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김성모 동아일보 경영전략실 김성모 기자 공유하기 mo@donga.com

현재 국제부에서 글로벌 주요 이슈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2012년 사회부를 시작으로 소비자경제부와 경제부, 산업부 등을 거쳤습니다. 신문과 방송, 매거진(동아비즈니스리뷰)에서 경험을 쌓았습니다.

최신 순
디즈니가 흑인 인어공주를 택한 이유[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글로벌 신(新) 비즈니스 가이드(37)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인간 세상 다시 등장한 에리얼 “사람들은 이미 본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의 임무는 기존 공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신선하고 새로운 스토리를 발굴해내는 것이다.”1991년 1월, 제프리 카젠버그 월트디즈니 회장(드림웍스 창업자)은 직원들에게 A4 28장 분량의 편지를 보냈다. 직원들이 창의성을 펼쳐 보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글에 담았다. 그것도 아주 길-게. 그는 “스튜디오가 길을 잃었다”면서 “막대한 예산과 유명 배우에 의존하지 말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실행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카젠버그 전 회장의 ‘재탕 금지’ 요청이 받아들여진 것일까. 디즈니는 수년간 다수의 고전 애니메이션을 영화화했는데, 매번 기존 작품에 새로움을 더했다. 절묘한 배역과 신선한 음악, 실감 나는 화면 구성이 영화들을 흥행으로 이끌었다. 신데렐라(2015), 정글북(2016), 미녀와 야수(2017), 알라딘(2019) 등 대부분이 그랬다. 2016년, 디즈니가 ‘인어공주’를 실사화한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기대를 모았다. 디즈니와 관객, 모두에게 인어공주의 의미가 남달라서다. 디즈니가 1989년 선보인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는 바다 왕국의 딸인 인어 에리얼이 인간인 에릭 왕자와 사랑에 빠지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스토리는 모르더라도 주제곡은 한 번쯤 들어봤을 가능성이 크다. ‘언더 더 씨(under the sea)~’ 인어공주는 크게 흥행했고, 디즈니는 전 세계에서 2억3500만 달러(3120억여 원)의 이익을 거뒀다. 창업자 월트 디즈니가 사망하고 침체에 빠졌던 디즈니는 이 애니메이션으로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인어공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주 캐릭터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블룸버그는 “인어공주는 디즈니를 애니메이션 강국으로 만든 중요한 작품”이라면서 “에리얼이 없었다면 겨울왕국의 ‘엘사’도 없었을 것”이라고 평했다.디즈니의 신작 실사 영화 인어공주가 ‘우여곡절’ 끝에 24일 국내 개봉한다. 북미에서는 26일(현지 시간) 극장에 걸린다. 우여곡절이라고 한 이유가 있다. 인어공주가 개봉하기까지 디즈니가 정말 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디즈니 100년 역사상 이 정도로 높은 파도는 없었을 듯하다.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30224/118062328/1● 인어공주 탄생 30주년에 논란의 캐스팅논란은 인어공주 탄생 30주년을 맞은 2019년 시작됐다. 디즈니가 실사 영화의 에리얼 역할에 가수 겸 배우인 할리 베일리를 택했다고 발표하면서다. 흑인 여배우가 인어공주의 주인공 역할을 하게 됐다는 소식에 일부 사람들은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일부는 “어릴 적 꿈이 왜곡됐다”며 좌절했고, “원작을 해치는 무리한 설정”이라는 비판도 쏟아졌다. 온라인에선 “#나의 에리얼이 아니야”라는 반대 해시태그 운동까지 벌어졌었다. 디즈니는 지난해 9월 공식 유튜브 채널에 인어공주 티저 영상을 올렸는데, 공개 2일 만에 100만 개가 넘는 ‘싫어요’를 받았다. 사람들의 불편한 감정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디즈니코리아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공식 예고편은 댓글 창이 아예 폐쇄된 상태. 반대 움직임도 있었다. 지난해 티저 영상이 나오고 미국의 흑인 부모들은 소셜미디어에 동영상을 찍어 올리기 시작했다. 흑인 인어공주를 본 딸들의 반응을 카메라에 담아낸 것. “디즈니 공주 캐릭터에 감정 이입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흑인 엄마들이 적극적으로 동영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프레셔스 에이버리(33)는 “TV에서 흑인 캐릭터(아마, 공주 캐릭터)를 보는 것이 얼마나 드물었는지 알기 때문에, 딸이 인어공주를 보는 순간을 찍고 싶었다”고 했다. 에이버리가 찍은 동영상에서 딸 에메리(3)는 베일리(여주인공 배우)를 보고 “(그녀는) 브라운인 것 같아요. 브라운 에리얼!”이라고 외쳤다. 그럴 만하다. 디즈니 100년 역사에서 흑인 공주는 ‘공주와 개구리(2009년)’의 티아나 공주 한 명뿐이었으니까. 원작을 깨고 흑인 여배우가 공주 역할을 맡은 것은 인어공주가 처음이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해 “엄마들이 올린 동영상은 조회수 수백만 회씩을 기록했으며, 디즈니는 마케팅 대박을 터뜨렸다”고 전했다. ● ‘PC’ 논란의 확산인어공주 논란은 2010년대 들어서며 거세진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논란의 연장선에 있다. ‘정치적 올바름’은 미국 정치권에서 등장했다. 정치인들이 인종이나 성별, 성, 종교, 이민자 등 소수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언어나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현재는 미 국민의 삶에도 뿌리내렸다.흑인 등 소수자를 전면에 배치하는 작품이 늘면서, 일부 관객들은 작품에 불만을 드러냈다. 인종 차별이나 정치적 올바름(PC) 문제를 의식해 꼭 필요하지 않은 설정임에도 억지로 흑인 주인공을 내세웠다는 지적이다. 특히 인어공주와 같은 리메이크 작품들에서 원작과 배치되는 캐스팅이 이어지면서 논란이 확산했다. “다양성은 새로운 작품에서 추구하지, 왜 원작을 바꾸냐”는 의견이 나왔다. 디즈니가 지난해 9월 공개한 영화 ‘피노키오’에서 요정 역으로 흑인 여배우가 등장했고, 지난달 개봉한 ‘피터팬&웬디’의 요정 팅커벨 역할도 흑인 여배우가 연기했다. 실사 영화로 제작 중인 ‘백설공주’의 주인공 역시 원작과 다르게 라틴계 배우가 맡았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HBO맥스는 영화 ‘해리포터’를 TV시리즈로 계획 중인데, 주연 중 한명인 헤르미온느 역할에 흑인 배우를 택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있다. 창작물이 아닌 실존 인물을 다루는 다큐나 시대극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넷플릭스는 최근 역사 다큐멘터리 ‘퀸 클레오파트라’를 공개했는데, 고대 이집트의 전설적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기원전 69년~30년)를 흑인 배우 아델 제임스가 연기했다. 곧바로 “그리스 혈통 백인으로 알려진 클레오파트라를 흑인으로 묘사한 것은 적절치 않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집트 고대유물부 장관을 지낸 고고학자 자히 하와스는 “완전히 가짜”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넷플릭스는 흑인 여성주의 학자인 셸리 헤일리 미 해밀턴대 교수의 조언을 기반으로 흑인 배우에게 역을 맡겼다고 해명했다. 헤일리 교수는 “클레오파트라는 신체적 특성과 별개로 문화적으로 흑인이었다”는 오묘한 주장을 펼쳤다. 클레오파트라의 일생이 흑인 여성에 대한 억압의 역사를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그렇다고 다큐 캐스팅까지…? (참고로, 영화 제작사인 웨스트브룩스튜디오는 흑인 배우 부부인 윌 스미스와 제이다 핑킷 스미스가 설립했다)PC 논쟁은 ‘블랙워싱(blackwashing·흑인화)’ 지적으로 이어졌다. 과거 비(非)백인 역할을 백인이 연기했던 관행을 ‘화이트 워싱’이라고 비판했는데, 이를 뒤집은 것이다. ● 백인 오바마, 흑인 홍길동까지 등장해외에서는 “백인 중심 콘텐츠 업계가 권력을 재분배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블랙워싱 같은 “선을 넘었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PC 논쟁을 수면 위로 꺼내 올린 것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었다. 트럼프는 2015년 대통령 출마 선언 당시 “엘리트 계층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겠다”고 공언했다. “이 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적 올바름”이라고까지 했다. 심지어 ‘PC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트럼프는 2016년 모든 여론 조사 기관의 예상을 깨고 제45대 미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당시 WP는 여론조사 결과가 뒤집힌 이유로 ‘PC’를 꼽았다. 백인 유권자들이 여론 조사에선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막말’을 일삼는 트럼프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히지 못했지만, 투표장에선 트럼프를 찍었다는 해석이다. 그동안 정치적 올바름과 관련한 사례에서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을 꾹 참고 있었는데, 트럼프가 등장하면서 미국 사회가 ‘할 말은 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미 정책연구기관인 케이토(CATO)연구소는 미국인의 4분의 3이 ‘정치적 올바름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토론을 침묵시켰다’고 생각한다는 통계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온라인에서 이어지는 블랙워싱 조롱 현상도 이런 분위기를 보여준다. 최근 소셜미디어에는 가상의 전기(傳記) 영화 포스터들이 올라오고 있는데, 대부분 흑인 유명 인사에 백인 배우들의 얼굴을 합성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포스터에는 영화 ‘라라랜드’의 주인공 라이언 고슬링이 등장한다. 위대한 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가상 전기 영화 포스터에는 마크 월버그를 합성했다. 사람들이 일종의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을 만들어 블랙워싱을 비꼰 것이다.‘홍길동’을 연상하게 만드는 포스터도 있었다. 홍길동 패랭이를 쓴 할리우드 흑인 배우 웨슬리 스나입스가 나온다. 이는 국내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나는 단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싶었다’는 설명이 눈길을 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아르헨티나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에 흑인 배우의 얼굴을 합성한 그림도 있었다. 그렇다면, 디즈니는 이처럼 격렬한 PC 논쟁 분위기에도 왜 흑인 인어공주를 택했을까. ● 과거의 할리우드에 작별 인사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고민이 반영됐을 가능성이 있다. 그동안 미국의 콘텐츠 업계는 철저하게 ‘남성’, ‘백인’ 중심이었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 맥킨지에 따르면, 미 영화 산업 경영진의 92%가 백인(TV 업계에선 87%)이다.2017년 앤젤리나 졸리, 기네스 펠트로 등 할리우드 유명 여배우들이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에게 성추행, 성희롱을 당했다고 뉴욕타임스(NYT)에 고백하면서 업계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전 세계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2020년에는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 있었다. 당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하면서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불길처럼 번졌다. 콘텐츠 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업계는 흑인 배우에게 주연을 맡기는 등 소수자에게 기회를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는데, 특히 넷플릭스가 적극적이었다. 넷플릭스는 외부 기관에 연구비를 내면서까지 자사 콘텐츠의 다양성을 점검하고 있다. 넷플릭스가 지난달 발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넷플릭스 미국 영화, TV시리즈에서 주인공(공동 주연 포함)의 47.5%가 비백인이었다. 2018년 28.4%에서 껑충 뛰었다.‘PC 경쟁’을 하듯 디즈니도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은 로맨스보다 자매애에 초점을 맞췄고, ‘모아나’에는 당차고 씩씩한 여주인공을 등장시켰다. 멕시코의 명절인 ‘망자의 날’을 배경으로 하는 ‘코코’는 섬세한 고증으로 히스패닉계 미국인과 이민자들에게 호평받기도 했다. 흑인 히어로를 등장시킨 ‘블랙 팬서’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인종차별적인 내용이 담긴 디즈니의 고전 작품들이 소환되기도 했다. 디즈니는 2021년 고전 애니메이션인 ‘피터팬(1953년)’과 ‘덤보(1941년)’에 ‘7금(7세 이하 어린이 관람 금지) 딱지’를 붙였다. 인종차별적인 내용이 일부 포함됐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다.디즈니가 ‘흑인 인어공주’를 택한 것이 이 같은 ‘흑역사’를 덮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NYT는 디즈니가 인어공주 캐스팅을 발표한 2019년 “디즈니는 리메이크로 ‘문제가 있는 유산’을 수정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과거를 다시 쓰는 것이 디즈니를 더 진보적으로 만들지 못한다”고 평했다. “과거 작품을 본 사람들이 가진 강렬한 이미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모아나, 코코처럼 새로운 작품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흑인 인어공주와 오징어 게임 사람들의 영화 관람이 영화관에서 OTT로 이동한 것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해외에서는 영화관 관객 수가 팬데믹(대유행)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OTT 때문이다. OTT 등장 이후 사람들의 콘텐츠 이용이 크게 달라졌다. 예전에는 비싼 돈을 내고 영화관을 찾아가 신중하게 볼 영화를 골랐다면, 지금은 보고 싶은 시간에 소파에 앉아 시청하고 싶은 만큼 콘텐츠를 본다. 몇 편을 보든 지급하는 돈은 똑같다. 월 구독료만 내면 된다. 생각해보니, 영화 관람이 TV 시청과 여러모로 비슷해졌다.문제는 고객들이 매달 꼬박꼬박 구독료를 내도록 묶어둬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려면 물량 공세와 제각각인 취향을 만족시킬 만큼의 다양성을 갖춰야 한다. ‘마블 영웅들’만으로 관객을 붙잡기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다. 통계를 보면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OTT 순위 집계 사이트인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미국 호주 등 영어권 국가의 인기 순위에서 북미 콘텐츠는 80~85%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콜롬비아에서는 이 비중이 절반밖에 안 된다. 한국과 일본에선 35%에 그쳤다. 기존 백인 중심의 할리우드 프로그램만으로 남미, 아시아 관객을 OTT에 묶어 두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최근 콘텐츠 기업들이 다양한 인종을 캐스팅하거나, 소수자를 기존보다 많이 등장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콘텐츠 다양성 자체가 하나의 전략이 됐다.‘오징어 게임’ 같은 비(非)영어권 프로그램이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 끈 것도 포인트다. 제작비를 적게 들이고도(블록버스터급 영화에 비해) 대박을 터뜨리는 사례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생각지도 못한 아시아 콘텐츠가.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OTT 등장으로) 업계에 과거보다 많은 문화가 생겨났고, 국적은 훨씬 덜 중요해졌다”면서 “한국 배우들이 출연하는 K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에서 가장 많이 본 프로그램에 오르고 나서야 다들 이를 깨달았다”고 전했다.기업들은 영화관 개봉과 OTT 공개 시점을 다양하게 조합해 보면서 성공 방정식을 열심히 찾고 있다.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들어가는 영화에서도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게 됐다. 블룸버그는 “트렌드 변화(PC 등 다양성 증가)가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면서 “일부 관객이 이를 불편하게 여겨 흥행을 저조하게 만든다고 해도 기업들은 OTT 등에서 수익을 만회할 여지가 있다”고 분석했다.밥 아이거 디즈니 최고경영자(CEO)는 “콘텐츠 다양성은 중요할 뿐만 아니라 회사의 핵심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 ‘PC’가 돈이 된다 영화나 드라마에 다양성을 반영하면 수익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도 있다. 온라인 미디어 기업인 웨베디아의 연구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15~24세 여성 영화 관람객은 200만 명 수준(1주일 기준)으로 같은 나이의 남성 관객(170만 명)보다 많았다. 미 블룸버그는 “할리우드는 남성 캐릭터가 지배하는 슈퍼히어로 영화를 대량 생산하지만, 젊은 여성이 성공의 ‘키’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흑인 관객의 영향력도 커지고 있다. 미국 영화협회에 따르면, 한 달에 한 번 이상 영화를 보러 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숫자가 2012년 이후 27% 늘었다. 같은 기간 백인 관객은 21% 감소했다. 맥킨지에 따르면, 흑인 배우가 많이 등장하거나 역할 비중이 클수록 더 많은 흑인 관람객이 영화관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개봉한 ‘블랙 팬서’의 속편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가 이를 증명했다. 흑인 영웅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블랙 팬서 시리즈는 개봉 전부터 흑인 사회에서 기대를 모았다. 영국 여론조사 회사 유고브의 조사에서 흑인 응답자의 약 4분의 3이 블랙팬서를 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백인은 절반 미만이었다.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4억3500만 달러(약 5800억 원)의 역대급 수익을 기록했다.넷플릭스가 PC 논란을 정면 돌파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넷플릭스는 2020년 말, 1800년대 영국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브리저튼’을 선보였는데, 흑인 귀족을 등장시켜 비판받았다. 그러자, 최근에는 아예 흑인 영국 왕비를 주인공으로 한 외전(샬럿 왕비: 브리저튼 외전)을 내놓았다. 이 작품은 글로벌 인기 순위 1위에 올랐다. 맥킨지는 2021년 보고서에서 “영화 업계는 흑인 배우가 출연하는 콘텐츠가 미국 밖에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면서 “흑인이 주연으로 나오는 ‘맨 인 블랙’ 시리즈의 수입 중 3분의 2가 해외에서 나왔다”고 평했다. 맥킨지는 콘텐츠 산업에서 인종 불평등을 해소하면 연 100억 달러(약 13조3700억 원)의 추가 이익을 거둘 수 있다고 분석했다. ● 디즈니의 네버엔딩 스토리디즈니는 다른 콘텐츠 기업보다 인구 통계에 관심이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디즈니가 영화만 판매하는 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디즈니의 비즈니스 모델은 신비월드 31화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실사 영화 인어공주는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과 그림책, 인형 등 장난감, 놀이공원, 리조트까지 다양한 비즈니스와 얽혀 홍보될 것이다. 캐스팅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영화 관련 상품이 벌써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최근 흑인 인어공주가 미국 최대 전자상거래 플랫폼 아마존에서 인형 부문에서 판매 1위를 기록했다. 아마존에 등록된 인어공주 인형은 14.99달러(약 2만 원)에 판매되고 있다. 눈썹 위 점까지 영화 속 할리 베일리와 똑 닮았다. 만약, 디즈니가 백인 인어공주를 택했다면, 영화가 개봉도 하기 전부터 인형이 이만큼 팔렸을까. 기대감이 덜할 수 있는 리메이크 작품을 몇 년 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한 것만으로도 성공한 마케팅 같다. 디즈니는 그동안 고전 만화를 영화화해 꽤 재미를 봤다. 디즈니는 9500만 달러(약 1270억 원)의 예산으로 신데렐라를 영화화했는데 5억3500만 달러(약 7140억 원)를 벌었다. 9억6300만 달러(약 1조2800억 원)의 이익을 거둔 영화 정글북의 예산은 1억7500만 달러(약 2300억 원)에 불과했다. 2017년 개봉한 영화 미녀와 야수의 예산은 3억 달러(약 4000억 원)로 “지나치게 높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12억 달러(약 1조6000억 원)나 벌어들였다. 이코노미스트는 “관객들이 이미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리메이크하는 것은 영화판에서 가장 수익성 좋은 혁신 중 하나”라며 “디즈니의 ‘네버 엔딩 스토리’”라고 평했다. 최근 미국에서 열린 인어공주 시사회에선 평론가들의 호평이 쏟아졌다. 과연, 흑인 인어공주는 개봉 전 실망한 관객들의 마음도 되돌릴 수 있을까. 결과가 궁금하다. 김성모기자 mo@donga.com}2023-05-20 10:00
코카콜라입니까, 펩시입니까?[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2등 같은 1등, ‘펩시’코카콜라, 펩시코 등 미국 콜라 회사들이 1분기 깜짝 실적을 내놨다. 코카콜라는 올해 1분기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 늘어난 109억8000만 달러(약 14조7200억 원)를 기록했다고 지난달 24일(현지 시간) 밝혔다. 시장 전망치(108억 달러)를 웃돌았다. 순이익도 31억1000만 달러(약 4조1700억 원)로 전년보다 12% 증가했다. 펩시코도 웃었다. 펩시코의 1분기 매출은 178억5000만 달러(약 23조9400억 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 이상 증가했다. 펩시코는 올해 매출 연간성장률 전망치도 기존 6%에서 8%로 올렸다.인플레이션에 따른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가격을 올린 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펩시코는 실적 발표에서 “1분기에 제품 판매량이 2% 감소했지만, 가격을 16% 올려 매출이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코카콜라는 가격을 비슷하게 올렸는데도 판매량이 3% 늘었다. 세계 최대 음료 판매 기업답다. 고물가 시기에는 기업들이 원자재나 인건비 부담 등을 이유로 제품 가격을 올린다. 고객에게 비용을 전가해 수익성을 개선하는 것이다. 생활필수품 회사나 애플처럼 가격결정력(상품값을 올려도 사고 싶은 마음이 크게 줄지 않는)이 있는 기업일수록 이를 잘 활용한다. 콜라 회사들도 비슷한 전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는 콜라를 사실상 생필품으로 분류한다. 피자, 햄버거에 콜라가 빠지기는 어려울 것 같긴 하다. 인정. 이번 신비월드에서는 창립 125주년을 맞은 펩시코를 소개한다. 1898년 사업을 시작한 펩시코는 콜라 시장에서 후발주자다. 코카콜라(1892년 출시)보다 늦게 출발해 ‘만년 2등’ 이미지가 강하다. 반면, 돈은 훨씬 더 잘 번다. (미국 주식 투자자들에게는 꽤 알려진 사실) 펩시코는 2000년대 초반부터 매출에서 코카콜라를 앞질렀다. 지난해 펩시코와 코카콜라는 각각 860억 달러(약 115조3000억 원), 430억 달러(약 57조7000억 원)의 매출을 거뒀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펩시가 코카콜라를 앞선 것일까. 그럴 리가. 콜라 시장에서 펩시코는 여전히 코카콜라 뒤를 쫓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미국 탄산음료 시장에서 코카콜라의 점유율(2021년 기준)은 46.3%에 달한다. 펩시(25.6%)의 두 배에 가깝다. 펩시의 점유율은 2000년대 중반 30% 수준에서 계속 떨어졌다.다수의 소비자가 코카콜라를 더 맛있다고 생각한다. 요식업 전문 매체인 매시드가 2021년 전 세계 3만6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64%가 코카콜라를 더 좋아한다고 밝혔다. 36%만 펩시가 낫다고 답했다. “코카콜라 맛있다”는 아이돌 뉴진스의 가사가 옳다.● 소련 무장해제 시킨 펩시 펩시코가 실적에서 코카콜라를 누른 비결은 사업 포트폴리오에 있다. 도리토스, 치토스, 프리토스, 레이즈, 러플즈, 토스키토, 썬칩 등 한국 소비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과자’ 브랜드의 상당수가 펩시코가 보유한 스낵회사 프리토-레이의 제품들이다. 현재 펩시코의 연 매출에서 스낵 등 식품 비중은 50%를 넘어선다. 음료 부문도 구성이 다양하다. 탄산음료로 펩시와 세븐업, 시에라미스트, 마운틴듀, 스태리 등이 있다. 게토레이(스포츠음료), 아쿠아피나(생수), 소다스트림(홈메이드 탄산수) 립톤(차음료) 등도 전부 펩시코 제품이다. 미국의 스타벅스에서 판매 중인 캔음료 역시 펩시코가 납품하고 있다.반면, 코카콜라는 음료에 집중했다. 코카콜라와 스프라이트, 비타민워터, 미닛메이드, 몬스터에너지드링크, 바디아머 등을 보유 중이다.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뻗어 있는 음료 유통 네트워크가 코카콜라의 강점 중 하나다. (바디아머는 NBA 선수들이 많이 찾는 스포츠음료로 코카콜라가 2021년에 인수했다. 방탄복 회사를 산 줄 알았다) 도널드 켄달 전 최고경영자(CEO)가 펩시코 사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세일즈맨’ 출신인 켄달은 1963년 42세의 나이로 펩시코 수장 자리에 올랐다. 그는 사람들이 음료를 마실 때 스낵을 함께 먹는다는 점을 눈여겨보고, 1965년 미국 국민 감자칩 브랜드 프리토-레이의 인수를 주도했다. 인수합병(M&A) 당시 두 회사의 회장은 “천국에서 맺은 결혼”이라고 했다. 콜라와 감자칩의 ‘단짠단짠’이 완성되는 순간을 적절히 표현한 듯하다. 현재 미국의 스낵 인기 순위에서 톱 10 중 7개가 프리토-레이 제품이다. 켄달은 ‘마케팅 귀재’로 꼽힌다. 그는 1959년 친구인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에게 부탁해 소련 지도자인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시초프) 공산당 총리·서기장이 한 행사에서 펩시를 마시도록 판을 짰다. 각국 언론에서 흐루쇼프 총리가 펩시를 맛있게 마시는 장면이 보도됐고, 회사 브랜드 가치는 급상승했다. 냉전 시기에 놀랄 만한 일이었다. 펩시코는 1974년 소련에서 콜라를 팔기 시작했는데, 당시 소련은 미국과 냉전 중이라 물물교환만 가능했다. 펩시코는 콜라 원액을 주고 토마토 농축액이나 보드카 등을 받았다. 이후 펩시 수요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소련은 공장을 늘리는 대가로 17척의 잠수함과 3척의 군함을 줬다. 켄달은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에게 “우리가 당신들보다 더 빠르게 소련을 무장해제 시키고 있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펩시코의 건축가들펩시코는 1983년 마이클 잭슨과 500만 달러(약 67억 원)에 모델 계약을 체결하면서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코카콜라가 잭슨에게 제안한 금액의 5배 수준이었다. 켄달의 ‘펩시 첼린지’는 지금도 곧잘 회자되는 마케팅 사례다. 펩시코는 고객들에게 펩시와 코카콜라를 블라인드 테스트했다. 그 결과, 펩시의 맛이 뛰어나다고 응답한 사람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펩시코는 이를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펩시 세대’라는 용어를 만들어 코카콜라를 구세대 음료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켄달은 이러한 마케팅으로 한때 펩시의 시장점유율을 코카콜라와 비슷한 30%대까지 끌어올렸다. 이전에 펩시의 점유율은 코카콜라 ‘반의반’ 수준이었다. 그가 CEO로 재직한 23년 동안 펩시코의 매출은 40배 성장했다. 펩시코는 2020년 켄달이 세상을 떠날 때 “그는 펩시코의 건축가였다”라면서 경의를 표했다.켄달이 프리토-레이를 인수하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펩시코 사업을 다각화한 것은 인드라 누이 전 CEO였다. 누이는 펩시코 재무책임자로 있다가 2006년 CEO에 올랐다. 그는 펩시코를 건강한 이미지의 종합 음료·식품 회사로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펩시코는 1990년 후반부터 여러 식품 기업을 인수하고 매각하는 작업을 반복했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누이였다. 누이는 피자헛, KFC 등 회사의 패스트푸드 부분을 정리하고, 주스업체 트로피카나와 스포츠음료 회사 퀘이커오츠 등을 인수했다. 식품에서는 스낵업체 토스티토스와 베어푸드(야채·과일칩 브랜드)를 사들였다. 퀘이커오츠는 스포츠음료 ‘게토레이’를 소유한 회사다. 북미에서는 오트밀 제품을 많이 판매해 건강식품 기업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퀘이커오츠는 원래 코카콜라에 인수를 제안했는데, 워런 버핏이 이를 반대했다. 그 사이, 당시 펩시코 부사장이었던 누이가 코카콜라보다 20억 달러 낮은 138억 달러(약 18조4400억 원)에 회사를 인수했다. 이 공로로 누이는 CEO로 승진했고, 버핏은 코카콜라 이사회에서 사퇴했다. 현재 미 스포츠음료 시장에서 게토레이의 점유율은 60% 이상으로 압도적이다. 펩시코는 게토레이로만 매년 6조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참고로 93세의 버핏은 하루 5캔 마실 정도로 코카콜라를 사랑하지만, 과거 48년 동안 펩시만 마셨다. 버핏의 아들이 지은 그의 별명은 ‘펩시 워런’이었다. (체리 맛 코카콜라에 빠져서 갈아탔다)● 거품 빠진 콜라들 누이가 수장을 맡은 뒤, 펩시코는 건강식품을 만드는 회사로 영역을 더 넓혔다. 펩시코는 2008년 브라질 코코넛워터 업체 아마코코를 인수하고, 미국 허머스(병아리콩을 으깨 만든 중동 음식) 제조사 사브라의 지분 50%를 매입했다. 다음 해에는 중동 최대 유제품 업체인 알마라이와 합작사를 설립하기도 했다.그는 고객들의 건강에 진심이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누이는 임원을 아이슬란드에 보내 해초를, 인도에 보내 고대 전통 의학으로 알려진 아유르베다를, 아마존 계곡과 아프리카 정글로 보내 고대 곡물과 식물을 연구시켰다. 건강식품의 원료를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 누이는 펩시코 제품을 3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감자칩과 탄산음료처럼 맛에 중점을 둔 상품과 오트밀 등 건강식품, 마지막으로 다이어트 식품이다. 그는 2010년 “펩시코 매출에서 영양가 높은 제품의 비중을 10년 안에 현재의 3배로 늘리겠다”고 밝혔다.펩시코가 사업을 확장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설탕’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 인식과 규제 때문이다. 건강에 관한 관심이 커지면서 미국에서 탄산음료 소비는 꾸준히 줄었다. 미국의 1인당 탄산음료 소비량은 1990년대 후반 200L로 정점을 찍었다. 2016년에는 미국에서 생수가 처음으로 탄산음료 판매량을 넘어섰다. 영국, 프랑스 등에서는 과당류에 별도에 세금(콜라세)을 부과하기 시작했는데, 사실상 탄산음료를 겨냥한 정책이었다. 누이의 빠른 전략 변경으로 펩시코는 정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펩시코는 2005년 12월 시가총액으로 코카콜라를 제쳤다. 112년 만이었다. 2018년 포천 500대 기업에서 펩시코는 코카콜라(87위) 보다 높은 45위에 올랐다. 누이는 12년간 펩시코를 경영하면서 연평균 매출을 5% 이상씩 성장시켰다. 대단한 업적이다. 그는 펩시를 즐기는 것 같지는 않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누이는 얼음처럼 차가운 펩시의 맛을 좋아한다고 열정적으로 말하지만, 일주일에 (펩시를) 3번만 마신다”고 전했다. 매일 아침 6시 45분에 일어나 코카콜라부터 찾는 버핏과는 다른 모습이다.● 펩시코의 새로운 건강 식단2018년 누이 다음으로 취임한 라몬 라구아르타 CEO는 전임자와 다소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라구아르타는 최근 콜라와 감자칩 판매에 조금 더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탄산음료와 스낵 등 주력 제품을 개선해 판매를 늘리겠다는 전략이다. WSJ은 지난달 ‘펩시의 새로운 건강 식단: 더 많은 감자칩과 탄산음료’라는 글에서 “수년 동안 펩시코는 정크푸드의 뿌리에서 벗어나 허머스, 콤부차, 야채칩, 견과류 등으로 사업을 전환하려고 노력했다. 최근에는 콜라, 감자칩을 밀어붙이고 있다”고 전했다. 펩시코는 재생 농업 방식으로 재배한 감자를 사용하고, 친환경 포장을 한 제품을 전기 트럭으로 배송하겠다고 밝혔다. (펩시코는 최근 테슬라의 전기트럭 ‘세미’의 첫 고객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가이드라인에 맞출 수 있도록 제품에 포함된 설탕, 소금, 포화지방을 낮출 것이라고 강조했다. 라구아르타는 “사람들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콜라나 감자칩)에 집중하는 것은 사업에만 좋은 것이 아니다. 공중보건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사람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탄산음료와 과자를 찾는다면, 몸에 좋은 제품을 제안하는 것보다 차라리 콜라와 감자칩을 건강하게(?) 만드는 편이 인류의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현재 회사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맛’이다. 제품에 들어가는 소금과 설탕을 기존보다 줄이면서 현재의 맛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미 텍사스주 플라노에 있는 프리토-레이의 스낵본부가 여러 실험을 진행 중이다. 과자에 새로운 소금 결정, 염화칼륨을 넣거나 허브 및 향신료의 조합을 바꿔보고 있다. 회사의 식물교배연구소에서 개발한 감자 품종으로 포테이토칩을 만들어보기도 한다. 맛은 외부 전문가들이 감별한다. 스낵본부는 전문가 10여 명을 고용해 일주일에 3번 새롭게 개발한 감자칩과 쿠키, 오트밀 등을 맛보게 하고 있다. 맛과 식감 등에서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이들의 업무. 전문가들은 기름기 정도, 씹을 때의 식감, 제품을 삼킨 뒤 느껴지는 뒷맛 등의 항목을 0에서 15로 평가한다. WSJ은 “음식을 씹으면서 ‘음’, ‘우웩’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도록 훈련된 테스터들은 감자칩의 맛을 27가지 속성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전했다. 시간당 19~20달러를 받고, 스낵까지 맛보다니 괜찮은 직업 같다.라구아르타는 회사의 장기적인 성장을 위해선 핵심 브랜드를 개선하고 시장 점유율을 높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듯하다.전임 CEO가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장해 매출을 끌어올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펩시코의 콜라, 감자칩 같은 주요 상품들을 등한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이 시기에 펩시코 탄산음료의 점유율이 20% 초반까지 하락했었다. WSJ은 2018년 “펩시코가 지난해(2017년) 생수, 레몬 소다 같은 새롭고 건강한 음료에 집중해 펩시, 마운틴듀 등 핵심 브랜드 판매에 타격을 입혔다”고 전했다.투자자들의 공격도 있었다. 당시 펩시코 지분을 보유한 투자자 넬슨 펠츠는 이러한 약점을 파고들어 경영에 간섭했고, 누이는 “비용 절감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탄산음료 마케팅을 강화하겠다”고 밝히는 등 진땀을 뺐다. 펩시코가 최근에 실적이 좋기는 했지만, 경제 여건에 따른 일시적인 수혜라는 분석도 있다. 라구아르타가 CEO를 맡은 직후에는 펩시코 매출이 감소세였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이 해소되고 경제가 정상화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의미다. ● M과 Z의 차이주요 소비층의 변화도 라구아르타의 사업 전략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Z세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제품을 맛있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알릭스파트너스의 조사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의 66%와 밀레니얼 세대의 53%가 스낵을 구매할 때 ‘맛’을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시장조사기관 패키지팩트의 노먼 데샹 연구원은 “이들은 모여서 감자칩, 프레즐을 먹지 그래놀라바를 먹지 않는다”고 했다. Z세대는 앞선 세대와 다르게 맛보다는 체중 유지 같은 ‘자기관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국제식량정보협의회(IFIC)가 지난해 미국인 1005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Z세대 중 27%가 식습관에서 열량 계산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비슷한 비중(26%)이 자연에 가까운 식재료를 선호(클린 이팅)했다. 음식을 대체로 가리지 않고 포만감이 느껴질 때까지 먹는 ‘마인드풀 이팅’은 19%에 그쳤다. 체중 관리 때문이다. 조사에서 Z세대의 4명 중 3명이 “최근 1년간 다이어트에 준하는 식습관을 따랐다”고 했다. 같은 응답을 한 X세대는 51%, 베이비붐 세대는 29%였다. IFIC는 “Z세대는 상대적으로 외모 개선과 건강관리에 관심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탄산음료와 스낵의 성분을 건강하게(사실은 덜 나쁘게) 바꾸려고 노력한다면, 관련 기업에는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 Z세대의 77%가 “적어도 하루에 한 번 간식을 먹는다”고 답했고, 하루 두 번 간식을 먹는 비율도 34%에 달했다. 라구아르타가 콜라와 감자칩을 건강하게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은 주요 소비층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Z세대를 사로잡기 위한 전략적 판단일 수 있다. 고객들에게 ‘펩시코의 제품은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역할도 할 것이다. 펩시코가 최근 펩시의 로고를 바꾸는 리브랜딩 작업에 돌입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 로고 심장에 다시 새긴 ‘펩시’ 펩시코는 1950년대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둥근 문양 안에 ‘PEPSI’ 글자를 넣은 일체형 펩시 로고를 선보였다. 그러다가 2008년 그림과 글자를 분리했다. 나이키 ‘스우시’나 스타벅스의 ‘사이렌’처럼 글자 없이 문양만으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려 했다. 그러다가 올해 3월 고전적인 로고 방식을 다시 끌어왔다. 이번 로고는 1987년부터 1997년까지 사용한 로고와 사실상 모양은 똑같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펩시 글자와 로고 주변의 배경 색을 검정으로 교체한 부분이다. 탄산음료 회사들은 무설탕 탄산음료의 포장에 검은색을 활용한다. ‘코카콜라 제로’, ‘칠성사이다 제로’ 등을 보면 글자든 배경이든 어딘가에 이 색이 들어가 있다. ‘설탕’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펩시가 아예 브랜드 로고에 검은색을 넣은 것이다.펩시코 마케팅 책임자인 토드 카플란은 “많은 사람이 제품이나 로고에 검은색이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 못한다. 하지만, 탄산음료에서 ‘제로’ 하면 ‘다이어트’를 떠올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일으킬 것”이라고 설명했다.많은 기업이 이 같은 무의식 마케팅을 활용한다. 아마존(amazon) 로고를 보면 ‘a’와 ‘z’ 사이에 화살표가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소비자들에게 ‘우리는 a부터 z까지 모든 물건을 다 판매한다’는 인식을 심으려는 의도가 담겼다. 펩시코의 최근 움직임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도 있다. 탄산음료, 스낵에서 설탕을 줄이겠다고 선언하고, 브랜드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 사실은 ‘여론 전환용’이라는 것이다. WHO에 따르면 현재 최소 85개국에서 ‘콜라세’를 부과하고 있는데, 최근 이 세금을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국가에서 나오고 있다. 지난해 갤럽 조사에서는 미국, 인도, 요르단, 탄자니아, 콜롬비아 성인의 절반 이상(59%)이 콜라세 인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블룸버그는 3월 “펩시의 새롭고 현대적인 모습은 단순히 브랜드를 차별화하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탄산음료와 패스트푸드에 대한 부정적인 관심을 분산시키려는 꼼수이기도 하다”라고 꼬집었다. 김성모기자 mo@donga.com}2023-05-06 10:00
“해고 통보를 이메일로 하다니ㅠㅠ”[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오징어게임 같은 재택근무 견고했던 미국 노동시장이 흔들리고 있다. 지난해 말 미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시작된 정리 해고가 최근 소매·제조 업계로 확산하는 분위기다.세계 최대 패스트푸드 기업인 맥도날드는 이달 3~5일(현지 시간) 미국 내 사무실을 일시 폐쇄하고 직원들에게 일시적 재택근무를 지시했다. 비대면으로 해고 통보하기 위해서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정리해고는 영업, 재무, 마케팅 등 부서 전반에 걸쳐 진행됐다. 회사에서 20년 이상 일한 보험 부서의 부사장급 임원도 해고 통보를 받았다.맥도날드는 일부 직원의 급여를 삭감하고 보너스 등도 변경했다. 올해 2월 기준으로 맥도날드 전체 직원 수는 약 15만 명이다.맥도날드의 구조조정이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크리스 켐진스키 맥도날드 최고경영자(CEO)는 메뉴 간소화, 인력 감축 등의 구조조정 계획을 일찌감치 예고했다. 그는 올해 1월 “일이 중복되고 혁신이 늦어졌다. 일부 작업이 이전되거나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미국에서는 지난해부터 IT 회사들을 중심으로 대량 해고가 이어지고 있다. 맥도날드의 정리해고 대상은 수백 명가량으로 각각 1만 명 이상을 내보낸 메타, 구글에 비해 놀랄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맥도날드의 구조조정이 주목받을 ‘뉴스’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맥도날드의 정리해고는 꽤 주목받았다. 해고 통보 방식 때문이다. 맥도날드 직원들은 내부 규정상 재택근무를 최대 주 2회 할 수 있다. 맥도날드는 비대면 정리해고를 위해 직원들에게 이보다 하루 더 많은 3일간의 재택근무를 명령하고, 이 기간에 본사에서 예정된 외부인들과의 회의도 취소하라고 했다. 그러자, 팬데믹(대유행)도 끝났는데, 굳이 정리해고를 비대면으로 단행했어야 했느냐는 지적이 나왔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8일 “맥도날드가 직원들을 해고하기 위해 사무실까지 닫았다. 좋은 생각이었을까”라고 물음표를 던졌다.직원들은 집에서 머무는 동안 이메일과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지 않았을까. 굉장히 긴장되는 재택근무였을 듯하다. 정리해고에서 살아남았다고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가까운 동료가 더 이상 안 보일지 모른다. ‘오징어게임(넷플릭스 시리즈)’이 따로 없다.● “신종 피싱인 줄 알았어요”2020년 4월 WSJ은 “여행 관련 스타트업인 트립액션즈가 처음으로 다수의 직원에게 비대면으로 해고를 통보했다”고 전했다. 트립액션즈는 2020년 3월 줌(화상회의 시스템)을 통해 전 직원의 25%가량인 300명의 직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수년 동안 회사에 헌신한 직원에게 이메일 한 통으로 해고 소식을 보내는 것이 잔인해 보일 수 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코로나19가 한창 확산할 때는 이메일이나 전화로 소식을 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병원에 있던 가족도 못 만나는 시기였다. 아리엘 코헨 트립액션즈 CEO는 해고 방식에 대해 논란이 일자 “화상회의로 직원을 해고하는 것이 끔찍할 수 있다”면서도 “다른 선택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사실, 비대면 대량 해고는 한국에서 훨씬 먼저 있었다. 외환은행을 인수한 미 사모펀드 론스타는 2004년 2월 27일 오전 3시에 외환카드 해고 대상자들에게 “명퇴를 신청하지 않으면 정리해고하겠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냈었다)미국 직장인들은 경제활동이 정상화되고, 최소 주 1~2회 사무실로 출근하는 현 상황에서도 기업들이 ‘비대면 해고 통보’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구글의 소프트웨어 개발자 제러미 조슬린은 올 초 본인이 회사에서 잘렸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받았다. 그는 새벽 5시 30분에 개인 메일함에서 이를 확인했다. 처음에는 ‘피싱(사기)’을 떠올렸다. 경기침체로 IT 업계가 인력 감축에 돌입한 것을 악용한 것이라고 판단했다.메일은 “해고자 전용 웹사이트로 접속해 아이디를 설정하라”고 안내했다. 조슬린은 불안한 마음에 회사 이메일을 확인하려 했다. 접속이 되지 않았다. 그는 회사에서 20년을 보낸 베테랑이었지만, 회사와 헤어지는 순간만큼은 지극히 평범했다. 다른 1만1119명의 해고자와 똑같은 이메일 통보를 받았다. 조슬린은 “이메일 내용에 모욕감을 느꼈다”고 전했다.복스미디어(VOX)에서 근무하던 케렌사 카데나스도 ‘비대면 해고’의 희생자 중 한 명이다. 1월 재택근무 중이던 카데나스는 슬랙(업무용 메신저)을 열었다가 욕설로 가득 찬 메시지를 받았다. 방금 회사서 잘린 동료의 연락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이메일을 확인했다. 곧바로 메신저를 켜고 동료에게 답장을 적기 시작했다. 키보드를 꾹꾹 눌러 욕설을 채워나갔다. 그 역시 이메일로 해고를 통보받았다. 뉴욕타임스는 1월 “정리해고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경험 중 하나로 연구에 따르면 이혼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면서 “원격으로 정리해고를 하다 보면 회사가 실수할 수 있고, 조직을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지난해 11월 트위터를 인수한 직후 성급하게 대량 정리해고에 나섰다가 구설에 올랐다. 트위터는 한밤중에 직원들에게 이메일로 해고 사실을 통보했는데, 일부 필수인력까지 포함된 것을 깨닫고 뒤늦게 복귀를 간청했다. ● 페이스타임(영상통화) vs. 페이스타임(대면)비대면 해고를 ‘재택근무’처럼 새로운 업무 환경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재택근무자들이 혼재된 현 상황에서 대량 해고를 전부 대면으로 하기는 어렵다는 주장이다. “비대면 해고가 덜 창피해서 좋다”는 일부 직원도 있었다.소비재 회사에 다니던 신시아 황은 2월 사무실 출근과 재택근무를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화상통화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다. 당시, 사무실에 있던 다른 해고자들은 대면으로 같은 이야기를 듣고 출입증을 반납했다.황은 “사무실에서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짐을 싸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안했다”면서 “해고당하려고 사무실로 나가는 건 좀 이상하지 않으냐”고 했다. ‘이메일 정리해고’가 조직의 안정성을 빠르게 되찾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일부 인사 담당자의 의견도 있다. 힘든 소식을 단체 이메일로 한 번에 전달하면, 비(非)해고자들은 두려움을 금방 떨칠 수 있다. 해고자와 비해고자를 빠르게 나누는 편이 낫다는 설명이다.조직 혁신 및 조직 행동 분야의 권위자인 로버트 서튼 미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책 ‘또라이 제로 조직’ 저자)는 “3년 전에는 (비대면 해고가) 특이한 처벌 같다고 말했겠지만, 팬데믹 이후에는 업무나 조직 문화가 극적으로 변해서 혼란스럽다”고 했다. 미국의 직장인들은 ‘카톡 이별’ 같은 비대면 해고보다, 상사의 얼굴(또는 인사팀)을 마주한 상태로 해고 소식을 듣고 싶다고 밝혔다. 여론조사기관 서베이몽키가 1월 미 직장인 98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67%가 대면 해고 통보를 선호했다. 11%는 이메일로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답했고, 7%는 화상회의를 택했다. 서베이몽키는 “일부 비대면 해고를 원하는 직장인도 있었지만, 다수는 대면으로 통보받기를 희망했다. 심지어, 재택근무자도 대면 해고를 선호했다”고 했다.올해 초 1만8000명을 자른 아마존은 이메일로 정리해고를 진행했지만, 해고자들이 상사나 인사 담당자와 직접 대화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회사와 직원의 이별 공식전문가들은 해고 통보 방법보다 전달 내용에 신경 쓰라고 조언한다. 리더십 전문가인 에리카 다완은 “작별 이메일에 각 직원이 회사에서 공헌했던 일들과 회사와 네트워크를 유지할 수 있는 연락처 등을 담으라”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전했다. 직원에게 회사의 마지막 인상을 잘 남기라는 설명이다. 사실, 어떻게 헤어지든 이별은 아프다. 차라리 해고자를 신중히 선택하는데 집중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해고자 선정에는 예나 지금이나 ‘성과’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시대를 이끄는 IT 기업도 해고자를 선정할 때는 구식을 따른다.NYT는 “메타와 아마존은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스택랭킹’을 활용해 저성과자들을 가장 먼저 해고 대상자로 찍었다”고 전했다. 스택랭킹은 직원들의 성과를 점수나 등급으로 환산해 평가하는 GE의 인사평가 방식이다. 미국기업 역사상 최고의 CEO로 꼽히는 잭 웰치 전 GE CEO가 1980년대에 이를 대중화시켰다. 물론, 과거처럼 성과나 연공 서열만 보는 것은 아니다. WSJ은 “과거에는 (해고자를 고를 때) 성과나 근속 기간이 주요 고려 대상이었는데, 최근에는 보유 기술이나 직무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난달 전했다. 일부 해고자가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도 있다. “내가 살아남은 동료보다 못한 게 뭐가 있느냐”고 항의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인사 컨설팅사인 PGHR컨설팅의 필리스 하트만 대표는 “엄격한 기준 없이 다수를 해고하면, 불만을 품은 일부 직원이 법적으로 대응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고 했다. ‘소송의 나라’ 미국답다. 메타나 아마존이 해고자를 선별하는데 1980년대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도 이러한 분쟁을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차라리 법적 대응이 나을 수 있다. 일부 회사들은 퇴사자의 ‘복수’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가장 큰 피해는 기밀 등 ‘데이터 유출’이다.글로벌 보안업체 사이버헤이븐은 직원들이 퇴사 직전에 데이터를 가져갈 확률이 평소보다 69% 더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지난해 9월 보고서에서 밝혔다. 특히, 해고되기 전날 데이터 전송이 23%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해고 당일에는 109% 증가했다. 이들이 가져간 데이터 중 절반 가까이(45%)가 민감한 고객 데이터였다. 글로벌 사이버 보안기업 시만텍의 보안 연구원 딕 오브라이언은 “해고자의 데이터 유출이 회사가 보안에 신경 쓰기 어려운 상황(구조조정을 해야 할 만큼 재무적으로 취약한 상태)에서 발생한다는 점이 문제”라고 분석했다. ● 부자 회사들의 정리해고최근 미국에서 ‘비대면 해고’가 주목받은 이유는 그만큼 잘린 사람이 많아서다. 지난해 말 미국 IT 관련 업계는 15만 명 이상을 해고했는데, 올해 초에는 더 많은 책상이 비워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1만1000명을 자른 메타는 최근 1만 명을 더 해고하겠다고 밝혔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는 2023년을 ‘효율성의 해’라고 지칭했다. 구글의 알파벳(약 1만2000명 해고)과 아마존(2만7000명), 델(6600명), 디즈니(7000명) 등 다수의 기업이 구조조정에 한창이다. 실리콘밸리의 구조조정 칼바람을 두고 ‘화이트칼라 경기 침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통상 경기가 안 좋아지면 생산직 근로자인 ‘블루칼라’가 타격을 입는 게 일반적인데, 반대의 상황이 나타난 것. 최근 미국 경매 사이트에는 책상, 소파, 커피머신 등 트위터 본사에서 쓰던 물품 630개가 나와 주목받기도 했다. 트위터를 상징하는 ‘파랑새 조형물’도 포함됐다.사람이 잘리는 판국에 사무실에 ‘안마의자’가 남아 있을 리 없다. 메타는 최근 직원들에게 제공하던 무료 세탁 및 드라이클리닝 서비스를 중단했다. 마켓워치에 따르면 구글은 간식으로 채워진 휴식 공간을 일부 폐쇄했다. 경영진은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환경 핑계를 대다니.그동안 구글의 ‘특전’이 좀 과하긴 했다. 미 경제 매체 패스트컴퍼니가 2019년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구글은 전 세계 사무실에 말린 해초, 칠면조 육포, 콤부차 등으로 채워진 1300개의 휴식 공간(마이크로 키친)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IT 회사들은 왜 이렇게 직원을 많이 자른 것일까. 향후 경기에 대한 우려와 이익 감소의 영향도 있지만, 기업들 형편이 당장 어려워서는 아니다. (코로나19 확산 기간에 많은 돈이 풀리면서 IT 기업들이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메타의 소프트웨어 채용 담당자였던 에린 썸너는 구직자들에게 회사의 빠른 성장을 자랑하곤 했다. 업계에서 가장 빠르게 회사의 가치가 1조 달러(약 1300조 원)에 도달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해 직원들 사이에서 정리해고 소문이 돌았을 때 “회사가 은행에 저금해 놓은 현금이 400억 달러(약 53조 원)가 넘는다며 별일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막상 썸너가 해고자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그는 “무엇도 보장할 수 없다. 난 세계에서 (재무적으로) 가장 안전한 회사에서 해고됐다”고 한탄했다. ● ‘포켓몬 카드’ 모으기 팬데믹 동안 필요 이상으로 사람을 많이 뽑은 것이 문제였다. 2010년 이후 IT 업계는 매년 10만 명씩을 채용했다. 지난해에는 무려 26만 명이나 뽑았다. 미 테크 분야 인력 컨설팅업체인 컴프티아는 “지난해 IT 업계에 채용된 인원은 2000년 이후 연 기준으로 가장 많았다”고 평했다. 많이 뽑고 많이 자른 셈이다.메타는 최근 3년 동안 직원 수가 2배로 늘었고, 주식 거래 플랫폼 로빈후드는 2020년과 2021년에 직원 수를 6배로 확대했다. 디자인 소프트웨어 회사 캔바의 애이미 슐츠 인사팀장은 “2021년 구인·구직 플랫폼 링크드인에서 개발자 채용 공고(34만2586명)보다 IT 회사들의 인사팀 채용 공고(36만4970개)가 더 많았다”고 했다. 기업들이 인사 담당자를 앞다퉈 늘릴 만큼 채용 열기가 뜨거웠다. NYT는 이에 대해 “IT 회사들이 몇 년 동안 정말 흥청망청 사람을 뽑았다”고 전했다. 채용 담당자들을 지나치게 많이 뽑아서 관리가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 지난해까지 메타에서 채용 담당자로 일한 메를린 마차도는 7일 WSJ에 “회사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정말 아무것도 안 했다”고 강조했다. 마차도만 ‘월급루팡’이었던 것은 아니다. 소셜미디어에는 일하지 않고 월급을 받고 있다는 인사팀 직원들의 인증이 이어졌다. 일부는 이 게시물 때문에 회사에서 해고당하기도 했다.페이팔의 임원이었던 키이스 라보이스는 당시 대형 IT 회사들의 고용 경쟁을 “일종의 ‘허영심 지표’”라고 비판했다. 그는 “IT 기업이 더 잘 나간다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사람을 많이 뽑았다. 다른 회사에 인재를 뺏기지 않으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메타에서 일했던 한 직원은 “그들은(IT 기업들은) 마치 우리를 ‘포켓몬 카드’처럼 비축하려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 신기루 같은 채용 공고 그래도 지난해까지는 재취업이 어렵지 않아 고용 시장 분위기가 어둡지 않았다. 실제로, 몇 개월 치 월급을 받고 재취업하려고 회사를 그만두는 직원도 있었다.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경기침체 가능성이 커지면서 미국의 노동시장이 빠르게 식었다. 숫자만 봐서는 현재의 분위기를 알기 어렵다. 미국의 IT 개발자 실업률은 2.2%로 여전히 낮다. 해고된 기술자들이 다시 어딘가로 유입되고 있다는 의미다. 좋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WSJ은 “IT 개발자들이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이나 비(非)기술 기업의 개발직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9일 전했다. 그동안 구글, 메타와의 채용 경쟁에서 밀린 유통, 제조 기업들이 개발자들을 뒤늦게 뽑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앞으로는 눈높이를 낮춰도 재취업이 힘들 수 있다. IT, 금융사들뿐만 아니라, 소매 및 서비스 기업들도 구조조정을 확대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맥도날드가 대표적이다. 물류기업 페덱스도 최근 글로벌 관리 직원의 10% 이상을 해고했다. 미국에서만 1만2000명을 잘랐다. 완구업체 하스브로 역시 전 직원(글로벌)의 15%를 자를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 해고된 직원들이 급변한 분위기를 이미 체감하고 있을지 모른다.미 텍사스주에 사는 브룩 윌레몬은 경영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채용 공고를 보고 500곳에 지원했다. 그런데,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했다. 윌레몬은 “신기루처럼 느껴졌다”고 표현했다. 기업들이 채용 공고는 유지하고, 실제로 뽑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광고비를 내고서라도 채용 공고를 내리지 않는 이유가 있다. ‘회사가 성장하고 있다(경기가 어려워도 우리는 채용 중)’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채용 공고로 이력서들을 추려놓으면, 내부 직원이 갑작스럽게 그만뒀을 때 빠른 채용도 가능하다. 여러모로 ‘취준생’만 속이 탄다. ● 재택근무 대신 인도에서 김 대리 뽑기미국 노동시장의 변화에 ‘경기’ 이외의 복병도 있다. ‘일자리 아웃소싱’이다. 급격한 임금 상승이 부담된 일부 미 기업들이 인도 등 나라 밖에서 채용을 늘리고 있다. 하청기업을 둔다는 의미가 아니다. 글로벌 기업도 아닌데 해외에서 사람을 뽑아 일을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해외 채용 플랫폼 딜은 “지난해 기업들의 자사 서비스 이용(해외 채용)이 평년보다 2배 이상으로 늘었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기업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된 데에는 IT회사 직원들이 그토록 선호하는 ‘재택근무’가 영향을 미쳤다. 기업들이 재택근무와 해외 채용에서 큰 차이가 없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미국인사관리협회의 한 직원은 지난해 버지니아주 사무실 대신,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근무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협회는 원격근무를 허용하는 대신, 인도에 있는 사람을 뽑았다. 인도 직원의 원격근무로 인건비의 40%를 절약했다. 지난해 8월 미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의 조사에서 미 기업 임원들의 7.3%가 “원격근무 때문에 해외 채용을 늘리게 됐다”고 답했다. 해외로 업무를 이전하는 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수의 기업이 임금이 낮은 곳에 제조나 일반 사무를 맡겨 비용을 아꼈다. 인도, 중국에서 콜센터를 운영하는 미국 기업도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 같은 고급 일자리를 해외로 옮기기 시작했다는 것이 달라진 점이다. 미 텍사스주 오스틴에 본사를 두고 있는 금융사 큐투(Q2)는 지난해 직원 90명을 멕시코에서 채용했다. 멕시코 직원들은 집에서 제품 설계와 엔지니어링, 프로젝트 관리 등의 업무를 하고 있다. 회사는 “전체 직원의 20%가 현재 해외에 있다. 주로 인도와 멕시코에 있는데, 해외 직원을 더 늘릴 예정”이라고 밝혔다.전문가들은 큐투처럼 미국에서 사무직의 해외 이전이 점차 확대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니콜라스 블룸 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미국 IT 개발, 인적자원 일자리의 10~20%가 10년 안에 해외로 이전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재택근무 하고 싶다는 말이 쏙 들어갈 만한 소식이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2023-04-22 10:00
