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과 고위 공직자가 언론 보도에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보도 내용에 따라 인기가 올라가거나 좋은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가 하면 공직의 생명에 치명적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도를 대하는 공직자들의 자세는 이기적 측면이 있다. 긍정적 보도에 고마워하다가도 부정적 보도가 나오면 언론을 적대시하는 태도로 돌변한다. 사실이거나 사실에 가까운 보도인데도 자기가 살기 위해 언론사를 상대로 명예훼손 고소와 손해배상소송을 남발하는 풍조가 있다.
▷서울남부지방법원 민사단독 송명호 판사가 어제 이런 공직 풍토에 경종을 울렸다. 이 판결은 언론 현상을 깊이 들여다본 결과로 평가된다. 송 판사는 “공직자가 긍정적 보도가 나올 때는 혜택을 누리다가 부정적 보도가 나올 때 곧바로 형사 고소나 민사소송을 통해 언론을 압박한다면 언론의 기능을 위축시켜 결국 민주주의 후퇴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세 또는 유명 정치인의 경우 그런 현상은 더욱 심한 편이다. 이번 판결에서 패소한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과거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현재도 중진으로 활동 중이다.
▷박 의원의 소송 상대방은 2008년 ‘박 의원이 사학재단으로부터 3000만 원을 받은 의혹이 있다’고 검찰 수사내용을 보도한 지방 방송사다. 그는 허위사실 보도로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1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판결의 취지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보도 내용이 공익을 위한 것이고 언론사가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으면 명예훼손죄는 성립하지 않고, 공직자의 명예는 일한 결과에 따라 국민이 인정해주는 것이지 본인이 나서서 지켜야 할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 법정에서는 공직자 명예훼손에 대해 ‘현실적 악의’ 개념이 적용된 지 오래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1960년의 뉴욕타임스-설리번 사건에 대해 ‘상대방이 언론사의 현실적 악의를 증명하지 못하는 한 명예훼손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유명한 판례를 남긴 이래 확립된 기준이다. 지난달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MBC ‘PD수첩’ 명예훼손 사건에는 빌려 쓰기 어려운 개념이다. 이미 민사소송 과정에서 허위 보도로 밝혀져 ‘현실적 악의’ 유무를 따질 여지가 좁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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