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송문홍/황장엽씨 입, 테러로 못 막는다

  • 입력 2004년 3월 9일 19시 19분


코멘트
이틀 전 아침 서울 송파구 가락동 탈북자동지회 사무실에 출근하던 사람들은 섬뜩한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피 묻은 식칼이 꽂혀진 황장엽씨 사진과 함께 ‘민족반역자 황장엽은 각오하라’는 제목의 유인물 10여장이 입구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단체의 명예회장인 황씨에 대한 명백한 테러 위협이었다.

황씨를 “황천길로 보내겠다”고 협박한 범인은 누구일까. 1997년 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인 이한영씨를 살해한 북한 공작원일까? 아니면 망명 이후 북한체제를 줄기차게 비판해 온 황씨에게 반감을 가진 ‘친북 좌경분자’의 소행일까?

소식을 접한 황씨는 모든 대외활동을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고 한다. 여든이 넘은 고령에도 일주일에 서너 차례씩 강연을 해 온 황씨에게 이번 일은 불의의 타격이 됐을 것이다. 최근 얘기가 오가던 황씨의 일본 방문건도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커졌다. 그런 점에서 테러 협박범의 시도는, 그것이 실제 테러의 전주곡이건 혹은 단순한 협박이건, 일단은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테러범의 위협이 끝까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황씨 개인을 볼 때 그렇다. 황씨는 북쪽에서 누리던 명예와 가족까지 버리고 한국에 온 후 북한체제를 비판하고 바꾸는 일에 여생을 바치겠다고 공언한 인물이다. 그런 황씨가 이만한 일로 위축될까? 실제로 황씨의 한 측근에 따르면, 황씨는 이번 일을 접하고도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 측근은 또 “그동안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을 뿐 황씨에 대한 테러 위협은 여러 차례 있었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범인은 테러 협박 상대를 잘못 고른 셈이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가 저급한 테러 위협이 횡행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됐는지 개탄스럽다. 범인이 북한 공작원이라면 이 나라의 치안이 걱정이다. 하긴, 최근 몇 년간 공권력이 간첩을 잡았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없으니 서울 시내에 북한 공작원들이 활개치고 돌아다닌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만약 범인이 무조건적인 남북화해를 지상 선(善)으로 맹신하는, 혹은 북한의 은밀한 지령을 받아 수행하는 자생적 친북세력의 일원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범인의 행동은 위험 수위를 넘어선 우리 사회의 이념적 혼돈 상황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10여년간 북한 주민의 참상과 북한체제의 폭압적인 행태를 접하고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현실이 안타깝다.

북한체제를 바꾸는 데 대북정책의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황씨 주장에 대한 평가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바로 그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남한체제가 북한체제보다 우월한 근본 요인이다. 그런 점에서 황씨의 입을 막아 보려는 범인의 시도는 우리 사회를 북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헛된 몸부림일 뿐이다.

황씨는 앞으로도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황씨가 망명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테러 협박범의 정체를 반드시 밝혀 내야 한다. 범인이 누구로 밝혀지든 그는 우리 사회 일각의 그릇된 대북인식을 바로잡는 반면교사 역할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송문홍 논설위원 songm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