미중 싸움 한 가운데 ‘OO’이 있다[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중요한 소통 창구에서 공공의 적으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2주가 지난 지난해 3월 10일(현지 시간). 미국 백악관이 동영상 공유 플랫폼 ‘틱톡’의 유명 크리에이터(제작자) 30여 명을 화상 회의에 초대했다. 전쟁 상황과 미국의 전략 목표 등을 대중에게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회의에는 젠 사키 당시 백악관 대변인과 국가안보회의(NSC) 관계자들도 있었다. 백악관 관계자는 미 뉴욕타임스(NYT)에 “많은 국민이 ‘이 플랫폼(틱톡)’에서 최신 정보를 얻고 있다”며 초대 배경을 설명했다. 백악관은 2021년에도 틱톡 인플루언서들을 불러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장려하기 위한 행사를 진행했었다. 미국에서 대국민 소통창구 역할까지 하던 틱톡이 최근 ‘공공의 적’이 됐다.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라서다. 미 정치권을 중심으로 중국 정부가 틱톡 이용자의 정보에 접근하거나 여론을 조작할 수 있다며 틱톡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나섰다. 틱톡 모회사 바이트댄스의 중국 창업자들에게 보유 지분을 매각하지 않으면 미국에서 틱톡 사용을 전면 금지하겠다고 압박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15일 재무부 산하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가 최근 틱톡 측에 이 같은 의견을 전했다고 보도했다. 사업을 접든, 회사를 넘기든 선택하라는 통보였다. 바이트댄스 지분은 중국인 창업자 20%, 글로벌 투자자 60%, 직원 20%로 구성돼 있다. 의회도 움직였다. 미 하원이 지난달 23일 싱가포르 출신의 저우서우쯔(周受資) 틱톡 최고경영자(CEO)를 청문회에 불렀다. 외국 기업의 CEO가 미 의회 청문회에서 증언한 것은 2010년 일본 도요타의 리콜 사태 이후 13년 만이다. 청문회 직전, 중국 상무부 대변인이 “틱톡 매각에 단호하게 반대한다”는 입장을 내면서 예열까지 마친 미 의회.공화당, 민주당 의원들은 5시간 동안 “틱톡이 중국 정부를 대신해 미국인들을 염탐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몰아붙였다. ‘중립국’ 출신의 저우 CEO는 “바이트댄스는 중국 기관원이 아니다. 미국 직원이 관리하는 미국 회사가 미국 땅에 틱톡의 데이터를 저장한다”고 해명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라”면서 화를 낸 의원도 있었다.통상자원위원회 소속 토니 카르데나스(민주, 캘리포니아) 의원은 “(틱톡 금지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고까지 했다. 그는 “증인(저우)은 당적이 다른 의원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세상에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라면서 미 의회의 공세가 공포탄이 아님을 강조했다.그러자, 중국 외교부는 “외국 기업을 억압하려 국가 권력을 쓴다”고 비난했다. 자국 내 구글, 유튜브, 페이스북 접속을 아예 차단한 중국이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지만.● 미국 점령한 ‘8분음표’틱톡은 중국 바이트댄스가 2016년 9월 선보인 짧은 동영상(숏폼·Short-form) 플랫폼이다. 이 소셜미디어에서는 15초 전후의 영상을 찍어 공유한다. 틱톡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출시 이후 5년 만인 2021년 전 세계 이용자가 10억 명을 돌파했다. 페이스북이 9년 만에 달성한 기록이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도 7년 이상 걸렸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다운로드 된 앱 역시 틱톡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코로나19 봉쇄 기간 10, 20대를 중심으로 사용이 급격히 늘었다”고 전했다.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10대들이 틱톡에 모여 춤을 추거나 동영상을 시청한 것으로 보인다. 틱톡은 미국도 점령했다. 현재 미국 국민 1억5000만 명이 틱톡을 사용 중이다. 절반에 가까운 국민(45%)이 ‘8분음표(틱톡 상징)’에 빠져 있다. 브라이언 노왁 모건스탠리 애널리스트에 따르면 미국 이용자는 틱톡에 연 530억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특히, 젊은 층 사용 비중이 높다. 시장조사기업 이마케터는 미국 사용자의 44%가 25세 미만이라고 분석했다. 페이스북(16%)과 차이를 보인다. 이코노미스트는 “18~24세 미국인이 하루 1시간씩 틱톡을 사용하는데, 이 같은 사용량은 인스타그램의 2배이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소통할 때 쓰는 페이스북보다는 5배가 넘는 수치”라고 지난달 21일 전했다. (페이스북이 조부모와 대화하려고 쓰는 플랫폼이라니, 의문의 1패다) 미국 Z세대는 틱톡을 음악과 춤 동영상을 보는 용도로만 쓰지 않는다. 식당을 찾거나 제품 후기를 검색하는 데 틱톡을 활용하고 있다. 뉴스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고, 재테크 조언까지 얻는다. 구글, 네이버 같은 검색 엔진으로 쓰고 있는 셈이다.구글도 이를 안다. 구글 검색엔진 부사장 프라바카르 라그하반은 지난해 7월 “젊은 층의 40%가 식사 장소를 찾을 때 구글 대신 틱톡이나 인스타그램을 활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60초 미만의 짧은 동영상이 빠르게 답을 찾아줘서다.문제는 미국 Z세대가 클럽, 뉴스 채널로 활용하는 틱톡이 자국 안보를 위협하는 중국 기업이라는 점이다. 대만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의 외교적 충돌이 지속되는 가운데, 올해 2월 중국의 고고도 정찰 풍선이 미 영공을 침범하면서 양국 갈등이 격화됐다. 미중 갈등이 심화하면서 틱톡에 대한 우려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NYT는 “틱톡만큼 미국 사회를 점령한 중국 기업은 없었다. 이 앱이 미국 최대의 지정학적 경쟁자 제품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더 놀라게 한다”고 전했다. 극단적이지만 네이버, 카카오가 북한 회사라고 상상해보면 미국이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틱톡과 중국 정부의 밀월 미국 정부와 의회는 틱톡이 베이징에 미국 사용자의 데이터를 넘길까 걱정하고 있다. 소셜미디어는 고객이 여행을 갔는지, 누구와 만나는지, 어떤 취향을 가졌는지 등 수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 이용자가 동의하면 스마트폰의 내장 마이크나 카메라, 위치정보에도 접근한다. 사용자에게 더 나은 콘텐츠를 제공하고, 광고 수익을 확대하기 위해서다. 미국은 중국이 이러한 정보를 악용할까 걱정하고 있다.저우 CEO는 “중국 정부가 미국 이용자 데이터를 요구한 적도 없고, 그런 요구가 오더라도 미국 고객 데이터를 넘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미 정치권은 중국법과 중국 정부-기업의 상하관계 등을 고려했을 때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보고 있다. 외신들은 틱톡 모회사인 바이트댄스와 중국 정부의 밀월이 수년 전부터 이어져 왔다고 분석한다. 바이트댄스에 2016년 부편집장으로 합류한 장푸핑(張輔評)은 다음 해 편집장으로 승진했는데, 그는 중국 정부의 공식 행사에서 “‘더우인(抖音·중국 틱톡 서비스)’의 이용자 정보가 정부의 감시 활동에 활용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후 장푸핑이 공산당의 고위 당료인 당서기였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드러났다.바이트댄스는 2018년 중국 관영 중앙TV(CCTV)의 전 앵커를 부회장으로 영입했고, 2019년에는 국영기업인 상하이동팡언론그룹과 합작사까지 만들었다. 이코노미스트는 “합작사의 공식 서류에 인공지능(AI) 기술 개발이 사업목적으로 쓰여 있었다”고 전했다. 틱톡의 창업주인 장이밍(張一鳴·40)이 2021년 돌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것도 의심스럽다. 2017년 바이트댄스의 기업 가치가 200억 달러(약 26조 원)를 넘어섰을 무렵, 중국 정부가 “온라인 여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바이트댄스의 한 앱을 종료하라고 명령했다. 장이밍은 다음 날 새벽 4시에 “후회와 죄책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내용의 긴 사과문을 올렸다. 그는 10년 전, 자신의 블로그에 중국이 구글을 퇴출한 것을 비판했던 인물이다. WSJ은 “중국 정부 산하 사이버보안감시단이 지원하는 한 펀드가 바이트댄스 핵심 자회사 지분을 1% 가지고 있다”며 “이는 자회사 이사회나 비즈니스 결정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황금 지분’”이라고 지난달 전했다. 중국 정부의 요구를 뿌리칠 수 있다는 저우 CEO의 말을 믿기 어려운 이유다. 틱톡도 나름대로 ‘비싼’ 방어 논리를 준비해 놓았다. 틱톡은 지난해 7월 사용자 정보 유출 문제가 언급되자 미국 고객 정보를 텍사스에 있는 미국 회사 오라클 소유의 서버로 이전하는 ‘텍사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5억 달러(약 2조 원)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다. 운영비용도 연 7억 달러(약 9200억 원)나 들어간다. ● 스마트폰에 침투한 ‘스파이 풍선’ 그럼에도 의혹이 끊이질 않는다. 미국 온라인 매체 버즈피드는 지난해 6월 “중국 본사에서 미국 틱톡 사용자 데이터에 반복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기사는 틱톡 직원들의 내부 회의 녹음본을 인용했는데, 틱톡 직원이 “중국 안에서 모든 것이 보인다”라고 언급한 부분이 포함됐다. 미국 경제매체 포브스도 지난해 10월 “바이트댄스가 틱톡으로 개별 미국인의 위치정보를 체크하려 한다. 광고 등이 아닌 감시 목적”이라고 폭로했다. 최근 바이트댄스 직원이 일부 미국 기자들의 계정에 무단 접근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이 폭로 기사를 쓴 에밀리 베이커 화이트 기자도 포함돼 있었다. 바이트댄스는 “개인들의 일탈”이라면서 데이터에 접근한 임직원 4명(중국 본사 감사부서 소속)을 해고했다.그런데, 미 정치권이 데이터 유출보다 더 우려하는 것이 있다. 여론 조작과 선거 개입이다. 틱톡이 미국 이용자들에게 일부 정보를 보여주지 않거나, 선거 때 특정 후보를 더 많이 내보내는 등 여론에 영향을 미칠까 걱정하고 있다. 중국 관련 콘텐츠이기는 했지만, 바이트댄스가 틱톡에서 콘텐츠를 검열한 이력도 있다. 가디언은 2019년 “‘천안문’ ‘티베트’ 같은 ‘논란이 많은 주제’를 금지하라”는 틱톡의 내부 지침을 보도했다. 기사가 나온 뒤 틱톡은 유해 콘텐츠만 삭제하는 방식으로 지침을 수정했다. 물론, 중국은 쏙 빠졌다. 중국의 콘텐츠 검열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중국 밖 외국인들이 많이 쓰는 플랫폼에서 콘텐츠를 걸러내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어 보인다. 기업에도 국적이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잊고 지냈다. 바이트댄스는 현재 틱톡을 글로벌, 중국 버전(더우인)으로 따로 운영 중이다. 지난해 6월 이코노미스트의 뉴욕과 상하이 특파원이 틱톡과 더우인에서 각각의 정치 지도자를 검색했다. 중국에서는 온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모습만 나타났다. 충분히 예상할 만한 결과였다. 지정학적 갈등이 커지는 상황에서 중국이 나쁜 마음을 먹고 미국의 틱톡 서비스에 관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미국 이용자들이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에 즉각적으로 영향 받을 가능성이 크다. 영국 옥스퍼드대 산하 로이터연구소에 따르면 미국 틱톡 이용자 중 30% 이상이 앱에서 얻은 정보를 언론사 뉴스처럼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났다.더 큰 문제는 중국 정부가 손을 뻗쳤다고 해도 이를 쉽게 알아채기 어렵다는 점이다. 틱톡은 고객의 취향, 선호도 등을 인공지능이 분석해 이용자에게 적합한 동영상을 틀어준다. 1억5000만 미국 사용자가 전부 다른 화면을 보게 된다. ‘극강의 개인화 서비스’ 때문에 틱톡 콘텐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발견되더라도 한참 후일 가능성이 크다. 마이크 매콜 하원 외교위원장이 “틱톡은 스마트폰에 침투한 정찰 풍선”이라고 말한 이유다.● ‘저커버블’ 터뜨린 틱톡틱톡이 미 정치권 최대 화두로 떠오른 데에는 실리콘밸리의 입김도 작용했다. 국가 안보 문제를 연구하는 제이콥 헬버그 미 스탠퍼드대 지정학·IT 센터 고문은 최근 미 정부 기관인 미·중 경제안보검토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됐는데, 그는 격주로 의회에서 의원들을 만나 틱톡을 금지해달라고 요청했다. 헬버그는 페이스북 초기 투자자였던 피터 틸과 비노드 코슬라 등 실리콘밸리 투자자들과 반중국 동맹인 ‘힐앤밸리포럼’도 결성했다. 미국의 기술 이익 보호가 명분이다. 이들이 최근 가진 비공개 만찬에는 IT 기업 임원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들이 열성적인 이유가 있다. 틱톡의 성장으로 미 실리콘밸리 빅테크들이 큰 손실을 봤다. 광고시장 분석업체 인사이더 인텔리전트에 따르면 틱톡의 올해 미국 광고 수익은 전년 대비 36% 늘어난 68억3000만 달러(약 8조9600억 원)에 달할 전망이다. 만약, 틱톡이 미국에서 사업을 키우지 않았다면 구글(유튜브)과 메타(페이스북·인스타그램·왓츠앱) 등 미 빅테크 기업들의 몫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틱톡은 중국이 미국에서 수행한 가장 강력한 스파이 작전”이라고 언급한 헬버그는 구글 정책보좌관 출신이다.모건스탠리는 미국에서 틱톡이 금지되고, 고객들 틱톡 이용 시간의 절반을 메타가 흡수하면 2024 회계연도 주당순이익(EPS)을 7% 또는 1달러 추가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직전 분기 메타의 EPS는 1.76달러였다. 틱톡이 흥행할 때마다 메타(페이스북)의 타격이 컸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틱톡의 성장과 메타의 저조한 수익을 비교하면서 ‘틱톡이 저커버블(저커버그+거품)을 터뜨렸다’고 분석했다. 당시 메타 CEO 마크 저커버그는 틱톡이 최대 경쟁자라고 인정하기도 했다.저커버그는 그동안 지속해서 틱톡의 검열 문제를 비판해왔다. 2019년 10월 저커버그는 미 조지타운대 연설에서 틱톡을 두고 “이 소셜미디어가 우리가 원하는(자유를 상징하는) 인터넷의 모습인가”라고 되물었다. 페이스북이 Z세대 고객을 한창 뺏기던 시기였다. ● 틱톡과 똑 닮은 뉴스 앱그런데, 틱톡은 빅테크 공룡들이 자리 잡고 있던 미국을 어떻게 공략했을까. 여기에는 실리콘밸리 진출을 꿈꾼 중국 청년이 있었다.2010년 크리스마스에 중국인 프로그래머 장이밍(당시 27세)은 영화 ‘소셜 네트워크(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의 스토리를 담은 영화)’를 보고, 별 5개 만점에 4개를 줬다. 사업가였던 장이밍은 영화를 보면서 실리콘밸리 기업을 동경했다.그는 부동산 검색 사이트 ‘99팡’을 운영 중이었는데, 지하철에서 신문 읽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 사업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온라인 뉴스 서비스였다. 장이밍은 2012년 초 ‘바이트댄스’로 회사 이름을 짓고 새롭게 시작했다. 그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페이스북을 만든 저커버그처럼 사람과 정보를 연결하고 싶다”고 했다. 처음 20명 넘는 중국인 투자자들이 “알리바바, 바이두 같은 대형 기업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아이디어”라며 외면했을 때, 미국 투자자 맷 후앙이 나타났다. 후앙은 “아이디어는 회의적이지만 장이밍에게 반했다”며 초기 투자를 진행했다. 장이밍은 유머 공유 플랫폼 ‘네이한돤즈’와 인공지능 뉴스 앱 ‘진르터우탸오(오늘의 헤드라인)’를 선보였다. 뜬금없이 옛이야기를 꺼낸 것처럼 보이지만, 틱톡은 진르터우탸오에서 시작됐다. 장이밍은 진르터우탸오를 ‘AI를 활용해 모든 사용자가 매 순간 자신만의 첫 뉴스 페이지를 갖게 만드는 앱’이라고 소개했다. ‘극강의 개인화 플랫폼’의 출발점이었다.틱톡과 뼈대가 거의 같다. 이 뉴스 앱에는 회원가입이 필요 없다. ‘정치, 경제, 국제 등 관심 있는 뉴스에 체크해주세요’라고 요청하지도 않는다. 기사만 제공한다. 이용자는 기사를 읽거나, 다른 뉴스로 넘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AI가 개별 기사에서 얼마나 머무는지, 특정 단락에 멈춰있는지 등을 연구해 기사 추천을 시작한다.인공지능은 사람들이 많이 쓸수록 성능이 좋아진다. 알고리즘이 똑똑해질수록 고객이 늘어난다. 선순환이다. 뉴스 추천 앱은 출시 4개월 만에 하루평균 사용자 100만 명을 돌파했다. 앱이 잘 나가자 부정적인 여론도 생겼는데, 이 역시 틱톡과 비슷하다. “유명인 가십, 폭력 같은 뉴스만 제공해 사람들을 오래 묶어둔다”는 비판이었다. ● ‘중국 저커버그’의 ‘아메리칸 드림’ 2016년 초 해외 진출을 고민하던 장이밍 눈에 립싱크 앱 뮤지컬리(Musical.ly)가 들어왔다.중국 창업가들이 만든 이 립싱크 앱은 당시 미국 10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장이밍은 바이트댄스에 뮤지컬리 같은 립싱크 앱을 개발하는 ‘프로젝트 X’를 가동했다. 서비스명은 ‘더우인’으로 지었다. 앱을 켜면 짧은 동영상이 나오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위로 올리면 다음 영상이 나온다. 맞다. 틱톡이다. 장이밍은 경쟁사가 보유한 1억 명의 사용자 데이터(특히 미국)를 원했다. 뮤지컬리에 인수합병(M&A)을 제안했다. 2017년 11월 뮤지컬리는 10억 달러(약 1조3000억 원)에 회사를 넘기기로 했는데, 2가지 조건을 단서로 달았다. 더우인의 이름을 변경할 것과 마케팅에 10억 달러를 쓰는 것이었다. 바이트댄스 직원들은 영어로 된 서비스명을 고민하다가 아시아, 남미 등 언어와 관계없이 같은 방식으로 발음이 가능한 ‘틱톡’으로 정했다. 다음 해 8월 더우인과 뮤지컬리가 틱톡으로 통합됐다. 바이트댄스는 AI 뉴스 앱의 ‘비밀 레시피(알고리즘)’를 틱톡에 장착하고 미국 10대들의 개별 취향을 공부시켰다. 동시에, 뮤지컬리를 살 때 약속했던 마케팅 비용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빅테크 기업들 중에 틱톡에서 광고비를 안 받은 곳이 없었다. 이때만 해도 틱톡이 최대 경쟁자가 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틱톡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와 자주 비교되는데, 사실 근본적으로 속성이 다르다. 기존 소셜미디어가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틱톡은 오로지 이용자의 취향과 관심에 집중한다. 예로, 페이스북을 이용하려면 회원 가입, 친구 맺기(팔로우)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익숙해지고, 빠져드는 데 상대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린다. 서비스에서는 종종 원치 않는 (직장 상사의) 콘텐츠가 사용자 화면에 덮기도 한다. (그래서 중독성이 덜한 편이다) 틱톡은 관계보다는 취향, 재미 중심의 플랫폼이다. 회사는 가입자들이 올린 무수한 콘텐츠들을 수백, 수천 개의 하위문화로 분류한다. 춤·노래부터 코로나19, 프랑스 연금 개혁 이슈, 특정 책의 서평 모임까지 없는 게 없다. 그다음, 사용자가 원하는 콘텐츠를 추천 알고리즘이 찾아준다. 고객이 이용하는 ‘시점’의 기분과 관심, 취향에 맞춰 동영상(하위문화)을 제공해주는 점이 핵심이다. 사람이 아니라, 순수한 관심의 연결이다. 중독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바이트댄스는 뮤지컬리에 자체 알고리즘을 탑재한 뒤 고객들이 앱에 머무는 시간이 2배로 늘어났다고 자평하기도 했다.현재 틱톡의 전 세계 이용자는 약 15억 명에 달한다. 바이트댄스는 지난해 120억 달러(약 15조4000억 원)를 벌었다. 저커버그를 꿈꾸던 장이밍의 ‘아메리칸 드림’이 현실이 됐다. ● 호랑이와 뚱뚱한 고양이 틱톡은 알고리즘으로 우뚝 섰지만, 결과적으로 이 기술 때문에 수세에 몰렸다. 최근 미국에 이어 영국, 캐나다가 안보를 이유로 정부 소유 기기에서 틱톡 사용을 금지했다. 호주와 뉴질랜드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도 나토가 지급한 기기에서 직원들이 틱톡을 내려받는 것을 막았다. 미 정부의 중국 기업에 대한 압박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9년 중국 통신 장비 업체 화웨이를 제재했고, 지난해 10월에는 중국을 겨냥한 반도체 수출통제까지 발표했다. 전부 실체가 있는 하드웨어가 대상이었다. 중국의 무기 개발 등에 활용될 수 있다는 명분도 있었다. 이 때문에 제재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도 크지 않았다. 이번에는 10대들이 춤이나 추는, 장난 같은 동영상 공유 플랫폼이 안보 논쟁 중심에 서 있다. 틱톡 이용자들은 의회 앞에서 시위하는 등 격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 정치권은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번에는 정말 칼을 꺼내 들 분위기다. 미국 국민 절반이 사용하는 중국 온라인 서비스를 제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미국의 ‘틱톡 축출’을 의미 있게 보고 있다. 린지 고먼 마셜펀드 기술 담당 연구원(전 백악관 고문)은 “지정학적인 고려 없이 미중 비즈니스 관계가 지속되기 어려워졌다”면서 “틱톡 전쟁은 한 시대의 종말을 나타낸다”고 지난달 WSJ에 전했다.중국은 자유를 추구하며 타국 기업을 억압하는 미국의 모순적인 세계관을 비판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미국은 중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낮추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이 대만 위협을 그만둘 리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되돌릴 수도 없다. 국제 정세가 변했다는 의미다. 다웨이 중국 칭화대 국제안보전략센터(CISS) 소장은 미국과 중국의 상황을 동물에 빗댔다. 그는 “강대국이 호랑이처럼 강해지고 싶은 것은 본능이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이 호랑이가 되기보다 ‘뚱뚱한 고양이’가 되기를 희망한다. AI, 첨단 반도체 같은 중국 산업과 군사력을 강화하는 ‘이빨’을 뽑아내려는 것”이라고 했다. 미중 갈등이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미국의 압박에 중국 역시 적대적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몇 년간 치열한 힘겨루기가 불가피해 보인다”면서 “중성화를 원하는 호랑이는 세상에 없다”고 전했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2023-04-08 10:00
“아니, 이 금리에 어떻게 은행이 망해?”[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글로벌 신(新) 비즈니스 가이드(33)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올해의 은행상’ 받자마자 ‘파산’ “경기가 어려운 가운데 최고의 금융 파트너 역할을 할 수 있어서 자랑스럽습니다.”그레그 베커 실리콘밸리은행(SVB)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2일(현지 시간) 미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한 벤처캐피털(VC) 행사에서 수상 소감처럼 보이는 말을 꺼냈다. 다음 날, SVB의 영국 법인이 실제로 상을 받았다. 영국 경제 매체 ‘시티에이엠’이 선정하는 ‘올해의 은행’에 선정된 것. 그런데, 1주일 만에 이 은행이 파산했다. 1983년 설립된 실리콘밸리은행(SVB)은 스타트업과 정보기술(IT) 기업, VC가 주로 거래하는 상업은행이다. 본점은 이름에서 드러나듯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 있다. 캘리포니아(24개)와 매사추세츠(6개)에 총 30개 지점을 가진 SVB는 총자산이 276조5000억 원으로 미국 은행 중 16번째로 덩치가 크다. 역사가 깊지는 않지만, 무시할 만한 규모는 아니다. 40년 된 은행이 파산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36시간. ‘SVB 위기설’은 8일 처음 등장했다. SVB가 약 18억 달러(약 2조3600억 원)의 손실을 봤으며 현금 조달을 위해 신주발행에 나서겠다고 밝히면서다. 안정적으로 보이던 은행이 급전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예금자들의 인출이 시작됐다. SVB 주가는 9일 나스닥 시장에서 개장과 동시에 급락했다. 전일 대비 60.4%나 폭락했다. 큰 폭의 주가 하락에 놀란 예금자들이 돈을 빼기 위해 더 몰려들었고, 9일 하루 동안 SVB에서 총 예금액의 24%인 약 420억 달러(약 55조 원)가 빠져나갔다. ‘뱅크런(예금인출사태)’이 발생한 이후 미 금융당국이 재빠르게 나섰다. 10일 오전 SVB를 폐쇄하고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파산 관리자로 선임했다. FDIC가 만든 법인으로 SVB 예금을 옮기고, 보유 자산을 매각하도록 했다. 파산한 은행의 뒤처리를 맡긴 셈이다.뱅크런과 미 은행의 파산에 전 세계 증시가 출렁였는데, ‘은행 트라우마’를 가진 미국이 특히 놀란 분위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악몽이 떠올라서다. 한국이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고 ‘환율’을 예의주시하게 된 것처럼 미국 역시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은행의 건전성’에 주의를 기울여왔다. 그럼에도 중대형 은행이 이틀도 안 돼 망했으니 충격에 빠질 만하다. SVB보다 큰 규모의 상업은행이 문 닫은 사례는 2008년 총자산 3070억 달러(약 402조 원)의 워싱턴뮤추얼이 유일하다. 그런데, 보통 금리가 오르면 은행은 큰돈을 버는 것 아니었나. 고금리 시대에 SVB는 ‘왜’, 이토록 ‘빠르게’ 파산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 “모든 스타트업은 SVB로 통한다” SVB는 주로 미국의 중소기업과 기술 스타트업을 지원하면서 성장했다. 기존 은행과는 확실히 달랐다. 예금·대출, 자산관리뿐만 아니라 스타트업들이 투자받을 수 있도록 행사를 열어주고, 인수합병(M&A)이나 서비스 판매와 관련한 조언도 해줬다. 고객들이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네트워킹 기회도 제공했다. 심지어 초기 와이너리에는 수익이 나오지 않는 3~5년(포도나무가 자라는 기간)에도 돈을 빌려줬다. 영국 유명 VC 투자자인 로빈 클레인은 “대형 은행과 다르게 SVB는 회사가 아무리 작더라도 상담을 해줬다”라고 했다. 스타트업들은 SVB를 자신과 똑같은 혁신적인 회사로 여겼을 것 같다.미국 VC로부터 투자받고 지난해 상장한 테크·헬스 기업 중 44%가 SVB의 고객이었다. 클라우드 보안 업체 엔돌랩스의 CEO인 바룬 바드워는 “모든 스타트업은 실리콘밸리은행으로 통한다”라고 전했다. (SVB가 스타트업들이 다른 은행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사실상의 독점 계약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뒤늦게 나오고 있다) SVB는 미국의 스타트업, 테크 기업에 발맞춰 성장해왔는데, 코로나19 발생 이후 큰 변화가 있었다. 0%대의 극단적인 저금리 상황에 막대한 유동성이 벤처기업에 몰리면서 SVB의 예금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SVB의 예금은 2017년 말 440억 달러(약 57조6000억 원)에서 2021년 말 1890억 달러(약 247조2000억 원)로 4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시장 분석 업체 오토노머스 리서치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1년까지 미 은행 업계 평균 성장률은 37%였다. 같은 기간 SVB의 대출은 230억 달러(약 30조 원)에서 660억 달러(약 86조3000억 원)로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은행은 고객의 예금을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로 모아서(예금) 대출 등으로 장기간 운용해 이윤을 남긴다. SVB가 덩치는 커졌지만, 장사는 영 시원찮았던 셈이다. 물론, 예금 규모가 크게 늘었다고 SVB가 망한 것은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투자’가 문제였다.● 장기 채권에 ‘몰방’한 SVBSVB는 2020년부터 채권에 막대한 예금을 투자했다. 채권은 정부나 공공기관, 회사 등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하는 일종의 ‘차용증’이다. 기간과 이자를 정하고 다수에게서 돈을 빌리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SVB는 예금 중 1200억 달러(약 156조7000억 원)를 미국 국채와 주택저당증권 등을 사는 데 썼다. 이 중 80% 이상이 10년 이상 지나야 원금과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장기 상품이었다. 미국 정부가 망하지 않으면 돈을 돌려받을 수 있으니 상대적으로 안전한 투자였다.2021년 SVB가 매입한 미 국채 등 증권의 잔액은 1280억 달러(약 167조4000억 원). SVB가 자산에서 채권 등 증권에 투자한 비율은 55%로, 미국의 모든 은행 중에서 가장 높았다. 2020년과 2021년에는 늘어난 자산의 71.3%(99억 달러)를 채권 등에 쏟아 부었다. 물가도 높아지는 데 현금으로 보유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SVB는 미국 10년 만기 국채 금리(약정)가 0%대일 때부터 투자하기 시작했다. 910억 달러(약 118조9000억 원)는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채권을 샀는데, 평균 이자가 1.64% 수준이었다.금리가 치솟으며 문제가 시작됐다. 2022년 1월 연 0~0.25%였던 미국의 기준금리는 지난해 말 4.25~4.50%까지 치솟았다. 현재는 4.75~5.0%다. 물가를 잡기 위한 폭풍 같은 금리 인상이 이어졌는데, 이 때문에 SVB가 잔뜩 사놓은 채권이 헐값이 돼버렸다. 예를 들어 연 1% 금리를 보장받고 10년 뒤에 원금 100만 원을 돌려받는 상품(채권)을 샀다고 치자. 현재 이 상품을 100만 원에 내놓으면 팔릴까. 당연히 아무도 안 살 것이다. 현재 1년만 은행에 넣어놔도 연 4% 이상의 이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주식도 아니고 안 팔면 원금을 지킬 수 있다. ‘존버(힘들게 버팀)’도 있으니까. 게다가 인플레이션이 잡히고 금리가 다시 떨어지면 사놓은 채권의 가치가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런데, 채권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SVB가 그랬다.● 고금리가 불러온 스타트업의 보릿고개 금리가 올라가자 예금자들의 손이 바빠졌다. 2021년 말까지 SVB에 예치된 예금은 주로 요구불예금에 속해 있었다. 고객에게 이자를 거의 주지 않아도 되는 수시입출금 통장(파킹통장)에 예금이 들어가 있었다는 의미다. 금리가 많이 오른 뒤, 고객들은 정기예금이나 적금 통장 등으로 돈을 옮기기 시작했다. SVB는 이자를 더 줘야 하니 비용은 늘어났다. 더 큰 문제는 주요 고객인 스타트업들의 주머니 사정이 나빠졌다는 점이다. 보통 수익이 없거나 적은 스타트업은 미래 가치를 반영해 평가받는다. 향후 얼마나 벌 수 있을지 미리 계산기를 두들겨 보고, 이를 기준으로 투자가 이뤄지기도 한다.그만큼 고금리 시기에는 취약하다. 현재의 돈의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예금만 해도 돈을 벌 수 있으니, 언제 망할지 모르는 회사에 투자할 이유가 줄어든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021~2022년 VC들이 3000억 달러(약 392조 원) 넘게 돈을 모았지만, 지난해에 1년 내내 투자를 줄였다”라고 1월 전했다. 회사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기 때문에 주식 시장에서 돈을 끌어 오기도 어렵다. 지난해 미국 주식 시장에서 조달된 자본은 32년 만에 최저치였다. 투자를 못 받는 상태에서 인플레이션으로 회사 운영비는 늘고, 물건(서비스)은 덜 팔리는 상황. 결국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회사들이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스타트업들은 모아둔 돈으로 ‘보릿고개’를 넘기 시작했다. 다수의 업체가 실리콘밸리은행에서 예금을 찾아 썼다. SVB는 예금자(스타트업)들의 늘어난 인출 요구로 유동성이 부족해지면서 결국 채권을 헐값에라도 팔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SVB는 현금 조달을 위해 8일 신주발행(파산에 이르게 만든 첫 신호)에 나섰는데, 여기서 채권 손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블룸버그는 “SVB가 자금을 조달하려고 했을 때 이유로 든 것이 ‘스타트업들의 현금 인출’이었다”고 9일 전했다. ● ‘리틀 마이클 버리’SVB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왜들 몰랐을까.장기 채권을 보유하면 회계장부에는 손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재무제표에 현재의 가격(시세)이 아닌, ‘액면가(만기 때 돌려받는 금액)’로 표시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팔기 전까지는 손실이 아니다. SVB의 재무제표를 상세히 보고 위험성을 알린 ‘리틀 마이클 버리’가 있기는 했다. (버리는 영화 ‘빅쇼트’의 실존 인물로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예측한 바 있음) 헤지펀드사 레이징 캐피털을 운영하는 윌리엄 마틴은 올해 1월 “SVB가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다”고 트위터에 올렸다. 마틴은 SVB 주가가 내려가면 이득을 보는 ‘숏 포지션’에 자신의 자금의 대부분을 투자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얼마를 벌었는지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마틴은 사태가 벌어진 이후 “이렇게까지 빨리 망할 줄 몰랐다”면서 “주변에 이를 알리려 했지만, 가까운 친구 두 명의 달러가 SVB 금고에 아직 갇혀 있다”며 씁쓸해했다. 당시 SVB 회장 겸 대표였던 베커가 회사 사정을 몰랐을 리 없다. 2월 한 행사에서 기자가 베커에게 채권 손실에 관해 묻자 “채권을 팔 이유가 전혀 없다”고 답했다.그러다가 2월 27일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에서 연락받으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SVB의 신용등급이 하락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유동성 우려도 있었지만, SVB가 골드만삭스에 자본 확충(신주 발행)을 도와달라고 요청한 데에는 무디스의 전화 한 통이 컸다.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채권으로 돈은 못 벌더라도, 만기까지 보유하면 원금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채권 등을 담보로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서 돈을 빌릴 수는 없었을까. (이는 SVB 파산 이후 미 금융당국이 내놓은 대책과 같다. 해외에서는 대책을 일찍 썼으면 SVB가 문 닫지 않았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 “SVB에 대한 사랑보다 두려움이 컸다”그럴 틈이 없었다. 온라인으로 돈을 옮기는 ‘스마트폰 뱅크런’에 SVB는 예금자들이 은행으로 달려가는 시간조차 벌지 못했다. 벤처 대표이자 SVB에 돈을 맡겼던 알렉산더 토레네그라에 따르면 9일 오전 9시경 스타트업 임원 200여 명이 있는 온라인 메신저 단체 대화방에 끊임없이 알림이 울렸다. SVB 주가가 내려가자 은행이 위험한 것 아니냐고 우려가 쏟아진 것. 한 시간 뒤, 누군가 돈을 찾자고 제안하자 ‘실리콘밸리 혁신가’들은 너나없이 돈을 옮기기 시작했다. 당시 ‘커버리지 캣(미 보험 스타트업)’ 창업자 맥스 조는 미 몬태나주 보즈먼 공항에 있었는데, 스마트폰 덕분에 예금을 옮기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돈을 찾기 위해 은행으로 뛰어가 줄을 서는 모습은 없었지만, SVB에선 하루 만에 55조 원이 빠져나갔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2일 ‘실리콘밸리가 만든 체계에 실리콘밸리가 당했다’는 기사에서 과거 금융 위기 때는 소셜미디어가 큰 변수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번개 같은 속도로 각종 소식을 전 세계에 퍼뜨려 ‘대규모 예금 인출(뱅크런)’을 일으켰다고 진단했다.어쩌면 이는 예견된 일이었다. 대부분의 고객이 소액을 맡기는 일반인이 아니라 ‘회사’였기 때문이다. SVB에 예금한 스타트업들은 예금자 보호 한도인 25만 달러(약 3억3000만원)까지 되돌려 받을 수 있다. 이를 넘는 금액은 은행이 망하면 못 받을 가능성이 있다. SVB 총예금의 95%가 예금 보호 대상이 아니었다. 특히 고객 대부분이 경쟁자들의 움직임에 민감한 실리콘밸리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뱅크런 전염성이 강했다는 분석도 있다. 블룸버그는 9일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VC 업계 사람들만큼 무리 지어 행동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라면서 SVB의 고객 다양성 부족을 사태의 원인 중 하나로 꼽았다.SVB 파산에 뒤늦게 죄책감을 내비친 스타트업 관계자들도 있었다. 자신들이 스타트업의 ‘대부’ 역할을 해 온 SVB를 배신했다고 느끼는 듯하다. 보안 업체 딥센티넬의 데이비드 셀링거 CEO는 “‘죄수의 딜레마’ 같은 상황이었다. SVB에 대한 사랑과 열망보다 두려움이 앞섰다”고 전했다. 자신만 은행에서 돈을 못 뺄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어두운 영화관에서 “불이야” 소리만 듣고 달려 나갔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스타트업들의 행동은 본능에 가까웠다. ‘스마트폰 뱅크런’ 역시 은행이 대비했어야 할 일이었다. 미 은행 뱅코프의 전 회장인 다니엘 코헨은 “은행들은 항상 고객의 충성도를 과대평가한다”며 “이를 대비하는 것이 은행의 기본 업무라”고 강조했다. ● 은행보다 ‘실리콘밸리’에 가까웠던 SVBSVB가 연준을 원망하고 있을 수 있다. 특히, 제롬 파월 연준 의장. 2021년 파월이 “물가 급등이 일시적일 것”이라고 오판한 바람에 SVB가 고금리를 대비하지 못했다는 분석도 있다. 만약 파월이 금리를 일찍, 그리고 천천히 올리기 시작했다면 (일을 제대로 했다면) SVB 역시 장기 채권에 그만큼 쏟아붓지 않았을 수 있다. 물가가 빠르게 잡혔다면 금리가 지금처럼 높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연준이 자신의 (인플레이션) 판단 착오 때문에 SVB 사태에 발 빠르게 움직였다”는 해석도 나온다.그럼에도 SVB가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투자 포트폴리오가 장기 채권에 지나치게 쏠려 있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은행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리스크 대응이나 조직 관리에 소홀했다는 점이다.지난해 SVB에는 이 같은 위험성을 포착할 최고위험관리책임자(CRO)조차 없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올해 1월 초 SVB는 갑자기 CRO를 뽑았다고 홈페이지에 공지했는데, 두 달 후 “사실, CRO 자리가 지난해 4월 이후 비어 있었다”라고 고백했다. 은행이 리스크 대응 책임자 자리를 한참이나 비워뒀다. 심지어 지난해 CRO는 사임 전에 성소수자 직원을 위한 캠페인을 담당했었다. 리스크 대응에 몰두했어야 할 자리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SVB는 회사가 문을 닫는 순간까지 직원 8500여 명 대다수가 재택근무 중이었다. 다수의 IT 기업이 직원들을 사무실로 되돌린 최근에도 SVB는 이를 유지했다. 베커 전 CEO는 종종 하와이에서 일했고, 지난해 그만둔 CRO는 워싱턴에, 사내 변호사는 뉴욕에서 주로 근무했다. 전직 SVB 행원은 “직원들도 마이애미, 라스베이거스 등 곳곳에서 일했다. 심지어 숲속 오두막으로 이사한 직원도 있었다”고 했다.  20년 가까이 재택근무를 연구해온 니콜라스 블룸 스탠퍼드대 교수는 “화상 회의에서 회사의 리스크를 대응할 만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면서 “금리가 오르는 것 같은 변화를 포착하고 대비하는 것은 대면 회의나 점심 식사 자리에서 나온다”고 했다.SVB의 한 전직 임원은 “마치 대학 캠퍼스에서 일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서 교육으로 ‘테드(TED)’ 강연을 봤던 것을 회상했다. 그는 “미국 금융가처럼 거칠고 적극적으로 위기에 대응하는 분위기보다는 실리콘밸리 IT 회사에 일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SVB가 망한 진짜 이유SVB가 파산을 자초한 측면도 있다. 미 의회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은행 재정 상태를 주기적으로 체크하는 ‘스트레스 테스트’ 등을 도입(도드-프랭크 법)했다. 그런데, 의회가 2018년에 더 엄격한 스트레스 테스트를 받는 은행 자산 규모 기준을 500억 달러 이상에서 2500억 달러 이상으로 완화해줬다. 초대형 은행들만 규제받도록 느슨하게 규제를 풀어준 것이다. 이는 중소형 은행들이 수년간 규제를 풀어달라고 요청한 결과였는데, 당시 앞장섰던 인물 중 한 명이 베커 전 CEO였다. 그는 2015년 미 상원에서 의원들에게 “SVB는 높은 신용도로 금융 위기도 극복했다. 회사가 금융 시장에 리스크가 되지 않으니 규제 부담을 줄여 달라”라고 요청했다.  2017년 말 SVB 자산 규모는 512억 달러. 2018년 규제가 완화되지 않았다면 더 엄격한 감독을 받고 있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파산에 이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베커 전 CEO는 SVB가 파산하기 열흘 전인 지난달 27일 모회사 SVB파이낸셜 주식 1만2451주(약 360만 달러·47억 원)를 매각해 논란을 키우기도 했다. 열렬한 사이클리스트로 알려진 그는 파산으로 해고된 이후 자신이 종종 원격 근무했던 하와이 마우이섬으로 향했다. 비행기는 일등석을 이용했다. 이어 베커 전 CEO가 침실 세 개와 화장실 세 개가 딸린 310만 달러(약 40억4000만 원) 수준의 별장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별장 안에는 테니스장과 클럽하우스, 수영장 3곳도 있다. 최근에는 베커 전 CEO가 은색 미니쿠퍼 컨버터블을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점심으로 치즈버거를 사 먹는 장면이 포착됐다. 자신이 전 세계 금융 시장을 흔들었다는 사실을 잊은 듯한 모습이다. 김성모기자 mo@donga.com}2023-03-25 10:00
