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67>

  • 입력 2009년 8월 26일 14시 11분


앨리스가 열기를 피해 버둥거렸다. 그러나 손발을 묶은 줄은 그녀를 3미터 이상 물러나지 못하게 했다.

"이 개새끼들! 죽일 놈들!"

앨리스가 뒹굴며 욕을 퍼부었다. 불길은 벽을 타고 진열장에 옮겨 붙었다. 넘실대는 불꽃 속에서 해골들이 부서졌다. 몸부림치던 앨리스가 고개를 돌려 사라를 살폈다. 사라는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채 고요히 앉아 있었다.

"뭐하는 거야? 참선이라도 하며 죽겠다는 거야? 사방이 불꽃이야. 우린 죽어. 우린 여기서 곧 죽는다고."

사라가 눈을 뜨고 앨리스에게 물었다.

"둘 다 죽으면 복수는 누가 해요?"

"무슨 소리야? 끝까지 복수 타령이야? 죽고 나면 다 끝이라고."

앨리스는 허리를 일으켜 앉으려다가 줄이 엉켜 바닥에 어깨부터 찧었다.

"아얏! 정말 미치겠네."

사라는 오른 손으로 왼 손등을 당겼다. 수갑처럼 줄이 손목을 묶었지만 손을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뭘 하려고?"

사라는 대꾸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왼손을 꺾기 시작했다. 투둑! 손목 관절 꺾이는 소리가 들릴 만큼, 360도 한 바퀴를 완전히 돌렸다.

"미쳤어?"

자연몸이든 기계몸이든 조금의 상처도 내지 않으려고 아껴왔던 사라가 아니던가. 기계몸 비율이 88퍼센트가 된 후로는 매사에 조심조심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스스로 손목을 꺾어 관절을 파손시켰다. 사라가 다시 한 번 팔목을 돌려 꺾은 다음 앨리스를 향해 축 늘어진 왼손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불꽃은 더욱 가까이 밀려들었다. 천장에서 둥근 통나무들이 불을 품은 채 쿵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나무에 정통으로 머리를 맞으면 화상을 입기도 전에 저승 구경을 할 참이다.

사라가 다시 오른손으로 왼 손등을 쥐었다. 턱을 들고 깊게 숨을 두 번 들여 마신 다음, 고개를 숙여 양손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단숨에 오른손으로 왼손을 비틀어 당겨 뽑았다. 왼손이 티틱 피부가 터지면서 뜯겨나갔다. 왼팔이 결박에서 풀린 것이다.

"으윽!"

사라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쓰러져 이마를 바닥에 마구 쳐댔다. 앨리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독종! 그래봤자 오른팔과 두 발은 여전히 묶여 있어. 괜한 자해 하지 마."

사라가 고개를 번쩍 들고 오른손을 뻗어 두 발을 쓰다듬었다.

"사라! 하지 마. 제발. 하지 말라고!"

앨리스가 소리를 질러댔지만, 사라의 손놀림은 빠르고 주저함이 없었다. 왼발부터 비틀어 돌려 뽑고 오른발도 마저 뜯어냈다. 이제 줄에 묶인 것은 오른팔뿐이었다.

"어쩌려고……? 사라!"

앨리스가 울먹였다.

사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불타는 통나무가 그녀의 코앞에 떨어졌다. 다른 통나무들도 불길에 휩싸여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사라는 몸을 굴려 2미터 쯤 전진한 후 오른팔을 쭉 뻗었다. 통나무가 사라의 오른 팔목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우직 소리가 났지만, 팔목이 잘리지는 않았다. 사라는 고통을 참으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두 눈을 똑똑히 뜬 채, 떨어지는 통나무 아래로 너덜거리는 오른 팔목을 집어넣었다.

"으윽!"

기계팔목이 부서지면서 손이 공처럼 튕겨나갔다.

결박을 완전히 푼 사라가 등으로 기어 앨리스에게 갔다. 그리고 뜯겨나간 기계팔의 날카로운 부품 조각들로 앨리스를 묶고 있는 줄을 하나하나 끊었다.

"사라!"

앨리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라를 들쳐 업었다. 그리고 힘껏 불타오르는 출입문을 향해 내달렸다. 출입문 밖으로 나서는 순간, 원숭이 꼬리가 허공에서 날아 내렸다. 원숭이 꼬리에게 발길질을 당한 앨리스와 사라가 다시 통나무집 안으로 나뒹굴었다. 원숭이 꼬리도 출입문을 넘었다.

"못 나가. 못 나가."

원숭이 꼬리가 단검을 뽑아 들고 앨리스의 목을 내리찍으려는 순간, 사라가 몸을 굴려 앨리스의 등을 덮었다. 칼끝이 사라의 목덜미를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불타는 통나무가 원숭이 꼬리의 정수리로 떨어졌고, 뒤이어 지붕 전체가 그들을 덮쳤다.

같은 시각, 통나무 집 한 채가 더 전소되었다. 두 집을 가득 채웠던 기기묘묘한 물품들은 잿더미로 바뀌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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