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65>

  • 입력 2009년 8월 24일 14시 05분


상상도 힘이 될 때가 있다.

어떻게 빠져나가느냐는 앨리스의 질문이 허공을 떠돌다가 사라졌다. 사라로서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답을 하지 않았다.

“으음!”

앨리스는 신음을 삼켰다. 뜯겨 나간 오른 팔뚝에서부터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어깨를 타고 턱까지 밀려 올라왔던 것이다. 후덥지근한 여름이지만, 그녀의 오른팔은 북극 얼음 바다에 빠진 듯했다.

“똑바로 앉아보세요. 가부좌를 틀면 좋은데 두 발이 묶였으니 무릎을 꿇죠. 어깨는 꼿꼿하게 세우고.”

“무릎을 꿇고 어깨를 세우라고요?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럽니까?”

사라가 먼저 무릎을 꿇고 어깨를 세웠다.

“벌벌 떨다가 심장이 멎고 싶은가요? 싸워야죠. 냉기 따위에 굴복해선 안 되죠.”

88퍼센트 기계몸인 사라에겐 냉기와 싸우는 일이 익숙한 모양이다. 앨리스는 사라의 경험을 믿어보기로 했다. 특별히 몸을 따듯하게 만드는 비법이라도 있는가.

“눈꺼풀을 천천히 내리세요. 그리고 꼼짝도 하지 않는 겁니다. 미세한 움직임도 그치세요. 온몸에 긴장을 풀고,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으세요.”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것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냉기가 더욱 빠르게 이마까지 치고 올라왔다. 앨리스는 실눈을 뜨고 사라를 살폈다. 사라는 정말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

“가장 뜨거웠던 순간을, 혹은 가장 뜨거우리라 여겨지는 순간을 지금부터 상상하는 겁니다. 냉기가 밀려올라오는 형사님의 오른팔에 그 뜨거움을 얹는 겁니다. 저는 10년 전 도반들과 종주했던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가렵니다. 작열하는 태양, 후끈거리는 모래,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턱턱 숨이 막히지요. 남 형사님도 해보세요.”

앨리스는 처음엔 횃불을 떠올렸다. 어둠을 사르며 활활 타오르는 불꽃.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횃불은 뜨겁지 않았다. 가까이 불꽃을 키워 오른팔에 갖다 댔는데도…… 오히려 차가웠다.

그 다음으로 떠올린 것은 화산이었다. 용암이 흘러 숲을 태우고 검은 재들이 하늘을 뒤덮는 상상. 그 용암에 오른팔을 넣는 순간은 따듯했다. 그러나 곧 용암 위로 눈이 내리고 푸른 강이 흘렀다. 이번에도 실패였다.

앨리스는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상상해보기로 했다. 무릎이 저려왔고 허리도 당겼다. 눕고 싶었다. 그때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은석범 검사였다. 앨리스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은 검사를 상상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은 검사와의 뜨거운 한 때라니?

석범은 단정하고 예의 바르고 때론 따듯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앨리스가 한 걸음이라도 다가서려 하면 공식적인 대화로 분위기를 바꿨다. 그렇다고 다른 여자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스티머스를 만든 후로는 특별시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살인마를 잡는 일에만 집중했다. 취미도 특기도 없었다. 휴가도 출장도 없었다. 석범이 일에 미쳐 돌아갔기 때문에, 대뇌수사팀원도 모두 워크홀릭으로 변해갔다. 남앨리스는 물론이고 성창수와 지병식도 개인 생활을 포기했다. 하루하루 긴장의 연속인 나날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연애는 불가능했다. 석범은 아예 연애 감정을 돌돌 싸서 쓰레기통에 처넣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 검사와 입맞춤을 나눈다면…… 스티머스 앞이 가장 짜릿하리라. 외부와의 교신 자체가 단절된, 피살자의 마지막 기억을 찾아내던, 분노와 안타까움이 뒤섞인 곳에서 입을 맞춘다면? 그리고 그의 입술이 턱과 목덜미를 지나고 그의 혀가 오른쪽 어깨와 쇄골을 핥고 팔꿈치에 닿는다면? 뜨거울 것이다. 내 몸은 스스로 뜨겁게 타올라 그의 입술과 혀에 답할 것이다.

냉기가 서서히 밀려갔다. 뜯긴 오른 팔꿈치를 지나서 존재하지 않는 팔목과 다섯 손가락까지, 오래 전에 식은 피가 따듯하게 도는 듯했다.

“휴우!”

그리고 더운 숨이 흘러나왔다.

“성공하셨군요. 축하해요.”

사라의 목소리가 방울처럼 딸랑거렸다. 앨리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순간, 출입문이 열리고 원숭이 꼬리가 앞발로 바닥을 쓸며 뛰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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