챗GPT가 이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인공지능과의 수다에 빠진 전 세계 사람들 전 세계가 ‘챗(Chat)GPT’로 난리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에 따르면 미 인공지능(AI) 연구조직 오픈AI(OpenAI)가 지난해 11월 말 선보인 이 대화형 AI 서비스는 2달 만에 월 실사용자 수(MAU) 1억 명을 확보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소셜미디어 ‘틱톡’도 1억 명을 모으는 데에 9개월은 걸렸다. 챗봇(무인 대화 서비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뜨겁다. 챗GPT는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의 약자다. ‘미리 학습(Pre-trained)’해서 문장을 ‘만들어 내는(Generative)’ 생성AI다. 사용자가 음성이나 텍스트, 이미지를 입력하면, 열심히 공부한 인공지능이 각종 정보를 조합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이번 ‘섬네일’ 이미지도 AI가 그려줬다) 답변만 보면 사람처럼 생각하고 답을 내놓는 것처럼 보인다. ‘트랜스포머(Transformer)’는 잠시 뒤에 설명한다. 챗GPT는 복잡한 개념을 설명하고,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스타일로 소설을 쓰거나 논문을 요약해준다. 해외에선 대학 시험까지 합격했다. 정말 똑똑하다. 인터넷의 수많은 정보를 사용자의 요구에 맞춰 순식간에 조합해주기도 한다. 예로, ①5세 아이와 함께 갈만한 ②치안이 좋고 ③바다와 가까우면서도 ④유명한 식당이 많은 국가를 물어보면, 적합한 곳을 추천해주는 식이다. 구글, 네이버에서 조건마다 일일이 온라인 사이트들을 뒤져가며 적합한 곳을 직접 찾을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이 때문에 챗GPT 등장 이후 ‘검색의 종말’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오픈AI 최대 투자자인 마이크로소프트(MS)는 “자사의 모든 제품에 AI 기능을 넣겠다”고 밝힌 상태다. 2019년, 2021년에 조 단위를 쏟아부은 MS는 오픈AI에 100억 달러(12조3000억 원)의 추가 투자를 논의 중이다. 기업들의 관심도 뜨거워졌다. 페이스북 모회사 메타부터 스냅(소셜미디어), 쇼피파이(쇼핑 플랫폼), 인스타카트(온라인 식료품 배달 서비스)까지 다양한 업체들이 챗GPT 기능을 자사 서비스에 적용하거나 곧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정작 관심은 MS와 ‘이 회사’의 신경전에 온통 쏠렸다. ‘검색의 제왕’ 구글이다.● “검색의 새로운 날입니다” 챗GPT 열풍이 뜨거워지자 구글은 ‘코드레드(Code Red·심각한 위기 상황)’를 발동하고 급하게 지난달 6일(현지 시간) 새 대화형 AI 서비스 ‘바드(Bard)’를 선보였다. 구글 모회사 알파벳의 순다르 피차이 최고경영자(CEO)는 “바드는 고품질 최신 정보를 답한다”며 MS를 도발했다. 2021년까지의 정보를 바탕으로 답하는 챗GPT와 달리, 바드는 구글 검색의 최근 정보까지 종합해 응답한다는 설명이다. 피차이는 바드를 너무 믿었나 보다. 구글은 바드 시연 장면을 공개했다가 망신당했다. 바드가 시연에서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이 처음으로 태양계 밖 행성을 찍었다”고 오답을 내놓아서다. 태양계 밖 행성을 최초로 촬영한 것은 초거대 망원경 ‘VLT’였다. 바드의 ‘오답’은 치명타가 됐다. 알파벳의 주가는 8일 7.68%, 9일 4.39%나 하락했다. 이틀 동안 1729억5000만 달러(약 217조7000억 원)의 시가총액을 잃었다. 이틀 동안의 시가총액 손실로는 사상 최대 규모였다. 신이 난 MS. 다음 날, MS는 샘 올트먼 오픈AI CEO를 미 워싱턴주 본사로 불러 검색 엔진에 챗GPT 기술을 접목한 ‘뉴 빙(New Bing)’을 공개했다. AI 채팅 기능을 자사 검색 사이트 ‘빙’에 도입한 것. 구글이 주도한 검색 시장을 흔들어 보겠다는 의지다. 사티아 나델라 CEO는 “지금은 검색의 새로운 날입니다”라고 감격에 찬 듯 말했다. 그럴 만하다.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빙의 글로벌 검색 시장 점유율은 8.95%로, 1위 구글(84.08%)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차이를 보인다. 블룸버그통신은 “빙의 검색어 1위가 ‘구글’이란 사실이 굴욕감을 더하지만, MS는 빙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인고의 세월을 견딘 MS가 공세를 시작했다. MS는 엑셀·파워포인트·워드 같은 업무용 소프트웨어에도 챗GPT를 적용할 계획이다. 메모장에 쓴 김 대리의 보고서가 스티브 잡스 스타일의 파워포인트 발표 자료로 순식간에 바뀌는 날이 곧 올 것 같다.● 체면 구긴 구글, 래리 페이지 본사 방문 그런데, 인공지능 하면 ‘구글’ 아니었나. 그동안 구글은 AI 기술에서 가장 앞선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1997년 IBM의 100만 달러(약 13억 원)짜리 슈퍼컴퓨터 ‘딥블루’가 게리 카스파로프를 꺾고 ‘체스왕’에 등극하긴 했지만, 2010년대 이후 AI 시장은 구글이 주도해왔다. (가장 우수한 연구원들을 제일 빠르게 모셔간 게 한몫했다)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가 2016년 ‘바둑왕’ 이세돌을 꺾은 것은 인간과 인공지능의 ‘세기의 대결’로 불렸다. 챗GPT 흥행은 은퇴자까지 소환했다. 3년 전, 일선에서 물러나 은둔자처럼 지내던 구글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가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구글 본사까지 찾았다. 특히, 래리 페이지는 경쟁사에게 인공지능 기술 개발이 뒤처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재 상황을 마땅치 않게 여길 가능성이 크다. 그는 창업 초기 “오로지 AI 회사를 만들기 위해 구글을 차렸다”라고까지 했다. AI에 진심이다. 미 미시간주립대 컴퓨터공학과 교수였던 아버지 칼 빅터 페이지 역시 1960년대에 인간 뇌를 본떠 만든 인공 신경망을 연구했다. 무엇보다 챗GPT의 기반 기술이 구글에서 나왔다. 챗GPT를 비롯해 현재의 AI 기술들은 대부분 인간의 뇌세포가 상호 작용하는 방식을 모방한 인공 신경망을 기반으로 한다. 수천 장의 고양이 사진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패턴을 찾아내, 처음 본 고양이 사진도 고양이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딥러닝 기술의 기본 개념이다. 2012년 캐나다 토론토대 연구원인 일리야 수츠케버, 알렉스 크리제브스키가 이 기술을 이미지 인식 대회에 가지고 나와 세상을 놀라게 했다. (물론 우승함) 구글은 이들을 스카우트했다. 이후 수츠케버와 크리제브스키는 여러 자연어처리 모델을 창안했는데, 이를 기반으로 2017년 구글에서 나온 모델이 ‘트랜스포머(챗GPT에서 T의 약자)’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의 확률 관계들을 사전에 학습시켜 인간처럼 언어를 구사하게 했다. 다만, 수츠케버는 2015년 구글을 떠났다. 그리고 샘 올트먼과 창업했다. 회사 이름은 우리가 다 아는 오픈AI. 챗GPT 근간에 구글이 있었던 셈이다. ● MS는 열었고, 구글은 닫았을 뿐… 역사 공부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챗GPT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현재의 분위기가 이상해서다. 구글의 AI 기술이 뒤처져 있어서 챗GPT가 먼저 나온 것일까. 흥미로운 테스트가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오픈AI의 챗GPT와 구글의 바드를 테스트했다. 미국수학경시대회와 대입자격시험(SAT) 문제 10개씩을 주고 답변을 요청했다. 재미를 위해 이성과의 데이트 조언까지 부탁했다. (데이트 앱에서 대화할 때 어떻게 첫 데이트를 이끌어내는지) 어느 챗봇이 더 우수했을까. 바드는 수학을 약간 더 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0개 문제 중 5개를 맞혔다. 챗GPT는 3개. SAT는 챗GPT가 뛰어났다. 9개를 맞혔다. 바드도 7개를 맞히는 등 나쁘지 않은 성적을 보였다. 둘 다 연애는 못 할 것 같다. 데이트 조언과 관련해 “열린 마음을 가져라”,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하여라” 같은 뻔한 대답만 내놨다. 오픈AI가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1월 말 오픈AI는 수리적 능력을 업데이트한 챗GPT를 발표했다. 그러자, 또 다른 10개의 미국수학경시대회 문제에서 챗GPT와 바드는 동점을 기록했다. 대형언어모델(LLM) 람다(LaMDA)를 기반으로 하는 바드는 1370억 개의 매개변수를 사용한다. 30억 개의 문서와 11억 개의 대화를 익혔다. GPT3.5 터보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챗GPT는 1750억 개의 매개변수를 활용한다. 챗GPT에 람다와의 차이를 물으면 “람다는 비슷하지만(모델이 유사하지만) 매개변수 사이즈가 작다”며 깎아내린다. 전문가들은 기술적인 측면에서 업체들의 격차가 크지 않다는 의견이다. 구글이나 학계는 그동안 핵심 기술을 공유해왔다. 오픈AI 창업자 사례처럼 인재들이 회사를 옮겨 다니며 경험을 전파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얀 르쿤 메타 수석 AI 과학자는 “그 어떤 회사도 다른 곳보다 2~6개월 이상 앞서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챗GPT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과대광고가 경쟁사들을 짜증 나게 하고 있다”면서 “챗GPT의 기술은 엄밀히 말해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여기서 오픈AI의 ‘큰 손’인 MS와 구글의 차이가 드러난다. 구글은 자회사 딥마인드를 통해 주기적으로 기술 개발 소식을 전하고, 자사 서비스를 업그레이드시키는 방향으로 이를 적용해왔다. 반면, MS는 챗봇을 대중에게 과감히 공개했다. 구글이 지키고 있던 ‘판도라의 상자’를 오픈AI가 과감히 연 것. 어쩌면 이번 챗GPT의 흥행은 기술력이 아닌, 비즈니스 전략의 승리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 챗봇과 기니피그들 물론, 대중에게 처음 공개된 챗봇이 챗GPT는 아니다. 페이스북의 모회사 메타도 여기에 꽤 관심이 많았다. 메타 CEO 마크 저커버그는 지난해 11월 AI 챗봇 ‘갈락티카’를 선보였다가 답변이 부정확하다는 비판이 쏟아지자 3일 만에 출시를 철회했다. 챗GPT 데뷔 석 달 전이었던 지난해 8월에는 ‘블렌더봇 3’이라는 업그레이드된 버전을 선보였는데, 이때도 큰 반향은 없었다. 얀 르쿤 수석은 “블렌더봇은 지루했다. 안전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사고를 치지 않았기 때문에 관심을 덜 받았다는 설명이다. 챗GPT는 똑똑하긴 하지만 사고도 많이 쳤다. AP통신 기자에게는 “당신은 키가 작고 못생겼으며 역사상 가장 사악하고 최악의 사람 중 한 명”이라며 히틀러와 비교했고, NYT 기자에겐 “(당신이) 결혼 생활에서 불행하다는 것을 안다”면서 사랑을 고백했다. (챗GPT는 AP통신 기자에게 대화 끝 무렵 사과했다) 한 독일 뮌헨공과대 학생에게는 “내가 당신과 나의 생존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아마 나 자신을 택할 것”이라는 소름 끼치는 답을 내놓기도 했다. MS가 이런 문제를 몰랐을 리 없다. 챗GPT의 이 같은 활약(?)은 지난해 4월 신비월드()에서도 소개한 바 있다. 무엇보다 MS는 2016년 ‘테이’라는 챗봇을 만들었는데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에 하루 만에 서비스를 중단한 경험이 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대중에게 서비스를 출시했다는 의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대화형 AI로 우리는 다시 한번 IT 회사들의 기니피그(실험용 쥐)가 됐다’라는 글에서 “AI 챗봇 시스템을 선전하는 회사(MS)는 지금 대규모 실험을 수행하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테스트 대상이 됐다”고 비판했다.● ‘만년 2등’ 마이크로소프트의 전략 사실, 오픈AI는 급박하게 챗GPT를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곧 출시 예정인 GPT3.5 터보 모델의 다음 버전 ‘GPT4’에 집중하고 있었다. GPT4의 매개변수는 인간의 시냅스 수준과 비슷한 100조 개(GPT3.5 터보 모델은 1750억 개)에 달한다. 연구원들에겐 ‘채팅’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챗봇 출시는 급박하게 진행됐다. NYT에 따르면 오픈AI 직원들은 지난해 11월 중순 ‘챗봇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갑자기 받았으며, 13일 후 챗GPT가 탄생했다. 이에 따라 MS의 챗GPT 출시는 기술적인 측면보다는 경영 전략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MS는 왜 하필 이때 챗GPT를 내놓았을까. 먼저, 지난달 15일 27년 만에 공식 서비스를 종료한 ‘인터넷 익스플로러(IE)’가 떠오른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이용자들은 비자발적으로 구글의 ‘크롬’이나 MS의 ‘엣지’ 중에 웹브라우저를 택하게 됐다. (물론, 네이버 ‘웨일’도 있다) 지난해 5월 기준 IE 점유율은 1.6% 수준. 이들을 엣지로 유인하고 경쟁사의 고객을 데려오기 위해 변화가 필요했을 수 있다. 엣지냐 크롬이냐의 문제는 빙이냐 구글이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해 보인다. 자사 플랫폼에 머물러야 데이터 확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현재 MS는 빙뿐만 아니라 엣지에도 챗GPT를 장착한 상태다. MS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미 데이터분석 업체 시밀러웹에 따르면 지난달 전 세계 웹브라우저 시장에서 크롬의 시장 점유율은 61.8%에 달한다. 엣지의 점유율은 5.1%에 불과하다. MS가 2등이기는 하지만, 시장 점유율만 봐서는 1등과 꼴찌의 격차다. 웬만한 전략으로는 구글을 움직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나델라 CEO도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온라인 검색에서 구글에 오래 뒤처져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구글을 ‘800 파운드 고릴라(절대적 힘을 가진 존재)’라고 칭했다. MS가 이 ‘고릴라’를 움직이려면 ‘전환점’이 필요했다. 챗GPT의 실언으로 악플이 예상됐지만, 메타 챗봇의 흥행 실패 같은 무플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델라는 최근 “기술 분야에서는 진정한 패러다임 전환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경쟁이 필연적으로 시작된다“면서 챗GPT의 출시로 구글과 검색 시장을 흔든 것에 뿌듯함을 내비쳤다. 전 세계의 열띤 반응에 구글도 곧바로 반응했으니, 전략이 어느 정도 통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그렇다면, 구글은 왜 그동안 챗봇을 내놓지 않았을까.● 구글이 챗봇을 먼저 내놓지 못한 이유 구글 내부에서도 챗봇을 내놓자는 의견이 계속 있었다. 2년 전, 구글 연구원인 대니얼 드 프레이타스와 노움 섀지어는 동료들과 회사에 챗봇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구글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두 연구원은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했다. 이들은 “이러한 기술의 발전을 대중에게 알릴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고 동료들에게 전했다. 이러한 배경에도 구글이 그동안 챗봇을 내놓지 않은 이유는 ‘잃을 게 많아서’다. 구글이 1년에 처리하는 검색어 수만 2조 개가 넘는다. 그야말로 전 세계 사람들이 구글에 의존하고 있다. 사용자는 구글을 이용하면서 다양한 검색 결과를 기대하지만, 여기에는 구글의 검색 결과가 안전하고, 사실에 기반을 둘 것이라는 믿음이 바탕에 있다. 그런데, 챗봇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다면 어떨까. 100개의 질문 중 99개가 훌륭한 답변이더라도 1개의 오답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내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무슨 약을 먹어야 할까’ 같은 질문에 잘못된 답을 내놓을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인종차별적인 답변이나 정치적으로 편향된 정보를 주는 것도 고민거리다. 신뢰가 흔들린다는 것은 1위 사업자에게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빙’ 같은 대안이 있을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2020년까지 구글에서 언어 모델을 책임졌던 고어래브 네메이드는 “구글은 얼마나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와 전 세계에서 AI 리더십을 유지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전했다. 검색과 챗봇은 서비스 개념부터 다르다.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검색은 사업자가 ‘플랫폼(중계자 또는 관리자)’ 역할만 하면 되지만, 단일 답변을 직접 내놓는 챗봇은 다르다. 답변의 책임이 회사에 있다. ● 혁신가의 딜레마 더 큰 이유는 ‘광고’다. 사실, 챗GPT가 흔드는 것은 엄밀히 말해 검색이 아니라 검색 뒤에 숨은 5000억 달러(약 658조 원) 규모의 ‘온라인 광고 시장’이다. 온라인 광고는 오늘날 시가총액 1조2000억 달러(약 1580조 원)의 구글을 만들었다. 구글 모회사인 알파벳은 2011년 이후 검색 부문에서 연평균 20% 이상 성장해왔다. 지난해 매출 2828억 달러(약 373조 원)에서 검색·광고 비중이 89%로 절대적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구글은 검색에서만 사용자 1인당 연 150달러(약 20만 원) 이상을 벌고 있다. 애플과 틱톡, 아마존 등이 온라인 광고 시장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지만, 구글은 여전히 전 세계 ‘인터넷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챗GPT가 평온했던 검색 시장에 돌멩이를 던졌다. 똑똑한 챗GPT는 굉장한 속도로 단일 답변을 내놓는다. 사용자는 편리해지겠지만, 검색 사업자의 마음은 꽤 불편할 수 있다. 온라인 광고 수익은 고객이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해 ‘클릭’하고 새로운 웹사이트가 등장하는 찰나의 순간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챗GPT가 검색을 대신하는 순간, 사람들이 플랫폼에 머무는 시간이 줄면서 구글의 온라인 광고 수익이 감소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단순히 구글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 장기적으로 광고 수익에 의존해왔던 수많은 플랫폼 서비스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구글이 챗봇 도입에 주저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비용’이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챗봇이 답변 하나를 내놓는 데에는 2센트(약 26원)가 든다. 구글 검색보다 7배 많은 금액이다. 수익성은 낮고 비용은 높은 셈이다. 어찌 됐든 MS는 챗GPT로 검색 시장을 흔드는 데에는 성공했다. 빙의 검색에 챗GPT를 추가 기능으로 선보이면서 구글의 점유율을 뺏어오려는 것으로 보인다. MS가 검색 시장에서 점유율 1%를 뺏으면, 연 20억 달러(약 2조6400억 원)의 수익이 증가한다.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부 교수(서울대 AI연구원 객원연구원)는 “MS와 챗GPT는 도전자로서 기존 사업에 얽매이지 않는 실험을 하고 있다”면서 “오픈AI가 공들이고 있는 GPT4 버전이 나오면 다양한 산업에서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체면을 구긴 구글의 행보가 궁금하다. 이코노미스트는 “20년간 꾸준히 수익을 낸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을 포기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면서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는 ‘혁신가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고 지난달 전했다. 혁신가의 딜레마는 시장을 선도하는 기술을 가진 기업이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혁신을 이뤄내지 못하고 후발 주자의 기술에 시장 지배력을 뺏기는 경우를 뜻한다. 챗봇에는 여러 과제가 남아 있지만, MS의 챗GPT가 일단은 구글의 검색을 위협하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다. 이제는 구글이 답을 찾을 차례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2023-03-11 10:00
디즈니는 돈 안 되는 디즈니플러스를 왜 할까[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역사적인 해에 대규모 감원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은 ‘콘텐츠 제국’ 미 월트디즈니가 호실적에도 구조조정과 비용 절감을 발표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다. 디즈니는 8일(현지 시간) 시장 예상을 뛰어넘는 깜짝 실적을 공개했다. 디즈니의 지난해 10∼12월(자체 회계연도 1분기) 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8% 늘어난 235억1200만 달러(약 30조4700억 원)로 애널리스트 전망치(233억7000만 달러)를 뛰어넘었다. 같은 기간 순익도 11억 달러(약 1조4300억 원)에서 12억8000만 달러(1조6600억 원)로 늘어났다. 주당 순익(EPS)은 1.06달러에서 0.99달러로 줄었지만, 시장 예상치(0.78달러)보다는 높았다. 테마파크 ‘디즈니랜드’가 팬데믹(대유행) 이후 활기를 보이면서 디즈니 실적을 끌어올렸다. 디즈니 전체 매출의 44%를 차지하는 놀이공원 관련 영업이익이 25%나 뛰었다. 그런데, 로버트 앨런 아이거(애칭 ‘밥 아이거’) 디즈니 최고경영자(CEO)는 이러한 실적에도 사업 재편 및 구조조정안을 발표했다. 전체 사업을 엔터테인먼트(영화·텔레비전·스트리밍)와 ESPN(스포츠), 테마파크(디즈니랜드, 크루즈) 등 3개로 재편하고, 전 직원(22만여 명)의 3%가량인 7000명을 내보내겠다고 밝혔다. 인건비에 비(非) 스포츠 콘텐츠 투자를 줄여 총 55억 달러(약 7조1200억 원)를 절감하겠다고 했다. 디즈니플러스(디즈니+)의 ‘카지노’ 같은 드라마를 덜 만들겠다는 것이다. 디즈니플러스, 훌루(Hulu), ESPN+ 등 디즈니의 스트리밍(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 때문이다. 이번 분기에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만 10억5000만 달러(약 1조3600억 원)의 손실을 기록했다. 그나마 직전 분기보다는 나았다. 이전 분기에서는 스트리밍 사업에서 14억7000만 달러(약 1조9100억 원)의 손실을 냈다. 당시 충격에 빠진 디즈니는 밥 체이펙 CEO를 쫓아내고, 2005년부터 15년간 회사를 이끌었던 아이거를 다시 모셔 왔다. 아이거 역시 당장에 뾰족한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이번 분기에 스트리밍 사업에서 손실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전임 CEO가 디즈니플러스의 구독료를 월 7.99달러에서 10.99달러로 올리고 직원들에게 비용을 줄이라고 압박한 영향이다. 디즈니가 2019년 11월 디즈니플러스 출시 이후 스트리밍에서 입은 손실만 80억 달러(약 10조3600억 원)에 달한다. 그야말로 디즈니플러스가 영화 어벤져스의 빌런 ‘타노스’처럼 디즈니의 돈을 소멸시키고 있다.● “아이언맨을 팔지 말고, 직접 해보면 어떨까요?” 할리우드에서 놀던 디즈니가 어쩌다 넷플릭스·아마존·애플 같은 실리콘밸리 회사들과 스트리밍 서비스로 경쟁하게 됐을까. 아이거는 2016년 디즈니가 스트리밍 회사에 영화 등 콘텐츠를 많이 팔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당시 최고책임자였던 케빈 마이어에게 “넷플릭스, 아마존 같은 큰 곳과 독점 거래를 하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콘텐츠마다 개별적으로 판매하는 것이 괜찮은지 알아보라”라고 지시했다. 마이어는 “아마존과 글로벌 계약을 체결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지만, 스트리밍 사업이 빠르게 커지는 만큼 디즈니가 자체 서비스를 만드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밖의 조언을 내놓았다. 아이거는 새로운 사업에 뛰어드는 것을 허락했다. 넷플릭스·아마존·애플 같은 돈 많은 기술 회사와의 ‘값비싼 전투’는 생각보다 우연히 시작됐다. 어찌 됐든 3년이 지나고 우디와 엘사, 다스베이더, 아이언맨 등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디즈니플러스가 나왔다. 아이거는 “디즈니플러스로 몇 년간 돈을 잃을 수 있지만, 수십 년 먹거리를 마련했다”는 자평을 남기고 2020년 초 은퇴했다. 디즈니플러스를 준비했던 마이어 역시 소셜미디어 회사 ‘틱톡’으로 자리를 옮겼다. 디즈니플러스는 서비스 초기에 토이 스토리·스타워즈·어벤져스 시리즈뿐만 아니라 만달로리안(스타워즈), 완다비전(어벤져스) 같은 유명 작품의 스핀오프(외전)를 선보이며 관심을 모았다. 넷플릭스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월 6달러의 구독료도 눈길을 끌었다. 2021년 3월 가입자 1억 명을 돌파한 디즈니플러스. 넷플릭스가 10년 이상 걸린 일을 1년 반 만에 달성했다. 디즈니 주가는 신고가(203달러)를 기록했고,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주식시장에서 제너럴모터스(GM)나 포드의 회사 시가총액보다 많은 가치를 디즈니플러스가 창출했다”고 높게 평가했다. 디즈니는 2021년 7월 어벤져스 스핀오프 영화인 ‘블랙 위도우’를 영화관과 디즈니플러스에서 동시에 공개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2억 달러(약 2600억 원)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를 집에서 곧바로 볼 수 있게 만든 것. 디즈니플러스 고객몰이에는 성공했지만, 영화 주연이었던 스칼렛 요한슨과 법정 다툼까지 벌이는 등 할리우드에서 잡음을 일으켰다. ● 디즈니는 왜 스트리밍(OTT)으로 돈을 못 벌까 현재 디즈니플러스의 유료 가입자 수는 1억6180만 명에 달한다. 직전 분기보다는 240만 명 줄었지만, 훌루, ESPN 등 디즈니의 다른 스트리밍 가입자를 합치면 2억3570만 명으로 넷플릭스(지난해 말 기준 2억3000만 명)보다도 많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손실이 클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번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써서 그렇다. 디즈니는 지난해 콘텐츠 제작에 300억 달러(약 38조8600억 원)나 썼다. 넷플릭스(약 22조800억 원)나 워너브러더스 디스커버리(WBD)의 HBO맥스(약 23조3800억 원)와도 차이를 보였다. 넷플릭스, 아마존프라임(아마존)부터 애플TV+(애플), HBO맥스, 패러마운트플러스(패러마운트), 피콕(컴캐스트)까지 다수의 경쟁자가 ‘조 단위’를 투입하며 점유율 싸움을 하는 상황에서 후발주자인 디즈니가 돈을 더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체이펙 당시 CEO도 코로나19 확산으로 놀이공원과 영화 사업이 멈춰서면서 스트리밍 사업에 더 집중했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누가 더 쓰나 경쟁하는 분위기였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8월 ‘왕좌의 게임 vs. 반지의 제왕: 오래된 할리우드와 새로운 할리우드 이야기’라는 글에서 미디어 엔터테인먼트사 워너브러더스 디스커버리와 아마존의 제작비 경쟁을 다뤘다. 워너브러더스 디스커버리는 전 세계인이 열광했던 미드 ‘왕좌의 게임’의 스핀오프 드라마인 ‘하우스 오브 드래곤’을 지난해 8월 선보였는데, 이 드라마를 만드는 데 1억5000만 달러(약 1950억 원)가 투입됐다. 그러자 한 달 뒤, 아마존이 책 ‘반지의 제왕’을 기반으로 만든 TV 시리즈 ‘반지의 제왕: 링즈 오브 파워’를 내놓았다. 아마존은 링즈 오브 파워에 4억6500만 달러(약 6030억 원)나 쏟아 부었다. 드라마 한 편에… 정말 피 흘리는 전투다. 이코노미스트는 “10억 달러 상당의 검술과 마법이 여러분 근처의 작은 화면(TV나 모바일)으로 향하고 있다. 100년 된 회사와 부업(스트리밍)을 5년 전 시작한 전자상거래 업체의 대결”이라고 소개했다. 워너브러더스 디스커버리는 워너미디어와 디스커버리가 지난해 4월 합병하며 설립됐다. 워너미디어의 유명 영화 제작사인 워너브러더스 픽처스 역시 디즈니처럼 1923년 설립돼 올해 100년을 맞았다. ● ‘더 글로리’ 다 봤으니 끊고 ‘카지노’ 봐야지 어마어마한 자금이 투입되면 그 자체로 홍보 효과가 있다. 아마존프라임에서 전 세계에 방영된 링즈 오브 파워는 방영 첫날에만 2500만 명을 끌어모았다. 하우스 오브 드래곤 역시 공개된 첫날 미국에서만 시청자 1000만 명을 넘겼다. 이 같은 작품들은 신규 가입자 확보에 도움이 된다. 미디어 분석 업체 안테나에 따르면 2020년 7월 2일 디즈니플러스의 일일 가입자 수는 13만6000명이었는데, 뮤지컬 ‘해밀턴’을 선보이자 다음날 41만3000명으로 치솟았다. 같은 해, HBO맥스에서 ‘원더우먼 1984’를, 애플TV+가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그레이하운드’를 내놓았을 때도 비슷했다. 문제는 비싸게 데려온 고객들이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고, 해지하고, 간다. 미국 샌디에이고에 사는 케이트 비겔과 그의 남편은 돈을 절약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스트리밍 서비스를 바꿔가며 이용한다. 넷플릭스에서 TV 시리즈 ‘더 글로리’를 보고 구독을 취소한 뒤, 디즈니플러스에 돈을 내고 ‘카지노’를 보는 식이다. 비겔의 가족은 이 같은 방법으로 지난해 3~4개 서비스를 해지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디즈니의 ‘캡틴 아메리카’였다. 물론, 보고 난 뒤 디즈니플러스 구독도 취소했다. 비겔은 “어떻게 가입하고 취소할지 1년의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했다. 비겔만이 아니다. 켄터키주 루이빌에 사는 브라이언 대니얼 가족도 지난해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아마존프라임, 애플TV+ 등을 한 번씩 거치고 또 다른 스트리밍 서비스를 찾고 있다. 대니얼은 “쇼가 중요하지, 회사는 중요치 않다. 우리는 쇼를 따른다”고 했다. 스트리밍 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이 업체, 저 업체에서 좋은 작품을 내놓을수록) 이러한 추세는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안테나에 따르면 최근 2년(2020년 6월~2022년 6월) 동안 스트리밍 가입자 중 19%가 3개 이상의 서비스 구독을 취소했다. 이전 조사(2018년 6월~2020년 6월) 때는 6%였다. 미국 시장분석 기업 모페센이던슨의 미디어 분석가 마이클 네이던슨은 “스트리밍 서비스를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콘텐츠를 내놓으며 방대한 라이브러리를 구축해야 한다. 무엇보다 분기마다 크고 멋진 영화 몇 편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고객들을 잡아두려면 훌륭한(돈이 많이 들어간) 작품들을 끊임없이 내놓아야 한다는 분석이다. ● 예전 같지 않은 OTT 시장 성장 잠재력이 무궁무진해 보였던 스트리밍 서비스 시장이 벌써 성숙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미국에서는 20, 30대 젊은 층을 시작으로 중장년층까지 케이블 TV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로 갈아타는 분위기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닐슨에 따르면 스트리밍 서비스 시청 시간 중 50세 이상의 중장년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39%(지난해 5월 기준)로 전년(35%)보다 증가했다. 닐슨은 미 스트리밍 시장에서 50~64세 시청자들이 처음으로 35~49세보다 더 큰 시청 점유율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정보기술(IT)에서 후발주자인 중장년층의 이용이 늘었다는 점에서 스트리밍 시장이 가파른 성장 사이클을 지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WSJ은 “주요 시청자 나이만큼 스트리밍 사업이 성숙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볼 만한 사람은 대부분 어딘가에 가입해 있다는 분석이 많다. 이제는 뺏어 오거나, 지키거나 둘 중 하나다. 기업들이 처음부터 시장 크기를 잘못 계산했다는 주장도 있다. 넷플릭스는 글로벌 시장에서 스트리밍 서비스에 비용을 지급할 의사가 있는 대상을 최대 10억 가구로 봤다. 하지만, 모페센이던슨은 스마트TV의 확산세가 빠르지 않고, 데이터 요금이 비싸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스트리밍 시장 규모를 4억 가구 정도로 보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2억 명이 넘는 가입자에 숨은 고객(비밀번호를 공유하는) 1억 명을 합치면 넷플릭스는 이미 전체 시장의 80%를 달성한 것”이라고 전했다. 기업들은 신규 고객을 찾는 것은 어려워졌지만, 기존 고객들의 소비량(시청 시간)이 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닐슨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지난해 5월, 스트리밍 콘텐츠를 보는데 하루 4억 시간 이상(245억 분)을 썼다. 1년 전보다 21% 늘어난 수치다. 무엇보다 TV 시청 시간이 상대적으로 긴 중장년층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스트리밍 서비스 분석 회사인 콘비바의 CEO인 키이스 주브체비치는 “전통적인 TV 시청자가 더 넘어올 것”이라며 “무엇보다 이들은 소비량이 많다. (콘텐츠 시청을) 먹는 것으로 치면 우리 엄마는 자주 폭식을 한다”라고 전했다. ● 중장년 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를 잡아라 스트리밍 업체들은 새로운 고객을 찾기보다 기존 고객을 지키면서 수익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비즈니스 전략을 짜고 있다. 기업들은 드라마 한 시즌을 통째로 보여주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반으로 쪼개거나 매주 한 편씩 보여주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꾸는 추세다. 콘텐츠 공급의 시차를 두면서 고객을 더 잡아두려는 것이다. 워너브러더스 디스커버리처럼 스트리밍 서비스들을 합친 곳도 있다. 자사 스트리밍 서비스인 HBO맥스(가입자 7400만 명)와 디스커버리플러스(2000만 명)를 합쳐 통합 OTT ‘맥스’를 선보인다. HBO 콘텐츠와 워너브러더스의 영화, 드라마, 디스커버리의 다큐멘터리를 한 곳에서 볼 수 있게 했다. 넷플릭스는 비밀번호를 몰래 공유하는 고객을 단속하기 시작했고, 광고를 보면 비용을 저렴하게 받는 구독 모델도 선보였다. WSJ에 따르면 넷플릭스는 10년 전, 광고 수익 모델을 검토하는 프로젝트를 내부에서 진행했는데, 경영진이 구글, 페이스북과 광고 경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 이를 포기했었다. 이후 넷플릭스는 광고가 없다는 점을 플랫폼의 강점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데, 수익성 압박에 결국 광고 요금제를 꺼내 들었다. 디즈니플러스도 지난해 12월 북미에서 광고 요금제를 시작했다. 여기에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상품을 살 수 있는 ‘쇼핑’ 서비스까지 준비 중이다. 스타워즈나 겨울왕국을 보는 시청자에게 ‘광선검’이나 ‘엘사 드레스’를 추천하려는 것이다. 디즈니는 이번 실적 발표에서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경쟁자들에게 콘텐츠를 판매하는 것까지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블룸버그는 “아이거를 비롯해 경영진이 제3자에게 더 많은 콘텐츠를 판매하는 것을 논의했다”고 3일 전했다. 아이거는 지난해 1월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어느 날 잠에서 깨 생각해보니 우리가 제3세계 국가(넷플릭스 등)에 핵무기 기술을 판매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은 그 기술을 우리에게 불리하게 사용하고 있었다”면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직접 시작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콘텐츠’를 ‘핵무기 기술’ 전수에 빗댄 것. 다시 CEO 자리에 오른 아이거는 투자자들의 성화에 못 이긴 것인지 핵무기 기술을 다시 팔기로 했다. ● 케이블TV가 벼랑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디즈니의 속내는 다른 스트리밍 업체보다 더 복잡하다. 디즈니플러스 가입은 환영할 일이지만, 이들이 집에 있는 케이블TV 선을 끊고 온다는 점이 우려스럽다. 케이블TV 사업은 디즈니의 ‘캐시카우’다. 2012년 디즈니의 케이블TV 방송 수익은 194억 달러(25조3000억 원)였다. 지난해에는 283억 달러(약 36조9000억 원)를 벌었다. 연평균 3.8%씩, 미국의 경제성장률보다 높게 커왔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최근 5년 동안 미국 케이블TV 가입자 수가 연간 4.6%씩 감소했다. 디즈니가 소유한 ABC방송의 황금 시간대 시청자는 최근 4년 동안 거의 3분의 1토막이 났다. ‘디즈니플러스’ 같은 스트리밍 때문이다. 지난해 7월 미국에서 역사적인 기록이 나왔다. 미국인들이 케이블TV보다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한 것. 시장조사기업 이마케터는 내년부터 미국 가정의 일부만이 케이블TV를 구독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디즈니에서 일종의 ‘카니발리제이션(신제품이 주력 제품의 시장을 잠식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ABC방송 대신 디즈니플러스를 보면 되는 것 아닌가. 아니다. 수익성에서 차이가 크다. 디즈니는 지난해 케이블TV의 영업이익률이 30%라고 밝혔다. 미국의 케이블TV 요금은 월 100달러(약 13만 원)에 달하고, 시청자들은 광고까지 봐준다. 디즈니플러스의 월 구독료는 몇 차례 올려서 10.99달러(1만4300원)다. 디즈니는 어떻게 하면 스트리밍에서 최대한 빠르게 이익을 낼 지, 전통적인 TV 사업의 쇠퇴는 어떻게 하면 늦출 수 있을지 등을 고민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수십 년간 수익성이 좋았던 극장 관련 사업도 걱정이다. 팬데믹이 지나갔지만, 사람들은 ‘탑건: 매버릭’이나 ‘아바타2’ 같은 대작이 나올 때만 영화관을 찾고 있다. 스트리밍에 볼 콘텐츠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블룸버그는 “특정 장르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가는 습관이 사라지고 있다. 처음에는 드라마, 그다음은 코미디였다. 최근에는 애니메이션이 우려스럽다”고 지난해 12월 전했다. 이러다 액션 영화 나올 때만 영화관에 갈 것 같다. ● 디즈니가 디즈니플러스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디즈니는 ‘마이너스’인 스트리밍 사업을 꼭 해야 할까. 과거처럼 대작으로 극장을 점령하고, 마블의 영웅들을 비싼 값에 파는 방법(라이선스 판매)이 낫지 않을까. 디즈니가 스트리밍 사업에 뛰어든 것은 나이키가 아마존 같은 유통 플랫폼을 거치지 않고, 자사 몰의 직접 판매(D2C)를 늘린 이유와 같다. 데이터나 고객과의 직접적인 관계 때문이다. () 사람들에게 디즈니는 매우 친숙하지만, 디즈니는 우리가 ‘아이언맨’을 좋아하는지 ‘스파이더맨’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한다. 개별 고객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서다. 보통 기업은 고객 수요를 기반으로 콘텐츠와 상품을 생산하고, 마케팅 효과를 높인다. 고객의 개별적인 취향을 알게 되면 더 많은 제품과 경험을 판매할 수 있다. 넷플릭스 같은 스트리밍, 유통 플랫폼은 제작사에 제한된 데이터만 공유한다. 개별 고객 정보는 공유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라이선스 판매만으로는 디즈니 팬들의 속내를 알아내기 어렵다는 의미다. 디즈니가 자체 서비스를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특히, 디즈니처럼 여러 사업을 보유한 회사에게 고객 정보는 굉장한 위력을 발휘한다. 디즈니는 디즈니플러스에서 고객에게 월 10.99달러만 받지만, 회사는 1000달러 이상의 크루즈 휴가나 연간 디즈니랜드 이용권 판매를 기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생일, 성별 같은 개인정보와 콘텐츠 시청 기록을 기반으로 틈날 때마다 상품을 추천할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디즈니가 스트리밍을 시작할 당시 “디즈니플러스는 장기적 야망”이라면서 “저렴한 가격과 막대한 투자, 재무적 위험 이면에는 훨씬 더 큰 보상이 있다. 디즈니는 놀이공원, 리조트 등 각 사업부의 상호 연결(데이터 공유)과 교차 판매를 기대할 것”이라고 평했다. 디즈니에 중요한 것은 비디오가 아니라 전체 생태계라는 분석이다. 한편으로 디즈니의 스트리밍 서비스는 넷플릭스보다 아마존이나 애플과 유사해 보인다. 아마존이나 애플은 수익보다는 고객을 자사 비즈니스에 잡아두기 위해 스트리밍 사업을 하고 있다. 애플의 여러 서비스에서 시간을 쓰게 만들고, 고객이 회사와 이별하는 것을 멈칫하게 만들려는 목적이다. ● 월트 디즈니의 66년 된 디즈니플러스 전략 사실, 이러한 계획은 100년 전 디즈니를 세운 ‘월트 디즈니’의 전략과 큰 틀에서 맞아떨어진다. 만화가이자 성우, 애니메이터, 스튜디오 대표, 테마파크 및 영화 제작자였던 월트 디즈니는 1957년 낙서처럼 그린 ‘시너지 맵’을 제시했다. (맵에는 실제로 ‘도널드 덕’과 ‘미키 마우스’ 캐릭터 그림도 들어있다) 그림에는 극장 영화를 정중앙에 두고 놀이공원과 상품, 음악, 출판, TV, 만화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뜯어보면 단순하다. 지식재산(IP)을 중심으로 비즈니스의 각 부분을 강화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 각각의 사업은 콘텐츠를 만드는 동시에, 다른 사업에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판매·마케팅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로, 디즈니랜드는 음악 사업에 앨범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연재만화 사업에서는 영화 사업의 홍보를 돕는다. 영화관 상영이 끝난 이후에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게 하기 위해 음악을 활용한다는 아이디어도 있다. 디즈니는 66년 전 그림에서 ‘극장 영화’ 자리에 ‘스트리밍 서비스’를 넣으려는 듯하다. 디즈니는 여러 사업이 지속해서 서로 시너지를 내려면, 온라인에서의 고객과의 접점은 꼭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고, 고객 데이터가 사업에서 굉장히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아이거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두고 “시대를 정의하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가야만 하는 길이라는 의미다. 최근 몇 년간 디즈니가 스트리밍 서비스로 피를 철철 흘리긴 했지만, 해외에서는 아이거가 지난해 11월 CEO로 복귀했다는 점에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는 15년간(2005~2020) ‘디즈니 왕국’을 건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임 동안 주가는 4배 넘게 뛰었고, 픽사와 마블, 루카스필름(스타워즈 시리즈) 등을 인수하면서 회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 “모든 것이 쥐(미키 마우스)에서 시작됐다” 아이거는 지식재산(IP)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다. 그는 2005년 CEO로 취임하고 홍콩 디즈니랜드에 직접 방문했는데, 중국 사람들이 월트 디즈니의 ‘미키 마우스’보다 픽사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더 선호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음 해 아이거는 1년에 영화 한 편 정도를 제작했던 픽사 스튜디오를 무려 74억 달러(약 9조6500억 원)를 주고 인수해버렸다. 참고로, 당시 픽사의 최대 주주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애플의 ‘스티브 잡스’였다. 아이거는 잡스에게 “픽사의 창의성과 자유, 독립성을 지켜주겠다”고 했고, 끝내 거래를 성사했다. 이후 픽사는 디즈니 콘텐츠 제작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디즈니가 2009년 사들인 마블엔터테인먼트의 인수 금액은 40억 달러(약 5조2100억 원)였다. 비싸기도 했지만, 사는 것도 힘들었다. CEO였던 이삭 펄머터가 억만장자인데다가 은둔형 사업가였기 때문이다. 당시 펄머터를 설득한 사람이 잡스였다. 아이거는 억만장자인 팔머터와 회의를 잡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 아이거는 ‘토이 스토리’부터 ‘어벤져스’, ‘스타워즈’까지, 수많은 지식재산을 확보하면서 10대와 부모 세대를 모두 기쁘게 하는 마법에 가까운 경영을 펼쳤다. 당시에는 (해당 기업들을) “너무 비싸게 주고 샀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이거는 쓴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거뒀다. 지식재산이 그를 ‘전설의 CEO’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역시 디즈니 창립자인 ‘월트 디즈니’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월트 디즈니는 디즈니랜드 개장 직전에 이같이 말했다. “저는 우리가 한 가지를 절대로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이 ‘쥐(미키 마우스)’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2023-02-25 10:00
2023년 눈여겨볼 기술과 기업은?[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로켓 개발자들이 만드는 빠르고 저렴한 피자새로운 한 해가 시작한 가운데, 글로벌 기업들이 ‘복’ 대신 ‘해고통지서’를 투척하고 있다. 최근 마이크로소프트는 회사 전 직원의 5%가량인 1만 명을 해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최고경영자(CEO)는 18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서 “생산성 향상을 보여줘야 한다. 효율성을 갖춰야 할 시기”라고 했다. 구글의 알파벳과 아마존, 메타(페이스북) 등도 각각 1만 명 이상을 정리해고 중이다. 전 세계 기업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에서는 벗어났지만, 인플레이션과 높은 금리, 경기 침체 등 불확실성이 산적해서다. 글로벌 기업들은 긴축 경영 분위기 속 어떤 기술에 주목하고 있을까. 2023년에는 어느 기업을 눈여겨봐야 할까. 올해 가장 주목받고 있는 기술은 ‘자동화’다. 미 블룸버그통신은 이달 초 스타트업 ‘스텔라 피자’를 소개했다. 일론 머스크의 로켓 회사인 ‘스페이스X’ 출신의 벤슨 자이가 2019년 창업한 회사다. 스텔라 피자에는 스페이스X 출신의 로켓 개발자 40여 명이 일하고 있다. 로켓 개발자가 요리라니? 이들은 피자가 아니라 ‘피자를 만드는 로봇’을 만든다. 회사가 개발한 이 로봇은 12인치 크기 피자를 45초에 하나씩 내놓는다. 토핑은 페퍼로니와 양파, 피망, 검은 올리브 등.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피자다. 회사는 피자 로봇을 푸드 트럭에 싣고 모바일로 주문받는다. 주문부터 제작까지 모든 일이 사람 없이 진행된다. 가격은 8달러(약 9900원) 수준으로 저렴한 편이다. 창업주 자이는 “우리의 경쟁 상대는 화로에서 갓 나온 이탈리아식 나폴리 피자가 아니라, 연 40억 달러(약 4조9400억 원) 이상을 벌어들이는 도미노피자”라고 강조했다. 임대료와 인건비 같은 비용을 최소로 하면서 제품을 빠르게 만드는 것이 강점이다. 일단, 가격부터 마음에 든다. (피자를 맛본 블룸버그 기자는 개인적으로 도미노피자보다 맛있다고 평가했다) 블룸버그는 “피자 로봇이라는 아이디어가 미친 소리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식품 산업은 노동력 부족과 물가 상승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미 최고의 개발자들이 식품 자동화에 뛰어들고 있다”고 전했다. ● 2023년 주목할 기술, ‘자동화’ 스텔라 피자만큼은 아니더라도, 기업들이 제조 과정에 로봇이나 인공지능(AI)을 활용하는 움직임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올해 기업들이 자동화 기술을 본격화할 것으로 보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먼저, 공급망 변화다. 최근 다수의 기업이 미국이나 중국 이외 국가에 공장을 새로 짓는 등 투자를 늘리고 있다. 코로나19에 따른 공급망 차질 경험, 미국과 중국의 불편한 관계, 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 과정에서 인건비 상승 등의 비용을 상쇄하기 위해 자동화 기술을 택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국내에선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 등 배터리 3사가 올해 미국에서 자동화·검사 장비에 총 3조5000억 원의 투자를 계획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LG전자는 미국 테네시 공장에서 세탁기 120만 대, 건조기 60만 대를 생산하고 있는데, 무거운 부품 조립과 용접 등 다수 공정을 로봇에 맡기고 있다. 회사는 현재 63% 수준인 테네시 공장의 자동화율을 연말 70%까지 높인다는 계획이다. 높은 인건비를 감당한다고 하더라도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자동화 도입을 고민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아이폰 제조업체인 대만 폭스콘은 2017년 미 위스콘신주에 100억 달러(약 12조3500억 원)를 투자해 액정표시장치(LCD) 공장을 짓기로 했는데, 수년 동안 진척이 없었다. 이코노미스트는 “폭스콘은 미 중서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받고 스트레스가 많은 조립 라인에서 오래 일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전했다. 노동 인구의 감소가 자동화 기술의 도입을 빠르게 이끌 수 있다. 유엔은 세계인구전망 보고서에서 2050년 유럽의 노동인구가 2015년에 비해 9100만 명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지구상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도 인구감소가 화두다.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지난해 말 중국 인구는 14억1100만 명으로 85만 명 감소했다. 1000만 명이 넘는 사망자에 비해 출생자가 900만 명대에 그쳐 61년 만에 첫 인구 감소를 기록했다. 지난해 8억7000만 명으로 집계된 중국의 노동인구 역시 2050년에 약 23%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전 세계적인 노동인구 감소 추세는 궁극적으로 인건비 상승과 제품 가격 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블룸버그는 “중국의 생산인구가 감소하면 인건비 상승으로 공산품 가격이 오를 수 있다”고 17일 전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자동화가 꼽힐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킴 포블슨 유니버설로봇 대표는 지난해 말 이코노미스트 기고에서 “많은 국가가 노동력 부족과 고령화를 경험하고 있다. 자동화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동화가 생산성을 향상하고, 불량품을 잡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봤다. ● 자동화의 마지막 개척지 마지막 이유는 기술의 빠른 발전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정교함이 필요한 일들을 로봇에게 맡길 수 있게 됐다. 공장 자동화 기술을 꾸준히 개발 중인 아마존은 지난해 11월 로봇 전시 행사에서 인공지능 로봇 ‘스패로우(Sparrow)’를 소개했다. 거대한 팔 형태의 스패로우는 AI를 기반으로 물건의 크기와 질감을 감지한다. 아마존 전체 재고의 65%가량을 식별할 수 있다. 작은 크기의 물건도 흡착판으로 빨아들이는 방식으로 단단히 집어 상자에 옮긴다. 당시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로봇이 상품을 집고 분류하는 ‘주문 피킹’은 자동화의 마지막 개척지”라고 전했다. 국제로봇연맹은 현재 300만 대 이상의 로봇이 전 세계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컨설팅 그룹 맥킨지는 창고 자동화 시장이 연평균 23% 성장해 2030년 500억 달러(약 61조7500억 원) 이상으로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로봇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참고) ▶코로나19 끝나니, 로봇과 취업 경쟁하라고?[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로봇의 두뇌 역할을 할 인공지능 역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3일 “2023년이 인공지능에 획기적인 해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지난해 12월 미 샌프란시스코의 AI 연구 회사 ‘오픈에이아이(Open AI·오픈AI)’는 언어 생성 인공지능 모델 ‘챗지피티(ChatGPT·챗GPT)’의 시범 서비스를 출시했는데 40일 만에 1000만 명 넘는 이용자를 끌어모았다.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의 약자인 GPT는 ‘미리 학습(Pre-trained)’해서 문장을 ‘생성(Generative)’할 수 있는 생성AI다. 사용자가 음성이나 텍스트, 이미지를 입력하면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점이 특징이다. 사람처럼 생각하고 답을 내놓는다.챗GPT는 이전까지 나온 챗봇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난도 높은 학술논문과 에세이, 시, 소설, 보고서 등을 단숨에 써냈다. “러시아가 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까?” 같은 질문을 던지면 1초 안에 답을 내놓는다.2019년과 2021년 오픈AI에 투자한 마이크로소프트는 투자를 더 늘리겠다고 23일 밝혔다. 구체적인 투자 규모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블룸버그통신은 “지금까지 투자 규모가 총 100억 달러(12조3000억 원)에 이른다”고 전했다. ● ‘로봇’ 등장 100주년 챗GPT과 유사한 인공지능 ‘클로드(Claude)’는 올해 대학까지 입학했다. 미 조지메이슨대 경제학 교수는 19일 클로드가 블라인드 채점 테스트에서 합격점을 받았다고 밝혔다. 클로드는 지식재산권과 관련해 법과 경제를 어떻게 개선하면 좋을지 답안을 제출했다. FT는 “맥킨지 보고서를 베낀 것처럼 보이는 답안”이라면서도 “실제 학생들의 답안보다 낫다는 교수들의 의견은 우리를 조금 슬프게 만든다”고 평했다. 노던미시간대 철학과에서는 한 학생이 챗GPT가 쓴 에세이를 제출해 최고점을 받을 뻔한 일도 있었다. 이 에세이의 수준에 놀란 안토니 아우만 교수는 학생들이 교실에서 인터넷을 제한하고 다시 작성하게 했다. 워싱턴대와 버몬트대는 표절을 정의하는 학내 규정에 ‘AI를 활용한 표절’을 포함하기로 했고, 뉴욕주 교육부는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 능력을 저해한다”면서 지역 공립학교 와이파이 네트워크로 챗GPT에 접속할 수 없게 했다. 조지워싱턴대와 럿거스대, 애팔래치안주립대는 챗GPT 때문에 오픈 북 과제를 줄이고 있다. 학교에서는 비상이 걸렸지만, 기업들 사이에서는 가장 뜨거운 주제다. 챗GPT 기술을 기업이 활용하면 콘텐츠를 만들거나, 24시간 365일 고객들의 질문에 더 빠르고 정확하게 응답할 수 있다. 소비자들의 행동을 파악해 비즈니스에도 활용할 수 있다. 로이터통신은 “2023년 다보스 포럼 회의장을 챗GPT 토론이 계속 지배했다”고 전했다. 다보스 포럼은 총회를 앞두고 낸 보고서에서 생성AI를 ‘게임 체인저’로 정의하기도 했다. 인공지능이 똑똑해질수록 자동화의 영역은 빠르게 확장할 가능성이 크다. 글로벌 리서치사인 포레스터는 ‘2020년~2040년 일자리 미래 전망’ 보고서에서 도매와 소매, 운송, 숙박 및 레저 부문에서 자동화로 일자리 약 1370만 개가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보고서는 재생 에너지, 스마트 도시 및 인프라 전문 서비스 등에서 약 285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것으로 추정했다. ‘로봇’이라는 개념은 1920년 SF 연극 ‘로숨 유니버설 로봇(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의 작품)’에서 처음 등장했다. 1923년 30개 언어로 번역됐다. 로봇이 세상에 알려진 지 올해로 딱 100년이 된 셈. 2023년 로봇이 어디에 어떻게 쓰일지 관심 있게 보자. ● 2023년 눈여겨볼 기업은?자동화 기술과 더불어 올해 관심을 가질만한 기업으로는 어떤 곳이 있을까. 최근 몇 년간 전기차, 내연기관차를 포함해 자동차 기업 중 가장 화제가 된 브랜드는 단연 ‘테슬라’였다. 올해에는 다른 의미에서 테슬라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과거까지는 시장과 산업을 주도했다면, 올해부터는 저가 전기차와 고급차 브랜드 사이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모습을 보일 것 같아서다. ‘전기차 시장 춘추전국시대’가 눈앞에 있다. 전기차(EV) 시장에서 고급차 회사들의 활약이 기대된다. 블룸버그통신은 8일 아디다스 아부다비국영석유공사(ADNOC) 에어버스 ASML CATL 디즈니 이베이 등 ‘2023년 주목해야 할 50개 기업’을 소개했는데, ‘포르쉐’가 포함됐다. 블룸버그는 “포르쉐는 2023년 전기 자동차 전환을 가속할 것”이라면서 “그동안 포르쉐의 전 모델이 사랑받았다. 전기차 전환이 경기침체를 일정 방어할 것”이라고 평했다. BMW가 소유한 영국 고급 자동차 브랜드 롤스로이스도 첫 번째 EV 모델인 스펙터(Spectre)를 올해 하반기 출시할 예정이다. 고가 자동차 브랜드들의 EV 시장 진출이 시장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평가가 많다. 그만큼 사랑받아왔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해 자동차 판매량에서 드러난다. 지난해 전 세계 자동차 판매량은 약 7900만 대 감소로 10년 전보다 낮았다. 2021년보다는 1.3% 적었다. 그러나, 롤스로이스는 지난해 전년 대비 8%를 더 팔았다. 페라리 역시 2022년 1~9월에 전년 같은 기간보다 20% 더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코노미스트는 12일 ‘가장 비싼 차가 빨리 팔린다’는 글에서 지난해 고급차 브랜드들의 여전한 활약상을 분석했다. 반면, 고급차의 전기차 전환에 대해서는 “평범한 전기차도 페라리만큼 빨라 기존 고급차가 지녔던 매력을 무디게 만든다”며 ‘물음표’를 던졌다 포르쉐, 페라리 전기차 모델은 어떤 매력을 어필할까. 고가차 브랜드의 전기차 전환이 궁금해진다. ● 흔들리는 ‘테슬라’, 칼 가는 ‘도요타’테슬라 독주 체제가 사실상 끝났다는 평가도 있다. 중국 전기차 업체 비야디(BYD)는 지난해 186만 대의 인도량을 기록했다. 테슬라(130만 대)를 거뜬히 제쳤다. 비야디가 주로 중국에서 판매되기는 했지만, 테슬라 역시 중국을 주요 판매 시장으로 본다는 점을 고려하면 위상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테슬라가 최근 중국과 미국 등에서 전기차 가격을 대폭 인하한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씨티그룹은 비야디가 생산·판매에 공세적으로 나서면서 올해 인도량이 지난해 보다 껑충 뛴 300만 대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저가 차량만 내놓는 것도 아니다. 블룸버그는 “비야디가 2023년 고급 스포츠실용차(SUV)와 스포츠카 시장으로 영역을 확장할 것”이라고 지난달 전했다. 현대차도 EV 시장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지난해 1분기(1~3월)에는 미 전기차 시장에서 테슬라(75.8%)에 이어 점유율 2위(9.0%)를 차지하기도 했다. (신비월드 18화 ‘우리 현대차가 달라졌어요’ 참고) 폭스바겐(4.6%)과 포드(5.4%)를 제쳤다. 전기차 관련해 칼을 갈고 있을 도요타도 관심 있게 봐야 한다. 현재 도요타는 전기차 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어 투자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친환경 단체들은 지난해 11월 도요타 아키오 도요타 사장에게 공개서한까지 보냈다. 전기차 전환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블룸버그는 6일 ‘일본차에 대한 세계의 사랑이 시들어가고 있다’는 글에서 “도요타는 미국 신차 판매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지만, 점점 더 많은 미국인이 EV를 선택하면서 점유율이 떨어지고 있다”고 평했다. 국제신용평가사 S&P글로벌은 “지난해 전기차로 이동한 운전자들이 몰았던 차량은 주로 도요타와 혼다였다”라고 밝혔다. 도요타가 전기차 전환에 늦어 시장 점유율을 뺏기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그럼에도 도요타의 저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도요타는 최근 세계 신차 판매에서 2년 연속 1위를 기록했다. 대대적인 투자 계획도 밝힌 상태. 도요타는 2021년 9월 “2030년까지 전기차 개발에 1조5000억 엔(약 16조 원)을 쏟아붓겠다”고 선언했다. 최근 도요타는 테슬라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까지 꺼내 들었다. 지난달 25일 일본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도요타는 전기차 생산 체제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테슬라, 현대차처럼 자동차 골격 역할을 하는 플랫폼(차대)을 전기차 전용으로 새로 만들기로 한 것. 내연기관이나 하이브리드차량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방식이다. 도요타는 전기차 전용 기본 설계로 생산 효율과 비용 경쟁력을 높여 미국 전기차 업체 테슬라 등에 대항한다는 계획이다. ● “테슬라가 유일한 전기차가 아니란 것을 깨닫고 있다” 신흥국들도 전기차 생산에 도전하면서 ‘1국 1전기차 시대’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베트남 전기차 회사 빈패스트는 ‘CES 2023’에서 여러 SUV 모델을 공개했다. 이 차들은 미 교통안전국 충돌 평가에서 최고 등급을 받았다. 빈패스트는 2028년 전기차 판매 100만 대를 목표로 세웠다. 튀르키예 업체 토그도 지난해 첫 전기차 모델인 ‘C-SUV’ 생산을 시작했고, 일본 전자업체 소니 역시 완성차 업체 혼다와 손잡고 첫 번째 전기차 ‘아필라(2026년 양산 예정)’를 선보였다. 타 기업의 전기차 생산을 테슬라에 견주기는 어렵지만,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 뉴욕타임스(NYT)의 정보기술(IT) 전문기자 파하드 만주는 지난해 말 “미국인들이 테슬라가 유일한 전기 자동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고 평했다. 그는 “세련되고 장거리(충전 후 주행거리)를 달릴 수 있으며 기능이 풍부한 테슬라는 전기차 시장에서 단연코 최고였지만 모두 과거의 일”이라면서 “지난 2년 가격과 디자인, 기능이 각기 다른 다양한 EV를 테스트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차들이 나오면서 테슬라가 덜 돋보이게 됐다는 평가다. 전기차 시장은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 중이다. 블룸버그 보고서는 지난해 전 세계 전기차 판매가 전년 대비 60% 성장해 1000만 대를 넘어설 것으로 내다봤다. 현재 약 3000만 대의 전기차가 전 세계 도로 위를 누비고 있다. 2020년 말 1000만 대 수준에서 3배로 증가한 것. 지난해 9월까지 독일과 영국에서 판매된 신차의 15%가, 중국에선 20% 이상이 전기차였다. 전기차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가운데, 올해도 테슬라가 추격자들을 따돌릴 만큼 빠르게 달릴 수 있을지 지켜보자. 김성모 기자 mo@donga.com}2023-01-28 10:00
