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戰死아들 명예회복 승소 '94세 母情승리 '

  • 입력 2000년 7월 11일 19시 20분


“두 눈을 감기 전에 죽은 아들의 명예만큼은 꼭 찾아주고 싶었어요.”

6·25전쟁 때 국군에 입대한 후 전사한 아들을 ‘국가유공자’로 만들기 위해 홀로 법정투쟁을 벌여온 90대 모정(母情)이 끝내 법원을 움직였다.

11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재판장 이재홍·李在洪부장판사)는 장남 이명훈씨(1950년 당시 23세)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해 달라며 송정득(宋丁得·94·서울 서초구 양재동)씨가 서울 남부보훈지청장을 상대로 낸 국가유공자 불승인판정 취소 청구소송에서 송씨에게 손을 들어줬다.

송씨는 이날 성당에서 아들을 위해 기도하다 승소 소식을 전해듣고 눈시울을 붉혔다. 재판부는 “나라를 지키려고 전쟁터에 나가 실종된 사람의 행방을 찾고 그가 국가유공자인지 아닌지를 밝힐 책임은 국가에 있다”면서 “국가가 유족에게 입증 책임을 떠 미루는 것은 위법행위”라고 지적, 이씨가 ‘국가유공자’임을 인정한다고 판결했다.

6·25전쟁 발발 20일 전인 1950년 6월5일. 아들 이씨는 어머니 송씨에게 “잘 다녀오겠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육군보병학교 갑종간부 후보생으로 입교했다. 전쟁이 일어날 줄을 모자는 전혀 알지 못했다.

“곧 휴가를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반가운 편지와 함께 입대할 때 입었던 옷가지들을 곱게 싸서 보냈던 아들은 전쟁이 터진 후 실종되고 말았다.

이어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고 송씨는 아들의 소지품과 하나밖에 없는 귀한 편지까지 모두 불태웠다. 인민군에게 발각돼 아들이 해를 당할까봐 걱정됐던 것.

1953년. 전쟁은 끝났지만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송씨는 70년대부터 세차례에 걸쳐 육군본부에 진정서를 내는 등 아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해 마침내 99년 2월 아들의 전사확인서를 받았다. 실종된 지 50여년 만에 아들의 위패가 국립묘지에 세워졌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아들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해 주지는 않았다. 전사를 입증할 자료가 충분치 않다는 이유였다.

소송을 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송씨는 지난해 봄 변호사도 선임하지 못한 채 셋째아들과 손자의 도움을 받아 직접 소장을 썼다. 잘 들리지 않는 귀로 판사의 말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 후 1년여 동안 재판에도 꼬박꼬박 출석했다.

11일 재판부는 “이씨가 전사한 것이 인정되며 향후 모든 국민이 유사시 국가에 충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그를 유공자로 인정함이 마땅하다”고 설명했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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