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모

김성모 기자

동아일보 경영전략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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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제부에서 글로벌 주요 이슈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2012년 사회부를 시작으로 소비자경제부와 경제부, 산업부 등을 거쳤습니다. 신문과 방송, 매거진(동아비즈니스리뷰)에서 경험을 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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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7~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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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에 남은 ‘드래곤볼’과 50세 ‘헬로키티’[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만약 정말로 드래곤볼로 소원을 하나 이룰 수 있다면…”일본 나고야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던 23세 청년 토리야마 아키라(鳥山明)는 2년 넘게 다니던 회사를 관뒀다.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 포스터를 디자인하는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져서다.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아 쓰던 그는 한 카페에서 만화상 응모를 발견했다. 상금이 탐이 난 토리야마는 스타워즈를 패러디한 만화를 그렸는데, 응모 기간이 이미 지나간 뒤였다. 마감을 놓친 그는 매달 만화상을 선정하는 주간 만화잡지 ‘소년 점프’에 그려둔 만화를 보냈다. 토리야마의 만화는 상을 받진 못했지만, 소년 점프의 편집자였던 토리시마 카즈히코가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회사에 전담을 자처했다.1978년 단편 ‘원더아일랜드’로 정식 만화가로 데뷔한 토리야마는 2년 뒤, 장편 만화 ‘닥터 슬럼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단행본이 3500만 부나 팔렸다.그를 천재 만화가 반열에 올린 작품은 따로 있었다. 1984년 등장한 ‘드래곤볼’이다. 드래곤볼은 전 세계에 신드롬을 일으킨 최초의 일본 만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5년까지 42권이 발매됐는데, 전 세계에서 2억6000만 부나 팔렸다. 한국 등 80여 개국에서 애니메이션으로도 방영됐다. 지난달 초, 닥터 슬럼프, 드래곤볼 등을 만들어낸 유명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69)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손오공과 젊은 시절을 보냈던 많은 이들이 그의 별세를 안타까워했다.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는 소셜미디어에 “용신으로도 살려낼 수 없는 곳으로 그가 갔다”는 포스팅을 올렸다. 일본의 일이라면 날을 세우는 중국 정부도 이날만큼은 애도를 표했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그의 작품은 중국에서도 환영받았다”며 “많은 중국 네티즌이 그를 기리고 있다”고 전했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수천 명이 한 광장에 모여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드래곤볼에 나오는 전투 기술 ‘원기옥’의 동작이다. 아르헨티나뿐만 아니라 브라질, 멕시코 등에서도 추모 집회가 이어졌다.인기 만화 ‘나루토’의 작가 키시모토 마사시는 “만약 정말로 드래곤볼의 소원이 하나 이루어진다면…”이라며 만화에서처럼 그가 부활하기를 바랐다. 성실한 귀차니스트 토리야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그와 관련된 일화들이 기사로 쏟아졌다. 먼저 그의 가능성을 처음 발견한 토리시마 편집자가 주목받았다.토리야마의 성공에는 편집자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원래 토리야마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소녀 로봇 ‘아리’를 1화에만 등장시키려 했다. 하지만, 편집자는 슬럼프 박사가 아닌 아리가 주인공이 돼야 한다고 맞붙었다. 당시 대부분의 만화에서 주인공은 남성 캐릭터였다. 둘은 “독자에게 물어보자”고 내기를 했고, 설문조사에서 아리가 순위권에 들면서 아리가 주인공이 됐다. 토리야마는 심통이 났는지, 만화에 편집자를 모델로 한 악역 캐릭터(닥터 마시리토)를 등장시켰다.드래곤볼도 편집자가 아니었으면 나오지 못할 뻔했다. 토리야마가 닥터 슬럼프 후속작을 구상하고 있을 무렵 편집자는 격투 만화를 제안했다. 그가 성룡의 무술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토리야마는 거절을 거듭했지만, 편집자는 끈질기게 그를 설득했고, 그 덕분에 드래곤볼이 탄생할 수 있었다. 드래곤볼 연재 초기에도 편집자의 조언이 있었다. 토리야마는 판타지물로 드래곤볼 스토리를 이끌어나갔는데, 인기가 식자(‘북두의 권’에 잠시 밀렸다고 함) 토리시마 편집자가 “전투신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후 ‘천하제일무술대회’와 녹색 피부의 외계인 악당 ‘피콜로’를 등장시키면서 드래곤볼은 1위를 다시 빼앗았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토리야마는 처음에 드래곤볼의 주인공을 성장시키는(만화에서 손오공은 12세로 등장해 45세로 끝남) 아이디어를 가져왔는데 편집자는 강하게 반대했다. 토리야마는 자기 뜻을 관철했고, 그 덕분에 스토리가 풍성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토리야마는 과거 인터뷰에서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며 “악당이 필살기로 거리를 날려버리는 장면이 종종 있는데 배경을 그리는 게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천재성에 의존하는 작가’라는 꼬리표가 붙기도 했다. 토리야마는 한 인터뷰에서 본인을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라고 소개한 적도 있었다.그러나 실제로 토리야마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드래곤볼의 연재와 관련해 “10년 동안 그리는 데 있어 정한 규칙이 있느냐”라는 질문에 “마감은 무조건 지켰다. 광고회사에서 일할 시절 마감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지 실제로 보고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토리야마는 40여년간 단 한 번도 연재 펑크를 내지 않았고, 출판사에서 보낸 어시스트 한 명의 도움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의 힘으로 그림을 그렸다. (닥터슬럼프 연재 당시 밤샘 작업에 시달리다 가족에게 검은색 부분을 잉크로 칠해달라고 부탁하긴 했다) 업무량도 어마어마했다. 그의 캐릭터를 기반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과 영화 22편을 모두 직접 감독하거나 관여했다. ‘게으른 천재’가 아니라, ‘성실한 귀차니스트’였다. 불멸의 손오공사실, 전설적인 음악가나 영화감독이 아닌, 만화가의 죽음에 전 세계가 가슴 아파하는 것은 굉장히 보기 드문 일이다. 토리야마와 드래곤볼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는 의미다. 드래곤볼은 서구권을 공략한 첫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1990년대 미국과 유럽의 많은 사람이 케이블TV에 나오는 드래곤볼을 보기 위해 TV 앞에서 기다렸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8일(현지시간) “미야자키 하야오(宮﨑駿) 같은 애니메이션 거장의 작품들이 미국에 전해졌지만,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들여다봤을 때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서구의 주류미디어에서 인기를 얻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며 “몇 가지 큰 예외가 있다. ‘포켓몬스터’, ‘나루토’ 그리고 ‘드래곤볼’”이라고 전했다. 드래곤볼 단행본은 20개 넘는 언어로 번역돼 약 2억6000만 부가 판매됐다. 역대 가장 많이 팔린 만화 시리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토리야마에 대해 “일본 콘텐츠가 세계에서 폭넓게 인정받고, 일본 관광객 증가로도 이어졌다”며 “일본 문화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토리야마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후배들은 ‘나루토’, ‘원피스’ 같은 글로벌 만화 히트작을 쏟아냈다. 토리야마는 “일본 만화가 해외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만화는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통념을 깬 것도 드래곤볼이었다. 드래곤볼 IP(지식재산)는 TV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영화, 게임 등 다방면으로 활용됐다. 드래곤볼 관련 매출은 230억 달러(약 30조 원)에 달한다. 드래곤볼 덕분에 토리야마도 많은 돈을 벌었다. 2021년 토리야마의 예상 인세 수입은 114억4000만 엔(약 1030억 원)이었다. 기타 IP 수익을 포함하면 생전 수입은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최근 사우디아라비아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드래곤볼을 주제로 한 테마파크를 짓는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테마파크는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서남쪽으로 약 40㎞ 떨어진 키디야 지역에 50만㎡ 규모로 건설된다. 테마파크 내부에는 ‘신룡(드래곤볼에서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을 형상화한 70m 높이의 롤러코스터를 비롯해 최소 30개의 놀이기구가 들어설 것으로 알려졌다. 토리야마는 세상을 떠났지만, 지구에 드래곤볼을 남겼다.그런데, 드래곤볼의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남미 등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을 푹 빠지게 만든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만화를 그릴 때 독자를 즐겁게 하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2013년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에만 집중했다”고 밝혔다. 교훈적인 메시지 전달에 신경 쓰는 다른 만화가와 다르게, 재미에만 집중했다는 설명이었다. 작품의 해외 진출에 나라마다 다른 문화적 요소를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재미는 만국 공통으로 통하는 특성이기 때문이다.50세 맞이한 헬로 키티 캐릭터 헬로키티 역시 드래곤볼 못지않게 수십 년간 사랑받은 일본의 대표 IP다. 일본 캐릭터 기업 산리오가 1974년 만든 헬로키티는 올해로 50주년을 맞았다. 한국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특별전(헬로키티 50주년 특별전-산리오캐릭터즈와의 여행)이 13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렸는데, 입장과 기념품 구매에 각각 1시간 이상 대기 줄이 늘어설 만큼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고양이 캐릭터 하나에 엄청난 사람이 몰렸다.츠지 신타로((辻信太郎·97) 산리오 창업주(현재는 손자 츠지 토모쿠니가 대표를 맡고 있음)가 처음부터 고양이 캐릭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 동부 야마나시현에서 자란 츠지는 어린 시절 카드 모으기 유행을 떠올리며 1960년 캐릭터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소소한 것을 주고받으면서 친구를 사귀었던 어린 날 행복감을 되살리고 싶었다. “카드 덕분에 외톨이었던 나는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진정한 행복은 우정을 통해 온다는 교훈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물론, 당시에는 우정을 키우는 일이 훗날 조 단위의 매출을 일으킬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츠지는 산리오라는 회사를 차리고 저렴한 제품들을 디자인하는 데 쓸만한 캐릭터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초등학생 아들의 같은 반 친구들에게 동물도감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어떤 동물에 호감을 보이는지 관찰했다.“처음에는 물고기를 시도했는데 관심 없었다. 고래, 돌고래도 시큰둥했다. 올빼미랑 펭귄에는 흥미는 보였는데 새는 보지도 않았다. 곤충, 나비, 벌, 무당벌레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의 1순위는 강아지였다. 2위는 흰 고양이, 3위는 곰이었고 기린, 사자 같은 야생동물이 뒤를 이었다. 당시 강아지 캐릭터 시장은 이미 ‘스누피’가 꽉 잡고 있었다. 그래서 츠지가 선택한 캐릭터가 흰 고양이다. 첫 사업 시장 조사 대상이 고작 초등학생 아들 반 친구들이라니. 너무 소박한 것 아닐까. “아이들 한 학급이 충분한 기반인지 누가 알 수 있나. 항상 완벽하게 맞출 순 없다. 미키마우스를 봐라. 그게 뭔가? 그냥 쥐 아닌가.” 츠지는 한 일본 만화가에게 흰 고양이를 그리게 했다. 저작권 등록을 위해 이름도 지었다. 영어 단어 ‘키티(고양이)’를 떠올렸다. 회사의 모토인 ‘사회적 소통’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헬로’를 그 앞에 붙였다. 그렇게 헬로키티가 탄생했다. 작은 비닐 동전 지갑에 처음으로 헬로키티 그림이 들어갔다. 귀여운 키티 옆에 귀여운 키티 헬로키티는 ‘IP 활용 교과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제품에 활용됐다. 키티 팬들은 키티 인형뿐만 아니라, 키티가 그려진 운동화, 가방, 종이 타월부터 카세트 플레이어, 젓가락, 와인 등을 샀다. 홍콩에서 키티 모양의 만두가, 대만에선 키티로 디자인한 비행기가 등장했다. 현재 130여 국, 약 5만 종류의 제품에 키티가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키티 덕분에 산리오는 연 38억 달러(5조3000억 원) 매출의 ‘캐릭터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분홍빛 세계화: 헬로 키티의 태평양 횡단 이야기’ 책을 쓴 미국의 인류학자 크리스틴 야노는 “헬로키티는 수익을 창출하는 기계”라고 말했다. 산리오는 주로 캐릭터 라이선스를 판매해 수익을 올린다. 2000년대 초중반에는 자체 소매점에서 판매하는 제품 제조에 집중하기도 했는데 마진이 많이 남지 않자 이후에는 라이선스 사업을 더 공격적으로 추진했다. 새로운 산업, 제품군에 진출했을 때 위험을 덜 감수해야 한다는 장점이 있다.대신, 품질 관리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예로, 홍콩에 있었던 헬로키티 딤섬 레스토랑(2017년쯤 폐점)은 장식부터 식기, 메뉴 등 세부적인 사항들을 산리오에 먼저 승인받도록 했다. 기본적으로 캐릭터 제작 과정에서는 폭력적인 요소나 어린아이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장면(술을 마시는 모습 등) 등은 배제했다. 캐릭터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산리오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헬로키티가 점차 나이가 들면서 브랜딩 파워가 약해졌다. 사람들이 주변에서 키티를 자주 접하다 보니 귀여움과 신선함을 예전만 못하게 느낀 것이다. 한 마디로, 캐릭터가 과잉 판매돼 식상해졌다는 의미다. 1999년부터 키티 관련 라이선스 매출은 10년 연속 감소하더니, 2010년에는 ‘호빵맨’에게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시치조 나오히로 와세다대 고등연구소 부교수는 “산리오는 처음에는 헬로키티 열풍이 걷잡을 수 없게 번지지 않도록 굉장히 조심했었다. 캐릭터가 한 번에 너무 큰 인기를 얻으면 안 된다는 것이 캐릭터 비즈니스의 암묵적인 규칙”이라고 강조했다. 키티 열풍이 전 세계로 퍼지고, 매출이 급증하자 캐릭터가 지나치게 많이 소비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매출이 꺾인 산리오는 키티를 어떻게 캐릭터 디자인 이상으로 활용할지를 두고 고심하기 시작했다. 드래곤볼처럼 키티 IP를 영화 등 여러 방면으로 쓰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헬로키티에는 입이 없다. “뭐? 