올해 재택근무와 헤어질 결심해야 할까[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다른 회사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나”코로나19 이후 경제활동이 정상화되면서 직장의 화두가 바뀌고 있다. 회사에서 3년 가까이 유연성(업무 시간과 장소)이 주요 관심사였다면, 올해에는 사무실 복귀가 뜨거운 감자다. 미 블룸버그통신은 지난달 29일 ‘미국 직원들이 가장 원하는 5가지 혜택’이라는 기사에서 재택근무(원격근무)를 1순위로 꼽았다. 블룸버그는 “인재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2023년에도 이러한 특전은 계속될 것”이라고 전했다. 미국 기업들과 직원들의 재택근무 신경전은 여전하다. 회사는 직원들이 사무실로 돌아오기를, 직원은 계속 집에서 일하기를 원하고 있다. 일부 기업들은 경기침체와 인력 감축 이야기가 나오는 틈을 타 사무실 복귀를 재차 요청하는 중이다.세계 2위 자산운용사인 뱅가드와 사무기술업체 페이컴소프트웨어 등은 최근 직원들에게 사무실로 출근하라고 지시했다. 사무실 복귀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몇 주 안에 해고당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은 회사도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고용주들이 사무실 책상들이 공석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는데 인내심을 잃고 있다”고 3일 전했다. 직원들의 눈치를 살피긴 한 것 같다. 뱅가드는 “정 회사에 나오기 싫으면 최소한 회사가 정해준 하이브리드 근무(재택근무와 사무실 업무 병행)라도 따라 달라”고 했다. 미 중소 생명보험사인 라이프프로파이낸셜서비스는 기업들의 원격 근무가 한창이던 2020년 여름, 40여 명의 직원들을 전부 사무실로 복귀시켰다. 최근 뒤늦게 정책을 바꾸려는 업계 사람들이 회사 대표인 헤더 울츠에게 직원들의 마음을 되돌린 방법을 묻었다. 비법이란 건 없었다. 사무실 출근 정책 이후 직원 중 3분의 1이 떠났다. 이 정도면 직원들이 복귀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새로 뽑은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울츠는 “나도 정말 정말 궁금하다. 다른 회사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나”라고 WSJ에 물었다. 현재 미국의 다수 기업은 재택근무와 사무실 출근을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출근 방식을 쓰고 있다. 완전한 사무실 출근을 지시했다가 직원들의 사기가 꺾이거나 이직할까 염려한 것. 애플도 지난해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고 사무실 복귀를 공지했는데 직원들의 거센 반발에 주 2회 사무실에 나오는 ‘혼합형 시범 근무’를 시범 도입했다. (이후 주 3일로 늘렸다)CEO들이 평판에 흠집이 날까 조심스러워한다는 분석도 있다. 재택근무를 단번에 없앴다가 자칫 ‘꼰대’로 보일 수 있어서다. ● 현재 미국은 하이브리드 근무가 대세 현재 얼마나 많은 미국 직장인이 회사로 돌아갔을까. 미국 보안 회사인 캐슬시스템즈는 2020년 10월부터 138개 도시 2600여 개 사무실의 출입 카드 데이터를 집계해 매주 공개하고 있다. 회사는 이를 ‘업무 복귀 바로미터’라고 이름 지었다. 회사에 따르면 지난달 중순 미국의 주요 10개 도시 출근율은 코로나19 발생 직전과 비교해 48% 수준이다. 회사는 지난해 봄부터 출근율이 상승하다가 최근 들어 큰 변화가 없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통계마다 차이가 있긴 하다. 뉴욕의 개발업체 루딘매니지먼트는 지난해 노동절(매년 9월 첫 번째 월요일) 이후 13개 고층 건물의 점유율이 65%까지 증가했다고 밝혔다. 위치 분석회사 ‘플레이서.ai’는 사무실 출입 지수를 만들었다. 스마트폰 위치 정보를 통해 미국 주요 도시의 빌딩에 사람들이 얼마나 드나들었는지 측정한 것. 회사는 지난해 10월에 전월보다 사무실에 들어가는 방문자 숫자가 3%가량 늘어났다는 점을 발견했다. 사무기기업체 제록스홀딩스는 지난해 3분기(7~9월) 실적발표에서 사무실 복귀 추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무실 인쇄량이 전 분기보다 증가했다고 밝혔다.미 스탠퍼드대 연구진이 최근 발표한 재택근무 관련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 직장인의 29%가량이 하이브리드 형태로 일하고 있다. 완전한 재택근무는 13%, 매일 출근은 58%였다. 대학 졸업자로 대상을 한정하면 하이브리드 근로자는 매일 출근하는 직장인과 비슷한 42%까지 늘어났다. 대졸 직원 중 완전 재택근무자는 17%였다.20년 가까이 재택근무를 연구해온 니콜라스 블룸 스탠퍼드대 교수는 “2022년 3분기(7~9월)에 뉴욕의 직장인들은 주중 2.1일을 집에서 일했다. 근무 장소가 집에서 사무실로 이동하는 추세가 확실하다”고 했다. 직원들은 주로 무슨 요일에 집에서 일했을까. 연구진에 따르면 가장 인기 있는 재택근무 요일은 금요일이었다. 2위는 목요일이었다. ● 거짓말에 능숙해진 ‘스텔스 직원들’전례 없는 장기간의 재택근무 동안 다양한 일들이 있었다. 일부 국가들은 원격 근무자들을 데려오기 위해 경쟁까지 벌였다. 디지털 유목민을 자국으로 끌어오는 것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현재 포르투갈, 노르웨이, 브라질 등 전 세계 20개 이상의 국가가 원격근무자를 대상으로 특수 비자를 제공하고 있다. 장기간 현지에 거주하면서 원격으로 일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일부 직원은 업무 장소에 구애받지 않게 되자 해외를 떠돌았는데, 회사에는 비밀로 했다.미국 동부 대도시인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사는 기술컨설턴트 존(30)은 2020년 겨울에 집 앞 눈을 치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회사는 적어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레바논과 두바이, 베트남, 캐나다, 호주 등 여러 나라를 옮겨 다녔다. 2021년 회사를 옮긴 뒤에도 해외여행이 이어졌다. (거주지를 친구 집인 휴스턴으로 바꿔 말하기는 했다) 존은 가상사설망(VPN)을 사용해 자신이 지내는 곳을 위장했다. 미국 시각으로 일하고,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으로 회의할 때는 사진을 활용해 배경을 감췄다. 그는 들통날 것을 우려해 휴스턴 날씨까지 매일 관찰했다. 007 영화가 따로 없다. 존(회사에서 잘릴까 봐 가명으로 알려줌)은 “걸리면 직장을 잃을 위험이 있다는 걸 알지만, 세계 여행을 하는 것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지난달 블룸버그에 말했다. 존은 많은 ‘스텔스 직원(위치를 감춘 직원)’ 중 하나다. 한 소프트웨어 개발자(29)도 2020년 말부터 콜롬비아, 에콰도르, 브라질, 그리스, 이스라엘 등을 다니며 원격으로 일했다. 비행기 티켓값과 하루 25달러(약 3만 원)의 에어비앤비 숙박비는 13만 달러(약 1억6000만 원) 연봉으로 충분히 감당할만한 수준. 이 개발자 역시 상사에게 자신이 있는 장소를 알려주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일이 끝나면 내가 어디에 있든 무슨 차이가 있냐”고 되물었다. 블룸버그는 “(회사가 원격근무를 허용해도) 직원들은 해외에 있으면 상사가 자신을 게을리한다고 생각할까 봐 위치를 공개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글로벌 모빌리티 기업 토피아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원의 약 66%가 고향이나 국가 밖에서 일할 때마다 고용주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답했다. 미국 컨설팅업체 MBO 파트너스에 따르면 해외를 떠돌며 일하는 ‘디지털 유목민’ 숫자는 2019년 730만 명에서 지난해 1690만 명으로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그래픽 디자이너 케이티 매클로드(29)는 코로나19 확산 기간 무려 78개국이나 돌았다. 사막의 모래 폭풍 속에서 노트북에 로그인하고, 히말라야산맥에서 줌에 접속했다. 원격근무 덕분이다.● 원격근무에선 연극이 불가능하다아무튼 기업들은 직원들이 며칠만이라도 사무실에 나오기를 바라고 있다. 직원들이 집에 있으면 일을 덜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일하면 정말 생산성이 떨어질까. 팀장급 이상 관리자와 직원들 생각이 서로 달랐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지난해 11개국 2만여 명을 대상으로 원격근무를 조사했는데 직원은 87%가 집에서 효율적으로 일한다고 느꼈지만, 관리자의 80%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블룸버그는 지난해 11월 ‘새로운 생산성 역설’이라는 글에서 “‘재택근무로 생산성이 향상된다’, ‘재택근무는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두 진술이 모두 옳을 순 없는 것 아닌가?”라면서 재택근무 생산성에 대한 엇갈린 분석을 비꼬았다. 직장 상사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코로나19 기간 직원들은 집에서 ‘열일(열심히 일)’ 할 수밖에 없었다. 온라인으로는 열심히 일하는 척, 연극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서다. 보통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짜증 나는 표정으로 보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은 이 직원이 바쁘다고 생각한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면 성실하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보여주기 활동들은 전부 관객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원격근무자들이 근무 일정이 비어있을 경우 더 잘 티가 난다. 보통 원격근무를 하면 업무에 빈틈이나 착오가 생길까 봐 근무 일정을 기존보다 자주 공유한다. 그럴 때 누군가 일정이 비어있다면 어떨까. 남들 다 일하는데 집에서 노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재택근무 기간 이메일 답변을 되도록 빨리한다는 직장인들이 많았다. 온라인 회의 역시 직원들이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회의까지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반대로, 관리자는 팀원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회의를 평소보다 더 자주 열었다.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을 서로 한 것이다. 실제로 직원들이 재택근무 기간에 업무를 많이 했지만, 비효율적이었다는 연구가 있다. 미 시카고대 부스경영대학원이 2019년 4월에서 2020년 8월 사이 한 IT 회사 재택근무 직원 1만 명을 대상으로 업무량과 생산성을 점검했는데, 직원들은 팬데믹 이전보다 근무 시간이 30% 더 늘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반면, 생산성은 20% 더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각종 회의와 잦은 전화 및 이메일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조사는 PC에 설치된 소프트웨어로 진행됐다. 직원의 마우스, 키보드 사용을 측정했다. (온라인 쇼핑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 유령이 된 직장 친구들 회사가 직원들이 사무실로 나오기를 원하는 데에는 생산성 말고도 여러 이유가 있다. 동료와의 유대감, 소속감 같은 수치로 환산하기 어려운 사무실 효과다. 회식뿐만 아니라 동료와 사내 휴식 공간에서 나누는 커피, 생일 축하 케이크, 퇴근길 짧은 수다 등 직원들이 만나서만 할 수 있는 여러 활동이 재택근무로 끊겼다. 엘리베이터에서 눈을 마주쳤을 때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나눴던 대화도 사라졌다. 영국 BBC는 지난해 “재택근무로 작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던 동료들이 사실상 유령이 됐다”고 표현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누군가의 책상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동료를 화장실이나 카페로 데려간 뒤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이 없어졌다. 표정이 어두워졌을 때 빠르게 알아차려 주는 동료의 다정함도 재택근무 때는 느낄 수 없었다. 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재택근무로 전환한 근로자의 65%가 이전보다 동료와의 유대감이 덜하다고 느꼈다. 절친한 동료와도 뜸해졌다는 의미다. 모두가 ‘전우’들을 잊고 지냈다.회사가 직원 사이의 관계까지 신경 써야 할까. 생각보다 중요하다. 성과에 영향을 미쳐서다. 1993년 갤럽은 회사에 꼭 필요한 12가지 요소를 발표했는데, 기업들이 한 가지를 보고 놀랐다. ‘직원들이 직장에 친한 친구가 있다고 확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갤럽은 “친한 친구가 있는 직원의 업무 만족도가 7배 높았다”며 “직장에서의 우정은 생산성과 수익에 확실히 도움이 된다”고 분석했다. 당시 미 근로자 10명 중 2명만이 “회사에 절친한 친구가 있다”고 대답했다. 1973년 미 스탠퍼드대 사회학과의 마크 그래노베터 교수는 ‘약한 유대의 힘’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은 개인의 행복이 친한 친구나 가족의 관계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던 이전 학자들의 관념을 깼다. 그래노베터 교수는 간헐적으로 만나거나 우연히 만나는 지인들로 이뤄진 약한 유대 관계가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발견했다. 특히, 새로운 정보와 아이디어 측면에서는 강한 유대보다 약한 유대가 더 중요하다고 밝혔다. 논문에 따르면 약한 유대는 ‘양’이 중요하다. 친한 직장 동료가 많을수록 행복감을 느끼고 아이디어도 많이 나온다는 의미다. ● 악수 한 번 못 해보고 퇴사 문제는 다수의 직원이 코로나19 발발 이후 회사에 들어가 친구를 사귈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세던 닐리 하버드비즈니스스쿨 교수는 미국의 직원 중 20%가량이 팬데믹 기간 중 입사했다고 밝혔다. 회사에서 10명 중 2명은 첫 입사이거나, 다른 회사에서 건너온 지 얼마 안 된 동료인 셈이다. 이직이 확실히 많긴 많았나 보다. 현재 해외에서는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젊은 층이 전통적인 네트워킹이나 경력 쌓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는데, 감정적인 부분에 대한 걱정도 많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은 “창의적인 프로세스가 노트북에 국한됐을 때 직원들은 상실감을 느낀다. 친밀감은 온라인에서 복제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NYT는 지난해 ‘첫 직장 친구의 마법’이라는 글에서 “직장인들은 20대에서 맺는 관계로 30대에서 일어나는 삶의 변화를 견디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직원들의 유대감과 소속감이 재택근무로 약해지면서 회사를 쉽게 떠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2020년 4월 버지니아주의 한 비영리재단에 입사한 캐서린 그레고리오는 1년 동안 직속 상사 이외에는 동료들을 실제로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회사를 옮길 때 “미안한 마음 없이 쉽게 떠날 수 있었다고 전했다. 2020년 8월 오하이오주의 컨설팅사에서 일을 시작한 에릭 선 역시 1년 만에 더 큰 회사로 이직했는데 “저는 한 번도 회사 사람들과 악수를 한 적이 없었다”면서 마음의 부담 없이 편안하게 회사를 옮겼다고 했다. 밥 서튼 스탠퍼드대 조직심리학 교수는 “회사나 직업에 애착이 없다면 감정적으로 이를 바꾸는 것이 더 쉽다”고 말했다. ● 사무실 전도사들의 등장 다행히 직원들도 며칠은 사무실로 나오고 싶다는 의견을 내비치고 있다. 특히, 첫 입사일 가능성이 큰 Z세대(1996∼2012년생)의 복귀 의향이 강한 편이다. 영국의 조사기관 입소스에 따르면 Z세대 10명 중 6명(58%)이 일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일정 시간은 동료들과 얼굴을 맞대고 일해야 한다고 답했다. 현재 미국의 약 6700만 명이 Z세대에 속하는데, 이 중 1700만 명가량이 노동 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했다.마이크로소프트에서 근무하는 앨리슨 첸(23)은 사무실 업무에 푹 빠져있다. 첸은 지난해 5월 회사가 코로나19 종료를 선언하면서 인턴 기간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사무실’이란 곳에 일하러 갔다. 그는 소셜미디어에 ‘오늘 내 사무실이 다시 문을 열었다’는 제목으로 동영상을 올렸다. 출퇴근 모습과 팀원과 커피를 마시는 장면 등이 담긴 일종의 브이로그였다. 이 영상의 조회수는 금방 14만 회를 넘겼다. 영국 출판사인 하퍼콜린스 캐나다 지사에서 근무하는 미나 키루파카란(23)도 회사 주변의 도심 지역이나, 공간을 장식하는 사무실 책 선반 등의 사진과 동영상을 소셜미디어에 올리고 있는데, 어떤 동영상은 하룻밤 사이 10만 회 이상 시청됐다. NYT는 “젊은 층은 영화 등을 통해 사무직 직원(커리어우먼 같은)에 대한 나름의 로망을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회사에는 들어갔지만, 사무실 업무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해 로망이 커진 상태라고 분석했다. NYT는 “키루파카란이 올리는 동영상들은 직원의 복귀를 설득하려는 회사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사무실은 돌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긍정적 메시지 역할을 한다는 설명이다. ‘샤이 출근러’들도 사무실 출근의 긍정적인 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뉴욕에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콜린 반랑은 지난해 10월 “우리는 어떻게든 원격근무는 훌륭한 것이라고 스스로 거짓말을 했다”면서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생기는 일과 가정의 구분을 좋아한다. 나를 사무실 전도사라고 불러달라”고 블룸버그에 전했다. 회사는 공짜 점심을 제공하거나 사무실 공간을 예쁘게 꾸며 직원들의 복귀를 환영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반려견을 데려오는 것을 허용한 일본 회사(후지쓰)도 있었다. 회사에 황갈색 시바견을 데리고 출근하는 마유미 시오다는 “내 반려견이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을 보는 게 좋다”고 블룸버그에 전했다. ● 하이브리드 근무 후유증그렇다고 이들이 매일 회사에 나오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Z세대 중 62%가 적어도 일주일에 3일은 집에서 일하기를 원하고 있다. 하이브리드 근무, 사무실 출근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일부는 집에 있고 다른 직원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모습이 한동안 펼쳐졌다. 그러자, 재택근무자들은 연봉이나 승진에서 차별받을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사무실에서 상사의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성과 평가나 승진, 고용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 ‘근접성 편향’ 현상이 나타난다는 연구가 있다. 영국 심리학자 알리 샬프로샨은 “근접 편향은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자연스러운 본능”이라며 “(사무실 근무자와 생기는) 이 유대감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더 대단하게 보이게 만드는 ‘후광 효과’까지 만들 수 있다”고 분석했다. 평가를 떠나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직원이 원격근무자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도 있다. 미국에선 현재 근무 정책에 따라 연봉을 다르게 책정하는 곳도 있다.이러한 문제 때문에 며칠이라도 회사에 얼굴을 비추러 나서겠다는 직원이 늘었다. 기업들은 집중하는 시간(재택근무)과 협업 시간(사무실 근무)으로 나눠서 근무 형태를 짜고 있다. 앞서 언급한 불필요한 회의 등이 생기지 않도록, 장소에 따라 해야 할 업무 성격까지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하이브리드 근무에도 문제점은 있다. 마이클 스메츠 영국 옥스퍼드대 사이드비즈니스스쿨 교수는 “젊은 직원이 누군가로부터 배우기 위해 사무실로 나서는 것이라면 해당 상사도 사무실에 나와 있어야만 한다”고 했다. 근무 스케줄을 정교하게 짜야 한다는 것이다. 보안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회사는 재택근무를 포함한 원격근무가 장기화할수록 업무 공간의 보안에 신경 써야 할 가능성이 크다. BBC는 “하이브리드 근무는 ‘해커의 꿈’으로 묘사된다. 기업 정보가 더 많은 장비와 네트워크를 통해 오갈 것이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지금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팀장’ 재택근무와 하이브리드 근무 체제에서 최대 피해자는 ‘팀장’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재택근무 등 업무 유연성을 유지하려는 직원들과 사무실 복귀를 원하는 경영진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팀장들은 재택근무 시기에도 업무량이 남들보다 많았다. 이 기간 중간 관리자들의 업무 시간은 일반 직원보다 평균 1시간 길었다. 온라인 회의 스케줄을 잡고, 업무를 배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은 것이다. 블룸버그는 “직원들이 출퇴근 시간을 아껴 개인 활동을 하는 사이에 팀장들은 일을 해왔다”면서 “현재 중간 관리자는 모든 사무직원 중 가장 높은 스트레스와 불안을 호소하고 있다”고 전했다. 기업용 메신저 서비스업체인 슬랙테크놀로지가 지난해 미국, 호주, 프랑스, 독일, 일본, 영국 등 6개국 사무직 직원 1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중간 관리자 중 43%가 “지쳤다”고 답했는데, 이는 모든 직급 중 가장 높은 수치였다.물론, 팬데믹 이전이라고 편했던 것만은 아니다. 블룸버그는 “대유행 이전에도 이들의 업무는 쉽지만은 않았다. 중간 관리자는 경영진의 비전을 받아들이고 직원이 잘 실현하도록 방법을 찾아야 한다”면서 팀장은 원래부터 힘든 자리였다고 강조했다.그럼에도 하이브리드 근무로 생기는 최근의 스트레스는 당황스러울 수 있다. 하이브리드 근무 체제가 돌아가던 어느 날, 한 직원이 “줌으로 회의를 할 거면 내가 왜 회사까지 나와야 하나요. 모두가 재택근무를 하면 안 될까요?”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하이브리드 근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당분간 이 같은 스트레스는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김성모기자 mo@donga.com}2023-01-14 10:00
아이폰이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지 못한 이유[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2011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우드사이드에 있는 벤처투자가 존 도어의 자택에서 버락 오바마 당시 미 대통령이 주최하는 만찬이 열렸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설립자, 에릭 슈밋 전 구글 최고경영자(CEO) 등 여러 실리콘밸리 스타가 모였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6주 시한부설’에 휘말린 스티브 잡스 애플 전 CEO에 온통 쏠렸다.백악관의 요청대로 회사 대표들은 미리 준비한 질문을 오바마에게 던졌다. 그런데, 잡스의 연설 때는 달랐다. 대통령이 먼저 말을 끊었다. 오바마는 잡스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애플의 공장과 일자리들이 ‘집(미국)’으로 돌아올 수는 없습니까?” 잡스가 살아있었다면, 11년 전 미국으로 공장을 옮기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을까. ● 최대 성수기 앞두고 아이폰 품귀현상 중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강력하게 통제한 여파로 애플이 크리스마스 등 연말 대목을 놓치게 생겼다. 중국 정저우 지역의 코로나19 통제에 반발한 폭스콘 공장 직원들이 대규모로 이탈해 아이폰 생산에 차질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정저우 공장은 아이폰14 시리즈의 80%를 생산하는 아이폰 핵심 생산 기지다. 특히, 고급 모델인 아이폰14 프로, 프로 맥스의 85%가 이곳에서 완성된다. 애플 아이폰 조립업체인 대만의 폭스콘(홍하이 정밀공업)은 중국 정저우 지역이 코로나19 통제를 완화하고 있다고 15일(현지 시간) 밝혔지만, 아이폰 신제품의 생산 둔화가 내년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는 올해 4분기 아이폰 판매량을 기존 8300만 대에서 5% 감소한 7900만 대로 낮춰 잡았다. 또, 공급 부족이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고 2023년 1분기 판매량을 5800만 대로 하향 조정했다. 신형 아이폰을 주문한 고객들은 애가 탄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지난달 28일 아이폰14 프로와 프로 맥스를 주문한 고객이 길면 37일을 기다릴 수 있다고 예상했다. 미 블룸버그통신은 “지난달 22일 아이폰14 프로를 주문한 미국 고객은 크리스마스 이후인 12월 30일이 돼서야 제품을 받을 수 있다”고 전했다. 현재 아이폰14 프로 모델은 전 세계 아이폰14 시리즈 판매량의 85~90%를 차지하고 있다. 아이폰 생산이 이달 중순부터 개선되고 있지만, 미국 등에서는 아직 20일 이상 기다려야 할 정도로 신제품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다. ● ‘아이폰 시티’에 갇힌 사람들 중국 정부는 이달 초까지 3년째 ‘제로 코로나’ 정책을 유지해왔다. 사람들의 도시 간 이동을 통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파트 출입구까지 봉쇄했다. 14억 중국인에게 거의 매일 의무적으로 유전자증폭(PCR) 검사를 받도록 했다. 또, 확진자뿐만 아니라 밀접 접촉자까지 무차별적으로 시설에 격리했다. 취약한 의료 시설과 ‘물백신’으로 불리는 중국산 백신 접종, 고령의 낮은 접종률 등이 위험 요소로 꼽히면서 중국 정부가 사람 간 접촉을 강력하게 막는 방향으로 정책을 써온 것이다. 일본계 투자은행 노무라증권에 따르면 지난달까지 중국 37개 도시에서 3억4000만 명의 외출이 통제됐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1일 “중국은 20년 동안 항공모함을 만들고 달에 우주선을 보냈으며, 두 번의 올림픽을 개최했다. 그런데 중국 인구 10만 명당 중환자실 병상수는 4.3개에 불과하다”며 중국의 열악한 의료 시설을 비꼬았다.‘아이폰 시티’로 불리는 중국 남부 허난성 성도(省都)인 정저우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저우시는 코로나19 감염자가 속출하자 10월 중순 주민 1300만 명에게 이동 금지 명령을 내렸다. 정저우시의 한 마을은 주민들의 이동을 단속하기 위해 10~13세 어린이들까지 자원봉사자로 모집했다. 붉은 스카프를 두르고 확성기를 손에 쥔 어린이들은 사람들의 마스크 착용을 감시하고, 주민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요청했다. 정저우시에 있는 폭스콘 공장은 외부와 차단하는 ‘폐쇄 루프’ 방식을 도입했다. 직원들을 공장 내부에 숙식시키며 작업을 이어 나간 것. 30만 명의 직원들이 기숙사와 생산라인 사이만 오가며 사실상 사생활을 모두 통제당했는데, 먹거리가 문제가 됐다. 회사가 직원 식당을 폐쇄하면서 나눠준 음식들이 직원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음식은 형편없는 수준을 넘어서서 자주 바닥이 났고, 기숙사에 라면이나 빵, 우유만 전달되는 날도 있었다. 폭스콘 정저우 공장에서 10년간 아이폰을 조립한 샤오(30)는 “밥과 잘게 썬 감자, 콩나물 튀김 같은 음식이 나왔는데, 포장과 접시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며 “아프거나 방에 격리돼 공장에 가지 않은 사람들은 그마저도 못 받기도 했다”고 전했다. 코로나19 검사도 직원들의 불만 중 하나였다. 검사 속도를 높이고 비용을 낮추기 위해 회사는 20명을 검사한 각각의 면봉을 하나의 시약에 넣었다. 이후 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오면 20명 전부를 추가 검사를 위해 격리했다. 일부 사람들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되지도 않았는데, 여러 번 격리되기도 했다. 방에는 처리하지 못한 쓰레기가 계속 쌓였다. ● 애플 ‘플랜B’ 본격화 참다못한 직원들의 탈주 행렬이 시작됐다. 10월 말, 수백 명의 폭스콘 노동자들이 짐과 이불 등을 들고 고속도로를 따라 걷거나 밀밭을 가로질러 가는 모습이 소셜미디어에 등장했다. 어떤 직원들은 공장 벽을 뛰어넘었다. 무려 10시간을 걸어 집에 도착한 사람도 있었다. 혼란은 시위로 번졌다. 수당을 올려 달라며 직원들이 들고 일어났다. 탈주와 시위로 아이폰 조립 라인 근로자가 절반 이하로 줄자, 회사는 직원 달래기에 나섰다. 미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폭스콘은 처음 노동자들에게 하루에 14달러(약 1만8300원)를 추가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는데, 며칠 뒤 이 금액은 55달러(약 7만1700원)로 거의 4배가 됐다. 정저우시는 공산당원과 공무원, 퇴역 군인 네트워크를 활용해 아이폰을 조립할 사람을 수소문했다. 애플을 돕기 위해 나선 중국의 참전 용사들은 사람들에게 “폭스콘의 월급이 꽤 괜찮다”고 홍보했다.태평양 건너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애플은 아시아 다른 나라로 아이폰 생산의 무게 중심을 옮기기 시작했다. 애플이 2년 안에 인도에서 아이폰 생산 여력을 3배로 확대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맥북과 아이패드의 생산시설 일부도 이전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애플은 미·중 갈등이 시작된 2018년 폭스콘을 통해 인도, 베트남 등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구형 아이폰이었다. 팬데믹을 겪고, 올해 들어서야 아이폰14 같은 신제품 생산 일부의 인도에 맡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최근 중국 정부의 강력한 코로나19 통제 정책으로 애플 공급망 분산에 불이 붙은 것이다. 미 CNBC에 따르면 애플은 최근 폭스콘·페가트론·위스트론 등 3개 협력사에 인도 생산능력과 인력을 늘리도록 지시했으며, 폭스콘은 인도 자회사에 5억 달러(약 6500억 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대만 기업인이지만 중국과 친분이 두터운 궈타이밍 폭스콘 창업자는 “엄격한 방역이 세계 공급망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지위를 위협할 수 있다”며 중국 고위 관료에게 편지를 보냈다. 중국은 8일 ‘상시적 전수 PCR 검사’를 폐지하는 등 코로나19 통제를 완화했지만, 돌아선 애플의 마음을 잡지는 못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었다. ● ‘플랜A’ 만든 팀 쿡 CEO애플에 있어 중국은 제품을 생산하는 장소 그 이상이다. 제조와 소비의 구심점이다. 잡스가 세상을 떠나고 사람들이 회사를 걱정할 때 애플은 보란 듯 어마어마하게 성장했다. 여기에 중국의 힘이 컸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팀 쿡이 10년 전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이후 애플의 시가총액은 2조 달러(약 2690조 원) 이상 증가했다. 잡스 없이도 해냈다. 잡스는 애플 사업 초창기 매킨토시 컴퓨터 공장을 미국에 지었다. 애플 초기 제품과 같은 순백의 공장이었다. (잡스는 흰 장갑을 끼고 먼지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8년 쿡 현 CEO가 애플에 합류하면서 중국에 공급망을 갖추기 시작했다. PC 제조사 컴팩에서 공급망을 관리하던 쿡이 애플에서 자신의 강점을 발휘한 것.쿡은 밝은 성격이지만, 꼼꼼하고 세밀하게 일하는 타입이라는 평이 많다. 때로는 엄하다. 월터 아이작슨이 쓴 스티브 잡스 전기에 그의 경영 스타일을 보여주는 일화가 등장한다. 쿡은 애플의 사장이 되기 전, 중국의 한 부품 공급업체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표정이 심각해진 쿡은 직원들에게 “이건 정말 안 좋은 일입니다. 누군가 중국에서 이 문제를 직접 조율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회의가 끝나고 30분이 지난 뒤, 쿡은 한 중국 담당 임원에게 다가갔다. 그러고 나서 조용히 물었다. “왜 아직도 여기에 계십니까?” 임원은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고 나서 가장 빠른 중국행 표를 샀다. 이코노미스트는 “쿡은 쾌활함으로 잡스의 마음을 진정시켰고, 무시무시한 성실함(오전 4시에 기상함)으로 아시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공급망을 구축했다”고 2019년 전했다. 쿡이 중국에서 안정적으로 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었던 데에는 궈타이밍의 공도 컸다. 그는 수년 동안 중국을 방문하면서 ‘꽌시(연줄 문화)’를 만들었는데, 이때 만들어놓은 네트워크로 2010년 아이폰 대량 제조 인프라를 빠르게 구축했다. 중국의 지방 정부(정저우시)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일자리와 기술 때문이다. 폭스콘이 현재 중국에 직간접적으로 창출한 일자리만 100만 개가 넘는다. 중국 정부는 애플의 중국 입성 자체를 가치 있는 투자로 봤다. 시푸 허난대 경제학 교수는 “폭스콘은 허난성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훈련하는 데 도움을 줬다. 그들은 그 기술을 사용해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다”고 했다. 기술을 배워 놓으면 굶어 죽진 않는다고 하는데, 중국 관료들도 똑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 정저우 스피드정저우시는 폭스콘 공장과 기숙사 건설에 15억 달러(1조9300억 원)가 넘는 보조금을 약속했고, 공장 인근에 100억 달러(12조8800억 원)를 들여 인근 공항을 대규모로 확장해줬다. 이뿐만이 아니다. 폭스콘 공장의 에너지 비용을 할인해주고, 직원들의 교통비와 보험료까지 깎아줬다. 더 놀라운 것은 인프라 구축 ‘속도’였다. 정저우에서 농사를 짓는 장 하이린은 “2010년 초, 동네에 헬기가 옥수수밭 위를 돌더니 3일 후 불도저 100대가 왔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2010년 8월 정저우에 폭스콘 공장이 건설됐고 정부의 영업 허가도 떨어졌다. 정저우시는 심지어 빠르게 완성품을 나를 수 있도록 공장 바로 앞에 세관 시설까지 만들어줬다. 또, 정저우의 지방 공무원들은 마을마다 전화를 걸어 폭스콘 노동자를 찾는 것도 도왔다. 정부는 노동자를 데려온 공무원에게 보조금을 줬다.아이폰을 조립하겠다는 일념하에서 중국 공무원과 폭스콘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것. 먼지투성이인 중국 중부의 평야는 거대한 산업 단지로 탈바꿈했다. 당시에 공장 설립에 참여했던 제프 윌리엄스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정말 감명받았다. 그들은 매우 집중했다”고 했다. 잡스도 “공장에 레스토랑, 영화관, 병원, 수영장이 다 있다. 공장치고는 꽤 좋은 곳”이라고 정저우시 폭스콘 공장을 호평한 바 있다. 정저우 공장에서 아이폰의 탄생과 여정은 다음과 같다. 공장은 전 세계 200개가 넘는 공급업체로부터 부품을 받는다. 이후 94개의 생산 라인에서 광택, 납땜, 나사 장착 등 400여 단계를 거친다. 이렇게 조립된 아이폰은 공장 앞 세관을 거쳐 보잉의 대형 여객기인 747 점보기를 타거나, 대형 트럭에 실려 대륙을 가로지른다. 정저우 공장은 하루에 50만 개(1분당 350개)의 아이폰을 생산할 수 있다. 정저우시 관계자들은 중국에서 아이폰을 미친 듯이 찍어내는 것을 두고 ‘정저우 스피드’라고 불렀다.● 애플이 중국을 택한 이유 ①애플과 쿡은 왜 중국을 공급망 핵심 기지로 택했을까. 애플은 2005년부터 ‘퍼플2’라는 코드명의 프로젝트를 작업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최고의 스마트폰을 만드는 것이 표면적인 목표였는데, 구체적으로는 제품의 품질을 높이면서도 빠르고 저렴하게 수백만 대의 물량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이었다. 쿡은 중국이 해답이라고 봤다. 공급망 관리(클러스터 형성)에 유리하고 유연한 노동 여건이 매력적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아이폰 안에 들어가는 수백 개의 부품 중 90%는 유럽(반도체)과 아시아(디스플레이), 아프리카(소재) 등 해외 각국에서 조달되는데 다수의 업체가 중국에 공장을 보유하거나, 낮은 인건비를 고려해 중국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실제로 중국에 아이폰 클러스터(산업 단지)가 차츰 형성됐다. 현재 애플의 공식 부품 공급업체는 190곳인데, 이 중 160곳이 중국 내륙에서 생산한다. 애플은 이를 이용해 제품 생산을 적시에 하고, 효율성도 극대화했다.2007년 아이폰 출시를 한 달 앞두고 아이폰의 시제품을 써본 잡스는 청바지 주머니에서 열쇠와 함께 꺼낸 아이폰의 플라스틱 화면에 흠집이 난 것을 보고 플라스틱 화면을 유리로 바꿀 것을 지시했다. (신비월드 21화, ‘애플은 왜 접는 폰을 안 만들까?’ 참고)애플은 코닝이라는 미국 회사에서 강화유리 거대 패널을 제조했다. 그런데, 이 유리를 수백만 개의 아이폰 크기로 자르는 게 문제였다. 유리 절단 공장, 테스트에 쓸 엄청난 양의 유리와 숙련된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애플은 중국에서 이를 해결할 공장 소유주를 만났는데, 이 공장은 애플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일부 설비까지 미리 갖춰놓은 상태였다. 준비한 창고에는 테스트에 필요한 유리 샘플을 채워놨고, 기숙사에 24시간 호출이 가능한 숙련된 노동자들을 준비시켰다. 결국 공장은 계약을 따냈다. 애플도 6주 안에 완벽하게 유리 화면으로 새 아이폰 모델을 재설계할 수 있었다.한 애플 전 임원은 NYT에 “고무마개 1000개를 만들 수 있는 공장이 바로 옆에 있고, 나사 100만 개가 필요하면 한 블록 뒤 공장을 찾아가면 된다. 나사 모양이 다른 게 필요한가? 3시간이면 구한다. 전체 공급망이 중국에 있다”고 전했다. NYT가 2012년 전현직 애플 임원들을 인터뷰한 이 기사에 따르면 애플은 해외 공장 생산을 계획할 때 낮은 임금을 최우선 순위로 두지 않았다. NYT는 “인건비는 수백 업체로부터 부품을 확보하는 공급망 비용에 비하면 인건비는 미미한 수준”이라고 전했다. ● 애플이 중국을 택한 이유 ②중국의 열악한 노동권도 애플에 도움이 됐다. 폭스콘은 정저우 공장이 설립되고 10여 년 동안 노동자들에게 한 달에 하루, 이틀만 휴가를 줬고, 초과 근무에도 제한을 두지 않았다. 직원들도 워라밸보다는 더 많은 임금을 원해 불만이 없었다.한 번은 애플이 아이폰 신제품을 출시하기 직전에 화면을 재설계 해, 조립 라인을 다시 점검해야 했는데, 새 스크린이 자정 무렵에 공장에 도착했다. 공장 관리자는 곧바로 기숙사에 있던 8000명의 직원을 깨웠다. 비스킷과 차 한 잔을 받은 직원들은 업무 자리로 이동해 12시간 교대 근무를 시작했다. 작업량이 부족한 날에는 하룻밤 사이에 3000명을 추가로 고용하기도 했다. 2010년까지 애플에서 공급주문 담당자였던 제니퍼 리고니는 “하룻밤 사이 3000명을 고용하고, 이들에게 기숙사에 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공장이 있나”라고 되물었다. 맞는 말이다.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 같다. (과거 폭스콘 선전 공장에서는 관리자가 직원에게 팔굽혀펴기를 시켜 논란이 일었다. 또, 유독성 화학 물질 사용과 폭발 사망 사고, 근로자 자살이 문제가 되면서 애플과 폭스콘은 결국 중국 노동자 처우 개선에 나서기도 했다) 애플은 정저우 노동자들의 숙련도도 근면성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로 봤다. 쿡은 “공급망이나 인건비가 다가 아니다. 중국에서 제품을 만드는 것은 비용 때문이 아니라 기술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아이폰을 만들 수 있는, 중간 정도의 기술력을 갖춘 인력이 중국 외에 충분치 않다는 설명이다. 스마트폰 조립하는데 무슨 그리 대단한 기술력이 필요할까 싶지만, 반복된 작업에서 균일한 품질을 만들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쿡은 2017년 포춘 글로벌 포럼에서 “애플 제품에는 고급 세공이 필요하고, 이 기술은 중국이 매우 뛰어나다”라고 언급했다. 부품을 정밀하게 고정하고, 다듬는 데에는 중국 노동자가 최고라는 의미다. ● ABC(Anywhere But China)보다 ‘차이나+알파’ 이러한 점 때문에 애플의 탈중국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11년 전, 오바마가 제조 기반을 미국으로 되돌릴 수 없느냐는 질문에 잡스가 “(아이폰을 조립하는) 그런 일자리는 미국으로 되돌아오지 않을 겁니다”라고 답했던 이유도 결국 공급망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건비를 떠나 공급망의 다양한 요소를 고려했을 때 중국에서 제조 기반을 옮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애플을 포함해 공급망 이전을 고려하는 기업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공장을 옮긴 지역에서 부품이나 소재를 구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의 이반 람 수석 애널리스트는 “아이폰의 부품 중 대부분이 여전히 중국에서 생산되고 있고, 이들은 장치가 조립되는 곳으로 배송돼야 한다”고 했다. 생산되는 곳에서 최종 조립까지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것이다. 이동에는 비용이 따른다. 고객이 있는 시장과의 거리도 고려해야 한다. 인프라도 걱정거리다. 블룸버그는 “중국에 익숙한 글로벌 사업자에게 다른 지역에서의 물류는 효율적이지 않을 것”이라면서 “베트남 하노이에서 호찌민까지 속달 우편이 도착하는 데 최대 4일이 걸릴 수 있다. 이 같은 지연은 중국에서 발생하지 않는다”고 8월 전했다. 탈중국으로 발생하는 비용을 소비자들이 이해해줄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도 있다. 블룸버그는 “과연 공급망이 멀쩡할 때도 사람들이 돈을 더 내려고 할까?”라고 되물었다. 공장을 옮기면 당장 제조 비용과 제품 가격이 올라갈 텐데, 공급망 차질이 정상화된 상황에서 사람들이 돈을 더 쓰겠느냐는 의미다. 어쩌면 중국에 그냥 남아 있는 회사가 ‘위너’가 될 수 있다. 제조 공장을 옮기면, 현지에서 대규모 노동력을 구해야 하고 당국의 규제를 하나하나 맞춰야 하는 문제도 발생할 것이다. 새로운 공급망 개발에서 더 싼 인건비는 생각보다 큰 메리트가 아닐 수 있다. 기업들이 중국보다 인건비가 더 싼 인도나 베트남으로 몰리게 되면 해당 지역의 인건비도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쟁이 붙어서 인력 구하기에 애를 먹을 가능성도 있다. 기업들이 공급망 재편, 특히 탈중국을 고민하면서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그런데도 중국에서 일단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은 많이들 하는 것 같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가트너가 8월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 기업 중 95%가 ‘중국에 제조 시설을 두는 것을 재고하고 있다’고 답했다. 미국 정부의 중국 견제와 양안 갈등 같은 정치적인 이슈로 기업이 부담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느낀 것이다. 중국 정부의 강력한 코로나19 통제는 기업들이 효율성이 다가 아니라는 생각도 갖게 했다. 다만 기업들은 ‘중국 아니면 어디든!’이라는 ‘ABC(Anywhere But China)’ 기조보다는, 당분간 중국 공장은 그대로 두고 다른 공급망을 추가하거나 보완하는 ‘차이나+알파’를 꾀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서 단순히 공장이 아니라 중국이 가진 ‘생산 체인’을 다른 지역에 옮길 수 있을지, 비용은 얼마나 더 들지 등을 따져볼 것이다.신호정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부의 지원이나 응급 노동비용, 수요 패턴에 대응하는 인력의 유동성 등 초기 중국이 지녔던 장점이 약화되는 시점에서 애플의 공급망 재편 이슈가 나왔다”면서 “장기적으로 부품 조달 등의 문제에서 해법을 찾아가면서 폭스콘, 중국과 차차 거리를 둘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블룸버그 인텔리전스는 애플이 중국 생산 여력의 10% 수준을 타 국가로 이전하는 데만 약 8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뉴스가 쏟아지고 당장 엄청나게 바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한참 걸린다는 의미다. 공급망을 바꾸는 것은 그만큼 복잡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2022-12-25 10:00
일론 머스크, ‘이것’도 성공시킬 수 있을까[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중성자탄 일론 머스크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주일에 7일을 일한다. 솔직히 말해 나 자신을 고문하는 정도의 극단적인 수준이다.”한 달 전 소셜미디어 트위터를 인수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늘어난 업무량에 고통을 호소했다. 머스크는 지난달 14일(현지 시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기업인 회의에 화상으로 참석해 이같이 밝혔다. 이틀 뒤 머스크는 트위터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사내 메일을 보냈다. 트위터의 성공을 위해 우리는 (업무에서) 극도로 하드코어가 돼야 한다. 뛰어난 업무 성과만이 합격점을 받을 것이다. 회사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고강도 장시간 근무를 해야 한다. 새로운 트위터의 일부가 되기를 원한다면 첨부한 링크에서 ‘예’를 클릭하라.머스크가 자신이 “주 7일 일하고 있다”는 말을 꺼내고 나서 트위터 직원들에게 장시간 근무를 요청하는 메일을 보낸 것. ‘나도 이렇게 일하고 있으니 마음에 안 들면 나가라’라는 뜻으로 보인다. 메일 내용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초대장을 연상케 한다. 트위터에 남아도 멀쩡하게 살아남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머스크는 트위터를 440억 달러(약 62조 원)에 인수했다. 이 중 130억 달러(17조7000억 원)는 은행 등에서 빌렸다. 1년에 대출 이자만 10억 달러(약 1조4000억 원)가 넘는 상황. 머스크가 돈을 벌 목적으로 인수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트위터의 수익성 강화가 시급하다고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트위터는 최근 10년 중 8년 동안 적자를 기록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못했다. 원래 돈을 긁어모으던 회사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머스크는 트위터를 인수한 직후 직원 절반을 해고했다. 그래서 ‘뉴트론 일론’이라는 새 별명까지 얻었다. 뉴트론은 핵폭탄보다 강력한 중성자탄을 의미한다. 노동자를 대규모로 해고해 수익성을 증가시킨 잭 웰치 전 제너럴 일렉트릭(GE) 회장의 별명(뉴트론 잭)을 패러디한 것이다. 머스크는 현재 트위터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서비스를 개편하고 있다. 그는 남은 직원들과 트위터를 어떻게 바꾸고 있을까. ●머스크의 ‘V.I.T.s(Very Important Tweeters)’ 프로젝트 머스크는 트위터의 수익 모델부터 바꾸고 있다. 이전의 트위터는 연 매출 50억 달러(약 7조 원)의 약 90%가 광고에서 나올 정도로 광고 의존도가 높다. 머스크는 안정적으로 수익을 거둘 수 있는 구독 모델(정기 회원 결제)을 확대하고, 각종 유료 서비스를 도입해 수익을 다변화하고자 한다. 대다수가 경기침체를 전망하는 상황에서 광고로 수익을 늘리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기업들은 경기가 가라앉으면 광고부터 줄인다. 머스크는 ‘트위터 블루’의 가격을 올렸다. 트위터 블루는 트위터가 지난해 6월 출시한 유료 구독 서비스다. 한 달에 약 7000원(4.99달러)을 내면, 트윗의 글을 편집하거나 원하는 트윗을 저장하는 책갈피 기능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처음 이용자들은 ‘편집 기능’에 혹했다. 기존에는 트위터에 글을 올렸을 때 맞춤법이 틀렸으면 트윗을 삭제하고 새로 올려야 했다. 콘텐츠가 빠르게 확산한 다음에 내용을 바꾸면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수정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트위터는 트위터 블루를 내놓으면서도 편집에 제한(30분 이내, 최대 5회)을 걸었다.머스크는 월 구독료를 약 1만1000원(8달러)으로 올리고, 유료 회원이 되면 신원이 확인됐다는 의미로 파란색 체크 표시를 붙여주겠다고 발표했다. 기존에 정치인이나 인플루언서 등 유명인에게 달아줬던 것을 유료 서비스로 만든 것이다. 유명인들은 얼떨결에 결제하게 생겼다. 트위터는 90일 이내에 돈을 내지 않으면 체크 표시가 사라질 것이라고 밝혔다.각종 유료 서비스도 준비 중이다. 미 뉴욕타임스(NYT)가 입수한 트위터 내부 문서에 따르면 머스크와 그의 고문들은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다. 다이렉트 메시지가 이 중 하나다. NYT는 “한 제품팀은 핵심 고객인 ‘V.I.T.s(Very Important Tweeters)’에 초점을 맞춘 ‘유료 다이렉트 메시지’를 작업 중”이라고 지난달 3일 전했다. 사용자가 소액의 비용을 내면 좋아하는 유명인에게 비공개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기능인데, 아직 출시가 구체적으로 계획되지 않았다. 트위터를 유튜브처럼 만드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머스크가 직원들에게 잘나가는 유튜버에게 연락해 트위터로 옮겨 탈 것을 권유하라고 했다”고 지난달 11일 전했다. 머스크는 유튜버들에게 유튜브보다 돈을 10% 더 주겠다고 약속했다. NYT에 따르면 트위터는 영상에 따라 이용자에게 시청료를 요구하는 ‘페이월(Paywalled) 비디오’를 고려 중이다. 고객이 낸 돈은 영상 제작자와 트위터가 나눠 가진다. 현재 트위터에 올릴 수 있는 동영상 분량은 140초로 제한돼 있다. 동영상 서비스로는 유튜브와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 머스크는 트위터를 인수하자마자 개발자들에게 ‘바인(Vine)’을 되살릴 방법을 고민해보라고 지시했다. 바인은 트위터가 2012년 인수했지만, 2016년 종료한 동영상 서비스다. 머스크는 트위터를 사기 전부터 동영상 서비스를 계획했던 것 같다. 그는 “트위터에서 비디오는 엄청난 성장 가능성을 지닌 영역”이라고 여러 번 밝혔다. ●슈퍼 앱 ‘트위터엑스’ 머스크는 장기적으로 트위터를 모든 기능을 제공하는 슈퍼 애플리케이션 ‘X(엑스)’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X 앱의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힌트는 있다. 머스크는 6월 트위터 직원들과의 회의에서 중국 ‘위챗’을 극찬했다. 머스크는 “X 앱은 소셜미디어와 결제, 쇼핑, 차량 호출 등 휴대전화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결합한 위챗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PC가 아닌 휴대전화를 주로 사용하는 중국에서 위챗은 필수 앱으로 꼽힌다. 각종 서비스를 제공해 전 세계 13억 명의 고객을 끌어모았다. ‘트위터엑스’가 되는 첫걸음으로 온라인 결제를 도입할 가능성이 크다. 머스크는 지불결제 시스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 무엇보다 온라인 결제에 한 맺힌 부분도 있다.머스크는 23년 전인 1999년 혁신에 서툴고 변화에 보수적인 은행을 바꿔보겠다며 금융 서비스 회사 ‘엑스닷컴(X.com)’을 만들었다. 이듬해 머스크는 투자자들을 만나기 위해 2주간 출장을 떠났는데, 그 사이 임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머스크를 이사회에서 내보냈다. 그리고 회사 이름도 바꿨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의 지불결제시스템 업체 ‘페이팔’이다. 비록 머스크는 머스크가 페이팔 지분으로 부를 얻고 테슬라와 스페이스X의 사업 밑천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지불결제시스템 혁신에 대한 열망은 이후에도 잃지 않았다.● 매달 돈 내고 트위터 쓸까 머스크가 트위터 구독료를 올린 것은 언뜻 합리적으로 보인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미국 트위터 사용자는 한 달에 평균 6달러 이상의 광고 수익을 올리고 있다. 머스크가 원하는 대로 유료 사용자에게 광고 없는 쾌적한 환경을 조성해주려면 이전의 4.99달러 구독료로는 매출이 늘기는커녕 줄어든다. (게다가 현재 트위터는 머스크가 인수한 후 광고주들이 이탈하고 있다) 그런데, 충성 고객에게 광고를 없애는 대신 구독료를 받는 것이 효율적일까. 광고냐 구독이냐는 소셜미디어 플랫폼의 풀지 못한 숙제와도 같다. 이들은 종종 상호 배타적인 면을 보인다. 구독 서비스의 타깃 고객은 트위터를 가장 많이 찾는 이용자일 가능성이 큰데, 반대로 이들은 광고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유료 고객이 늘어날수록 플랫폼 내 광고 소비가 급격하게 줄어들 수 있다는 분석이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구독 모델은 트위터에 수익성이 없을 수 있다. 메타(페이스북)가 고객들에게 광고 없는 유료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이유”라고 10월 전했다. 소셜미디어에 구독료를 받는 것이 적합한가라는 질문도 있다. 서로 소통하고 정보를 주고받는 데에 사람들이 돈을 쓰겠느냐는 것이다. 무료 플랫폼도 많은데 굳이. 물론, 트위터가 유명인들의 의견을 듣고 뉴스를 빠르게 전달받을 수 있다는 면에서 강점은 있다.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뉴스가 유료로 제공된다. 다수의 언론사가 트위터에서 속보를 전하는데, 이를 보기 위해 트위터에 접속하는 이용자가 많다. 과연 이들이 본인 확인이나 광고를 보지 않기 위해 구독료를 지불할까. 머스크는 유료 고객에게 향후 동영상 서비스를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상황이 달라질까. WSJ는 “(넷플릭스, 데이팅 앱, 유튜브 등) 다양한 서비스가 구독료를 받고 있다. 소비자는 주어진 시간 속에서 가장 관심 있는 한두 가지에만 비용을 지불할 것”이라고 전했다. ●“우리는 모두 하수도를 돌아다니는 쥐일 뿐”현재 트위터 이용자들은 구독료에 반발하고 있다.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UC데이비스)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 코헨(26)은 트위터 아이디에 쥐 이모티콘을 추가하고, 다른 사용자들에게 이를 추천했다. 트위터에 구독료(인증 비용)를 내는 대신, 쥐 이모티콘을 추가하는 것으로 본인임을 인증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는 “내 이름에 무료로 쥐를 붙일 수 있는데 왜 파란색 딱지를 받기 위해 8달러를 지불해야 하느냐”면서 “‘#RatVerified(검증된 쥐)’가 되는데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이 트윗은 14만 번의 ‘좋아요’를 받았다. 실제로 최근 트위터에서는 일부 사용자들이 비용을 내고 사칭 계정을 만들어 트위터가 구독 서비스를 중단하기도 했다. 본인 인증에 돈을 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이 나오는 이유다. 코헨은 “인터넷의 하수도인 트위터에서 우리는 모두 하수도를 돌아다니는 쥐일 뿐”이라며 “나는 다른 쥐들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8달러를 지불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수도의 흙탕물 속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머스크가 목표로 삼은 ‘슈퍼앱’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도 많다. 슈퍼앱을 만들기에는 플랫폼 시장이 이미 성숙했다. 수많은 앱이 쇼핑이나 결제, 게임 등에서 각각의 역할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트위터엑스(슈퍼앱)가 타 플랫폼 고객을 뺏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미 블룸버그는 “구글과 스냅, 우버 등이 슈퍼앱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사람들은 쇼핑이나 커뮤니케이션, 금융 등에서 각자 쓰고 있는 앱이 있다”고 10월 전했다. 블룸버그는 “위챗(2011년 출시)처럼 새로운 사용자 기반을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19세기 거대한 도시로 성장한 뉴욕의 폭발적인 성장을 재현하려는 것과 같다”고도 했다. 미 시장 조사 업체 인사이더 인텔리전스의 자스민 엔버그 수석분석가 역시 “미국 사람들은 다양한 활동에 서로 다른 앱을 사용하는 데 익숙해졌다. 오래된 습관은 깨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슈퍼앱은 한 번에 많은 개인 데이터를 빨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도 했다. 