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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0월 20일 13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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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측면에서 보면 YS 정권과 공통분모가 있네요.
“있죠. YS 정권 초기 제가 (정권을) 옹호하는 글을 얼마나 많이 썼는데요.”
그의 정치적 성향 또는 정치관을 이처럼 단순명쾌하게 드러내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이 얘기에 비춰보면 그의 주장이 특정 정파나 특정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일부의 평은 오해거나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그 정권이 얼마나 도덕적이냐 개혁적이냐, 이런 상식적인 잣대를 들이댈 뿐이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 김대중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붙인 것은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저는 이회창도 정권을 잡고 나면 달라질 수 있다고 봐요. 그럴 때는 이회창 정권을 편들어줘야 한다는 거죠. 전두환·박정희 정권과는 다른 정권 아니겠습니까.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그만큼 진전된 것이죠. 저는 권력이 다원화됐다고 봅니다. 제가 이번에 낸 책에 ‘권력 변환’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권력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거죠. 힘의 무게중심이 정치권력에서 언론으로 옮겨갔는데, 지식인들은 정치권력 비판이 가장 정의로운 것인 양 포장한단 말이에요!.”
그는 “김대중 정권에 대해 비판하는 얘기를 두 번 하고, 지지하는 얘기를 한 번 해도 지지자로 분류한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해일까요. 고의일까요.
“고의적이죠. 물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절대 고의라고 생각지 않겠지만.”
화제를,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온 지역주의 문제로 돌렸다.
―지역주의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해오셨는데, 정권이 바뀌면 어느 정도 해소될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별로 나아진 게 없지요?
“손호철 교수 같은 사람은 지역주의가 더 악화됐다고 신이 나서 얘기한단 말이에요. 저는 다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고, 정권교체가 안 됐을 경우의 호남을 생각해보자, 이 말만 하고 싶어요. 그 얘기 하나로 끝나는 겁니다. 정권이 교체된 후 호남 지역주의의 추악한 면이 드러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역주의가 심화된 것은 영남이 정권을 되찾기 위해 예전보다 더 뭉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영남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것을 보면 해도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모든 지식인이 거기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어요. 그것을 비판하면 호남 지역주의라고 하고. 신문 시장에서 작용하는 지역주의가 고스란히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거죠.”
―한편으로 생각하면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요원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엔 그래도 과거에 비해 나아지고 있어요. 그야말로 밥그릇 싸움의 형태, 이지메 당하고 일방적으로 깨지던 상태에 비해서는 진일보했다는 거죠. 비록 싸움의 목소리가 더 커지고 싸움의 모습이 더 추악해 보일 망정 왕따 당하던 단계보다는 멱살잡고 싸우는 단계가 더 나은 것이죠.”
강교수는 ‘인물과 사상’ 2000년 1월호에서 “새 천년을 맞아 우리 시민사회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조선일보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일보에 한국 사회의 모든 모순이 집약돼 있다”고 선언한 바 있다. 조선일보에 대한 그의 진단은 얼마나 타당한 것일까.
▼신문은 ‘도구’가 아니다▼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라는 표현을 처음 쓰셨는데, 어떤 뜻입니까.
“차별화 전략에서 나온 겁니다. 과거 조선일보에 가서 항의시위하던 분들이 대부분 재야 운동권이에요. 그것과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그 분들도 진심이라기보다는 구호로서 이야기하는 것이겠지만 (조선일보가) 사라져야 한다, 제거해야 한다고 했는데 저는 생각을 달리하는 거죠. 조선일보도 자신의 주장을 펼 권리가 있지, 왜 없어요. 존중해줘야죠, 그 주장은. 문제는 과연 대북관이나 재벌에 대한 시각 등 조선일보의 정치·경제적인 주의나 주장이, 이 신문이 지금 한국 신문시장에서 누리는 몫만큼 대표성을 띠고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아니라고 보는 거죠. 분명히 괴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거품을 걷어내고 제대로 된 몫을 찾아주려는 겁니다. 그런데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는 참 힘들어요. 정말 절벽이에요. 지식인들은 더 한심해요.”
―그 동안 조선일보를 잣대로 숱한 지식인들을 공격해왔는데요. 심지어 김수환 추기경까지 비판하셨는데, 그분들은 교수님만큼 언론에 대한 비판의식이 투철하지 못한 걸로 보시는 겁니까.
