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이현세 “내 작품은 판타지…전쟁 준비 해야겠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19일 15시 33분


코멘트
“전쟁 준비를 해야겠죠.”

13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화실에서 만난 이현세 화백(60)은 ‘전쟁’이란 단어를 꺼냈다. 지난달 30일부터 네이버 웹툰에 연재를 시작한 ‘천국의 신화’ 6부(봉황의 날개)에 대한 출사표였다. 전쟁을 치루듯 치열하게 작품을 만들겠다는 의지였다.

‘천국의 신화’ 자체가 전쟁 같은 작품이다. 1997년 당시 가장 ‘핫한’ 만화가였던 그는 한민족 신화와 상고사를 소재로 100권 분량으로 대작을 발표했다. 같은 해 청소년보호법 시행 뒤 이 만화 속 원시인류의 성행위 장면이 음란물이라는 이유로 기소됐다. 표현의 자유 논쟁이 일었다. 6년 간 법정 공방이 이어진 끝에 2003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처음으로 내가 무슨 만화를 그려왔는지를 생각해보게 됐죠. 그전까지 독자들의 열광적 지지만 받았으니까요. 내 만화에는 독이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인지…. 결국 ‘자신’을 돌아보게 되더군요. 당시를 극복하는데 가족애가 컸어요. 막내가 초등학생, 딸이 중학생이었는데, 자칫 ‘아빠가 음란 폭력물 만화를 그린다’고 학교에서 따돌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를 믿어줬어요.”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 그는 하늘을 쳐다봤다. 정점에 있던 그는 이렇게 반짝임을 잃었다. 스스로 “남은 건 상처뿐이었다. 전쟁 같은 시간 후 어느새 50대가 됐다”고 그는 말했다.

“음. 대법원 무죄 판결나니 더 이상 ‘천국의 신화’를 그리기 싫더라고요. 저는 신이 나서 광대처럼 뛰어다니는 작가에요. 신명으로 그리죠. 그런데 그 신명이 죽었으니. 뛰어놀긴 싫은데, 그리다 마는 것도 아닌 것 같았어요. 한명의 독자라도 원하면 그려야 한다는 생각에 2007년 5부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마쳤죠. 5부는 제가 콘티를 짜면 그림은 제자가 그렸어요.”
10년 만에 6부 연재를 시작한 이유는 ‘도전’ 때문이다.

“네이버 측에서 2년 전인가 찾아와 ‘천국의 신화’를 이어서 연재하자고 했어요. 이미 마음속에서 지운 상태였고, 현실적으로 이 나이에 일주일에 한번 연재를 할 수 있을지, 웹툰에서 얼마나 호응을 얻을지…. 수많은 댓글 속에서 과연 내가 꿋꿋이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었죠. 1년 정도 고민했지만 마음속에 무언가 갈증이 있었어요. 젊은 작가들과도 경쟁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면서 용기가 생겼습니다.”

이 작가는 2014년 겨울부터 1년 이상 6부를 준비해왔다. 한민족의 시원인 배달국 1대 환웅 거발한(1부), 천족(天族) 치우천왕과 황토인(화족·華族) 헌원의 전쟁(2부), 견우직녀 설화를 소재로 한 가루치(3부), 마지막 환웅 거불단(4부), 1대 단군 검마르(5부)에 이어지는 6부는 위만조선의 건국과 패망을 다룬다.

“‘천국의 신화’는 제국 순이 아니라 인물을 중심으로 그려왔어요. 앞으로 위만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고조선이 멸망한 후 고구려 건국 전, 즉 부여 옥저, 예맥이 있던 시대로 갈 겁니다. 이 시대는 중국 춘추전구시대와 유사하게 보여 작가로써 참 탐이 납니다.”

그는 우리 사회 역사 논란을 의식한 듯 자신의 작품을 ‘판타지’로 규정했다.

“상고사 역사서인 ‘환단고기’ 등을 참고했는데 역사학계는 ‘위서’(僞書)라고 보죠. 반대로 치우가 헌원에게 패하는 것으로 2부를 그리자 재야사학자들에게 ‘왜 치우가 패하냐’며 비난받기도 했어요. ‘천국의 신화’가 역사물이면 제목이 ‘천국의 역사’겠죠.(웃음). 저는 신화, 즉 한민족 판타지를 그리는 겁니다, 역사에서 자유롭고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죠.”

