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본 대지진 1년]<2>‘원전 이산가족’ 마쓰모토 고지 씨의 슬픔과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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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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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생이별 아픔 덜어준 기타… 이젠 이웃을 위해 연주합니다
“일어서요, 모두 함께 간바레”

마쓰모토 씨(왼쪽) 부부 등 세 가족이 만든 밴드 ‘러브 앤드 피스’는 11일 동일본 대지진 1년을 맞아 ‘희망콘서트’를 열기로 했다. 오른쪽 2명은 바로 옆 가설 주택에 사는 멤버 부부.
마쓰모토 씨(왼쪽) 부부 등 세 가족이 만든 밴드 ‘러브 앤드 피스’는 11일 동일본 대지진 1년을 맞아 ‘희망콘서트’를 열기로 했다. 오른쪽 2명은 바로 옆 가설 주택에 사는 멤버 부부.
《 동일본 대지진 이후 1년. 일본에는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34만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11만 명은 원전 사고로 인한 피난민이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생이별을 하고 있는 피난민도 적지 않다. 이들의 하루하루는 고통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고향으로 되돌아갈 그날을 기다리며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원전 사고가 갈라놓은 마쓰모토 고지(松本光二·48) 씨 가족도 그렇다. 》
“얼른 대피하세요. 원전이 폭발합니다.”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에서 10km 떨어진 후타바(쌍葉) 군 히로노(廣野) 마을. 평화로운 이 마을이 아무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마을로 전락한 건 순간이었다.

흰색 방호복과 방독면으로 완전무장한 경찰. 다급함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허겁지겁 집을 나서는 주민들. 길게 늘어선 차량의 행렬…. 인구 5000명의 아담한 시골 도시에서는 낯설기만 한 광경이었다.

지난해 3·11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다음 날인 3월 12일 오전 10시. 3대의 승용차에 나눠 탄 마쓰모토 씨 가족과 부모, 형 가족도 긴 피난 대열에 합류했다. 떠날 때만 해도 마쓰모토 씨는 “2, 3일 후면 돌아오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이날은 고통스러운 1년의 서막이었다.

○ 이산가족이 되다

원전에서 40km 떨어진 이와키(磐城) 시로 대피한 마쓰모토 씨는 당시 긴급 대피소에 모인 주민들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대지진에 이어 원전 폭발 위기라는 초유의 재앙을 연거푸 겪은 주민들. 모두 입을 굳게 다문 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마쓰모토 씨는 “최고의 안전과 신뢰를 자랑하는 일본의 원전이 터지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시간 후쿠시마 제1원전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규모 9.0의 강진과 15m의 지진해일(쓰나미)에 전력공급 시스템이 망가진 후쿠시마 제1원전 1∼4호기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원자로는 벌겋게 달아올라 방사성물질이 잔뜩 녹은 냉각수는 졸아붙었고 원자로는 수소가스로 차올랐다. 결국 이날 오후 3시 36분 첫 번째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더 멀리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이날 밤 마쓰모토 씨 가족은 긴급회의를 열었다. 나머지 원자로도 조짐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에 결국 다시 피난길에 오르기로 결정했다. 부모는 도쿄(東京)에 있는 마쓰모토 씨 이종사촌 집으로, 형 가족은 사이타마(埼玉)에 있는 친구 집으로, 마쓰모토 씨 가족은 가나가와(神奈川) 현의 처가로 뿔뿔이 흩어졌다.

일단 살자고 피했지만 얹혀사는 신세가 편할 턱이 없었다. 마쓰모토 씨의 부모는 한 달도 안 돼 살던 집에서 가까운 이와키 시 가설주택으로 돌아왔다. 마쓰모토 씨 가족이 살던 히로노 마을은 아직 방사선 수치가 높아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이다. “집에는 갈 수 없어도 집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싶다”는 부모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얼마 뒤 마쓰모토 씨도 부인 미키에 씨와 두 딸을 남겨두고 이와키 시로 돌아왔다. 마쓰모토 씨가 일하던 회사 공장이 재가동을 결정한 데다 노부모를 더는 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에게 미안하지만 160명의 종업원을 책임져야 하는 공장장으로서의 책임감도 무시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 5개월 만에 다시 찾은 집

집을 떠난 지 5개월여 만인 지난해 8월 20일. 경계구역 내에 들어갈 수 있는 임시귀가 조치가 내려졌다. 엉겁결에 집을 떠난 피난민들이 집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챙겨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2시간뿐이었다.

10년 넘게 산 집이 그리 낯설 수가 없었다. 여느 해 같았으면 탐스러운 꽃과 싱그러운 풀로 가득했을 마당 정원은 어른 키 높이만큼 자란 풀로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감상에 빠질 겨를도 없었다. 마쓰모토 씨는 닥치는 대로 물건을 챙겼다. 부부와 두 딸의 옷을 한가득 자루에 우겨넣고 마지막으로 가족 사진첩을 챙겨 넣었다. 열쇠를 잠그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억울했습니다. 서러웠어요….”

마쓰모토 씨는 처음에 원망도 많이 했다.

“후쿠시마 원전은 모두 도쿄에 사는 사람을 위한 것이에요. 우리가 쓰기 위한 전기를 생산한 것도 아닌데 왜 우리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지요?”

