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6년 4월 21일 03시 02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요즘 지역마다 자기 고장 출신 문인들을 기리는 기념관 건립과 문학 행사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던 터라 내심 기대가 컸다. 사실 식민지시대를 살다 간 문인들처럼 타계한 지 오래된 분들의 기념관은, 작가 이름은 내걸었지만 정작 문인의 손때가 묻은 유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민망함마저 안겨 주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에 비한다면 미당 서정주 시인의 기념관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유품을 보관하고 있는 편이었다.
아마도 미당의 자택 안방을 차지하고 있었을 자개장롱이 송두리째 옮겨 와 있었고 그 안엔 미당이 입었던 양복과 겨울 코트가 빽빽하게 걸려 있었다. 그 옷들을 한쪽으로 젖히니 넥타이들이 죽 도열하고 있었다. 미당의 베레와 파이프 원고지 도자기 서예작품 등도 보였다.
이색적인 것은 전시장 한편에 미당의 친일시와 전두환 송시도 액자에 넣어져 그의 대표작과 나란히 늘어서 있다는 점이었다. 이 기념관이 들어설 당시 시인의 전기적 오점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고 그래서 이런 식의 고육책으로 타협이 이루어진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이 시인의 행적이야 이미 밝혀질 만큼 밝혀졌고 알려질 만큼 알려진 터인데 문학적 성과가 도무지 의심스러운 수준 미달의 작품을 시인의 대표작과 함께 전시한다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미당시문학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인촌 생가를 둘러보고 나오니 대문 앞에 마을 할머니 둘이 서 있다가 지나가는 남자에게 알은체를 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 나왔느냐”고 묻자 남자가 다소 심드렁하게 “심심해서요”라고 답변했다. 그 말에 대한 할머니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심심하면 장 넣고 소금 넣으면 되지, 뭐 하러 나와.” 저절로 슬며시 웃음이 번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아마도 미당이라는 한 탁월한 시인을 기리는 진정한 기념관은 어느 궁벽한 건물 속에서가 아니라 이 지방 사람들의 저렇게 살아 있는 말투, 그 정겨우면서도 차진 언어 표현 속에 자리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운사를 찾아가 동백 숲 아래를 거닐어 본 다음 예정된 코스인 양 풍천장어에 복분자술을 곁들인 점심을 먹었다. 아, 입에 살살 녹는 바로 그 맛! 그리고 식후엔 근처의 고인돌군까지 둘러보는 호사를 누렸다.
그러나 그 다음 행선지인 부안의 신석정 생가는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한 시절을 풍미한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는 탓인지 생가 근처에 가도 길 안내 표지판이 잘 눈에 띄지 않았다. 물어물어 마을 입구까지 왔으나 골목을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또 걸어서 한참을 헤매야 했다. 마침 어느 집 마당에 두 남자가 나와 있어서 울타리 너머로 신석정 선생 생가가 어느 집인지 아느냐고 묻자 엉뚱하게도 “그분 언제 이사 오셨느냐”고 되묻는다.
결국 찾아낸 신석정 시인의 생가에는 아무도 없었고 대문이 닫혀 있었지만 울타리 삼아 듬성듬성 심어 놓은 나무를 젖히고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최근에 손을 봐서 그렇겠지만 깔끔하면서도 운치 있는 초가집이었다. 늦은 오후의 봄볕이 푸지게 쏟아지는 마루에 걸터앉아 잠시 미당과 석정 이 두 시인이 남긴 시편들을 되새김질했다.
미당이 “선운사 고랑으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습니다”라고 노래할 때 석정은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읊었다. 이들 부족 방언의 마술사가 있어 한국어는 고감도의 충만과 활기를 누릴 수 있었다. 한때 세상을 진동시켰던 정치인들의 웅변과 상품을 파는 장사치의 호객 소리가 일으키는 소음은 조만간 잦아들어도 이들 시인의 언어는 한국어가 수명을 다하지 않는 한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마루에서 몸을 일으키니 멀리 정쟁과 물욕으로 들끓는 서울이 성큼 눈앞에 달려왔다.
남진우 시인·명지대 교수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