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32)

  • 입력 2000년 1월 24일 19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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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송영태와 작별할 차례가 되었군요. 그는 가끔 전화를 해서는 무게를 잡기도 하고 자기가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투로 설명을 하기도 했고 화를 내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는 여기서 마리와 함께 나의 몇 안되는 가까운 친구였거든요. 나는 괴팅겐으로 한번 그를 만나러 갔던 적도 있었어요. 그의 친구들과 술 마시고 고기 구어 먹으러 교외로 나가고 밤새껏 노래하다가 이웃 사람들의 항의도 받고 그랬죠.

나는 겉으로는 전혀 의기소침해지지 않았어요. 그동안 열심히 이것 저것 그린 덕분에 사십여 점의 작품이 쌓였고 대작도 여덟 점이나 해냈거든요. 티어가르텐 부근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어요. 마이스터 쉴러를 마치는 데도 얼마쯤 도움이 될 거였어요.

입구 쪽에서부터 크로키들을 보여주고 소품과 큰 작품들을 잘 섞어서 배치하고 최근에 변화를 보인 것들을 맨 마지막에 걸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마리의 어린이 낙서 같은 함축된 선과 표현의 영향을 받은 게 사실이에요. 다만 나는 그런 느낌을 더 구체화 시켰고 민화의 단순함과 축약을 활용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과거의 흔적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내 양식에서 처음 시작하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주관은 형상의 안쪽에 숨기고 객관성은 양식화를 통해서 일종의 기호로써 드러내는 식이었지요. 그 기호를 보는 이가 자기 감각에 의해서 재구성하고 번역해 낼테니까요. 형상은 일그러지거나 겹쳐지거나 뭉개졌지만 기하학적인 어떤 제도의 틀 안에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였지요. 나의 큰 작품들은 이 제도의 틀을 더욱 엄격하게 갖추어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 안에 단순한 형상의 물질들이 터질 듯이 와글대는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전람회는 제법 괜찮았어요. 여러 매체에 소개가 되었고 다른 도시로의 전시기획도 들어왔어요. 나는 날마다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내다가 마지막 날에 그림을 떼러 신 선생 부부와 함께 전시장에 늦게까지 남아 있었어요. 늦게라야 여름 밤이었으니까 저녁 식사 무렵의 한 일곱 시 반쯤 되었을까. 앞섶을 풀어헤친 흰 셔츠 위에 헐렁한 카디건을 걸친 안경쟁이가 입구로 성큼 들어섰어요. 그는 바퀴 달린 커다란 수트케이스를 끌고 있었지요. 나는 무심코 돌아보고 나서 다시 그림을 양팔에 들어 벽에서 떼어 세워 놓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내가 보구나서 떼면 안되냐?

돌아보니 그건 송영태였어요.

뭐야 다 늦게 나타나서….

하면서도 나는 반가웠습니다. 어쨌든 그는 잊어버릴만 하면 아주 중요한 시기에 내게 왔거든요. 그리고 문제꺼리를 한가지씩 던져 주고 가서 부담스럽기는 했지만요. 나는 뒤로 물러서서 그가 내 그림들을 한바퀴 둘러볼 때까지 기다려 주었어요. 그는 신 선생과 인사를 하고 나를 도와서 뒷정리까지 끝냈어요. 일단 화랑의 창고에다 그림들을 보관해 놓고 우리는 근처의 그리스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어요. 우리는 쏘련의 어처구니 없는 쿠데타 실패에 대해서 이야기 했고 자본주의의 전세계화에 관해서도 암울한 전망을 주고 받았어요. 그러나 그런 얘기는 학생 식당에서도 그 무렵에 늘 주고 받던 화제라서 새로울 것도 없었지요. 신 선생 부부와 헤어지고 영태와 나는 그의 거추장스러운 짐 때문에 택시를 타고 집에까지 갔어요.

도대체 이건 뭐야…또 어딜 가려구?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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