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육정수]법관들 ‘自我로부터의 독립’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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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22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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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부정(不貞)을 참다못한 부인이 이혼 판결을 청구했다. 담당 법관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이혼에 반대하는 개인적 신념을 갖고 있다. 부부를 설득해서 이혼을 막아보려고 시도해 봤지만 실패했다. 부부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이미 건너버렸다. 누가 봐도 민법상의 ‘결혼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중대한 사유’로 인정됐다. 그런데도 법관은 이혼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법관이 있다면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개인적 신념을 접고 법에 따라 이혼 판결을 하는 것이 법관의 직분에 합당할 것이다. 법관은 자신의 신념이 실정법과 충돌할 때 법 적용을 배제한 채 자신의 신념에 맞게 판결할 특권이 있는가. 그런 특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법관들이 너도나도 실정법을 제쳐두고 개인적 신념이나 소신, 정치적 이념적 신조(信條)에 충성하려 든다면 법적 안정성과 법질서는 붕괴되기 때문이다.

독일의 법철학자 구스타프 라드브루흐는 “양심에 반해 설교하는 목사는 경멸해야 하지만, 양심에는 반해도 법률에 충실한 재판관은 존경해야 한다”고 말했다. 법관에게 양심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함축하고 있는 명언이다. 최근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의 국회폭력, 전교조의 시국선언, MBC ‘PD수첩’의 광우병 왜곡보도에 대한 일련의 무죄 판결 파문이 라드브루흐의 말을 곱씹어보게 한다.

우리 헌법 제103조가 규정하고 있는 ‘헌법과 법률, 양심에 따른 독립된 심판’에서 ‘양심’의 의미는 아주 모호하다. 법학계도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직무상의 양심’이고 ‘객관화된 양심’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는 정도다. 다시 말해 개인적 신념이나 신앙심, 도덕관, 가치관을 뜻하지 않는다는 풀이다.(가재환 전 사법연수원장의 ‘법관론’)

법관의 양심은 ‘객관화된 양심’

양심의 의미가 불분명하다 보니 자의적(恣意的)이고 독단적인 판결의 법적 근거로 오용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나왔다. 이 개념은 우리나라와 일본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다. 전후(戰後) 독일의 기본법(헌법) 초안이 작성될 때도 ‘양심’ 조항이 들어 있었으나 심의 과정에서 삭제됐다. 실정법을 왜곡하는 근거로 악용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법(司法)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행한 일들을 정확히 예측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양심’ 조항을 헌법에 넣느냐 마느냐는 입법론적 논란에 불과하다. 법관이 재판을 할 때는 그와 상관없이 주관적 신념을 억제하는 것이 철칙이다. 그것이 ‘인치(人治)’가 아닌 ‘법치(法治)’를 이루는 길이다. 법관은 정치권력이나 여론, 언론, 금력(金力) 등 외부 압력과 유혹으로부터의 독립을 지켜내야 한다. 그것 이상으로 법관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자아(自我)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엄격한 자기 통제다.

실정법 넘는 正義는 인정 안돼

필자가 과거 법조 담당 기자로 일할 때, 몇몇 법관이 판결 선고를 앞두고 사건에 대한 기자의 생각과 의견을 물어보는 일이 더러 있었다. 국민의 상식에 비추어 자신의 판단을 검증해보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오늘날의 젊은 법관들은 부정적으로 볼지 모르지만 필자는 훌륭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당시 재판 잘하기로 정평이 났던 법관들이다. 법관들이 자신을 ‘독립된 왕국’에 가두는 것이 재판의 독립은 아니다. 자폐(自閉)된 법관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오만과 독선이다.

법관의 임무는 넓게 보아 법질서 유지에 있다. 혹자는 법질서보다 정의의 실현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정법을 뛰어넘는 정의 실현 권한이 법관에게 인정된다면 최근 무죄판결 사태처럼 이상한 판결들이 더욱 춤추게 될 것이 뻔하다. 이런 현상은 사회를 극도의 혼란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한쪽 방향으로 치우친 법관 그룹이 자신들이 주도하는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헌법정신과 실정법을 농락하는 것이 결코 용납돼선 안 된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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