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부른다/전북]소설가 양귀자의 고향예찬

  • 입력 1998년 7월 22일 19시 37분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그때, 시내를 가로질러 구비구비 흐르던 전주천은 지금처럼 야위지 않고 참 풍성했었다. 그 중에서도 한벽루를 끼고 흐르던 교동쪽 전주천은 아녀자들의 즐거운 빨래터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도 바로 거기, 머리에 흰 수건을 쓴 젊은 어머니와, 찰랑찰랑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던 냇물과, 비눗물이 다 빠질 때까지 하염없이 물 속에서 흔들리며 헹구어지던 하얀 이불홋청이 함께 정다웠던 그 옛날의 냇가였다.

물 소리, 빨래 방망이 소리, 그리고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한데 뒤섞여 흡사 잔치집처럼 부산한 거기 빨래터에서 어느날 어린 나는 장난삼아 주무르고 있던 양말 한 짝을 떠내려 보내고 말았었다. 떠내려가는 양말을 잡으려고 앞으로 앞으로 내달렸던 나, 잡힐 듯 잡힐 듯 너울거리다 마침내 센 물살에 떠밀려 저멀리로 떠나버린 양말 한 짝.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양말 한 짝처럼 세월이라는 이름의 센 물결에 떠밀려 여기까지 흘러와 있다. 앞으로 앞으로 떠내려가다 문득 살펴보니 잔치집처럼 부산하던 전주천은 너무 조용하고, 이제는 아무도 그 곳에서 이불홋청을 빨지 않는다. 늙으신 내 어머니조차 빨래는 세탁기가 한다는 사실을 다소곳이 수긍하고 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이렇게 멀리 흘러와서 돌이켜보는 추억속의 고향의 모습은 그 시절곁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아름답다. 세월이 흐를수록, 타향살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나는 그것을 느낀다. 연꽃이 아름답던 덕진호수, 심심하면 달려가던 오목대, 숲그늘이 향기롭던 경기전, 어린시절 팔랑개비처럼 드나들 때는 몰랐던 내 고향의 아름다움이 지금은 마음 속에서 한없이 절절하다.

어디 그 뿐인가. 이름모를 골목길 곳곳에 숨어있던 아취 그윽한 고옥들의 이끼서린 기왓장들, 값싼 장터밥집에 들어가도 벽마다 돌아가며 걸려있던 그림과 붓글씨 액자들, 나물 한 접시를 담아도 그토록 열심히맛과 멋을 내던 어머니들의 손맵시. 그런 것들이 일러주는 내 고향의깊은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오히려 고향을 떠나고 난 다음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아니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그냥 동구밖 버드나무처럼 거기 묻혀서 열심히 몸과 마음을 키우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만큼 나날이 충만하고 평화 뿐이었던 시절이 내 삶속에 어디 또 있었을까. 봄이면 축등행렬이 아름다웠던 전주 단오제에 흥분했고, 남원 춘향제에 다녀온 어른들 이야기 듣느라 밤새는 줄 몰랐었다. 여름에는 변산해수욕장이나 무주 구천동에 다녀온 오빠들의 새까맣게 탄 얼굴을 부러워하며 친구들과 전주천을 누비고 다녔었다. 정읍 내장산 단풍이 첫물을 들이기 시작하는 초가을이면 어머니를 따라 임실로 버스를 타고 나가 함지박 가득 포도주 담글 포도를 사오곤 했었다. 겨울은 겨울대로 서해바다 부안지방에서 사온 젓갈로 담근 김장김치가 또 얼마나 일품이었던지. 겨울 지나고 봄이 오면 키가 한뼘은 불쑥 커있곤 했었는데….

그렇게 키를 키우고 뼈를 굳혀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뭉클하다. 지금은 이렇게 고향을 떠나서 살고 있으나,거기 아직도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더욱 더 가슴이 뭉클하다. 나는 비록 여기 있지만 내가 사랑하는 그들은 여전히 경기전과 오목대를 거닐 것이며,여름이면 변산 바닷가에 몸을 담글 것이고,가을이면 내장산 단풍을 즐길 것이다. 그러면 족한 것이다. 내가 없어도 그들이 내 고향 산천을 충분히 어루만져 줄 것이므로.

마음이 곤하고 몸이 지쳐 있을때 언제라도 나를 반겨줄 산천과 사람들이 있는 나, 그러므로 나는 행복하다. 게다가 그곳이 전라북도 하고도 전주라면 나는 분명 행운아다.

양귀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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