키티가 고양이가 아니라고?” 2014년 미 LA타임스는 키티 팬들의 눈이 번쩍 뜨일만한 기사를 내보냈다. 키티가 사실은 고양이가 아니라 ‘키티 화이트’라는 어린 소녀였다는 내용이었다. 크리스틴 야노는 ‘재패니즈 아메리칸 내셔널 뮤지엄’의 전시 책임자로 있을 때 헬로키티 전시물에 ‘고양이’라는 설명을 달았다고 한다. 그러자 산리오가 ‘헬로키티는 고양이가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고 밝혔다. 산리오는 ‘키티는 항상 두 발로 앉거나 걸었지, 한 번도 네발로 묘사된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산리오는 공식사이트에서도 헬로키티가 영국 출신의 소녀 캐릭터라고 밝혔다. 심지어 애완용 고양이도 있단다. 이름은 ‘차미 키티’다. 키티 양 볼 옆에 털 세 가닥에 대해서는 “소녀가 귀밑에 털이 있는 것”이라는 황당한 설명을 달았다. CNN, NYT 등 해외 주요 언론들이 잇달아 키티의 정체를 전했고, 헬로키티 팬들은 그야말로 ‘멘붕’에 빠졌다. CNN은 “11월 1일생의 키티는 팬케이크 만들기, 종이접기를 좋아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친구는 너무 많이 가질 수 없다’이다. 오늘 (키티는 친구를) 몇 명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전했다. 배신감을 느낀 팬들은 온라인에 분노를 표출했다. 당시에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었는데,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전쟁 관련 소식보다 키티 관련 게시물이 10배 이상 많았다. 헬로키티의 정체를 알고 나서 아이들이 우는 동영상도 올라왔다.2019년 산리오는 콘텐츠 거물 워너브러더스와 헬로키티를 영화화하는 60억 달러(약 8조3000억 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NYT는 “워너브러더스는 고양이를 영화로 제작하려고 산리오를 5년간 설득했다”고 전했다. 5년 전, 헬로키티의 정체를 밝힌 순간부터 산리오에 구애한 것이다. 산리오의 폭탄선언 덕분에 IP 다각화의 길이 열린 셈이다.귀여운 건 못 참지헬로키티의 매력은 두말할 것 없이 ‘귀여움’이다. 달콤하고 포근한 귀여움의 힘에 많은 사람이 쉽게 지갑을 연다. 그러다 보니 학계에서도 귀여움에 관한 연구가 꽤 진행돼왔다. 인간은 무엇을 귀엽다고 생각할까. 1940년대 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 콘라드 로렌츠는 사람들이 큰 눈과 작은 코와 입, 둥근 뺨, 통통한 몸, 짧은 팔과 다리, 흔들리는 걸음걸이를 가진 아기에게 끌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이미지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작지만 강력한 힘: 귀여움이 세상을 점령한 방법’이라는 기사에서 “만화 캐릭터도 이에 맞춰 변신을 거듭했다”면서 “예로, 미키마우스의 팔, 다리, 코는 1928년 이후 작아졌지만, 머리와 눈은 커졌다”고 강조했다.2015년 한 연구에 따르면 참가자들은 고양이 동영상을 보고 더 활기차고 긍정적으로 느끼고 짜증과 불안, 슬픔을 덜 느낀 것으로 나타났다. 옥스퍼드대학교의 신경과학자 모르텐 크링겔바흐는 아기 얼굴을 보고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연구했는데, 뇌의 전두엽 부위에 있는 안와전두피질(쾌락과 관련된 영역)이 0.14초 이내에 활성화된다는 점을 발견했다.귀여움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코노미스트는 “일본 에도시대(1603~1868년)의 일본 예술가들은 강아지를 그리거나 상아로 강아지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책 ‘거부할 수 없는’의 저자 조슈아 폴 데일은 “르네상스, 로코코 시대 예술에서의 귀여움의 주요 표현은 ‘날개를 단 아기(큐피드)’였다”고 주장했다.현대에서 고양이는 가장 사랑받는 콘텐츠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2022년 유튜브에는 매일 9만 개 이상의 고양이 동영상이 업로드됐다. 영국의 컴퓨터 과학자(월드와이드웹 창시자)인 팀 버너스 리는 ‘인터넷 사용에서 가장 놀라운 점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고양이”라고 답했다. 귀여운 콘텐츠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가 그만큼 컸단 뜻이다.산리오는 구데타마, 마이멜로디, 쿠로미, 폼폼푸린 등 수많은 캐릭터를 발굴해냈지만, 헬로키티의 영향력은 아직도 절대적이다. 산리오 창립자는 한 인터뷰에서 헬로키티 열풍이 식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미키마우스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도널드덕? 구피? 미키를 대체할 수 있는 건 미키뿐이다. 스누피도 마찬가지다. 찰리브라운도 루시도 대신할 수 없다. 키티는 오직 키티만이 대체할 수 있다.”일본 장수 IP, 시대가 변해도 살아남을까 과거 레이 하토야마 산리오 해외사업총괄본부장은 드래곤볼과 헬로키티 같은 캐릭터의 글로벌 성공을 ‘쌀 수출’에 빗댔다. “쌀에 해외 각 국가들이 좋아하는 향신료를 넣으면 맛을 더할 수 있기 때문에 식재료를 판매하기 쉽다”고 말했다. 드래곤볼의 ‘재미’나 헬로키티의 ‘귀여움’ 같은 세계를 관통할 수 있는 무기가 있으면 IP를 다양하게 활용해 매출을 끌어올리기 쉽다는 의미다. (과거 만화 도라에몽이 일본 학교를 배경으로 해 해외 판매가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세계를 강타했던 일본 만화, 캐릭터 산업은 웹툰(웹 코믹)으로 대표되는 21세기 온라인 만화 시장에서 한국에 선두를 빼앗긴 지 꽤 됐다. 2020년 7월에는 ‘만화 종주국’ 일본에서조차 한국 기업이 만화 플랫폼 1위를 차지했다. 앞으로는 인쇄 만화보다 웹툰 시장이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만화 업계는 전 세계 웹툰 시장이 2030년 560억 달러(약 77조5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현재 일본의 인쇄 만화 시장은 20억 달러(약 2조7700억 원)에도 못 미치는 상태다. 보수적인 일본 만화 업계가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신작의 첫 발표는 ‘소년 점프’ 같은 주간만화잡지에서 한 뒤, 출판물로 인쇄돼 연재되는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일본 만화 장인들이 20세기 작업 방식에 갇혀 있는 것도 있다. 화법이 독창적이고 플롯(구성)이 정교한 인쇄 만화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내에선 웹툰을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평가하는 작가도 일부 있다고 한다. 전통적인 일본 만화 애호가들이 웹툰을 조잡하다고 평가하고, 인쇄 만화의 형식과 읽는 순서 등을 신성시하는 것도 있다. 웹툰은 전통 만화만큼 정교한 서사를 제공하진 못하지만, 색감이 화려하고 직관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편의성도 뛰어나다. 웹툰 관련 시장이 계속 커지는 이유다.이코노미스트는 “일본 만화 팬들은 고령화되고 있다. 소년 점프 독자의 평균 연령은 30세가 넘는다. 아이들은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스크롤 해 본다. 아이들 취향에 맞는 것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라며 변화를 촉구했다.김성모 기자 mo@donga.com}

    • 202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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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엔비디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下)[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이번 신비월드는 ‘’의 후속편입니다. 16일 기사(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3553586?sid=104)를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게임 덕후’가 만든 슈퍼컴퓨터 199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서니베일의 한 아파트 월세방에서 사업을 시작한 회사가 있었다. 게임 화질이 점차 중요해질 것으로 전망한 창업자들은 사업을 위해 각자 잘나가던 기술 회사까지 관뒀다. 한 차례 폐업 위기를 넘긴 이 회사는 2000년대 그래픽카드 ‘지포스(GeForce) 시리즈’로 게임 업계를 휩쓸었다.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 이야기다. 미 스탠퍼드대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공부하던 대학원생 이안 벅은 공부만큼 게임을 좋아했다. 그는 2000년 23개의 지포스를 연결해 ‘퀘이크’라는 게임을 즐겼다. 그는 “8K 해상도의 첫 번째 게임 장비였다”며 “게임을 위한 장비가 벽 한쪽을 통째로 차지했는데, 정말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 이때만 해도 엔비디아는 게이머들 사이에서만 핫한 회사였다. 그런데, 벅처럼 게임과 컴퓨터를 모두 잘 아는 일부 연구원이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게임 이외의 용도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분자 관련 모델을 만들던 한 연구원은 연산 작업에 대학에 있던 슈퍼컴퓨터 대신 전자 매장에서 구매한 GPU를 사용했다. 몇 주가 걸릴 일이 몇 시간 만에 끝났다. 한창 게임에 심취해 있던 벅도 GPU의 잠재력을 발견한 이들 중 하나였다. 그는 게임에서 친구들에게 수류탄을 던지는 것 말고도 다른 곳에 GPU를 사용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미국방위고등연구계획국(다르파·DARPA)의 지원을 받던 벅은 지포스의 프로그래밍 도구인 셰이더(上편 참고)를 해킹해 다량의 연산을 빠른 속도로 해치우는 슈퍼컴퓨터를 개발했다. GPU를 활용한 ‘저예산 슈퍼컴퓨터’였다. 참고로, 미국 국방성 산하 핵심 연구개발 조직 중 하나인 다르파는 최초의 인터넷을 개발한 곳이기도 하다.얼마 안 돼 엔비디아에 스카우트된 벅은 2004년부터 ‘쿠다(CUDA)’ 프로젝트를 감독했다. 2006년 등장한 쿠다는 엔비디아의 GPU에서만 작동하는 일종의 프로그래밍 툴이다. 그래픽카드를 그래픽 작업 이외의 용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엔비디아가 개발한 플랫폼(생태계)이다. 컴파일러, 런타임, 디버거 등(기자도 모른다. 걱정하지 말자) 여러 개발 도구들이 쿠다에 포함돼 있다. 개발자들이 기존에 만들어 놓은 것들을 불러내는 라이브러리 기능도 있다. 기초 작업이나 간단한 것들을 라이브러리에서 꺼내 쓰게 해 시간을 절약시켰다. (벅은 현재 엔비디아 부사장으로 재직 중)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한 인터뷰에서 “모든 지포스 그래픽 카드에서 쿠다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며 “슈퍼컴퓨팅을 대중화하는 작업이었다”라고 회상했다.엔비디아는 2006년 1초당 3조 회 이상의 수학 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차세대 프로세서(지포스 8800)를 출시했다. 연산 수행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그래픽 성능까지 일부 포기했다. 그래픽 구현보다 슈퍼컴퓨터로서의 성능에 초점을 맞춤 셈이다. 당시 미 뉴욕타임스(NYT)는 “수학적 기능을 갖추고 있는 8800은 (인텔) 슈퍼컴퓨터의 직접적인 경쟁자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GPU가 만든 피자 피자 제조업체부터 에너지 기업, 의료 회사까지 여러 기업 및 연구 기관에서 엔비디아의 GPU를 찾기 시작했다. 이들은 엔비디아의 GPU를 활용하면 인텔의 중앙처리장치(CPU)만 사용했을 때보다 업무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미국 식품 회사 제너럴밀스는 냉동 피자 제품을 개발하는 데 엔비디아의 GPU를 썼다. 냉동 피자를 완벽하게 만드는 일은 예술인 동시에 컴퓨터 문제다. 정교한 컴퓨터를 사용해 재료를 조합하면 실패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제너럴밀스는 엔비디아의 고성능 그래픽칩이 탑재된 컴퓨터를 선택해 작업 속도를 높였다.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의료 기기 회사 테크니스캔도 엔비디아의 GPU를 사용해 업무 효율을 높인 곳이다. 테크니스캔은 3차원 유방 스캔 장치에 엔비디아의 그래픽 프로세서를 도입했다. 기기는 스캔에서 발생한 데이터를 의료용 이미지 파일로 변환하는데, 인텔 프로세서만 사용했을 때 2시간 걸리던 작업이 15분으로 단축됐다. 테크니스캔의 엔지니어인 짐 하드윅은 “스캔 당 15분으로 단축하면 환자가 당일에 검사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미 최대 유전 탐사기업 슐룸베르거는 석유 매장지를 찾는데 엔비디아의 GPU와 쿠다를 활용했다. GPU로 석유 매장 징후를 스캔하는 알고리즘을 최적화 한 것. 슐룸베르거는 이를 통해 기존 컴퓨터보다 6배 이상 빠른 속도로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었다. 엔비디아 출신의 한 개발자는 “데이터 분석이 굉장히 중요했다. ‘여기 파보세요’라고 결정하는 데 1억 달러(1300억 원)가 걸려있었다”고 회상했다.쉽게 설명해 엔비디아의 GPU가 연산 작업을 특출나게 잘해서 데이터 처리나, 시뮬레이션 시간을 굉장히 단축했다는 의미다. 수조 원 들어가는 신약 개발 과정을 떠올리면 시뮬레이션 시간을 줄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엔비디아의 사업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엔비디아는 모바일 기기에 진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퀄컴에 밀려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엔비디아가 만든 태블릿PC, 텔레비전 셋톱박스, 스마트 스피커 등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2000년대 후반 리먼 브러더스 사태 때는 엔비디아도 휘청했다. 엔비디아의 기업가치가 고점 대비 80%나 추락했다. 젠슨 황은 전체 직원의 6.5% 수준인 360여 명을 해고해야 했다. 반도체 기업 AMD(황의 첫 직장이자 오늘날 엔비디아의 최대 라이벌)가 엔비디아를 인수하려고 했는데, 황이 합병 회사의 CEO 자리를 고집해 거래가 무산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AMD는 대신에 그래픽 반도체 업체 ATI를 인수했다. 5년여 동안 20억 달러(약 2조7000억 원)를 쏟아부은 쿠다는 아직 제대로 된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 엔비디아의 분기당 매출이 1조 원 내외였던 것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투자였다. 쿠다 사용 개발자 수는 10만 명 근처에서 정체돼 있었다. “엔비디아 칩 좀 공짜로 보내주실 수 있나요?”엔비디아는 GPU 슈퍼컴퓨터 생태계를 포기하지 않았다. 2009년 1월 스탠퍼드대에서 최고 컴퓨터 과학자로 꼽히는 빌 달리(현 엔비디아 수석 과학자) 교수를 데려왔다. 같은 해 3월에는 처음으로 연례 개발자 콘퍼런스인 ‘GTC’를 개최했다. 컴퓨터 과학자인 제프리 힌턴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는 첫 GTC 행사를 찾았다가 영감을 얻었다. 그는 행사가 끝나고 엔비디아에 연락해 이렇게 말했다. “방금 머신러닝 연구자 1000명에게 엔비디아 칩을 꼭 사야 한다고 이메일을 보냈어요. 그런데, 저 혹시… GPU 하나만 공짜로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힌턴 교수는 신경망을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AI)을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인공 지능에 관한 연구가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았고,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수학이나 체스(또는 바둑)처럼 규칙과 정의가 명확한 분야에서만 작동했다. 논리적 추론이나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언어 등에서는 발전이 더뎠다. 예를 들어, AI에 번역을 맡기려면 두 언어의 전체 문법과 모든 단어를 입력하고 각각의 단어와 문장을 대응시키는 수작업이 필요했다.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걸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중의적 표현을 완벽하게 소화해내지 못했다.사물에 대한 인식에서도 장벽이 높았다. ‘고양이’를 인식하는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치자. 먼저 고양이 이미지의 여러 요소를 분리해야 한다. ‘4개의 다리’와 ‘뾰족한 두 귀’, ‘수염’, ‘꼬리’ 등을 입력할 것이다. 그런 다음, AI에 귀가 접힌 스코티시폴드종 고양이를 보여주면 ‘고양이가 아닙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올 것이다. 