“투철하지 못할뿐더러 다른 게 또 있죠. 물론 김수환 추기경님을 존경해요. 지금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지식인들을 포함해서 원로급이나 지도급 인사들이 무난하게 모나지 않게 둥글둥글 원만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보적 행위를 실천하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면 보기에 아름답기야 하겠지만, 제가 보기엔 한국 사회에서 개혁을 하려면 그런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저는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의 지식엘리트층, 사회운동하는 엘리트층이 가진 언론관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정치인들의 언론관과 너무 비슷합니다. 언론이라는 걸 좋은 목적을 위해 이용해야 하는 도구로만 보는 거예요. 과거 박정희·전두환식 언론관과 본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저는 신문을 도구로 보면 안 되고 정당과 비슷한 조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제가 세계 최초로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그런 언론관이 정착돼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선 도구적 언론관이 국민들에게 널리 퍼져 있고 그것이 언론문화가 돼버리니까 신문을 정치적·이념적 가치관에 의해 선택하지 않죠.”
―조선일보에 대한 현실론도 존중돼야 하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그 신문이 엄연한 실체로서 한국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쓴 말이 주류 콤플렉스라는 거예요. 제가 주로 문제 삼는 건 좌파 진보적 지식인들입니다. 좌파 진보적 지식인이 ‘현실적으로 영향력 있는 주류 신문이니까 이 신문을 이용해야 되겠다’는 태도를 취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한국 사회에서 좌파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어떻게 주류가 될 수 있습니까. 그 모순을 제가 지적한 거예요. 주류가 아니어야 마땅하죠. 그런데 거기에 대한 반론은 안 하고 다들 일상적 지식인론만 역설해요.” ▼시민단체의 오만▼
―이런 문제 제기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예컨대 환경 문제 같은 것은 언론의 도움이 없으면 캠페인이 쉽지 않지요. 환경운동단체들이 영향력 있는 언론을 활용해 운동의 효과를 크게 봤을 때 ‘당신들은 어떤 신문을 상대했으니까 나쁘다’라고 비난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지. 이건 가치의 우선순위 문제와도 연결된다고 보는데요.
“제가 빅3 신문을 다 상대하지 말자고 주장했다면 말이 안 되죠. 전국지 시장의 60∼70%를 장악하고 있다는데 어떻게 막습니까. 하나의 신문만 이야기한 거예요. 환경운동에 대해선 저도 그런 점을 생각했어요. 환경운동하면서 이데올로기가 무슨 상관이냐. 언젠가 최열 장원씨가 토론회에 나와 멋있는 말을 하더라고요. 정치환경도 환경이라고. 자기들이 그 논리를 만든 거예요. 이번에 최열씨가 사외이사 건으로 문제가 됐습니다만 우리 나라 시민운동단체들은 내부 비판이 없어요. 언론을 두려워하는 점도 있지요. 게다가 수많은 영남인사들이 이름을 걸어두고 있는데 특정 신문과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선다고 하면 다 나갈 겁니다.”
―교수님께서 참여연대 사무처장인 박원순 변호사에게 “시민단체들이 언론에 너무 비굴하게 군다”고 비판하자 박변호사가 “운동의 현장에 나가 다른 사람들 얘기도 들어보라”(‘참여사회’ 2000년 6월호)고 반박하지 않았습니까. 현장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말한 것 같은데요.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현장에서 냉정한 태도를 취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제가 언론비판을 하는데, 전혀 언론비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저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고 ‘너 언론비판 해본 적 있어, 없어’라고 묻는 건 예의가 아니죠. ‘현장에 있냐 없냐’는 기준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건 온당치 않다는 거예요. 그건 비판을 경청하지 않겠다는 오만한 자세죠. 가령 내가 열심히 시민운동하는데 시민운동을 하지도 않는 사람이 비판한단 말이에요. 그래도 시민운동하는 사람은 그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지, ‘너 시민운동 해봤어’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오만은 ‘우리가 현장에서 이렇게 뛰는데’라는 엄청난 도덕적 우월감에서 비롯된 거죠.”
―결국은 언론관의 문제로 귀착하는 것 같은데요.
“그것 더하기, 제가 이래서 욕먹는 건데, 인정 욕구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말하자면 매명주의라는 건데, 세상을 보는 가치관의 문제일 수도 있고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걸 모두 매명주의로 몰아붙이는 게 타당한 것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더 모욕적인 발언이 나와요. 무지라는 거죠. 적어도 좌파 진보적 지식인에겐 이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나쁜 새끼들이 있나’ 하고 분통이 터지지 않느냐는 거예요, 사설 같은 것을 보면. 배알의 문제죠, 배알. 저는 좌파 진보성이 희석된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이 신문은 이런 시각을 갖고 있구나, 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심리가 이해가 안 된다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순화돼 있어요,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매명주의라는 말은 무척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표현이죠.
“자존심 상해야 마땅하죠.”
―좌파 지식인들은 그걸 논쟁의 대상으로 삼지 못하겠다는 태도 같아요. 논쟁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자존심의 문제, 감정의 문제가 돼버린 느낌입니다.
