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소비자파워]소비자가 시장을 바꾼다

입력 2000-01-10 21:14수정 2009-09-23 08:26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새 시대의 화두 가운데 하나는 ‘소비자’다. 거대 생산자와 유통망에 가위눌려 살아야 했던 소비자들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소비자가 나서서 생산현장과 시장의 구조를 바꾸는 광경이 선진국에서는 친숙한 모습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못했던 것이 사실. 뒤늦게, 그러나 강력하게 경제주체로서 자기 선언을 하고 나선 소비자의 권리와 그들이 만들어가는 세상, 그리고 소비자운동의 전망 등 우리 사회 소비자 문제의 현주소를 집중점검한다.》

미국은 이상한 나라다. 적어도 최근 전개되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MS)사건을 보는 한국인의 눈에는 그렇다.

80년대말 2류 국가로 추락해 가던 미국을 구원한 일등공신 MS사가 정부의 칭찬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시달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미 사법부는 최근 법무부의 주장을 받아들여 MS사에 독점 혐의가 있다고 예비판정했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재인을 지정해 정부와 MS사가 협의토록 결정해 놓은 상태다. 아직 최종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MS사를 분할해야 한다”는 소리마저 나온다.

왜 미국 정부는 MS사를 문제삼는 걸까. 바로 ‘소비자의 권리’ 때문이다. MS사는 컴퓨터 운영체제(OS) 시장에서의 독점적 위상을 악용해 웹브라우저 등 각종 소프트웨어를 강매했고 결국 소비자들이 비싸게 상품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다.

“기업에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지만 기업이 ‘소비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순간 정부는 소비자를 대신해 칼을 빼들고 나섭니다.”(미 공정거래위 소비자 보호국 마니셔 미설 변호사)

MS사뿐만이 아니다. 미 정부는 어떤 기업이든 독점이나 담합 등 부당한 방법을 이용해 경쟁을 회피하고 소비자에게 비싼 가격을 물리면 기업을 분할해 경쟁을 촉진시켜 왔다.

1977년 미국의 거대 전화회사 AT&T를 22개 지역회사로 분리시켜 시내전화 통화료를 절반 가까이 떨어뜨렸고 거의 90년전인 1911년에 이미 미국 석유시장의 85%를 차지하던 스탠더드 오일사를 33개의 회사로 쪼개기도 했다.

미국의 정부와 소비자들은 기업들이 자유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할 때만 소비자가 값싸고 질 좋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이를 실천해 왔다. 이를 위해 미 연방공정거래위원회(FTC)와 법무부 반독점국은 기업끼리 서로 짜고 가격을 올리거나 독점 또는 과점 기업이 독점적 위치를 이용해 부당한 경쟁을 하는 행위를 감시하고 있다.

FTC에 6년간 근무했던 한국계 변호사 세실 정의 증언.

“정부는 선수(기업)들이 최선을 다해 싸우도록 독려하고 이 과정에서 서로 봐주거나(담합) 한쪽이 부당한 방법(독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심판입니다. 그래야만 관중(소비자)이 경기를 즐길 수 있죠.”

이런 원칙 때문에 미국에서 기업간의 담합행위는 형사 범죄로 취급된다. 미 법무부는 5월20일 세계 비타민 시장을 과점해 온 스위스 로슈, 독일의 BASF 등 다국적 제약업체들에 대해 “이들 기업이 담합을 통해 연간 50억달러 상당의 제품가격을 불법적으로 인상해 소비자에게 피해를 끼쳤다”며 로슈에 5억달러, BASF에 2억5000만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벌금을 매겼다. 또 로슈의 전 세계마케팅 책임자는 징역형까지 받았다.

그러나 우리 기업인들은 담합행위가 적발되면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벌금만 내면 되는 걸로 인식하고 있는 게 현실. 공공건설 입찰에서 담합한 업체들을 검찰이 사법처리하려 하자 공정거래위가 “너무 심하다”며 업계 편을 들 정도다. 담합이 소비자나납세자의 주머니를 부당하게 털어가는 ‘악질적인’ 범죄라는 인식이 정부나 기업인, 그리고 국민 사이에 희박한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인식에 왜 이처럼 큰 차이가 나는 것일까.

한국개발연구원의 신광식(申光植)박사는 “경제개발 초기에 정부가 우리 기업을 외국기업과의 치열한 경쟁으로부터 보호해 주던 관행이 30여년간 지속되면서 정부와 기업은 경제성장만 우선시하고 소비자의 권리를 아예 도외시해 왔다”며 “이제 정부와 기업이 소비자의 권리를 최우선시하고 소비자도 자신의 권리를 강력히 요구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치열한 경쟁에 시달리지 않는 한국 기업들의 풍토는 결국 비싼 물가로 이어져 소비자의 손해로 귀착된다. 97년 스위스 여론조사기관 CRG가 세계 145개 도시를 대상으로 실시한 물가조사에서 서울은 7위를 기록했다. 미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시의 월마트 매장. 3000평에 달하는 매장을 둘러봤지만 한국보다 소득이 몇 배 높은 미국의 물건값이 오히려 싸다. 셔츠 스웨터 청바지 등 각종 의류 가운데 20달러가 넘는 상품이 거의 없다. 구두와 신발도 10달러선. 또 10달러면 한 가족의 한끼 식사에 충분할 정도로 생선 빵 과일 등 식료품 가격도 싸다.

이런 저렴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점포 매니저 캐롤린은 “미국은 80년대부터 유통업체간의 ‘가격경쟁’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값싸고 질 좋은 물건들을 사들여 판매할 수 있는 업체만 살아남게 됐다”며 “결국 이런 저렴한 가격은 소비자의 이익으로 돌아간다”고 설명했다.

우리 사회에서는 소비자의 권리 가운데 질 좋고 값싼 물건을 살 수 있는 권리만 무시되어온 게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소비자 권리에 해당하는 △피해구제 △정보제공 △안전도 여전히 열악한 수준이다.

한 햄버거 회사가 커피를 너무 뜨겁게 팔아 손님이 화상을 입자 40억원을 배상하도록 판결한 미국의 현실과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다. 상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교환하거나 환불받으려면 가게 주인의 눈치를 보거나 옥신각신 싸워야 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먹을 거리와 관련된 사고가 터져 소비자들을 불안하게 한다. 어느 상품을 사야 할지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는 없고 소비자를 현혹하는 일방적인 광고만 소비자를 둘러싸고 있다.

서울대 소비자아동학과 여정성(余禎星)교수는 “경제성장 우선주의에 밀려 한국의 소비자는 들러리 역할에 머물러 왔다”며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소비자의 애국심에만 호소하고 소비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기업은 글로벌 경쟁시대에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뒤집어 말하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오늘날 소비자들의 과제라는 뜻이다.

<워싱턴·뉴욕·로스앤젤리스=이병기기자> watchdog@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