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D/Topic]이소룡(브루스 리)은 살아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13일 17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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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철의 종횡무진 시간기행 11

이탈리아 청년 무기고(Mughigo)는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다. 출생 직전 아버지가 별세한 탓에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어머니마저 남편의 처참한 죽음에 충격을 받아 무기고가 젖먹이 때 기력상실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무기고는 외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무기고의 아버지는 젊고 유능한 검사였다. 어머니는 부유한 기업인의 딸로 태어나 승마, 펜싱 등 ‘귀족 스포츠’에 재능을 보인 ‘금수저 우먼’이었다. 어머니는 펜싱 종목의 이탈리아 국가 대표선수로 올림픽에 참가하기도 했다. 올림픽에서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얼짱 선수’로 주목 받아 활짝 웃는 얼굴 사진이 전 세계 언론에 소개됐다. 그때 프랑스의 어느 신문에서는 캡션(사진 설명)에 ‘CC의 재현인가?’라는 제목을 붙였다.

CC는 이탈리아의 미녀 배우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Claudia Cardinale)의 이니셜이다. CC는 1938년 북부 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이탈리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57년 ‘튀니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탈리아 여성’ 미인대회에서 입상한 그녀는 부상(副賞)으로 베네치아 여행을 가게 됐다. 거기서 영화 제작자의 눈에 띄어 배우로 데뷔한다.

CC는 초기엔 코미디 영화에 주로 출연해 강렬한 매력으로 남성 팬들을 사로잡았다. 그 후 연기력과 미모를 바탕으로 명감독과 함께 숱한 명화를 만들었다.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로코와 그 형제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8과 1/2> 등은 영화사(史)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 있다.

무기고의 어머니는 올림픽 직후 영화계, 패션모델계 등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으나 보수적인 가풍 탓에 그쪽으로는 진출하지 못했다. 어느 영화감독은 CC와 함께 나타나 곧 촬영에 돌입할 시나리오를 내밀기도 했다. 그 감독은 이렇게 회유했다.

“아드리아 아그리파(Adria Agrippa) 양! 그대가 배우로 데뷔하면 영화 역사에 큰 이름을 남길 것이오. ‘AA 시대’가 열린단 말이오. BB(Brigitte Bardot, 브리지드 바르도)와 CC, MM(Marilyn Monroe, 마릴린 먼로)은 있어도 AA라는 특등석은 비어 있지 않소? 그대가 여기에 앉을 적임자요!”

AA는 현모양처를 바라는 부모님의 종용에 따라 ‘전도양양’한 청년 법조인과 23세란 비교적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당시 이탈리아 대중지와 방송에서는 ‘이 시대의 선남선녀, 커플로 탄생하다!’ 등의 제목으로 요란하게 보도했다.

무기고 아버지의 달콤한 신혼생활은 채 한 달도 지속되지 못했다. 아버지가 시칠리아에 검사로 부임하면서 마피아를 소탕하는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라는 ‘범죄와의 전쟁’에 차출됐기 때문이다. 그는 마피아 조직을 잡아내는 데 온몸을 던졌다. 그의 상관은 노련하면서도 강직한 인물로 정평이 난 ‘국민 검사’ 팔코네 부장검사였다. 그는 체포된 마피아 중간 보스들을 신문(訊問)하면서 그들의 불안감을 이용하여 조직 비밀을 자백하게 하는 솜씨를 보였다.

마피아로서는 조직이 와해될 만큼 큰 위기를 맞았다.
마침내 마피아는 무기고 아버지가 탄 승용차에 무차별 총격을 난사하여 살해한 데 이어 팔코네 부장검사도 그의 승용차가 지나가는 길에 폭약을 장치해 폭사시킨다.

소년 무기고는 15세가 될 때까지 부모의 죽음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말해준 대로 교통사고인 줄 알았다. 나폴리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무기고는 문학,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다. 성적은 중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나폴리에서 손꼽히는 부호인 외할아버지가 평소에 학업성적 무용론을 주장하기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무기고를 격려했다.

