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허승호]프로라이프 vs 프로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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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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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들어 미국의 범죄율이 급격히 감소했다. 그 원인에 대한 설명 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1973년 연방대법원의 낙태허용 판결 때문”이라는 스티븐 레빗 시카고대 교수의 분석이다. 연평균 5만 건이던 미국의 낙태는 판결 후 75만 건으로 급증했다. 낙태를 가장 원하는 계층은 가난한 10대 흑인 미혼모다. 열악한 환경에서 범죄자로 성장할 확률이 높은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은 것이다. 학문 외피를 쓴 인종주의적 편견이란 비난도 있었으나 사실은 인구사회학적 통찰이었다.

인간 생명의 가치는 동등한가

반대의 경우도 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1966년 “아이를 낳지 않는 자는 국가의 배신자”라며 낙태를 엄금했다. 낙태 의사를 처형하기도 했다. 그러자 출산율은 1년 만에 배로 뛰었다. 하지만 이렇게 태어난 애들은 평균성적이 떨어졌고 평균소득도 낮았다. 사회불만세력이 된 이들은 1989년 체제 전복의 주축이 됐고 그 과정에서 차우셰스쿠는 총살됐다.

‘태아는 잉태된 순간부터 인격체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 우리 대법원 판례다. 생명의 존엄에 대한 원칙적 선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도 그럴까. 간단한 사고실험을 해보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40대 가장과 아직 신경계도 분화되지 않은 배아는 생명의 무게가 같을까. 둘 중 하나만 살릴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건 상관없을까.

이 실험은 ‘생명가치의 동등성’에 근원적 의문을 제기한다. 신영철 대진대 교수(경제학)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망 위험을 1000분의 1 줄이기 위해 비용을 얼마나 지불하려 하는지를 계측했다. 이를 통해 그는 18∼59세의 청장년층이 청소년이나 노년보다 1.5배쯤의 생명가치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밝혔다(논문 ‘선택실험법을 이용한 인간생명가치의 추정’, 2007년). 사실 이 결론은 안전-보건-환경 등 생명관련 학계의 상식이다. 태아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가치도 이렇게 달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요즘 프로라이프(Pro-Life) 의사회가 낙태시술 의사들을 고발해 논란이다. 프로라이프는 ‘생명의 편’이라는 뜻으로 태아생명을 중시한다. 반대쪽은 ‘살아있는 여성’의 선택권을 중시하는 프로초이스(Pro-Choice)다. 여성계는 “출산은 여성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원치 않는 출산을 강요할 수 없다”고 본다. 미 대법원의 견해이기도 하다.

낙태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는 매우 이중적이다. 관련 법규는 매우 엄격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낙태는 쉽다. 전체 낙태의 96%가 불법이다. 그런데 낙태사유에 ‘산모의 선택’ ‘사회경제적 사유’ 등이 포함된 선진국 기준으로 환산하면 이 중 90%가 합법이 된다. 높은 불법률은 법이 지나치게 엄해 빚어진 결과일 뿐이다. 이렇게 엄격한 법규와는 달리 한국은 미혼모로 살아가기엔 너무 가혹한 환경이다. 미혼모와 자녀에게 지낼 곳과 자립교육을 제공하는 시설은 전국에 19곳뿐, 그마저도 5∼10가구 규모다.

윤리의 문제, 현실의 문제

미혼모에 대한 눈길은 더 차갑다. 중고교 여학생은 학습기회마저 빼앗긴다. 빈곤층 전락은 예정된 수순이다. 높은 불법낙태율을 탓하기 전에 ‘우리가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지’ 자문해봐야 한다.

낙태 법규를 엄격히 집행하면 생명가치가 고양될까. 그럴 것이다. 부작용도 따른다. 돈 있는 산모는 해외로 원정낙태를 떠나며, 가난한 산모는 은밀하고 불결한 시술대에 오를 것이다. 양극화다. 이도저도 안 되면 차세대 빈곤의 씨앗이 함께 잉태된다. 그렇다고 낙태를 무한정 풀어놓자니 이번엔 우리의 도덕적 본성이 몹시 불편해진다.

프로라이프의 고발로 낙태 이슈가 새로 떠올랐다. 태아와 산모의 생존권 사이 어느 지점에서 균형을 잡을 것인가 하는 철학적, 윤리적 논쟁이다. 동시에 매우 현실적 고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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