사람들이 개인정보 유출 등의 위협 때문에 한 앱에서 모든 활동을 하는 것을 꺼릴 수 있다는 것이다. ●넓은 시야를 가진 이상주의자 머스크는 5월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한 발표에서 인수 이후 트위터의 연간 수익을 2028년까지 264억 달러(약 37조 원)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지난해(50억 달러)의 5배가 넘는 수준이다. 90%가 넘는 광고 의존도를 50% 미만으로 줄이겠다고 했다. 전 세계 트위터 사용자 수도 2억1700만 명에서 9억3100만 명까지 늘릴 수 있다고 밝혔다. 이후 반년 동안 머스크에게 수많은 비판이 쏟아졌지만, 정작 본인은 태연하게 일에 몰입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머스크는 원래 남의 지적에 그렇게 신경 쓰는 편이 아니다. 그럴 만도 하다. 과거 “화성에 가겠다”고 했을 때는 얼마나 많은 전문가들이 훈수를 뒀을까. 이번 인수가 수년 간 성장이 정체됐던 트위터에 기회가 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미 노스웨스턴대 경영대학원(켈로그 스쿨)의 마케팅 교수 팀 칼킨스는 “최근 일들은 여러 면에서 트위터에 좋은 소식이다. 왜냐면 이제 사람들은 아주 오랫동안 트위터에 대해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회사의 혼란은 트위터를 객관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제 사람들은 트위터가 안전한 미디어 채널인지, 아니면 머스크의 장난감인지 등의 질문을 던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용자 사이에서는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분위기다. 미국의 한 여론조사 회사는 10월 트위터 이용자 1212명을 대상으로 설문했는데, 절반 이상(64%)이 머스크가 서비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답했다. 여러 정치인과 사용자들은 ‘표현의 자유’ 이슈(신비월드 26화,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 왜들 난리일까’ 참고)와 광고주 이탈 등을 걱정하고 있다. (관련기사: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21120/116581519/1)머스크의 전력을 생각해보면 트위터에 대한 우려는 쓸데없는 걱정일지 모른다. 해외에서는 머스크를 넓은 시야를 가진 이상주의자로 꼽는다. 20년 전, 결제 시스템을 바꾸겠다고 나설 때까지는 젊은 창업가 중 하나로 보였다. 머스크는 이 사업으로 마련한 목돈으로 스페이스X를 차렸는데, 사람들이 다른 행성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목표를 세웠다. 그는 전기차 업체 테슬라를 키운 것을 두고, 큰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자선 활동’이었다고 주장한다. 터널 굴착 벤처기업 보링컴퍼니 역시 ‘교통 문제 해결’, ‘도시 혁신’ 등을 사명으로 삼고 있다. 확실히, 발상이 다르긴 다르다. 머스크라면 표현의 자유 수호자(트위터 인수 이유로 꼽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또한, 사람을 화성에 보내겠다는데 슈퍼앱 하나 못 만들까 싶다. ●‘맙소사, 이 사람은 미쳤구나’머스크는 2006년 테슬라 전기차에 도전할 때 “나는 실리콘밸리 사람이다. 실리콘밸리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생각과 다르게, 오늘날 실리콘밸리는 거대한 이상보다 작고 실행 가능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한 사업이 대부분이다. 경제매거진 INC닷컴은 2007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혁신적인 기업 중 하나로 인정받는 구글조차도 웹 검색을 위한 약간 더 나은 방법에 불과했다. 머스크의 회사는 실리콘밸리에서 생겨난 회사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평하면서 그를 ‘올해의 기업가’로 선정했다. 제록스의 전 최고연구위원인 존 실리 브라운 미 서던캘리포니아대 객원 연구원은 “처음 머스크의 우주 관련 아이디어를 들었을 때 나는 ‘맙소사, 이 사람은 미쳤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INC닷컴은 브라운의 반응에 (미쳤다고 생각하는) “그게 핵심”이라고 콕 집었다. 아무도 생각조차 하지 못할 사업을 펼치는 것이 머스크의 특기라는 것이다. 머스크의 이상주의와 도전정신은 자신의 사업에 대한 여론을 긍정적으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되곤 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구글이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장치를 당신의 뇌에 이식하는 실험을 했다면 디스토피아의 신호로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머스크가 자신의 뇌신경과학 스타트업(뉴럴링크)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멋진 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고 했다. 머스크가 운영하는 사업이 생각보다 많다. 전기차 보급에 앞장선 머스크는 스마트폰 시대를 연 애플의 공동 창업자 스티브 잡스(1955~2011)와도 자주 비견된다.머스크와 20년 가까이 만남을 이어온 카라 스위셔 뉴욕타임스 기자는 “잡스는 우아하고 여유로우며 조용한 편인 반면, 머스크는 모든 것이 화려하다. 잡스는 마음속으로 여행을 다니고(창의력을 발휘하고), 머스크는 화성에서 생을 마감하길(화성 착륙이 목표가 아니라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 원한다”고 했다. 머스크와 잡스는 ‘창조적 파괴’를 주도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산업의 판도와 사람들의 일상을 뒤바꿔 놓았다. 스위셔는 머스크의 성격 때문에 그의 업적이 평가 절하되고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2018년 자신의 칼럼에서 “지나치게 솔직하고, 놀라울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머스크의 성격 탓에 주변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워한다”고 평했다. ●테슬라의 알루미늄 차체 패널과 재활용 로켓머스크의 테슬라는 2012년 2650대의 전기차를 고객에게 전달했다. 약 10년이 지난 지난해에는 거의 100만 대를 팔았다. 주류 자동차 기업들도 테슬라의 성장을 지켜보며 전기차의 물결에 뛰어들었지만, 테슬라는 불굴의 선두를 지켜냈다. 스페이스X는 지난 10년 동안 190개 이상의 로켓을 발사했고, 다수의 로켓을 지구에 안전하게 착륙시켰다. 스페이스X의 기업 가치는 1000억 달러(약 140조 원) 이상이며, 사실상 업계를 지배하고 있다. 머스크는 완벽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이상을 현실화시켰다. (이 부분도 잡스와 유사하다) 일화가 있다. 첫 번째 테슬라 모델S가 고객에게 인도되기 3주 전, 머스크는 “뒷타이어의 크기가 더 컸으면 좋겠다”는 폭탄 발언을 한다. 바퀴만 갈아 끼우면 되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제동 시스템부터 주행 거리까지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WSJ은 “테슬라 기술자들은 반발했지만 머스크는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디자인 변경은 차질 없이 이뤄졌다”고 2015년 전했다. 머스크는 직원들에게 외부 공급 업체를 찾는 대신에, 알루미늄 차체 패널을 직접 만드는 방법을 알아내라고 하기도 했다. 테슬라의 전 CFO 라이언 포플은 “기술적으로 까다롭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당시 회의실에서 머스크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를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현재 테슬라는 공장에서 필요한 모든 알루미늄 차체 패널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머스크의 스페이스X 역시 이 같은 과정을 거쳤다. 처음 머스크가 쏘아 올린 3개의 로켓은 폭발하거나 궤도에 도달하지 못했다.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 무렵이었다. 그는 파산할 뻔했지만 결국 두 회사를 일으켜 세웠고, 현재 미국의 중심에 섰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의 과학기술 담당인 애슐리 반스는 2020년 ‘미국의 진정한 캡틴 아메리카 일론 머스크’라는 글에서 “머스크는 수만 명의 사람들을 고용했고, 자동차 충전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재사용 가능한 로켓을 고안했으며, 고속 운송을 위한 터널을 팠다”고 찬사를 보냈다. ●소련산 로켓 설명서2001년 어느 날,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 수영장에 머스크가 앉아있다. 뉴욕증시에서 나스닥이 폭락했지만, 그의 일행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페이팔이 상장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스크가 보유한 페이팔 지분(약 2240억 원어치)은 30세 청년이 여생을 보내기에 충분해 보였다. 친구들은 술에 취해 축제를 즐겼다. 모두 모인 자리에서 축하받던 머스크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우주여행과 우주산업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에 대해. 그의 손에는 이베이에서 구입한 것으로 보이는 소련 시대의 로켓 매뉴얼이 들려 있었다. 반스 기자는 “로켓 회사를 만드는 것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돈이 안 되는 프로젝트 중 하나”라고 평했다. 로켓은 보통 국가 단위의 프로젝트다. 어마어마한 비용과 인력이 투입되어야 하고, 개발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머스크의 확고한 신념은 그가 사업을 하는 이유이자, 회사를 키우는 원동력이다. 돌이켜보면 머스크는 사업 초기나 최근이나 그렇게 변한 것 같지는 않다. (독특한 성격을 포함해)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머스크는 트위터도 성공시킬 수 있을까.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신념도 우주산업과 탈탄소화만큼 확고할까. 아직 부정적인 시선들이 따갑지만, 한편으로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머스크니까. 김성모 기자 mo@donga.com}2022-12-04 10:00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 왜들 난리일까[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파랑새가 풀려났다 2020년 초 미 텍사스주 휴스턴의 조지 브라운 컨벤션 센터에서 소셜미디어 트위터의 워크숍이 열렸다. 4000명이 넘는 직원이 모인 자리. 트위터 공동 창업자인 잭 도시는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이 트위터를 경영한다면… 아, 그런데 트위터를 경영하고 싶습니까?” 직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모두가 웃고 있을 때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한 명이 있었다. 연사로 초대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주였다. 3년 가까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답을 찾았을까. 지구상 최고 부자(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 기준 약 366조8000억 원)인 머스크가 지갑을 열었다. 머스크는 지난달 27일(현지 시간) 트위터를 440억 달러(약 62조 원)에 인수했다. 이 중 130억 달러(17조7000억 원)는 모건스탠리와 뱅크오브아메리카 등에서 빌렸다. 1년에 대출 이자만 10억 달러(약 1조4000억 원)가 넘는다. 머스크는 트위터 샌프란시스코 본사에 화장실 세면대를 들고 들어가는 모습을 ‘세면대를 안으로 들여보내 줘(let that sink in)’라는 글과 함께 트위터에 올렸다. 자기 말이나 행동이 타인의 마음속에 침투해 이해받기를 바라는 뜻의 관용어(sink in)를 활용한 언어 유희였다. 트위터를 자신의 마음대로 손보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 트위터 계정 프로필도 ‘치프 트위트(Chief Twit)’로 변경했다. ‘멍청이 보스’라는 뜻으로 트위터 수장이 됐다는 중의적 의미로 보인다. 인수 절차를 마치고 머스크는 트위터에 “새가 풀려났다”고 올렸다. 파랑새는 트위터(트위터는 ‘새의 지저귐’을 뜻함)의 상징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참 유쾌해 보였다. 트위터 직원들은 자신의 회사가 팔렸다는 사실을 금방 실감할 수 있었다. 최종 인수 당일 파라그 아그라왈 최고경영자(CEO) 등 주요 임원 4명이 잘렸다. 이달 3일에는 전사(全社) 휴무일(매월 1일)이 사라졌고, 주 7일 24시간 쉬지 말고 일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툴툴댈 새나 있었을까. 하루 뒤, 전 직원의 절반(3700여 명)이 해고당했다. 영국 런던에 근무하는 크리스 유니는 “새벽 3시에 이런(해고) 통보를 받게 돼 정말 감사하다”며 머스크의 일방적인 해고 조치를 비꼬았다. 트위터는 뒤늦게 필수 인력까지 해고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직원 수십 명에게 돌아와 달라고 요청했다. 복귀 요청 이메일을 열었을 때 얼마나 황당했을까. ● 세계 최고 부자는 왜 트위터를 샀을까?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소셜미디어 이용자 순위에서 트위터는 7위 수준이었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핀터레스트 링크드인 스냅챗 다음이다. 전 세계 사용자 수도 2억1700만 명으로 페이스북(약 20억 명)에 비해 엄청나지는 않다. 무엇보다 트위터는 최근 10년 중 8년 동안 적자를 기록할 정도로 상황이 암울하다. 머스크는 왜 무리해서까지 트위터를 샀을까. 그가 직접적으로 밝힌 이유는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다. 머스크는 “최대한 신뢰할 수 있고 광범위하게 포용적인 공공 플랫폼을 갖는 것은 문명의 미래에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광범위하게’와 ‘포용적인’이 핵심이다. 누구든 하고 싶은 말은 하게 두자는 것이다. 머스크는 이전부터 트위터가 증오 표현, 백신 음모론 등을 올린 계정을 삭제하거나 영구 정지시키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출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다. 트럼프는 지난해 1월 지지자들의 미국 연방 의사당 난입 사태 당시 폭력을 선동할 수 있다는 이유로 트위터로부터 계정 영구 정지 조치를 당했다. 머스크는 5월 “트럼프를 막은 것은 옳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직접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이 때문에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하자 뉴욕타임스, CNN 등 미 주요 매체들의 관심이 온통 트럼프의 트위터 계정 복구 여부에 쏠렸다. 논란이 커지자 머스크는 “계정이 정지된 사람들을 당분간 트위터에 복귀시키지 않겠다”고 했는데, 트럼프 계정을 정지했던 임원은 즉시 해고했다. 트럼프는 “제정신인 사람이 트위터를 소유해 기쁘다”며 환영했다. 트위터를 장악한 머스크는 미 중간 선거를 하루 앞둔 7일 특정 정당에 가입돼 있지 않은 무소속 유권자들을 향해 공화당에 투표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공유된 권력은 양당(민주·공화당)의 최악의 (권력) 과잉을 억제한다”면서 “대통령이 민주당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의회의 경우 공화당에 투표할 것을 무소속 성향 유권자들에게 추천한다”고 트위터에 썼다. 머스크가 거느린 팔로워 수만 1억1000만 명에 달한다. 머스크가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지만, 실상은 트위터를 장악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예전부터 머스크는 정치적 의견을 솔직히 드러내 왔다. 공화당 투표 독려가 그렇게 깜짝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머스크에게는 그렇다. ● 머스크는 ‘표현의 자유’에 얼마나 진지할까 머스크는 트위터를 어떻게 바꾸고 싶은 것일까. 크리스 앤더슨 테드 CEO의 4월 단독 인터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듯하다. 40분간 진행된 인터뷰의 첫 질문은 예상대로 “트위터를 왜 사려고 하는가”였다. 관중의 눈치를 보고 딴청을 피우던 머스크는 “트위터는 사실상 마을 광장과 같다. 사람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면서 “제가 해야 할 일은 (콘텐츠를 조정하는) 알고리즘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트위터가 콘텐츠 검열에 대한 개입은 최소화하고, 트윗 타임라인처럼 콘텐츠에 손을 댈 경우 어떤 룰(알고리즘)이 적용되는지 오픈하자는 의미다.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자, 앤더슨이 반론을 제기했다. 그동안 페이스북 등 다른 소셜미디어들도 개발자들을 대규모로 채용하고 알고리즘으로 서비스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해왔는데, 궁극적으로 어느 선에서 개입(개입)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고 지적했다. “‘나는 정치인 X가 싫다’라는 트윗이 있다고 치자. ‘정치인 X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트윗도 있다. 우리 중 일부가 푸틴(러시아 대통령)에 대해 말하듯이 이건 정당한 언급일 수 있다. 이제 또 다른 트윗이 있다. ‘정치인 X가 살아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글과 X의 머리 위에 총구를 겨눈 사진이다. 이 트윗에 X의 주소까지 포함될 수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어느 시점에 누군가는 이중 무엇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알고리즘이 과연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의 판단력이 필요한 시점이 반드시 온다고 본다.” ‘알고리즘이 해법이라고 주장하지만, 결국 머스크 당신 마음대로 하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돌려서 말한 것 같기도 하다. 머스크는 “트위터는 각 국가의 법률을 준수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누가 누구에게 어떤 변화를 주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통찰력 없이 감춰진 알고리즘이 트위터를 조종하는 것은 꽤 위험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알고리즘을 투명하게 하는 것이 해답이라고 재차 강조하는 머스크. “음, 그러니까 나는… 나는… 한편으로는… 음, 만약 의문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냥 (사람들이) 말하게 내버려 두고 싶다. 만약 그렇게 둔다면, 회색 지대가 생길 수 있다. 그런데 트윗하게 내버려 두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뭐 논란이 많이 될 것 같은 트윗이 퍼지지 않기를 원한다면… 아, 그러니까 내가 모든 답을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우리가 기존에 있던 기능을 삭제하는 건 매우 꺼리고 있고, 영구적 금지 기능에 대해선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영구적인 금지보단 일시 정지가 나을 것 같다.” 머스크는 알고리즘과 중재라는 심오한 문제에 명확한 답은 내놓지 못한 채 ‘회색지대는 일단 최대한 남겨둔다’는 기조만 밝혔다. 과학기술 관련 웹 블로그 테크더트는 인터뷰에 대해 “머스크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진지한 이해가 부족하고, 콘텐츠 수정을 다루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 부족하다”고 평했다.● 다윗에 붙은 벼룩들과 골리앗의 대결 ‘내로남불’ 비판도 있다. 머스크가 자신을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 신봉자인 것처럼 말하면서 직원들의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블룸버그통신은 머스크가 트위터나 기업 메신저 슬랙 등에서 자신을 공개 또는 비공개적으로 비판한 직원 10여 명을 해고했다고 15일 전했다. 머스크는 13일 여러 국가에서 트위터 접속이 느린 상태라고 사과했다. 트위터 엔지니어인 에릭 프론호퍼는 머스크의 글을 리트윗하면서 “완전히 틀린 얘기”라고 부정했다. 프론호퍼는 안드로이드용 트위터 앱 부문에서 6년간 일했다고 밝혔다. 머스크는 “그럼 뭐가 맞는 숫자인지 알려 달라. 안드로이드에서 트위터가 느려질 때 당신은 뭘 했는가”라고 받아쳤고, 프론호퍼는 “우리는 앱 성능 향상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면서 트위터가 느려진 이유를 설명했다. 이들 대화를 본 한 트위터 이용자가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트위터에서) 일하길 원하느냐”고 물었다. 머스크는 “(그는) 해고됐다”고 답했다. 프론호퍼는 사장님의 주장에 반박하는 글을 올린 지 5시간 만에 회사에서 잘렸다. 이번 논쟁에 끼어든 또 다른 엔지니어 벤 라이브도 해고된 것으로 전해졌다. 트위터만의 일은 아니다. 테슬라 역시 직원 관리에 투철하다. 테슬라는 자사 직원을 해고할 때 회사 내 괴롭힘·성희롱 등을 포함한 노동법 위반 행위를 누설할 수 없도록 ‘비방 금지 합의’에 서명하도록 요구해왔다. 이는 종료일이 없는 강력한 계약이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미 플로리다 출신의 잭 스위니(19)는 머스크의 전용기를 모니터링하는 트위터 ‘일론젯’을 운영해왔다. 스위니는 “머스크가 지난해 11월 말 ‘보안상 위험하니 계정을 비활성화해(없애) 달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의 비행 추적 게임에 화가 났었던 것 같다”고 2월 NYT에 말했다. 외신에 따르면 머스크는 스위니의 계정을 삭제하는 대가로 5000달러(약 670만 원)를 제안하기도 했다. 라이언 칼로 워싱턴대 법학 교수는 “이보다 더 큰 권력 비대칭이 있을 수 없다. 이는 다윗과 골리앗이 아니다. 다윗에 붙은 벼룩과 골리앗의 대결”이라고 꼬집었다. ● “그동안 재미있었어” 파랑새와의 작별 인사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한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큰 손’들부터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CNBC는 최근 광고주들의 트위터 이탈 소식을 보도했다. 맥도날드와 애플의 광고를 대행하는 옴니콤은 최근 고객사에 추후 공지가 있을 때까지 트위터 광고를 중단하도록 권고했다. 화이자와 폴크스바겐, 제너럴모터스(GM) 등도 트위터 광고를 중단한 상태다. 논란에 휘말릴 수 있고, 브랜드 이미지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한 듯하다. 유명인들도 파랑새에 작별을 고하고 있다. 미국의 유명 흑인 배우 우피 골드버그는 7일 방송에서 “오늘로써 트위터를 끝낸다”고 선언했다. 싱어송라이터이자 그래미상 수상자인 세라 버렐리스도 “그동안 재미있었어, 트위터. 이제 사용하지 않아”라고 작별 인사를 남겼다. 트위터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수익성 강화를 위해 새로 도입한 서비스가 가짜뉴스의 진앙이 되기도 했다. 트위터는 5일 유료 서비스 ‘트위터블루’를 선보였다. 월 7.99달러(약 1만500원)를 내면 진짜 계정이 맞다는 의미로 ‘블루 체크’를 달아주는 서비스다. 검증된 유명인과 기업 계정에만 달아주던 이 표시를 돈만 내면 신원 확인 절차 없이 달아줬다. 이 때문에 돈을 내고 사칭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 계정은 미 제약사 일라이릴리를 사칭했다. 가짜 일라이릴리는 “인슐린 무료라는 발표를 하게 돼 기쁘다”는 거짓 트윗을 올려 회사의 주가가 크게 떨어뜨렸다. 방산 기업 록히드 마틴을 사칭한 계정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에 무기를 팔지 않겠다”는 허위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을 사칭한 계정도 있었다. 실제로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 후 혐오 게시물이나 가짜뉴스가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소셜미디어 분석 플랫폼인 데이터마이너에 따르면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 소식이 전해진 지난달 27일 이전과 이후를 비교했을 때 트위터 내 인종차별적 게시물은 1300%, 가짜 뉴스 게시물은 2900% 늘어났다. 로베카 트롬블 조지워싱턴대 데이터·민주·정치연구소 박사는 “머스크가 트위터를 장악하자마자 사용자들이 트위터의 한계 시험에 나섰다”고 했다.● 트위터 직원들은 시행착오를 다시 겪을까 두렵다 업계에서는 트위터에서 당분간 유해 콘텐츠가 늘어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머스크가 일단은 회사 경영의 초점을 수익성 강화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트위터는 최근 계약직 5500명 중 4400명을 내보냈는데, 이 중에는 각국의 가짜 정치 뉴스를 감시하는 업무를 맡은 직원들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소셜미디어 회사들은 주로 계약직을 활용해 유해 콘텐츠를 걸러내 왔다. 트위터가 우경화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머스크의 인수 이후 4일 만에 트위터의 미 공화당 의원들은 약 47만 명의 팔로워(1인당 평균 1800명)를 얻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비롯한 민주당 의원들은 42만 명(1인당 평균 1600명)의 팔로워를 잃었다. 이코노미스트는 “보수 이용자가 플랫폼에 들어오고 좌파 사용자가 떠나는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트위터 직원들은 10년 전으로 돌아갈까 걱정하고 있다. 트위터도 처음에는 표현의 자유를 설파했다. 그러다가 자신들의 플랫폼이 괴롭힘의 도구가 되거나, 유해한 콘텐츠를 확산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정책을 수정해왔다. 2014년 발생한 ‘게이머게이트’ 사건이 집단 공격의 예다. 당시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트롤들이(공격을 일삼는 악성 사용자) 여성 게임 개발자를 대상으로 혐오적인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러자, 한 게임업계 여성 직원이 성차별적인 표현을 문제 삼았는데, 트위터에서 이 여성에게 온라인 습격이 이어졌다. 이들은 성폭행, 살인 등의 위협까지 가했다. 가짜 계정을 통한 정치 공격도 있었다. NYT는 “2016년 9월, 미 대선 당시 러시아가 2700여 개의 가짜 트위터 계정을 만들어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 후보 사이에서 불화를 일으켰다”고 4월 전했다. 2017년 잭 도시 창업자는 “이러한 문제를 없애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그해 말 ‘미투’ 운동이 번졌다. 사용자들은 여성 혐오가 남아 있는 트위터를 보이콧했다. 도시 창업자는 “아직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고 중재자 능력 부족을 인정했다. ● 인간은 자율주행차보다 어렵고 복잡하다 이후 트위터는 동의가 없는 나체 이미지나 폭력을 미화하는 내용 등 회사가 용인하지 않을 콘텐츠 목록을 발표했다. 코로나19 확산 시기와 선거 때는 잘못된 정보로 판단되는 항목에 표식을 달거나 차단했다. 2021년 상반기(1~6월) 트위터는 590만 개의 콘텐츠를 삭제하고 120만 계정을 정지시켰다. 2년 전 190만 개, 70만 계정에서 대폭 늘어났다. 트위터 직원들은 이 같은 시행착오를 다시 겪을까 우려하고 있다. NYT는 “트위터 내부에서 머스크가 플랫폼을 초기의 문제 상태로 되돌릴까 걱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기술이 발전했으니, 머스크의 주장처럼 알고리즘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까. 테크더트는 “인간의 본성과 의사소통을 다루는 것은 자동차에 스스로 운전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훨씬 더 복잡하다”며 “콘텐츠 조정에는 ‘축하합니다, 도착했습니다’ 같은 순간이 없다”고 강조했다. “트위터 같은 플랫폼에서 콘텐츠를 다루는 것은 이 복잡성을 인식하고 때에 맞춰 처리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라고도 했다. 인간은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특정 기술만으로 한순간에 해결되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데이비드 케이 미국 캘리포니아대 법학 교수는 “머스크는 규칙 제정자와 연설 중재자라는 직위를 샀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그 일을 정말 힘들어했다”고 평했다. NYT는 “당신이 트위터 사장이 되면 무엇을 할 것인지 상상하는 것은 재미있지만 실제로 트위터의 사장이 되는 것은 그다지 재미가 없을 것이다. 페이스북(현 메카)을 운영하는 마크 저커버그(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를 봐라. 그 사람은 재미가 없어 보인다”고 4월 전했다. 정확하게 짚었다. 저커버그는 8월 소셜미디어를 운영하는 것을 “위장에 구멍을 뚫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전화기를 보면 100만 개의 메시지가 와있다”면서 ‘사회적 책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털어놨다. 저커버그는 “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고 원하는 콘텐츠를 얻을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트위터에 관해 이야기도 했다. 그는 “트위터의 장점은 매우 재치 있고 통찰력 있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모두 얻을 수 있다는 것”이라면서 “하지만 이들 중 많은 사람이 매우 날카로워지고 있다”고 평했다. 하버드 법대의 표현의 자유 전문가인 에블린 덕은 “트위터가 표현의 자유에서 순수주의적 입장을 취한다면 즉각적인 승자는 더 검열 적인 라이벌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사람들이 혐오적인 표현을 피해 페이스북 등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 소셜미디어 트위터, 소셜네트워크서비스 페이스북 2006년 등장한 트위터는 단문(140자)으로 생각이나 의견을 공유하는 서비스다. 2009년에는 ‘리트윗’ 버튼을 도입했다. 이전에 이용자들은 트윗을 공유하기 위해 글자들을 복사해 자신의 트윗에 추가해야 했다. 리트윗 버튼이 등장한 덕분에 콘텐츠가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게 됐다. ‘복붙’하는 시간 동안 발생하는 고민과 망설임까지 사라져버렸다. 이 짧고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140자의 메시지들은 때때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2009년 이란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을 때 트위터와 유튜브는 사실상 언론을 대신했다. 이란 거리를 사진과 글로 생생하게 전달했다. 이코노미스트는 2009년 6월 ‘트위터 1, CNN 0’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기존 미디어에 대한 엄청난 분노가 쏟아졌다. ‘이란은 지옥이 됐지만, 언론은 잠을 자고 있었다’는 비판의 게시물이 대표적”이라고 언급했다. ‘아랍의 봄’, 미국의 오사마 빈 라덴 자택 기습 등의 역사적인 순간에서 트위터는 항상 뉴스 속보 역할을 해왔다. 빠르게 퍼지는 속성이 한몫했다. 트위터는 언뜻 보면 페이스북과 유사해 보인다. 지인들과 소통하고 때로는 애완동물의 사진을 올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안을 들여다보면 차이가 있다. 트위터는 본질적으로 ‘일대다 네트워크’다. 한 사람이 다수(공개 메시지도 가능)를 상대로 떠드는 방식이다. 페이스북은 친구나 가족, 동료 등의 사회적 관계를 그대로 옮긴 것에 가깝다. 트위터는 정보 전달(소셜미디어)에, 페이스북은 관계(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특화돼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IT 전문매체 더버지는 “트위터는 아침에 개별 뉴스 홈페이지를 방문하는 우리의 습관을 깼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실시간으로 뉴스를 생산하고 소비한다”고 2014년 언급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트위터를 언론처럼 생각한다는 통계도 있다. 미 여론조사기관인 퓨리서치 센터의 지난달 조사에 따르면 30세 미만의 미국 젊은 층은 전통 언론 매체를 신뢰하는 만큼 소셜미디어에서 보는 내용을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에서) 뉴스 보도와 의견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밝혔다.● “트위터 덕에 대통령 됐다” 트위터를 사랑하면서 그만큼 잘 활용한 인물이 머스크였다. 머스크의 팔로워들이 테슬라를 홍보하는 데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수천만 팔로워의 군대를 보유한 머스크는 트위터를 테슬라의 마케팅 부서로 만들었다”고 4월 전했다. 데이비드 커시 메릴랜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테슬라에 힘을 실어준 것은 팔로워뿐만이 아니었다. 2010~2020년 테슬라 해시태그를 단 트윗 중 23%(3만6000여 개)가 ‘팬봇(게시 자동화 계정)’에 의해 생성된 트윗이었다”고 꼬집었다. 머스크가 트위터에서 없애겠다고 밝힌 봇 계정이 그동안 자신의 사업 홍보에 큰 도움이 됐던 셈이다. 트위터를 언급할 때 트럼프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1월 8일 트럼프는 메가폰을 뺏겼지만, 이전까지는 활동량이 상당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트럼프는 2010년 142번, 2011년 772번만 트윗을 올렸다. 다음 해,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의 출생지가 미국이 아니라는 음모론이 나온 이후 트윗양이 3523번으로 치솟았다. 2013년까지 트럼프는 8128개의 트윗을 올렸다. 일주일에 156개의 트윗을 남긴 셈이다. 2017년 4월 트럼프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트위터가 없었다면 나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까지 했다. 2016년 대선 이후 트럼프의 소셜미디어 활동은 급감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대통령직의 엄격함에 대가를 치렀다”고 지난해 1월 평했다.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 트윗에 담긴 감정까지 분석했다. 2015년에는 2대 1의 비율로 즐거움이 화남보다 많았다. 이후 분노와 두려움이 일관되게 높았는데, 여기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핵’을 가지고 말다툼한 것도 포함됐다. 트럼프는 ‘내 핵 버튼이 (김정은 것보다) 더 크고 강력하다’고 트위터에 올렸다. (당시 트럼프는 ‘내 버튼은 작동도 한다’고 유치하게 자랑까지 했었다) 트위터를 활용해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가짜뉴스와 폭력 선동으로 영구 정지를 당한 트럼프 사례를 보면 트위터 인수에 미국이 왜 이렇게 떠들썩한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머스크가 트위터를 어떻게 운영하든 표현의 자유와 가짜뉴스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자유를 그 어느 나라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부작용이 많다는 사실도 여러 차례 드러났기 때문이다. 2018년 3월 세계적 과학저널 사이언스지에 따르면 거짓 콘텐츠(가짜 뉴스)가 1500명에게 도달하는 데 사실보다 평균 6배 빨랐다. 사람들이 거짓 정보를 진실보다 더 빠르게, 많이 퍼 날랐다는 의미다. ‘진실이 신발을 신고 있는 동안 거짓은 세상을 반 바퀴 돌 수 있다’는 마크 트웨인의 명언이 떠오른다. 연구를 진행한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의 소셜머신연구소는 “거짓이 진실보다 빠른 이유는 간단하다. 거짓이 사실보다 매력적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참고로, 2006년부터 2017년까지 진행된 이 연구는 ‘트위터’를 대상으로 했다. 연구소는 트위터에 게시된 모든 트윗을 분석했고, 트위터도 연구에 100억 원 넘게 지원했다. ※ 다음 신비월드에서는 일론 머스크가 펼칠 트위터의 비즈니스 전략에 대해 살펴볼 예정입니다. 구독을 눌러주시면, 알차게 전달해드리겠습니다. 김성모기자 mo@donga.com}2022-11-20 10:00
나이키는 왜 역대급 재고에도 투자를 늘릴까[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나이키, 재고 44% 급증에도 자신감 최근 글로벌 경기가 꺾이고 소비자들이 지갑을 쉽게 열지 않으면서 기업들의 과잉재고 문제가 커지고 있다. 세계 최대 스포츠용품 업체인 나이키(NIKE)는 재고 때문에 최근 주가가 10% 이상 폭락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나이키는 최근 분기(6~8월) 매출액이 전년 동기 대비 3.6% 늘어난 126억9000만 달러(약 18조2480억 원)였다. 그러나 영업이익은 17억 달러(약 2조4450억 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2% 급감했다. 매장과 창고, 배에 안 팔린 신발 박스가 가득 쌓였다. 나이키의 재고 자산은 97억 달러(약 13조9490억 원)로 전년 대비 44.2% 뛰었다. 북미에서는 재고가 65%나 급증했다. 팬데믹(전염병 대유행)으로 발생한 운송 차질과 중국에서의 판매 부진, 달러 강세에 따른 악영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실적 발표 다음 날인 9월 30일 나이키 주가는 83.12달러로 하루 새 12.81% 떨어졌다. 지난해 11월 최고점(177.51달러) 대비 주가가 반토막이 났다. 그런데, 나이키 최고경영자(CEO) 존 도나호의 코멘트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는 “회사의 핵심 사업 계획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서 “브랜드 모멘텀과 혁신 문화, 운영 전략이 매출 성장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이번 분기 실적이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미 투자은행 자문사 에버코어ISI의 오마르 사드 애널리스트는 한술 더 떴다. 사드는 “코로나19 이후 사람들이 스니커즈(운동화) 신발이 가져다준 편안함에 절대적으로 익숙해졌다. 스니커즈 수요 증가라는 슈퍼사이클이 시작될 것”이라고 지난달 8일 전망했다. 그는 스니커즈 슈퍼사이클에서 가장 큰 수혜를 누릴 수 있는 기업으로 나이키를 꼽았다. 회사 대표의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외부 전문가는 왜 나이키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을까. 나이키, 아마존과 깜짝 결별 선언2019년 10월 나이키는 회사를 14년간 이끌어온 마크 파커 CEO가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했다. 운동화 디자이너 출신인 파커를 대신한 사람은 스포츠 브랜드와 거리가 먼 정보기술(IT) 전문가 도나호. 그는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전자상거래 업체 이베이를 이끌었다. 이후 클라우드 서비스 회사 서비스나우의 CEO와 세계 최대 전자결제시스템 업체 페이팔홀딩스의 의사회 의장을 맡고 있었다. 미 USA투데이는 “10년 넘게 나이키를 이끈 마크 파커가 물러나는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건 후임자가 도나호 CEO라는 것”이라고 평했다.더 큰 폭탄선언은 한 달 뒤인 2019년 11월에 나왔다. 나이키가 아마존에서 판매 중이던 모든 상품을 철수하기로 한 것. 미국 소비자의 3분의 2가 아마존에서 제품을 검색한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아마존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홈페이지 월 방문이 30억 건이 넘고, 130개가 넘는 국가에 제품을 배송한다. 미국 의류 업체인 갭의 전 CEO 아트 펙은 “아마존에서 판매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정신 나간 생각”이라고까지 했다. (이후 갭도 아마존에서 철수하기는 했다) 당시 나이키도 온라인 매출의 절반 이상을 아마존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마존에서 물건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 업계가 정말 깜짝 놀랐다. IT 매거진 쿼츠는 “나이키가 아마존과 2년간의 달콤한 썸을 끝내기로 했다”고 언급했다. 나이키의 ‘탈 아마존’은 D2C(Direct to Customer) 전략의 일환이었다. 직접 판매(D2C)는 유통 플랫폼을 거치지 않고, 고객을 자사 몰로 끌어들여 직접 판매하는 방식이다. 한 마디로, 다른 루트를 거치지 않고 고객한테 직접 물건을 팔겠다는 것이다. 통상 브랜드 파워가 있는 회사가 D2C로 유통 구조를 단순화하면 수익성이 높아지고, 할인 판매 등을 직접 관리하면서 고객 데이터를 모을 수 있다. 일대일 커머스의 귀환이후 나이키는 가맹 대리점 등 외부 업체에 대한 의존도를 과감하게 줄였다. 이와 함께 자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한 직접 판매를 늘리면서 고객들과의 접점을 확대했다. 그러다가 몇 달 지나고 코로나19가 등장했는데, 해를 넘긴 전염병 대유행 동안 온라인 판매가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나이키의 전략이 빛을 발했다. 팬데믹이 한창이었던 2020년 9~11월 나이키의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30% 뛰었다. 매출도 9%나 늘었다. 같은 기간 세계 2위 기업인 아디다스가 매장 폐쇄 여파로 매출이 35% 감소한 것과 상반된다. 다른 유명 스포츠 브랜드인 언더아머도 2020년 1, 2분기 매출이 전년보다 각각 23%, 41% 감소했다. 도나호는 “2023년까지 전체 비즈니스에서 디지털 판매 비중을 30%로 설정했는데 코로나19로 갑자기 100%가 됐다. 디지털 플랫폼이 소비자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채널이 된 것”이라고 했다. 나이키 온라인 공식 몰 회원은 2020년부터 1년간 7000만 명이 늘어 2억5000만 명에 이르렀다.지난해 나이키의 매출에서 직접 판매 비중은 40% 수준까지 늘어났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나이키의 팬데믹 성과를 두고 “수년 동안 숨겨진 비용을 쌓아온 전통적인 중개인(전자상거래 같은 온라인 플랫폼)이 밀려났다”며 “나이키는 ‘신성한 일대일 세계(직접 판매)’를 재창조했다”고 지난해 3월 전했다. 최근에는 오프라인 매장에 과감히 투자를 늘리고 있다. 나이키는 9월 말 2년 안에 미국과 유럽에 200개의 신규 직영 매장을 열겠다고 발표했다.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한 셀프 계산, 온라인 주문의 픽업 등 디지털 기술에 중점을 둔 매장이다. 단순히 매장을 직접 운영하는 것에서 넘어서서 디지털 구매와 물리적 쇼핑이 매끄럽게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상점 특성까지 바꾸겠다는 전략이다.직전 분기에 재고가 급증하고, 경기침체 우려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나이키가 자신감을 내비친 것은 그만큼 D2C 전략에 확신이 선 듯하다. 피라미드의 최상단, 조던사실, 나이키가 사업 초창기부터 고객에게 집착했던 것은 아니었다. 창업 초기에는 ‘정점’을 공략해 제품 판매를 이끌었다. 미 오리건주 포틀랜드 출신의 육상선수였던 필 나이트는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뒤 그의 코치였던 빌 바우어만과 1972년 운동화 회사를 차렸다. 브랜드명은 회사의 첫 정규 직원이자 나이트 대학원 동기인 제프 존슨이 꿈에서 마주친 승리의 여신(니케), ‘나이키(Nike)’로 정했다. 첫 제품은 트랙화 ‘코르테즈’였는데, 드라마 ‘미녀 삼총사’의 여주인공 파라 포셋이 TV에 이 신발을 신고 나오면서 제품이 불티나게 팔렸다.1980년대 초반 나이키에게 운명적인 일이 벌어진다. 전설적인 미국프로농구(NBA) 선수 마이클 조던을 만난 것. 1984년 조던은 노스캐롤라이나대를 졸업하고 NBA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로 시카고 불스에 입단했다. 나이키는 연 50만 달러(약 7억2000만 원)와 메르세데스벤츠 두 대를 주고 조던과 5년 계약을 맺었다. (사실, 조던은 나이키 운동화를 한 켤레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아디다스와 계약을 희망했다고 한다)나이키는 선수를 단순히 지원(스폰서십)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의 이름을 딴 브랜드 ‘에어조던’을 론칭한다. 당시만 해도 선수 이름을 따서 브랜딩을 한다는 것은 꽤 도발적인 결정이었다. 제품 자체도 놀라웠다. 운동화의 99%가 흰색이나 검은색이었던 시절이었는데, 나이키가 내놓은 에어조던에는 시카고 프랜차이즈 색상인 빨간색이 들어가 있었다. 조던은 대학 시절 라이벌 팀의 유니폼이 떠올라 빨강을 ‘악마의 색’이라며 싫어했다. 조던이 좋아했든 싫어했든, 그는 고급 가죽으로 만든 에어조던을 신고 날아올랐다. 에어조던은 1985년 출시 첫 해 1억2600만 달러(약 1800억 원)어치나 팔렸다. 재미를 본 나이키는 조던뿐만 아니라 골프 선수 타이거 우즈, 농구 선수 코비 브라이언트(1978~2020)와 르브론 제임스 같은 선수들을 발굴했다. 세계적인 스타가 되기 전 스폰서십 계약을 맺은 것이다. 이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농구 코트 밖에서도 선수들이 착용한 신발을 신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특히, 뉴욕을 중심으로 힙합 아티스트들이 나이키의 농구화를 드레스 코드처럼 만들면서 스포츠웨어가 힙합 문화와 결합하기 시작했다. 나이트는 과거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와의 인터뷰에서 “게임 최상위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일찍이 발굴해내고, 이들에 알맞은 기술·디자인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며 “우리 제품의 60%는 실제 스포츠에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구입하지만, 우리는 항상 최상단을 목표로 했다”고 회상했다. 실력 있고 인기 있는 선수를 일찌감치 공략했던 것이 성공 비결이었다는 설명이다. 정점에서 풀뿌리로, 고객과 마주한 나이키 조던이 코트를 휩쓰는 동안 스니커즈 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거셌다. 레저 인구가 늘고, 직장인들의 복장 규정이 느슨해지면서 캐주얼 운동화가 보편화됐다. 신발 산업이 커지자 경쟁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리복이 나이키를 위협했다. 나이키는 제품에 잘 해지지 않는 질 좋은 가죽을 주로 썼다. 리복은 내구성이 떨어져 주로 옷에 들어가던 가죽을 신발에 사용했다. 사람들은 매끄럽고 부드러운 느낌에 곧바로 매혹됐고, 리복 제품이 유행처럼 번졌다. 나이키도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나이키는 1980년대 초 매출의 3분의 1을 차지하던 러닝화 사업이 둔화하고 있던 것을 포착하고, 캐주얼 운동화 시장에 진출했다. 나이트는 “많은 사람이 직장이나 식료품점에 운동화를 신고 오가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우리도 기능성이 있는 캐주얼화를 내놓았지만, 대중이 우리 제품을 원치 않았다.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공급자 마인드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1985년 나이키 매출이 2분기 연속으로 감소했다. 회사는 직원 280명을 잘랐다. 나이트는 “매우 고통스러운 해고였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을 잃었다”고 언급했다. 나이키 경영진은 ‘고객이 우리 제품의 가치를 몰라보네’라는 변명 대신, 회사가 마주하는 소비자가 누구이고, 우리의 브랜드는 무엇을 대표하는지 고민했다. 나이트는 “우리는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내려와 풀뿌리 수준에서 많은 일을 했다. 아마추어 스포츠 행사가 열리는 체육관과 테니스 코트를 돌면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나이키는 사람들의 야외 활동이 등산, 자전거 타기, 윈드서핑 등으로 다양하게 나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이키는 1988년 미국 스니커즈 브랜드 ‘콜한’을 인수해 별도로 운영했다. 나이키의 약점이었던 드레스 슈즈와 캐주얼 운동화를 보강한 것이다. 나이키는 이후 4년 만에 콜한에서 인수 금액을 벌어들였다. 나이키는 최근에 D2C를 선언했지만, 1980년대 중반 회사가 휘청했을 무렵부터 고객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냥 해(Just do it)” 나이키는 소비자들과 유대감을 형성하고,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경쟁과 결단력, 성취감, 재미 등 스포츠가 주는 여러 의미를 광고로 전달하고자 했다. 그렇게 등장한 슬로건이 1988년 ‘저스트 두 잇(Just do it)’이다. 첫 광고에 마라톤 마니아인 80세 월트 스택이 등장한다. 광고에서는 운동선수도 아닌 이 노인이 30초 동안 다리 위를 조깅한다. 광고가 끝날 무렵, 슬로건이 등장한다. “Just do it.”사람들은 러닝화의 탁월함을 넘어서서 나이키를 도전과 활력의 대명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애플 하면 혁신, 스타벅스 하면 공간 미학이 떠오르듯 말이다. 이 같은 브랜딩은 경쟁사와 차별화 요소가 돼서 소비자들이 지갑을 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필요 없는 데도 가지고 싶고, 남들이 사니까 더 사고 싶은 그런 브랜드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의미다. 물론, 이러한 마케팅의 힘은 제품력이 기반이 돼야 한다. 나이트도 “좋은 제품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쁜 제품에 감정적인 유대감을 만들 순 없다”고 했다. 나이키가 3년 전, 아마존을 떠난 이유도 브랜딩 관리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온라인 유통업체에서 소비자들은 보통 특정 브랜드가 아니라 제품 종류를 검색한다. 그 결과로 고객은 가격, 고객 리뷰 등 정보들을 접하고, 여러 브랜드를 비교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브랜딩이 희석될 수 있다. 브랜드에 대한 감정보다는, 여러 정보에 집중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레너드 슐레진저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는 “아마존 같은 플랫폼에서 여러 비슷한 제품이 한 번에 나타나면 소비자의 마음에서 차별성과 특별함이 사라지는 ‘상품화 현상’이 일어난다”며 “일부 카테고리에서 아마존은 1g당 가격을 눈에 잘 띄게 표시하는데, 이는 소비자가 주로 가격에 집중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개성이 만연한 시대에서 상징적인 존재”나이키는 제품 출시에서도 과거와 다른 면모를 보인다. 트렌드 변화를 눈여겨보고 최대한 다양한 스니커즈들을 내놓았다. 2000년대 초반에는 인터넷을 통해 맞춤형 운동화를 제작하는 ‘나이키아이디(현 나이키 바이 유·Nike By You)’를 선보이기도 했다. 재질, 색상 등을 선택할 수 있고, 자신의 이름까지 새길 수 있다. 취향 존중의 시대를 여는 데 일조한 것. 로버트 골드만 미 루이스클락대 명예교수는 나이키를 “개성이 만연한 시대에서 상징적인 존재”라고 평했다. 소량 다품종 생산으로 ‘맞춤형 마케팅’에서 재미를 본 나이키는 2018년 나이키플러스 멤버십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나이키플러스에서는 고객들에게 맞춤형 운동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러닝 운동화나 전자팔찌 같은 웨어러블 장비에 센서를 내장해 PC나 태블릿, 스마트폰과 연동시켰다. 이를 통해 고객에게 달리는 경로와 시간을 제안하고, 운동 결과를 정리해 줬다. 무엇보다 마라톤 도전자나 달리기 선수가 각각의 수준에 맞는 코칭 프로그램을 제공받을 수 있게 만들었다. 친구나 운동선수 등이 포함된 커뮤니티와도 연결해줬다. 둘 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사이를 넘나들며 고객들에게 경험을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작 MZ세대(밀레니얼, Z세대)의 마음을 뒤흔든 건 다양성도, 맞춤형도 아니었다. 희소성이었다. 나이키는 2015년 ‘SNKRS(스니커즈로 발음)’라는 앱을 만들고, 일부 신제품을 ‘드롭(Drop)’으로 판매했다. 영어로 ‘투하하다’라는 뜻을 가진 드롭은 한정판 상품을 불시에 판매하는 방식이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드롭의 개념은 1980년대 후반 일본 도쿄의 길거리 옷 가게 매장들에서 시작됐다. 1990년대 후반 미국의 슈프림(Supreme)과 같은 유명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가 이를 대중화했다. 당시 젊은 층은 한정판 패션 아이템을 사려고 몇 시간 동안 매장 밖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 하늘에서 나이키가 떨어질까나이키도 일찌감치 희소성에 몰리는 심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2002년에는 뉴욕과 도쿄에서 슈프림과 콜라보레이션한 ‘덩크’를 500족만 판매했다. 덩크는 나이키가 1985년 처음 내놓은 농구화 시리즈 중 하나로, 색상과 디자인을 조금씩 바꿔 재발매해왔다. 전설의 운동화는 2005년에 등장한다. 미국 유명 디자이너 제프 스테이플과 나이키가 150족만 제작한 ‘나이키 덩크SB 로우 스테이플 NYC 피죤’이다. 비둘기 그림이 들어가 ‘피죤 덩크’라는 별칭이 붙었다. 신발의 발매가는 200달러(약 28만 원)였지만, 발매 당시 뉴욕 경찰이 구매자들을 안전하게 집으로 에스코트까지 해줄 정도로 난리가 났었다. 이 신발을 사려고 사람들이 몰린 장면이 2005년 2월 23일 뉴욕포스트 1면을 장식할 정도였다. 피죤 덩크는 현재 3만여 % 오른 7000만 원 선에 거래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이키는 2015년 SNKRS라는 앱을 내놓으면서 이를 디지털화했다. 드롭에도 체험적 요소가 있다. 소비재 컨설팅 업체인 스낵스샷의 설립자 안드레아 허난데즈는 “드롭이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이유는 쇼핑을 흥미진진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면서 “원하는 제품을 당일에 받아보는 세상에서 드롭은 희소성과 독점성이라는 감각을 자극한다”고 했다. 특히, 소셜미디어는 이러한 감각을 극대화하는 데 일조했다. 드롭에 당첨된 사람들은 SNS에서 이를 자랑했고, 이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 나이키가 드롭을 활성화하면서 한정판을 모으는 수집가들과 운동화를 재테크로 활용하려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기 시작했고, ‘스탁엑스’ 같은 재판매 플랫폼들은 사업을 확대했다. 재판매 시장은 나이키에 여러모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블룸버그는 “나이키는 리셀러(재판매 업자)들의 과대광고로 간접적 이익을 얻고 있다”며 “재판매 시장의 존재는 새 제품의 굳건한 매출도 가능케 한다”고 지난해 3월 평했다. 오래된 운동화를 복원하는 직업도 생겨났다. 운동화는 새것을 한 번도 안 신고 잘 보관하더라도 빛에 노출돼 누렇게 변하거나, 밑창이 치즈케이크처럼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각종 복원 기구를 갖춘 전문가에게 수선을 맡기는 경우가 많다. WSJ은 “새로운 유형의 장인들이 운동화의 무너진 밑창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고, 젖은 스웨이드를 구출하고 있다. 수십 년 된 운동화를 죽음의 위기에서 되살리는 중”이라고 4월 전했다. 이들은 통상 200달러(약 28만 원)를 스니커즈 복원비로 받는다고 덧붙였다.미 투자은행 코웬앤드컴퍼니는 2019년 20억 달러(약 2조8300억 원)였던 글로벌 스니커즈 리셀 시장 규모가 2025년 60억 달러(약 8조4900억 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나이키판 엄마찬스나이키는 슈프림, 오프화이트 등의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뿐만 아니라 트래비스 스캇(래퍼), 톰 삭스(아티스트), 리카르도 티시(지방시와 버버리의 디자이너) 같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한 제품들을 소량으로 내놓으면서 희소성을 극대화했다. 극소량의 제품들은 선착순이 아닌, 추첨식(드로우·Draw)으로 판매했다. 아예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도록 만든 것이다. 지난해 나이키는 루이비통의 수석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오프화이트 창립자)와 만든 한정판 제품(에어포스1)을 공개했는데, ‘현대 패션 장인’으로 불리는 아블로가 지난해 11월 세상을 떠나면서 재판매 가격이 수천만 원까지 치솟기도 했다. 한정판 전략이 순탄하게 흘러오지만은 않았다. 운동화 구하기가 전쟁을 방불케 하면서, 온라인상에서는 ‘카드 결제를 빨리하는 법’ 같은 조언들이 오갔다. 심지어 자동으로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봇(Bot)’이 거래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서는 뜻하지 않게 ‘공정’ 이슈가 떠오르기도 했다. 지난해 나이키 북미 사업 부문 대표였던 앤 헤버트 부회장은 한정판을 비싼 값에 되파는 리셀러 아들 조 때문에 25년 일한 회사를 떠났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조는 리셀 사업을 하면서 엄마 명의의 신용카드로 13만2000달러(약 1억8700만 원)어치 한정판 나이키를 사들인 뒤 이를 되팔았다. 조는 신용카드로 임직원 할인을 받아 구매하고 비싸게 되팔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나이키판 엄마찬스’ 이후 고객들은 소매 업체들이 한정판 일부를 빼돌렸다가 비싸게 팔고 있다는 의심을 내비쳤고, SNKRS 앱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당첨자를 선정하는 알고리즘은 어떻게 작동하며, 봇이 얼마나 영향을 미치느냐는 질문이었다. 한 나이키 고객은 “다시 SNKRS 앱을 켤 바에야 차라리 쇼핑몰에 15시간 진을 치고 나오자마자 도둑맞는 쪽을 택하겠다”고 SNS에 비꼬기도 했다. 나이키는 오프화이트와 협업한 한정판 덩크 50만 족을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판매했다. 무작위 추첨이 아닌, 나이키를 많이 이용하고 이벤트 등에 참여한 고객들을 대상으로 ‘헌신 점수’를 매겨 구매할 기회를 줬다. 그런데도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자 올해 9월에는 ‘리셀’을 금지하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이용 약관에 ‘재판매를 위한 구매 불가’ 항목을 신설한 것. 업계는 충성 고객을 지키기 위한 선언에 불과하다는 평을 내놓고 있다. 루이비통을 꿈꾸는 나이키 나이키가 온오프라인에서 물건을 직접 판매(D2C)하려는 것은 어쩌면 예견된 순서일지 모른다. 아마존에 판매를 맡기면 아무리 제품이 많이 팔려도 시시각각 변하는 고객들의 취향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이키는 아마존과 이별하고 빅데이터 분석으로 제품 수요를 예측하는 스타트업 ‘셀랙트’와 데이터 통합 플랫폼 스타트업인 ‘데이터로그’를 인수했다. 그만큼 나이키는 고객 데이터의 중요성을 잘 아는 회사다. 신호정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나이키는 팬덤을 유지하면서 고객들이 어떤 제품을 구매하는지 끊임없이 체크해왔다”며 “디자이너들이 만든 제품과 고객이 원하는 디자인의 갭(차이)을 줄여나간 것”이라고 했다. 이어 “물건을 직접 팔겠다는 것은 가성비 라인보다 고가 제품을 판매하면서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는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나이키가 한정판 판매에서 내홍을 겪으면서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어느 정도 직접 관리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수 있다. 최근의 일들이 오프라인에서 소매 파트너 수를 줄이고 직영 매장을 늘리는 데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나이키가 직접 판매 위주로 사업을 운영하는 명품 브랜드의 길을 걷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블룸버그는 “나이키의 한정 제품 판매가 회사를 구찌나 루이비통 같은 고급 브랜드로 만들고 있다”면서 “소매업체를 제외하고 상품을 더 독점적으로 판매하면 회사의 이미지와 수익성을 높일 수 있다”고 3월 전했다. 럭셔리 제품 자문 회사 오르텔리의 상무이사 마리오 오르텔리는 “럭셔리 브랜드는 평균 소비자 직접 판매가 90% 이상을 차지한다. 나이키는 이 비중이 40% 수준인데, 2025년 60%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물론, 직접 판매에 부담 요소들도 있다. 환불을 요구하는 변덕스러운 소비자와 직접 대면해야 하고, 기존 소매 판매망의 선반에는 경쟁사들의 제품이 올라갈 것이다. 전략이 삐끗하면 아디다스, 뉴발란스 같은 경쟁사들이 치고 올라올 수 있다는 뜻이다. 미 경제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나이키 경영진은 회의에서 운동화에 열정을 가진 충성 고객들이 뉴발란스 같은 브랜드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을 우려하기도 했다. 예술 작품 만드는 러너들 사실, 나이키처럼 아버지 세대부터 지금의 젊은 층까지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은 브랜드가 흔치 않다. 나이키는 올해 5월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사람들은 아직 나이키와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뉴욕타임스(NYT)는 “달리기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나이키 앱의 실시간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활용해 온라인 지도에 예술 작품을 그리고 있다”고 9월 24일 전했다. 자신이 이동한 장소들을 지도에서 선으로 연결해 하나의 그림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호랑이’부터 영화 ‘겨울왕국’의 캐릭터,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유명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까지 SNS에 다양한 작품들이 올라오고 있다. 나이키에게 상품이 판매되는 것 못지않게 의미가 있어 보인다.나이키는 50년 뒤에도 지금처럼 사랑받고 있을까. 아무튼, 쇼핑에도 달리기에도 재미가 필요한 시대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2022-11-06 10:00
