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32>

  • 입력 2009년 2월 18일 13시 18분


"우연일 겁니다."

앨리스가 솔방울만한 선지를 한 숟갈 퍼 올렸다. 맞은편에 앉은 성창수와 지병식은 선지를 한 쪽으로 몬 후 뜨거운 국물부터 훌훌 마셨다.

북한산 동쪽 끝자락 도깨비빌딩 지하 11층에 자리 잡은 해장국집 <흙>은 대뇌수사팀의 단골 식당이었다. 스티머스를 가동한 날에는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흙>에 모였다. 5대 째 선지해장국만 판다는 주인 노파의 주장에 따르자면, 원래 <흙>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여의도 20층 빌딩의 9층과 10층을 썼다고 한다. 2040년부터 가축의 피를 날것이든 익힌 것이든 요리하여 파는 일 자체가 불법이 된 후 선지 해장국집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지하 10층 이하에 숨어 알음알음 찾아오는 손님만 받았다.

특별시 정부에서는 이들의 불법 영업을 알고도 모른 체했다. 위생청의 단속 대상 요리는 삼천 개가 넘었다. 올해도 무려 일흔 두 개 요리가 불법 유해 식품 리스트에 올라왔다. 특별시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조처였지만, 단속 업무를 총괄하는 위생청 으로서는 벅찬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하나 박멸하는 최선책보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내는 차선책을 썼다.

엘리베이터로 들어서면 속도감을 느끼기도 전에 군침부터 돌았다. 지하에서 솔솔 올라오는 음식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 것이다. 지하 10층에 내려 침침한 형광등 불빛을 따라 한 층 더 계단을 내려갈 때는 범인을 쫓을 때보다도 걸음이 더 바빴다.

펄펄 끓는 선지 해장국을 보고도 숟가락을 들지 않은 이는 석범뿐이다.

"우연이 아니야."

석범은 개꼬리의 붉은 기억을 검토한 후 자신이 뱉었던 말을 뒤집었다. 앨리스가 볼에 선지를 머금은 채 따지듯 말꼬리를 잡아챘다.

"우연이 아니면요? 우연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뱀눈에 광대뼈가 튀어나와서, 형사라기보다는 범죄자에 가까운 인상을 풍기는 창수가 수첩을 꺼내 폈다.

"사체에서 머리가 없는 살인 사건만 찾아 봤습니다. 지난 9년 동안 서른 건, 올해도 꽃 벌판 사체까지 합쳐 세 건입니다."

"비슷한 사건이 해마다 있었군요. 그럼 우연일 수도 있겠습니다 정말."

앨리스가 자기 식대로 풀었다. 석범이 창수의 수첩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성 형사님! 그 서른세 건 중에서 두개골을 쪼개고 뇌를 꺼낸 후 다시 두개골을 맞춘 사건은 몇 건이나 됩니까?"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양 볼이 뭉툭하게 늘어져서 복어를 닮은 병식이 창수를 거들었다.

"특이한 사건이긴 하지만, 정말 우리를 겨냥한 걸까요?"

세 형사의 시선이 석범에게 향했다. 석범은 즉답 대신 그릇을 들고 선지 국물을 삼켰다. 따뜻하고 비릿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갑자기 카페 UFO에서 만났던 노민선의 퉁퉁 부은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 다투고 헤어졌으니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우연인 경우는 논의할 가치도 없습니다. 우연이 아니라면 범인은 곧 다시 움직일 겁니다."

"다시 움직인다면?"

"대담한 놈입니다. 숨어 달아나지 않고 우리에게 시비를 걸고 조롱한 격이니까요. 답답한 사실은 그때까지 우리가 특별히 할 일이 없다는 겁니다."

침묵이 찾아들었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앨리스가 말머리를 돌렸다.

"근데 성 선배, 지 선배 혹시 그거 알아요? 연쇄살인마들은 보통 사람과 뇌가 다르답니다."

"정말?"

창수의 눈이 작아졌다. 의심 많은 사내였다.

"속고만 사셨나?"

앨리스가 선지 한 덩이를 천천히 떠서 창수의 코끝까지 들어올렸다.

"잘 보세요. 요걸 연쇄살인마의 뇌라고 칩시다. 그럼 여긴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전전두엽이겠죠? 연쇄살인마는 이 부분이 손톱만큼 작아요. 중요한 판단을 내릴 때 여길 거의 안 쓴다고 보면 되요. 한데 감정을 나타내는 편도체와 저쪽 소뇌는 정상인보다 훨씬 크죠. 종합해보자면, 감정 반응은 정상인보다 민감하지만 그걸 억제하는 이성은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겁니다."

"전전두엽, 그 뇌의 앞부분이 도덕적인 판단도 내린다고 하지 않았어?"

병식이 물었다.

"맞습니다. 때문에 연쇄살인마는 자신이 저지른 흉악한 범행에 대한 도덕적인 고민이나 판단 자체가 힘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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