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는 일본]<4>기술의 블랙박스화

  • 입력 2003년 11월 27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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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다시 ‘기술 일본’의 깃발을 들었다. 생산 효율성으로 승부하던 일본 자동차업계도 첨단 기술을 활용한 자동차를 선보이며 세계 자동차업계와 경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달 열린 도쿄모터쇼에서 도요타가 선보인 1인승 전기자동차. 동아일보 자료사진
일본이 다시 ‘기술 일본’의 깃발을 들었다. 생산 효율성으로 승부하던 일본 자동차업계도 첨단 기술을 활용한 자동차를 선보이며 세계 자동차업계와 경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달 열린 도쿄모터쇼에서 도요타가 선보인 1인승 전기자동차. 동아일보 자료사진
《‘샤프공장 부근에 수상한 그림자가 처음 나타난 것은 7000억원대의 제조 설비를 처음 들여올 때였다. 샤프는 액정화면(LCD)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지만 최근에는 삼성과 LG 등 한국 업체의 빠른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혹시 아시아의 라이벌이 은밀히 정찰한 건 아닐까. 샤프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지난달 일본의 주간지 아에라에 실린 기사의 한 구절. 샤프가 미에현 가메야마에 건설 중인 LCD TV 공장 근처에서 카메라를 든 수상한 인물이 여러 차례 목격됐다는 내용이다.》

취재팀은 샤프측에 ‘공장을 보고 싶다’고 여러 차례 요청해봤다. 응답은 단호했다.

“동아일보뿐 아니라 전 세계 어느 언론에도 공장은 공개할 수 없다.”

일본에서 만난 한국 전자업체 관계자는 “LCD 공장은 처음에 기둥을 몇 개 박느냐만 봐도 몇 인치 LCD가 주로 생산되는지 알 수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일본 업계가 한국 기업에 대해 내비치는 경계심은 지나친 수준”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2002년 미국 특허를 딴 기업 순위
1위IBM(미국)3333건
2위캐논(일본)1895건
3위NEC(일본)1833건
3위마이크론(미국)1833건
5위히타치(일본)1616건
6위마쓰시타전기(일본)1566건
7위소니(일본)1456건
8위GE(미국)1417건
9위미쓰비시(일본)1408건
10위삼성전자(한국)1329건
자료:IFI(미국 특허전문조사회사)

기술대국 일본. ‘잃어버린 10년’에도 불구하고 제조업 부문에서 일본의 기술적 우위는 확고하다. 일본 기업들은 흉내 낼 수 없는 기술경쟁력을 세계시장 재석권의 주무기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기술을 ‘블랙박스’ 속으로=1990년대 이후 아웃소싱이 유행하면서 일본 제조업체들은 공장 내의 설비나 부품을 모두 외부에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후발 아시아 메이커들이 똑같은 설비와 부품을 사면 ‘일제’와 별 차이 없는 제품을 만들곤 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면 이를 감추고 독점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전에는 새 기술을 개발하면 우선 특허부터 내는 방식으로 독점사용권을 확보하곤 했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정말로 중요한 기술은 아예 특허 신청도 안 하고 꽁꽁 숨긴다.

특허를 내놓아도 아시아의 일부 국가들은 이를 존중하지 않는다. 소송을 해도 비용이 많이 든다. 그래서 새로 선택한 전략이 기술의 ‘블랙박스(black box)화’다.

“실리콘 재료의 혼합방법이나 굽는 방법은 특허를 내지 않기로 했다. 특허를 받지 않으면 들키지 않는다.”(샤프의 다니 젠베·谷善平 부사장)

전자업체인 캐논은 최근 금형 기술자를 모집중이다. 캐논 아미공장의 이시이 히로시(石井裕士) 공장장은 “금형을 밖에서 주문하면 제품 기술이 노출될 위험이 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전통적으로 일본은 제품 개발 초기 단계부터 협력업체와 함께 작업을 하는 게 관행이었지만 핵심 부품은 물론 금형까지 자체 제작하는 것.

노무라종합연구소 미타라이 히사미(御手洗久巳·전자 담당) 수석 컨설턴트는 “일본 기업은 선진 기술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제는 후발 주자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새로운 움직임들=1980년 이후 일본에서는 국가가 관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반도체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는 식의 자만심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달 초 일본을 방문했던 산업자원부 윤영선 산업정책과장은 “산업 기술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정부와 대학, 기업이 연합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졌다”고 전했다.

일본 대학에서는 TLO(Technology Licensing Office) 설치 붐이 일고 있다. TLO는 원래 미국에서 대학의 지적재산권(IP) 특허 취득과 기업 연계를 독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 자존심 강한 일본이지만 IP 분야에서 뒤졌다는 반성으로 미국식을 그대로 들여왔다.