최대한 상세하고 다양한 고양이 모습을 입력해놓을 수 있지만, 그 자체로 매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힌턴 교수는 기존과 다르게 인간의 뇌세포가 상호 작용하는 방식을 모방한 ‘인공 신경망’ 방식을 연구했다. 수천 장의 고양이 사진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패턴을 찾아내, 처음 본 고양이 사진도 고양이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딥러닝 기술의 기본 개념이다. 그런데, ‘뉴런(신경세포)’이 문제였다. 평균적으로 인간의 뇌에는 약 1000억 개의 뉴런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각각의 뉴런은 최대 1만여 개의 다른 뉴런과 연결돼 있다. 뉴런 간 접점이 100조에서 1000조 개 사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뇌를 흉내 내려면 컴퓨터가 뉴런들의 상호작용만큼 어마어마한 연산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인공 신경망 개념이 1940년에 등장하고도 진전이 없었던 이유다. 힌턴 교수는 GTC에서 답을 찾아냈다. 엔비디아 GPU의 병렬식 연산 능력이면 인공 신경망 구축이 가능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선구자들엔비디아는 제안을 거절했고, 힌턴 교수와 토론토대 조교들(일리야 수츠케버, 알렉스 크리제브스키)은 아마존에서 지포스 그래픽카드 2개(GTX 580)를 구입했다. 조교들은 엔비디아의 쿠다에서 시각 인식 신경망을 훈련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동안 수백만 개의 이미지를 공급했다. 힌턴 교수는 “크리제브스키 집 침실에서 2개의 GPU가 윙윙거리며 학습했다”며 “전기세는 부모님이 내주셨다고 한다”고 말했다.인공 신경망에 ‘알렉스넷(AlexNet)’이라는 이름을 붙인 크리제브스키는 2012년 시각 인식 경연대회(ImageNet)에서 이를 선보였다. 인공 신경망을 사용한 참가자는 크리제브스키가 유일했다. 크리제브스키는 이전 대회에서 25% 수준이었던 오류율(딸기, 고양이, 강아지 같은 이미지에 라벨을 잘못 붙이는)을 15%까지 떨어뜨리며 1등을 차지했다. 대회 주최 측은 처음에는 부정행위를 의심했다. 그 정도로 큰 진전이었다. 알렉스넷에 대한 설명이 담긴 9쪽 분량의 크리제브스키의 논문은 이후 10만 번 이상 인용됐다. 엔비디아 그래픽카드 같은 특수 GPU가 범용 CPU보다 신경망을 최대 100배 빠르게 훈련할 수 있다는 내용이 논문의 핵심이다.조교 중 한 명인 수츠케버는 “GPU가 나타났을 때 기적처럼 느껴졌다”고 표현했다. 힌턴 교수는 “쿠다 없이 머신러닝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며 “패러다임이 바뀌는 빅뱅 같은 순간이었다”고 강조했다. 이름이 알려진 힌턴 교수와 일리야 수츠케버, 알렉스 크리제브스키는 회사를 차렸는데, 반년도 안 돼 구글에 인수됐다. 이들은 구글의 인공지능 연구팀 구글 브레인에 합류해 그렉 코라도, 제프 딘, 앤드류 응 등의 (현재 전설적인 인물로 꼽히는) 연구원들과 힘을 합쳤다.비슷한 시기 페이스북(현 메타)도 당시에도 굉장히 유명했던 컴퓨터 과학자 얀 르쿤 뉴욕대 교수(현재 AI 천왕 중 한 명으로 꼽힘, 힌턴 교수실에서 연구한 적 있음)를 영입했다. 구글과 페이스북은 저명한 학자들을 서로 모셔가면서 ‘인공지능 연구자 독과점 체제’를 구축해나갔다.구글 브레인 팀이 맡은 가장 큰 프로젝트는 당시 적자투성이였던 ‘유튜브’를 되살리기는 것이었다. 구글 브레인은 고객이 좋아할 만한 동영상을 파악하고 추천하는 방식으로 알고리즘을 다시 짰다. 또, 유튜브 비디오를 웹사이트나 블로그에 올릴 수 있게 해 유튜브를 단순 동영상 서비스가 아닌 소셜미디어 플랫폼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유튜브 동영상을 자동으로 재생하게 만든 것도 이들이 한 작업 중 하나였다. 이러한 기술들은 인공지능 연구에서 나온 것이고, 구글 브레인은 엔비디아의 GPU를 사용했다.얀 르쿤 교수의 페이스북도 유튜브처럼 AI를 기반으로 비즈니스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 연구를 기반으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고객에게 어떤 콘텐츠를 먼저 보여줄지를 결정했다. 우리가 매 순간 맞이하는 고객 맞춤형 광고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나왔다. 그러자, 실리콘밸리에서 소수의 빅테크 기업이 인공지능 학자들을 독과점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업계에서 주목받던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와 샘 올트먼 와이콤비네이터(현 오픈AI 최고경영자) 대표가 2015년 실리콘밸리 로즈우드 샌드힐 호텔에 구글과 페이스북의 주요 AI 연구원들을 초대했다.이들은 저녁 식사에서 “현재의 독과점 구조를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을 지원해주면 될까”라고 물었다. 연구원들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시큰둥했다. 회사의 지원이 충실해 어디로도 이직할 마음이 없다는 뜻이었다. 딱 한 명, 힌턴 교수의 제자 일리야 수츠케버만 흥미를 보였다. 수츠케버는 구글에서 머스크와 올트먼이 지원하는 비영리 연구소(설립 당시 비영리 목적이 뚜렷했음)의 수석 과학자로 자리를 옮겼다. 2015년 문을 연 챗GPT의 ‘오픈AI’였다. “일론과 오픈AI 팀을 위하여!”오픈AI는 사업 초기부터 인공지능 언어 모델에 집중했는데, 당시에는 사람처럼 말하게 하는 AI라는 개념이 생소했다. 오픈AI 연구원들은 인공 신경망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알고리즘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엔비디아 유튜브 채널에 오픈AI의 수츠케버와 동료 개발자 안드레이 카르파티가 등장한 2016년 동영상이 있다. 영상에서 카르파티는 “대규모의 데이터를 네트워크에 입력하면 문장에서 단어들이 서로 이어지는 패턴을 파악할 수 있다. 결국에는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처럼 컴퓨터와 대화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7년 구글 브레인 팀이 한발 앞서 ‘트랜스포머’라는 모델로 이를 구체화했다. 참고로 트랜스포머는 챗GPT에서 T의 약자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의 확률 관계들을 사전에 학습시켜 인간처럼 언어를 구사하게 한 것. 쉽게 설명하면, 컴퓨터가 A, B 다음 나올 철자가 C라는 것을 유추하게 만드는 개념이다. 번역할 때 맥락을 파악하는 일이기도 하다. 추리 소설로 비유할 수도 있다. 사람이 소설책을 끝까지 읽고 ‘확률적으로’ 범인을 예측하는 것처럼 인공지능이 비슷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원리는 간단하지만, 이를 실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범인을 정확하게 예측하려면 이해관계부터 정황, 각종 증거 등을 전부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이 같은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려면 엄청난 양의 연산 작업(학습)이 수반돼야 한다. 컴퓨터가 수행해야 할 작업이 어마어마해지는 셈이다. 연산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번역을 예로 들면, 이전에는 문장을 단어들로 분리해 먼저 나오는 것부터 순서대로 연산 과정을 거쳐 대응 값을 출력했다. 맥락과 앞뒤 단어 사이의 관계성을 측정하는 트랜스포머 방식에서는 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병렬 방식’의 연산이 필요하다. 엔비디아의 GPU가 중요해졌다.엔비디아는 2016년 오픈AI의 주문을 받아 12만9000달러(약 1억7000만 원)짜리 AI 용 서버를 만들었다. 서류 가방 크기로 8개의 그래픽 프로세서가 탑재된 이 슈퍼컴퓨터는 기존 컴퓨터에서 6일 이상 걸리는 작업을 2시간 만에 처리했다. 젠슨 황은 오픈AI 사무실에 슈퍼컴퓨터를 직접 전달하면서 슈퍼컴퓨터에 응원 메시지와 사인을 적었다.“일론(머스크)과 오픈AI 팀을 위하여! 컴퓨팅과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오픈AI는 2018년 6월 첫 대형 언어 모델인 ‘GPT-1’을 선보였는데, 이 과정에서 돈이 곧 경쟁력이라는 사실을 깨우쳤다. 오픈AI는 챗GPT 첫 번째 버전인 GPT-1에 1억2000만 개의 변수(파라미터)를 학습시켰다. 다음 해 나온 GPT-2는 15억 개를 훈련했다. GPT-3(2020년 6월 출시)는 1750억 개, GPT-4(지난해 3월)는 1조7000억 개(추정)의 매개변수를 학습했다. 공부를 많이 할수록(학습시킨 변수가 많을수록) 챗GPT는 똑똑해졌지만, 그만큼 뛰어난 연산 능력이 필요했다. 비싼 엔비디아 GPU가 많이, 정말 많이 필요했다.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조달하기 위해 비영리법인인 오픈AI는 2019년 영리법인을 자회사로 만드는 독특한 결정을 내리게 됐고, 결국 마이크로소프트(MS)에서 130억 달러(약 17조 원) 등 거금을 투자받았다. ▶오픈AI와 챗GPT 상업화 관련 내용은 신비월드 46화 참고.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31208/122542180/1 되살아난 ‘그레이스 호퍼’ 챗GPT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1억 명의 사용자를 모으면서 오픈AI에 투자한 MS에 먼저 관심이 쏠렸지만, 전문가들은 진정한 승자는 엔비디아라고 말한다. (연일 치솟는 엔비디아의 주가가 이를 증명해주는 듯하다) 엔비디아가 전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기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준비된 회사였기 때문에 행운을 잡을 수 있었다. 챗GPT가 세상에 등장하기 전까지 AI는 기존 서비스의 효율성을 높이거나 수익성을 강화하는 방편으로만 존재했다. 인공지능 비즈니스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엔비디아는 불투명한 미래에 과감하게 배팅했다. 젠슨 황은 지난해 대만국립대 졸업식 연설에서 “이 새로운 분야(AI)를 발전시키기 위해 회사의 모든 부분을 전환했다”며 “지난 10년간 여기에 300억 달러(약 40조5000억 원) 이상을 투자했다”고 강조했다.먼저, ‘쿠다’가 있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엔비디아는 인공지능이나 관련 알고리즘 개념이 생기기도 전에 개발자들과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엔비디아는 2006년 쿠다 출시 이후 4년 동안 개발자 10만 명을 모으는 데 그쳤지만, 쿠다에 대한 지원을 줄이지 않았다. 그 결과, 2016년 100만 명의 개발자가 쿠다에 모였다. 현재는 400만 명의 개발자가 쿠다를 사용하고 있다. 2020년에는 이스라엘의 작은 반도체 회사 멜라녹스를 70억 달러(약 9조4000억 원)에 인수해 업계를 놀라게 했다. 컴퓨터 네트워킹 공급업체인 멜라녹스는 대규모 데이터를 빠르고 원활하게 이동시키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때만 해도 기존 기술(이더넷)로 충분해 비싸게 샀다는 말이 많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멜라녹스의 기술력이 빛을 뽐냈다. AI 연구개발로 여러 CPU와 수십 개가 넘는 GPU 등이 결합하면서 칩 간의 원활한 데이터 이동이 중요해졌다. (인텔도 멜라녹스를 사려 했는데 엔비디아에 뺏겼다)2022년, 엔비디아는 완전히 새로운 칩을 발표했다. 데이터센터 전용으로 쓸 수 있는 ‘그레이스 CPU’다. 엔비디아는 그동안 슈퍼컴퓨터를 만들 때 AMD나 인텔의 CPU를 라이선스 비용을 내고 구매해 넣어왔다. 그러다가 직접 CPU까지 개발했다.같은 해 9월, GPU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엔비디아 GPU 시리즈는 게임용 그래픽카드든 데이터센터용이든 동일한 설계방식(아키텍처)을 사용했는데, 이를 분리했다. 데이터센터 전용으로 설계한 GPU를 내놓은 것. 이 칩이 호퍼 GPU, ‘H100’이다. 제품들의 이름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기술 발전을 주도한 여성 과학자 ‘그레이스 호퍼(1906~1992)’에서 가져왔다. MS + 애플 = 엔비디아엔비디아는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을 한 번에 이용할 수 있는 클라우드 서비스(DGX)를 지난해 선보였다. 호퍼 GPU와 그레이스 CPU, 칩 간의 뛰어난 데이터 네트워크 능력, 소프트웨어 개발 플랫폼 쿠다 등 AI 개발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기술들을 총망라했다. DGX 월 구독료만 내면 비싼 GPU를 사지 않고도 엔비디아의 최신 GPU와 기술들을 이용할 수 있다. H100 GPU 8개를 탑재한 DGX의 월 구독료는 서버당 3만7000달러(약 5000만 원) 수준이다. H100 GPU의 가격은 1대당 3만 달러(약 4000만 원)로 알려져 있다. AI 기업이 서비스 개발을 하려면 (엔비디아 GPU를 많이 사서) 데이터센터를 직접 조성하거나, (엔비디아 GPU를 많이 구매해놓은) MS 같은 클라우드 업체에 요금을 내고 데이터센터를 빌려 써야 한다. 엔비디아는 MS, 구글, 오라클 등 클라우드 회사들과 파트너십을 맺었다. AI 회사들은 MS 등을 통해서 엔비디아의 DGX 소프트웨어를 이용할 수 있다. 엔비디아는 자사 클라우드를 이용하면 AI 개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한 번에,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젠슨 황은 비용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는 고객의 비용을 줄여주는 회사”라고 강조했다. 클라우드 업체를 이용해도 엔비디아 GPU를 사용하는 것이니, 업체에 이용료를 내지 말고 엔비디아 클라우드를 곧바로 쓰라는 의미로 보인다. 그동안 개발자들은 엔비디아를 마이크로소프트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봤다. 엔비디아가 표면적으로는 반도체나 데이터센터 장비를 생산해왔지만, MS처럼 운영 체제나 프로그래밍 환경 등도 조성해왔기 때문이다. 애플과 비슷한 면도 있다. 엔비디아 플랫폼은 애플의 모바일 운영 체제 iOS(앱스토어)처럼 폐쇄적이다. 쿠다의 AI 개발 프레임워크나 도구, 라이브러리가 엔비디아 GPU에서만 작동한다. 쿠다를 사용하는 한, 엔비디아 칩을 써야만 한다. 애플이 아이폰을 판매하고 이후 구독 등 서비스로 이익을 거둔 점도 유사하다. 엔비디아는 현재 클라우드 서비스를 판매 중이다. 젠슨 황은 최근 여러 행사에서 “우리는 아이폰이 등장한 순간과 같은 혁명을 AI 분야에서 맞이하고 있다”고 말했다. 선택받은 ‘칩’엔비디아는 지난해 4분기 매출 29조5000억 원, 순이익 16조4000억 원의 실적을 기록했다. 순이익률이 55.6%에 달했다. 지난해 분기 마진율(매출총이익률)이 70%가 넘게 나온 적도 있었다. (쿠다가 등장하기 전에는 마진율이 20%대였음)엔비디아가 AI 관련 시장에서 독점적 영역을 구축하고 놀랄 만큼 높은 이익을 거두자 빅테크들도 대응에 나서기 시작했다. 구글은 AI 연구개발에서 엔비디아 GPU를 대신할 수 있는 자체 칩(TPU)을 개발해 일부 사용하기 시작했다. 구글, 인텔, 퀄컴 등은 엔비디아 생태계에 맞서겠다며 손까지 잡았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구글과 인텔, 퀄컴 등은 ‘UXL 재단’이라는 기술 컨소시엄을 구성해 ‘원API’라는 오픈소스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해당 프로젝트는 어떤 반도체 칩이나 하드웨어에 상관없이 모든 컴퓨터에서 작동하는 소프트웨어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반도체 분야에서 iOS와 안드로이드 싸움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엔비디아를 대체할 수 있는 기업이 나올 수 있을까. 단기간에는 쉽지 않아 보인다. AMD나 구글이 엔비디아 못지않은 GPU를 ‘짠’하고 설계했다고 치자. 여기서 그쳐선 안 된다. 엔비디아가 멜라녹스를 인수하며 강화한 고속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NVLink)까지 갖춰야 한다. (멜라녹스만 한 회사가 아직 시장에 없다고 알려짐) 엔비디아의 DGX처럼 서버를 구축하려면 하드웨어 조립업체도 찾아야 한다. 더 큰 장벽이 있다. 쿠다 만큼 우수한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쿠다 개발에는 수천 명의 전문가와 수조 원이 투입됐다. 무엇보다 쿠다에 대응하는 플랫폼을 내놓더라도 개발자들을 설득해야 한다. 개발자 400만 명의 ‘네트워크 효과’가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없지만, 카카오톡 대신 다른 SNS를 쓰게 만드는 것만큼 어려워 보인다. 아, 경영진도 설득해야 한다. “시장에서 증명된 엔비디아를 두고 왜 다른 회사 제품을 구매해?”라는 답변이 돌아올 수 있다. 브랜드 파워가 이렇게 무섭다. 그런데, 빅테크 기업들이 대응책을 마련하는 동안 엔비디아는 가만히 있을까. 