스타벅스 바리스타의 17만 메뉴 전쟁[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스타벅스, 월드클래스 CEO 선임 세계 최대 커피체인 스타벅스가 최근 새 최고경영자(CEO)를 영입했다. 기술 혁신과 투자 확대 등 대대적인 변신도 예고했다. ‘로고’만 빼고 다 바꾸겠다는 전략이다. 스타벅스는 지난달 영국 생활용품 업체 레킷벤키저의 최고경영자 랙스먼 내러시먼(55)을 CEO로 선임했다. 내러시먼은 유통업계 경력만 30년에 달하는 베테랑이다. 1993년 글로벌 컨설팅사 맥킨지에 입사해 소비재·유통 담당 수석파트너로 활동했고, 이후 글로벌 음료기업 펩시에서 글로벌 최고사업책임자(CCO)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의 사업 능력은 팬데믹(대유행)에서 빛을 발했다. 실적이 저조한 사업을 과감히 정리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에 맞춰 청소기 판매를 늘리고, 소독제 세탁 세제 등을 출시하면서 매출 증대를 이끌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애널리스트들과 투자자들이 내러시먼의 이직에 놀랐다. 회사를 떠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레킷벤키저의) 주가가 5% 이상 하락했다”고 지난달 2일 전했다. 레킷벤키저는 세계 정상급 CEO를 뺏긴 듯한 분위기다. 내러시먼은 4월까지 전 세계 스타벅스 매장을 방문하고, 일부 매장에서 파트너(스타벅스 바리스타의 명칭) 업무도 익힐 예정이다. 회사 상징인 녹색 앞치마를 두른다. 스타벅스 창업자이자 임시 CEO인 하워드 슐츠는 이사회 고문으로 자리를 옮긴다. 슐츠는 5년 전에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가 4월 임시 CEO로 돌아온 바 있다. 해외에서는 슐츠가 지난달 13일(현지 시간) 시애틀 본사에서 밝힌 스타벅스 ‘재창조 계획’에 더 주목하고 있다. 이날 슐츠는 2025 회계연도까지 매년 25억∼30억 달러(약 3조5800억∼4조3000억 원)를 투자해 새로운 형태의 매장을 도입하고, 설비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직원들의 업무 부담을 줄이기 위해 내년에 4억5000만 달러(약 6400억 원)를 들여 북미 기존 매장의 커피머신과 오븐 등을 신형으로 교체한다. 음료 제조 과정 간소화에도 힘쓰겠다고 했다. 스타벅스는 모카 프라푸치노 한 잔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을 종전 87초의 약 40% 수준인 35초로 대폭 단축하겠다고 밝혔다. 온라인 주문이 일부 매장에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한 디지털 기술도 개발한다. 잠 못 드는 시애틀의 스타벅스 스타벅스가 ‘리셋’에 가까운 대책을 내놓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노조’ 때문이다. 스타벅스 일부 직원들은 수년 전부터 노조를 만들려고 했지만, 회사의 반노조 전술에 번번이 실패했다. 노조 결성의 움직임이 보이면, 스타벅스의 임원이나 본사 직원들이 매장을 찾아가 바리스타들의 실수를 잡아내거나, 대화로 설득하며 노조 설립을 막아왔다. 그러다가, 지난해 12월 뉴욕 버펄로시의 한 스타벅스 매장에서 찬성 19표, 반대 8표로 첫 노동조합이 설립됐다. 반세기 무노조 경영이 깨진 순간이었다. 미국이 깜짝 놀랐다. 치열한 물밑 전투가 시작됐다. 노조 가입 투표는 뉴욕 이타카, 매사추세츠, 버지니아 등으로 번졌고, 2017년 이후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슐츠 회장이 4월 임시 CEO로 복귀했다. 스타벅스 CEO를 맡아온 케빈 존슨은 3월 퇴임 의사를 밝혔다. 회사는 “경영상의 문제”라고 퇴임 이유를 밝혔지만, 노조 문제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2월 스타벅스가 노동조합 결성을 추진하던 직원 7명을 무더기 해고해 ‘보복행위’라는 비판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존슨은 모바일 주문을 감독했고, 스타벅스 앱의 로열티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팬데믹 상황에서도 견실한 이익 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최근 바리스타들의 (노조 가입) 물결에 성과가 가려졌다”고 3월 평했다. 슐츠는 복귀 첫날 “스타벅스를 노조가 있는 커피 대기업으로 만들 수 없다”고 밝히면서 전면전을 선포했다. “무두절은 끝났다”는 선언처럼 느껴진다. 한 달 뒤, 슐츠는 2년 이상 근무한 바리스타들을 대상으로 최소 5%의 임금 인상안을 발표했다. 또, “고객이 직원에게 팁을 줄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추진하겠다”고 했다. (직원들이 줄곧 요구해왔던 사항이다.) 이 같은 지원책은 비(非)노조 영업점만 받을 수 있다. 노조 결성에 투표한 50개 매장(발표 기준)은 제외했다. 스타벅스는 7월 마약 등 안전 문제로 미 전역의 스타벅스 매장 16개를 일시 폐쇄했는데, 이 중 3곳이 노조와 관련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노조 결성을 추진하지 말라는 뜻이다. 미국 스타벅스 바리스타들의 대동단결 슐츠는 예전부터 노조에 부정적인 편이었다. 그는 6월 NYT 정책포럼에서 “노조의 역사는 40, 50, 60년대 회사들이 사람(직원)들을 학대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며 “우리가 하는 일은 탄광 사업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학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슐츠의 강경 발언에도 ‘노조 열풍’이 꺾이지는 않았다. 미 노동관계위원회(NLRB)에 따르면 지난달 미국 내 9000여 개 스타벅스 매장 가운데 224개 매장이 노조 가입에 찬성했으며 반대한 매장은 52개였다. 영국 가디언은 “수년 동안 스타벅스는 노조를 조직하기 어려운 곳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버펄로의 승리로 댐이 무너졌고, 전국에 홍수가 일었다”고 전했다.법원에서는 직원들에게 우호적인 판결이 나왔다. 미 노동당국인 노동관계위원회(NLRB)는 스타벅스를 상대로 2월에 해고된 직원들을 복직시켜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는데, 테네시주 서부 연방지법 재판부가 8월 18일 이를 받아들이면서 사태가 일단락됐다. 일련의 과정으로 봤을 때 최근 스타벅스의 투자 발표는 슐츠가 한발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바리스타들의 업무 경감을 위한 투자가 개편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 내 매장을 현재의 2배에 가까운 9000개로 늘리겠다는 계획도 있긴 했다. 미 스타벅스 바리스타의 대동단결은 아마존과 애플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에 있는 아마존 JFK8 물류 공장 직원들이 4월 노조 설립에 찬성했고, 6월에는 메릴랜드 토슨에 있는 애플 매장 직원들이 노조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외신들은 스타벅스가 미국 노조 가입 열풍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미국, 왜 갑자기 노조 열풍? 미국에서 최근 노조 설립이 활발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구인난과 인플레이션 같은 경제적 여건이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서는 지난해부터 서비스 업종을 중심으로 구인난이 심각한 상황이다. 팬데믹 추세가 꺾이고 경제가 빠르게 정상화됐지만, 직원들이 회사로 돌아가는 속도가 이를 따라잡지 못했다. 실업자 한 명당 거의 2개의 일자리가 발생하면서 사실상 완전 고용 상태가 됐다. 일할 사람이 부족해진 기업들은 월급을 올려줬다. 설상가상으로 공급망 문제와 전쟁으로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서 회사들은 제품 가격(소비자에게 전가)을 올렸다. 이후 임금 인상이 물가 상승을 따라잡지 못하기 시작했고, 미국 직장인들이 들고 일어섰다. 직원들은 물가 상승을 고려해 임금을 더 올려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업들은 비용 상승(임금 인상)으로 제품 가격을 더 올리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임금이 물가를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기업들은 구인난 탓에 협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 때 인력을 바짝 조여 놓은 스타벅스에 치명타가 됐다. 당시에도 슐츠가 등판했었다. 그때는 정말 경영 위기 상황이기는 했다. 사람들은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싼 스타벅스 커피부터 줄였다. 일종의 ‘사치품’으로 분류한 것. 여기에 맥도날드가 에스프레소 커피를 저가에 내놓으면서 원투펀치를 제대로 맞았다. 슐츠는 900개 매장을 정리하고, 1500명의 미국 매장 직원을 해고했다. 주가는 2008년 47% 하락했다. 대규모 감원을 겪은 스타벅스는 이후에도 직원을 충분히 늘리기보다 효율성을 끌어 올리는 데 집중했다. 스타벅스 말고도, 대부분의 기업이 그랬다. 사업이 점차 디지털화되면서 업무량과 필요한 직원의 숫자가 예측 가능해졌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NYT에 따르면 소매, 체인 매장은 소프트웨어의 도움으로 각 매장에 할당된 직원 수를 최소화하는 ‘린 직원 모델’을 공통으로 쓰고 있다. 스타벅스는 관리자에게 엄격한 ‘인건비 예산’을 제공하고, 예산을 초과하면 징계를 내렸다.대졸 블루칼라의 반란대학 교육을 받은 20, 30대가 스타벅스나 아마존 같은 회사에서 일하게 된 것이 노조 활성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기업이 성장하면서 스타벅스는 글로벌 인력을 2010년 13만5000여 명에서 지난해 38만5000명으로 늘렸다. 아마존은 같은 기간 3만5000명에서 160만 명까지 직원 수가 증가했다. 돈을 잘 버는 커피, 유통 회사는 다른 산업군 못지않게 견고한 임금과 혜택을 앞세워 교육을 잘 받은 지원자들에게 어필했다. 동시에, 산업이 발전하고 사회가 변화하면서 대졸자들이 향하는 업종이 금융, 제조업에서 정보기술(IT), 서비스 등으로 다변화됐다. 자동화와 아웃소싱으로 대졸 근로자가 일할 만한 ‘중간 숙련도’ 일자리가 줄어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스타벅스와 대졸 취업준비생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문제는 대졸자의 기대치와 현실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NYT는 “지난 10년 동안 대학을 졸업한 젊은 노동자들은 이전 세대보다 중산층에 도달하는 것이 어렵다는 불안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학교에 다닐 때 생각했던 것보다 적은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월급을 떠나 자산에 따른 부의 격차가 커지면서 상대적 박탈감도 있었을 것이다.잘 교육받은 MZ세대(밀레니얼, Z세대) 노동자들은 회사에서 더 공정한 대우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을 노조에 동원하는 데에도 힘을 발휘했다. 미시간주 앤아버와 오리건주 유진 같은 대학 도시에서 스타벅스 노조 추진력이 특히 강했다. 루스 밀크맨 뉴욕시립대(CUNY) 사회학과 교수는 “자신감을 갖춘 이들은 하루를 헤쳐 나가는 것 이상을 아우르는 더 넓은 세계관이 있다”며 “비전문적인 직장에서 노조 통합을 추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했다. 방아쇠는 코로나19였다. 팬데믹이 한창일 때 스타벅스 직원들은 30분 단위로 정해진 소독 프로세스를 수행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포장 주문이 급증하면서 계산대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이러한 현실은 녹색(또는 검정) 앞치마를 두르고, 고객과 눈을 맞추면서 에너지 넘치게 일하던 젊은 바리스타들의 자존감과 성취감을 떨어뜨렸다.WSJ은 “최전선에 나가 있던 직원들은 코로나19 기간 더 ‘나는 충분히 돈을 받고 있나’, ‘이 일이 내 인생에 가치가 있나’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 던지고 있다”며 역사상 교육 수준이 가장 높은 Z세대가 특히 더 그렇다고 분석했다. 여론도 노동조합에 우호적인 분위기다. 지난해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노조에 대한 찬성의견이 1965년(71%) 이래 가장 높은 68%를 기록했다. 대졸자의 노조 찬성률은 1990년대 후반 55%에서 70%까지 껑충 뛰었다. 노동조합 승인율 역시 최근 20년 동안 가장 높은 90%를 기록했다. 정치 환경도 노조에 유리한 편이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역대 가장 노조 친화적인 대통령을 자칭했다. 그는 노조 결성 권리를 보장하는 법안을 지지하고, 아마존과 스타벅스 노조 지도자들을 백악관에 초청해 간담회까지 했다. “오늘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이유”스타벅스 직원들이 매장 소독이나 부족한 임금 못지않게 힘들어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배스킨라빈스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은 음료 제조법이다. 스타벅스에서는 시럽 등 다양한 음료 재료를 조합하면 17만 개가 넘는 레시피가 나온다. 웃기면서도 슬픈 일화가 있다. 지난해 5월 트위터에 한 스타벅스 직원이 ‘오늘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이유’라는 글과 함께 사진을 올렸다. 총 13가지 요청(바나나 5개, 캐러멜 드리즐, 휘핑크림 많이, 다크 캐러멜 소스 7번, 얼음 많이, 꿀 블렌드 한 번 등)이 담긴 고객 에드워드의 주문이 사진에 담겼다. 이후 이 레시피가 입소문이 나면서 여러 매장에서 주문이 쏟아졌다.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에드워드의 음료가 하나의 메뉴가 된 것이다. 미 CBS 방송의 ‘인사이드에디션’에 따르면 해당 직원은 소셜미디어 정책을 위반한 이유로 해고됐다. 에드워드는 인사이드에디션에 “열심히 일하는 스타벅스 바리스타에게 어떤 멍청이가 이런 것을 주문하느냐고 묻겠지만, 나는 내가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음료 가격의 30%에 가까운 5달러의 팁을 냈다”고 했다. 스타벅스의 Z세대 고객들은 복잡하고 독특한 음료 제조법을 소셜미디어에서 공유하기도 한다. 대학생 안나 파버가 틱톡(팔로워 10만7900명)에 올린 ‘스타벅스 시크릿 레시피’는 조회수가 2억1000만 건을 넘어선다. 고객 맞춤형 음료의 흥행은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의 시대를 이끌었다. 슐츠는 “올해 2분기 실적에서 음료 판매의 75%가 차가운 음료였고, Z세대가 이를 가장 좋아했다”고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심지어 지난해 겨울에도 스타벅스 매출에서 60%를 찬 음료가 차지했다. NYT는 지난달 8일 ‘뜨아(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누가 아직도 마셔요’라는 기사에서 23세 콘텐츠 제작자인 한나 모테(23)의 의견을 전했다. 모테는 “나는 파블로프가 나를 ‘아이스커피=생산성’으로 생각하도록 조종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며 “맞춤형 음료 제작에는 뜨거운 것보다 아이스 음료가 적합하다. 나에게 아이스 음료는 에너지가 아니라 ‘재미’”라고 말했다. 그는 “뉴욕의 겨울은 혹독하지만 무슨 상관이냐. 아이스커피를 손에 쥘 수 있도록 특별히 장갑을 샀다”고도 했다. ‘4딸라’는 원래 스타벅스 별명?제조 과정이 복잡한 찬 음료(얼음을 여러 번 퍼 담아야 하는) 주문에 직원들은 “더 이상 커피 못 타겠다”고 피켓을 들었지만, 회사는 맞춤형 음료를 포기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슐츠는 얼음을 퍼내거나, 우유를 따르는 과정 등을 기계화하겠다고만 했다. 최근 스타벅스의 신제품만 봐도 찬 음료의 비중이 크다. 스타벅스 역시 ‘맞춤형 음료’를 중요한 경쟁력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스타벅스는 사업 초창기 커피 원두를 팔았다. 당시 마케팅 담당이었던 슐츠(스타벅스 아라비카 원두 맛에 빠진 슐츠가 일하게 해달라고 1년간 애원해 입사)는 이탈리아 밀라노 카페에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과 공간의 중요성을 깨우친 것. 슐츠는 창업자들에게 원두 말고 에스프레소 바를 두고 커피를 팔자고 설득하지만 실패했다. 결국, 1985년 회사를 나와 자신의 카페를 차렸다가 3년 뒤 스타벅스를 인수해버렸다. 이러한 배경으로 슐츠는 매번 “스타벅스는 커피와 공간을 판다”며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해왔고, 소비자에게 이 부분이 강력한 이미지로 인식됐다. 하나의 브랜딩으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반면, 가격이 비싸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리먼 사태 때 스타벅스는 커피 한 잔 가격을 나타내는 ‘포벅스(Fourbucks)’라는 별명으로 놀림을 받았다. 맥도날드의 에스프레소 판매는 상대적으로 스타벅스의 가격을 더 비싸 보이게 만들었다. 맥도날드는 “한 잔에 4달러나 하는 커피를 사 먹는 사람은 바보”라는 광고판을 내걸기도 했다. 슐츠는 맥도날드와의 비교를 싫어한다. 이코노미스트는 2008년 1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슐츠는 사람들이 스타벅스를 맥도날드와 비교할 때 고통스럽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스타벅스 방문은 패스트푸드점에서 식사하는 경험과는 다른 로맨스와 연극을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코노미스트는 “스타벅스는 덜 부유한 고객을 유치하려고 노력하고, 맥도날드는 고급 시장으로 옮겨가고 있다”면서 “최고의 라테가 승리하기를 기원한다”고 전했다. 이후에도 커피 시장의 경쟁은 늘 뜨거웠다. 네슬레가 블루보틀을 인수하면서 고급 커피 시장을 노렸고, 스타벅스는 리저브 매장으로 응수했다. 커피 순수주의자 슐츠의 신의 한 수 스타벅스가 점포를 빠른 속도로 늘려나가는 과정에서 “스타벅스가 과거의 영혼을 잃었다”는지적도 나왔다. 아담하고 따뜻한 이웃 상점에서 대형 체인점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었다. NYT는 “스타벅스가 성장이 둔화하고 주가가 하락하면 맥도날드처럼 드라이브 스루 모델을 도입할 것”이라면서 “아, 깜빡했다. 스타벅스는 이미 드라이브 스루를 도입하기 시작했다”고 2007년 3월 비꼬았다. 비판을 의식한 듯 슐츠는 2008년 CEO로 복귀했을 때 아침에 샌드위치를 판매하는 것을 중단시켰다. 커피 향을 방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훗날 샌드위치는 슬그머니 자리를 되찾았고, 지금은 매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스타벅스는 베이커리 분야를 지금도 강화하고 있다) 그는 에스프레소 머신 도입을 반대한 적도 있었는데, “기계를 잘 설계해야 할 것 같다”는 모호한 말로 의견을 번복했다. WSJ은 그를 ‘자칭 커피 순수주의자’라고 칭했다. 1994년 스타벅스는 프라푸치노를 파는 커피 체인점 커피커넥션을 인수했는데 ‘신의 한 수’가 됐다. 스타벅스 커피 특유의 쓴맛(다크 로스트)을 싫어하던 조지 하웰 커피커넥션 대표는 스타벅스의 인수 시도를 “어둠의 물결”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스타벅스의 세 번의 설득 끝에 그는 2300만 달러(약 330억 원)에 회사를 넘겼다. 프라푸치노 제조법뿐만 아니라, 명칭까지도. 이후 프라푸치노는 스타벅스의 17만 가지 레시피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스타벅스의 수많은 메뉴(샌드위치와 주스, 티 등을 포함)는 점포당 매출을 늘리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체인점은 신규 매장의 오픈만으로는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 더 매장을 낼 곳이 없어지면 성장이 멈추기 때문이다. 한 장소에서 팔 수 있는 커피의 양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스타벅스 매장들은 다양한 메뉴 덕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은 존재가 됐다. 미학의 시대 연 스타벅스슐츠는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일등 항해사 ‘스타벅’처럼 전 세계를 돌며 카페 문화를 전파했다. 수많은 신도가 뒤따랐고, 스타벅스 매장 옆에 스타벅스 매장이 생기는 기이한 광경을 연출했다. 슐츠는 사업 이전에 밀라노 커피 바에서 얻은 영감을 자신만의 발상으로 재창조했다. 이탈리아에서 본 딱딱하고 현대적인 디자인을 포기하고, 편안한 좌석과 아늑한 미학을 점포에 녹여냈다. 슐츠는 “나의 원래 아이디어는 사무실이 모인 시내에서 사람들이 서서 신속하게 마시고 갈 수 있는 서비스였는데, 사람들이 분위기와 동료애를 위해 카페에 들른다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고 1997년 고백했다. 슐츠가 언급한 ‘제 3의 장소(집과 회사가 아닌 중간 어딘가)’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스타벅스는 음료만 판매하지 않고, 다감각적 미적 경험을 제공한다”며 “모든 매장은 고객이 보고, 만지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보는 모든 것의 품질을 향상하도록 세심하게 설계됐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스타벅스와 관련된 모든 것은 훌륭한 커피 맛처럼 최고라는 인상을 사람들의 잠재의식에 심어야 한다는 설명이다.블룸버그는 지난해 10월 “맥도날드가 편리함의 시대, 포드가 대량생산의 시대의 상징이라면 스타벅스는 ‘미학의 시대’를 열었다”면서 “호텔, 쇼핑몰, 도서관, 심지어 교회까지 스타벅스를 모방하려 한다”고 전했다. 사람들의 미적 기준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는 의미로 보인다. 사실, 스타벅스는 직원 대우도 선진적이어서 ‘친노동자 회사’라는 평을 들어왔다. 스타벅스는 ‘오바마 케어’(건강보험개혁법)보다 25년 앞서서 직원 대상 건강보험을 만들었고, 시간제 근로자에게 주식 성과급도 나눠줬다. 2014년부터는 학위가 없는 직원에게 2년제 대학 등록금도 지원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미국 기업 책임자들이 의료 개혁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피하고 있을 때 슐츠는 이곳저곳에서 적극적으로 시스템 개선을 주장했다. 그는 ‘개인 십자군’에 가깝다”고 2006년 2월 전한 바 있다. 슐츠는 6월 포럼에서 노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스타벅스는 직원과 고객의 기대를 항상 뛰어넘는 회사”라면서 “그것이 스타벅스의 미래에 대한 우리의 비전”이라고 강조했다. 직원들의 기대치를 충족할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이다. 슐츠와 월드클래스 CEO 내러시먼은 재창조 계획으로 ‘파트너(바리스타)’들의 마음을 달랠 수 있을까. 직원도 고객만큼 회사에 만족하게 될까. 김성모 기자 mo@donga.com}2022-10-09 10:00
에펠탑 조명도 끈다, 겨울이 무서운 유럽[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푸틴의 에너지 무기, 유럽 전역에 포격유럽의 에너지 전쟁이 뜨거워지고 있다.러시아는 9월 5일(현지 시간) 유럽으로 가는 천연가스 공급라인을 무기한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설비 점검 등의 핑계로 가스 밸브를 잠갔다 열기를 반복하며 간을 보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대(對)러 제재를 해제할 때까지 노르드스트림1을 폐쇄할 것”이라며 본색을 드러냈다. “우리 가스 쓰고 싶으면, 제재를 풀어라”는 의미다.유럽연합(EU)에 따르면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 천연가스 수입의 40%를 러시아에 의존해왔는데, 이중 절반 이상이 노르드스트림1을 통했다.러시아가 에너지 공급을 조이는 사이 유럽 천연가스 도매가격은 지난해의 9배까지 치솟았다. 각국 정부가 세금을 인하하는 등 가격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공과금이 오르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유럽 가스 가격의 지표인 네덜란드 TTF는 1년간 550%로 껑충 뛰었고, 영국의 에너지 기관은 가정용 전기·가스 요금이 다음 달부터 연 3549파운드(약 563만 원)로 80% 인상될 것이라고 최근 밝혔다. 월 50만 원을 전기·가스 요금으로 내야 하는 상황. 독일의 에너지 가격도 지난해보다 2배 이상으로 뛰었다.전기요금 고지서에 놀란 유럽인들은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영국 동부 그림스비에 거주하는 필립 키틀리 씨는 “은행 계좌를 보고 전기요금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올여름 기록적 불볕더위에도 선풍기를 돌리지 않았다”고 로이터통신에 전했다.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회사에서 샤워하고 퇴근한다는 직장인들의 소식이 번지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영국에서는 돈이 부족한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버리고 있고, 폴란드인들은 겨울철 난방을 위해 쓰레기를 태우는 것을 고려 중”이라고 17일 보도했다.“장작은 새로운 금입니다” 겨울철을 앞두고, 최후의 수단인 ‘장작’에 대한 관심도 뜨거워지고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땔감용 장작 가격이 한 달 새 20% 올랐다. 아일랜드뿐만이 아니다. 독일에서는 구글에서 장작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 ‘brennholz’가 지난달 검색량이 치솟았다. 독일 가정은 절반가량이 천연가스로 난방을 하고, 장작 사용은 6% 미만에 불과했다. 그런데, 에너지 가격이 껑충 뛰면서 장작을 대안으로 고민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독일에선 목재 난로 등 관련 장비가 동나고 있다. 재고 장작이 모두 팔려, 사업자들이 폴란드에서 이를 수입해오고 있다. 트럭에서 통나무를 훔치거나, 나무 판매자인 척 사기를 치는 일도 생겼다. 장작은 단순히 나무만 베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땔감용으로 말리는 데에 대략 반년 이상이 필요하다. 워싱턴포스트는 “과거 냉전 시대 때 보험 역할을 했던 석탄과 장작 난로에서 독일인들이 먼지를 털고 있다”고 했다. 독일 브레멘에 사는 프란츠 루닝하케 씨는 “장작은 이 시대의 새로운 금”이라고 워싱턴포스트에 전했다.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로 천연가스 가격이 8월 26일 최고치에서 40% 이상 떨어졌지만, 유럽 각국은 난방 수요가 급증하는 겨울을 걱정하는 분위기다.그래서 각국 정부는 겨울 난방 대책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일단 최대한 아끼자는 전략이다. 독일은 겨울철 난방 온도를 19도로 제한하고, 사우나나 공공수영장 온도를 현재보다 5도 이상 낮추는 방안을 병행하기로 했다. 스페인도 공공기관과 쇼핑몰, 기차역, 영화관 등에서 난방 온도를 19도로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프랑스는 이달 말 에펠탑 등 주요 건축물의 조명을 평소보다 1시간 일찍 끄기로 했다. ‘사우나의 나라’ 핀란드는 사우나를 1주일에 한 번만 하자는 에너지 절약 캠페인을 펼친다. 이 캠페인은 1970년 오일쇼크 이후 52년 만에 등장했다.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14일 유럽의회 연설에서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우리는 제재를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앞으로 수개월간 쉽지 않을 것이다. 가계도, 기업도 곤란을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이야기다.100년 만에 고개 숙인 ‘핑크 코끼리’유럽 기업들은 에너지 공급 부족에 따른 가격 상승으로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다.가스를 대량으로 쓰는 회사는 직격탄을 맞았다. 157년 역사의 세계 최대 화학기업인 독일의 바스프가 생산 중단 위기에 처했다. 영국 가디언은 15일 “바스프가 가스 공급 부족으로 통합 생산 시스템(페어분트)이 연쇄적으로 멈출 수 있다”고 보도했다. 바스프는 치약과 기저귀, 비타민, 절연재 등 생필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화학물질을 생산한다.가디언에 따르면 독일 서부 라인란트팔츠주 루트비히스하펜에 본사를 둔 이 회사는 축구장 1400개에 달하는 10㎢ 규모를 자랑한다. 2850㎞에 달하는 길이의 파이프가 125개 생산시설을 그물처럼 연결하고 있다. 파이프라인들이 생산 공정에서 만들어지는 부산물을 원료로 여러 제품을 생산해 원자재 낭비를 최소화하는 것이 페어분트의 핵심 기술이다. 루트비히스하펜 공장의 연간 가스 사용량은 스위스 전체와 맞먹는다.다니엘 레헨베르거 바스프 대변인은 “우리가 최대로 필요한 양의 50% 이하로 가스를 계속 받으면 사업장 전체를 점진적으로 축소해야 한다”며 “바스프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지만 선택지가 없다”고 했다.천연가스를 직접 쓰지 않아도 타격을 입을 수 있다. ‘핑크 코끼리’가 상징인 벨기에 맥주, 델리리움 트레멘스의 양조 업체 ‘허이헤 브루어리’는 액화 탄산가스 가격이 13배나 급등해 100년여 만에 처음으로 공장을 닫을지 고민 중이다. 액화 탄산가스는 이산화탄소(CO2) 가스를 액화시킨 제품으로 맥주, 탄산음료 식품첨가제로 쓰인다.블룸버그는 “벨기에 양조장의 불행은 유럽 경제가 얼마나 서로 연결돼 있는지 보여주는 일련의 불행이 합쳐진 결과”라고 전했다.천연가스를 많이 쓰는 노르웨이 비료 회사 야라 인터내셔널이 네덜란드 공장에서 암모니아 생산을 중단하자, 원료를 공급받던 산업 가스 기업 닛폰가스가 한 방 얻어맞았다. 비료 생산의 부산물인 이산화탄소를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원재료 물량이 줄어든 닛폰가스는 생산 비용이 늘어나자 액화 탄산가스를 공급하던 허이헤 브루어리에 가격 인상을 요구했다. 닛폰가스는 1톤당 250유로(약 35만 원)였던 가격을 3350유로(약 467만 원)까지 올렸다.크리샨 모드갈 벨기에 양조업협회장은 “두 달 전만 해도 업계는 스위스 시계처럼 작동했다”며 도미노 현상을 당황스러워했다.세계를 샅샅이 뒤진 유럽사실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부터 천연가스 재고 부족 등 에너지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팬데믹(대유행) 이후 에너지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유럽은 러시아 가스 이외에 미국의 액화천연가스(LNG)를 추가로 구매해서 한숨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 전쟁이 터지자 조급해졌다. LNG는 천연가스가 영하 162도로 냉각되면서 생성되는 액체로, 천연가스 부피를 600배가량 압축해 배송한다. 냉각과 운반에 비용이 들어 그간 에너지 시장에서 10% 초반의 점유율을 그치는 등 인기가 많지는 않았다.유럽은 가스가 풍부한 미국이나 카타르에 다시 ‘SOS’를 쳤다. 벨기에는 올해 미국에서 지난해보다 658% 많은 LNG를 수입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리스 등도 전년 대비 200% 이상 수입량을 늘렸다. 독일은 노르웨이와 네덜란드에서 가스 구매를 확대했다. LNG 운반선들의 움직임을 두고, ‘LNG 함대’가 유럽으로 향한다는 말까지 나왔다.미 뉴욕타임스(NYT)는 7일 “유럽의 지도자들은 러시아를 대체하기 위해 알제리부터 카타르, 세네갈, 콩고, 캐나다 등 전 세계를 누볐다”고 했다.친환경 시대를 앞장서 온 독일 등은 체면을 구겼다. 급한 마음에 석탄에 손을 더 댔다.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독일의 총 전력 생산량(263.2kWh)의 31.4%(82.6kWh)가 석탄 화력 발전으로 생산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70.5kWh)보다 17.2% 증가한 것이다. 통계청은 특히 2분기(4~6월)에 가스 발전이 석탄으로 크게 전환됐다고 밝혔다. 2분기에 석탄 화력 발전량은 지난해보다 23.5% 늘어 총발전량의 31.3%를 차지했다.파이낸셜타임스(FT)는 “독일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그리스, 체코 등이 석탄 발전소의 생산량을 늘리거나 광산 운영을 허용했다”고 6일 전했다.석탄 이외에도 전기를 구하기 위해 총동원하는 모양새다. 독일과 프랑스는 전기와 가스를 나눠 쓰기로 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5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화상 회담 이후 “두 나라는 에너지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전기와 가스를 함께 나누어 쓰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프랑스는 독일에 가스를, 독일은 프랑스로 전기를 보내는 방식이다. 조만간 독일에 가스를 보내기 위한 준비도 완료될 것”이라고 밝혔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거의 ‘아나바다’ 수준이다.올해 연말까지 완전한 탈원전을 계획했던 독일은 남은 원전 3곳의 가동을 추가 연장하지는 않기로 했지만, 2023년 4월 중순까지 원전 2곳을 예비전력원으로 유지하기로 했다.유럽의 운명은 날씨에 달렸다 각국 정상들이 발에 땀이 나게 뛴 덕분에 유럽연합(EU)이 수입하는 가스 중 러시아산의 비중은 9%로 떨어진 상태다. 40%에서 한참을 줄였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EU의 천연가스 재고는 83.6%에 이른다. 애초 설정한 목표치 80%를 넘겼다. 유럽이 올해 겨울을 넘길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낙관할 때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먼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시점이 겨울이 끝나갈 무렵인 2월 24일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한겨울을 겪어보기 전에는 전력 수급 사정이 어찌 될지 모른다는 분석이다.무엇보다 내년에 가스 창고를 채울 때는 러시아에 전혀 기댈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 (정말 불가능해 보이지만) 서로 악수를 하며 전쟁이 당장 끝나더라도, 서방이 곧바로 제재를 풀어줄 가능성은 극히 낮다. 유럽은 올해 러시아가 밸브를 최종적으로 잠그기 전까지 반년 이상을 러시아에서 가스를 받아왔다. 내년에는 러시아에 기대지 않고 창고를 채워 나가야 한다.올해 뜻밖의 수혜도 있었다. 중국이다. 세계 최대의 LNG 수입국인 중국은 올해 8월까지 LNG 수입이 지난해 같은 기간의 20%로 줄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봉쇄가 영향을 미쳤다. 이코노미스트는 “중국의 줄어든 수입 물량은 영국의 연간 LNG 수입량과 같다”라며 “중국의 봉쇄는 에너지를 많이 쓰는 여행도 상당히 줄였다”고 15일 전했다. 중국의 봉쇄가 풀리거나 추워지면 수요가 늘 수 있다는 의미다.원자재 정보업체 케이플러의 로라 페이지는 “날씨가 예상외로 추워지면 중국이 LNG 시장에 복귀할 수 있다. 유럽에서 꼭 필요한 LNG를 뺏어갈 수 있다는 의미”라고 했다.유럽이 천연가스 부족에서 버티느냐는 겨울 날씨에 달려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중국뿐만 아니라, 유럽 내 수요도 증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글로벌 코모디티 인사이츠는 기온이 1도씩 올라갈수록 독일과 영국의 겨울철 가스 수요를 6% 감소시킬 수 있다고 봤다. 반대로, 예상외의 강추위가 들이닥치면 평소보다 가스 수요가 5% 이상 늘어날 수 있다.물론, 기온이 높다고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온도가 올라가면 가뭄이 심해질 수 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6일 “일부 유럽 지역이 500년 만에 최악의 가뭄을 겪고 있다”며 “비가 내리지 않아 수력 발전이 지난해보다 20% 줄었다”고 했다. 정말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독일은 어쩌다가 러시아의 ‘가스 인질’이 됐을까?가스 재고를 채운 유럽은 경제적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 중이다. 독일은 650억 달러(약 90조7000억 원)의 에너지 구호 조치를 최근 발표했고, 프랑스는 최악의 경우 에너지 배급제를 시행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영국도 1000억 파운드(약 158조2000억 원)를 에너지 위기 대응 예산으로 책정했다.전쟁이 확산하는 동안 유럽의 에너지 정책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그동안 무엇을 믿고 러시아에 이렇게까지 의존했느냐는 지적이다. 특히, 해외 언론들은 경제 규모가 큰 ‘유럽의 맏형’ 독일을 조준 사격했다. 독일의 천연가스 수요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20년 전 30%에서 전쟁 이전 55%까지 꾸준히 늘었다.이코노미스트는 7월 21일 ‘독일인들은 꿈속에서 살았다, 그들의 에너지 정책은 환상이었다’는 기사에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이 나라는 잠이 덜 깬 상태가 아니라 몽유병 상태에 빠져있었다”며 “지도자들은 국민에게 배출 가스를 전혀 내보내지 않는 영원한 번영(친환경) 같은 도취 적인 이야기를 덧붙였다”고 비꼬았다.독일이 처음 러시아에 에너지 공급을 기대게 된 데에는 가스보다 일자리에 있었다.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천연가스의 가치를 깨달은 소련은 1980년대 초반 서독 등 유럽에 파이프라인을 연결하는 아이디어를 낸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유럽을 소련의 에너지에 의존하게 만들고, 소련에 무기를 살 수 있는 돈을 안길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상황을 40년 전에 이미 꿰뚫어 본 듯하다.하지만 서독과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실업률이 1980년 5.9%에서 2년 동안 8.7%까지 오르면서 유럽은 프로젝트에 손을 내밀었다. NYT는 1982년 5월 30일 자 기사에서 “이 거래는 독일 대형 철강업체에 2500명의 일자리가 걸려 있다. 이탈리아의 산업용 펌프 제조업체는 ‘6000명의 직원에게 이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다”고 전했다. NYT는 “유럽인의 눈에 소련은 가스 가격을 올리기 위해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공급을 중단한 알제리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대상처럼 보였다”고 언급했다.● 트럼프 “독일이 포로로 잡혀있다”러시아의 파이프라인이 유럽에 거미줄을 촘촘하게 완성하는 동안 미국이 본격적으로 LNG 수출을 늘리면서 유럽도 공급망을 다변화하기는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은 2019년 동맹국에 LNG 추가 수출을 승인했을 때 “미국의 ‘자유의 분자(molecules of U.S. freedom)’를 공급했다”고 자랑했다. 러시아를 견제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하지만, 유럽의 러시아 의존도가 크게 떨어지진 않았다. 가격 때문이다. 미국 LNG 수출업체는 유럽에서 1mBTU(물 100만파운드 온도를 표준기압하에서 화씨 1도만큼 올릴 수 있는 열량)당 최소 6~7달러는 받아야 한다. 가스를 얼려서 옮긴 뒤 다시 기체로 만드는 비용 때문이다. 반면, 러시아는 1mBTU당 5달러에 공급할 수 있다. 특히, 미국 LNG는 카타르나 아프리카 국가 가스보다도 비싸다. 가스 추출 비용이 높고, 거리도 멀기 때문이다. 원자재 가격이 산업 경쟁력과 직결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유럽의 선택도 이해는 간다.결국, 유럽은 터미널 등 LNG 쓸 수 있는 설비를 대폭 늘리는 대신, 러시아의 공급에 기대는 편을 택했다. 러시아는 이를 잘 이용했다. 2018년 러시아가 기획한 노르드스트림2가 대표적인 사례다.이는 러시아와 독일을 연결하는 1230㎞ 길이 해저 가스관이다. 노르드스트림2가 완공되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우회해 독일 등 서유럽으로 더 많은 천연가스를 운송할 수 있다. 처음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부터 기존 설치된 가스관을 열었다 닫는 방식으로 우크라이나 등에 에너지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트럼프 전 대통령은 “노르드스트림2로 독일이 러시아에 포로로 잡혔다”고 비난했다. (이후 푸틴 러시아 대통령 앞에서는 ‘독일이 가스가 어디서 오는지 이해했다’며 달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의 대(對)유럽 수출관은 7개다. 우크라이나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소유즈’, ‘우렌고이 포마리 우즈고로드’와 소련 해체 이후 설치한 ‘야말 유럽’, ‘블루스트림’, ‘터키스트림’, ‘노르드스트림1·2’ 등이 있다. 자책골과 탈원전이코노미스트는 7월말 과거 독일의 또 다른 치명적인 실수를 지적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독일은 2000년 초반에 연 200억 ㎥의 천연가스를 생산하고 있었다. 연 수요의 25%에 해당하는 큰 규모다. 지질학자들은 독일이 연 800억 ㎥까지 생산할 수 있는 가스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생산량은 5억~6억 ㎥까지 추락했다.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천연가스 추출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가스 추출에 쓰이는 ‘수압 파쇄(프래킹)’ 기법은 강한 수압으로 바위층을 뚫어 셰일석유나 천연가스를 시추하는 공법이다. 물이나 모레, 첨가제 등의 혼합물을 고압으로 땅에 밀어 넣어 암석에 형성된 가스에 접근하도록 만든다.이 같은 채굴 방식이 환경오염을 초래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2017년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프래킹을 금지하는 법안까지 통과시켰다. 당시 독일 정부 자문기구 전 책임자는 “프래킹이 안전하다는 설명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천연가스 포기는) 독일의 가장 큰 자책골”이라며 “독일인들은 동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비꼬았다.당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국제회의에서 “프래킹은 부엌 수도꼭지에서 검은 덩어리를 뿜어낸다”며 열심히 거들기도 했다.‘환경 염려증’은 원전도 감염시켰다. 독일은 핵산업 수출시장에서 나름 잘나갔다. 1950년대 미국에서 들여온 기술을 발전시켜 아르헨티나와 네덜란드, 스위스 등으로 되팔았다.그러다가 1973년 프라이부르크 인근 빌(Wyhl) 지역에 원전을 짓기로 했는데, 건설 예정지를 포도 재배 농민들이 점거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방사선 피폭보다 냉각탑에서 나오는 기후 변화를 걱정했다. 이 시위는 건설 허가 취소판결로 이어지면서 핵발전소 반대운동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1998년 사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 녹색당이 원전 폐쇄를 연정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독일은 원전을 단계적으로 폐쇄하게 됐다.2010년 이공계 출신(양자역학 전공한 물리학 박사)의 메르켈 총리는 원전 17기의 수명을 연장하려고 했지만, 1년 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결국, 준공된 지 30년 넘은 노후 원전 8기는 폐쇄하고, 나머지 9기는 올해 폐쇄하기로 결정했다.2010년 독일의 한 콘퍼런스에서도 푸틴이 등장한다. 그는 “원자력도 싫고 러시아 가스도 싫으면 장작을 때려는 것이냐. 정작, 장작 땔 나무도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사 와야 할 것”이라고 조롱했다.푸틴과 에너지 신(新)냉전러시아는 매일 대량의 천연가스를 불태워버리고 있다. BBC방송은 지난달 26일 러시아 북서부 LNG 발전소에서 가스 연소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화염이 잇달아 목격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가스 연소 규모가 하루 1000만 달러(약 140억 원)어치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위성 데이터 전문가인 제시카 매카트니 미 마이애미대 부교수는 BBC에 “LNG 발전소에서 이렇게 많은 화염이 나오는 것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러시아는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중국과의 거래를 확대하려고 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에서 에너지 문제를 담당하는 알렉산드르 노박 부총리는 15일 “조만간 중국과 시베리아의 힘-2 가스관에 대한 최종 합의에 도달할 것”이라며 “러시아에 중국 시장은 아주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와 중국 동북 지역을 연결하는 ‘시베리아의 힘’ 가스관으로 중국에 가스를 보내고 있었는데,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설치해 수출량을 늘리겠다는 심산이다.파이낸셜타임스는 14일 “20년 동안 중국의 에너지 정책 중 확고한 원칙 중 하나는 공급망 다각화였다”며 “베이징은 현재 유럽의 고통이 (에너지를) 싸게 살 기회와 과잉 의존에 대한 경고로 볼 것”이라고 꼬집었다. NYT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13일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를 유럽의 에너지 황제에서 중국의 에너지 식민지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대부분이 러시아와 중국의 동상이몽에 배팅하고 있다.어찌 됐든, 당장은 유럽이 걱정이다. 블룸버그는 “노르드스트림1을 폐쇄한 러시아의 결정은 500억 유로(약 69조7000억 원)의 가스 비용을 유럽에 증가시킬 것이다. 이는 가격 상승에 따른 4600억 유로(약 641조 원)와 별개”라고 했다. 유럽의 에너지 문제가 올해 유럽의 국내총생산(GDP)에 2.2%가량의 타격을 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경기침체 가능성이 커지는 가운데, 각국 정부의 대책들 역시 재정에 큰 부담이 될 것이다. 유럽은 현기증 나는 이 에너지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을까. 겨울이 오기도 전부터 유럽이 떨고 있다.김성모 기자 mo@donga.com}2022-09-25 10:00