“겉으론 그렇게 하고 있지만, 사실은 논쟁에 응하고 있는 거예요. 글들을 보면 전부 저를 겨냥하고 있는데 그게 얼마나 우스워요. 제가 고맙죠. 저에 대한 과대평가죠. 제 비판 방식을 문제삼는 데 머릿글 전체를 할애하다니 저한테 너무 집착하는 거죠(‘당대비평’ 2000년 가을호). 그러니까 제가 우쭐해진다니까요, 너무 과대평가해주셔서. 그건 아닌데….”
‘강준만식 글쓰기’는 그 동안 두 건의 ‘사고’를 당했다. ‘최장집 사건’과 관련해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해 1심에서 700만 원을 선고받은 일과 언론학자 정진석 교수(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인물과 사상’에 사과문을 실은 일이다.
―이한우 기자로부터 소송을 당한 직후인 지난해 1월호 ‘인물과 사상’에서 “앞으론 독설에서 호소로 바꾸겠다”며 글쓰기 방식을 바꿀 뜻을 비추셨습니다. 또 정진석 교수에 대한 사과문이 실린 지난해 7월호 ‘인물과 사상’에선 “앞으로는 정중하고 차분하게 비판하겠다”고 하셨는데, 별로 바뀐 점이 없는 것 같은데요.
“(웃음) 저는 엄청 자제하는데요.”
▼분노에 의한 글쓰기▼
―어느 시점부터 교수님의 글쓰기에 관성이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굳이 심한 표현을 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데도 그런 표현을 즐긴단 말이죠. 그건 관성의 문제가 아닐까요.
“관성의 문제도 있는 것 같고요. 사실 고민스러운 일인데, 제 글쓰기에 이런 딜레마가 있죠. 분노에 의한 글쓰기를 하다 보니까 냉정한 상태에서는 글이 잘 안 돼요. 글을 써놓고 며칠 있다 읽어보면 맘에 들지 않을 때가 많아요. 그러면 분노를 자제하고 냉정하고 차분하게 쓰면 되지 않겠느냐. 그게 안 돼요. 분노가 이끌어주지 않으면…. 그렇다고 제가 ‘또라이’는 아니에요. 차라리 그렇게 별난 사람이라면 평소 심리가 그러니까 그렇다고 볼 수도 있을 테지만 저는 조직에서는 너무 점잖은 편이거든요.”
―과격한 표현이나 조롱조 표현을 분노로 정당화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런 식의 글쓰기에 대해 비판한다면 제가 감수해야죠.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아요.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 나쁜 사람이네’ 하면서 화기애애하고 정중한 표현으로 비판할 수 있겠어요? 성질이 나니까 막 써대는 거죠.”
―글쓰기의 효과를 따질 때 오히려 손해 보는 측면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권성우 교수(동덕여대 국문과)가 김정란 교수(상지대 불문과)의 비판방식을 문제 삼으면서 ‘비판의 목적은 대화’라고 했는데, 저는 대화가 목적이 아닌 비판도 있다고 봅니다. 독설 풍자 격문 대자보… 이런 양식의 커뮤니케이션은 대화가 목적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비판의 목적이 대화가 아니라고 해서 무가치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보지 않거든요. 제가 하는 비판이 아무리 격하더라도 실정법에 의해 규제를 받는 거예요. 저한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다’고 주문할 수 있고 비판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제가 지나칠 경우에는 그만한 응징이 따르기 때문에 결국 제가 책임질 일이죠. 두 사건으로 제가 치르고 있는 비용과 희생이 얼마나 큰데요. 이해관계가 개입되지 않은 사안의 경우 대화를 목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정말 나쁜 사람이다, 라고 판단할 경우, 가령 ‘100분 토론’에 나왔던 김용서 교수님(이화여대 행정학과) 같은 분의 과거 행태에 대해 글을 쓴다면 그분이 그 글을 읽고 기분 나빠하지 않을 정도의 정중한 비판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분은 ‘한국논단’(월간)에 가면 재미있는 말씀을 많이 하실 분이에요. 제가 글을 쓴다면 그분의 말을 인용해가면서 ‘약 드셨나’라고 조롱할 수 있겠죠. 그러면 ‘야 이 자식이 정말 조롱하네. 이거 나쁜 놈이네’ 그럴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내가 달리 어떻게 말하겠어요. 조롱해야 마땅하다면 조롱조 표현이 들어가야죠. 그건 독자와의 호흡이기도 합니다.