엔비디아는 6개월마다 신제품을 내놓는 괴물 같은 회사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 202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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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엔비디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上)[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마약보다 구하기 힘든 ‘H100’“지금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구하기가 마약보다 어렵다.”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가 전 세계 정보기술(IT) 기업들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주력 제품이 인공지능(AI) 연구·개발의 필수재로 꼽히면서 품귀 현상을 빚을 정도로 수요가 몰리고 있어서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5월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의 한 행사에서 엔비디아의 GPU 부족에 대해 언급했다. 품귀 현상은 현재 진행형이다. 현재 엔비디아의 최고 사양 GPU인 ‘H100’은 6개월은 기다려야 받아볼 수 있다. IT 기업들은 기다려서라도 받겠다는 상황이다. 글로벌 시장 조사 기관 퓨처럼그룹의 수석 애널리스트인 대니얼 뉴먼은 “고객들은 엔비디아 경쟁사에서 제품을 구매하기보다 엔비디아 것을 기다리고 있다”며 “6개월이 아니라 1년 6개월을 기다려서라도 받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엔비디아 실적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엔비디아는 지난해 매출이 609억 달러(약 80조3900억 원), 영업이익은 329억 달러(약 43조4300억 원)로 전년보다 각각 125%, 311% 증가했다고 지난달 22일(현지시간) 밝혔다. 4분기(11~1월) 영업이익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무려 983%나 뛰었다. 시장 전망치를 넘어선 수치다. 엔비디아는 “H100과 같은 서버용 AI 칩 판매가 실적을 이끌었다”고 밝혔다. 엔비디아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데이터센터 사업도 409% 성장했다. 실적 발표 직후 뉴욕증시 시간외거래에서 엔비디아의 주가는 9.5%까지 증가했다.엔비디아의 주가는 연일 상승세다. 연초 470달러 수준에서 이달 8일 974달러까지 치솟았다. 지난해 6월 1조 달러(약 1310조 원) 수준이었던 엔비디아의 기업가치는 2조 달러(약 2620조 원)마저 넘어섰다. 엔비디아는 세계 최대 석유기업인 사우디 아람코를 제치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비싼 회사가 됐다. 1위와 2위는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애플이다. 뉴스트리트리서치 피에르 페라구 애널리스트는 “빅테크 업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들도 엔비디아 CEO인 젠슨 황에게 정말, 정말, 정말 정중하게 행동하고 있다. 모두가 엔비디아를 화나게 할까 봐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엔비디아 GPU가 뭐길래, 얼마나 중요하면 이렇게 난리일까. 엔비디아는 어쩌다가 이토록 중요한 제품을 개발하게 됐을까. ● 김밥천국을 좋아하는 남자 엔비디아를 창업한 젠슨 황 CEO는 1963년 2월 17일(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과 같은 날 출생) 대만의 남부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을 해외에서 살았다. 캐리어(에어컨 회사) 엔지니어였던 아버지가 ‘기회의 땅’에서 젠슨 황이 성장하기를 희망해서다. (황이 4살 무렵 미국 뉴욕에 갔다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이 같은 다짐을 했다고 한다) 젠슨 황의 부모는 황이 9살이 되자 미국 켄터키주 오네이다의 저렴한 기숙학교에 입학시켰다. 황은 “오네이다 마을에 온 최초의 중국인”이라고 회상했다. 등록금이 저렴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사고 친 아이들이 모이는 특수학교였기 때문. 교도소에서 막 출소한 그의 룸메이트는 일곱 군데의 자상(刺傷)에서 회복 중이었다. 황은 학교에서 인종 차별과 따돌림을 당했는데(칼에 찔린 적도 있다고 함), 좌절하지 않고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했다. 자신보다 8살 많은 룸메이트에게는 수학을 가르쳐줬다.가정형편 탓에 몇 년이 지나서야 젠슨 황의 부모가 미국에 건너왔다. 가족은 워싱턴주를 거쳐 오리건주 포틀랜드 교외로 이사했다. 당시 공립학교에 다니던 황은 학업에서 재능을 보여(특히 수학) 남들보다 2년 일찍 오리건주립대에 입학했다. 전공은 전기공학. 반도체 산업에 발을 담근 건 1985년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다. 황은 자신만큼 전기공학을 사랑한 아내를 만나 실리콘밸리로 이사했다. 반도체 기업 AMD(오늘날 엔비디아의 최대 라이벌)에 취업한 황 CEO는 일과 학업을 병행했다. 8년여 끝에 미 스탠퍼드대에서 전기공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엔지니어 경험을 쌓은 젠슨 황은 몇 년 후 LSI로직이라는 브로드컴 자회사로 이직했는데, 그의 가장 큰 고객사 중 한 곳이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자바 언어 개발)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였다. 1992년 석사 학위를 마친 황은 어느 날 썬에서 친하게 지내던 엔지니어들(크리스 말라코프스키, 커티스 프리엠)과 축하 자리를 가졌다. 황은 자신이 좋아하는 ‘데니스(Denny‘s)’에서 친구들을 보기로 했다. 데니스는 나초, 햄버거, 샌드위치 등 ‘미국식 백반’을 파는 패스트푸드 체인점이다. 지점이 많고 24시간 영업해 ‘미국의 김밥천국’, ‘미국의 기사식당’으로 불린다. 학창 시절에 여기서 아르바이트했던 황은 “이때 경험이 외향적인 성격을 갖는 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지난해 그는 미 시사주간지 뉴요커와의 인터뷰도 데니스에서 했다.이곳에서 셋은 운명을 바꿀 대화를 나눴다. 썬의 엔지니어들은 “직장생활이 재미없다”면서 ‘게임용 3차원(3D) 그래픽카드’를 함께 개발하자며 창업을 제안했다. 일반 PC나 비디오게임에서도 3D 기술을 활용할 수 있도록, 그래픽을 ‘가속(업무 처리 속도를 증폭)’하는 보급형 장치를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였다. 평소 게임을 좋아했던 황은 금세 마음을 빼앗겼다. 당시 3D 그래픽에 관한 관심이 뜨거웠다. 영화 ‘쥬라기 공원’이 곧 개봉할 예정이었다. 다만, 3D 그래픽은 쥬라기 공원 제작비 정도는 있어야 활용할 수 있는 ‘비싼 기술’이었다. 이들의 안목이 대단한 이유는 대화를 나눈 시기가 1993년이었기 때문이다. PC(개인용 컴퓨터) 게임 시장 자체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95’는 1년 반 후에나 등장했다. 시장이 생겨나기도 전에 제품부터 떠올린 셈이다.● “우리 회사 폐업까지 30일 남았습니다”세 사람은 실리콘밸리의 유명 벤처투자사인 세퀘이아 캐피털 등에서 창업 자금을 지원받아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회사 이름부터 지어야 했다. 당시 이들은 첫 번째 그래픽 칩을 설계하고 있었는데, 작업 중인 파일을 ‘dot-NV’로 저장하고 있었다. ‘NV’는 ‘넥스트 버전(Next Version)’의 약자다. 세 사람은 ‘NV’가 포함된 단어를 찾기 위해 사전을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라틴어 ‘인비디아(Invidia)’를 발견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질투의 여신’의 이름이다. 그렇게 최초의 그래픽카드 전문 회사 ‘엔비디아(Nvidia)’가 탄생했다. 그에게 사업은 수학만큼 쉽지 않았다. 엔비디아는 처음 게임 기기용 그래픽 칩(카드)을 개발했는데 새로운 설계방식(아키텍처)을 택했다가 쫄딱 망했다. 3D PC 게임의 가능성을 본 것은 엔비디아만이 아니었다. MS는 윈도에서 개발자들이 3D 게임을 만들 수 있도록 개발 생태계(DirectX)를 만들고 있었다. 개발자들은 윈도에서 직접 3D 그래픽을 구현하길 원했다. 엔비디아의 제품은 윈도 생태계에서 호환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개발자들이 ‘듣보잡’ 회사 제품에 관심 자체가 없었다. 엔비디아는 100여 명의 직원 중 70%를 해고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직원’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그래픽카드를 다시 설계하고, 프로토타입을 만든 뒤 파운드리(제조사)를 오가는 테스트 과정에 통상 2년은 걸리기 때문이다. 그동안 경쟁사들은 가만히 있을까.엔비디아는 100만 달러(약 13억 원)의 거금을 들여 이 과정을 대신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에뮬레이터)를 구매했다. 개발한 그래픽카드의 기능이 여러 PC에서 잘 작동하는지, 호환에는 이상 없는지 등을 빠르게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주 검증되지 않은 스타트업의 기술이었지만, 엔비디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엔비디아는 이를 통해 6개월 만에 두 번째 그래픽카드인 ‘RIVA 128’을 1997년 8월 선보였다. PC용 그래픽카드인 RIVA 128은 경쟁사보다 1년 이상 앞선 제품이었다. 게이머들 사이에서 금세 입소문이 나면서 RIVA 128은 4개월 만에 100만 대나 팔렸다. ‘스타크래프트’ 출시 등 ‘게임 황금기’로 불린 1998년 엔비디아는 410만 달러(약 54억 원)의 이익을 거뒀다. 다음 해 엔비디아는 미국 증시에 상장됐다. 황은 “휘청거렸던 때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무너뜨리기 가장 어려운 CEO라고 불립니다”라고 말했다.참고로 RIVA 128 제품이 출시됐을 때 엔비디아에 남은 돈은 직원들 한 달 치 월급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몇 년 동안 엔비디아는 직원 프레젠테이션 때 ‘우리 회사는 폐업까지 30일 남았다’는 말로 발표를 시작했다.● 스타트업 대표가 TSMC에 보낸 편지황이 자신을 ‘좀비 CEO’로 칭한 데는 단순히 사업 위기를 극복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CPU의 세상에서 GPU(Graphics Card, 그래픽카드)를 살려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젠슨 황에 따르면 인텔은 엔비디아를 여러 차례 퇴출하려고 시도했다. 황은 인텔과 엔비디아를 ‘톰과 제리’에 비유하면서 “인텔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한다. 인텔이 가까이 올 때마다 나는 칩(GPU)을 들고 도망친다”고 말했다. 과거만 해도 GPU 시장은 틈새시장에 가까웠다. 당시 PC 시장은 훨씬 더 똑똑한 인텔의 중앙처리장치(CPU, Central Processing Unit)가 점령하고 있었다.CPU는 사람이 디지털 기기에 특정 업무를 지시하면 이를 해독하고, 제어하고, 계산하는 장치다. 컴퓨터 ‘두뇌’라고 보면 된다. 인텔의 CPU는 1980년대 PC에 탑재된 이후로 거의 모든 분야에 사용됐다. 데이터 처리 시장에서 99%라는 어마어마한 점유율을 차지했었다. 인텔이 수십 년 동안 세계 최대 칩 제조업체로 자리할 수 있었던 이유다. (현재는 아님) 앞으로 언급할 유튜브 추천 알고리즘과 구글의 광고 추천, 챗GPT 등장에서 엔비디아의 역할을 이해하려면 CPU와 GPU의 차이를 알고 넘어가야 한다. 어렵고 복잡한 연산을 수행하는 CPU는 차례대로 업무를 수행하는 장치다. 저장한 엑셀 파일을 불러오고, 인터넷을 실행하고, 동영상을 재생하는 작업을 CPU가 한다. 반면, GPU는 복잡한 수학 작업을 아주 작은 계산으로 나눈 다음에 ‘병렬 컴퓨팅’이라는 방식으로 한꺼번에 처리한다.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간다고 생각해보자. 쇼핑카트를 직접 밀면서 쇼핑하는 것이 CPU다. 마트 통로를 돌아다니며 적어 놓은 쇼핑목록을 하나씩 집어넣고 계산대로 간다. 빠르진 않지만,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할 수 있다. GPU는 여러 사람에게 손바구니를 쥐여주고 각자 사 올 것을 지시하는 개념이다. 각자 흩어져 과일이나 화장지, 물, 고기 등을 담아온다. 손바구니에 TV나 청소기를 담아오긴 어렵지만,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은 제품들을 빠르게(동시에 흩어져 가져오는 만큼) 쇼핑할 수 있다. 다량의 단순 업무를 수행할 때, 상대적으로 정확도보다 속도가 중요할 때 GPU가 적합하다는 의미다.처음 GPU가 비디오게임용으로 개발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미지 픽셀들을 하나하나 명령해 동시에 모니터에 출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CPU도 게임용으로 활용은 가능하지만, 1초당 화면이 수십 번 이상 바뀌는 게임에서는 GPU가 더 적합하다. 미 블룸버그통신은 “엔비디아가 존재하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은 인텔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며 “게임은 엔비디아가 GPU라는 틈새시장을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엔비디아가 RIVA 128로 50억 원 이상을 벌었지만, 아직은 스타트업 수준. 그런데, 이때 엔비디아는 대만 TSMC와 위탁생산 계약을 맺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2017년 TSMC 창립 30주년 행사에서 비밀이 밝혀졌다. 엔비디아는 사업을 시작하고 TSMC에 계속 접촉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씹혔다. 젠슨 황은 RIVA 128이 소기의 성과를 내고 나서 대만에 있는 모리스 창 TSMC 창업자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보냈다.모리스 창은 편지를 읽자마자 젠슨 황에게 전화를 걸었다. 황과 직원들은 고객에게 보낼 RIVA 128 제품이 이상은 없는지 수작업으로 테스트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처음 보는 전화번호에 황은 “누구시죠?”라고 물었고, 모리스 창은 자신이 누군지 밝히며 “편지 잘 받았다”고 인사했다. 몇 초 동안 전화에서 침묵과 환호성이 공존했다.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스타트업 대표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전화를 받았다고 상상해보자. 일단 수화기를 막고 소리치지 않았을까. 딱 그 상황이다. 둘이 통화한 다음 해에 엔비디아는 TSMC와 장기 위탁생산 계약을 체결했다. 이때 맺어진 인연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엔비디아가 이후 내놓은 ‘괴물 GPU’들을 시장에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던 데에는 TSMC의 역할이 컸다. ● 엔비디아와 개발자들의 첫 연결고리 ‘지포스’엔비디아는 RIVA 128을 계속 업그레이드시켰는데, 1999년 공모전을 통해 그래픽카드의 이름을 지었다. ‘지오메트리 포스’를 줄인 ‘지포스(GeForce)’다. 이는 엔비디아의 첫 브랜딩 시도였다. 결국, 지포스는 수년간 엔비디아를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 엔비디아는 1999년 8월 지포스 이름을 단 제품(지포스 256)을 선보였는데, 이 모델이 최초의 GPU(Graphics Card)로 꼽힌다. 이전에는 ‘그래픽카드’나 ‘그래픽칩’으로 불렸다. 지포스 256은 경쟁사 GPU들보다 성능이 5배가량 뛰어났다. 쉽게 말해, 경쟁사보다 더 좋은 화질을 더 빠르게 구현하는 기술을 내놨다는 의미다. 2000년 스탠퍼드대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공부하던 대학원생 이안 벅은 23개의 지포스 GPU를 연결해 ‘퀘이크’라는 게임을 즐겼다. 그는 “8K 해상도의 첫 번째 게임 장비였다”며 “게임을 위한 장비가 벽 한쪽을 통째로 차지했는데, 정말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지포스 시리즈는 단숨에 게임용 그래픽카드 시장을 평정했다. 2013년(엔비디아 설립 20주년) 기준 전 세계 PC의 70%가 엔비디아의 GPU를 썼다. 엔비디아는 MS 콘솔 게임기 엑스박스(Xbox)에 GPU를 공급하기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연간 5억 달러(약 6600억 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엔비디아의 GPU가 다른 그래픽카드와 큰 차이를 보인 것 중 하나가 프로그래밍 도구인 ‘셰이더(Shader)’다. 조명, 입체감, 그림자 등을 개발자들이 직접 다룰 수 있는 프로그래밍 기능을 GPU(정확히는 지포스3)에 넣은 것. 엔지니어가 명령어를 넣는 일상 작업뿐만 아니라, 팔레트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창의성을 발휘해 화면을 구현할 수 있게 했다.이러한 기술 개발은 사업적인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하드웨어 성능뿐만 아니라 (우리 하드웨어에서만 작동하는) 소프트웨어를 구축해 차별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애플이 아이폰뿐만 아니라 앱스토어를 만들어 개발자들이 각종 앱을 만들게 한 것과 유사하다. 