“이탈리아 전국에서 가장 공부를 잘한 네 아버지는 세상을 너무 일찍 떠났다. 공부가 무슨 소용인가? 내 사랑하는 외손자 무기고! 너는 세상 물정을 두루 익혀 기업인으로 성공하라.”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무기고는 어린 시절 비디오로 별별 영화를 다 봤다. 그 가운데 가장 감명 깊은 영화는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 작품 <대부(代父, The Godfather)>였다. 주연배우 말론 브랜도의 연기가 무기고의 어린 영혼을 홀딱 사로잡았다.

컴컴한 실내에 서서히 빛이 들어오면 어느 초췌한 50대 남자가 자신의 딸을 만신창이로 만든 놈들을 복수해달라고 읍소한다. 그의 하소연을 듣는 노인의 무표정한 얼굴에 엄정한 카리스마와 따스한 부정(父情)이 어우러졌다. ‘돈 콜레오네’라는 이 노인은 마피아 보스.

영화 <대부>의 첫 장면이다. 무기고는 이 영화를 수십 번 보고 대사를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덕분에 영어를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말론 브랜도가 출연한 영화 대부분을 봤다. 브랜도의 브로마이드 사진을 벽에다 붙이고 혼자서 브랜도의 영화 대사를 중얼거렸다. 브랜도가 청년 시절에 출연한 <이유 없는 반항>이나 <비트 제네레이션>을 보고 무기고는 기성사회에 대해 막연한 반감을 품었다.

15세 때 크리스마스이브에 무기고는 혼자서 방에 앉아 <대부>를 감상했다. 가족 파티에 얼른 오라는 가사도우미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듣고 영화에 몰입해 있을 때였다.

덜컹! 문이 열리며 외할아버지가 들어왔다. 외할아버지는 비디오 화면을 얼핏 보고는 천둥소리 같은 고함을 질렀다.
“이게 무슨 영화야?”
“예? <대부>인데요.”
“이 영화가 어떤 것인지 알고 보느냐?”
“어떤 것이라뇨? 아카데미상을 여러 개 받은 명화….”
“나는 심장이 떨려서 이 영화 못 본다!”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울먹임으로 바뀌었다. 무기고는 그때 처음 부모 죽음의 경위에 대해 자세히 들었다.

“이 영화에서 마피아가 미화(美化)되었다. 그들은 무자비한 조폭이요, 희대의 협잡꾼 집단일 뿐이다. 내가 사업하면서 마피아란 거머리 조직에게 피 빨리듯 뜯긴 돈만 해도 천문학적 금액이다. 내가 그놈들을 뿌리 뽑으려고 검사 사위를 맞았지.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위가 일찍 죽었으니….”
외할아버지는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네 아버지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 죽음이 계기가 되어 정부는 마피아 소탕작전에 발 벗고 나서 마피아 세력이 거의 와해됐지.”
“…….”
“아직 잔존 세력이 준동하지만 너는 그런 데 신경 쓰지 마라.”
“……!”

외할아버지는 무기고의 부모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전에 무기고는 부모가 어떻게 생긴 분인지도 몰랐다. 결혼식 사진이었다. 아버지는 이탈리아 남부지역의 전형적인 남성처럼 키가 작고 땅땅한 몸매였다. 무기고는 자신이 아버지를 붕어빵같이 닮았다고 느꼈다. 어머니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눈이 큼지막한 미인이었다. 이탈리아 ‘국민 여배우’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CC)와 흡사했다.

“네가 엄마를 닮았어야 하는데….”
외할아버지의 중얼거림을 듣고 무기고 역시 그런 아쉬움이 들었다.

그날 이후 무기고는 ‘오렌지족’에서 ‘투사’로 변신했다. 영화, 뮤지컬, 콘서트 등을 구경하러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중류 수준의 대학을 나와 외할아버지 기업체를 물려받는 ‘후계자 경영인’이 되기를 꿈꾸다가 아버지의 존재를 깨달으면서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는 개안(開眼)을 경험한 것이다.

