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5년 5월 12일 15시 32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30대 중후반을 넘어선 사람들에게 킨지는 낯선 이름이 아니다. 킨지는 1960, 70년대 여성 월간지의 별책 부록이나 삽지 형태로 제본된 미니 북을 통해 친숙하게 만날 수 있는 이름이었다. 사람들은 봉인된 그 미니 북을 통해, 그리고 킨지란 이름을 통해 자위 혹은 마스터베이션, 오럴 섹스, 애널 섹스, 클리토리스 등의 용어를 배웠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욕망을 드러내고 또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다. 킨지는 사람들의 잠자는 욕망을 깨웠다.
킨지는 1948년과 1953년에 각각 ‘인간에 있어서 남성의 성행위’와 ‘인간에 있어서 여성의 성행위’란 연구보고서를 발표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세계적인 성 혁명을 불러일으켰던 인물이다. 인디애나 주립대 동물학 교수였던 킨지는 록펠러재단의 후원으로 섹스연구소를 설립한 후 무려 1만2000명에 이르는 사람들과의 개별 인터뷰를 통해 인간의 성적 행동양식을 실증적으로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섹스학 혹은 성(性)과학은 킨지의 연구를 시작으로 공론화되고 또 본격화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미국의 1940년대와 50년대라면 냉전 이데올로기와 함께 극우 보수의 기운이 한껏 고조돼 있었던 시대다. 정치사회적 억압기제가 도처에 널려 있을 때 표면적으로 사람들을 억누르는 정서는 강고한 도덕률이다. 특히 섹스의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한 금욕주의가 통용된다. 정치적 통제는 섹스를 금기시함으로써 효과를 얻는다. 이를 거꾸로 보면, 정치적 탈 권위와 사회적 민주화라고 하는 문제는 섹스의 혁명을 관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된다. 킨지와 그의 보고서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갔다는 의미를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당시 그는 다른 의미의 사회운동가였던 셈이다.
빌 콘던이 킨지에 주목했던 것은 이 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빌 콘던은 결국 1940, 50년대의 미국을 그리려 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미국사회를 그리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빌 콘던은 지금의 미국사회가 과거처럼 엄격하게 통제되고 닫혀져 있는 사회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싶다.
작가들, 그러니까 영화감독들은 뭔가가 자신을 억누르려 하면 할수록 그것을 뚫고 나가고자 하는 속성을 지니며, 그럴 때 작가가 쥐려고 하는 무기는 한편으론 표현 수위가 높은 폭력이며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금기시하려는 섹스의 문제일 수 있다. 빌 콘던은 결국 후자를 택한 셈이 된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빌 콘던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를 자꾸 성적으로, 정치적으로 가둬놓고 싶어? 그러면 내가 진짜 센 얘기를 들려주지. 예전에 킨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야.”
따라서 ‘킨제이 보고서’는 내러티브 구조를 분석한다든지, 캐릭터를 연구한다든지, 카메라와 조명과 의상과 배우의 연기와 음악 따위가 어떠했는지를 보는 영화가 아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 빌 콘던이 과연 왜 이런 작품을 찍고 싶어 했는지를 유추해 내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된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정부는 줄곧 낙태와 동성애, 안락사와 사형제도의 폐지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 창작 표현의 수위 문제 등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비교적 진보주의자를 자처하고 있을 빌 콘던은 아마도 그 같은 부시 권력의 태도에 대해 영화를 통해 한마디 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느 쪽 입장을 두둔하고 또 지지하는가는 철저하게 각 개인들이 판단할 몫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를 평가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준점이 될 것이다. 13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 가.
오동진 영화평론가·동의대 영화과 교수 ohdjin@hotmail.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