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식의 과학생각]나노 기술이 세상을 바꾼다

  • 입력 2001년 7월 11일 18시 33분


나노 세상이 온다

올해는 우리나라 나노기술(NT) 시대의 원년으로 기록될 것 같다. 과학기술부는 ‘나노기술 종합발전 10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경기 성남시 판교신도시에 나노타운을 건설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1959년 12월 어느 날. 미국 물리학회에서 40대 초반의 대학교수가 ‘바닥에 많은 여지가 있다’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면서 분자기술의 가능성을 예견했다. 연사는 훗날 양자역학 연구로 노벨상을 받게 되는 리처드 파인만. 그는 분자의 세계가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아주 작은 구조물을 세울 수 있는 건물터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분자 크기의 기계, 곧 분자기계의 개발을 제안했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대부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1992년 6월 어느 날. 미국 상원의 소위원회에서 30대 후반의 감정인이 분자기술에 대해 앨 고어 의원과 열띤 일문일답을 벌였다. 감정인은 나노기술의 핵심 이론가인 에릭 드렉슬러. 그는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이 분자기술에 관심을 가져 줄 것을 당부했다. 고어 의원은 그로부터 5개월 남짓 뒤에 클린턴 행정부의 부통령 자리에 오른다.

극미한 분자 세계를 우주의 공간처럼 광대한 영역으로 상상한 파인만의 선견지명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의 아이디어가 분자기술의 씨앗이 되었기 때문이다. 분자기술은 분자 하나 하나를 조종해 물질의 구조를 제어하는 기술이다. 분자는 나노(10억분의 1)미터로 측정된다. 따라서 드렉슬러는 분자기술 대신에 나노기술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파인만이 나노기술의 아버지라면 드렉슬러는 그 산파역인 셈이다.

분자기계는 이미 자연에 존재하고 있다. 가령 생물체의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분자기계이며 세포 안에서 유전정보의 지시에 따라 아미노산으로 단백질을 생산하는 리보솜 역시 고성능의 분자기계이다. 생명체는 이처럼 스스로 수많은 분자를 결합해 특정의 구조를 가진 분자기계를 만들어 내는 이른바 자기조립 능력을 갖고 있다. 요컨대 나노기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조립의 능력을 이용해 나노기계를 만드는 데 있다.

나노기술 시대가 궤도에 오르면 제조산업과 의학 분야에 혁명적 변화가 올 것 같다. 제조부문의 경우 나노기술로 물질의 구조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으므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이를테면 스마트 옷감 등 주위 환경을 감지해 스스로 적절히 대응하는 지능을 가진 스마트 물질의 제조가 가능하다.

나노기술이 의학에 미칠 영향은 상상을 불허한다.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나노기계이다. 이러한 자연의 나노기계를 인공의 나노기계로 물리치려는 발상이 나노의학의 출발점이다. 나노로봇을 인체에 주입하면 잠수함처럼 혈류를 따라 순회하면서 바이러스를 박멸한다. 어떤 나노로봇은 세포 안으로 들어가 자동차 정비공처럼 손상된 세포를 수리한다. 이론적으로는 나노의학으로 치료 불가능한 질병은 없어 보인다.

따라서 낙관론자들은 나노기술을 인간의 굴레인 노화와 사멸까지 미연에 방지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기고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혹시나 나노기술이 전쟁이나 테러에 쓰인다면 육안으로 식별이 불가능한 나노폭탄의 파괴력은 엄청날 테니까.

더욱이 나노기계가 자기증식하는 기능을 갖게 될 것이므로 인간의 힘으로 통제 불가능한 재앙이 발생할 개연성이 없지 않다. 가령 유독 쓰레기를 제거하기 위해 뿌려놓은 나노로봇이 바이러스처럼 복제를 멈추지 않는다면 지구는 로봇 떼로 뒤덮이고 말 터이다.

한때 나노기술의 전도사 역할을 자임한 드렉슬러가 몽상가로 따돌림을 당할 정도로 백안시됐던 나노기술이 이제는 21세기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꿈의 기술로 다가오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경쟁 또한 볼 만하다. 2000년 1월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5억 달러가 투입되는 ‘국가 나노기술 구상’을 서둘러 발표했다.

과학기술부는 나노기술 10대 강국 진입을 목표로 삼았다. 드렉슬러는 1955년생으로 김영환 과학기술부장관과 동갑이다. 김 장관이 그를 초청해 대담이라도 가진다면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과학적 상상력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이인식 과학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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