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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놀이와 예술’]<8>실루엣 판타지, 그림자놀이

입력 2004-08-02 18:04업데이트 2009-10-0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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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 볼탄스키의 설치미술 작품 ‘천사(1984)’. 날개 달린 천사 조각의 그림자를 통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주제를 그로테스크하게 보여주고 있다.
옛날엔 왜 그리 정전(停電)이 잦았는지. 대낮처럼 집안을 밝히던 전등이 나가면, 장롱이나 서랍에 숨어있던 양초가 부랴부랴 모습을 드러낸다.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촛농을 바닥에 떨어뜨려 초를 고정시키면 방안은 곧 은은한 빛의 세계가 된다. 이제 벽에 그림자의 향연을 펼칠 차례. 벽 근처에 손을 갖다 대고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면 벽에서는 토끼가 귀를 쫑긋거리고, 개가 입을 벌려 멍멍 짖어 대고, 까마귀가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모든 사물은 이렇게 제 안에 다른 것의 형상을 품고 있다. 매일 보던 손에 이렇게 많은 동물이 들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림자가 비로소 사물이 품은 잠재적 형상들을 우리 눈앞에 풀어놓았던 것이다. 그림자가 아니라면 우리에게 손은 그저 손일뿐이다. 그림자가 있기에 우리는 손에 토끼가 숨어 있고, 개가 들어 있고, 까마귀가 감춰져 있음을 본다. 그림자는 이렇게 우리가 늘 보던 뻔한 세상을 색다른 시각으로 보게 해준다.

● 괴테도 안데르센도 그림자놀이를 즐겼다

그림자를 이용하면 한 사물에 몰래 다른 형상을 감춰둘 수도 있다. 가령 체스의 말(馬)은 예로부터 인간의 프로필을 감추는 장소로 즐겨 활용되었다. 프랑스혁명 당시 권좌에서 쫓겨난 귀족들은 나폴레옹을 조롱하는 데 이 수법을 써먹었다. 그들은 이 영웅의 프로필을 체스의 ‘왕(king)’이 아닌 ‘졸(pawn)’ 속에 감추어 두었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나폴레옹에 대한 자신들의 경멸을 드러냈던 것이다.


카라 워커의 '린치를 가하는 버지니아 주의 군중들'(1998년). 언뜻 경쾌해보이는 실루엣에 담긴 내용은 미국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가했던 끔찍한 만행과 그 결과들이다.

현대 작가 중에도 그림자의 표현적 가능성을 활용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언젠가 본 일본 작가의 작품이 생각난다. 작품은 끈에 묶여 허공에 매달린 커다란 철사뭉치였다. 이 무정형(無定型) 물체의 비밀은 그림자에 있었다. 철사뭉치의 위에서 아래쪽으로 비스듬히 빛을 비추니 바닥에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 형상이 모터사이클을 닮았다. 작가는 그런 식으로 철사뭉치 안에 슬쩍 모터사이클 한 대를 감춰두었던 것이다.

회화가 그림자에서 나왔다는 전설도 있다. 고대 로마의 저술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博物誌)’에 나오는 얘기다. 아주 오랜 옛날 그리스에 코레라는 이름의 한 소녀가 있어, 사랑하는 연인을 멀리 떠나보낼 처지에 놓였다. 그 때는 아직 사진도 없고, 그림이라는 것도 없던 시절. 생각 끝에 그녀는 연인을 불러다 벽 앞에 세워두고, 거기에 촛불을 비쳐 생긴 그림자의 윤곽을 따서 연인의 초상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것이 회화의 시초라는 것이다.

이 전설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자만으로 꽤 훌륭한 예술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18세기 독일에서는 가위로 종이를 오려 만든 실루엣 예술이 유행했는데, 그 중에는 독일의 문호 괴테가 만든 작품도 남아 있다. 왼쪽 그림을 보라. 한 소년이 손가락 두 개를 들어올려 토끼의 머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괴테와 절친하게 지냈던 콘스탄틴 남작의 소년시절 실루엣이라고 한다. 고전주의자라서 그런지 괴테의 것은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남긴 실루엣 작품, '고틀로프 프리드리히 콘스탄틴 남작'(1783년). - 사진제공 진중권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도 실루엣 예술을 즐겼다. 안데르센은 달랑 동화만 쓴 게 아니다. 그의 문학적 상상력은 늘 조형적 상상력의 뒷받침을 받았다. 자신이 쓴 동화의 장면을 즐겨 펜으로 그렸고, 인형극 등장인물들의 형상을 바느질해 직접 만들었으며, 때로는 가위를 들고 종이를 오려 자신이 상상하는 장면이나 무대를 실루엣 예술로 남겼다. 안데르센이 남긴 1000여 점의 실루엣 작품들은 사실적인 괴테의 것과 달리 낭만적 판타지를 보여준다.

● 어둡고 덧없고 실체 없는…

실루엣 예술의 전통은 현대에도 이어졌다. ‘실루엣’ 하면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역시 프랑스의 화가 앙리 마티스. 1950년대 이후 그는 거의 전적으로 색종이를 가위로 오려붙이는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화폭에 신문, 잡지 따위를 오려 붙이는 것을 미술에서는 흔히 ‘콜라주’라고 부른다. 하지만 마티스는 제 작품을 ‘콜라주’가 아니라 ‘회화’로 간주했다. 자신이 붓이 아닌 “가위로 그림을 그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루엣 예술은 마티스에서 추상의 수준에 도달한다.

최근 카라 워커라는 미국 작가가 19세기 풍의 실루엣 예술을 다시 들고 나왔다. 맨 위의 그녀의 작품은 언뜻 보기에 매우 유머러스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라. 거기에 묘사된 것이 실은 무섭도록 끔찍한 장면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카라 워커는 그 자신이 흑인여성으로서, 미국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던 인종차별의 장면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그림자도 검은 색, 피부도 검은 색이므로, 흑인의 검은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실루엣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을 게다.

프랑스 작가인 크리스티앙 볼탄스키의 작품은 설치예술을 이용한 그림자놀이라 할 수 있다. 원래 그의 목적은 덧없이 금방 사라지고, 실체가 없어 만질 수 없는 그런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덧없고 실체 없기로 따지자면, 만질 수도 없고 불만 끄면 곧바로 사라지는 그림자만한 게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그림자놀이를 택한 것이다. 그의 원리는 비교적 간단한 편이다. 먼저 판지나 나무로 얼기설기 조그만 형상들을 만들고, 거기에 조명을 비추어 벽에 커다란 그림자로 확대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예술의 주제이기 이전 오래 전부터 철학의 주제이기도 했다. 고대의 철학자 플라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저 천상에 있는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라고 주장했다.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 따르면, 인간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동굴에 갇혀 동굴 벽에 비치는 그림자를 참된 실재로 알고 살아가는 죄수와 같은 존재라고 한다. 그의 말이 맞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자체가 거대한 그림자놀이인 셈이다.

볼탄스키의 작품은 어쩔 수 없이 플라톤을 떠올리게 만든다. 플라톤의 동굴에서는 사람들이 담장 위로 “온갖 인공의 물품들”, 즉 “인물상 및 동물상들”을 쳐들고 지나간다. 그리고 이 인형들이 불빛을 받아 동굴의 벽에 거대한 그림자놀이를 펼치는 것으로 상정된다. 볼탄스키의 작품에서 연출되는 상황과 너무 닮지 않았는가?

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진중권의 ‘놀이와 예술’ 9회는 ‘카메라 옵스큐라(암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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