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汎與 사회주의자들 커밍아웃을

  • 입력 2007년 3월 15일 19시 38분


코멘트
‘후진타오가 기업의 최고경영자였다면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졌을 것이다.’ 중국의 눈부신 성장을 소개한 지난달 독일 주간지 슈피겔의 한 대목이다.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중국 공산당은 어떤 체제도 못 쫓아올 유연성과 능력으로 성장과 안정을 동반 달성 중이라고 했다.

정체성 이젠 분명히 밝혀야

원자바오 국무원 총리는 “앞으로 100년은 경제성장을 통해 성숙한 사회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중국 공산당한테는 사유재산제나 시장경제나 모두 성장을 위한 수단인 셈이다. 어떻게든 부강해져야 사회주의의 요체인 공평과 사회적 정의를 이룰 수 있고, 그래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완성된다는 논리다.

원 총리 말대로라면 굳이 사회주의를 배척할 이유가 군색해진다. 세상엔 개인의 자유와 책임보다는 평등과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중국은 시장경제로 번 돈으로 공산당이 주도하는 평등과 정의를 이룬다는 거고, 베네수엘라는 석유 팔아 번 돈으로 대통령이 주도하는 ‘21세기 사회주의’를 한다는 주장이다.

4월에 대통령선거가 있는 프랑스의 사회당 후보 역시 의료와 교육, 사회적 일자리 등 국가 주도의 복지공약을 내놨다. 다만 어디서 돈을 만들지 막연한 게 문제다. 중국처럼 시장경제를 지원하지 못하고 베네수엘라처럼 내다 팔 자원이 없다면, 경제가 시원치 않은 프랑스에선 부유층 세금을 더 올리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프랑스 국민은 사회당 후보의 사회주의정책을 미리 알고 투표 여부를 결정할 수 있어서 좋다. 중국인의 81%가 ‘우리나라 상태에 만족한다’는 지난해 미국 퓨리서치 조사 결과를 보면 정권만 유능할 경우 정치적 자유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모양이다.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이 추구하는 ‘고르게 잘사는 균형발전사회’는 사회주의적 이상(理想)과 다르지 않다. 경제와 복지를 개인의 자유와 책임, 시장원리에만 맡길 수 없어 국가가 챙겨야 한다는 것이 그렇다. 사회적 책임, 사회적 서비스, 사회적 일자리 등 ‘사회적’이라는 돌림자 또한 사회주의 색채가 짙다. 국회가 결딴나도 열린우리당이 포기 못한다는 사립학교법은 사회주의가 승했던 유럽에서 본떴고, 언론자유를 옥죄는 신문법은 견제와 균형을 용납하지 않는 전형적 사회주의 정책이다.

5년 전 이맘때 우리는 색깔론 편다고 할까 봐 함부로 사회주의란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당시 ‘노무현 후보는 사회주의 노선’이라고 했던 이인제 씨는 되레 역공을 받았다. 관훈클럽 토론에서 노 후보가 “광의에 있어서 복지는 목적이고 성장은 수단”이라고 했어도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그의 경제관에 ‘유럽 사회민주주의 이념이 다분히 가미’됐다는 평가는 선거 후에야 나왔다. 유권자는 모르고 찍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제는 정체성을 분명히 밝혀도 될 때가 됐다. 우리는 좌파쯤엔 눈도 꿈쩍 않을 만큼 성숙해졌다. 사회주의를 표방해도 ‘선거를 한다’는 좁은 의미의 민주주의는 뒤집히지 않는다. 우리 헌법은 시장경제와 자유주의를 채택해 사회주의적 복지국가는 허용되지 않지만(정종섭 ‘헌법학원론’)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이 성공하면 언제든 바꿀 수 있다. 정체성보다 중요한 건 성장과 안정을 이룰 능력임을 국민은 안다.

이번엔 국민이 알고 찍든지 말든지

열린우리당도 ‘국민 삶의 질로 대표되는 실질적 민주주의 완성’을 지향한다면 당당하게 사회주의를 내걸고 지지층을 넓히기 바란다. 시장경제를 억눌러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반(反)개혁세력’으로 몰면 된다. 석유는 없는 나라지만 부유층과 봉급생활자의 세금을 올려 나눠주면 공평과 사회적 정의가 실현될 것 아닌가. 떳떳하지 못할 게 없다면 지금까지 입에 올리지 못했던 당신들의 주의(主義)를 못 밝힐 이유도 없다. 이번엔 국민이 알고 속든지 말든지 해야 한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