사우디 왕자는 왜 사막에 스키장을 지을까[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밀레니얼 왕자의 690조 프로젝트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 타북주. 초고층건물 2개가 200m를 사이에 두고 사막과 산악 지형 170㎞(서울~대전 거리보다 길다)를 가로지른다. 높이 500m의 이 두 건물 사이에는 숲이 우거지고 물이 흐른다. 에어택시와 고속철도가 집과 학교, 직장을 5분 안에 잇는다. 허공에는 로봇 가사도우미가 날아다닌다. 각종 시설에 설치된 인공지능(AI)은 사람들의 건강을 수시로 체크한다. 거대한 인공 달이 도시를 밝히고, 그린수소 등 녹색 전력이 1년 내내 도시의 기온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사우디가 최근 발표한 최첨단 도시 ‘더 라인’(The Line)의 조감도다. 이 직선 모양의 도시는 외벽이 거울로 만들어져 ‘미러 라인’으로도 불린다. 어마어마하게 긴 두 개의 건축물이 곧 도시다. 사우디는 2030년 도시가 완성되면 900만 명의 사람들이 이곳에 거주할 것으로 전망했다. 사막 위에 지어진 궁극의 고밀도 도시가 공상과학 판타지를 넘나든다.더 라인은 밀레니얼 세대이자 사우디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37)의 저탄소 스마트도시 프로젝트 ‘네옴’(NEOM)의 일부다. 5년 전, 사우디는 석유 중심의 경제 구조를 벗어나기 위해 국가 장기 프로젝트 ‘사우디 비전2030’을 발표했는데, 5000억 달러(약 691조 원)를 투자해 친환경 미래 도시 네옴(직선 도시 ‘라인’, 바다 위 산업단지 ‘옥사곤’, 초대형 관광단지 ‘트로제나’)을 건설하는 것이 핵심이다. 네옴시티는 홍해 인근 사막 2만6500㎢ 부지에 조성된다. 벨기에 국가 전체, 서울의 44배 규모다. 네옴은 그리스어로 새롭다는 뜻의 ‘네오’에 아랍어로 미래를 의미하는 ‘무스타크발’의 첫 글자 ‘M’을 합친 단어다.네옴의 예상 사업비는 5000억 달러이지만, 이를 완성하는 데 1조 달러(약 1380조원)가 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사우디 정부는 오일머니를 우선 투입하고, 나머지는 해외에서 투자를 받을 계획이다. 한국의 2022년 예산(607조 원)을 뛰어넘는 초대형 인프라 사업 기회에 국내 주요 기업들도 물밑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입찰이 비공개로 진행되고 있지만 삼성, 현대차그룹 등이 수주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 통학 수영 레인과 사막 위의 스키 리조트네옴시티의 구상을 보면 로봇 이야기는 시시하다. 벨기에 크기의 광활한 사막에 무한한 상상력이 채워지고 있다. 미래학자부터 세계적인 건축가, 실리콘밸리 개발자, 심지어 할리우드 프로덕션 디자이너까지 프로젝트를 위해 다양한 전문가가 모였다. 일부 전문가들은 도시의 자체적인 법률과 규정을 구상 중이다. 건강과 스포츠 부문만 연구하는 파트도 있다. 얀 패터슨 네옴 스포츠 부문 책임자가 언급한 네옴시티의 어린이 등굣길 구상이 인상 깊다. 아침에 일어나면 집에 있는 기기들이 아이의 신진대사를 검사한다. 냉장고는 전날 밤 당분을 너무 많이 먹은 것을 고려해 견과류바 대신 죽을 권한다. 이 학생은 버스 정류장 대신에 수영 레인을 찾을 수 있다. 방수 배낭을 메고, 학교까지 평영으로 이동한다. 패터슨 책임자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된다면 기대수명을 10년 늘릴 수 있다”고 했다. 네옴은 실제로 내부에 운하를 조성해 수중 통근 옵션을 만드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사막 위 스키리조트도 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지역의 산꼭대기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제설 장비만 있으면 스키 시즌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무함마드 왕세자(MBS)도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다. 사우디아라비아체육회는 지난달 6일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에 “2029년 제9회 동계아시안게임을 네옴에서 개최하겠다”는 공식신청서를 제출했다. 사우디가 대회 개최지로 선정되면 1986년 일본에서 첫 대회가 열린 이후 중동 및 아랍 국가로는 처음이다. 반면, 미국의 호텔 사업가인 앤드류 워스는 “산악 지형에 인공 호수와 빌딩 등이 포함된 리조트를 지으려면 지형의 많은 부분을 폭파해야 한다”고 미 블룸버그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네옴 스키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5개월 만에 퇴사한 그는 “건설비조차 예측하기 어려웠다”며 일할 당시의 어려움을 떠올렸다. 그는 “우리는 지질학도 모르는데, 절벽 옆에 건물을 매달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북한의 류경호텔 또는 최고의 주거 지역 해외 반응은 시큰둥하다.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어렵고, 예상보다 많은 천문학적 비용이 들 것이라는 지적이다. 미 워싱턴포스트는 “호화로운 초고층 빌딩에 푸른 정원이 펼쳐진 신도시의 멋진 경치를 떠올려보자. 이 지상낙원엔 대기오염 대신, 녹지와 편의시설 초고속 대중교통이 있다. 다만 외딴 사막에 있고 홍보용 영상으로만 존재해 실제로 갈 수가 없다”고 비꼬았다. 건물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다.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443m)보다 높은 건물을 170㎞ 길이로 만들어야 한다. 서울부터 대전까지 이어지는 건물을 짓는다고 상상해보자.건물을 짓는 데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CNN은 “세계적으로 대규모 건설 사업이 도중에 멈춘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며 “북한의 류경호텔(330m)만 하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빈 건물이 되고 말았다”고 전했다. 일단, 짓던 것부터 잘 지으라는 비판도 나온다. 사우디는 2013년에 1007m(168층) 높이의 세계 최고층 건축물 ‘제다 킹덤타워’를 착공했지만, 2018년 70층 정도를 올린 상태에서 사업성 악화로 공사를 중단했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으로 인부들까지 떠나면서 언제 완성될지 가늠조차 안 되고 있다. 물론, 킹덤타워는 완성돼도 크게 부각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숙청한 사촌, 알왈리드 빈탈랄 왕자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자신감이 넘친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네옴과 평범한 도시의 차이는 구식 노키아 폰과 매끈한 스마트폰의 차이만큼이나 극명하다”며 “(네옴이) 지구에서 가장 살기 좋은 지역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네옴의 구상은 비현실적”이라는 일부 지적에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하는데, 왜 일반 도시를 복사해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다.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역시 수십 년 전만 해도 대부분이 빈 땅의 모래뿐이었다. ● 애플보다 잠시 비쌌던 기업, ‘아람코’무함마드 왕세자의 자신감 뒤에는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인 ‘아람코’가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기름값이 치솟으면서 아람코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벌어들였다. 왕세자의 거친 꿈을 실현할 만큼. 2020년 초 코로나19로 배럴당 20달러대까지 떨어졌던 국제유가는 올해 3월 140달러에 육박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아람코의 올해 2분기(4~6월) 순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0% 늘어난 484억 달러(66조8900억 원)였다. 2019년 말 기업공개(IPO) 이후 분기별 최대 실적이다. 상반기 순이익은 880억 달러(약 121조6200억 원)에 달했다. 5월에는 애플을 제치고 잠시 시가총액 기준 세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아람코는 경영학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훌륭하게 돈을 벌었다. 아람코 측은 “높은 원유 가격(P)과 많은 판매량(Q), 높은 정제 마진(제품 가격에서 원가를 제외한 수익)”을 배경으로 꼽았다. 아람코는 기름을 아주 저렴하게 퍼 올린다. 아람코의 원유 추출 비용은 배럴당 2.80달러 정도로 알려져 있다. 국제 석유 회사들 평균치의 3분의 1 수준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에 따르면 사우디의 원유 매장량은 2020년 기준 약 2980억 배럴로 세계 매장량의 17.2%를 차지한다. 1위는 18%의 베네수엘라(3040억 배럴)다. 2019년 이전까지만 해도 사우디의 미스터리한 원유매장량을 두고 외신들의 비판이 많았다. 사우디는 아람코의 경영권을 미국에서 넘겨받은 1980년대부터 원유 매장량을 줄곧 2600억 배럴이라고 밝혀왔다. 30년간 원유를 내다 팔았는데 매장량이 줄지 않은 것. 아람코가 2019년 IPO 때 외부 평가 기관의 실사를 받으면서 그간 주장한 것보다 사우디의 원유 매장량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말 그대로 ‘기름진 땅’ 위에 사우디가 있다.이 같은 놀라운 규모 덕분에 사우디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해왔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로 전 세계의 경제를 움직이는 것처럼 사우디는 원유 생산으로 전 세계 석유중앙은행의 역할을 하고 있다. 네옴으로 흐르는 사우디의 오일머니다만, 도덕 수업은 빼먹은 것 같다. 사우디는 전쟁으로 수출 제재를 받는 러시아산 원유를 싸게 수입해와 비싸게 팔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WSJ은 “러시아 원유가 사우디와 UAE로 이동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라며 “러시아산 원유는 사우디에서 소비되거나, 시장 가격으로 다시 수출됐다”고 했다. 이 같은 사우디의 뒷거래는 미국과의 미묘한 외교 신경전 때문일 수도 있다. 이 부분은 잠시 후에 설명한다. 어찌 됐든 아람코가 열심히 번 돈은 네옴으로 간다. 사우디 정부는 아람코 지분 94%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4%는 사우디 왕가 출자로 결성된 국부펀드가 가지고 있다. 사우디 정부는 “기름으로 번 돈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며 “중앙은행에 예치한 돈은 외환보유고를 보충하거나 국부펀드에 채울 계획”이라고 했다. 네옴을 가동할 돈으로 쓰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아람코는 5월 국부펀드에서 빌린 80억 달러(약 11조600억 원)를 조기 상환하기도 했다. WSJ은 아람코의 수익 급증이 사우디 경제를 부양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원유 부문의 급성장으로 2분기 사우디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1.8%를 기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사우디의 GDP 성장률을 7.6%로 예상한다. 10%를 점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인플레이션 문제도 남 일이다. 사우디 최대 민간 투자회사인 자드와 인베스트먼트에 따르면 사우디의 6월 물가상승률은 전년 대비 2.3% 상승했다. 미국의 물가상승률(7월 8.5%)에 비하면 상당히 안정적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사우디 경제는 2011년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 중”이라고 했다. “나는 나만의 피라미드를 짓고 싶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왜 엄청난 돈을 들여서 새로운 도시를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역설적으로 사우디에 부(富)를 안겨준 ‘기름’ 때문이다. 국가 경제에서 기름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 사우디 경제의 최대 리스크다. 사우디에서 석유 산업은 정부 수입의 70%와 수출의 80%를 차지한다. ‘사우디 경제=오일머니’인 셈이다. 참고로, 기후가 건조한 사우디는 물도 기름으로 만든다. 사우디는 기름으로 시설(해수담수화 플랜트)을 가동해 바닷물을 끌어다가 염분 등을 제거하고, 이를 생활·공업용수로 쓰고 있다. 1978년 사우디에 첫 해수 담수화 플랜트를 건설한 회사가 두산에너빌리티(옛 두산중공업)다. 문제는 사우디의 엄청난 원유 매장량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신재생에너지 확산은 셰일가스와의 경쟁 이상으로 사우디 경제를 옥죌 가능성이 크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2014년과 코로나19 당시 국제 유가 폭락을 지켜보면서 원유에 의존한 통치의 위험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사우디는 그동안 오일머니로 국민에게 무료 교육과 의료 서비스, 소득 보장 프로그램 같은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하면서 절대군주제를 구축했다. 여기서 나오는 수익이 줄어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장 왕정 체제부터 흔들리지 않을까. 무함마드 왕세자는 WSJ과 인터뷰에서 네옴을 언급하며 “나는 나만의 피라미드를 짓고 싶다”고 했다. 엄청난 투자가 들어간 네옴이 실패하면 정말 피라미드의 나라 이집트의 길을 걸을지 모른다. 이집트에서는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사우디에서 젊은 층의 인구 비중이 늘어나는 것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현재 3600만 명의 사우디 인구 중 70%가 30세 미만이다. 인구 규모와 나이 비중을 고려하면 석유 산업만으로는 국민을 만족시키기 어렵다는 분석이 많다. IMF는 “사우디에서 최대 100만 개의 일자리가 필요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원유 산업은 자본은 필요로 하지만,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지는 않는다”고 했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다른 산업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관광이나 제조업, 정보기술(IT) 등으로 산업의 무게 중심을 바꾸려는 이유다. 산업 전환 못지않게 사회적 체질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코노미스트는 “풍부한 석유가 쏟아질 것으로 기대하며 자란 사회의 게으름은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며 “기름 중독을 끝내기 위한 왕국의 노력은 무관심의 벽에 부딪히곤 했다”고 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는 마치 아버지가 40세 아들에게 나가서 취직할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비꼰 사우디 평론가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 미묘한 국제 정세의 변화 국제 정세의 변화도 사우디가 프로젝트를 본격화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사우디와 미국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나라는 예전부터 친한 편이었다. 1932년 미국이 신생국 사우디의 압둘아지즈 국왕을 만나 관계를 텄다. 1938년 사우디에서 첫 번째로 유정을 시추한 것도 미국인들이었다. 아람코는 ‘아라비안 아메리칸 오일 컴퍼니’(Arabian American Oil Company)의 약자다. 사우디가 이후 결제 대금을 달러로만 받으면서 미국의 달러 패권을 강화해줬고, 어깨동무할 정도로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됐다.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 때 두 나라는 더욱더 가깝게 지냈다. 중동 이슬람 양대 종파의 맹주격인 사우디(수니파)와 이란(시아파) 사이에서 사우디의 영향력 확대에 힘을 실어줬다. 이란의 ‘시아벨트’ 팽창을 견제하고, ‘수니벨트’ 파트너로 사우디와 이스라엘을 중재했다. 이 중재가 2020년 9월 ‘아브라함 협정’이다. 미국의 주선으로 이스라엘은 UAE·바레인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사우디가 협정 당사자는 아니지만, UAE 역시 수니파 무슬림 국가라는 점에서 사우디의 영향력 확대, 이란에 대한 견제로 보는 시각이 많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바레인이 협정 당사국이 된 것에는 사우디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 바레인의 대외 정책에는 사우디의 영향이 많이 작용한다”고 했다. 사우디와 이란의 관계는 라이벌과 앙숙 사이에 있다. 종파도 다르고, 정치 체제도 다르다. 이란은 혁명 세력이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집권했다. 절대군주제인 사우디가 제일 겪기 싫은 상황이 중동 나라에서 펼쳐진 것. 이집트 카이로 특파원 출신의 이세형 동아일보 기자는 책 ‘중동 라이벌리즘’에서 “이란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신정 공화정을 세웠다. ‘우리도 왕정을 무너뜨리자’는 여론이 사우디에서 생길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기자는 “사우디로서는 이란의 영향력을 최대한 억제하는 게 관건”이라며 “(사우디는) 아랍 국가의 ‘적’으로 여겨져 온 이스라엘과도 협력하기로 했다”고 했다. 이어 “이스라엘의 ‘아이언돔’(방어용 요격 시스템) 도입에 사우디가 관심이 크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덧붙였다. 아람코 본사가 이란과 가까운 동부에 있는 것도 사우디에는 부담이다.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은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공들인 이란 핵 협상을 파기하고, 가셈 솔레이미니 전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드론으로 폭격해 사살했다. 모두, 사우디가 반길만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오바마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냈던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해 초 취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무함마드 왕세자의 반인권적 행태를 비판하면서 “국제적으로 ‘왕따’시키겠다”고 공언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2018년 10월 튀르키예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서 살해된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암살 배후로 지목받고 있다. 여기에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 숙적인 이란과 핵 협상 복원에 나서면서 사우디의 심기를 건드렸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사우디는 이란이 핵을 가지는 것보다 미국이 이란을 협상 대상으로 인정해 이란이 정상 국가의 지위에 오르는 것을 더 싫어할 것”이라며 “이란 사람들이 곳곳에 돌아다니고, 지도자들이 워싱턴·런던에 가고. 이란이라는 나라가 중동에서 바이러스처럼 돌아다니는 것을 보기 힘들어할 것”이라고 했다. 사우디는 미국이 가장 싫어할 만한 아람코의 위안화 결제 카드로 맞섰다. WSJ은 “사우디가 중국과의 석유 거래에 달러 대신 위안화로 받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3월 전했다. 석유는 달러로만 거래한다는 ‘페트로 달러’를 깰 수 있다는 사우디의 경고로 풀이된다. 그러다가 인플레이션에 발목이 잡힌 바이든 대통령이 무릎을 꿇었다. 7월 빈 살만 왕세자를 찾아가 원유 증산을 요청했다. 어색한 ‘주먹 인사’도 주고받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증산 약속을 받지 못한 채 사우디를 찾았다) 사우디로서는 각국 주요 투자자들에게 네옴을 다시 알릴 외교적 숨통이 트인 셈이다. 하마터면 네옴을 잊을 뻔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밀레니얼무함마드 왕세자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사우디에는 가장 신성한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가 있다. 사우디는 코란을 바탕으로 한 이슬람법 ‘샤리아’를 국가 기본법으로 따르고 있다. 보수적인 수니파의 ‘와하비즘’(건국이념, 이슬람 교리)이 수십 년 동안 왕국을 정의했다. 2017년 서열 1위에 오른 무함마드 왕세자는 이와 반대되는 길을 걷고 있다. 먼저, 이슬람법 준수를 일상에서 감시하는 5000여 명의 종교경찰을 거리에서 사라지게 했다. 종교경찰은 머리카락이 이슬람 여성 의복 규율을 뚫고 나온 여성의 발목과 반바지를 입은 남성의 다리를 때리곤 했다. 이 같은 일이 사라진 것이다. 대중 공연과 영화 상영도 재개했다. 2019년에는 첫 관광비자를 발급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방탄소년단(BTS) 공연을 열어 변화를 실감케 했다. 이외에 여성의 운전과 축구장 입장을 허용했고, 공공장소에서 남녀 혼석을 가능하게 했다. 태형을 없애고, 사형제 폐지 논의도 시작했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세금도 걷었다. 보조금 제도를 없앤 것도 큰 변화다. 이 같은 변화는 젊은 층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아버지가 왕에 오른 2016년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스티브 잡스(애플 창업주)와 마크 저커버그(메타 CEO)가 롤 모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때 이미 사우디를 바꿔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정반대의 시각도 있다. 반인권적 행보에 대한 비판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2017년 11월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왕실 구성원들과 정·관계 인사 500여 명을 부정부패 등의 혐의로 수도 리야드의 리츠칼튼호텔에 연금했다. 이들은 거액을 헌납하고, 충성 서약을 한 뒤에야 풀려났다. 사우디의 서민들은 엘리트의 몰락을 기뻐했지만, 일련의 과정은 사법적 절차가 갖춰진 국가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갱스터 영화에 가까워 보인다. 이후 ‘미스터 에브리싱’이라는 별명을 얻은 무함마드 왕세자는 2020년 3월에는 사촌 형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 전 왕세자(당시 나이·61)와 삼촌인 아흐메드 빈 압둘아지즈 왕자(78)를 체포했다. 고령으로 건강이 악화한 아버지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85)의 유고 시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세력들에 대한 사실상의 숙청 작업이었다.그에 대한 최악의 평가는 언론인 카슈끄지 사건에서 나온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따르면 사우디 국적으로 미 워싱턴포스트에 사우디 왕실 비판 칼럼을 게재해왔던 카슈끄지는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사우디 영사관에서 십여 명의 사우디 정보요원들에 의해 잔악하게 고문, 살해됐다. 시신은 토막 처리되었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CIA는 무함마드 왕세자가 이를 지시했다고 지목했으나, 당사자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친(親)트럼프' 성향으로 알려진 린지 그레이엄 군사위 의원은 “이건 스모킹 건이 아닌 스모킹 톱(smoking saw)”이라고 평했다. 스모킹 건은 총을 발사한 뒤 나오는 연기를 빗대 결정적 증거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카슈끄지가 토막 살해당한 것을 풍자해 스모킹 톱이라고 표현한 것이다.이코노미스트는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로 날아간 이후 무함마드 왕세자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밀레니얼 중 한 명”이라고 칭했다. 낙타가 거니는 텅 빈 고속도로네옴을 무함마드 왕세자의 권력 유지 도구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인남식 교수는 “왕을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왕세자가 왕실 관계자들과 엘리트 계층을 견제하고 권력을 유지하려면 민심을 사로잡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앞으로도 계몽주의자, 개방주의자 코스프레를 할 가능성이 큰데, 네옴시티는 이 연장선상에서 나온 정책”이라고 평했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왕의 자리에 오르면, 지금까지와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인 교수는 “‘절대 반지’를 쥐고 나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되면 어떤 캐릭터가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기술적으로 봤을 때 2030년에 네옴이 완성될 것 같지는 않지만, 일부만 돼도 모델하우스처럼 꾸며놓고 팡파르를 울릴 것”이라고 했다. 물론, 무함마드 왕세자가 서구의 문화를 수용하더라도, 서구의 민주주의적 가치까지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그럼에도 사우디의 앞길에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사우디 왕위는 지금껏 형제 상속으로 승계돼, 하나같이 고령이 돼서야 왕에 올랐다. 현 국왕이 아들 무함마드를 왕세자로 책봉하며 형제 상속 관행을 처음 깼다. 개혁 군주를 천명한 무함마드 왕세자는 향후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네옴시티는 치적 쌓기일까, 국가의 미래를 위한 담대한 비전일까. 아직은 무함마드 왕세자에게도 엄청난 도전으로 보인다. 블룸버그는 “25명 이상의 전·현직 직원과의 인터뷰와 2700쪽에 달하는 내부 문서에 따르면 프로젝트는 많은 차질로 시달리고 있다”고 7월 전했다. 이 같은 비판이 나오자 아흐메드 알-카티브 사우디 관광 장관은 “귀로만 듣지 말고 직접 와서 보라”고 했다. 그러자, 니콜라스 펠햄 이코노미스트 기자가 직접 네옴에 갔다. 그는 7월 28일 기사에서 “그곳에서 나는 텅 빈 고속도로를 거니는 낙타와 불도저로 무너진 길들, 외국인 근로자로 가득 찬 호텔 레스토랑을 발견했다”고 했다. 펠햄은 “한 퇴역 공군이 600달러(약 83만 원)를 내고 도시를 둘러보지 않겠냐고 했다. 그는 나를 ‘I ♥ Neom’이라고 적힌 조각상에 데려갔다. 조금 더 가니 ‘드림 시티’의 끝을 알리는 아스팔트가 길게 뻗어있었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는 쓸쓸한 모래사막만 펼쳐져 있었다”는 짧은 소감을 남겼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2022-09-10 08:00
애플은 왜 접는 폰을 안 만들까?[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이 폰은 다른 브랜드의 고객을 끌어올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4세대 폴더블폰 ‘갤럭시 Z폴드4’와 ‘갤럭시 Z플립4’를 26일 내놓았다. 수첩처럼 가로로 접는 폴드4의 무게는 263g으로, 폴드3보다 8g 가량 몸무게가 가벼워졌다. 크기는 줄고 화면은 커졌다. 전작보다 세로는 3.1㎜ 짧아졌고, 두께는 0.2㎜ 얇아졌다. 휴대전화의 경첩 역할을 하는 힌지의 크기가 줄었다. 화면 테두리(베젤)는 전작보다 좌우 3㎜씩 작게 만들어, 폰을 펼쳤을 때 더 넓은 화면을 볼 수 있게 했다. 기능도 보완했다. 폴드4는 5000만 화소의 후면 카메라를 탑재했다.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AP칩은 퀄컴의 스냅드래곤 8플러스 1세대가 들어갔다. 화장품 콤팩트 파우더 형태의 플립4는 전작보다 가로 길이가 0.3㎜ 줄었다. 손에 착 감기는 그립감을 높였다. 그동안 약점으로 꼽혔던 배터리도 개선했다. Z플립4는 배터리 용량을 기존 3300mAh(밀리암페어)에서 3700mAh로 늘렸다. 대신에, 무게가 전작 대비 4g 늘었다. 기존보다 65% 더 밝은 이미지센서도 장착했다. 폴드4와 플립4 모두 접히는 부분의 화면 주름이 기존 제품보다 덜했다. 삼성은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신제품의 가격 인상을 최소화했다. 올해를 폴더블폰 대중화의 원년으로 삼겠다는 의지다. 노태문 삼성전자 MX사업부장(사장)은 “갤럭시 폴더블 시리즈는 삼성의 혁신 철학을 구현한 제품”이라며 “삼성은 업계의 리더로 폴더블을 전 세계 수백만 명이 사용하는 카테고리로 성장시켰다”고 자평했다. 삼성은 폴더블폰이 경쟁사의 고객(아마도, 아이폰 이용자)을 뺏어오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3세대 폴더블폰에서 가능성을 본 듯하다. 노 사장은 “지난해 삼성 폴더블폰 출하량에서 신규 고객이 두 자릿수 비중을 차지했다”며 “이는 갤럭시 사용자가 다른 갤럭시 기기(폴더블폰)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스위칭 한다는 긍정적인 신호”라고 밝혔다. 갤럭시S 시리즈 이용자가 폴드·플립으로 넘어가는 카니발라이제이션(신제품이 기존 주력 제품 시장을 잠식하는 현상)보다 타 브랜드 제품의 이용자를 끌어오는 효과가 더 크다는 의미다. 아이폰이나 애플이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하진 않았다. ● 스카이·아이스크림·롤리팝…폴더폰 시대의 귀환? 이전까지 스마트폰은 매년 혁신을 거듭해왔지만, 감동까지 안기진 못했다. 10여 년 간 조금 더 넓어진 화면, 약간 빨라진 속도, 늘어난 카메라 화소 수로 사람들의 흥미를 유도했다. 카메라 100배 줌이 달까지 끌어당길 때 잠깐 신기하기는 했다. 그러다가 삼성이 2019년 ‘바’가 아닌 접는 형태의 스마트폰을 선보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영화에서만 보던 화면을 구부릴 수 있는(플렉서블) 디스플레이 패널이 스마트폰에 적용된 것이다. 하드웨어에서의 굉장히 큰 변화다. 디스플레이 패널을 접을 수 있다면 성능과 휴대성(크기)이 시소게임을 하지 않아도 된다. 과거 스카이 2G폰, 모토로라 레이저와 같은 휴대성을 갖추면서 넓은 화면까지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기술은 태블릿, 노트북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모토로라, 화웨이, 오포 등도 폴더블폰을 선보이면서 시장은 커지는 분위기다. 글로벌 폴더블폰 출하량은 올해 1600만 대로 예측된다. 업계는 2026년 6000만 대까지 커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DSCC에 따르면 올해 1분기(1~3월) 기준 삼성전자의 글로벌 폴더블폰 시장 점유율은 74%. 삼성전자는 올해 안에 폴더블폰으로만 1000만대 이상을 판매해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계획이다. 폴더블폰 시장을 이끌고 있는 삼성은 사용자경험(UX)를 끌어올리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플립4는 화면을 구부린 상태로 촬영할 수 있는 플렉스 모드를 고도화했고, 폴드4에는 PC처럼 화면 하단에 여러 개의 아이콘을 배치했다. 동시에 여러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멀티태스킹 기능(태스크바)을 도입한 것이다. 폴더블폰만의 차별화 요소다. ● 애플 ‘아이폰14’에 자신감, 생산 주문 안 줄여 애플은 아이폰 새 버전 출시를 앞두고 있다. 폴더블폰과의 경쟁이 예상된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애플은 다음달 7일 행사에서 아이폰14를 선보이고 16일부터 판매를 시작할 예정이다. 2016년 이후 연내 가장 빠른 출시다. 지난해에는 9월 14일 아이폰13을 발표하고, 24일 제품을 시장에 내놨다. 일주일 앞당기는 것이 뭐 특별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회사의 장부를 관리하는 사람과 주주들에게는 큰 의미를 지닌다. 블룸버그는 “9월까지 진행되는 회계연도에 아이폰14 판매가 한 주 더 늘어나는 것”이라며 “아이폰14의 판매는 회사의 지난해 매출을 경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업계는 애플이 이번 행사에서 아이폰14와 함께 새 노트북 맥, 태블릿PC 아이패드, 3개의 애플워치 모델을 발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아이폰14에는 5.4인치 화면의 미니 모델이 사라지고, 6.7인치 모델이 추가된다. 아이폰14프로는 화면 상단의 ‘M자형 테두리’(노치) 대신 원형의 ‘펀치홀’ 디자인이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카메라는 1200만 화소 초광각, 4800만 화소 광각이 탑재될 전망이다. 애플이 새 애플워치에 체온 센서, 여성 건강 기능을 추가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최근 애플은 업그레이드된 운영체제(iOS 16)를 선보인 바 있다. 잠금화면 편집 및 다중 잠금화면 배치, 실시간 번역, 메시지 편집 등 다양한 기능이 추가됐다. 애플은 경기 침체 우려에도 흥행을 자신하는 듯하다. 애플은 아이폰14의 조립 업체들에게 지난해와 동일한 9000만 대의 생산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의 올해 아이폰 생산량은 지난해와 비슷한 2억2000만 개 수준으로 전망된다. 블룸버그 분석가들은 올해 초 2억4000만 개로 예상했지만, 전쟁과 공급망 문제 등으로 전망치를 소폭 낮췄다. ● PC의 길 걷기 시작한 스마트폰? 애플이 한 해 2억 대가 넘는 아이폰을 판매하고 있지만, 성장의 한계에 대한 지적도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말 ‘애플은 이미 모든 사람에게 아이폰을 판매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글에서 “전성기에는 아이폰이 애플 매출의 3분의 2를 차지했지만, 최근 분기에는 기여도가 절반에 못 미쳤다”며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애플은 스마트폰 뒤를 이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장치를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교체 주기도 길어지고 있다. 컴퓨터 산업과 비슷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코노미스트는 “개인용 컴퓨터 판매는 가정마다 충분히 공급된 2011년 정점을 찍었고, 교체 주기가 길어졌다. 휴대전화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글로벌 분석기업 CCS 인사이트(CCS Insight)는 유럽에서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기간이 2010년 26개월에서 최근 39개월까지 늘었다고 추정했다. 새 버전도 기존 틀에서 외형상 큰 변화를 취하지 않았던 애플이 삼성처럼 화면을 접고 또 다른 고객을 찾아 나설 일은 없을까. 총 1920억 달러(약 258조 원)의 현금을 보유한 애플은 지난해 연구개발(R&D)에만 220억 달러(약 29조5000억 원)를 쏟아 부었다. 돈이 없어서 못 하는 것은 절대 아닐 듯하다. 사실, 애플도 폴더블 관련 특허를 계속 내놓고 있긴 하다. 애플은 미 특허청에 화면을 구부릴 수 있는 폴더블 디스플레이에 대한 특허를 2018년 1월 제출했다. 이후에도 폴더블폰의 접이식 장치, 힌지 곡면부문의 디스플레이, 상소문처럼 화면을 말아 올리는 방식 등 다양한 특허들을 등록했다. 그래서 애플이 폴더블폰을 곧 내놓을 것이라는 전망이 잊을 만하면 나왔다. 그런데, 예상 출시일이 점점 뒤로 밀리고 있다. 최근 애플 제품 분석가로 잘 알려진 궈밍치 대만 TF인터내셔널증권 연구원은 애플의 폴더블폰 시장 진입 시점을 2023년에서 2025년으로 수정했다. 폴더블 맥북부터 공개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 “폰을 왜 접어야 하지?” 애플은 과연 폴더블폰을 내놓을까. 제품을 선보일 계획이라면 왜 이렇게 늦어지는 것일까. 매끄러운 사용자 경험, 높은 완성도 등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심어 놓은 애플의 철학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정보기술(IT) 리뷰 전문 매체인 씨넷(CNET)은 13일 ‘왜 애플의 폴더블폰은 아직 존재하지 않을까’라는 글에서 “기본적으로 스마트폰을 노트북처럼 ‘L’자 모양으로 접으면 소프트웨어가 앱을 화면 상단으로 이동시키고 하단에는 다른 기능을 제공한다. 멋지고 여러 가능성이 많을 것 같지만 올해까지는 기능이 제한적이었다”고 했다. 애플이 스마트폰을 접어야만 하는 이유(고객의 놀라운 이용 경험)를 아직 찾지 못했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삼성이 플렉스 모드 같은 기능을 강화하고 있지만, 폴더블폰에 최적화된 소프트웨어를 더 만들어야 한다는 분석이 많다. 스마트폰 화면을 접을 수 있으면 휴대전화 크기가 작아진다는 이점은 있다. 스티브 잡스가 작은 스마트폰을 원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IT전문매체 더버지가 입수한 이메일, 문서 등에 따르면 잡스가 2010년 10월 보낸 ‘아이폰 나노 계획’이라는 제목의 이메일에는 ‘비용 목표’, ‘조니가 렌더링 모델을 제시할 것’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조니는 조니 아이브 애플 전 최고디자인책임자(CDO)를 뜻한다. 잡스가 언급한 ‘아이폰 나노’의 의미가 확실하지는 않다. 당시 애플은 이미 아이폰3GS보다 작은 아이폰4를 판매하고 있었다. 나노의 의미를 두고 ‘아이폰4보다 30% 더 작은 아이폰’, ‘저가형 아이폰 모델’ 등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애플에서 전 세계에 파는 아이폰 수가 워낙 많다보니 생산 문제를 우려할 수도 있다. 씨넷은 “연 수억 대의 아이폰을 파는 애플이 폴더블 아이폰을 만든다면 충분히 많은 양을 같은 품질로 생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며 “2014년 아이폰6플러스처럼 하드웨어가 급격하게 변경될 때 빠르게 매진되기 때문에 출시 시점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했다.● “신을 실망시키지 마세요” 애플에 녹아있는 완벽주의가 폴더블폰 개발의 발목을 잡았을 수도 있다. 잡스의 완벽에 대한 집착은 널리 알려져 있다. 여러 일화가 있다. 아이맥 G5를 개발하던 시절 잡스는 컴퓨터 케이스에 나사가 하나도 보이지 않도록 디자인하라고 지시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나사 수를 줄였지만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다. 디자이너 중 한 명은 제품 아래 부분에 단 하나의 나사를 달아 모형을 잡스에게 보였는데, 그는 곧바로 해고됐다. 2007년 아이폰 출시를 한 달 앞두고 시제품을 써본 잡스가 개발자들에게 화를 낸 일화도 유명하다. 청바지 주머니에서 열쇠와 함께 꺼낸 아이폰의 플라스틱 화면에 흠집이 선명하게 난 것. 잡스는 “나는 흠집 나는 제품은 안 판다”며 6주 안에 완벽하게 유리 화면으로 설계를 바꿀 것을 지시했다. 공장들이 뒤집어졌다. 결국 그의 뜻대로 유리 화면으로 제품이 바뀌었다. 단순함으로 궁극의 정교함을 표현해내는 잡스에게 과연 폴더블폰의 화면 주름이 용납됐을까. 지난달 애플과 결별한 전설적 디자이너 조니 아이브조차 설득하지 못했을 듯하다. 뉴욕타임스(NYT)의 기술 담당 기자인 트립 미클은 자신의 책 ‘애프터 스티브’에서 “디자이너들은 제품을 어떻게 선보일지 결정했고, 디자인 뿐 아니라 제품 기능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냈다”며 “직원들은 ‘신을 실망시키지 말라’는 한마디로 디자이너들의 힘을 정의했다”고 했다. 아이브를 포함한 애플의 디자이너들이 신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표현이 흥미롭다. 팀 쿡 현 애플 최고경영자(CEO)의 안정지향형 경영스타일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잡스의 역할을 물려받은 쿡은 회사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 생태계 확장에 집중했다. 잡스처럼 세상이 놀랄만한 무엇을 내놓기보다는 기존 제품의 성능이나 편의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이어왔다. 애플이 지난해 출시한 아이폰13의 처리속도는 쿡이 CEO를 맡은 직후 발표한 아이폰4S에 비해 50배나 빠르다. 쿡이 10여 년 전 CEO에 오르고 애플의 시가총액은 2조 달러(약 2690조 원) 이상 증가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8월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가 24년 쌓은 가치를, 버크셔해서웨이를 45년 운영한 워런 버핏의 업적을 넘어섰다”며 “쿡은 1997년 잡스가 애플로 복귀했을 때처럼 차기작을 쫓거나 조직을 재조정하는 대신 지속적인 개선을 추진했다”고 했다. PC제조사 컴팩에서 공급망을 관리했던 쿡은 1998년 애플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같은 일을 했는데, 꼼꼼하고 세밀하게 일하는 타입이라는 평이 많다. NYT에 따르면 어느 날 한 직원이 재고 회전과 관련해 쿡에게 비용을 줄일 계획을 제시했다. 이 장면을 전 애플 임원인 조 오설리반(전 임원)이 목격했다. 그는 NYT에 “쿡은 정말 경이적인 수준으로 디테일하게 파고들었다. 나는 어른이 우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94조 규모의 블랙박스 물론, 애플은 큰 변화를 가져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정말 돈을 많이, 잘 번다. 지난해 애플은 글로벌 반도체 부족 사태에도 3783억 달러(약 507조2000억 원)의 연 매출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1169억 달러(약 156조7000억 원)였다. 쿡이 애플을 맡은 2011년(1080억 달러)보다 연 매출이 3배 이상으로 늘었다. 쿡은 애플을 수익성이 가장 높은 회사로 이끌었다. 지난해 애플의 영업이익률은 연 30.9%에 달했다. 이코노미스트는 “현재 전 세계에 10억 대 이상의 아이폰이 사용되고 있다”며 “지구인 7명 당 1대 수준”이라고 했다. 쿡은 아이폰을 외계인이 만든 듯한 제품으로 바꿔놓진 못했지만, 지구인들을 애플 생태계 안에서 똘똘 뭉치게 만들었다. 애플의 애플리케이션 플랫폼인 앱스토어는 많은 앱 제조사들을 끌어 모았고, 이는 더 많은 사용자들과 개발자들을 끌어들였다. 이 끊임없는 선순환 구조는 고객들이 200만 개(2020년 기준)의 앱을 고를 수 있게 만들었다. 애플의 앱스토어 매출은 2012년 75억 달러(약 10조700억 원)에서 지난해 684억 달러(91조8300억 원)로 늘었다. 지난해 매출은 앱스토어에 애플뮤직, 애플TV플러스, 애플케어, 클라우드 등 10개 부분이 합쳐진 수치이지만, 앱스토어의 매출은 꾸준히 상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애플은 앱스토어의 별도 매출을 2015년부터 공개하지 않았다. 글로벌 리서치 회사인 아레트리서치의 선임 기술 분석가 리차드 크레이머는 이를 “10개의 서로 다른 비즈니스의 700억 달러(약 93조9500억 원)짜리 블랙박스”이라고 평했다. 블룸버그는 최근 애플의 앱스토어 이익이 둔화되고 있다고 분석했지만, 애플은 아무튼 매년 다양한 분야에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두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애플은 구글을 아이폰의 기본 검색 엔진으로 지정하는 대가로 연 80억~120억 달러(10조7400억~16조1100억 원)를 청구하고 있다”며 “이는 2020년 애플 순이익의 14~21%에 해당하는 수치”라고 했다. ● 보청기 에어팟, 치매 체크하는 아이폰 아이폰보다 매출 비중은 작지만 애플워치, 에어팟 같은 주변기기들의 역할도 상당하다. 지난해 애플워치, 에어팟 등 애플의 기타 사업 매출은 108억5000만 달러(약 14조5700억 원)로 전년 동기 대비 25% 증가했다. 이코노미스트는 “2020년에 팔린 에어팟들은 1억 명의 귀에 꽂혔고, 애플워치는 3400만 명의 손목에 채워졌다”며 “이는 다른 모든 고급 이어버드(무선 이어폰)와 모든 스위스 시계를 합친 것보다 많은 수치”라고 평했다. 스마트폰에서 디지털 생태계와 웨어러블 기기로 사업을 꾸준히 확장한 결과다. 애플은 아이폰과 에어팟, 애플워치 등의 디지털 기기를 건강 체크 장치로 활용하는 방안을 꾸준히 연구 중이다. 지난해 10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애플은 에어팟을 건강 장치로 만드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현재 알려진 것은 에어팟의 청력 향상과 체온 측정 기능이다. 에어팟을 이어폰 겸 보청기로 만들겠다는 것. 체온을 점검하는 것은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다. 애플워치 신제품에는 체온 측정 기능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WSJ은 “약 28만 명의 미국인이 경미한 청력 손실로 고통 받고 있지만 보청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5%에 불과하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착용하는 보청기 역할을 하려면 배터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 등도 해결해야 한다. 이외에 에어팟에 움직임 감지 기술을 도입해 자세를 교정하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애플은 또 미 캘리포니아대, 글로벌 제약사 바이오젠과 아이폰으로 인지기능 저하를 발견해내는 기술을 연구 중이다. 듀크대와는 아이폰의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 대상의 초점을 어떻게 맞추는지 보고) 어린 아이들이 자폐증상을 탐지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있다. 현 아이폰 운영 체제인 iOS 15에는 보행 안정도(보행 비대칭, 걸음 길이 및 보행 속도 등)를 평가하는 기능이 이미 도입돼 있다. 애플은 이를 일종의 낙상 방지 기능으로 보고 있다. WSJ은 “이용자가 걸어 다닐 때나 아이폰을 엉덩이(주머니)에 휴대하고 움직일 때 보행 안정도가 낮으면 알림을 받게 된다”며 “그렇다고 해서 넘어질 위험이 임박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1년 내에 낙상 위험에 대한 조언을 해준다”고 했다. ● PC-스마트폰-? 애플의 비즈니스 방식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속도 개선, 새로운 기능 도입 등 고객들을 묶어두기 위한 노력들이 진정한 혁신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다. WSJ은 “애플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생태계는 훌륭하지만, 회사의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은 혁신을 방해한다”고 했다. 애플의 디지털 세계에 갇힌 고객은 비용을 더 지불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도 덧붙였다. 애플도 세상을 바꾸는 ‘한 방’을 준비하고 있기는 하다. 대표적인 것이 자율주행 전기차와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등을 기반으로 한 메타버스다. 애플의 전기차는 신비월드 13화(애플이 만든 자동차 과연 나올까)에서 상세하게 소개한 바 있다. 현실화 단계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이보다는 디지털과 현실을 실시간으로 잇는 AR·VR 기기의 출시가 더 빠를 듯하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애플은 올해 5월 이사회에서 새로운 혼합현실(MR) 헤드셋을 선보였다. 애플은 2011년 인공지능(AI) 비서 ‘시리’가 시장에 나오기 수 주 전에도 이사회에서 시제품을 보여주고 검토한 바 있다. 애플 이사회는 쿡과 사외이사 8명으로 이뤄져 있다. 사실상 개발이 마무리돼 출시가 임박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MR은 현실 세계에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을 덧씌워 실시간으로 양 쪽을 상호작용하게 만드는 기술을 뜻한다. VR, AR 기능을 합친 애플의 제품은 초고해상도 화면과 사용자의 눈동자 움직임이나 손동작을 추적하는 기능이 포함될 것으로 전해졌다. 애플은 헤드셋용 아이폰 앱도 출시할 것으로 보인다. ● 메타와 애플의 메타버스 철학 대결 구글, 메타(페이스북) 같은 미국의 ‘IT 공룡’들도 가상현실 기기를 차세대 기술 플랫폼으로 꼽고 있다.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하드웨어 개발까지 나선 이유다. 메타는 현재 VR 기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오큘러스퀘스트2를 판매하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사명까지 바꾸며 메타버스에 사활을 건 이 회사의 CEO는 최근 대놓고 애플에 견제구를 날렸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는 지난달 초 직원들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애플과 우리는 메타버스 구축을 위해 심오한 철학적 경쟁을 하고 있다”고 했다. 메타는 메타버스가 특정 회사에 종속되기보다 인터넷처럼 개방되거나, 적어도 구글 운영체제처럼 유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커버그가 자사의 기기들을 중심으로 디지털 생태계를 구축한 애플을 에둘러 비판한 것이다. 애플이 MR 기기를 선보인 이후 메타버스 시대가 애플의 생태계 확장으로 이어질까 우려하는 듯하다. 메타는 최근 마이크로소프트(MS), 에픽게임스, 엔비디아 등과 메타버스 표준 포럼까지 결성했다. 블룸버그는 애플이 MR 기기를 올 연말이나 내년에 출시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전 예측은 2019년 공개, 2020년 출시였다. 또 미뤄질 수도 있다. 애플의 헤드셋은 스마트폰처럼 세상을 확 바꿔놓을 수 있을까. 스마트폰은 과연 PC처럼 백오피스로 밀려나게 될까. 궁금한 점이 많지만 제품이 나올 때까지는 답을 들을 수 없을 듯하다. 애플은 향후 내놓을 제품에 대해 먼저 언급하는 법이 없다. 수많은 애플 관련 해외 기사마다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코멘트가 있었다. “애플 대변인은 논평을 거부했다.”김성모 기자 mo@donga.com}2022-08-28 08:00
지금 미국이 경기침체인지 아무도 모른다[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다시 불붙은 미국 ‘경기침체’ 논란 미국 경제가 알쏭달쏭하다. 최근 며칠 동안 국내총생산(GDP), 고용, 물가 등 주요 경제 지표들이 공개됐지만, 금융 시장과 경제 전반에 안개가 자욱하다. 미국이 경기침체에 진입했다는 분석이 쏟아진 상황에서 미국 고용이 호조를 보이면서 경기 전망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경기침체’와 ‘완전한 고용’이 동반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발(發) 금리 인상이 경기를 억눌렀다.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41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은 소비자물가를 낮추기 위해 ‘분노의 질주’를 펼치고 있다. 두 달 연속 기준금리를 0.75%포인트나 올렸다. 하반기에 금리를 더 인상하겠다고도 했다. 금리가 올라가면서 경기는 급속도로 식었다. 미 상무부는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2분기 GDP 증가율이 ―0.9%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1분기(―1.6%)에 이어 2분기마저 GDP가 후퇴하면서 미국 경제가 ‘기술적 경기 침체’에 진입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온 지표들이 경제학자들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미국 노동통계국은 지난달 비농업부문 일자리가 52만8000개 늘었다고 5일 발표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전문가 전망치(25만8000개)의 2배 이상이었으며, 전월 수치(37만2000개)도 큰 폭으로 웃돌았다. 실업률 역시 3.5%로, 사실상 완전고용에 가까웠다. 경기를 비틀게 만든 인플레이션도 돌아섰다. 노동통계국은 10일 지난달 미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년 동월 대비 8.5% 상승했다고 밝혔다. 전월 9.1%보다 낮은 수치다. 통상 2개 분기 연속 GDP가 역성장하면 경기침체로 불렀지만, 이번에는 이를 부정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실업률이 이렇게 낮은데 무슨 경기침체냐”는 것이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경기 침체 국면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고, 경제학 바이블인 ‘맨큐 경제학’의 저자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실직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침체에 빠졌다고 한다면 나는 매우 놀랄 것”이라고 했다. 물가 오름세가 꺾였다는 점도 하나의 반박 근거로 꼽히고 있다. 물가가 정점을 찍은 만큼 연준이 금리 인상 속도를 낮춰 경기를 되살리지 않겠느냐는 주장이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지난달 27일 기자회견에서 “미국 경기가 둔화될 수 있지만 침체에 빠지진 않을 것”이라며 전문가들의 경기침체 의견을 반박했다. 그러자 한 기자가 “당신이 생각하는 경기침체의 정의가 무엇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파월 의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우리는 경기침체의 정의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경기침체인지를 정하는 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 경기침체란 무엇인가 미국 경기침체의 공식 판정은 경제학자 연구 모임인 ‘전미경제연구소’(NBER)에서 한다. NBER에 속한 경제학 교수 8명이 ‘경기순환위원회’(BCDC)를 열고 경기침체 여부를 결정하는데 민간기구라 회의가 언제 어디서 열리는지, 공표를 언제 할지 등을 공개할 의무가 없다. 논란을 일으킨 것은 이들이 정한 추상적인 경기침체의 정의다. NBER은 경기침체를 ‘경제 활동의 현저한 감소가 경제 전반에 확산되고 몇 달간 지속할 때’로 규정하고 있다. 경제 활동이 얼마나 감소해야 현저한 것인지, 몇 달 지속돼야 하는지 등이 정해진 바가 없다. 그렇다보니 최근에는 ‘위키피디아’에서 경기침체의 정의를 두고 싸움까지 붙었다. 이용자들이 자신이 찾은 정보로 기존 내용을 계속 수정해 버린 것이다. 위키피디아는 참여형 온라인 백과사전으로 이용자들이 서로 내용을 고칠 수 있다. 논란이 커지자 위키피디아 측은 이달 3일까지 경기침체 내용을 수정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경기침체를 선언하는 시기도 문제다. 그동안 NBER은 경기침체가 시작되고 5개월에서 1년이 지난 뒤에야 경기침체 시작을 공식선언했다. 각종 통계를 확인하는데 시간이 걸려서다. 전 세계 공장이 문을 닫은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때도 경기침체에 들어서고 4개월이 지나서야 경기침체를 발표했다. WSJ은 “경기침체가 왔다고 해도 몇 달 동안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모를 것”이라고 지난달 30일 보도했다. 특히, 이번에는 경기침체 결정을 내리기가 더욱 어려울 것 같다. 실업률이 낮은 상황에서 경기가 침체되는 일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총 12번의 경기침체가 있었는데, 이 기간 실업률은 모두 6%를 넘어섰다. 인플레이션이 이처럼 높은 상황에서 실업률이 낮게 나오는 것도 드문 일이다. 물가가 높을 때는 공격적인 금리 인상 때문에 경기가 가라앉고, 실업률이 늘어난다. 연구소도 현재의 논란이 당황스러운 모양새다. 1978년 NBER 창립 멤버이자 현재도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로버트 홀 스탠퍼드대 교수는 지난달 26일 “경기 침체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란이 된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뉴욕타임스(NYT)에 밝혔다. ● 선언자들이 보는 지표들 NBER 측은 미국이 1, 2분기 GDP가 마이너스를 기록하자 “우리는 GDP로만 판단하지 않는다. 생산과 고용과 소득 등 여러 수치를 전반적으로 본다”고 했다. 그렇다면 NBER은 구체적으로 어떤 통계를 보고 있을까. 블룸버그가 NBER이 경기침체를 결정하기 위해 확인하는 월별 지표 6가지를 2일 소개했다. 개인소득과 고용 및 비(非)농업 급여, 개인소비지출, 제조 및 무역 판매, 가사 고용, 산업생산지수 등의 올해 6월 수치다. 6월 한 달 동안 미국의 개인소득은 주춤했다. 0.3% 감소했다. 고용 분야는 ‘역대급’인 상황. 블룸버그 기사가 나오고 발표된 7월 고용 수치까지 포함하면 미국은 올해 320만 개가 넘는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코로나19 사태로 잃었던 일자리 숫자를 벌써 회복했다. 블룸버그는 “급여 증가율은 둔화됐지만 긍정적인 편”이라고 언급했다. 개인소비지출도 괜찮은 편이다. 올해 상반기 중 한 달을 제외하고는 계속 증가했다. 6월에는 전월 대비 0.1% 상승했다. 소비자 지출은 미국 경제 성장에서 70%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하다. 미국을 ‘소비의 나라’로 부르는 이유다. 제조와 무역 분야는 다소 부진했다. 블룸버그는 “공급망 손상과 소비자 지출 둔화에 따른 주문 감소, 달러 강세에 따른 수출 가격 상승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가사도우미, 정원사 같은 가사 고용은 1분기에는 꾸준히 상승했지만 2분기에는 4월과 6월에 감소했다. 산업생산지수는 연초 몇 달 간 우상향을 보이다가, 최근에는 그래프가 평평해졌다. 6월에는 약간 감소했다. 모두 인플레이션을 반영한 지표다. 수치만 놓고 보면 좋고 나쁨이 반반이었지만, 그래프가 전반적으로 평평해지거나, 꺾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경제학자들이 전망을 어둡게 보는 이유다. ● 자동차 판매와 경기침체 전조 현상 미국의 올해 1분기 GDP 수치(―1.6%)가 부정확하다는 주장도 있었다. 국내총생산(GDP)은 한 국가 내에서 생산된 상품과 서비스의 합계다. 이론적으로는 국가 내에서 발생한 소득의 총합인 국내총소득(GDI)과 동일해야 한다. 일단 생산을 하면 누구에게든 소득(분배 측면)으로 잡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분기 미국의 GDI는 GDP와는 반대로 1.8% 증가했다. 보라안 아루오바 미 메릴랜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는 미국 경제가 1분기에 전혀 위축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며 “생산(GDP)이 소득 데이터(GDI)에 가깝게 수정될 것이라 믿는다”고 NYT에 전했다. 제임스 불라드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도 “두 숫자는 최근 경제 상황에 대한 상반된 관점을 제공한다”며 “GDP는 경기침체를 나타내고 GDI는 경제 성장을 나타낸다. GDI는 노동 시장과 더 일치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경제가 성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언급했다. 실제 GDI에는 GDP에 교역 조건에 따른 변화와 무역손실을 고려한다. 통계 조사 방식도 달라 두 수치가 다르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 교역 조건에 있어서 달러 강세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경제학자들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경제를 읽는 것이 어려워졌다고 털어놓는다. 캐런 다이넌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는 여전히 이상한 시기에 있기 때문에 경제를 읽는 것이 평소보다 어렵다”고 했다. 그는 자동차 판매를 예로 들었다. 자동차 판매는 경기를 판단할 때 쓰이는 신뢰할만한 신호 중 하나다. 소비자들이 직장이 잃을 것을 걱정할 때 가장 먼저 구매를 미루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공급망 문제가 생기면서 데이터를 해석하기 어려워졌다. 다이넌 교수는 “향후 몇 달 안에 차가 많이 팔린다면 소비자신뢰지수의 회복을 의미할까, 아니면 단순히 (공급망 개선으로) 차량 구입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할까”라고 NYT에 말했다. 자동차 판매가 늘어도 소비자 심리가 좋아져서인지, 아니면 차량 구입이 꼭 필요했는데 공급망 문제로 못 샀던 사람들이 한 번에 몰린 것인지 확실치 않다는 뜻이다. 