엔비디아는 이후 개발한 프로그래밍 플랫폼 ‘쿠다(CUDA)’에서 이 같은 전략을 극대화한다. 엔비디아는 마이크로소프트와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CG)도 만들어 GPU 개발 생태계를 구축했다. 일각에서는 이때부터 ‘개발자’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으로 본다.엔비디아가 기술적으로나 사업적으로 뛰어났던 또 다른 이유는 독보적으로 빠른 신제품 출시 간격이다. 엔비디아는 코로나19 시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6개월마다 성능이 향상된 새 제품을 선보였다. 반면, 1년 반에서 2년마다 새로운 것을 내놨던 경쟁사들은 하나둘씩 조용히 사라졌다.● 거대한 아르키메데스 지렛대그런데, 게임용 장치를 만들던 엔비디아는 어쩌다가 인공지능 분야에 뛰어들게 됐을까. 2000년대 초반 엔비디아가 그래픽카드 시장에서 한창 잘 나가고 있을 무렵 젠슨 황은 스탠퍼드대의 한 양자화학 연구원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다짜고짜 “당신 덕분에 오래 걸릴 연구를 단번에 해치웠다. 감사하다”고 인사했다.분자 관련 모델을 만들던 연구원은 단순 연산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학교의 슈퍼컴퓨터를 이용해도 몇 주나 걸리는 작업이었다. (초기 슈퍼컴퓨터가 CPU의 성능 위주로 구성돼 있었기 때문) 그런데 게임에 빠져 있던 아들이 단순 계산 작업이니 지포스(GPU)를 활용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연구원은 가전제품 매장인 프라이스에 가서 지포스 여러 개를 구매해 몇 시간 만에 연산을 해치웠다. 결과를 믿을 수 없었던 연구원은 스탠퍼드대의 슈퍼컴퓨터에서 똑같은 작업을 수행했다. 몇 주 뒤 나온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황은 이를 통해 게임 화면 개선 이외에 GPU의 활용 가능성을 알아챘다. 그는 GPU를 ‘거대한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무거운 것(대규모 작업)을 들어 올릴 수 있는 GPU의 능력을 비유한 것이다. GPU는 패턴과 관계를 인식하고, 추론하고, 예측하는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최근 10년 동안 인공지능 속도가 100만 배 이상 향상된 배경에는 엔비디아의 GPU가 있었다.사실, 엔비디아의 GPU는 인공지능 열풍이 불기 한참 전부터 우리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다. 유튜브 영상 추천, 인스타그램 피드, 구글 광고 등이 전부 GPU를 활용한 알고리즘으로 작동한다. 한국벤처창업학회장을 역임한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 교수는 “엔비디아는 처음에는 핵심 고객인 게이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GPU 성능을 계속 발전시켜나갔다. 그 덕분에 알고리즘 추천이나 AI 등 새로운 시장에서 돋보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물론, 단번에 엔비디아가 이를 실현한 것은 아니었다. 인공지능 시대를 준비하는 10년여 간의 과정이 있었다. 2012년 이미지 인식 대회에 참가해 세상을 놀라게 한 미 토론토대 연구원들 이야기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우리는 엔비디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下)’ 편은 30일 소개합니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 2024-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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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잉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습니다[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알래스카 1212편, 비상사태입니다”지난달 5일(현지 시간) 금요일 오후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공항. 캘리포니아주 온타리오로 가는 알래스카항공 1282편은 주말을 앞두고 승무원과 탑승객 177명으로 만석에 가까웠다. 26열 왼쪽을 포함해 몇몇 좌석만 비어있었다. 기내는 조용했다. 좌석 등받이에는 스크린이 없었고 이륙을 위해 내부 조명은 어두워져 있었다. 1282편 여객기는 4시 52분 게이트를 떠나 5시가 조금 넘어 이륙했다. 10분 후, 비행기가 지상 약 4880미터 고도에 이르렀을 무렵 26열에서 ‘펑’하는 폭발음과 함께 비행기 옆면에 구멍이 뚫렸다. 벽으로 개조한 비상구 덮개가 뜯겨 나간 것이다. 당시 비행기는 시속 440마일(약 708km)로 운항 중이었다.산소마스크가 승객들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한 승객이 “비행기 측면에 구멍이 났다”고 소리쳤고, 일부 승객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무원은 승객들에게 안전벨트를 매고 자리에 앉아있으라고 명령했다. 1282편 조종사는 항공 교통 관제소에 즉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비행기가 압력을 잃어 돌아가야 한다”고 전하고 회항을 결정했다. 이후 약 10분 동안 ‘죽음의 운항’이 이어졌다. 26열의 비상구 바로 옆 좌석 두 곳에는 승객이 없었지만, 인근에 앉아있던 10대 소년은 입고 있던 셔츠가 통째로 벗겨져 밖으로 빨려 나갔다. 27열에 앉아 있던 조시아 맥컬 군(12)은 자신이 놀라 떨어뜨린 휴대전화가 구멍 사이로 날아가는 것을 지켜봤다. 할머니가 캄보디아에 다녀와 선물한 연갈색 곰인형도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맥컬 군은 “1초 정도 고요했다가 얼어붙을 것 같이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어요”라고 말했다. 크리스토퍼 히크먼 씨(44)는 원래 29석에 예약돼 있었다. 탑승 직전 함께 탈 어머니가 불편할까 봐 좌석을 업그레이드해 일등석 바로 뒤인 8번째 줄에 앉아있었다. 구멍에서 꽤 떨어진 자리였지만,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비행기가 추락하면 좌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옆자리에 앉은 여성이 그에게 “손을 좀 잡아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히크먼 씨와 그의 어머니는 여성의 손을 꼭 잡으며 서로를 위로했다. 공포에 질린 승객들은 가족과 지인들을 찾았다. 니콜라스 호크 씨(33)는 “하얀 수증기나 구름 같은 것이 기내에 흘러 들어왔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스테파니 킹 씨도 “남자친구와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했다. 1282편은 인명 피해를 보지 않고 5시 27분 포틀랜드공항에 긴급 비상 착륙했다. 탑승객들에 따르면 비행기가 완전히 멈춘 뒤에도 기내는 한참 동안 조용했다. “잠시 자리에서 기다려 달라”는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오자 승객들은 그제야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 “여러분의 가족이 탔을 수도 있습니다” 미 연방항공청(FAA)은 다음날인 6일 1282편의 사고 기종인 ‘보잉 737 맥스9’의 운항을 전면 중단시키고 점검을 지시했다. 미국 내 171대의 737 맥스9이 4~8시간씩 점검받았다.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는 사고 원인을 찾기 위해 포틀랜드에 진상 조사단을 파견했다. 최우선 과제는 사라진 ‘비상구 덮개(도어 플러그)’를 찾는 것. 도어 플러그는 창문과 벽체로 이뤄진 일종의 덮개다. 더 많은 좌석을 넣기 위해 불필요한 비상구를 막는 데 쓰인다. 폭 66㎝, 높이 121.9㎝ 크기의 30㎏짜리 덮개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행기의 경로를 추적하고, 관련 지역 사람들에게 마당과 건물 옥상 등을 뒤져봐 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이틀 뒤, 과학 교사인 밥 사우어의 집 뒷마당에서 ‘문짝’을 발견했다. NTSB는 도어 플러그에서 문을 비행기에 고정하는데 사용되는 볼트 4개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NTSB 관계자들은 볼트가 애초에 제대로 설치돼 있었는지를 파악 중이다. 737 맥스9의 도어 플러그는 볼트 4개와 12개의 고정용 부품으로 동체에 결합한다. 항공사들의 자체 조사 결과 미국 내 동일 기종에서 유사한 결함이 발견됐다. 미 유나이티드항공은 737 맥스9 79대 중 약 10대에서 도어 플러그의 볼트가 충분히 조여지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8일 발표했다. 알래스카항공도 65대 중 일부에서 비슷한 문제를 발견했다.주말이 지나고 8일 뉴욕 증시에서 보잉 주가는 8% 넘게 하락했다. 미국 증시가 1월 내내 상승 랠리를 펼쳤지만, 보잉의 주가는 이후에도 하락세를 보였다. 여행객들이 737 맥스9 기종의 탑승을 피하는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항공사와 여행사에 비행기 기종과 좌석 배치를 묻는 전화가 이어졌다. 여행을 앞둔 이스트버그 씨(25)는 “제 좌석이 26열(덮개가 날아간)과 가깝다. 창가 자리라 더 걱정된다”고 전했다. 미 항공기 제작사 보잉의 데이브 칼훈 최고경영자(CEO)는 9일 미 시애틀 인근 737 공장에서 열린 직원 간담회에서 여객기 안전사고의 위험성을 강조하면서 눈물을 훔쳤다. 그는 손상된 비행기 사진을 떠올리며 “나도 자식이 있고 손자가 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일이 될 수 있으니 책임감을 가지고 일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26일 검사 및 유지보수 절차를 거친 737 맥스9이 3주 만에 운항을 재개했지만, 불안감은 여전하다. 1282편 이후에도 일부 보잉 항공기가 말썽을 일으켰다. 17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탑승하려던 보잉 737 미국 공군기에서 산소 유출이 탐지되는 결함이 발견됐다. 20일에는 보잉 757 기종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미 항공사 델타항공 982편이 애틀랜타 하츠필드 잭슨 국제공항에서 이륙을 준비하던 중에 앞바퀴가 떨어져 나갔다. 당시 982편에는 170명 넘는 승객이 탑승하고 있었다. 미국 항공사 CEO들은 운행 지연 등 보잉 항공기 사고로 발생한 손실을 토로하면서 쓴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알래스카항공은 1282편 사고 여파로 2000억 원가량의 손실을 보았다고 밝혔다. 벤 미니쿠치 알래스카항공 CEO는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좌절과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유나이티드항공은 보잉과의 계약을 재검토하고 있다고 으름장을 놨다. 양사는 미국에서 737 맥스9 기종을 가장 많이 운용해온 주요 고객이다. 로버트 아이솜 아메리칸항공 CEO는 애널리스트들과 모인 자리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며 “보잉 정말 정신 차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면 그들도 성공하지 못합니다”일각에서는 보잉이 항공기 제조 비용을 줄이려고 과도하게 ‘아웃소싱’을 한 것이 결함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보잉은 10조 원이 넘는 비행기 개발비를 줄이기 위해 2000년대 중반부터 기체 주요 부분의 설계와 제작을 외부 업체에 맡겨왔다. 보잉이 최종 조립에 집중해 수익성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이었다. 항공기 기체 부품 제조사인 ‘스피릿 에어로시스템’은 보잉의 핵심 공급사다. 2005년 보잉에서 분사돼 사모펀드사인 오넥스에 매각됐다. 1916년 보잉 창립 이후 수십 년간 이어져 온 품질 관리가 외부로 넘어간 것. 1282편의 추락한 덮개를 포함해 보잉 737 맥스9의 70%가량을 스피릿이 제작한다. 스피릿은 캔자스주 위치타 공장에서 알루미늄 동체 등을 제작해 워싱턴주 렌튼의 보잉 공장으로 보낸다. 보잉 737 맥스 같은 단일통로(Single-aisle) 항공기는 40만 개 이상의 부품으로 구성되는데, 배관작업(튜브)과 함께 날개와 꼬리 등을 볼트로 조여 조립한 뒤 내부를 장식한다. 현재 보잉은 매월 약 38대의 항공기를 생산 중이다. 내년엔 50대 이상으로 늘릴 계획이다.외신들은 보잉의 압박과 스피릿의 과도한 업무 할당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보잉의 결함 문제로 이어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스피릿의 전현직 직원들은 보잉이 생산 속도를 높이라고 무리하게 요구해 직원들이 과도한 업무에 허덕이고 있다”고 13일 전했다. 스피릿 직원들은 하루 2대 속도로 기체를 생산할 경우 한 달간 볼트와 패스너, 리벳 등을 조합해 채워야 하는 구멍이 1000만 개에 달한다고 주장했다.코넬 비어드 국제기계항공노조 스피릿 위치타 공장 지부장은 “스피릿이 직원들에게 작업을 너무 재촉해 전 세계 곳곳에 문제가 있을 법한 비행기가 돌아다니고 있다”고 꼬집었다.2018년, 2019년 추락 사고 이후에도 비슷한 지적이 있었지만, 보잉은 아웃소싱 관행을 크게 손보지 않았다. 737 맥스8 기종은 2018년 인도네시아, 2019년 에티오피아에서 운항 중 추락한 바 있다. 당시 탑승자 전원(총 346명)이 목숨을 잃었다. FAA는 2019년 3월 맥스8의 운행을 중단시켰다가 결함 보완 후 2020년 12월 운항을 재개했다. 737 맥스는 크기에 따라 7, 8, 9, 10(7이 가장 작음)으로 구분된다.보잉과 스피릿은 지난해 4월과 8월에도 결함으로 737 맥스의 납품을 일시 중단했다. 4월에는 수직 꼬리날개를 동체와 연결하는 부품이 말썽을 일으켰고, 8월에는 기내 압력 유지 부품에서 의도치 않은 구멍이 발견됐다. 대형 사고와 각종 결함에 대한 화살이 부품 제조사에 날아오자 스피릿 CEO가 나섰다. 팻 샤나한 스피릿 CEO는 지난해 가을 한 인터뷰에서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면 그들도(보잉) 성공하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비행기 품질 문제가 단순히 스피릿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 의도치 않았던 ‘737 맥스’ 개발 보잉은 비용과 생산 속도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비판을 수년간 받아왔다. 보잉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 기종을 개발하면서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다. ‘737 맥스’다. 2011년 초 보잉에 위기가 찾아왔다. 10년 넘게 보잉에서만 여객기를 받아온 아메리칸항공이 유럽연합의 항공기 제작사 ‘에어버스’에 신형 제트기 수백 대를 주문할 수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에어버스는 2010년 단일통로형 항공기 A320의 연료 효율을 높인 업그레이드 버전 A320네오(neo)를 선보였는데, 아메리칸항공이 이 기종을 눈여겨본 것이다. 당시 항공사들의 여객기 선호도도 초대형에서 에어버스 A350, 보잉 787 같은 쌍발 광동체 여객기(통로와 엔진이 각각 2개인), A320 등의 단일통로형으로 바뀌는 시기였다. 가격이 비싸고 연료 소비가 큰 초대형 비행기의 효율성이 떨어져서다. 항공 수요에 따라 수익 변동성도 컸다. 손님을 가득 채우지 못하고 뜨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2008년 에어버스는 483대 비행기를 인도했지만, 보잉은 375대에 불과했다”며 “에어버스는 2011년 파리에어쇼에서 약 730대를 주문받았는데, 연료 효율성이 높은 신형 기종 A320네오가 인기를 끌었다”고 2019년 전했다.에어버스에 주문량을 추월당한 보잉은 A320네오의 경쟁 모델인 737을 완전히 새로운 기종으로 바꾸려는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737을 빠르게 업그레이드(737 맥스)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선회했다. 혁신보다 수익성을 택한 셈이다. 한 전직 보잉 임원은 “보잉이 맥스를 제작하기로 한 이유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쉽고, 저렴하며, 항공사(고객)에는 연료 절감 효과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11년 아메리칸항공이 737 업그레이드버전 100대를 주문하기로 하면서 같은 해 8월 맥스 개발이 시작됐는데, 보잉은 에어버스를 따라잡기 위해 개발에 속도를 냈다. 보잉 직원들은 촉박한 일정에 압박이 심했다고 털어놨다. 보잉의 전직 직원들은 “엔지니어들이 평소보다 두 배 빠른 속도로 기술 도면과 설계를 제출해야 했다”고 NYT에 전했다. 배선 조립을 담당했던 한 엔지니어는 “몇 달 동안 개발자들이 엉성한 청사진을 전달했다”며 “배선 관련 사항은 개발 후반부에 정리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청사진에는 복잡한 지침들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 파멸로 이끈 속도전아이러니하게도 737 맥스 개발의 핵심은 전작인 737과 동일한 비행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FAA 등으로부터 인증을 빠르게 받기 위해서였다. 