가령 ‘김정일과 김대중 두 사람이 합의만 하면 이 나라를 마음대로 끌고 갈 수 있다’는 김용서 교수의 주장에 대해 제가 ‘그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국민 수준을 과소평가한 겁니다’라고 말하는 게 옳겠어요? ‘김교수님, 약 드셨나요?’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조소나 조롱이 들어갈 수 있다고 봅니다. 나는 그래서 분노도 확산돼야 한다고 봅니다. 어찌 됐건 저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도 그런 식의 반박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제 딴에는 엄청 자제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하시니까 약간 섭섭하기도 하네요.”
―주변에서 그런 지적을 하니까 마지못해 시인하겠다는 말씀입니까?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어떻게 내가 느끼는 분노를 저 사람도 똑같이 느끼기를 바라느냐고 체념하는 부분도 있죠”
▼ ‘사람 비판’이 먼저다▼
―이진우 교수(계명대 철학과)가 ‘emerge 새천년’ 2월호에 ‘강준만식 글쓰기’에 대해 비판한 글이 있지요.
“비판적 반성의 계기보다 싸움 구경의 흥미만 유발한다”고요. “흥미만 가질까요? 그리고 흥미를 가지는 게 나쁜가요?”
―나쁘다고 볼 순 없겠죠.
“‘100분 토론’을 예로 들면 저는 그 정도면 안티조선측이 잘했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실망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흥미 차원에서 토론을 지켜봤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게 위험한 것이지,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서 쓴 글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흥미를 유발했다면 아주 좋은 거죠.”
―‘100분 토론’ 홈페이지에 올라온 의견들을 보니까 안티조선측의 논리에 대한 비판이 많던데요.
“저는 앞으로 그런 종류의 토론이 또 벌어지더라도 안티조선 쪽이 불리하다고 봅니다. 가령 극단적인 예로 광주시민과 신군부 쪽 사람이 TV 토론을 하면 신군부쪽이 이겨요. 왜냐. 이쪽은 정의감에 의해 심적으로 격앙되기 마련이고, 저쪽은 가진 것을 지키려는 상태이기 때문에 심리전에서부터 불리한 거죠. 저 역시 TV 토론에 나간다면 흥분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어요.”
―실명비판의 형식을 빌려 인격비판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실명비판을 할 때 무한대의 반론권을 주지 않습니까. ‘인물과 사상’에서 반론을 다 받아줘요. 대등한 게임이라는 거죠. 그런데 그 게임에 거부감을 느끼는 건 한국 지식인들의 자존심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는 거죠. 그 동안 비판을 받아보지 않아서 그래요. 그리고 인격과 연결해야 마땅한 경우가 있어요. 예컨대 어떤 교수에 대해선 제가 사실 명예훼손 소송 걸릴까 봐 심하게 쓰질 못해서 그렇지 문민정부 때부터 지금까지 쓴 글을 보면 인격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어요. 세계화라는 단어를 막 쓰던 분이 막상 세계화가 되니 딴소리를 하고. 어떻게 지식인이 그럴 수 있어요.”
―사람을 제도와 동일시하고 사람 쪽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는 탓에 정작 개선돼야 할 제도나 구조의 문제점을 불투명하게 만든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거 이진우 교수 말인가요? 제도를 누가 운용해요, 사람이 하지. 누가 사장으로 앉아 있느냐에 따라 KBS 문제가 달라지는데 사장을 비판하지 않고 KBS의 제도를 어떻게 비판합니까? 제도를 바꾸는 건 바로 사람인데.”
―사람에 대한 비판이 제도에 대한 비판보다 중요하다는 말씀이네요.
“균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 지식계 문화에서는 사람 비판이 없었어요. 비평도 없구요. ‘신동아’에 ‘남성 탐구’를 쓰시는 정혜신 선생님, 나중에 한번 보세요. 나는 그분이 선구적인 일을 한다고 봐요. 그런 작업을 하는 분들이 자꾸 늘어야 합니다. 우리 지식계에선 사람에 대한 찬양만 있지 비판이 정말 없어요. ‘침묵의 카르텔’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면, 지금 제가 하는 작업에 대해 거부감이 느껴지더라도 조금은 달리 봐줘야죠.”
▼한국 지식계는 ‘쓰레기’▼
―교수님의 글쓰기가 현대사회의 다원성, 다양한 가치를 간과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는데요.
“그게 바로 요즘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부드러운 파시즘 체제의 특성이라고 봅니다. 전선이 다양해지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도덕적 우위에 의해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이 합당하냐는 것이죠. 그런 정서에 비춰보면 저는 대단히 무식하고 시대착오적인 일을 벌이고 있는 거죠. 저는 거꾸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뭐냐, 이거죠. 진정으로 다원주의가 실현된 사회라면 갖가지 주장들이 나올수 있는 것 아니에요? 그렇다면 내 목소리도 거기에 끼워달라는 거죠. 다원화된 사회라면 극좌에서부터 극우까지 모든 주장이 용납되고 허용돼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면 제 주장이 문제가 될 건 없다는 겁니다.”
