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메드] 9월호 김수석 편집장의 말 “김밥이 잘못했네!”

  • 입력 2015년 9월 4일 17시 25분


마감 날이었다. 이틀 전부터 세 들어 있는 사무실의 에어컨이 정확히 오후 6시를 기점으로 꺼졌다. 개별 냉방이 아니었기에, 땀을 뻘뻘 흘리며 유독 버거운 마감을 보내야 했다. 그때 전화 한 통이 왔다. 아버지라는 세 글자가 액정 화면에 떴다.

아.버.지. 우리 부자가 전화 통화를 하는 일은 정말 드문 일이다. 생면부지한 사람에게서 잘못 걸린 전화가 오는 것보다 사실 더 드문 일이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면 어머니를 통해 전하는 게 관례다. 굳이 부자 관계가 어색하거나 나빠서가 절대 아니다. 그냥 일종의 전통 같은… 이해는 안 되지만 이미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수화기에서 들려온 것은
아버지의 음성이 아니었다.

“저, 지금 전화 받으신 분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아들인데요.”

아버지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아들임을 밝히는 생경한 일에 얼떨떨했다. 불길한 예감이 찌릿하게 척추를 타고 흘렸다.

“저희 의원에 환자분이 찾아오셨는데, 계속 구토를 하시고 지금 인지능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열도 너무 높고요. 보호자가 오셔야 할 거 같아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뇌혈관 질환이었다. 몇 년 전 어머니의 뇌동맥출혈 덕에 중환자실 간호사와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분을 쌓은 경험이 있었기에 대번에 구급차를 부르라고 했다. “보호자가 직접 부르셔야 한다”는 말에 버럭 화를 내고 전화를 끊은 후 119에 전화했다.


119에 가장 가까운 근처 대학병원을 확인 후 만사 제쳐놓고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갔다. 응급실에 도착하니, 아버지의 바지에는 구토한 오물의 흔적이 가득하고, 열은 39.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나마 해열제를 맞고 응급처치를 해 정신은 어느 정도 돌아온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도 헐레벌떡 응급실로 달려오셨다. 아버지는 그런 모자를 별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어제 하루 지난 김밥을 먹어서 그래.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어머니가 울상을 지으셨다.

“당신 그제도 토하고 속 안 좋다고 했잖아요.”

“그때는 오징어를 잘 못 먹어서 그래.”

어머니의 핀잔에 아버지가 심드렁하게 대꾸하셨다.

“이거 다 응급실에서 쓰는 수법이야. 막 겁주고 협박해서 이것저것 검사만 잔뜩 받게 한다니까.”

하지만 검사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담관석이 담관을 막아서 이미 오래전부터 염증이 심하게 발생해있는 상태였다. 간수치가 400을 넘어섰으며 쇼크를 일으킬 수도 있고 시간을 지체하면 패혈증으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촉각이 시급한 상태였다. 해당 병원에서는 수술이 어렵다며 다른 대학병원을 소개해줬지만, 아버지는 굳이 친구분이 수술했다는 대학병원으로 가셨다.

그곳의 응급실은 만원이었고, 한참을 응급실 대기의자에 앉아 기다려야 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계속 말씀하셨다.

“김밥을 잘 못 먹었어.”

내 눈치를 힐끗 보시더니 역시나

“그냥 김밥 잘 못 먹어서 그런데… 너 마감은 쳤냐. 어서 가서 마감이나 쳐라!”

새벽녘에야 모습을 드러낸 의사는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물었다. 아버지가 너무나 세세하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다 털어놔서 의사가 다소 짜증내며 “묻는 거에만 답해줬으면 좋겠다”고 쏘아붙였다.

하지만, “김밥을 잘 못 먹었다”는 아버지가 복용한 약은 소화제뿐이 아니었다. 독한 진통제와 관련된 약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고혈압과 고지혈증 외에도 목 디스크로 오랫동안 약을 복용했다는 것도 나는 처음 알았다. 도대체 얼마나 아프셨던 걸까.

전날은 김밥을 잘 못 먹었고, 그 전날은 오징어, 그 전날은 또 무엇을 잘 못 드셨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진통제를 드셔왔던 걸까.


마감을 하러 사무실에 들어와 컴퓨터를 켰다. 윙윙거리는 컴퓨터 소리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누워 계실 때는 눈물이 났는데…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누워계실 때는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딱히 아버지가 싫거나 어색해서가 아니다. 음… 그냥 오랜 전통 같은 거다. 뭐 마감은 다소 늦었지만, 거짓말같이 또 한 권의 책이 나왔다. 마감이 끝났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거짓말을 들으러 가야겠다.

- 김수석 편집장
* 본 기사의 내용은 동아닷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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