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비교릴레이]운명과 싸우는 소녀전사들

  • 입력 2000년 11월 8일 17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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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샤르휘나'(왼쪽)와 '사라사'
▲'레 샤르휘나'(왼쪽)와 '사라사'
<아르미안의 네 딸들> 레 샤르휘나 vs <바사라> 사라사

초대형 세트와 해외 로케이션이 없이도 만화는 때로 영화 못지 않은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만화책에만 고정시킨다면 두 페이지를 가득 메우는 전쟁 신이나 사막 위에 세워진 고대 도시의 방대함 속으로 즐겁게 빠져들 수도 있을 것이다.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과 타무라 유미의 <바사라>는 '사랑과 모험의 대서사시'나 '환상적인 전쟁 스펙터클'이란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대작이다. 방대한 스케일과 독특한 등장인물들은 중국의 고전 삼국지 못지 않다. 다른 게 있다면 주인공이 나이 지긋한 아저씨 영웅이 아니라 십대 후반의 소녀 전사들이란 것.

'외길을 걷는 인간은 미래를 모른다.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는 구절로 많은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완결까지 10여년이 걸린 신일숙의 역작으로 대원문화출판사에서 14권으로 완간됐다. 페르시아와 고대 그리스가 지중해 연안을 장악하고 있던 기원전 5세기, 대대로 '레 마누'라 불리는 여왕이 통치해 온 아르미안이란 가상국가가 배경이다. 고국에서 추방당한 아르미안의 넷째공주 레 샤르휘나가 인도, 그리스, 페르시아를 방랑하며 많은 신과 인간들을 만나 겪는 모험이 만화의 줄거리다. 작가 신일숙은 그리스 신화와 당시의 실제 역사를 교묘하게 결합하여 환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었다.

서울문화사에서 27권으로 완간된 타무라 유미의 <바사라>는 현대문명이 폐허가 된 미래 어느 시점, 국토 대부분이 사막으로 변한 일본이 배경이다. 무능한 왕이 민생을 도탄에 빠뜨릴 무렵, 백성들은 '운명의 아이'라 불리는 백호마을의 소년 타타라가 자신들을 구해주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국왕의 아들이자 일본 서부를 다스리는 적왕(赤王) 슈리는 마을을 습격해 타타라의 목을 친다. 타타라의 쌍둥이 여동생 사라사는 오빠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키나와로부터 홋카이도까지 일본 전역을 누비며 동지들과 함께 수많은 전쟁을 치르게 된다.

금발의 앳된 소녀 레 샤르휘나와 사라사는 둘 다 마음이 여리면서도 고집 세고 당찬 성격을 가졌다. 어찌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이들은 너무나도 특별한 운명을 타고 났기에 늘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서게 된다. 팔자가 세다고나 할까.

레 샤르휘나는 여왕이 되고 전쟁을 일으킬 운명을 타고난다. 그녀가 아르미안에서 추방당한 것도 자신의 왕권이 흔들릴 것을 염려한 큰 언니 레 마누아 때문. 그녀가 고국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불새의 깃털'을 찾아야만 하는데 험난한 여정을 겪으며 '전사'로 거듭난다. 레 샤르휘나는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자신의 운명 때문에 끊임없이 갈등한다.

사라사는 복수를 위해 '운명의 아이'였던 오빠 타타라를 대신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전사가 되어 각지의 민중을 이끌고 전쟁을 일으켜 왕국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사라사는 자신이 진짜 '운명의 아이'였던 오빠를 사칭하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한다.

둘은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맞서 싸우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운명이 예견한 삶을 살게 된다. 레 샤르휘나는 운명대로 여왕이 되지만 아르미안은 페르시아와의 힘겨운 전쟁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낸다. 사라사는 자신이 오빠의 운명을 대신한다고 생각했지만 뒤늦게 진짜 '운명의 아이'는 자신이었음을 알게 된다.

'전사'로서 이들의 주무기는 검. 레 샤르휘나는 물의 여신 라아나로부터 받은 전설의 검 '물의 검'을, 사라사는 일찍이 할아버지가 일본 국왕에게서 훔쳐냈던 '백호보검'을 쓴다. 그런 보검들 덕분인지 이들은 별다른 검술 연습을 하지 않고도 탁월한 실력을 구사한다. 샤르휘나는 역사상 실재하는 페르시아 전쟁에 참전하여 한 칼에 두명씩 해치우고, 사라사는 신들린 듯 칼을 휘둘러 열명이 넘는 산적떼를 소탕한다.

운명적인 삶을 사는 이들에게 운명적인 사랑은 필수. 공교롭게도 레 샤르휘나와 사라사는 연인들끼리도 닮아 있고, 처음 만나는 장소도 같다.

레 샤르휘나의 연인은 전쟁과 파멸의 신 '에일레스'. 짙은 흑발에 냉혹한 눈초리를 가진 그가 아르미안의 사막에서 처음 레 샤르휘나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은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오마 샤리프가 등장하는 신과 닮아 있다.

사라사의 연인은 적왕 슈리. 역시 흑발의 슈리는 인간이지만 에일레스 못지 않게 전쟁과 파멸을 몰고 다니는 카리스마형이다. 이 커플도 사막에서 처음으로 조우하고, 서로 적인 줄 모르고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 황홀한 하룻밤을 보낸 며칠 후 이들이 전장에서 대면하여 서로의 정체를 확인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레 샤르휘나와 사라사가 자신들의 거창한 운명 때문에 모두로부터 보호받고, 사소한 일들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여러 훌륭한 조연들을 차례로 사지에 내모는 것을 보면 왠지 얄밉다. 그 얄미움이 극에 달하는 건 근사한 남자 조연이 결국 보답 받지 못한 사랑을 하고 죽어갈 때다.

두 편은 모두 '금발의 여주인공. 그녀가 사랑하는 흑발의 남자주인공. 그녀를 사랑하는 금발의 남자 조연이라는 순정만화의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신마(神馬) 류우칼시바의 정령 미카엘은 레 샤르휘나를 위해, 유목민 출신의 아게하는 사라사를 위해 귀중한 자신의 생명을 버린다. 개인적으로 아게하가 죽는 장면은 삼국지에서 관운장이 운명을 다했을 때 못지않게 안타까왔다. 왜 임자가 따로 있는 여주인공 때문에 사랑고백도 한번 제대로 못한 채 목숨을 버리는지, 마음 아픈 걸로 모자라 '억울한' 심정까지 든다.

아무리 바빠도 신문에 실린 오늘의 운세를 확인하고, 첨단 기술의 총아인 컴퓨터로 어울리지 않게 사주를 보는 현대인들. 그만큼 현대인들은 지루한 일상 속에서 '운명'이라 부를만한 드라마틱한 것들을 기대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아무리 기다려도 '운명'이 오지 않는다면 동네 만화방에라도 가보는 게 어떨까.

이재연 <동아닷컴 객원기자> skiola@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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