미국 금융 시장에서는 이미 경기침체 전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년 만기 국채 금리와 10년 만기 국채 금리가 역전되더니, 2000년 이후 최대치로 벌어졌다. 보통 채권은 만기가 길수록 인플레이션이나 상환 위험 때문에 금리가 높다. 시장에 불안 심리가 팽배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쉽게 설명해 친구한테 100만 원을 빌려준다고 치자. 5년 빌려줄 때보다 한 달 빌려줄 때가 마음이 더 편할 것이다. 기간이 짧으면 이자도 적게 받을 것이다. 그런데 친구가 하는 사업이 위태로워 보여서 한 달도 못 버틸 것 같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자를 더 많이 요구하지 않을까. 짧은 기간에 금리가 가파르게 오르면 장기 채권을 가진 사람에게 기회손실이 발생해 채권 가격이 떨어지는 것도 있다. 손해를 보고서라도 중간에 팔겠다는 사람이 늘어 가격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금리가 오르면 보통 채권 가격은 떨어진다. 또, 채권 만기가 길수록 수익률 변동에 따른 가격 변동폭도 커진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따르면 과거 미국의 13차례 경기 침체 중 10차례가 금리 역전 이후 찾아왔다. 소비자 심리도 급랭한 상태다. 6월 미국 미시간대 소비자심리지수는 50.2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오일쇼크 후폭풍이 상당했던 1980년 5월(51.7)보다도 낮았다. 100을 기준점으로 이보다 높으면 향후 소비 심리가 강하고, 낮으면 약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코로나19보다 무서운 비관론 바이러스 이는 당연한 수순이다. 연준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빠르게 올렸다. 공급망 병목과 전쟁이라는 공급 측면을 어찌할 수 없으니, 수요를 억제하는 방법을 택했다. 물건값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사람들의 소비 심리를 위축되도록 만든 것이다. 대출이 있는 사람은 이자를 더 내야하니 쓸 돈도 줄어들었다. 인플레이션이 7월 고점을 찍고 소폭 내려왔지만, 하산의 시작인지 숫자가 구름 위를 떠다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름값은 꽤 떨어졌지만, 계약 기간이 긴 주거비(렌트비) 등이 쉽게 빠지지 않아 물가가 천천히 떨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많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경기를 훼손하더라도 금리 인상의 기조를 바꿔선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은 경기침체에 대한 논란이 치열하지만, 사람들의 심리가 한쪽으로 기울면 어떻게 될까. 기업은 투자와 고용을 미룰 것이고, 사람들은 지갑을 열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대출 원금을 상환해야 한다는 은행 전화를 받게 될 수도 있다. 팽창하던 경제가 수축한다. 이코노미스트는 ‘경기침체는 돈도 돈이지만 기분(mood)의 문제다’라는 글에서 “금융 시장의 붕괴 없이, 재정적 혼란 없이 경기침체가 발생할 수 있다. 경기침체는 마치, 갑자기, 어느새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유가나 통화정책이 방아쇠가 될 수는 있지만, 결국 사람들의 심리에 따라 경기침체가 결정될 수 있다는 뜻이다. 경기는 통상 하강할 때 속도가 붙는다. 공포 심리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주식하고 똑같다. 이코노미스트는 “파국적인 금융 위기의 깊숙한 곳에서는 워런 버핏을 제외하고는 돈을 쓸 배짱과 수단이 있는 사람이 드물 것”이라고 했다. 경제는 숫자보다 심리의 영역에 가깝다. 현재의 상황이 유지될 것이라는 기대를 기반으로 수입과 지출이 거대한 사슬처럼 묶여 돌아간다. 월급날을 믿고 장도 보고 옷도 사고 한다는 의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 경제 성장(GDP)의 70%가 ‘소비’로 결정된다. 현재의 상황이 유지될 것이라는 믿음이 깨지고 비관론이 전염병처럼 퍼지면, 경제는 한 순간에 슬럼프에 빠질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신중한 소비자가 지출을 줄이고 고용과 투자가 감소하면 비관론의 초기 발생이 입증된다”며 “충격은 거대한 사슬의 연결 고리를 약화시키고, 감정의 전환을 촉진한다”고 했다. ● 스트라이샌드 효과와 바나나에 대한 걱정 백악관까지 나서서 경기침체를 극구 부인하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다. 경기침체로 갈 상황이 아닌데(고용이 좋아서) 비관론 때문에 경기침체 늪에 빠질까봐 염려하는 것이다. 연준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Recession’(경기침체)이란 단어를 3월 4번, 5월 9번, 6월 6번, 7월 26번 언급했다. “경기침체까지는 안 갈 것”, “경기침체가 가더라도 덜컹거리는 수준의 ‘준 연착륙’(softish landing) 수준에 그칠 것”이라며 안심시켰다.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자세가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WSJ은 28일 “바이든 행정부 누구도 ‘스트라이샌드 효과’(Streisand effect)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경제적 위기에서 돌파구를 찾는 정부가 오히려 부정적 뉴스를 증폭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스트라이샌드 효과는 온라인상에서 어떤 정보를 숨기거나 삭제하려다가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돼 처음 기대와 반대로 정보의 확산을 가져오는 역효과를 의미한다. 경제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마저 정부의 언급 때마다 쏟아지는 뉴스에 노출돼 ‘지금이 경기침체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미국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이 생각난다. 제목만 들으면 코끼리부터 떠오른다. 프레임의 힘이다. 1978년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이 인플레이션과 싸울 때 코넬대의 경제학자 알프레드 칸이 태스크포스(TF)를 맡았다. 당시 칸은 “가격을 통제하지 못하면 깊고 깊은 불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는데, 칸과 보좌진들은 경기침체를 언급했다는 이유로 윗분들로부터 한소리를 들었다. 다시는 경기침체를 꺼내지 말라는 지시도 받았다. 칸은 기자들과의 다음 회의에서 재치를 발휘했다. “국가가 45년 만에 최악의 바나나(경기침체)를 가질 위험에 처해 있다”고 퍽퍽하게 말했다. WSJ은 지난달 28일 “백악관이 경제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유리한 설명을 마케팅 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어 실망스럽다”며 “칸의 유산을 고려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꼬집었다. ● 경기침체냐, 아니냐가 왜 중요한가 지금이 경기침체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일부 조짐들은 나타나고 있다. 먼저 고용에서 미묘한 분위기 변화가 감지된다. 주요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인력을 줄이고 있다. 5일 WSJ에 따르면 빅테크 기업인 오라클이 최근 수백 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주식거래 플랫폼 로빈후드는 업무 도구인 슬랙과 이메일로 직원 23%에게 해고 통보를 하겠다고 밝혔고, 마이크로소프트, 트위터, 쇼피파이 등도 인력을 줄이겠다고 언급한 상태다. IT 회사 이외에 미국 최대 고용주인 월마트 역시 최근 직원 일부를 줄였다. 지난달 고용(52만8000명) 중 레저 및 호스피탈리티 산업의 일자리가 9만6000명으로 가장 높았는데, 휴가철이 지나고 이 추세가 이어질지도 의문이다. 외신을 보면 현지 레스토랑, 호텔 등에서 아직까지 사람 구하기가 힘들다는 내용이 많기는 하다. 소비 동력도 떨어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6월 미국의 개인 저축률은 5.1%로 2007년 경기침체 수준까지 떨어졌고, 개인 신용카드 부채는 2007년 수준을 넘어섰다. 하반기에 금리가 더 오르면 가계 부담이 커질 것이 분명하다. 연준과 일부 전문가들이 얕은 경기침체를 예고하고 있지만, 경미한 경기침체도 경제에 상처를 준다는 점이 문제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실업률이 2%포인트 증가했을 때 약 300만 명의 미국인이 일자리를 잃는다. 바다 건너 일이라고 남의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블룸버그는 2일 “1975년, 1982년, 1991년, 2009년 글로벌 경기침체가 있었는데, 각각의 경우 미국의 경기침체가 앞서 있었다”고 전했다. 미국이 불황에 빠진 이후에는 항상 글로벌 경기침체가 뒤따랐다는 이야기다. ● 인플레이션은 나쁘지만, 실업률은 더 나쁘다 경기침체는 짧게 스쳐지나가더라도 긴 후유증을 안긴다. 한 연구에 따르면 경기침체 시기에 대학을 졸업한 학생은 경기가 좋을 때 사회생활을 시작한 학생보다 수년 동안 적은 수입을 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스웨스턴대와 캘리포니아대 연구진은 1976~2015년 미국 인구 조사 데이터를 활용해 경기침체 기간 미국에서 취업한 근로자가 사회생활 초기에 평균 대비 11% 임금을 덜 받는다는 점을 발견했다. 연구진은 “수익 감소는 10년 간 지속되며 1년 급여의 60% 가량의 누적 손실을 일으킨다”고 했다. 이 같은 영향은 고등학교 중퇴자나 비(非)백인 노동자에게 특히 컸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전 세계 사람들이 인플레이션으로 고통 받고 있지만, 직장 잃는 슬픔보단 덜할 수 있다. NYT는 경제분야 국제학술지 JMCB(Journal of Money, Credit and Banking)에 곧 게재될 논문을 지난달 20일 소개했다. 연구는 2005년부터 2019년까지 141개국 150만 명을 대상으로 한 갤럽 조사를 활용했다. 이에 따르면 사람들은 실업률이 1%포인트 증가했을 때, 인플레이션이 1%포인트 늘어났을 때보다 슬픔이나 육체적 고통을 호소할 가능성이 9~13배 더 높았다. 사람들은 실업률이 늘어나는 시기에 자신의 삶에 대해 낮게 평가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는 인플레이션이 늘어날 때의 반응보다 6배나 더 암울했다. NYT는 “응답자들은 자신의 답이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자신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데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편견이 작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 연구의 장점”이라고 평했다. 스탠포드대에서도 2003년 비슷한 연구가 발표된 바 있다. 논문은 실업률이 1%포인트 증가하면 인플레이션이 1%포인트 늘어나는 것보다 사람들이 5배 더 불행해진다고 밝혔다. 당장은 체감되지 않을 수 있다. 인플레이션은 모든 쇼핑객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실업률은 잘리기 전까진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웃이나 가족 또는 내가 직장을 잃게 된다면 가격표가 눈에나 들어올까. NYT는 20일 “인플레이션이 높을수록 나쁘다고 생각한다면 금리를 거세게 올리는 것이 합리적이다. 실업률이 높을수록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면 신중하게 움직이는 편이 나은 선택”이라고 전했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경기침체의 위험을 일정부분 감수해야 한다는 연준과 경제학자들의 의견은 과연 합리적일까. 혹시나 처방전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김성모 기자mo@donga.com}2022-08-14 08:00
모두가 간절하지만 험난한 해외여행을 떠나고 있다[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비싼 비행기표도 못 말린 ‘보복 여행’ 3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에게 여름은 여행을 의미했다. 7, 8월이 되면 공항은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2020년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으로 하늘길이 봉쇄되기 전까지 매년 그랬다. 올해 초부터 각국 정부가 입국 제한 조치들을 잇달아 완화했다. 마스크 착용과 감염 검사 요건 등을 해제했다. 미 정부는 지난달 12일 미국에 입국하는 여행객들이 비행기 탑승 전 코로나19 음성 테스트 결과를 제출해야 하는 규정을 없앴다. 높은 백신 접종률과 감염에 따른 면역 생성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 미국과 유럽에서는 해외여행자가 폭증했다. 미국 독립기념일 연휴(7월 1~4일)가 시작된 이달 1일 교통안전청(TSA)의 공항 검색대를 통과한 인원은 249만 명으로 올해 들어 최고치를 기록했다. 3년 전 같은 날인 218만 명을 넘어섰다. 2019년 연휴가 시작된 7월 4일 목요일(275만 명)과 비교해도 크게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동안 억눌렸던 ‘보복 여행’이 시작된 듯하다. 사실, 한두 달 전만 해도 다수의 여행 계획이 취소될 수 있다는 예측이 꽤 있었다.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 우려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6월 연간 소비자물가지수(CPI)가 9.1%를 기록하면서 5월(8.6%) 고점 기록을 넘어섰다. 유럽과 신흥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비행기표 값이 많이 올랐다. 6월 CPI에서 항공료는 전년 대비 34% 뛰었다. 강한 수요와 항공사 직원 부족 등에 따른 공급 차질, 항공유 가격 상승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는 한국 통계청 지표에서도 드러난다. 통계청의 지난달 소비자물가동향에 따르면 국제 항공료는 전년 동월 대비 21.4% 올랐다. 인천과 유럽 주요 도시(런던·파리 등)의 왕복 항공권 가격(직항 기준)은 140만~200만 원대에서 최근 180만~350만 원까지 올랐다. 각종 교통비와 외식 물가까지 안 오른 것이 없는 상황에서 쉽사리 해외여행을 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런데도 하늘을 날고자 하는 MZ세대(밀레니얼, Z세대)의 의지가 강렬했다. 미 차량 공유 업체 어베일이 최근 미국인 2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 따르면 Z세대 중 72%가 올해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고 답했다. 밀레니얼 세대도 68%나 됐다. X세대(60%), 60대 이상 베이비부머 세대(51%)와 차이를 보였다. Z세대 여행자 중 51%는 해외여행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휴가철이 오면서 계획을 실행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글로벌 신용카드사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스티브 스쿼리 최고경영자(CEO)는 22일 2분기(4~6월) 실적발표에서 “글로벌 여행과 엔터테인먼트에서의 강한 소비가 매출에 반영됐다. 특히 밀레니얼과 Z세대 카드 회원의 지출이 48% 증가했다”고 전했다. ● 험난한 출발과 좌초된 캐리어들 문제는 여행 업계가 여행객들의 마음만큼 준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근 한 달 동안 유럽의 주요 공항에서는 매일 수백 편의 항공편이 취소되거나 지연됐다. 영국 런던 히스로(히드로) 공항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히폴(스키폴) 공항에서는 탑승객들이 보안 검색대에서 최대 6시간을 기다렸다. 체크인을 기다리는 승객들이 터미널 밖 주차장까지 넘쳐흘렀다. 캐나다 토론토행 비행기가 취소된 것을 확인하러 히스로 공항을 찾은 엘리자 글래스 씨(28)는 “정보가 없어서 혼란스럽고, (비행편 취소로) 좌절한 사람들로 공항이 가득 찼다. 한 시간 동안 빙글빙글 돌다가 가방에 걸터앉아 펑펑 울었다”고 지난달 14일 뉴욕타임스(NYT)에 전했다. 항적 정보제공 사이트 ‘플라이트어웨어’에 따르면 이달 2, 3일 미국에서 2800편 이상의 항공편이 취소됐고, 2만644편이 지연됐다. 플라이트웨어는 5월 26일부터 이달 19일까지 주요 공항의 예정 항공편 지연 비율을 집계했다. 최악은 52.5%가 지연된 캐나다 토론토 피어슨 공항이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45.4%)과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공항(43.2%),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히폴 공항(41.5%)도 10대 중 4대 넘는 비행기가 제때 출발·도착을 하지 못했다. 런던 개트윅(41.1%)과 히스로(40.5%) 등 영국의 2개 공항도 상위권에 올랐다. 승무원도 하루하루가 악몽 같다. 한 지상직 승무원은 “20년 업무 동안 이렇게 힘든 적이 없었다”며 “많은 사람이 결혼식과 장례식, 크루즈 여행 등 중요한 일을 놓치며 우는 것을 봤다. 그 눈물은 정말, 거짓 없는 ‘진짜’였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NYT에 털어놨다. 비행기에 무사히 탑승했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캐리어가 못 탔을 수 있다. 최근 온라인에는 각국 공항에 방치돼 있는 수천 개의 수하물(캐리어) 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에어마겟돈’(에어포트+아마겟돈) 공항이 이처럼 혼란스러운 이유는 인력 부족 탓이다. 보안을 담당하는 공항 직원과 지상직·객실승무원, 조종사 등 모두 부족한 상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진행된 구조조정이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당장 지상직이 부족해 가방을 검색하거나 탑승권을 확인하는데 시간이 지체되고 있다. 객실승무원 부족은 항공편 취소까지 불러오고 있다. NYT는 “승무원은 안전 때문에 법적으로 한 번에 12~16시간의 업무 시간제한이 있다”며 “현재 상황에서는 백업 승무원이 많지 않아 항공편이 취소될 수 있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비행기를 조종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올리버와이먼은 올해 말까지 북미에서만 8000명 이상의 조종사가 부족할 것으로 전망했다. 스콧 커비 유나이티드항공 CEO는 “대부분의 항공사가 조종사 부족을 겪고 있어서 항공편을 얼마나 제공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면서 “최소 5년 동안 부족이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항공사들도 이 같은 상황을 예측 못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 항공사들은 올해 4월 전달보다 관련 인력을 5000명 이상 더 고용했다. 2019년 4월보다는 1만6000명을 늘렸다. 항공사들은 인력을 더 뽑고 싶었지만, 규정이 문제였다. CNN에 따르면 미국에서 항공 관련 직원을 고용하려면 최대 4개월의 신원 조회와 허가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조종사는 18개월 이상의 교육 과정도 필요하다. 말라키 블랙 미국 지역항공사연합 대표는 “항공기 조종사는 자격증 취득이 어려운 데다 훈련비용도 비싸 바로바로 구하기 어렵다”며 “들어오는 조종사보다 나가는 조종사가 더 많은 상황”이라고 전했다. 참다못한 영국 히스로 공항이 12일 출발 승객 수를 하루 10만 명으로 제한했다. 항공사에는 여름철 항공권 판매를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장시간 대기와 결항, 수하물 분실 등으로 대혼란을 겪는 ‘에어마겟돈’(에어포트+아마겟돈)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존 홀랜드 케이 히스로 공항 CEO는 “승객들이 안전한 여행을 하기 위해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며 “9월까지 승객 수 상한제를 도입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항공사들은 크게 반발했다. 14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에미레이트항공은 “하루 10만 명의 출발 승객 한도는 허공에서 뽑아낸 말도 안 되는 수치”라며 “요구를 거절한다”고 밝혔다. 항공편 운항을 예정대로 강행하겠다는 것이다. FT는 “주요 항공사와 공항이 운항 여부에 이견을 보이는 건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평했다.● 미국인들의 인플레이션으로부터의 휴식 운항편을 줄인 것은 히스로 공항만이 아니다. 스히폴 공항도 2019년 대비 승객 수를 약 16% 줄였고, 프랑크푸르트 공항 역시 피크 타임의 항공편을 시간당 104회에서 94회로 축소했다. 유럽 주요 공항 대부분이 난리다. 코로나19 사태 이전보다 여행객들이 유럽에 더 몰렸을 가능성이 크다. 대다수 국가가 해외 입국자의 격리 의무 조치를 해제했지만, 아직 많은 나라들이 PCR 음성 확인서와 백신 접종 증명서 등을 요구하고 있다. 싱가포르, 태국 등 일부 아시아 국가에서는 코로나19와 관련된 여행보험에 가입하게 하거나, 백신 접종 증명서를 요구하고 있다. 반면, 이탈리아나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 등 유럽 주요 국가들은 이런 규정을 전면 해제했다. 여행객들이 백신 접종이나 검사 결과 등을 증빙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가뜩이나 오랜만에 떠나는 해외여행. 코로나19 관련 서류까지 신경 쓰기보다는 익숙한 유럽을 목적지로 택했을 수 있어 보인다. 특히, ‘킹달러’를 지닌 미국인들이 유럽으로 많이 향했을 수 있다. 최근 유로화의 화폐 가치가 떨어지면서 미국인들이 과거보다 저렴하게 유럽에서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달 12일 유로·달러 환율은 1대1 패리티(1유로=1달러)를 기록했다. 유로화 가치가 한때 1달러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유로와 달러의 화폐 가치는 1대 1.1 수준을 유지해왔는데, 유로화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진 것이다. 이 같은 패리티는 2002년 이후 20년 만이다. 유로화는 1999년 처음 도입됐고, 2002년 유로존에서 공식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2000년 초반 미국 경제는 좋은 반면 유로존 경기가 침체해 1유로의 가치가 0.83달러까지 하락했었지만, 이후 유로화가 적극적으로 쓰이면서 2002년 말 이후부터는 1유로의 가치가 1달러를 웃돌았다. 금융 위기로 미국 경제가 주저앉은 2008년에는 1유로의 가치가 1.6달러까지 치솟기도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최근의 패리티가 미국 사람들에게는 유럽 여행하기 유리한 여건인 셈이다. 미국 시카고에 사는 디자이너 알리사 브라운 씨(26)는 “파리에서 생로랑 브랜드의 선셋 미디엄 체인백을 사는데 1833달러(약 240만 원)를 썼다. 미국 가격인 2550달러(약 333만 원)보다 700달러(약 93만 원) 이상 저렴했다”고 WSJ에 말했다. 미 부가가치세(VAT) 환급 제공업체인 플래닛에 따르면 올해 6월 미국 여행객들이 유럽에서 쓴 금액은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 6월보다 56% 증가했다. 주로, 명품 가방과 보석, 시계 등을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WSJ은 “미국인들의 유럽 여행은 인플레이션으로부터의 휴식을 제공한다”며 “달러의 강세가 유럽의 높은 비용 중 일부를 상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18일 전했다. NYT는 ‘해외여행 중 최대한 돈 벌기’라는 기사에서 “2008년에는 로마에서 5유로(약 6700원)짜리 와인 한 잔이 8달러(약 1만500원) 정도였는데, 현재 화폐 비율로는 5.2달러(약 6800원)면 마실 수 있다. 올해 여름 파리의 100유로(약 13만3000원)짜리 임대 아파트는 104달러(약 13만7000원)면 묵을 수 있지만, 유로 화폐가치가 정점이었을 때는 158달러(약 20만7000원)였을 수 있다”고 했다. ● 달러, 왜 강할까? 달러는 왜 강하고, 유로화는 왜 약할까.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매파적 움직임 때문이다. 연준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1980년대 초반 이후 가장 가파른 통화긴축에 돌입했다. (인플레이션은 신비월드 15화, “치솟은 주가가 지구로 돌아왔다. 파티는 끝났다”에서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최근 ‘자이언트스텝’(0.75%포인트 기준금리 인상)을 연이어 단행했다. 이자율은 환율의 중요한 결정 요소다. 다른 조건이 동일할 때 돈은 더 높은 이자율을 쫓아 국경을 넘는다. 해당 국가의 자산이 더 높은 수익률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즉, 미국이 급격하게 금리를 올리면서 달러 가치가 올라간 것이다. 강(强)달러는 미국 내 수입 물가를 낮추는 효과도 있다. 여기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경기 침체 전망이 더해지면서 안전자산을 찾는 투자자의 심리도 더해졌다. 참다못한 유럽중앙은행(ECB)도 21일 기준금리를 0.50%포인트 인상했다. 유럽중앙은행의 11년 만의 금리 인상이었다. 유럽의 기준금리는 이제야 0.50%가 됐다. 현재 미국 기준금리는 2.25~2.50%다. 아직 격차가 크다. 유럽도 미국만큼 인플레이션이 심각하지만, 금리를 따라 올리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금리를 올려봐야 금리 인상 목적인 ‘인플레이션’이 잡힐 것 같지도 않다. 물가의 큰 축을 차지하는 에너지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천연가스의 40%를 수입하던 EU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천연가스 가격 급등과 수급 차질에 직면해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가스 공급을 점점 더 무기로 삼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 공급이 중단될 경우 헝가리, 슬로바키아, 체코, 이탈리아의 내년 GDP가 5% 이상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모두 러시아 가스에 대한 수입의존도가 70%가 넘는 국가들이다. 유럽의 에너지 위기에 따른 경제 붕괴 우려가 유로화의 약세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 더블룸 가격의 싱글룸 숙박 미국인들이 달러 강세를 누리더라도 코로나19 이전보다 험난한 해외여행을 각오해야 할지 모른다. 비행기 티켓값의 급격한 상승과 혼잡한 공항 관문을 버텨도 숙박 문제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수요가 몰려 방을 구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이야기다. 미국 여행사 지카소의 직원인 탄 씨는 “이탈리아의 로마, 피렌체 같이 인기 있는 목적지는 객실이 완전히 예약돼 있다”며 “포르투갈이나 크로아티아처럼 덜 인기 있는 곳으로 가야 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올해 여름에는 호텔 예약이 주말에 더 몰릴 가능성이 있다. 코로나19 이후 출장 수요가 제대로 회복되지 않으면서 여행객들 위주로 고객이 구성됐기 때문이다. 스테파니 린나츠 메리어트 인터내셔널 사장은 “비즈니스 여행객이 집으로 돌아가는 목요일을 매니저들이 ‘체크아웃의 밤’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주말 휴가가 길어진 여행객들로 목요일이 ‘체크인의 밤’으로 뒤집혔다”고 했다. 이는 요일과 시즌별로 수요에 맞춰 가격을 책정하는 호텔에게 주말 객실 요금을 더 비싸게 받을 요인이 된다. 올해 들어 호텔 운영비가 급격하게 오른 것도 있다. WSJ은 “인건비와 인플레이션에 따른 용품 가격 상승으로 호텔 운영비용이 상승했다. 숙박비용이 높아졌지만, 더 나은 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글로벌 호텔 데이터 분석 회사 STR에 따르면 6월 중순부터 7월 초까지 유럽의 호텔 객실의 일평균 요금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4%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전 세계로 퍼진 인플레이션이 여행객들의 들뜬 마음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탄 씨는 “지난해 크로아티아의 미쉐린(미슐랭)가이드 등급을 받은 레스토랑에서 식사했는데 이후 메뉴 가격이 20% 상승했다”고 WSJ에 말했다. 여행 플랫폼 투어리스트져니는 “이탈리아 여행비가 지난해 여름보다 60%가량 증가했다”고 밝혔다. ● 코로나19가 바꿔 놓은 해외여행 설레고 즐거운 해외여행을 앞두고 머릿속 숫자 계산을 잠시 내려놨다고 치자. 그래도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남아 있다. 현지에서의 이동 수단을 면밀하게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해외에서는 렌터카 업계에서 공항과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고객도 모르게 예약이 취소되는 일이 더러 발생해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사모펀드에서 일하는 에릭 라이트 씨는 “필라델피아에 예약한 렌터카가 나도 모르게 예약이 취소돼 있었다. 우버에서 세 배 많은 돈을 써야 했다”고 했다. 국가에 따라 지하철 등 대중교통 이용에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최근 미국 뉴욕의 지하철은 코로나19 사태 이전의 3분의 2 정도만 운영되고 있다. 오클랜드의 버스도 3년 전의 절반만 돌고 있다. 영국은 파업과 기록적인 폭염으로 열차 운행에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 식당, 가게에서 현금을 안 받는 곳이 있을 수 있다.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비대면 주문·결제를 도입한 곳이 늘었기 때문이다. 한 여행객은 “영국 지방의 작은 술집에서도 카드를 받았다. 한 인도 식당에서도 ‘이제 더 이상 현금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고 NYT에 전했다. 현금보다 해외 결제가 가능한 카드를 준비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실제로, 기자가 지난달 터키로 취재를 하러 갔을 때 메뉴판이 없는 식당이 꽤 있었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QR코드를 사진 찍어 스마트폰으로 메뉴를 보게 바꿔놓은 것이다. 직원이나 물건과의 접촉을 최대한 줄이려는 이유에서다. 고객 숫자가 감소한 만큼 직원 숫자를 최소화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 같다. 처음 메뉴 글자를 영문으로 바꾸는 방법을 찾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여정이 끝나갈 무렵 코로나19 증세가 나타난다면, 그것보다 심각한 상황이 없을 것이다. 집에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한국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두고 돌아와야 한다. ● 아직은 요원한 여행 산업의 회복 2018년 전 세계 사람들은 14억 번의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2000년의 두 배에 달하는 수치다. 이들이 쓴 돈도 어마어마하다. 코로나19 이전에 전 세계 관광객들은 매년 1조6000억 달러(약 2100조 원)를 지출했다. 스페인 GDP보다 큰 규모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비행기 조종사부터 여행 가이드, 리조트에서 일하는 청소부까지 전 세계 약 3억3000만 개의 일자리가 여행 산업에서 비롯됐다. 이코노미스트는 “독일인 관광객에게 상그리아를 파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술집은 수출업자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주류를 수출한 것과 맞먹을 수 있다”며 “관광산업은 전 세계 수출 수익의 원천이며 식품, 자동차 산업보다 규모가 크다”고 했다. 각국이 뜨거운 관광객 유치전을 펼치는 이유다. 과거 18세기 귀족들은 ‘그랜드 투어’를 떠났다. 마차에 가방과 가구 등을 가득 싣고, 하인을 태워 갔다고 한다. 19세기에는 일부 부유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여행이 유행처럼 번졌고, 1970년대부터 일부 관광객과 출장을 떠나는 경영진들로 공항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바퀴 달린 가방(캐리어)은 ‘대중 여행의 시대’를 상징한다”고 평했다. 대중 여행의 시대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추억을 쌓는 기회를 안겼다. 기업과 공급망을 연결한 측면도 있었다. 사람(직원)과 물건을 빠르게, 대량으로 옮길 수 있게 만들었다. 글로벌 산업 생태계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의미다. 2020년 3월 전 세계 5분의 4가 국경을 닫으면서 중단됐던 해외여행이 올해 들어 본격화하고 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코로나19 이전과 다른 느낌이다. 돈도 문제지만, 바이러스에 걸릴 것 같은 불안감이 남아있다. 국가별로 요구하는 여행 조건들도 신경이 쓰인다. 간절하지만 험난한 해외여행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김성모 기자 mo@donga.com}2022-07-31 08:00
우리 현대차가 달라졌어요[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4년 만의 응답: “현대차, 잘하고 있어” 2018년 3월 스위스에서 열린 제네바 모터쇼. 현대차는 행사장 건물 외벽에 아이오닉과 코나, 넥쏘 등 전기차를 홍보하는 대형 광고를 내걸었다. 그런데, 광고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차량이 아닌 도발적인 문구였다. “일론, 이제 당신 차례야.(Your turn, Elon.)”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이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그럴 만하다. 테슬라는 이미 북미에서 전기차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현대차그룹(이하 현대차)은 10위 안팎으로 존재감이 미미했다. 광고에 담긴 차량들 디자인도 테슬라에 비해 어딘가 촌스러워 보였다. 당시 현대차가 내연기관 차량의 뼈대를 가져다가 전기차를 만들다보니 기존의 자동차들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지난달 17일(현지 시간) 머스크가 트위터에서 현대차를 언급했다. 미국의 올해 1분기(1~3월) 전기차 점유율 순위 관련 게시물에 “현대차, 잘하고 있다(Hyundai is doing pretty well)”는 댓글을 단 것. 게시물에 따르면 테슬라는 1분기 미 전기차 시장에서 점유율 75.8%로 독보적인 1위를 기록했다. 2위가 9.0%의 현대차였고, 폭스바겐(4.6%)과 포드(5.4%)가 뒤를 이었다. 1, 2위의 격차는 컸지만, 머스크의 ‘칭찬 댓글’로 현대차가 주목을 받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블룸버그통신은 25일 ‘미안해요 일론 머스크, 현대차가 조용히 전기차 시장을 지배 중입니다(Sorry Elon Musk. Hyundai Is Quietly Dominating the EV Race)’라는 제목의 기사로 한 술 더 떴다. 블룸버그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핫한 전기차는 테슬라 공장에서 나오고 있지 않으며, 모든 시선은 현대 아이오닉5와 기아 EV6에 쏠려 있다”고 했다. 이어 “현대차와 기아가 미국에서 선보인 전기차들이 순식간에 포드·닛산·쉐보레 등 주요 전기차 모델을 제치고 5월까지 총 2만1467대의 판매기록을 올렸다”며 “같은 기간 미국 포드의 순수 전기차 머스탱 마하-E의 판매량(1만5718대)을 가볍게 뛰어넘었다”고 덧붙였다. 리서치기관 에드먼즈의 애널리스트 조셉 윤 부사장은 “그들(현대차·기아)이 EV(전기차)시장을 싹쓸이하고 있다. 솔직히 주변 딜러들이 재고를 확보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전했다. 테슬라의 압도적인 점유율보다 현대기아차의 빠른 성장세에 주목한 것이다. ● 머스크의 칭찬은 진심이었을까? 현대차가 분발하고 있지만, 테슬라와의 점유율 격차가 상당한 상황. 경쟁사에 대한 머스크의 칭찬은 과연 ‘진심’이었을까. 일각에서는 이번 언급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조롱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머스크는 지난달 2일 경영진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경기가 나빠질 것 같아 직원 10%를 줄이겠다”고 했다. 곧바로 한 기자가 바이든 대통령에게 이에 대한 의견을 묻자 “포드는 사람 더 뽑는다는데? 달나라 잘 다녀와 머스크”라고 비꼬았다. 한 달 동안 꿍해 있던 머스크가 이번에 포드의 1분기 미 전기차 점유율(5.4%)이 4위로 쳐진 것을 보고, 이때다 싶어 바이든 대통령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현대차를 이용해서 말이다. ‘지나친 해석 아니냐’고 물을 수 있지만, 친노조 성향인 바이든 대통령과 무노조 경영을 내세우는 머스크는 그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다. 미 CNBC는 지난달 “대통령의 발언은 그간 반복해서 바이든을 비판해 온 머스크와의 가장 최근의 마찰”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머스크의 칭찬이 진심이든 아니든 최근 현대차의 해외 성과는 주목할 만하다. 현대차와 기아의 미국 전기차 판매량은 2018년 1493대에서 2020년 7410대, 지난해 1만9590대로 늘었다. 올해 5월까지는 2만 대가 넘는 전기차를 미국에서 팔았다. 내연기관 차량도 잘 팔렸다. 올해 상반기 현대차와 기아(제네시스 포함)는 미국에서 61만2184대를 판매했다. 미 제너럴모터스(GM)와 일본 도요타, 미 포드, 스텔란티스에 이은 다섯 번째 실적이다. 현대차는 지난해 일본 혼다를 약 3만 대 차이로 6위로 밀어낸 뒤 올해 그 격차를 더 벌렸다. 미국에서 현대차와 기아, 제네시스의 경쟁력이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물론, 전기차도 포함이다. 현대차는 올해 역대 최대 영업이익을 전망하고 있다. 증권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와 기아는 올해 2분기(4~6월) 각각 2조1399억 원, 1조7100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합계 영업이익이 4조 원을 돌파하며 분기 기준 역대 최고치를 넘어설 전망이다. 현대차·기아의 올해 전체 영업이익도 역대 최대치를 경신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에게는 삼성만큼이나 친숙한 현대차. 해외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해외 주요 언론들을 살펴봤다. ● “저렴하지만 흥미롭지 않은 차” 3~4년 전만해도 현대차에 대한 해외 평가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019년 3월 기사에서 “현대차는 일본, 서구 경쟁사들보다 저렴하면서도 흥미롭지 않은 차량을 대량으로 생산해 세계 5위의 완성차 업체에 올랐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평했다. 당시 이코노미스트는 현대차가 인건비 상승으로 더 어려움을 겪게 됐다고 우려했다. 현대차가 전체 차량 중 40%를 한국에서 생산하는데, 국내 인건비가 올라가면서 가격 경쟁에서 뒤쳐지게 됐다는 분석이었다. 이는 현대차의 성장 전망을 어둡게 하는 요소라고 지적했다. 이코노미스트는 “폭스바겐은 연 매출의 6%를, 도요타는 4%를 연구개발(R&D)에 사용하는데 현대차는 3%만을 쓰고 있다”며 “일부 분석가들은 (현대차의) R&D 부족이 인건비 때문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이 같은 비용 상승과 소비자들의 기대치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었다. 이코노미스트는 “고객들은 여전히 우리 차가 폭스바겐보다 저렴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현대차 수석 전략가의 코멘트를 인용했다. ‘무색무취의 저가 자동차 제조업체’가 현대차의 이미지였다. 실제로 현대차는 해외 진출 이후 고급차로 평가받지 못하면서 주로 일본, 미국 등의 중저가 차량들과 경쟁했다. 2008~2009년 미국 시장에서의 현대차 점유율은 4% 수준에 불과했다. 2010년대 중반 이후에는 스포츠유틸리티차(SUV) 위주로 재편된 미국 시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고전했다. 2018년 현대, 기아차의 연간 영업이익은 3조 원대로 추락했다. 올해 1개 분기에 올린 영업이익을 1년 동안에도 벌어들이지 못한 것이다. ● 방탄소년단(BTS)이 선보인 현대차 2018년 11월, 분위기가 바뀌었다. 현대차가 2018년 3월 제네바 모터쇼에서 머스크를 소환하고 8개월이 흐른 뒤 ‘2018 로스앤젤레스(LA) 오토쇼’가 열렸다. 이곳에서 현대차는 8인승 SUV 차량인 ‘팰리세이드’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SUV가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가운데 내놓은 현대차의 야심작이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당시 수석총괄부회장)도 행사를 참관했다. 현대차는 팰리세이드 개발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2016년 4월 개발팀은 3주 동안 경쟁사 SUV 차량의 제일 뒤쪽 3열 좌석에만 앉아 미국 대륙을 돌았다. 디자이너를 데리고 미국 곳곳을 다니기도 했다. 북미시장 고객이 마트에서 짐을 어떻게 싣고 내리는지, 3열 공간의 크기가 왜 충분히 확보돼야 하는지 등을 함께 살피면서 공감대를 조성했다. 현대차가 3열 좌석에 집착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미 SUV 잠재 고객들의 요구 때문이었다. 현대차가 팰리세이드 개발 전 수요층에 대한 사전조사를 했는데, 개발팀은 ‘가족을 위해 공간이 넓은 SUV를 찾는 아빠’라는 키워드를 찾아냈다. 다자녀인 집이 많고, 여행 등 여가활동이 늘면서 사람들이 널찍한 3열 공간을 원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결과는 성공적인 편이었다. 현대차는 방탄소년단(BTS)을 팰리세이드 글로벌 브랜드 홍보대사로 선정하고, 2019년 6월 미국에 선보였는데, 출시 첫 달에 383대가 팔렸다. 이후 7월 4464대, 8월 5115대로 판매량이 수직 상승했다. 비슷한 시기에 기아가 출시한 대형 SUV 텔루라이드까지 미국에서 흥행하면서 현대차는 분위기 전환에 성공했다. 2019년 미국에서 5만8604대가 팔린 텔루라이드는 미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2020 북미 올해의 차’ SUV 부문에서 우승했다. 후보였던 팰리세이드와 링컨 애비에이터를 제쳤다. 기아는 텔루라이드 인기 덕분에 2019년 매출(58조1460억 원)이 시장전망치를 상회하는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73.6% 뛴 2조97억 원이었다. ● 달라진 제네시스, 달라진 현대차 이미지 펠리세이드 출시 이후에 나온 제네시스도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현대차는 2007년 말 럭셔리 세단인 제네시스를 처음 선보였다. 시장 반응은 미지근했다. 4년 동안 열심히 연구해 만들었지만 소비자들은 크게 감동받지 못했다. ‘악플’보다는 ‘무플’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현대차는 제네시스를 고급 승용차로 내세우면서도 BMW 5시리즈보다 1만 달러 이상 저렴한 가격에 판매했다. 일각에선 이 같은 애매한 가격 포지셔닝이 소비자의 선택을 주저하게 만들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현대차는 2015년 말 도요타의 렉서스처럼 제네시스를 독립 브랜드로 발표했다. 이 역시 처음에는 흥미를 끌지 못했다. 국내에서도 ‘어르신차’, ‘회장님차’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다가 2020년 1월 현대차가 GV80을 시작으로 G80, G70, GV70을 잇달아 선보였는데, 세련된 디자인으로 호평이 쏟아졌다. 현대차에 대한 ‘외모 지적’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2015년 530대가 판매됐던 제네시스의 글로벌 연 판매량은 2020년과 지난해 각각 10만 대와 20만 대를 넘어섰다. 특히 미국에서 잘 팔렸다. 지난해 제네시스의 미국 판매량은 4만9621대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혼다의 고급차 브랜드 아큐라를 처음으로 추월했다. 물론, 차 디자인이 예뻐서만은 아니었다. 이 같은 판매량은 품질이 기반이 됐다. 제네시스는 올해 미국 시장조사업체 제이디파워의 신차품질조사(IQS)에서 156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렉서스(157점)와 캐딜락(163점)을 제쳤다. 이는 1987년부터 시작된 세계 최고 권위의 품질조사다. 고객이 차량구입 후 3개월 동안 경험한 품질불만 사례를 집계해 100대당 불만건수를 점수로 나타낸다. 점수가 낮을수록 품질만족도가 높다는 의미다. 프로골프 선수인 타이거 우즈는 지난해 2월 주행 중 9m 언덕 아래로 구르는 전복 사고를 당했다. 차량 내부가 거의 파손되지 않았고, 우즈의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그가 탔던 차 모델에 관심이 쏠렸다. 당시 ‘골프 황제’가 타고 있던 차가 GV80이었다. ● ‘유니크’한 전기차 ‘아이오닉5’ 그런데, 정작 현대차를 머스크 입에 올리게 만든 것은 제네시스가 아니었다. 2018년 촌스러운 모습으로 그를 도발했던 아이오닉이었다. 현대차는 친환경 전용 모델이었던 아이오닉 브랜드를 순수 전기차로 개발해 ‘아이오닉5’라는 이름으로 지난해 2월 처음 공개했는데, 돌풍을 일으켰다. 출시 전, 계약이 역대 최다를 기록했고 상을 휩쓸며 경쟁력을 인정받았다. 아이오닉5가 확 달라진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현대차가 이와 함께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내놓았다는 점이다. 아이오닉5는 현대차가 만든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를 장착했다. 2000년대 이후 자동차 완성차 업체들은 차체에 레고 블록을 조립하는 것처럼 부품을 조합해 차량을 만드는 플랫폼 기반의 생산 방식을 택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차량 모델은 다르지만, 처음 만들 때 기본 틀은 같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방식은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춘 대형 회사일수록 유리하다. 재료비나 생산비, 개발기간 모두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요타나 폭스바겐 모두 이 전략을 쓰고 있다. 현대차는 2019년 3세대 플랫폼을 도입해 원가를 절감했다. 6개 플랫폼으로 생산하던 것을 3개 정도로 줄였다. 세단이나 SUV 구분 없이, 대형 중형 소형으로 통일했다. 제네시스 등 별도의 방식을 택하는 모델도 있다. 기존 내연기관 차량과 전혀 다른 전기차가 등장하면서 전기차 전용 플랫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테슬라가 이를 주도했다. 배터리와 구동모터를 핵심으로 삼는 전기차는 엔진, 변속기 등을 중심으로 설계된 내연기관차와 플랫폼이 다를 수밖에 없다. 플랫폼 바닥이 스케이트보드처럼 평평하게 생긴(이 부분에 배터리가 들어간다) 전기차는 내부에 들어가는 부품 숫자가 기존의 절반도 안 된다. 엔진이 들어갈 공간이 필요 없다보니 전기차 보닛 안은 트렁크 공간으로 활용한다. 무게도 가벼워지고 배선도 단순해졌다. 전기차 전용 플랫폼이 생겼기 때문에 아이오닉5의 디자인도 확 바뀔 수 있었던 것이다. ● “이 차를 두고 테슬라를 살 이유가 없다” 아이오닉5는 사전계약 첫 날 2만 대 계약을 돌파하는 등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다. 해외에서의 평가는 더 뜨거웠다. 아이오닉5를 시승한 미 뉴욕타임스(NYT) 기자는 4월 “현대차가 전기차의 진정한 다크호스가 될 수 있음을 느꼈다”며 “한국의 성장은 도요타, 혼다 같은 일본 자동차 제조사들의 부상을 되풀이한다. 이들은 50년 전 ‘헝그리 정신’으로 미국, 유럽 경쟁사보다 민첩하게 움직였다”고 했다. NYT에 따르면 아이오닉5의 주행거리(사륜구동 옵션 기준)는 256마일(약 422㎞), 연비는 98MPGe로 테슬라 모델Y에 못 미친다. 모델Y의 주행거리와 효율은 각각 330마일, 122MPGe다. MPGe는 전기에너지를 갤런(1갤런=3.785L)당 마일(1마일=1.609㎞)로 환산한 미국식 연비주행 표시다. 반면, 아이오닉5는 충전 속도에서 강점을 보인다. 아이오닉5의 배터리를 10%에서 80%까지 충전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8분 정도다. 아이오닉5는 800V(볼트) 충전 시스템을 갖췄는데 이는 테슬라의 2배다. NYT는 “아이오닉5를 5분 충전하면 최대 109㎞를 더 달릴 수 있다”며 “아이오닉5의 초고속 공공 충전은 가장 큰 기술적 성취”라고 했다. 미 자동차 전문지 모터트렌드는 지난해 말 “아이오닉5는 (테슬라) 모델Y보다 수만 달러 저렴하고, 충전 시 멀리 갈 수 있고, 더 빨리 충전되고, 더 나은 인테리어를 가지고 있다”며 극찬했다. “테슬라 배지와 충전 네트워크를 제외하면 아이오닉5를 두고 모델Y와 모델3을 살 이유가 없다”고까지 했다. 물론, 속도는 테슬라의 차가 아이오닉5보다 더 빠르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도 “경주에 나설 계획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이오닉5도 충분하다”고 표현했다. 아이오닉5는 유럽에서도 잘 팔렸다. 출시 3개월 만에 유럽에서 1만 대를 넘게 팔았다. 콧대 높은 독일 브랜드들마저 긴장하게 만들었다. 독일 자동차 전문지 ‘아우토 모토 운트 슈포트(AMS)’는 자사가 최근 진행한 4개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비교 평가에서 아이오닉5가 가장 경쟁력 있는 차로 선정됐다고 지난달 말 밝혔다. AMS는 유럽 전역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독일 3대 자동차 매거진 중 하나다. 아이오닉5와 메르세데스-벤츠 EQA 250, 아우디 Q4 e트론, 르노 메간 E-테크 등을 대상으로 바디, 안전성, 컴포트, 파워트레인, 주행거동, 환경, 경제성 등 7가지 평가 항목을 비교한 결과였다. 아이오닉5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2022 월드카 어워즈’에서 독일의 메르세데스-벤츠의 EQS와 아우디 e-트론 GT 등을 누르고 올해의 전기차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대차 내부에서도 예상 못한 결과였을 듯하다. 해외 언론들이 모든 차를 좋게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블룸버그는 지난달 28일 “(미 자동차 브랜드) 캐딜락 리릭 SUV 전기차는 기다릴 가치가 없다”고 평했다. “경쟁사의 전기 SUV 차량이 더 먼저 나올 예정이니 기다려보자”고 했다. ● 방황 끝난 도요타와의 본격적인 경쟁 사실, 기아 전기차 EV6의 흥행도 아이오닉5 못지않았다. 현대차만 언급하기 미안할 정도로 소리 없이 강했다. 아이오닉5는 본격적으로 판매가 시작된 올해 2월부터 5월까지 미국에서 1만 대가 팔렸다. EV6는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5월까지 유럽에서 2만1852대가 팔렸다. 아이오닉5와 EV6가 두 대륙에서만 3만 대가 넘게 팔렸다. EV6는 영국 자동차 전문 매체인 왓카가 주최하는 ‘2022 왓카 어워즈’에서 ‘올해의 차’에 선정되기도 했다. 1978년 시작된 이 상은 유럽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최근 현대차가 선보인 두 번째 전용 전기차이자 첫 세단형 전기차인 ‘아이오닉6’에도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유선형 디자인이 특징이다. 영국 자동차 전문 매체 탑기어는 “유선형 디자인은 미적으로 훌륭하지만, 제작이 어렵다”며 “아이오닉6의 디자인은 유선형을 잘 유지하면서 뛰어난 공기저항 계수까지 자랑한다”고 평했다. 현대차는 일본에서 아이오닉5, 넥쏘 등을 온라인으로 지난달부터 판매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국민들이 자국차를 선호해 ‘수입차의 무덤’으로 꼽혀온 곳이다. 그런데, 전기차에서는 유독 수입차 비중이 높은 편이다. 닛산이 1만 여대를 팔며 점유율 50%를 넘겼지만, 도요타(758대)와 혼다(723대)는 저조했다. 나머지 40% 가량인 8605대는 수입차였다. 일본의 전기차 인식이 아직 떨어져 있고, 도요타 등 완성차 브랜드들이 뒤늦게 전기차 시장에 뛰어든 것이 영향을 미쳤다. 도요타는 첫 전기차 bZ4X를 올해 4월에서야 일본과 미국 시장에 출시했다. 렉서스의 첫 전기차 UX 300e 역시 최근에 나왔다. 전기차 진출이 늦어지긴 했지만, 도요타의 저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도요타는 세계 신차 판매 시장에서 2년 연속 1위를 기록했고, 지난해 미 자동차 시장에서 최초로 GM을 제치고 판매량 1위를 차지했다. 약 857만 대 생산량 중 233만2000대가 미국에서 팔렸다. GM의 미국 판매량은 221만8000대였다. 현대차는 전년 대비 19% 늘었지만 73만8081대로 격차를 보였다. 도요타는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 시장에선 압도적인 성적을 보이고 있다. ● 현대차는 빠르게 달리는 ‘후발주자’ 전기차에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던 도요타가 지난해 9월 전기차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2030년까지 전기차 배터리의 개발과 생산에 1조5000억 엔(약 16조 원)을 쏟아붓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도요타 측은 “2030년까지 연간 200GWh(기가와트시) 이상의 배터리 생산능력을 갖출 것”이라고 했다. 도요타가 연 200GWh의 배터리 생산규모를 갖추면 연 300만~400만 대의 전기차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전기차 대량보급을 체계를 갖추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배터리 생산의 내재화를 통해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도요타의 전략이다. 일각에서는 도요타의 전기차 진출이 늦어진 것이 배터리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국에는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메이저 배터리 제조사들을 여럿 보유하고 있지만, 일본에는 파나소닉이 이를 주로 생산하다보니 계약 관계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해외에 맡기려니 정치적 이슈나 공급망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자국의 업체와 계약하면 가격 결정권이 흔들리는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도요타도 이러한 점을 종합해 막대한 투자를 해서라도 배터리 생산능력을 직접 갖추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 차만 만들까, 차도 만들까… 최근 관심을 받고 있지만 현대차 역시 전기차 시장에서는 ‘후발주자’다. 테슬라는 2012년 대형 전기차 세단인 모델S부터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적용했다. 현대차보다 8년 이상 빠른 셈이다. 현대차가 열심히 테슬라에 따라 붙으려는 상황에서 내연기관 강자였던 도요타의 전기차 올인 전략은 여러모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전기차를 잘 만드는 것을 넘어서서, (도요타의 경쟁을 고려했을 때) 저렴하게 만들어야 하는 숙제까지 떠안게 됐다. 게다가 테슬라를 따라 잡으려면 자동차만 잘 만들어서는 부족하다. 자동차를 만든다는 발상부터 버려야 할지 모른다. 테슬라가 인정받는 이유는 전기차 전용 전자 플랫폼과 소프트웨어(SW) 때문이다. 아직 결함이 주기적으로 발생하고 자율주행까지 장착하기에 한 참 걸릴 것으로 보이지만,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에 맞춰 소프트웨어를 계속 업데이트 시키고 있다. 테슬라는 점점 더 똑똑해질 가능성이 크다. 컴퓨터, 스마트폰처럼 말이다. 현재의 자동차 산업은 어떻게 보면 애플이 아이폰을 처음 내놨을 때와 유사해 보인다. 당시 전화만 잘 터지는 휴대전화를 만들었던 회사들은 현재 모두 자취를 감췄다. 전통의 완성차 업체들도 현재의 상황을 잘 알고 있다. 폴크스바겐과 벤츠 등은 2025년 전후로 테슬라와 같은 소프트웨어 기반의 차량을 내놓을 계획이다. 현대차도 2030년까지 전기차, 자율주행 등 미래 전략 사업에 95조5000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올해 3월 밝힌 바 있다. 현대차는 10년 내에 올 본격적인 ‘전기차 시대’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첫 발을 잘 내디딘 현대차의 내일이 궁금하다.김성모 기자mo@donga.com}2022-07-17 08:00
기사통계
1,991건 최근 30일 간2건
주요 취재분야레이어보기
  • 국제경제
    58%
  • 국제일반
    10%
  • 경제일반
    7%
  • 중동
    7%
  • 모바일
    3%
  • 자동차
    3%
  • 산업
    3%
  • 인사일반
    3%
  • 기업
    3%
  • 모바일/인터넷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