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69>

  • 입력 2009년 4월 12일 12시 46분


제15장 87퍼센트 인생

69회

특별시는 잠들지 않는 도시다.

인간에게는 최소한 하루 4시간의 수면이 필요했지만, 로봇은 365일 내내 깨어 있어도 피로를 몰랐다. 공장도 은행도 극장도 24시간을 꽉꽉 채워 최고의 이익을 추구했다. 21세기 초에는 시민들이 잠든 동안 로봇이 그 공백을 메우니 좋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2049년 지금 로봇의 한결같음은 시민들의 수면 체계 자체를 바꿔버렸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자는 보편적인 질서를 따르는 인간이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자리를 지키면서 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로봇이 떠맡은 후로 인간은 시간 단위가 아니라 업무 단위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인 투 파이브(9 to 5)'니 '세븐 투 투웰브(7 to 12)'니 하는 말은 전설이 되었다. 같은 회사 같은 부서에 몇 년을 근무해도 같은 사무실에서 마주 보고 앉아 회의할 일이 없었다.

근무 시간이 한 시간이든 열 시간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일을 마친 때가 낮이든 밤이든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일을 집에서 혼자서 하든지 공원에서 친구들과 하든지 그것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많은 '중요함'이 사라지자 특별한 '자유로움'이 부여되었다. 3분의 1은 예전처럼 낮에 일하고 밤에 잠들었지만, 나머지 3분의 2는 원할 때 일하고 원할 때 잠들었다. 저녁 7시 북적이는 번화가는 새벽 5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건강을 위해 도심 공원을 달리는 시간도 따로 없었다. 아침에도 달리고 낮에도 달리고 저물녘에도 달리고 밤에도 달렸다. 특별시는 잠들지 않고 달리는 도시였다.

특별시의 중심을 좌우로 관통하는 한강은 달리기 코스로 오랫동안 사랑 받아왔다. 제각각 다른 테마를 가진 12개의 인공섬이 만들어지고, 그 섬이 날개를 펴듯 구름다리로 강의 남북을 잇자, 한 쪽으로만 달리던 지루함도 사라졌다. 12개의 섬을 놓고 시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달리기 코스를 설계했다.

"인공섬 세우고 구름다리 놓으면 뭣 하나? 앞만 보고 질주하는 고집쟁이들에겐 그게 그건데."

오후 3시 서사라가 '지중해'라고 불리는 '인공섬 5'를 지날 때부터 앨리스는 줄곧 뒤따라 달렸다. 앨리스는 보안청에 소속된 남녀 형사를 통틀어 달리기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준족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달려도 자꾸 거리가 벌어졌다. 대부분의 특별시민은 인공섬들이 펼쳐 보이는 열두 가지 색다른 풍광을 즐기며 구름다리를 건너기도 하고 반대 편 강변을 기웃댔지만, 사라는 오로지 달리는 것 자체에만 집중하였다. 앨리스가 두 팔을 더욱 높이 휘저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혼잣말을 지껄였다.

"완쾌되긴 했나 보군. 폭주기관차가 따로 없어."

'잉카'라고 불리는 '인공섬 12'에 이르러서야 사라는 달리기를 멈췄다. 4분 13초 후에 도착한 앨리스가 격한 숨을 토하고 물을 마시는 동안 사라는 가볍게 품을 밟으며 활개짓을 했다.

"'달빛마을'엔 왜 한 번도 오지 않는 겁니까?"

바디 바자르가 폭파된 뒤 보안청은 테러 피해자들을 위한 임시 숙소를 달빛마을에 마련했다. 앨리스는 달빛마을에 배정된 사라의 낡은 아파트 앞에서 잠복했지만 헛수고였다. 글라슈트 팀을 찾아갔지만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배틀원 2049' 16강전이 코앞인데 어딜 갔느냐고 물었다. 글라슈트를 눕혀놓고 부품을 교환하느라 바쁜 꺽다리 세렝게티와 뚱보 보르헤스는 자신들도 그녀의 행방을 몰라서 수소문하는 중이라고 짧게 답했다. 시합을 앞두면 열흘이든 한 달이든 글라슈트와 함께 일어나고 글라슈트와 함께 눕는 이가 바로 로봇 트레이너 서사라였다. 한숨을 내쉬며 체육관을 나오는데, 세렝게티가 흘리듯 한 마디 보탰다.

"답답해서 그럴 겁니다. 16강전까진 경기장에 오지 말라는 주최 측의 권유가 있었거든요. 말이 권유지 금지 명령이죠.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테러를 예방하는 차원이라네요. 서 트레이너는 아프고 힘들수록 더 몸을 격하게 놀린답니다. 그래야 기계몸이 말을 듣는다나 어쩐다나. 사자 머리를 질끈 묶고 질주하는 블랙 러너를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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