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01>

  • 입력 2009년 5월 26일 13시 25분


앨리스는 달렸다.

미친 듯이 잘 뛴다고 해서, 보안청 형사들은 그녀를 '앨리스 런'이라고 불렀다. 석범은 20세기에도 그녀처럼 잘 뛰는 여자가 있었고 그녀의 이름은 롤라였으며 그녀를 기리는 영화 제목이 '롤라 런(Lola Rennt)'이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나 30미터도 달리지 못하고 앨리스는 멈춰야만 했다. 갈림길이었다. 두 갈래도 아니고 다섯 갈래 길! 어느 길에서 들려온 총성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무턱대고 뛰어들었다가는 엉뚱한 방향으로 영영 빠져든다. 귀를 기울였다.

탕.

기다렸다는 듯이 총성이 울렸다. 눈앞의 다섯 갈래 길이 아니라 등 뒤에서 나는 소리다. 앨리스는 뒤돌아서서 달렸다.

"앨리스 런!"

"달려 앨리스!"

창수와 병식의 응원 소리가 귓가에 쟁쟁거렸다. 앨리스는 해마다 보안청이 주최하는 마라톤 대회에서 남녀 통틀어 3년 연속 1등을 했다. 구식 자전거를 타고 출발점부터 도착점까지 그녀를 응원한 이가 바로 창수와 병식이었다.

다시 갈림길이 나왔다. 이번에는 다행히 두 갈래다.

앨리스는 좌우 길을 한 차례씩 노려보았다. 자신의 감(感)을 믿고 50퍼센트의 확률에 기대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왼쪽!

앨리스가 더 좁은 왼쪽 길로 달려 들어갔다.

굴이 더욱 작아지며 심하게 휘었지만 더 이상 갈림길은 나오지 않았다. 휘는 곳마다 낡은 천이 커튼처럼 내려와 있었다. 어깨를 움츠리고 허리를 숙이며 커튼을 하나씩 젖혔다. 더러운 식기와 썩은 음식, 구멍이 송송 뚫린 천과 찢어진 책들. 분명히 지난밤에도 머문 흔적이 남았지만 사람은 없었다. 총성을 듣고 놀라서 다들 숨어버렸는지도 몰랐다.

앨리스는 푸른 천 앞에서 다시 걸음을 멈췄다.

"끄응 끄……."

신음 소리가 천 밖으로 새어나왔기 때문에, 천을 집어 걷어내려다가 잠시 멈췄다.

"끙!"

다시 앓는 소리가 나는 순간 커튼을 휙 젖히고 총을 들이댔다. 총구를 향해 머리를 내민 것은 사람이 아니라 불독 강아지였다. 개목걸이에 쇠줄이 단단히 묶인 탓에 총성을 듣고도 달아나지 못한 것이다.

"참 내! …… 휴우, 이리 와. 착하지."

앨리스는 맥이 탁 풀린 듯 한숨을 내쉬며 강아지를 끌어안았다.

쿠쿵!

그 순간 천장이 뚫리면서 주먹만 한 쇠공 두 개가 연이어 떨어졌다. 항상 고개를 들 것! 행동 수칙을 잠시 잊은 것이 문제였다. 재빨리 몸을 돌린 앨리스는 무사했지만 쇠공을 머리와 등에 맞은 강아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죽었다. 천장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지만, 찬바람만 쌔앵 불어내릴 뿐이다. 머리가 터지고 등이 부러진 채 즉사한 강아지의 시신을 보며 앨리스가 욕을 삼켰다.

"이 새끼들을 그냥 콱……."

탕!

다시 총성이다. 앨리스는 달렸다. 앨리스 런!

치지익, 칙.

동굴을 밝히던 전깃불이 일제히 꺼졌다. 불빛이 사라지자 암흑 천지였다. 앨리스는 비상용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켤 수 없었다. 이 어둠 속에서 빛을 뿜는 것은 날 향해 총을 쏘라는 표시와 다르지 않았다.

왜 갑자기 정전이 되었을까? 우연일까? 아니다, 이건 날 노리는 거다. 낯선 동굴에서 빛조차 사라진다면, 유리한 건 녀석이다. 함정을 파고 날 기다리겠지. 이건 백퍼센트 내게 불리한 싸움이다. 녀석은 이 동굴을 구석구석 알고 나는 오늘이 첫 걸음이니까. 이대로 물러나는 것 역시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왔던 길 어딘가에 이미 함정을 팠을 수도 있으니까. 어렵더라도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뛰지는 말고 천천히 그래 천천히!

천천히, 귀를 쫑긋 세우고 걸었다.

두 번 왼쪽으로 꺾고 세 번 오른쪽으로 꺾었다.

이마에 땀을 닦고 다시 왼쪽으로 꺾는 순간, 누군가 앨리스의 허벅지를 세게 걷어찼다. 천연다리였다면 중심을 잃고 쓰러졌겠지만 기계다리인 탓에 앨리스는 움찔 허리를 뒤튼 후 곧바로 주먹을 뻗었다. 그리고 살쾡이처럼 뛰어올라 뒤엉켰다. 상대의 가슴과 옆구리를 계속 무릎으로 찍으면서 왼 주먹으로 턱을 후려쳤다. 그리고 왼 어깨를 움켜쥐는 순간, 상대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앨리스가 어깨를 쥔 손에 힘을 빼며 물었다.

"지, 지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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