일본은 중소형 LCD나 화상처리 반도체(CCD)에 집중하고 있다. 고객의 주문에 따라 차별화된 제품을 만들기 위해 기술력이 필요한 분야다. 이에 비해 한국 기업이 강점을 갖고 있는 D램이나 대형 LCD는 투자액으로 승부가 갈리는 범용 제품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우광 수석연구원은 이에 대해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온리 원(only one)’ 제품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난달 개막한 도쿄 모터쇼에서 도요타는 하이브리드 카인 ‘프리우스’를 대량생산해 시장에 내놓겠다고 발표해 세계 자동차 업계를 놀라게 했다. 취재팀이 방문한 도요타 공장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띈 표지는 ‘에코(eco)’. 1992년부터 환경을 기업 사명의 하나로 채택한 도요타의 기업 소개 책자는 환경기술로 시작한다. 생산 효율성으로 세계 자동차 업계와 경쟁을 벌이던 일본 자동차 업계가 차세대 기술로 ‘게임의 룰’을 바꾸고 있다. 새로운 변화다.

▽한국 기업에 던지는 메시지=올해 8월 일본 경제산업성 산하 신에너지·산업기술종합개발기구(NEDO)의 지원으로 후지쓰 히타치 파이어니어 등이 공동 출자해 차세대PDP개발센터가 만들어졌다. 한국을 경쟁자로 상정한 프로젝트다.

기술을 둘러싼 일본의 움직임은 한국 기업에 중요하다. 한국의 반도체가 잘 나간다고 하지만 제조설비는 대부분 화낙 울박 니콘 등 일본 메이커의 제품을 쓰고 있다. 여전히 많은 부분 일본의 기술에 의존한다. 한국은 원천기술은 물론 부품이나 생산기술도 일본과 맞서기에 힘이 부치는 게 현실이다.

일본에 오래 근무했던 삼성종합기술원 이창협 CTO그룹장은 “일본 내에선 정부 주도 프로젝트에 한국 기업들은 참여할 수 없다는 ‘무언의 압력’이 존재한다”며 “일본 업체들 사이에서는 ‘한국에 더 이상 기술을 줄 수 없다’는 합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술 도입에 적극적인 중국도 중요한 변수. 2000년 한국과 일본을 방문했던 중국 주룽지(朱鎔基) 총리는 양국에 대해 “반도체 라인을 이전하면 어떤 혜택이라도 주겠다”며 러브콜을 보냈다. 현재까지는 아무도 이에 응하고 있지 않지만 전략을 수정할 상황 전개도 가능하다.

기술을 둘러싼 일본의 긴박한 움직임. 이 긴장감은 국경을 넘어 한국 등 인근 국가에도 전해지고 있다.

도쿄·나고야=특별취재팀

▼"D램-LCD 실패 되풀이 말자" 뼈아픈 반성 ▼

“D램과 초박막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LCD)에서 한국기업의 설비 투자 전략은 투자의 타이밍, 집중도, 내용 등 모든 면에서 일본기업보다 우수했다. 일본은 완패했다.”

일본 산업계의 권위자인 히토쓰바시대 이타미 히로유키(伊丹敬之) 교수가 작년 9월 저서 ‘기업전략백서’에서 내린 결론이다.

1990년대 초까지 세계 D램 시장을 석권하던 일본은 불과 몇 년 만에 한국 업계에 선두를 빼앗겼다. 세계 하이테크 산업사에서 ‘일대 사건’이다. 일본은 이어 벌어진 TFT-LCD 경쟁에서도 한국에 다시 패했다. 일본에선 이에 대해 다양한 분석을 통해 다시는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이타미 교수는 우선 전략의 실패를 지적한다.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일본 반도체업계의 물량이 줄어들면서 일시적으로 D램 가격이 상승했다. 일본 업계는 “생산량을 조절하면 이익을 늘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지만 이것이 비극의 싹인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타미 교수는 “생산조절 담합 전략에는 합의에 참가하지 않은 기업의 점유율과 이익이 순식간에 늘어난다는 함정이 있다”고 지적했다. 아직 한국의 시장점유율이 미미하던 시절, 일본이 자기들끼리 담합을 하고 있는 동안 한국은 생산량을 계속 늘렸다.

1992년 일본의 버블 붕괴는 한국으로서는 운이 좋았던 부분.

수요 변동이 크고 설비투자가 1, 2년 지나야 결실을 맺는 D램 산업의 특성상 일본 기업 경영진이 리스크를 각오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 시기에 집중 투자를 한 삼성은 1994년과 1995년의 D램 호황기에 막대한 이익을 거뒀다. 일본 최대였던 히타치의 두 배.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대규모의 TFT-LCD 설비투자를 단행했고 승세를 이어갔다.

이타미 교수는 일본 업계에 사생결단을 각오한 ‘사무라이 정신’을 주문한다.

“첨단기술시장에 집중하면 기술적 우위는 가능하지만 수요가 작고 수익이 없어 기술투자를 위한 자금이 고갈되는 악순환이 일어나곤 한다. 따라서 성숙시장에서 꾸준히 벌어들여야 한다. 성숙된 제품 시장은 넘겨줘도 된다는 자세는 안 된다. 일본 기업은 상대가 포기할 만큼 설비투자를 단행해 가격경쟁에서 철저하게 맞붙어야 한다.”

한국 기업이 듣기에는 섬뜩한 충고다.



도쿄·나고야=특별취재팀

이병기 배극인 홍석민 박형준기자(이상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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