―어쨌든 다원성 측면에서 보면 교수님의 판단도 자의적이고 상대적인 것일 수 있죠.
“다원화·다양화되었으니까 획일적인 잣대로 재긴 어렵다는 거죠? 적어도 개혁에 이바지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그거라고 봐요. 사회가 달라졌다고 보는데 과연 그럴까요. 정권교체로 바뀐 건 정권뿐입니다. 예전부터 보여온 구태의연한 행태는 그대로 남아 있어요. 한국 시민사회 영역에서 뭐가 달라졌습니까. 신세대 문화만 달라졌죠. 언론이 변화됐습니까. 종교가 변화됐나요. 달라진 게 없어요. 달라진 게 없는데도 달라졌다고 환상을 심어주면서 왜 거기에 따르지 않느냐고 욕한다면 동의할 수 없죠.”
―계몽주의와 연관시킨 비판도 있습니다. 이진우 교수가 ‘emerge 새천년’ 9월호에서 계몽주의의 함정을 지적했더군요. 자신만 옳다는 일종의 신화를 만들어간다는 지적인데, 교수님의 글쓰기에 계몽주의적인 측면이 강하다는데 동의하십니까.
“계몽주의라는 말은 안 쓰고 싶은데요. 계몽이라는 말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말이 돼버린 세상이거든요. 계몽이라기보다는 표현의 자유입니다. 당신(좌파 지식인)이 알아서 표현해라. 다만 당신이 그런 일을 하는 데 대해 나는 동의를 못하기 때문에 언행일치를 시켜주겠다는 거죠. 하루아침에 한국 사회를 좌파 세계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거예요? 아니잖아요. 어차피 길게 보는 것 아닙니까. 뭐가 그렇게 급해 자기 메시지를 전파하겠다고 비판받는 신문에까지 글을 쓰냐 이겁니다.”
▼비판에 예민한 사람들▼
―글쓰기 문제를 조금 더 얘기하지요. 홍윤기 교수는 ‘인물과 사상’ 2000년 10월호에서 실명비판에 따르는 인격훼손을 파시즘의 고문방식에 비유했는데요.
“저는 홍교수님이 고민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엄청난 과장을 해도 되는 건지. 제가 누누이 얘기했지만 왜 그렇게 10대 소녀들처럼 예민하냐는 거예요. 사회참여하면서 남을 비판하겠다는 사람들이 그 정도의 비판에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어요.”
―거기에 간극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그 정도’라고 하지만, 비판당하는 쪽에서는 ‘그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까지’가 되는 거죠.
“심각하게 느끼는 것도 이해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그분들이 심각하게 느끼는 건 기존 한국 지식계 정서에 근거한 거죠. 먼저 이분들이 저에 대해 그런 비판을 하기 전에 한국 지식계의 비판문화는 어떤 것이며, 제가 제기한 ‘침묵의 카르텔’이 어느 정도인지, 상호비판이 있었는지, 인물을 배제한 주의나 주장, 이론에 대해서만 비판해야 하는 건지, 그런 논의부터 먼저 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서강대 임상우 교수(서양현대사)가 쓴 ‘끼리끼리 뜯어먹는 한국 지식사회’라는 글을 보면 한국 지식계는 쓰레기예요, 쓰레기. 비판이라는 것도 전부 ‘짜고 치는 고스톱’이고, 넘어서는 안 될 선을 그어놓고 거기까지만 가고. 그렇게 독설을 퍼부어대는 분이 저말고도 여러분 있어요.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안 되는 건 실명을 거론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각개격파, 실명비판으로 들어가면 가만있지 않는다는 거죠. 지식인들만 면책특권을 누리겠다는 생각이 뻔히 보이는데 제가 어떻게 거기에 동조합니까. 문화를 바꾸자는 거죠.”
그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비판에 불만이 많은 듯했다. “인터뷰 기사가 공정하게 나가려면 한국 지식인의 비판문화에 대한 분석기사가 곁들여져야 한다”고 했다.
▼남의 밥그릇 건드리기▼
―홍윤기 교수가 이런 문제제기를 했더군요. “진보적 인사들이 조선일보와 인연을 끊고 대항한다면 조선일보의 자본과 독자층에 어떤 중대한 변화가 올지 근거를 대라”고요.