이는 비즈니스 차원에서도 중요했다. 기존과 다른 모델로 인증을 받게 되면 조종사들이 추가로 훈련받아야 한다. 항공사들에는 제법 큰 비용이다. 보잉은 A320네오의 연료 효율성을 넘어서기 위해 (A320네오보다 연료 소모를 4% 낮추는 것이 목표) 737 맥스에 새 엔진을 장착했는데, 공기 역학이 달라지는 바람에 기체가 기울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보잉은 항공기의 기울기가 적당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기수를 조정하는 소프트웨어(MCAS·기동 특성 증대 시스템)를 추가했다. 하지만, 보잉은 이러한 변화를 조종사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다.NYT는 “이 시스템은 백그라운드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보잉은 조종사에게 이 시스템에 관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규제 당국도 이에 동의했다. 조종사는 시뮬레이터로 훈련할 필요가 없었다”고 꼬집었다. 맥스의 새로운 소프트웨어 시스템은 총 346명을 사망하게 만든 2018년, 2019년 추락 사고의 원인이 됐다. 데니스 뮬렌버그 당시 보잉 CEO는 소프트웨어 센서의 오작동이 737 맥스 추락 사고의 원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뮬렌버그 CEO는 2019년 10월 물러났고(사실상 해고), 칼훈 현 최고경영자가 자리를 이어 받았다. 규제 기관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미 연방항공청(FAA)이 비행기 제조사를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001년부터 보잉은 자체 안전 테스트를 더 많이 수행하기 위해 로비를 활발히 했고, FAA가 2005년부터 이를 허용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한 전직 보잉 고문은 이를 두고 “어린아이에게 과자 가게를 맡긴 것과 같다”고 평했다. NYT에 따르면 보잉은 737 맥스 사고로 2019년 80억 달러(약 10조6000억 원)의 손실을 입었다. 2021년에는 추락 사고와 관련해 미국 법무부와 25억 달러(약 3조3300억 원)의 벌금을 납부하는 데 동의했다. ● “아이디어는 달러로 측정된다”보잉의 추락사고와 각종 결함은 속도와 비용 등을 우선시한 데 따른 결과라는 분석이다. 미 블룸버그통신은 “737 맥스의 실패는 속도와 비용, 무엇보다도 주주 가치에 중점을 둔 결과”라고 평가했다. 블룸버그는 “뮬렌버그가 2015년 CEO에 자리한 뒤 공급업체(스피릿 같은)에 가격 양보(마진 축소)를 요구하고 엔지니어에게 더 많은 부담을 안겼다. 더 많은 비행기를 생산하면서 인력을 7% 감축한 뮬렌버그의 지휘 아래 효율성 추구가 가속했다”고 꼬집었다. 보잉 전 엔지니어는 “회사의 끊임없는 비용 절감에 안전이 희생됐다”라고도 했다. 737 맥스의 연료 시스템 기술자는 아담 딕슨은 보잉에서 30년 근무했다가 2018년 11월 회사를 그만뒀다. 그가 “회사의 이윤과 맞닿아 있는 성능 목표에 도달하려면 안전을 희생해야 했다. 이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회사를 나왔다”고 했다. 전직 보잉 직원에 따르면 엔지니어의 설계 비용은 연례 성과 평가에 반영됐다. 한 관리자는 한 엔지니어의 연례 평가에서 “아이디어는 달러로 측정된다”고 말했다.보잉은 이에 대해 강하게 부정했다. 보잉은 “비용을 우선시한다는 일각의 우려에 동의할 수 없다. 안전을 성과나 목표와 바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보잉이 혁신보다 지나치게 주주 가치에 신경 썼다는 비판도 있었다. 보잉 경영진은 2010년부터 400억 달러(약 53조4000억 원) 이상을 자사주 매입에 쏟아 부었다. 블룸버그는 “이 전략으로 보잉은 월스트리트를 열광시키고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에서 한동안 최고의 실적을 기록했지만, 불황과 새로운 경쟁 위협에 대한 대비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평했다. 보잉은 추락사고와 결함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품질 관리를 강화하겠다고 했지만, 기존의 경영 방식을 크게 바꾸진 않았다. 오히려 공급사에 책임을 떠넘겼다는 주장도 있었다. 스피릿의 전직 품질 검사관인 조슈아 딘은 보잉이 2018년, 2019년 사고 이후 공급사들에 결함을 줄일 것을 요구했고, 이는 품질 제고가 아닌 결함 축소 보고로 이어졌다고 폭로했다. 그는 “스피릿 직원들은 품질 관련 우려가 관리자에 전달되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품질 검사관들은 문제를 많이 지적할 경우 보복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지난해 스피릿 노조는 다수의 결함을 발견한 검사관들이 계약직으로 바뀐 것에 대해 회사에 항의했다. 딘은 자신이 기체에 잘못 뚫린 구멍을 지적한 뒤 해고됐다고 주장했다. ● 추락만큼 무서웠던 팬데믹 2020년 말 737 맥스의 운항이 재개됐지만,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을 거치면서 보잉은 최근까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왔다. 보잉은 한 분기에만 수천억 원의 손실을 보았다. 2020년부터 6개 분기 연속 손실을 기록하기도 했다. 블룸버그는 “보잉은 (추락 사고에 따른) 737 맥스 운항 중단, 팬데믹 등 두 번의 위기를 겪으면서 약 390억 달러(약 51조9000억 원)의 순부채를 재무제표에 기록하고 있다”고 최근 전했다.매출의 대부분을 보잉의 737에 의존해 온 스피릿(보잉 기체 납품사)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2019년 말 미국 내 4개 공장에서 1만5900여 명을 고용하고 있던 스피릿은 팬데믹으로 수천 명을 해고했다. 리오프닝 이후 여객, 화물 등 항공 수요가 급증했지만, 이번에는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인재들이 아마존의 블루오리진이나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 같은 돈 많은 우주탐사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WSJ은 “단순히 직원을 잃은 개념이 아니다. 스피릿은 수년간 쌓아온 전문성을 잃었다”며 “숙련된 정비사나 작업 품질을 검사할 수 있는 전문가도 부족했다”고 전했다. 이는 보잉도 마찬가지였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737 맥스 추락사고 이후 3200명 이상의 엔지니어가 보잉을 떠나 아마존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보잉과 스피릿의 재정적 위기와 공급망 문제, 인력 부족 사태 등은 항공기 생산 지연으로 최근까지 이어졌다. 지난해 일부 고객사들이 크게 반발했다. 저가 항공사인 라이언에어의 마이클 오리어리 CEO는 “머리 없는 닭처럼 (생각 없이) 뛰어다니고 있다”며 지난해 보잉 경영진을 비판했다. 블룸버그는 “같은 업계에 있으면 한 다리 건너 아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CEO 해임을 요구하는 경우는 드물다. 설사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어도 공개적으로 비난하진 않는다”며 보잉에 대한 비판이 이례적이라고 평했다.● 737 맥스, 가장 성공적인 ‘실패작’으로 남을까 일각에서 737 맥스를 ‘실패작’으로까지 깎아내렸지만, 추락사고 이전까지만 해도 이 기종은 보잉에서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었다. 보잉이 처음 737 맥스를 내놓았을 때 주문이 5000대 넘게 들어왔었다. 이 기종의 가격이 약 1억 달러(약 1300억 원)부터 시작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수익이 확보됐던 셈이다. 보잉이 2017년부터 현재까지 인도한 737 맥스는 1370대 수준이다. 최근 미중 관계가 개선할 여지를 보이면서 보잉은 지난달 중국남방항공에 737 맥스의 인도 재개를 준비하고 있었다. 2019년 추락사고 이후 4년 넘게 기다려온 인도였다.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지난달 737 맥스 기종에서 문짝이 떨어져 나가는 결함이 발생했다. WSJ은 “결함에 따른 추가 검사가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 수 없지만, 베이징에 의해 수년간 동결된 인도 시점에 불확실성을 더했다”고 전했다. 중국은 향후 20년 동안 전 세계 항공기 인도량의 5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시장으로 꼽히는 곳이다. 보잉은 지난달 문짝이 떨어지는 결함은 2018, 2019년 추락사고에 비하면 굉장히 경미한 문제라고 판단할지 모른다. 일단 인명 피해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보잉이 ‘문짝 이탈’ 결함을 추락사고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신뢰가 한 번 무너지면 회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브룩 서덜랜드 블룸버그 칼럼니스트는 지난해 737 맥스에서 결함이 발견됐을 때 이렇게 말했다. “‘바퀴벌레 한 마리가 보이면 더 많은 바퀴벌레가 있을 수 있다’는 진부한 표현이 있다.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이제 문제는 얼마나 더 많은 바퀴벌레가 남아있느냐는 것이다.”보잉이 이번 사고를 계기로 품질 관리를 개선하고 과거의 명성을 회복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김성모 기자 mo@donga.com}

    • 202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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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서 억만장자처럼 쇼핑할 수 있습니다”[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테무에서 억만장자처럼 쇼핑하세요”미 매사추세츠주(州) 다트머스에 사는 창고 시설 관리자 캐시 베네티(68)는 지난해 말 중국 온라인 쇼핑 플랫폼 ‘테무(TEMU)’에 처음 접속했다가 깜짝 놀랐다. 말도 안 되게 저렴한 가격 때문이다. 장바구니에는 금세 제품 14개가 담겼다. 총 결제 금액은 90달러(약 11만7000원)에 불과했다. 그가 산 고기 연육제는 69센트(900원), 스웨터는 10달러(1만3000원), 재킷은 15달러(1만9500원)였다. 며칠 뒤, 테무를 다시 찾은 베네티는 223달러(약 29만 원)를 내고 34개 품목을 구매했다. 그는 “여러 상품이 아마존보다 저렴하다는 점에 놀랐다”고 말했다.중국의 초저가 온라인 쇼핑몰 ‘테무’가 미국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테무는 중국 3위 전자상거래 업체 핀둬둬(拼多多)가 지난해 9월 미국에서 출시한 쇼핑 앱이다. 미국의 쇼핑 대목인 블랙프라이데이가 있었던 11월 테무의 미국 거래액은 전월보다 29% 증가했다. 테무의 올해 해외 거래액은 140억 달러(약 18조2400억 원)에 달한다. 내년 목표치로는 300억 달러(약 39조 원)를 내세웠다.테무는 올해 2월 미국프로풋볼(NFL) 챔피언 결정전 슈퍼볼(Super Bowl) 광고에도 등장했다. 30초짜리 영상에는 곱슬머리 여성 모델이 스마트폰을 계속 두드리며 원피스와 구두 등을 끊임없이 쇼핑하는 장면이 나온다. 광고의 마지막 문구가 강렬하다. “테무 앱을 다운로드하고 억만장자처럼 쇼핑하세요.” (참고로 올해 슈퍼볼 광고비는 1초당 3억 원 수준이었다. 광고를 한 번 트는데 회사가 90억 원가량을 쓴 것) 미국에서 테무의 흥행 덕분에 앱을 선보인 핀둬둬의 기업 가치도 크게 뛰었다.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핀둬둬의 시가총액은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기준 1958억 달러(약 255조 원)로, 알리바바(1905억 달러)까지 제쳤다. 정말 무서운 기세다. 핀둬둬의 테무는 현재 미국 이외에 유럽, 일본 등 40여 국가에 진출한 상태다. 한국에는 올해 7월 등장했는데 벌써 350만 명의 사용자를 모았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이 가격이 진짜 맞나’ 의심하게 될 정도다. 5만9839원짜리 겨울용 남성 신발을 84% 할인해 9059원에 판매(27일 기준) 중이다. 여행용 배낭은 1만5452원, 가죽 벨트는 6689원이다. 정말 가죽이 맞긴 한 걸까)● 리콴유를 동경한 청년 사업가8년 전만 해도 핀둬둬가 알리바바를 넘어설 것이라고 내다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중국 쇼핑 앱 시장은 알리바바와 징둥닷컴이 굳건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핀둬둬는 구글 엔지니어 출신의 1980년생 황정(黃崢, 콜린 황)이 창업했다. 황정은 알리바바 본사가 있는 항저우에서 자랐다. 중학교를 마치지 못한 그의 부모는 공장에서 일했지만, 황정은 12살에 지역 명문 학교인 항저우 외국어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수재였다. 그는 중국 저장대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위스콘신대에서 컴퓨터공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학교에 다니면서 마이크로소프트(MS)에서 인턴 생활도 했다. 황정은 2004년 졸업을 앞두고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에 동시에 합격했다. 당시 MS는 PC 윈도 등으로 엄청난 수익을 내고 있었지만, 구글은 검증되지 않은 검색 엔진 회사였다. 뉴욕 증시에도 아직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는 “확실치 않은 미래가 맘에 든다”라면서 구글을 택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황정은 구글에서 주로 검색 알고리즘을 연구했다. 2006년, 그는 중국 지사에서 바이두 등 현지 업체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는데 미국 캘리포니아주 본사에 수시로 가야 했다. 검색 결과의 글자 크기 같은 사소한 것들까지 창업자들(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 사인을 받아야 했다.구글 상장 초기에 투자해 이미 수십억을 번 황정은 2007년 회사를 나와 스마트폰 등을 판매하는 온라인 플랫폼 회사를 차렸다. 3년 뒤, 황정은 자신의 사업이 차별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회사를 매각했다. 이후 웹사이트 마케팅 회사, 게임 회사를 만들었고, 두 회사 모두 성공을 거뒀다. 그는 주변에 “재정적으로 자유로워졌다”고 이야기했다.2013년 그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는데, 집에서 1년간 머무는 동안 생각이 변했다. 리콴유 싱가포르 초대 총리와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벤저민 프랭클린을 존경한다는 그는 세상을 바꾸는 일에 여전히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가 중국의 두 거대 기업이 황정의 눈에 들어왔다.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와 중국 최고의 게임 회사이자 ‘중국판 카카오톡’ 위챗을 보유한 텐센트다. ● 전자상거래와 게임의 만남 알리바바와 텐센트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며 중국의 핵심 기업으로 거듭났지만, 상대방의 사업 영역에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황정은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이 두 회사는 서로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자상거래와 게임에서 창업 경험이 있는 그는 두 분야를 합치면 엄청난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쇼핑 앱을 게임처럼 재밌게 만들겠다는 전략을 세웠다.황정은 2015년 100억 원가량을 투자받아 전자상거래 회사 ‘핀둬둬’를 차리고 몇 달 뒤 애플리케이션(앱)을 선보였다. 중국에서 내놓은 앱 이름은 회사 이름과 같은 핀둬둬였다. 그는 일단 물건이 저렴해야 사람들이 만족감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제조사와 고객을 직접 연결하는 ‘C2M(Customer-to-Manufacturer)’ 비즈니스 모델을 택했다. 유통 비용을 없앤 것. 핀둬둬가 받는 거래 수수료가 0.6%다. 사실상 회사도 수수료를 안 받는 셈이다. 대신, 판매자에게 광고비를 받아 수익을 올렸다. 매출의 70%가량이 광고비에서 나온다.핀둬둬는 일정 고객 이상이 모이면 제품 가격을 깎아주는 ‘대륙판 공동구매’로 이보다 가격을 더 낮췄다. 주문 물량을 어느 정도 확보해 판매자가 가격을 더 낮출 수 있게 했다.핀둬둬는 고객들이 위챗(중국판 카카오톡)으로 지인들의 참여를 독려하게 했다. 고객이 지인에게 “그룹 초대에 참여하고 정장 한 벌을 48위안(8700원)에 구매하시겠습니까?” 같은 메시지를 보내는 식이다. 중국어로 ‘핀’은 ‘모은다’, ‘둬둬’는 ‘많이’라는 뜻이다. 