그는 연필에 A4용지를 둘둘 말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웹툰을 그려낼지 궁금하던 차였다. “일단 종이에 그린 후 스캔합니다. 이후 PC에서 색깔을 넣는 식으로 작업합니다.” 이어 그는 웹툰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부분을 연구했다고 밝혔다.

“출판 만화는 공간을 나누는 공간 연속 예술이라면 웹툰은 스크롤로 쭉 내려보기 때문에 시공간 연속 예술이라고 봐요. 장면을 연출을 하는데 가장 공을 들였죠. 이해하기 어렵지 않게 세세하게 풀어주고 나레이션을 많이 사용했죠. 그림체도 변화를 줬습니다. 이전에는 등장인물 어깨에 힘을 줘 직선으로 그렸는데 이젠 웅크려 둥글게 그렸어요. 놀랐을 때도 눈을 크게 그렸는데 이제는 눈을 작게 하고 눈동자를 그립니다. 똑같은 그림체로 그리는 건 정말 힘들고 지겨운 일이죠. 까치가 나오는 스포츠만화를 안 그리는 이유도 유니폼 그리기 지겨워서죠.”

그래서인지 그는 새 작품을 할 때마다 독자들로부터 “이현세의 제자들이 그렸다‘는 오해를 산다고 했다. 이 화백은 ”독자들은 새 작품을 보고 “이건 이현세가 그린 게 아니다”라고 의심하면 나름 성공을 한 것“이라며 웃었다. 6부는 ’19금‘이던 1~5부와 달리 전체 연령이 볼 수 있다. 하지만 6부 1회를 보면 팔과 다리 잘린 채 노예가 된 장수가 나온다.

”한고조의 황후인 여태후를 그린 건데 실제 역사에요. 고대사를 다룬 판타지다보니 전쟁장면이 많고 칼 싸움을 하면 팔 다리가 잘리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어요. 그래도 표현을 하는 데는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그립니다. 웹툰은 초등학생도 볼 수 있으니 잔인하지 않게 그리려 합니다.“

그는 ’천국의 신화‘를 가야, 신라와 발해까지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신의 나라‘로 불린 가야와 신라까지 다시 그리고 싶습니다. 신라는 외세를 등에 업고 통일했다고 보죠. 그래도 단일민족 개념이 만들어진 게 통일신라 아닌가요.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을 본다고 하듯이 저 역시 신라인이 후예로서 당시를 그려보고 싶었죠. 가야와 신라의 병합 과정, 삼국통일, 북쪽의 발해까지 다룰 생각입니다. ’천국의 산화‘는 판타지 맞아요. 그래도 작품 통틀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 자부심입니다.“

그의 작업대에는 큰 돋보기가 설치돼 있었다. ”작은 그림 그릴 때는 눈이 아프다. 이게 큰 도움이 된다“며 이 화백은 ”그럼에도 가장 행복하고 컨디션 좋을 때가 그림을 그릴 때“라고 말했다.

”일이 아니라 즐기고 있는 겁니다. 70살이 되면 70살에 맞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손자 손녀들을 위한 이야기가 그릴 수도 있고, 나와 같이 늙어간 사람들을 위로하는 만화가 될 수도 있고 대단한 판타지를 할 수도 있겠죠.“

그는 만화계 후배들과 만화 한류에 대해 조언을 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

”젊은 웹툰 작가들의 다듬어지지 않는 날 것, 즉 신선한 아이디어가 큰 강점이죠. 대자본의 콘텐츠에서는 나올 수 없는 거에요. 다만 혼자 작업하다보니 그림의 밀도, 연출의 보편성이 떨어집니다. 학원물, 로맨스물이 많은 이유죠. 만화 한류요? 답은 퀄리티와 서사에 있습니다. 혼자 그리고 싶으면 2년 정도 작품을 만든 후 6개월 연재하는 거죠. 아니면 한 작품을 내도 여러 명이 협업해서 질을 높이는 거예요. 독립영화사에게 ’어벤져스‘를 기대하진 않잖아요. 글로벌한 콘텐츠가 되려면 수준을 끌어올려야 합니다.“

김윤종기자 zoz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천국의 신화’ 6부 ’봉황의 날개‘에서 주인공 위만이 한나라 여태후에게 독배를 받고 있는 장면. 네이버 제공

‘천국의 신화’ 6부 ’봉황의 날개‘에서 주인공 위만이 한나라 여태후에게 독배를 받고 있는 장면. 네이버 제공

만화가 이현세. 사진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만화가 이현세. 사진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