“저는 홍교수님에게 사회운동이라는 것이 비전과 확신을 주는 게임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고 싶어요. 제 생각엔 그런 건 종교가 할 일이고 허풍 떠는 권력이 맡을 일이지, 사회운동이란 건 그런 게 아니라는 거죠. 운동관의 차이죠. 오랫동안 내가 언론 문제를 겪어본 바로는 언론개혁운동에 거대하고 멋있는 프로젝트는 없어요. 지금 너무 감정적이고 소모적인 논쟁으로 흐르고 있어요. 저라고 좋겠어요?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하면, 조선일보 비판하는 것 지겨워요, 저도.”
―교수님이야 언론학을 전공했으니 그렇겠지만, 언론학을 전공하지 않은 다른 지식인들에겐 언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들이 있지 않을까요. 인생관 또는 역사인식의 차이일 수도 있겠고.
“저는 그렇게까지 보지는 않아요. 다만 내 직업적 전문성에서 비롯된 착각이나 편견은 없을까, 그런 경계심은 갖고 있죠.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전공하는 걸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죠. 그런데 스스로 검증해보면, 그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한국의 정치학자들 가운데 언론을 비판하는 사람의 이름을 하나라도 댈 수 있습니까? 언론의 정치 보도와 관련해. 그러면 그것이 신문방송학과 교수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해 정치 보도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걸까요? 아니면 한국 언론의 정치 보도가 정치에 끼치는 영향이 없다고 생각해서일까요. 그리고 경제학자들 가운데 한국 언론의 경제 보도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을 본 적 있어요? 김윤자 교수(한신대 경제학과)가 한겨레신문을 통해 가끔 하시더군요. 정말 그런 분은 희귀한 분이에요. 이렇듯 언론 보도에 대한 비판을 꺼리는 이유를 따져보자는 거죠, 솔직하게.”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요?
“가치관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보면 됩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신통해서 그래요. 전혀 다루어지지 않은 영역이 있더란 말이죠. 제가 볼 때는 무척 중요한 일인데, 왜들 거기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을까. 정치학과 교수들한테 물어보니 ‘남의 밥그릇 건드렸다가 큰일나려고’라고 이야기합디다. 제가 보기엔, 많은 정치학자들이 신문에 정치에 대한 칼럼도 쓰고 싶고 여기저기 참여도 하고 싶은데, 언론 비판해서 득 될 게 없다는 거예요. 제 문제점은 제가 언론 비판을 업으로 삼다시피하니까 남들이 언론비판을 꺼리는 마음을 너그럽게 이해해주지 못하는 점이죠. 전문화에 따른 제 편견 같은 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답답하니까….”
▼‘도덕운동’이 아니다 ▼
―그 얘기는 ‘당대비평’에서 지적한 도덕의 문제와 관련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인식을 절대화해 ‘성채’ 안에서 자신의 도덕 기준만을 내세우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죠.
“도덕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더 정확한 표현은 언행일치, 명실상부죠. ‘당대비평’에서 주장하는 ‘일상적 파시즘’론에 저는 100% 동의합니다. 문제는 좌파들이 수구 기득권 세력에 의한 정치·경제적인 파시즘도 문제로 삼아야 하는데, 그것을 제쳐놓고 일상적 파시즘만 표적으로 삼는다는 거죠. 그건 의도야 어찌 됐든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우파와 극우파를 도와주는 결과를 낳는다는 거예요.”
―교수님 시각에 따르면 좌파의 정체성 문제를 떠나, 사람들이 옳은 건 옳다고 옳지 않은 건 옳지 않다고 분명히 얘기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 아닙니까. 바로 그런 점에서 도덕성 운동이 아니냐는 거지요.
“도덕성이라는 말은 과대평가예요. 그렇게까지 높게 봐주시나.”
―과대평가의 문제는 아닌 듯싶은데요.
“그 말에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것 아니에요, 사실은. 예를 들면 미국에 있는 극우 근본주의자들은 작은 도덕적 잣대 하나를 갖고 모든 걸 쳐버리는데, 그런 일과 제가 하는 일은 의미가 다르지 않습니까. 도덕은 도덕이지요. 다만 그쪽에서 얘기하는 도덕의 의미가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알기 때문에 제가 과대평가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표현을 꺼리는 겁니다.”
―어쨌든 ‘이게 옳은 일인데, 왜 너는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나무라는 것은 도덕성을 따지는 것 아닙니까.
“제가 도덕을 꺼리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어요. 제가 만일 도덕을 주장하면 어떤 문제에 봉착하게 되냐 하면, ‘너 그러면 유신 때나 전두환 때는 뭐했냐’는 비판이 나오지요. 왜 이제 와서 세상 좋아지니까 도덕 타령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일을 도덕운동으로 보는 건 과대평가라는 겁니다. 제가 거기까지 갈 수는 없기 때문에”
그는 도덕이라는 말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다. 한마디로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위선에 대한 혐오’라는 표현을 썼다. 도덕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순교자 정신’이라는 딱지도 붙었는데요.