회사 이름에 ‘많이 모이면 저렴하게 해준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듯하다. 쇼핑 앱 곳곳에는 ‘게임적 요소’를 배치했다. 고객이 룰렛을 돌리거나, 가상의 물고기를 키우면 할인 쿠폰을 주는 방식이다. 핀둬둬 관계자는 “반짝 세일을 연상케 하는 한정 시간 판매, 백화점 행사 같은 행운권 추첨도 있다. 친숙한 오프라인 경험을 디지털 세계에 재현해 재미와 친숙함을 더했다”고 했다. 보통 고객들은 전자상거래 플랫폼에 아무 이유 없이 들리지 않는다. ‘수건을 사야겠다’, ‘콜라가 떨어졌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앱을 켠다. 플랫폼에선 물건만 사고 바로 나가버린다. 황정은 여기서 아이디어를 찾은 듯하다. 핀둬둬가 게임만큼 즐겁고 재밌으면 앱에 자주 드나들면서 쇼핑을 많이 하게 될 것이라는 발상이다. (계획하지 않은 물건까지)핀둬둬는 중국에서 초기에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더니 현재 고객이 9억 명을 돌파했다. 해외에서도 전략이 먹힌 것 같다. 핀둬둬는 미국 진출 1년 만에 월간 활성 사용자 5200만 명을 확보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샬럿 흐리스(32)는 최근 친구의 권유로 테무를 내려받았다가 틈날 때마다 앱에 접속해 게임을 하고 있다. 그는 “값싼 도파민에 중독돼 가입하게 만든 친구를 원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테무는 미국 앱 다운로드 시장에서 아마존, 월마트 등을 제치고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로켓 배송 필요 없다”핀둬둬의 3분기 매출은 지난해 동기 대비 93.9% 뛴 688억 위안(약 12조3800억 원)이다. 순이익은 155억 위안(약 2조7900억 원)으로 22.6% 늘었다. 해외에서의 흥행이 핀둬둬 매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많다. 핀둬둬의 미국 진출 타이밍이 한몫했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 소비자들이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고금리로 근심이 커질 무렵 핀둬둬는 ‘극강의 가성비’로 빠르게 시장에 침투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미국 소비자들이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이전 100달러로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었던 물건들을 현재 구매하려면 119.27달러(지난달 말 기준)가 필요하다. 식료품 가격은 2020년 1월보다 25% 뛰었다. 같은 기간 중고차 가격은 35%, 임대료는 20% 상승했다. 미국 근로자들의 월급이 뒤따라 오르긴 했지만, 물가 상승에 못 미치는 경우도 많았다.여기에 미국 금융당국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연 0.25%에서 5.50%까지 올리면서 가계에 부담이 커졌다. 미국 가계는 그간 저축해 놓은 것으로 버텨왔지만, 높은 물가와 고금리가 장기화하면서 소비 심리가 차츰 둔화했다.주머니 사정이 나빠진 미국 소비자들은 테무에 열광하고 있다. 아마존에서 8.47달러(약 11000원)에 판매하는 한 무선 이어폰은 테무에선 쿠폰을 적용하면 3달러(약 3900원)면 살 수 있다. 테무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는 13달러(약 1만7000원)짜리 차량용 휴대 진공청소기다. 미 텍사스 북부에 사는 린 해치(42)는 “이제 아마존에 접속하기 전에 테무를 먼저 살펴본다”고 말했다.테무의 무료 배송은 9~20일로 아마존에 비해 한참 느리다. 미국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중국에서 개별 고객에게 직접 배송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 소비자들은 가격만 착하면 ‘느린 배송’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분위기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린에서 마케팅 일을 하는 줄리아 벨킨(28)은 “가정용품이나 가구 같은 물건들이 정말 저렴하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테무를 자주 쓴다는 그는 “물건이 정확히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것도 꽤 흥미진진하다”고 덧붙였다.미국 물류 관리 소프트웨어 서비스 업체 쉬포의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당일 또는 익일 배송을 선호하는 전자상거래 쇼핑객은 지난해 18%에서 10%로 감소했다. 로라 베런스 우 쉬포 최고경영자(CEO)는 “온라인 쇼핑객들이 이제는 익일 배송을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며 “2~3일 배송, 심지어 5~8일 배송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문제와 금리 인상 여정은 다음 기사 참고.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20605/113793005/1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602/119603694/1● “중국산… 누구요, 저요?!” 핀둬둬를 비롯한 중국의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전략적으로 서구권 공략에 나서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메이드 인 차이나’가 해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0년대부터다. 외국인들이 중국 공장에 투자하고 값싼 중국산 제품을 전 세계에 퍼뜨렸다. 2000년대 중반 들어 중국 기업들이 해외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2016년에는 중국 가전업체 하이얼이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 가전사업부를 인수하는 일까지 있었다.글로벌 금융정보서비스 업체 레피니티브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21년까지 중국 기업들은 약 900억 달러(약 117조 원) 상당의 해외 기업들을 인수했다. 대상은 대부분 서양 기업이었다. 그러다가 미·중 관계가 악화하면서 미국의 중국 기업에 대한 압박이 거세졌다. 미국이 중국 정보통신기기 업체 화웨이를 제재 명단에 올린 것이 대표적이다. 중국 기업들은 서구권에서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자 ‘메이드 인 차이나’부터 감췄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올 3월 서구권에 진출한 기업 수십 곳의 웹사이트를 조사한 결과, 대부분이 서양 브랜드로 착각할 수 있도록 홈페이지를 구성해 놓았다. 온라인 쇼핑몰 쉬인(Shein), 소셜미디어 틱톡(TikTok)처럼 이름부터가 영어다. 핀둬둬도 중국과 다르게 테무(TEMU)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진출했다. ‘중국색’을 빼기 위해 본사를 이전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테무는 미 보스턴에 본사를 세웠고 모기업인 핀둬둬 역시 중국 상하이에서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거점을 옮겼다.중국 기업이 해외 시장을 공략할 때 자체적인 기술을 활용하는 것도 특징 중 하나다. 대다수 중국 기업은 자체 웹사이트나 모바일 앱을 활용해 고객에게 직접 물건을 판매하는 중이다. 이를 통해 해외 고객의 데이터를 직접 모으고, 정교한 분석을 통해 시장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아마존, 페이스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 업체가 기술력으로 ‘공급자 마인드’가 아닌 수요자 중심(온디맨드 방식)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방식으로 중국의 온라인 쇼핑몰 쉬인은 지난해 미국에서 200억 달러(약 25조90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미국에서 2020년보다 3배 많은 돈을 벌었다. 미국 등에 자산을 최대한 두지 않는 것도 중국 기업의 생존 전략으로 보인다. 쉬인은 미 인디애나주에 유통센터를 열었지만, 대부분은 중국에서 직접 배송한다. 테무는 미국에는 공장은커녕 창고도 없다. 이코노미스트는 “중국 캠핑용품 브랜드 ‘네이처하이크’는 중국 밖에서 단 한 명의 직원도 고용하지 않고 서구와 일본을 정복했다”고 강조했다. ▶미국 MZ세대를 사로잡은 중국 의류 쇼핑몰 ‘쉬인’에 대한 내용은 다음 기사 참고.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707/120131075/1● 테무가 넘어야 할 산 모바일 분석기관 앱토피아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미국 소비자들은 하루에 테무 앱을 평균 18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쇼핑 앱 ‘알리 익스프레스’는 11분, 아마존은 10분이었다. 앱토피아는 “젊은 층은 테무를 일 평균 19분 사용했다”고 전했다. 아마존은 “테무와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품질, 배송 등 여러 면에서 초저가형 직구 앱과는 차이가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테무나 쉬인 같은 중국 서비스가 아마존 등 미국 기업에 타격을 주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아마존의 월간 순 방문자 수는 2022년 9월 2억1750만 명에서 올해 3월 2억1100만 명으로 감소했다. 2022년 9월은 테무가 미국에 상륙한 시기다.물론, 중국 기업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꽤 있다. 미 정치권의 견제가 시작됐다. 현재 미국 관세법은 800달러(약 105만원) 이하의 수입품에 대해서는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2015년까지 이 기준이 200달러 수준이었는데, 2016년 3월 전자상거래 활성화를 위해 금액을 상향했다. 최근 미 의회에서 중국 기업들이 이 제도를 악용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미 의원들과 일부 미국 기업들은 “중국 기업이 국제 우편을 대규모로 이용해 안전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강제 노동으로 만들어진 제품을 배송하면서 세금까지 피하고 있다” 등의 비판을 내놓았다. 테무나 쉬인 등 중국 의류 플랫폼들은 강제노동 의혹이 제기된 중국 신장 지역에서 공급받은 면화를 제품화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해당 기업들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미 관세국경보호청에 따르면 지난해 9월부터 1년간 면세 혜택을 받고 미국에 들어온 소포는 약 10억 개다. 2019년의 2배 수준이다. 미 의회는 자체 조사 결과 이 중 3분의 1가량이 테무와 쉬인의 물량이라고 밝혔다. 킴 글래스(Kim Glas) 미 섬유단체협의회(NCTO) 회장은 “관세 면세 한도는 세계 최대의 암시장이며 놀랍게도 미국 정부에 의해 합법화됐다”고 꼬집었다. 정보 유출에 대한 우려도 있다. CNN은 올 4월 미국과 유럽, 아시아 전문가에게 자체 의뢰해 분석한 결과 핀둬둬에서 악성코드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핀둬둬가 사용자의 통화 기록과 문자 메시지, 사진 앨범 등을 훔쳐본 것이다. 핀둬둬는 고객의 휴대폰 사용 내역을 조회해 경쟁사를 견제하고 사용자 정보로 맞춤형 광고 등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CNN은 “이번 논란에 테무가 연루된 것은 아니지만, 테무의 글로벌 확장에 악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후에도 테무가 잘나가긴 했지만)● “‘노마진’으로 살아남기” 테무가 과연 수수료 없이 현재와 같은 성장을 이어갈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지금처럼 할인 쿠폰을 뿌려가면서 수익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최근 모건스탠리의 조사에 따르면 테무의 고객 중 44%가 앱에서 지출을 줄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앱에서 소비를 늘린 고객은 22%에 불과했다. 첫 구매 할인 등을 노리고 온 고객들이 재구매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블룸버그는 “신규 고객을 충성 고객으로 전환하지 못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상대적으로 소비 여력이 취약한 계층이 테무의 주요 타깃인 것도 약점이다. 고객 특성상 할인(비용) 폭이 커야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블룸버그는 “테무의 쇼핑객이 여성, 젊은 층, 저소득층에 편중돼 있다”며 “고객 중 절반 이상이 연 소득 5만 달러(약 6500만 원)보다 적고, 58%가 45세 미만”이라고 전했다.투자사 샌포드 번스타인은 테무가 올해 해외에서 130억 달러(약 16조8400억 원)의 매출에도 불구하고 36억5000만 달러(약 4조7200억 원)의 영업 손실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품질 문제도 테무의 성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핀둬둬는 사업 초기 ‘짝퉁 브랜드’ 전자제품을 판매했다가 이슈가 됐다. 핀둬둬의 이용자들은 삼성전자의 영문명(Samsung)을 교묘히 비튼 ‘Shaasuivg’라는 짝퉁 브랜드를 찾아냈다. 유통기한이 지난 분유를 한 캔에 7.5위안(약 1360원)에 팔았다가 질타받기도 했다. ‘정말 싼데 기대 없이 한 번 사볼까’에서 ‘그냥 2000~3000원 더 주고 믿을 만한 데서 사야지’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다. 미국의 테무 열풍은 파괴적 혁신일까, 아니면 경기 흐름에 따른 일시적인 수혜일까. 중국 쇼핑 앱의 흥행이 계속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 2023-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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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짜 위험한 가짜뉴스가 온다[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고등학교 덮친 가짜 포르노올해 10월 16일(현지 시간) 미국 뉴저지주(州) 웨스트필드고교의 2학년 여학생들은 학교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남학생들이 평소보다 지나치게 조용했다. 일부는 특정 여학생을 보면서 수군대기도 했다. 나흘 뒤, 한 남학생이 “남학생들이 몇몇 여학생의 가짜 누드 사진을 만들어 돌려봤다”고 고백하면서 학교가 한바탕 뒤집혔다.남학생들이 인공지능(AI)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소셜미디어에서 복사한 여학생들의 실제 사진을 AI 기반 웹사이트에 올리고 클릭 몇 번 했을 뿐이다. 남학생들은 가짜 나체 사진을 그룹 채팅에서 공유했다. 피해 여학생들의 신고로 경찰이 수사에 나섰지만, AI 활용 이미지에 대한 규제와 법률이 명확지 않아 관계 기관 사이에 의견이 분분한 상태다. 학교 측은 문제의 이미지가 삭제돼 더 이상 유포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여학생들은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일부 학부모들은 해당 이미지가 외부로 공개돼 학생들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 중이다. 미 빅테크 기업들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공지능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가운데, 딥페이크 관련 범죄와 가짜 정보(가짜뉴스), 저작권 침해 등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국에선 딥페이크 기술 악용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딥페이크(deepfake)’는 AI 기술인 딥러닝(deep learning)과 가짜를 뜻하는 페이크(fake)의 합성어다. 인공지능으로 특정 인물의 이미지나 목소리 등을 디지털 콘텐츠에 합성하는 기술이다. ‘진짜 같은 가짜’를 만드는 기술로 이해하면 된다. 미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의 한 사용자(닉네임 deepfakes)가 2017년 조작 동영상을 만드는 알고리즘을 올리면서 나온 용어다. 특히, 딥페이크 기술의 불법 음란물 활용이 심각하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일반인의 얼굴을 음란물에 합성하는 ‘포르노 딥페이크’ 생성이 급증했다. 딥페이크 분석가인 제네비브 오는 미 블룸버그에 “2019년 이후 관련 동영상이 9배나 증가했다”고 전했다. 오가 올해 5월 30여 개의 해외 사이트를 조사한 결과 약 15만 건의 딥페이크 음란물이 발견됐다. 총 조회수는 38억 회에 달했다. 글로벌 유명 배우나 가수의 얼굴을 음란물에 합성한 영상도 떠돌았다. 