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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10월 20일 18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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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해군사령관 빌뇌브는 나폴레옹의 명령에 몸서리를 쳤다. 지중해 함대를 이끌고 대서양으로 나설 때마다 숙적 넬슨이 앞을 막는 상황이었다.
나폴레옹의 충복이자 자신의 친구인 데크레는 ‘우물쭈물하는 자네에 대해 황제는 화가 나셨다네’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공포정치 때 유능한 장교들이 숙청당하는 와중에도 ‘복지부동’으로 관운(官運)을 이어갔던 빌뇌브. 이제는 진격밖에 선택의 길이 없었다.
영국 해군제독 넬슨은 한쪽 눈과 한쪽 팔을 잃은 상이용사였다. 귀족부인과의 스캔들로 어려움도 겪었지만 타고난 지략을 인정받아 최고사령관에 복귀했다. 빌뇌브는 8년 전 나일강에서 대파한 적이 있는 만만한 상대. 길목만 잡고 있어도 적은 움직이지 못했지만 영국 정치인들은 나폴레옹의 기세를 꺾는 대승리를 원했다.
10월 21일, 33척의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스페인 남서쪽 트라팔가르곶으로 출항했다. 27척의 영국 함대도 지체 없이 돛을 올렸다. 넬슨은 사령선인 빅토리아호에 ‘영국은 각자가 의무를 다하기를 기대한다’고 적힌 깃발을 걸었다.
빅토리아호가 쏜살같이 함대 가운데를 돌파하는 순간 빌뇌브는 기겁했다. 나일강에서 넬슨은 좌우협공으로 함대를 유린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앙을 갈라 치고 있었다. 프랑스 함대는 좌우로 흩어져 포탄세례를 받았다. 노련한 영국 뱃사람들을 상대하기에 신참장교 중심의 프랑스 해군은 역부족이었다.
연합함대 33척 중 22척이 깨지고 끌려갔다. 전사자는 8000여명. 이로써 나폴레옹은 영국 정복의 꿈을 접었다.
영국측 전사자는 1700여명에 그쳤지만 그 가운데 넬슨이 있었다. 넬슨은 총탄을 맞고 “나는 의무를 다했다. 신께 감사한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빌뇌브는 살아남았으나 1년 뒤 가슴에 칼이 꽂힌 시체로 발견된다. 패장의 불명예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누군가의 응징 대상이 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우리는 영국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작전을 중지해야 한다”라고 토로했던 그의 판단이 나폴레옹보다 정확했음은 분명했다.
김준석기자 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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