“과대평가죠. 저는 하기 싫은 일은 안 하거든요. 그러니까 순교자는 아니죠. 제가 교수가 아니라면 이런 일을 뭐 하러 하겠어요. 교수랍시고 국민 세금 축내면서, 전공이 언론인데, 어떻게 언론과 관련된 문제를 모른 척할 수 있냐는 겁니다.”
▼“여자 나오는 술집, 안 가겠다.”▼
―다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길을 혼자 걸어간다는 점에서 순교자 의식을 가진 것 아니냐는 거지요.
“그건 아니에요. 오히려 혼자 외롭게 하기 때문에 인정욕망을 더 충족시키는 면이 있죠. 저도 인정 욕구가 대단히 강하단 말이에요. 내가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함으로써 충족되는 인정욕구,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확신할 때 갖는 만족감이 있잖아요. 솔직히 저한테 그런 것까지 없는 건 아니죠. 그러니까 이해득실의 게임인데 저를 순교자로 보는 건 좀…. 저도 그런 계산은 나름대로 하고 있다는 거죠. 내가 느낄 수 있는 만족이란 게 뭐겠어요. 지금은 ‘저 자식, 천하에 나쁜 놈’이라는 욕을 듣지만, 저는 지식인 문화가 반드시 바뀔 거라고 봅니다. 오래 걸릴망정.”
기자가 도덕성 또는 도덕운동을 거론한 데는 그가 최근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일을 ‘예사롭지 않게’ 본 이유도 있다. 그는 ‘인물과 사상’ 10월호에서 신문 칼럼을 자주 쓰는 정신과의사 이시형씨가 술집 호스티스의 ‘직업윤리’를 거론한 데 대해 분개하며 이런 고백과 결심을 밝혔다.
“나는 젊은 아가씨가 있는 술집에 가서 못된 짓도 많이 한 쓰레기 같은 인간이다. 이후 여성의 성적 접대가 제공되는 곳엔 절대로 가지 않겠다. 젊은 아가씨들이 있는 술집에 가서 아가씨의 허벅지를 주무르는 행동과 진보와 개혁을 부르짖는 행동 사이에 아무런 갈등과 모순을 못 느꼈던 나의 과거를 참회한다.”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지 않겠다’는 선언은 분명 도덕적인 선언이지요?
“그 얘기하고 나서 무지하게 후회했어요. 그때는 마음이 풀어져 그런 얘기를 했어요. 이시형을 비판해야겠는데 비판을 하기 전 ‘나는 떳떳한가’ 검증해보니 어쩔 수 없더라고요. 그런 것도 안 하면서 이시형을 비판하면 내가 나쁜 놈이 되죠.”
―자신의 도덕성을 좀더 강화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이죠?
“당연히 그래야죠. 그런데 그 얘기했다가 얼마나 욕먹었는데요. 당신이 어떻게 교수냐고. 게다가 그게 뉴스에 나왔어요. 강준만 실망했다, (술집에) 안 가려면 조용히 안 갈 것이지 굳이 그렇게 떠들 필요 있냐, 뭘 그렇게 잘난 척하냐. 별별 얘기가 다 나왔어요. 그래서 제가 인터뷰 같은 것 안 하려는 거예요. 진의가 왜곡되기 때문에.”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는 얘기네요?
“욕 먹어 싸죠.”
―자격 없는 놈은 비판하면 안 된다는 논리인가요? 마치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이 여자를 돌로 쳐라”는 예수의 말씀처럼. 그러면 사람들의 비판의지가 위축되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이 그래야 한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사회를 향해서 발언하는 사람들만큼은 그래야 한다는 거죠. 아니면 차라리 입 닫고 있거나.”
