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제약협회와 한국다국적의약산업협회가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리츠칼튼 서울’에서 지난달 18일 개최한 ‘제약산업 오픈 이노베이션 공동컨퍼런스’. 이틀 간 열린 행사에서는 ‘오픈 이노베이션’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한국제약협회 제공
‘신약 개발’은 실패 가능성이 높지만 성공할 경우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전형적인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 분야다. 통상적으로 신약 개발에는 10∼15년의 기간과 1조 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이렇게 긴 시간과 큰 비용을 투자해도 신약 개발에 실패할 확률이 성공 확률보다 훨씬 더 높다는 것이다. 수많은 신약 개발이 임상 단계(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서 수포로 돌아간다. 하지만 신약 개발에 성공하기만 하면 최소 수천억 원에서 많게는 수조 원을 벌어들일 수 있다. 돈 문제가 아니더라도 기술력과 회사의 명예 측면에서 신약 개발은 제약 회사들의 숙원이기도 하다.
최근 신약 개발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행사가 열렸다. 한국제약협회(KPMA)와 한국다국적의약산업협회(KRPIA)는 지난달 18일부터 이틀간 ‘제약산업 오픈 이노베이션 공동컨퍼런스’(Pharma Association Conference·PAC)를 진행했다. 이 행사에서는 국내 제약사와 다국적 제약사가 ‘오픈 이노베이션’(연구개발 과정에서 다른 기업이나 대학·연구소와 기술과 지식을 공유해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을 통해 협력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행사에는 국내 제약기업과 글로벌 제약사, 정부, 학계, 연구기관 등에서 400여 명이 넘는 제약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요즘 국내외 제약업계에서 오픈 이노베이션은 이른바 ‘메가 트렌드’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이미 실패의 위험과 비용을 줄이고 효율성은 극대화할 수 있는 오픈 이노베이션 방식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제약사와 대학이 공동 연구를 하거나 제약사들이 공동연구를 하는 사례가 많다. 유럽 제약협회(EFPIA)와 유럽연합(EU)정부는 ‘혁신 의약품 이니셔티브 프로젝트’(Innovative Medicine Initiative·IMI)를 2012년부터 공동 출자로 진행 중이다. 사노피, GSK, 화이자 등 글로벌 제약사들과 EU 정부, 14개 대학 연구소(영국,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등)는 단백질과 펩타이드 같은 생물학적 분자 물질을 이용해 혁신적인 신약으로 만드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다국적 제약사들 사이의 협력도 활발하다. 글로벌 제약회사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은 2010년부터 스페인 칸토스 지역에 ‘오픈랩’을 마련해 운영 중이다. 오픈랩은 외부 연구자들과 연구 자료를 공유하고, 자금을 지원해주는 역할을 하는 개방형 연구실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연구 성과물 역시 공유된다.
국내 제약사인 한미약품과 글로벌 제약사인 사노피는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고혈압·고지혈증 치료제인 ‘로 벨리토’를 개발했다. 2013년 로벨리토 출시 기념행사에 참여한 양 사 임원진. 한미약품 박명희 이사(왼쪽부터)와 이관순 대표이사, 사노피-아벤티스코리아 배경은 대표이사와 에흐베 스뛰델 상무. 사노피-아벤티스코리아 제공또 다른 글로벌 제약사 사노피 역시 오픈 이노베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사노피는 미국 바이오 업체인 리제네론과 아플리버셉트(항암제 성분)를 이용한 전이성 대장암 및 직장암 치료제 ‘잘트랩’을 만들어냈다. 이 약은 현재 국내에서도 식약처의 승인을 받은 상태로 출시를 앞두고 있다.
국내 제약사들도 ‘제약산업 오픈 이노베이션 공동컨퍼런스’를 계기로 앞으로 오픈 이노베이션을 적극 활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 중견 제약업체 연구원은 “세계 시장의 3%도 안 되는 국내 제약 시장에는 매출 1조 원을 넘은 회사가 없을뿐더러 아직 개별 회사가 독자적으로 신약을 개발할 능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은 미래 먹거리이기 때문에 국내 업체들에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한 신약 개발은 필수”라고 이야기했다.
몇몇 제약사는 이미 오픈 이노베이션을 활용하고 있다. 한미약품은 사노피와 함께 고혈압·고지혈증 치료제 ‘로벨리토’를 개발했다. 이 약품은 국내 최초로 국내 제약회사가 다국적 제약회사와 제품 개발에서부터 허가, 영업, 마케팅까지 전 과정을 공동으로 진행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한미약품은 또 미국 스펙트럼사와 호중구 감소증(백혈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호중구가 갑자기 줄어드는 증세) 치료 바이오 신약인 ‘LAPS-GCSF(SPI-2012)’를 공동개발하고 있으며 내년에 임상 3상에 돌입할 예정이다. JW중외제약도 일본의 주가이 제약과 C&C 신약연구소를 함께 설립해 통풍치료제 ‘URC-102’(임상 2상 진행 중)를 개발해냈다.
현재 가장 흔한 오픈 이노베이션은 ‘기업-기업’, ‘기업-대학 또는 연구기관’ 형태다. 하지만 제약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는 다수의 기업과 연구기관이 머리를 모아 신약을 개발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보고 있다. 대형 제약사의 한 연구원은 오픈 이노베이션을 ‘연애’에 비유했다. 그는 “각자 아는 남자들, 아는 여자들을 공유하면 그만큼 마음에 맞는 이성을 쉽게 찾을 수 있지 않나. 화합 공식으로 이뤄진 신약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어 “업계의 노력과 함께 정책적으로도 연구개발 활성화를 위한 적극적 지원이 이뤄진다면 글로벌 기업들도 국내 제약기업들과 활발하게 공조하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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