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육정수]‘우리법연구회’와 ‘民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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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1일 03시 00분


이른바 진보성향 판사들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가 요즘 사법부 안팎의 시선을 끌고 있다. ‘사법의 정치화’를 이끄는 ‘사법부의 하나회’라는 지탄까지 받는 이 모임은 지난 주말 정기총회에서 토론 끝에 회원 명단을 공개하기로 했다.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지난달엔 비밀조직이란 비판을 의식해 발족 21년 만에 첫 공개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집단의식·행동은 연구 목적 일탈

우리법연구회가 회원 명단과 활동 내용을 공개한다면 모임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회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이념적 정치적 성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할 것 같다. 결국은 모임을 해체해야 한다는 거스를 수 없는 요구에 직면할지 모른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2005년 9월 국회 인준청문회에서 우리법연구회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그는 의원 질의에 대해 “대법원장이 되면 ‘법원에 이런 단체가 있어선 안 된다. 젊은 판사들은 모르지만 부장판사들은 탈퇴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겠다”고 답했다. 당시 핵심 회원 몇 명은 탈퇴했다가 대법원과 법원행정처 요직에 중용됐다. 이 대법원장은 더는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우리법연구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기본적으로 상식과 법질서를 깨는 돌출판결에서 비롯됐다. 정치적 집단행동을 통한 세력화의 전력(前歷)도 영향을 끼쳤다. 1988년과 1993년, 2003년에 이어 올해 2월 신영철 대법관 징계사건에 이르기까지 네 차례의 사법파동을 사실상 주도했다. 그 결과 대법원장 2명을 중도 하차시키는 전과(戰果)도 올렸다.

판례나 법률적 이슈에 대한 연구모임 활동은 판사들의 전문성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도(度)를 넘어 특정 이념과 정치적 집단의식을 형성하게 되고 그것을 판결에 반영하며, 나아가 ‘개혁’을 내세워 사법부 수뇌부를 몰아내기 위한 집단행동까지 거듭한다면 연구 단체라고 하기 어렵다.

우리법연구회와 성격은 다르지만 사법부를 주목하게 하는 연구 모임에 ‘민사판례연구회’(민판)가 있다. 대체로 보수 성향을 띠는 사법부 주류(主流)세력이란 점에서 진보성향의 비주류 세력인 우리법연구회와 대비된다. 민판은 사법연수원 기수별로 성적 최상위권 몇 명씩을 엄선해 가입시킨다고 한다. 극소수를 빼곤 거의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이뤄진 엘리트집단이다. 군복무를 마친 사람만 뽑는 점도 특색이다.

민판 회원들은 대법관과 헌법재판소 재판관, 사법행정을 담당하는 법원행정처 요직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대법원장과 현직 대법관 3명, 대법관을 거쳐 올해 퇴직한 김용담 법원행정처장, 지난해 감사원장이 된 김황식 전 대법관, 헌재 재판관 2명이 민판 출신이거나 현재 회원이다. 민판은 ‘대법관 사관학교’라 해도 손색이 없다.

민판은 主流판사들의 출세 통로

회원 선발 방법이나 요직 석권이란 점에서 민판이야말로 ‘사법부의 하나회’라 할 만하다. 우리법연구회는 노무현 정부 때 소수가 반짝 약진한 것을 제외하곤 맨파워 면에서 민판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밀린다. 민판이 ‘똑똑한 판사들의 모임’이라는 점은 사법부 구성원 다수가 인정한다. 국내 판례가 부족해 일본 판례를 주로 원용하던 시절, 민판이 판례 연구에 기여한 공적은 대단하다.

하지만 민판의 폐해도 적지 않다. 사법연수원 성적이 판사의 일생을 좌우하다 보니 사법부 내 위화감 조성과 관료화의 원인이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원행정처 요직과 관련해서는 ‘백판(白判)’ ‘흑판(黑判)’이란 말도 나돈다. 판사 배치표의 ‘비고’란에 행정처 파견 직책이 쓰여 있는 판사를 흑판이라 부른다. 재판보다 행정업무 중시 풍토에 대한 자괴감의 표현이다. 민판 활동과 행정처 근무를 통해 ‘인사(人事) 라인’이 형성되면 좀처럼 바꿀 수 없는 ‘카르텔’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장이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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