그는 자신이 운동가가 아니라고 했다. 그 이유라는 게 어찌 보면 참 단순하다. “제가 인터뷰를 하지 않으려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운동의 전망에 대해 물으면 답변이 곤란한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글 쓸 때와 달리 인터뷰를 하게 되면 전망에 대해 얘기해야 하거든요. 나는 거짓말은 하기 싫어요. 그런데 운동가는 거짓말도 해야 돼요. 비관적으로 보이더라도 희망 섞인 관측을 해야 한다는 거죠. 저는 그런 면에서 운동가는 아니에요. 전에 세미나 같은 데 가서 결론에 이르러 희망적인 이야기를 안 하면 청중이 항의하더라고요. 교수라는 사람이 그렇게 비관적으로 얘기하면 어떡하느냐고. 그렇지만 거짓말을 할 순 없죠.” 그는 “핏대가 나고 성질이 난다”는 말로 ‘어두운 전망’에 대한 답답한 심경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는 정말 비관적으로만 보고 있는 걸까. 운동에 대한 지속적인 열정과 추진력은 최소한의 희망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죽을 때까지 이 운동하겠다” ▼
―운동의 전망을 비관적으로 보고 계시는데, 교수님의 운동이 이렇게 가다간,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일종의 종교적 신화로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신화까지야 되겠어요. 그건 너무 과대평가해 주시는 겁니다. 사실 낙관하는 점도 있거든요. 제가 즐겨 하는 얘기입니다만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가 몇 년이냐, 이거죠. YS 정권 때부터 잡아야 하지 않겠어요? 10년도 안 됐다는 거죠. 한 가지 웃기는 것은 과거에 전두환·박정희를 예찬하던 사람들이 서구 민주주의의 잣대를 가지고 YS·DJ 정권을 두들겨 패는 현상입니다. 코미디죠. 제가 부르짖는 주장이 당장 큰 효과는 없더라도 문제를 일단 공론화한 점에서, 긴 호흡을 갖고 본다면 제가 불치병 걸려서 죽거나, 오다가다 죽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할 거니까, 앞으로 20년 더 산다고 보면 그때쯤엔 뭔가 달라지지 않겠냐는 거죠. 그렇게 멀리 보면 낙관적인 측면이 있는 거죠.”
―악역을 맡았다고 자주 말씀하시는데 그 역할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지금 단계에서는 의지로 하기보다는, 심하게 얘기하면 ‘이왕 버린 몸인데’ 하는 심보가 강해요. 내가 여기서 어떻게 더 버리겠는가. 저는 안 망가지나요. 이건 경계해야 할 부분이지만, 관성에 의해 끌려가 버리는 측면도 있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혹독한 비판이라도 저를 되짚어볼 기회를 주는 거니까 저로선 어떤 독설이든 즐거운 마음으로 대환영이죠. 제가 수긍할 수 있는 대목은 받아들이죠. 그리고 상대편 논리의 허점을 발견하는 것도 기쁨이고.”
▼지식인 생명은 독립성▼
―어느 글에선가 교수님이 하는 일의 최종 목표는 지식인의 복원이라고 말씀하셨더군요. 그 의미를 설명하신다면.
“제가 보기엔 지식계가 언론계에 먹혔어요. 지식계가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영역에 머물러야 되는데, 신문에 칼럼 쓰고 TV 출연하는 것말고 지식인이 대중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스스로 개발도 안 했고요. 기껏해야 캠퍼스 안에서 연구회나 강연회를 갖는 건데 그런 건 요즘 시장에서 통하지도 않지요. 그러니까 대중은 언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지식인을 만날 수 있는데, 문제는 어떤 지식인이 언제 어떤 이슈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주도권을 언론이 쥐고 있다는 거죠. 심한 표현으로 지식인은 언론의 용병일 뿐이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력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식인은 언론의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그야말로 언론을 주체적으로 이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신문의 칼럼니스트 시장을 보면 대학교수가 너무 설쳐요. 자유기고가 시장이 넓어져야 해요. 또 교수들은 연고나 정실로부터 독립해야 하는데, 지금 보세요. 대학들이 모교 출신을 교수로 채용하는 비율이 얼마나 높은지. 교육부가 겁주기는 했습니다만, 제가 볼 때 마이동풍이에요. 점점 학연주의가 강화되고 있어요. 무섭다고요. 학연주의에 빠진 지식인은 지식인이 아니죠. 지식인의 생명은 독립성인데. 이런 모든 일이 제가 말하는 지식인의 복원이죠.”
―이상주의자라는 평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 이상주의자면서도 현실주의자지요. 현실이 이상에 근접할 수 있도록 비판할 건 비판하고 부정할 건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죠.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더디게 조금씩 조금씩 갈 수밖에 없는 거죠.”
애초 ‘2시간만 딱’ 하기로 했던 인터뷰는 오후 7시가 넘어 끝났다. 예정시간보다 한 시간 반 가량 더한 것이다. 인터뷰 도중 몇 차례 전화가 걸려왔으나 그는 한 번도 받지 않았다. 기자와 나란히 화장실에 갔다올 때를 빼곤 단 한 차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얘기를 했는데도 지친 기색이라곤 없었다. 가방을 챙기는 기자에게 그가 말했다.
“서울에 올라가도 어차피 저녁은 먹고 가야 할 것 아닙니까.” 그는 중·고생들이 메고 다닐 법한 ‘어깨가방’을 둘러메고 앞장섰다. 자전거는 학교에 두고 갔다. 2회전의 공이 울린 것이다.
[독설가 강준만 11시간 밀착인터뷰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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