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종식]‘서민구조’ 본분 잊고 돈 되는 사건만?

  • 입력 2008년 10월 22일 03시 00분


기초생활수급자인 A 씨는 보험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기 위해 법률구조공단을 찾았다. 그러나 자초지종을 듣던 상담원은 “소송이 복잡하고 승소 가능성이 없다”며 A 씨를 돌려보냈다.

반면 월급이 700만 원이 넘는 의사 B 씨는 병원을 상대로 낸 3000만 원의 임금 청구소송을 공단에 맡겼는데, 소송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법무부 산하 법률구조공단은 장애인이나 월평균 수입 260만 원 이하 서민들의 무료 변론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요즘 공단의 운영은 설립 취지와 한참 다른 모습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공단은 지난해 244억 원의 국고 지원금을 받았다. 각종 기관으로부터 186억 원의 출연금도 받았다.

문제는 공단이 맡는 소송이 출연기관에서 의뢰하는 ‘돈 되는 사건’에 쏠리고 있다는 점이다. 공단은 2005년 노동부와 ‘임금·퇴직금 무료 법률구조사업’ 협약을 맺은 뒤 소송 1건당 최소 7만5000원을 지원받고 있다.

이후 공단의 체불임금 피해자 구조 건수는 2005년 전체 민사사건의 11.9%(7024건)이던 것이 지난해는 55.3%(4만2961건)로 껑충 뛰었다. 2년 만에 6배 넘게 폭증한 것.

손해배상 사건처럼 복잡한 소송보다는 월급명세서 등 증거가 명확한 임금 소송이 쉽고 돈도 된다. 생계형 소액 재판에서 서민들이 변호인 없이 쩔쩔매는 이유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법률구조 수혜자 선정에도 구멍이 뚫려 있다. 의사 B 씨는 고급 주택과 자동차를 리스(임대) 형태로 갖고 있어 재산세를 거의 내지 않았다. 재산세 과세 영수증만 공단에 제출한 B 씨는 저소득자로 분류돼 쉽게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예산 확충을 위해 편법이 동원되고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변호사가 아닌 공단 직원들은 최근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소송을 도와주면서 소송이 중단되거나 취하된 경우에도 행정안전부로부터 건당 9000원의 상담료를 지원받고 있다. 이는 변호사법 위반 혐의가 있고 행안부의 예산 낭비로도 이어진다.

공단의 파행 운영은 이뿐만이 아니다. 오죽하면 현직 법무관들이 공단을 상대로 국선변호 실비에 대한 부당이익금 반환 소송을 냈을까. 고름이 차올라 터지기 전에 환부를 도려내는 공단의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종식 사회부 bell@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