소년 무기고는 마피아의 남은 세력을 자기 손으로 뿌리뽑겠다고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 무얼 준비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영어 격언이 떠올랐다.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펜의 힘은 칼의 힘보다 세다. 즉, 문력(文力)은 무력(武力)보다 강하다는 뜻이다. 무기고는 그래도 무력을 무시할 수 없다고 봤다. 그래서 자기 나름의 격언을 만들었다.
‘The pen is as mighty as the sword.’
문력은 무력만큼이나 강하다.

무기고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을 목표로 삼았다.
친구들이 대학입시 준비에 열을 올릴 때 무기고는 이탈리아의 시인 타소(Tasso)를 비롯해 칠레의 네루다, 소련의 예프투센코 등 체제에 저항한 시인들의 작품을 찾아 암송했다.
무기고는 <세계의 저항 시인 계보(系譜)>라는 책에서 한국의 김지하 시인을 발견했다. 나폴리시립도서관에 가서 찾아보니 김 시인의 시집 <Five Thieves>(오적, 五賊)라는 영역본이 있었다. ‘오적(五賊)’이란 한국사회를 좀먹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 5대 권력층을 말한다. ‘5적’을 김지하 시인은 다음과 같이 등장시켰다.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것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털 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쪽
남북간에 오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 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만하고 목 질기기 동탁 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五賊)의 소굴이렷다

무기고는 이탈리아의 5적으로 마피아, 재벌, 정치인, 언론, 고위 공무원 등을 꼽았다. 그는 김지하 시인을 흉내 내어 이탈리아판 <오적> 담시(譚詩)를 지어 혼자서 읊었다. 열흘 밤낮을 바쳐 쓴 이 노작(勞作)을 여러 문예잡지에 투고했으나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실망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술을 단련했다. 김지하 시인 때문에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돼 나폴리 시내에 있는 태권도 도장을 찾았다. 태권도를 배우며 한국어 구령을 외치면 왠지 모르게 쾌감이 느껴졌다.
“차렷!”
“경례!”

무기고는 외삼촌을 졸라 권총 사격장에 출입했다. 미성년자는 권총을 잡을 수 없으나 외삼촌 회사의 직원 신분증을 빌려 들락거린 것이다. 또 매일 팔굽혀 펴기 300회, 스퀏 300회, 런지 300회를 하며 기초 체력을 키웠다.

무기고는 나폴리의 여러 지역신문에 ‘로베르토’라는 필명으로 사회 풍자시를 자주 기고했다. <오적>보다는 풍자 강도(强度)를 조금 낮추었다. 처음엔 거의 퇴짜 맞았으나 갈수록 채택되는 빈도가 늘었다. 시뿐 아니라 사회평론도 써보았다.

무기고는 대학 진학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나폴리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어 북쪽의 밀라노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폴리테크니코’라 불리는 이 명문학교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입학하고 1년간 학업, 무술 연마, 시작(詩作) 등을 함께 하는 분주한 일상을 보냈다. 밀라노에서도 태권도 도장에 다녀 검은 띠를 땄다.
무기고는 이탈리아 정치권의 부패한 실상을 규탄하는 시위에도 자주 참여했다.

무기고는 어느 날 TV에서 프랑스 외인부대의 활약상을 보았다. 극한으로 몰아넣는 훈련, 분쟁지역에 파견돼 벌이는 치열한 전투…. 젊은 피가 끓었다. 이탈리아에서는 2005년부터 모병제가 시행되어 군 복무가 의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무기고는 휴학하고 이탈리아 특수부대에 자원입대했다.

기초 군사훈련에서 무기고는 발군의 재능을 발휘했다. 사격, 유격 훈련, 낙하산 훈련 등에서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이탈리아 남부 알프스에서 빙벽타기와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100㎞ 완주 훈련을 마치고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되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탈레반에 납치된 인질 구출 작전에 동원된 것이었다. 무기고는 탈레반 반군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여 인질을 구해내는 작전 성공에 일조했다.

