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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3월 24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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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과 리란칭(李嵐淸) 중국 수석부총리 간에 탁구경기가 열렸다.
이날은 ‘핑퐁외교’ 30주년 기념일. 78세의 나이에 라켓을 잡은 키신저 전 장관은 “30년 전 이 작은 탁구공 하나가 지구라는 공을 움직였다”면서 감격했다.
1971년 3월 초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열린 제31회 세계 탁구선수권 대회.
문화대혁명 발발 이후 처음 국제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중국 선수단은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목표는 승리가 아니었다. 중국의 최대 관심사는 미국과의 접촉. 중국 선수단은 미국팀을 대할 때의 에티켓 교육까지 받은 터였다.
25일 대회가 끝날 즈음 중국은 ‘비장의 카드’를 내밀었다. 미국 선수단의 중국 초청. 며칠 후 베이징 공항에 도착한 미국 선수단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국 대륙을 공식 방문한 최초의 미국인이었다.
워싱턴은 ‘중국이 내민 손’의 의미를 파악했다.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키신저 당시 안보보좌관을 대동하고 베이징으로 날아가 마오쩌둥(毛澤東) 주석과 만났다.
“그동안 저는 무책임한 말을 많이 했습니다.”(마오)
“(웃으며) ‘미 제국주의 타도’ 같은 것 말입니까.”(닉슨)
“미국은 이제 타도 대상이 아닙니다. 모두 타도해버리면 친구는 아무도 없지 않겠습니까.”(마오)
두 나라는 ‘소련 견제’라는 공동 목표 아래 친구가 됐다. 그것은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지극히 현실주의적 발상이었다. 관계 개선 후 기대되는 경제적 실익도 중요했다.
두 나라가 손을 잡을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은 ‘가능성’의 나라였다. 중국에 있어 미국과의 화해는 자국의 외교적 경제적 잠재력을 대내외적으로 인정받는 중요한 절차였다.
닉슨 대통령은 극진한 대접을 받고 푸짐한 선물을 안고 돌아갔다. 선물 중에는 양국 우호의 상징인 판다 ‘싱싱’도 포함돼 있었다.
몇 년 전 ‘싱싱’이 죽자 미국은 다른 판다를 보내줄 수 있느냐고 중국에 요청했다. 중국 정부의 대답은 간단했다. “물론 보내드리죠.”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판다 값으로 800만 달러를 지불해야 합니다.” 중국은 사회주의의 얼굴을 한 무서운 시장경제국가가 돼 있었다.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태클을 걸 수 있는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가 된 것이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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