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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8년 3월 26일 20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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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담임교사는 “문제 학생이라는 기미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고 부모들 역시 전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했다.
▼ 삶의 이유 찾지못해 ▼
이 자살 기사를 읽는 동안 내게 자연스럽게 떠오른 그림은 계층을 불문하고 우리 주변에서 많이 만날 수 있는 아이들의 모습, 살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사실상 요즘엔 더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는 부모와 교사들로부터 벗어나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살고 있는 문화에서는 ‘죽어 버리자’라든가 ‘한 명이 죽으면 다함께 죽자’라는 말이 아주 쉽게 나오게 되어 있다. 어떤 면에서는 전(前) 세대가 죽을 이유가 있어서 자살을 했다면 지금 아이들은 살 이유를 찾지 못해 죽는다고도 할 수 있다.
현대의 청소년들은 갱을 이루어 다니며 극적인 사건을 벌이고 싶어하기 때문에 쉽게 죽는다는 분석을 내리는 전문가도 있을 것이다. 비디오물을 비롯한 유해한 문화 환경이 죽음에 대한 욕망을 부추긴다는 측면을 강조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네 명의 아이들은 그냥 ‘콱 죽어버린 것’은 아닌 것 같다. 한 아이가 아파트에 찾아간 친구들에게 “죽기 전에 우리 소지품을 기념품으로 주겠다”고 말했다는 부분은 무심히 넘길 대목이 아니다. 그들은 마음속 깊이 자신의 죽음이 가진 의미를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랐고 그 친구들이 자신들의 죽음의 의미를 ‘증언’해 주는 존재이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다른 아이는 “천국에 가서 우리 가족의 수호 천사가 되고 싶다”는 유서를 남겼다. 이 아이는 분명 가족을 매우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 아이는 왜 살아서 가족을 사랑하는 법을 알아내려 하지 않았을까. 만약 이들이 몸이 아픈 어머니를 위해 병원에서 병간호를 했었다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가계에 보탬이 되거나, 일하는 가운데 또래들과 일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면 이렇게 쉽게 죽음을 택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른바 일류 대학에 재직하고 있지만, 자신만만하고 자기 존중심이 높은 학생들을 별로 만나지 못한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주눅들게 만들었을까. 나는 이들에게서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경험을 체계적으로 박탈당해온 과거를 본다.
아직도 당근과 채찍으로 아이들을 다루고 있는 훈육의 공간인 가정과 학교, 아이들을 소비능력에 따라 줄을 세우는 물질만능의 소비사회는 이들로 하여금 삶을 무가치하게 느끼라고 부추긴다.
삶을 마감한 아이들의 명복을 빌면서 10대의 안녕과 인권에 대해 생각했으면 싶다. 18세까지의 사람들을 모두 ‘아동’이라는 보호 대상자의 범주에 넣고 통제하려 드는 발상을 이젠 바꿀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제는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 주인의식 일깨워야 ▼
이 사건이 10대 청소년들에게 노동하는 존재로서의 주권, 사유할 수 있는 문화적 존재로서의 주권을 부분적으로라도 부여하면서 새로운 공간을 열어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세상은 살아갈 만한 곳이며 자신은 살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개인의 존엄성과 자율성이라는 개념 아래 전면적 구조 조정을 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한혜정<연세대교수·문화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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