군 생활을 마친 무기고는 견문을 넓히려 로마로 상경했다. 테르미니 역에서 내려 숙소를 찾아가다 눈에 익은 태극 마크 간판을 발견했다. 한국 식당이었다.
“벤베누토(Benvenuto, 어서 오세요)!”
여자 종업원의 상냥한 목소리가 무기고를 맞는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둘은 놀란다.
“소피아?”
“로베르토?”
고교 시절 나폴리에서 ‘청소년 기자 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한 멤버 아닌가.

“말만큼 큰 처녀가 되었네! 볼로냐대학에 가지 않았어?”
“너도 청년이 되었네, 호호호! 나는 볼로냐를 졸업하고 로마에 와서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고 있어. 저녁엔 여기 한국식당에서 알바 일을 하지. 너는 뭐하고 지냈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시간이 오래 걸려. 내가 고등학교 때는 필명으로 로베르토라 했지만 이제는 무기고라는 본명을 쓴단다.”

식당 안에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무기고는 불고기 정식 2인분을 주문하고 소피아와 함께 밥을 먹자고 제안했다.
“사장님께 허락 받아야지.”
소피아는 사장 겸 쉐프인 P씨에게 무기고를 소개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예요.”
무기고는 P씨에게 거수경례를 붙이며 한국어로 인사했다.
“안뇽하십니카!”
“한국말 인사는 어디서 배웠나요?”
“태권도 사범님께 조금 배웠습니다. 검은 띠 유단자입니다.”
“호! 대단하네요. 소피아도 만날 겸해서 자주 놀러 오시오.”

무기고는 소피아를 소년 시절부터 사모했다. 시원스레 큰 눈망울과 사슴처럼 긴 목을 가진 그녀를 보면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녀에게 사랑고백 시(詩)를 숱하게 보냈으나 번번이 퇴짜 맞았다.
소피아의 눈에는 무기고가 건달처럼 보여 싫었다. 시를 씁네, 무술을 단련하네, 마피아를 때려잡네 하고 떠벌리는데 장차 어떤 인물이 될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짜리몽땅한 신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 재회한 그날 밤 무기고와 소피아는 한국식당에서 밥을 먹고 밖으로 나와 거리를 산책했다. 무기고는 밀라노 대학 이야기, 이탈리아 특수부대 훈련 체험, 아프가니스탄 파견 경험 등을 털어놓았다. 소피아는 무기고의 이야기에 대해 반신반의(半信半疑)했다.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지어낸 허무맹랑한 무용담 아닐까?

목이 말라 카페에 들러 레몬 음료인 ‘리모나타’를 마시며 무기고는 부모 사진을 꺼내 소피아에게 보여주었다.
“우리 엄마, 미인이지? 소피아, 너 닮았지?”
“와! 미인이시네! 내가 닮기는… 난 족탈불급(足脫不及)이야.”
“내 눈엔 CC-엄마-소피아, 싱크로율이 99%인데!”
“너는 나이 들수록 뻥이 점점 세지네! 호호호!”
소피아는 눈을 흘기며 웃었다.
“난 이 사진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녀. 부모님이 내 수호신이야. 울 엄마와 네가 닮았으니 너도 내 수호신이 되어 줘!”
“무기고! 지금 나한테 프로포즈하는 거니?”
“그래!”
“…….”

무기고는 로마에 체류하며 마피아의 동향을 살폈다. 아버지의 옛 동료 검사들을 찾아가 정보를 얻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무기고가 마피아 색출에 나서는 것을 만류했다.
“물리력을 가진 우리도 그놈들을 상대하기가 버거운데 민간인 신분인 자네가 달려든다니 무모하지 않은가? 민간인 탐정은 추리 소설에나 나오지 현실세계에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놈들을 내 손으로 잡아내고 그들의 만행을 폭로하는 글을 쓸 작정입니다.”
“의욕은 좋지만 아무래도 무리네. 자네는 순진한 구석이 많군!”
“이래 뵈도 태권도 유단자에 이탈리아 특수부대원 출신입니다.”

