[광화문에서/이기홍]구제역 생매장과 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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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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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국제부장
이기홍 국제부장
“한국의 가축 도살처분은 18개월 전 이집트에서 자행된 돼지 학살의 잔혹함을 능가한다.”

영국에 본부를 둔 국제동물보호단체인 ‘세계 농장에서의 자비심’이 최근 발표한 성명의 한 대목이다.

한국에서의 구제역 도살처분이 수백만 마리(6일 현재 312만 마리)에 이르고 상당수가 생매장됐다는 소식에 전 세계의 동물애호가들이 들끓고 있다. ‘…자비심’의 각국 회원들은 영국 네덜란드를 비롯한 각국의 한국대사관에 수천 통씩의 항의 e메일을 보내고 있다. 이 단체는 한국 상황을 이집트 정부가 18개월 전 ‘돼지독감’을 이유로 돼지 16만 마리를 도살한 것과 비교하고 있다.

세계의 수의학자들은 이번 파동을 동물방역사에 기록될 ‘사건’으로 규정한다. 물론 매몰 마릿수에서는 2001년 영국 네덜란드 등에서 도살처분한 600만 마리에 못 미친다. 하지만 선진국들이 2001년의 끔찍한 경험을 토대로 예방적 도살처분을 최소화하고 백신 접종을 병행하는 쪽으로 전환하는 흐름에서 벗어난 것이다.

동아일보 특파원들이 선진국의 구제역 대책을 조사한 결과 한국처럼 반경 500m 이내는 다 죽이는 식의 예방적 도살처분을 기계적으로 밀어붙이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일본의 경우 구제역 발생 농가만 도살처분한다.

백신 사용을 한국처럼 꺼리는 나라도 드물다. 미국은 백신의 신속한 공급을 위해 구제역 항원을 보유하고 있다. 구제역이 발생한 뒤 항원을 만들려면 10주 이상 걸리지만 항원을 갖고 있으면 1주일 내에 백신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육류 수출을 위한 청정국 지위에 집착해 백신 사용을 꺼리다 실기(失期)했다. 사실 2009년 기준 우·돈육 수출액은 20억 원에 불과했다. 도살처분 보상비용 등으로 든 돈은 2조5000억 원을 넘는다.

솔직히 필자는 2조니, 3조니 하면서 경제적 관점에서만 도살처분 문제에 접근하는 게 싫다. 300만은 물건 300만 개가 아니다. 비록 언젠가는 도축될 운명이었을지언정, 아직은 더 숨쉴 자격이 있었던 소중한 생명들이었다. 더구나 생매장은 세계동물보건기구(OIE)의 규정은 물론 국내 동물보호법을 위배한 잔혹한 죽임이다.

한 장의 사진이 잊히지 않는다. 낭떠러지 같은 구덩이 앞에서 아기돼지들이 울부짖고 있다. 어미돼지는 새끼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공포로 어찌할 바를 모른다. 뒤엔 포클레인의 큰 삽이 다가오고 있다. ‘예방적 도살처분’을 당한 돼지는 296만 마리. 총 사육 마릿수의 30%에 달한다. ‘예방’이란 단어가 무색하다. 안락사 주사를 맞은 한 어미소는 송아지가 젖을 물자 다리를 부르르 떨면서도 2, 3분을 버티다 새끼가 입을 떼자 쓰러졌다고 한다.

지난해 우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개최를 비롯해 국격을 높이는 데 힘을 모았다. 동물복지는 이미 국격의 주요 요소가 된 지 오래다. 선진국들은 잔혹한 환경에서 사육·도축된 축산물 거래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구제역 대책은 물론 사육·도축환경(법의 관리망을 벗어난 개 도살을 포함해)을 근본부터 점검해야 한다. 백서도 만들어야 한다. 사람에게 고기를 내주기 위해 태어난 운명이지만, 살아있는 동안만은 쾌적하게 생활하고, 최소한의 고통 속에 마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인간의 최소한의 예의이고 문명국가의 조건이다. 그것이 참혹하게 죽어간 동물들, 그리고 동물을 살리고 싶어 수의학을 배웠지만 결국 죽이는 일에 동원돼야 했던 수의사를 비롯한 방역요원들의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위로 아닐까.

이기홍 국제부장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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