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악론(樂論)’ 펴낸 윤재근 한양대 명예교수

  • 입력 2007년 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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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의 준비 작업을 거쳐 최근 ‘악론(樂論)’을 펴낸 윤재근 한양대 명예교수. 그는 “동양의 모든 정신은 악(樂)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한다. 전영한 기자
20년의 준비 작업을 거쳐 최근 ‘악론(樂論)’을 펴낸 윤재근 한양대 명예교수. 그는 “동양의 모든 정신은 악(樂)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한다. 전영한 기자
1990년 출간된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도 보기 드물게 100만 부가 넘게 팔린 동양철학서였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장자의 사상이 밀리언 셀러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깊은 철학을 알기 쉽게 풀어낸 저자 윤재근 한양대 국문과 명예교수 덕이었다. 그는 40여 년 동안 동양 정신에 대해 연구해 온 전문가. 1988년 시를 통해 동양의 정신을 분석한 ‘시론(詩論)’을 내놓아 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는 그가 이번에는 20년의 준비 끝에 ‘악론(樂論)’을 들고 나왔다.

“서양의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면 동양의 모든 사상은 악(樂)으로 통합니다.”

윤 교수가 동양 정신의 원류를 찾아 떠난 40여 년의 여행 끝에 내놓은 결론이다.

악이라…. 하긴 한류 열풍의 일등공신은 가요 아니던가. “그래서 음악의 한류 현상이 가능한 것이군요?”

기자의 질문에 뜻밖에도 윤 교수는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음악(音樂)은 일본에서 만든 조어인데 이 단어가 생기면서 동양 특유의 악의 개념이 음악(music)으로 축소됐어요. 아닙니다. 악은 하늘을 해석한 것입니다.”

윤 교수에 따르면 동양의 ‘하늘’은 영어의 ‘sky’가 아니라 만물을 하나로 아우르는 개념이다. 이것을 유가에서는 천(天), 도가에서는 도(道), 불가에서는 법(法)이라고 부른다.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만물이 목숨을 표현하는 순리가 악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나타내니까 즐겁고 그래서 ‘즐거울 락(樂)’이라고 쓰죠.”

그러면서 윤 교수는 “길가에 있는 돌멩이 하나도 목숨으로 보고 표현하는 것이 동양의 악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조금 과한 것 아닌가 싶어서 “그건 무생물인데 악의 범주에 넣어도 될까요?”라고 묻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고려의 문사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슬견설’을 읽어 보세요. 동양의 정신은 생명의 크기를 논하지 않고, 무생물이냐 생물이냐를 가리지 않고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만물을 소중히 하고 아끼는 거예요.”

‘슬견설’은 개와 벼룩의 아픔은 크기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풀어낸 글이다. “이규보가 ‘달팽이의 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대붕(大鵬)과 동일시해 보라. 연후에 나는 당신과 도를 이야기하겠다’고 얘기하지 않았나요? 이게 바로 악의 정신입니다.”

1500쪽에 이르는 그의 방대한 저서 ‘악론’은 크게 ‘인(人)과 악’, ‘천(天)과 악’으로 나뉘어 구성됐다. 전반부는 ‘예기(禮記)’의 예악사상을 통해 유학에서 말하는 악을 설명했고 후반부는 노장(老莊)에서 말하는 악과 연관되는 통념들을 두루 살펴본다.

법가를 포괄하는 유가나 도가에서 말하는 악이 같다는 윤 교수에게 문득 질문을 하나 던졌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라는 도가와 엄격한 규율에 맞춰 질서를 지키는 법가가 같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그러자 윤 교수는 “흔히 법가에 대해 엄격한 법치주의라고 생각하는데 법가 사상의 기본은 천하 만물이 안심하고 사는 겁니다. 그 수단으로써 엄격한 규율을 들고 나왔죠. 그러니까 법가는 악을 이루는 또 하나의 과정입니다”라고 받았다.

윤 교수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산업사회의 병폐들 역시 악을 모르기에 벌어진 결과라고 진단했다. “사람을 위해 자연을 정복하고 개발해도 된다는 개념은 철저히 서양식 사고관이거든요. 서양 것을 받아들이는 데 급급하니 부작용은 생각도 못해 본 거죠.” 이어 그는 “만해와 단재 선생의 주체성을 갖고 철저한 비판을 통해 서양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윤 교수는 한국의 인문학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했다. “자기 이론을 만들지 못하고 항상 외국 것을 베껴 쓰니까 악의 정신이 무너지는 겁니다. 시비(是非)가 있어야 하는 서양의 정신으로는 도저히 악을 표현할 수 없어요.”

20여 년 전 동서양 문명의 접합점을 찾는 시도로 ‘시론’을 쓰며 그가 내린 결론은 두 세계는 접합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서양은 옳고 그름, 너와 나 등 항상 대립되는 두 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동양은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르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문명의 접합을 위해 10여 년을 연구했으나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윤 교수는 다시 연구를 시작했고 20년의 작업 속에 나온 결과물이 바로 ‘악(樂)’의 발견이었다.

“서양과 달리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르는 악의 사상을 알고 있는 우리 민족은 퓨전에 강합니다. 비빔밥, 포크숟가락 같은 것은 우리만이 만들 수 있는 발명품이죠.”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윤재근 명예교수

△1936년 경남 함양 출생 △1968년 서울대 영문과 졸업 △1972년 서울대 대학원 미학과(석사과정) 졸업 △1983년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박사과정) 졸업 △1968∼1975년 서울 동성고 교사 △1982∼2000년 한양대 국문과 교수 △1992∼1994년 한양대 인문대 학장 △1994년∼현재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저서=문예미학(1979년), 만해 시와 주제적 시론(1983년), 장자 우화 시리즈 전3권(1990년), 논어 전3권(1991년), 노자 전3권(1993년), 맹자 전3권(1995년), 한 권으로 읽는 주역(1999년)

▽상훈=현대문학상(1978년), 월탄문학상(1980년), 한국문학상(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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