“그래? 마피아 놈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지저분한지 사례를 들어볼게. 2013년 11월 프란체스코 라코스타라는 마피아 두목이 경쟁 조직원들로부터 쇠파이프로 얻어맞고 멧돼지 우리에 던져졌지. 그자는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애걸했지만 굶주린 멧돼지 16마리가 뜯어 먹었다네.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뼈만 남았다 하더군. 칼라브리아 주 경찰은 경쟁조직의 두목 시모네 페페를 살인혐의로 체포했다네. 두 조직은 60년간 세력다툼을 해왔는데 최근 페페의 대부가 라코스타의 조직원에게 살해당하자 페페가 복수한 것이라네.”

무기고는 2015년 8월 20일 오후 로마 시내를 거닐다 화려한 장례식 행사를 목격했다. 말 6마리가 끄는 운구 마차가 나타나자 하늘에서는 헬리콥터에서 빨간 장미꽃잎이 뿌려졌다. 영화 <대부>의 주제곡을 브라스밴드가 연주했다. 로마 남동부 지역 마피아 조직 두목인 루마니아 출신 카사모니카 비토리오의 장례식이었다. 운구차 뒤에는 검은 상복 차림의 건장한 사나이 수백 명이 따라갔다.

시민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수군거렸다.
“조폭들이 대명천지 대낮에 저렇게 설쳐대니 어디 무서워서 살겠나? 이거 완전히 공포 분위기 아냐?”
“경찰은 저런 놈들을 안 잡아가고 뭐 하나?”
“요즘도 로마시청 고위 공무원과 마피아가 결탁해서 공공 공사를 말아먹는다 하잖아요. 지금 수사 받는 공무원만도 100명 넘는다는데요.”
“몇 달 전 남부 플라티마을에서 치러진 지방선거에는 입후보자가 단 1명도 없었지요. 마피아의 협박이 무서웠기 때문이랍니다.”
의협심이 발동된 무기고는 그 시민들 앞에 나서서 외쳤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놈들을 때려잡겠습니다!”
무기고가 장례식 행렬을 가리키며 사자후(獅子吼)를 토하자 그쪽의 어느 늙수그레한 중간 두목급 풍모의 애꾸눈이 뒤돌아보더니 무기고 쪽으로 다가왔다.

“우리를 때려잡겠다고?”
“그렇소.”
“이 X만한 놈이 겁대가리 없이!”
이마에 칼자국 상처가 얼룩덜룩 남은 애꾸눈은 당장이라도 무기고를 때릴 듯이 주먹을 들어올렸다.
“영감! 왕년에 좀 놀아본 모양인데, 진정하시오. 당신 조직원 가운데 가장 센 놈과 한판 붙겠소.”
“결투 신청? 좋다! 그럼 내일 밤 8시에 콜로세움에서 맞짱판을 벌이기로 하지.”
“좋소!”
“장난삼아 하는 말이 아니야.”
“그건 내가 할 말이오. 진짜로 주먹 쓰는 놈을 데려 오시오.”
이들의 대화를 들은 몇몇 시민도 구경 오겠다고 말했다.
“우리도 가겠소.”

무기고는 숙소로 돌아와 내일 밤 대결에 대해 구상했다. 어느 놈과 붙든 이길 자신이 있었다. 특수부대에서 맨손 격투 훈련 때 챔피언으로 등극하지 않았는가. 덩치가 산만큼 큰 녀석들도 발차기 한 방에 날려 보냈었지! 이탈리아 이종격투기 헤비급 선수 출신자도 정권(正拳)으로 턱을 정확하게 가격해 경기 개시 20초 만에 쓰려뜨렸었지!