사고 직후엔 원전 직원을 보기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한동네 가족이기도 했다. “모두 친구고 조카고 이웃주민들이에요. 하지만 원전 폭발사고 이후 이들은 모두 죄인이 돼버렸어요. 여기 가서 빌고 저기 가서 굽실거리고…. 정부가 주도해서 벌인 사업 아닙니까. 그런데 정작 손 비비고 죄인 취급을 당하는 건 마을 사람들이에요.”

이제는 미움을 거둬들이기로 했다는 마쓰모토 씨는 최근 후쿠시마 제2원전을 재가동하려는 도쿄전력의 움직임에 대해서만큼은 단호했다. 그는 “제2원전이 가동되면 마을 주민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며 “고향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원전은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 없다


마쓰모토 씨가 힘들고 고된 피난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부인 미키에 씨와 함께하는 밴드 활동 덕분이다. 중학교 때부터 취미로 전기기타를 연주해온 마쓰모토 씨는 6년 전 동네 친구들과 함께 7인조 밴드 ‘러브 앤드 피스(Love&Peace)’를 만들었다. 한 달에 한 차례 정기적으로 콘서트를 열었지만 원전 사고 후 활동이 중단됐다.

하지만 멤버들은 지난해 여름부터 다시 모여 활동을 재개했다. 이전까지는 자신을 위한 취미 생활이었지만 지금은 힘들고 지친 피해 주민을 위해 노래 봉사를 하고 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는 피난 생활 후 처음으로 부흥 콘서트를 열었다. 마쓰모토 씨는 “밴드 활동을 재개하면서 우리가 힘을 얻었듯이 이제는 이 에너지를 남들을 위해 쓰고 싶다”고 했다.

11일에는 동일본 대지진 1년을 맞아 이와키 시의 하와이안스라는 대형 리조트에서 희망콘서트를 열기로 했다. 마쓰모토 씨는 콘서트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를 작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외칠 것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 되돌아가는 그날까지 힘을 내자고. 그리고 그날을 위해 건배를 하자고. 현실은 힘들지만 우리는 즐거운 피난민이라고.”
▼ 마쓰모토 씨 아내 미키에 씨의 ‘思夫曲’ ▼
“일 때문에 위험지역 남은 남편 생각하면 하루에 열두번도 더 달려가고 싶지만…”


일본 가나가와 현 아야세 시의 친정집에 머물고 있는 미키에씨(오른쪽)와 장녀 에리호 씨가 집 근처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피난 생활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있다.
일본 가나가와 현 아야세 시의 친정집에 머물고 있는 미키에씨(오른쪽)와 장녀 에리호 씨가 집 근처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피난 생활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있다.
“일 때문에 위험한 곳에 남아있는 남편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요”

가나가와(神奈川) 현 아야세(綾瀨) 시에서 동아일보 기자를 만난 마쓰모토 씨의 부인 미키에 씨는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눈물을 훔쳤다. “남편과 같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앞길이 창창한 두 딸을 생각하면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요. 방사능 수치가 많이 떨어졌다고 해도 불안해요.”

남편에 대한 미안함, 부모로서의 책임….

미키에 씨의 마음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흔들린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방 2칸짜리 가설주택에 살고 있는 남편을 생각하면 한시도 맘이 편하지 않다. 마쓰모토 씨 부부는 결혼 생활 24년 동안 한 번도 떨어져 산 적이 없다. 이산가족이 된 지 1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도 생이별이 낯설기만 하다.

아내의 친정으로 피난온 지 한 달 만에 회사일 때문에 이와키 시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쓰모토 씨의 말을 들은 미키에 씨와 두 딸은 아연실색했다. 두 딸은 “아빠는 바보” “이런 아빠가 어딨냐”고 말렸지만 결국 자기 일에 충실하려는 아빠의 책임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언제쯤 집에 갈 수 있을까요?” “아마 영원히 돌아가지 못하겠지요?” 미키에 씨는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듯 고개를 젓는다. 큰딸 에리호 씨(21)의 두 눈도 붉어졌다. 에리호 씨는 “지금도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면 우두커니 앉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할 때가 있다”며 “방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한가하게 보내는 꿈을 꾸곤 해요. 꿈속에서라도 집을 볼 수 있으니 다행인지 몰라요”라고 말했다.

미키에 씨는 노후와 미래를 생각하면 답답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부부는 아이들을 키우고 노후에도 부부가 함께 보낼 보금자리를 위해 건축비만 5000만 엔이 넘는 거금을 들여 집을 지었다. 은행에서 받은 대출금만도 2600만 엔. 앞으로도 10년 동안 다달이 갚아나가야 한다. 하지만 현재 살지도 못하고 앞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빚을 갚아나가는 게 아깝기만 하다. 그는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살길이 막막한데 정부의 지원대책은 더디기만 하다”며 불평을 쏟아냈다.

피난민들은 언제쯤이면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갈 수 있는 기준을 충족하려면 방사능 수치가 시간당 1FSv(마이크로시버트)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경계구역 내의 방사능 오염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방자치단체와 원전 당국이 물을 뿌려 방사능 오염물질을 씻어내는 제염 작업을 하고 있지만 바람이나 비 등 기후 변화에 따라 방사능 수치는 들쑥날쑥하다. 이 때문에 지자체가 조만간 귀촌 선언을 한다고 해도 실제로 주민이 돌아오기까지는 상당 기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글·사진 이와키=김창원 특파원 changkim@donga.com  
아야세=김창원 특파원 cha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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