무기고는 대결장소가 콜로세움이라기에 그곳을 배경으로 한 무술영화 <맹룡과강(猛龍過江, the Way of the Dragon)>이 떠올랐다. 전설적인 무술 배우 브루스 리(이소룡, 李小龍)가 주연으로 나온 작품으로 마지막 격투 장면은 액션 영화의 절정(絶頂)으로 꼽힌다. 무기고는 그 영화를 다시 감상하며 브루스 리의 몸놀림을 분석했다.

로마의 중국 식당을 괴롭히는 마피아를 이소룡은 신출귀몰한 쿵푸 솜씨로 응징한다. 마피아는 마침내 미국의 살인 청부업자 척 노리스를 불러와 이소룡과 대결을 시킨다. 이들 무술 고수들은 콜로세움에서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인다. 물론 이소룡이 이긴다.

콜로세움에 도착한 무기고는 관중이 운집한 것을 보고 놀랐다. 카메라 수십 개와 대낮처럼 훤한 불빛을 비추는 조명시설이 동원돼 스포츠 중계방송 같은 분위기였다. 어리둥절했다. 어제 결투 제의를 했던 애꾸눈 영감탱이는 본부석에 앉아 목에 힘을 주고 있었다. ‘21세기 스파르타쿠스’라는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어서 오시게. 그래 맞아 죽을 각오는 했나?”
애꾸눈이 이죽거리며 말을 걸었다. 알고 보니 ‘스트리트 파이터 선발대회’ 로 예정된 행사였다.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데 수십 개 기업들이 스폰서로 나섰다.
“맞아 죽을 각오라니? 마피아 양아치를 때려죽일 것이니 잘 지켜보시오.”
“허허, 오늘은 자네 제삿날이 될 거야. 상대는 우리 조직에서 주먹이 가장 센 놈이야. 미국 UFC 격투기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에도 도전했어.”
“내가 이길 테니 파이트머니나 잘 챙겨 주시오.”

네댓 경기에 이어 무기고가 특설 링에 올랐다. 링 아나운서가 요란하게 양 선수를 소개했다.
“오늘 밤의 최대 하이라이트! 재야 무림계 최고수인 두 선수가 목숨을 건 대결을 벌이겠습니다! 승자에게는 스파르타쿠스 얼굴이 새겨진 순금 메달과 함께 상금 1만 달러가 수여됩니다!”

무기고는 이소룡처럼 윗도리는 벗고 아랫도리는 긴 바지를 입었다. 상대방을 보니 키가 무기고보다 머리통 하나만큼 크고 온몸에 근육이 꿈틀거렸다. 사각턱이 돋보이는 얼굴이었다.
5분씩 3라운드 경기였다. 무기고는 1라운드에서는 상대방의 힘을 빼고 2라운드 후반에 KO 시킨다는 목표를 세웠다.

공!
1라운드가 시작됐다. 사각턱 녀석은 덩치가 작은 무기고를 깔보고 덤볐다. 펜싱 국가대표 선수 어머니의 DNA를 물려받은 무기고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스텝 속도를 자랑했다. 상대가 주먹을 뻗으면 사뿐 뒤로 물러서고, 상대가 잠시라도 주춤하면 총알 같은 스피드로 접근해 펀치를 적중시키는 양상이었다.
연속해서 10여 방 때렸을까. 사각턱 녀석의 눈두덩이에서 불그레한 핏빛이 감돌았다.

“엇!”
무기고가 뒤로 피할 때 갑자기 다리를 쓸 수 없었다. 애꾸눈이 링 아래에서 손을 뻗어 무기고의 발목을 붙든 것이다. 그 틈을 타 사각턱이 라이트 훅으로 무기고의 왼쪽 턱을 가격했다.
퍽!
무기고는 썩은 볏단처럼 쓰러졌다. 심판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원, 투, 쓰리…”
무기고는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심판의 목소리가 모기소리처럼 작게 들렸다. 일어서야 한다는 본능적인 의지가 작동하긴 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기고! 일어나!”
무의식 심연(深淵)에서 들려오는 소피아의 애타는 목소리!
무기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벌떡 일어났다.
공!
1라운드가 끝났다.

2라운드가 시작됐다. 무기고는 1라운드 때 받은 대미지 탓에 전신에 힘이 빠져 전진-후퇴 스텝을 쓰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사각턱이 날리는 펀치를 자주 맞았고 얼굴은 피범벅이 됐다. 아무래도 2라운드에서는 방어 위주로 버티고 승부는 3라운드에서 걸어야 할 판이다.

3라운드가 시작됐다. 무기고는 숨쉬기를 방해하는 마우스피스가 답답해서 링 바닥에 뱉었다.
“요요요!”
무기고는 이소룡 특유의 괴성을 질렀다. 영화 <맹룡과강>을 연상하며 발차기 위주로 공격을 펼쳤다. 사각턱은 그라운드에 누워 결판을 내려는 듯 무기고의 허리춤을 잡으려 달려들었다. 그때마다 무기고는 사각턱의 턱을 발로 차 저지했다.
“무기고! 힘내!”
소피아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 링 주위를 얼핏 보니 소피아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소피아가 이곳에 응원하러 왔나?
이제 사각턱도 발 기술을 시도했다. 그의 하이킥의 위력은 대단했다. 무기고는 사각턱의 육중한 발 공격을 서너 차례 받고 휘청거렸다. 이제 3라운드 종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 끝나면 무기고의 패배임이 틀림없다.

마지막 승부수!
“요요요옷!”
무기고는 이소룡 괴성을 다시 내지른 후 온몸에 힘을 빼고 동작을 부드럽게 펼쳤다. 수리매가 하늘을 날 때 날개를 펼친 것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하게 팔을 뻗어 사각턱의 발 공격을 막아냈다. 이어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 몸을 360도 돌리는 ‘돌개질’ 발차기로 사각턱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사각턱이 휘청거렸다. 무기고는 지체하지 않고 깨금발로 휙 뛰어올라 사각턱의 왼쪽 ‘사각턱’을 ‘두발낭상’으로 정확하게 걷어찼다.
쿵!
사각턱은 입에서 핏덩이를 토하며 쓰러졌다. 카운트다운 10을 셀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무기고의 KO승이었다.

이튿날 오전 로마 힐튼호텔의 레스토랑 ‘라 페르골라(La pèrgola)’에 브런치 시간에 마주 앉은 무기고와 소피아.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누구랑 싸웠어?”
“어제 격투기 대회에 나갔지. 너도 응원하러 오지 않았어?”
“무슨 소리야? 안 갔는데….”
“네 목소리를 들었는데… 네 얼굴도 얼핏 봤고….”“정신 차려, 무기고! 머리를 다쳐서인지 헛소리를 하네!”
무기고는 지갑을 열어 100달러 지폐 100장이 든 현금 1만 달러를 보여주었다.
“어제 받은 우승 상금이야!”
“진짜야?”
“그렇다니까! 그러니 이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사지.”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무기고는 브런치 세트를 시키고 종업원에게 조간신문을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스포츠 신문을 보니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두 사나이가 격투하는 장면이 실려 있었다. 제목은 ‘브루스 리, 살아있다?’였다. 무기고가 ‘사각턱’의 턱에 발로 걷어차는 순간이 포착된 사진이었다. 무기고는 링 사이드에 앉은 관중의 얼굴을 하나하나 세심히 살폈다. 소피아가 있는지 찾아내기 위해서다.
애꾸눈 영감탱이 뒤에 앉은 여성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친다. 소피아 같기도 하다.
“이 여성, 소피아 너 아냐?”
소피아는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무기고 네가 보여줬던 어머니 사진… 그분 같은데….”
“엄마….”
무기고는 부모 사진을 꺼내 눈시울을 붉히며 어머니 얼굴을 살폈다. 소피아가 팔을 뻗어 무기고의 등에 손을 대고 살포시 감싸주었다.

고승철 소설가 songche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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