돈을 받고 친구나 회사 동료 등 평범한 여성의 사진을 나체 이미지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미국에는 합의되지 않은 딥페이크 포르노의 제작이나 공유를 범죄로 규정하는 연방법이 아직 없다. 현재까지 미국에서 관련 혐의(비동의 성적 콘텐츠 제작 및 공유)로 기소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치과 보험 파는 가짜 톰 행크스 현재 온라인에는 수없이 많은 딥페이크 이미지가 떠돌고 있다. 일부 딥페이크 사진과 동영상을 사람들이 진짜라고 착각해 수만 번 이상 공유한 사례도 종종 등장하고 있다. 3월 소셜미디어에 흰색 롱패딩을 입은 프란치스코 교황 사진이 등장했다. 사진 속에서 교황은 은색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그의 오른손은 텀블러를 들고 있다. 온라인에서 폭발적인 반응이 나왔다. 한 SNS 계정에 올라온 이 사진의 조회수만 2540만 회가 넘었다. “힙(hip)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돈 모이니한 조지타운대 교수는 패딩 브랜드 이름을 묻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진은 인공지능 툴인 ‘미드저니(Midjourney)’로 만든 ‘가짜 이미지’였다.비슷한 시기에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뉴욕 경찰에 체포되는 사진이 빠르게 확산했다. 트럼프가 자신을 체포하려는 경찰로부터 도망가거나, 경찰의 체포 시도에 강하게 저항하는 모습 등 버전이 다양하다. 교도소에서 주황색 재소자 복장으로 청소하는 모습도 있다. 전부 AI 기술이 만든 가짜 이미지다. 논란이 확산하자 뉴욕 경찰이 나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구금된 바 없다”고 밝혔다. 5월에는 미국 국방부 청사(펜타곤) 인근에 불이 난 듯한 가짜 이미지가 온라인에 빠르게 퍼지면서 미국 주식시장이 출렁이는 소동까지 일어났다. 해외 전문가들은 AI가 만든 흔적이 뚜렷하다고 평가했지만, 투자자들은 진위를 가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사실 확인이 어려운 중동전에서는 딥페이크 사진이 선전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초기 불에 탄 아이 시신 사진이 인터넷으로 빠르게 퍼졌는데 인공지능이 만든 이미지였다. (하마스가 이스라엘 아기들을 참수했다는 속보도 있었는데 거짓으로 드러났다) AI 가짜 광고도 등장했다. 일부 업체들이 유명 배우들의 목소리와 이미지를 도용해 광고에 실제 출연한 것처럼 AI로 꾸민 것이다. 스칼렛 요한슨은 IT 회사의 앱 홍보에, 톰 행크스는 치과 보험 홍보 영상에 도용됐다. 업체들은 배우의 사진과 영화 속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 낸 AI 아바타를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톰 행크스는 자신의 SNS에 사칭 광고에 속지 말라고 당부했고, 스칼렛 요한슨은 법적 조치에 나섰다. ● 미 정치권 딥페이크 경계령미 정치권에선 내년 대선을 앞두고 딥페이크 기술이 가짜 정보나 여론 조작에 쓰일까 걱정하는 분위기다. 2월 미국의 시카고 시장 선거 전날, 소셜미디어 엑스(X·전 트위터)에 ‘시카고 레이크프론트 뉴스’라는 새 계정이 녹음 파일을 올렸다. 파일에는 “경찰이 용의자를 죽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예전이 그립다”는 폴 발라스 후보(전 시카고 교육청장)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당시 발라스는 경찰지원 확대를 최우선 공약으로 앞세워 경찰노조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녹음은 더욱 그럴싸하게 들렸다. 수천 명이 이를 공유했는데, 녹음은 발라스의 목소리를 흉내 내도록 훈련된 딥페이크 작품이었다. 발라스는 결선 투표에서 탈락했지만, 녹음 파일이 퍼진 다음 날 1차 선거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가짜뉴스가 선거의 당락까진 결정하진 못한 것이다.스탠퍼드대 연구진과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올라온 연구에 따르면 소셜미디어 여론 조작(주로 러시아 봇)이 정치적 태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탠퍼드대 연구진은 러시아의 허위 선거 운동이 후보자 득표율에 0.01포인트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했다. 주로 소셜미디어에서 퍼지는 딥페이크 정보가 선거 결과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영향력은 없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선거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은 미치지 않더라도 사회적 자산인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딥페이크는 범죄뿐만 아니라 국가 안보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이 모든 정보를 의심하게 될 것”이라며 “군인은 명령을 신뢰하지 못하고, 대중은 정치인의 스캔들을 거짓으로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진짜’ 뉴스조차 일단은 의심부터 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교한 가짜 정보가 양적으로 많아질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고도화된 딥페이크 기술이 등장한 지 아직 1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아, 기술은 더 발전할 여지가 충분하다. 또 과거와 달리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점점 더 쉽게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블룸버그는 “전쟁이나 주요 사건에서 소셜미디어를 통한 허위 주장이 일상화되고 있다. 딥페이크 확산은 사람들이 사실에 근거한 의견 형성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전했다. ● 부모도 속는 딥페이크 기술과거 딥페이크 기술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결과물이 조잡해 가짜는 금방 들통났다. (포토샵 보정도 나름 정교해지긴 했지만) 그러다가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얼굴이나 목소리까지 훨씬 더 현실적으로 구현할 수 있게 됐다. 현재 AI 이미지 생성 서비스로 달리(DALL-E), 미드저니, 스테이블디퓨전 등이 많이 쓰이고 있다. 모두 생성형 AI 기술이다. (달리는 챗GPT를 선보인 오픈AI의 플랫폼이다) 이들은 챗GPT와 똑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한 AI가 요청한 이미지를 만드는데, 왜곡된 부분(노이즈)은 학습을 거칠수록 실제와 유사해진다.현재 공개된 가장 큰 데이터 세트인 ‘LAION-5B’에는 58억5500만 개의 이미지가 포함돼 있다. 사진 58억5500만 개를 공부한 AI가 주문 제작을 받고 있다는 의미다. WSJ의 테크 칼럼니스트 조안나 스턴은 딥페이크 기술이 얼마나 정교한지 파악하기 위해 올 4월 인공지능 ‘아바타’를 만들었다. 스튜디오를 찾은 스턴은 30분 정도 동영상을 찍고, 2시간 분량의 음성 녹음을 진행했다. 이를 학습한 AI(AI 동영상 제작 플랫폼 신디시아 활용)는 스턴과 똑같이 생긴(목소리 포함) 아바타를 선보였다. 문장을 입력하면 아바타가 스턴이 실제 이야기하는 것처럼 떠든다. 그는 “긴 문장을 입력하면 약간 로봇처럼 말했지만, 짧은 문장은 자연스러웠다. 마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스턴은 다른 플랫폼을 사용해 음성 복제도 시도했다. 이번에는 스튜디오를 찾지 않고 90분 분량의 음성 파일을 웹사이트에 올렸다. 2분도 지나지 않아 목소리가 복제됐다. 그는 은행에 전화를 걸어 ‘AI 스턴(봇)’에게 이름과 주소를 대신 답하게 했는데, 은행 생체인식 시스템은 이를 걸러내지 못했다. 딥페이크 기술은 가족까지 속일 정도로 정교해졌다. 스턴은 “자주 통화하는 여동생이 목소리를 구별해내지 못했지만 내가(AI 스턴이)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똑같이 아버지한테 전화해 봇(AI 스턴)으로 아버지의 사회보장번호를 물어봤는데, 녹음된 목소리가 나오는 줄 알았다고 했다“고 전했다. 하니 파리드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컴퓨터 과학 교수는 딥페이크 이미지, 동영상과 진짜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행운을 빈다”고 답했다.▶챗GPT 기술을 쉽고 자세하게 설명한 기사를 찾고 있다면 다음 참고.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311/118276311/1● 빅테크 “우리를 규제 해달라”빅테크 기업들도 AI 기술의 위험성에 공감하는 분위기다. 기업들이 “우리를 규제해달라”고 나서서 요구할 정도다. (현재까지 딥페이크 기술의 부작용을 위주로 설명했지만, 챗GPT의 ‘환각’도 위험 요소 중 하나로 꼽힌다. 이는 챗GPT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 등 거짓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지어내는 증상이다. 빅테크 기업들은 이를 개선하려고 노력 중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애플 공동 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 히브리대 교수 등 유명 인사 1100여 명은 올 3월 말 미 비영리단체 ‘삶의 미래 연구소(FLI)’의 공동 서한에 서명했다. “모든 AI 연구소가 현재 수준을 능가하는 AI 시스템 개발을 최소 6개월간 중단하자”는 것이 서한의 핵심 내용이다. 세계적 AI 권위자로 꼽히는 스튜어트 러셀 UC버클리 컴퓨터과학과 교수, 딥러닝의 창시자로 알려진 요슈아 벤지오 몬트리올대 교수, 구글 딥마인드 연구진 등 AI 전문가들도 서한에 이름을 올렸다. AI 이미지 생성 서비스 스테이블디퓨전의 CEO 에마드 모스타크도 있었다.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는 올 4월 한 인터뷰에서 “(AI 위험성에 대한 걱정 때문에) 밤잠을 설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사회에 해를 끼치는 딥페이크 동영상을 제작하는 행위에 반드시 상응하는 대가가 따라야 한다”며 “AI를 다뤄본 사람은 이것이 너무나 위험한 문제라는 것을 알 것이다. 사회적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규제 기관을 만들자는 의견도 나왔다. ‘챗GPT 신드롬’의 주인공인 샘 올트먼 오픈AI CEO는 5월 미 의회 청문회에서 “AI 기업에 ‘라이센스’를 부여하는 규제 기관 창설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AI 부작용을 관리할 수 있는 기업에만 개발 허가권을 주자는 주장이다. 미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인공지능의 사용에 대해 기대보다는 우려가 크다고 느끼고 있었다. 지난달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AI 위험 관리에 초점 맞춘 인공지능 지침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AI 개발자가 프로그램에 대한 데이터와 기타 정보를 정부에 제공해야 한다는 조항을 포함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7월 구글, 메타, MS, 오픈AI 등 주요 AI 개발 업체에 인공지능 서비스를 대중에 공개하기 전에 전문가들의 안전성 검사를 거치겠다는 ‘자발적 약속’을 하도록 압박하기도 했다. ● 드라마 못지않은 오픈AI 사태 지난달 오픈AI에서 이 같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만한 일들이 벌어졌다. 오픈AI 이사회에서 ‘윤리성’을 중요시하는 일부 이사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들은 챗GPT 출시에 결정적 역할을 한 올트먼 CEO를 내보냈다. 외신들은 “AI 개발론자가 안전론자에 승리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지난달 17일(현지 시간) 오픈AI 이사회는 “이사회와 소통에 솔직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면서 올트먼 CEO에 해고를 통보했다. 명확지 않은 사유에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본인도 황당했는지 다음 날 SNS에 “멀쩡하게 살아 있는 내 추도사를 읽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고 올렸다. 20일 오픈AI의 최대 투자자인 마이크로소프트(MS)가 “올트먼이 새 AI 팀을 이끌 것”이라며 영입을 발표했다. 그러자 오픈AI 임직원 702명이 이사회 측에 “우리도 MS로 가겠다”고 선포했다. 오픈AI의 임직원은 총 770명이다. 투자자들과 임직원의 반발로 오픈AI 이사회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오픈AI는 21일 올트먼이 CEO로 전격 복귀했다고 밝혔다. 쿠데타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이 회사의 특이한 지배구조부터 알아야 한다. 오픈AI는 2015년 ‘인간 수준의 인공지능을 안전하게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비영리단체로 출발했다. 지분이 없는 6명의 이사진이 모든 결정권을 갖는다. 챗GPT 개발이 외부 입김에 흔들리지 않도록 자본과 경영을 분리한 것이다. 투자자들 역시 경영에 간여할 수 없게 했다. 이상은 곧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경쟁자인 알파벳(구글)이 문제였다. 덩치 싸움에서 게임이 되지 않았다. AI 개발과 인재를 데려오는데 끝도 없는 돈이 투입됐고, 진도는 더뎠다. 가장 답답해한 인물 중 한 명이 오픈AI 공동설립자였던 일론 머스크였다. 그는 오픈AI 개발에 더 많이 개입하고자 했는데 개발자들과 종종 충돌했다. 한 연구원은 머스크에게 현재 개발이 윤리적인 부분에 미칠 영향을 충분히 고려했는지 물었다가 “얼간이(Jackass)”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오픈AI 직원들은 이 연구원에게 ‘얼간이’라고 적힌 트로피를 만들어 선물했다) 머스크는 2018년 2월 회사를 떠났다. 내부에서 “서비스를 상용화하는 계획을 내놓고 투자자를 유치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오픈AI는 결국 2019년 영리법인을 자회사로 만들었다. 비영리법인이 자회사인 영리법인을 통제하는 독특한 구조가 만들어진 것. 오픈AI는 ‘사업성보다 윤리성과 사회적 안전을 우선하는 AI로 돈 버는 회사’가 됐다. 마이크로소프트가 130억 달러(약 17조 원)를 투자해 영리법인 지분 49%를 확보했지만, 비영리법인의 이사회 의석은 1석도 보유하지 못했다. (올트먼이 잘릴 때 MS가 반대의견을 낼 수 없었던 이유다) ● 모순을 안고 살아가는 남자 이사회는 올트먼의 퇴출 사유를 명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올트먼이 챗GPT의 윤리적 안전성보다 투자 유치 및 MS와의 사업 확대에 치중한 것을 우려한 결정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어떻게 보면, 이사회는 자신의 역할을 다한 셈이다. 업계에서는 AI 시장의 치열한 경쟁을 고려했을 때 비영리법인이 영리법인을 자회사로 두는 오픈AI의 지배구조 자체가 모순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올트먼의 실제 삶도 모순적이긴 하다. 채식주의자인 그는 주말엔 자신의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농장에서 와인용 포도와 소를 기른다. (그의 배우자가 소고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채식주의자가 육식을 사랑하는 배우자를 위해 기르는 육우라니!) 올트먼은 AI에 한해 개발론자보다 이상론자에 가까워 보인다. 올트먼은 2019년 미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오픈AI의 AI 개발을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와 비유했다. 그는 “우리가 열망하고 바라는 AI 개발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만큼 스케일이 크다”면서 오픈AI가 세상을 뒤흔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올트먼은 오픈AI의 기업 가치를 860억 달러(약 113조 원)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가 가진 지분은 ‘0’이다. 올트먼이 회사에서 받는 돈은 약 6만5000달러(약 8500만 원)의 연봉뿐이다.그는 허위 정보의 범람 같은 부작용 역시 종종 걱정했지만, AI가 세상에 가져올 이점이 더 크다고 자신했다. 올트먼은 “ 일반인공지능(AGI·인간 수준의 인공지능)은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번영과 부를 가져올 것”이라며 “AI의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는 방법 역시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해외에선 이번 사태로 오픈AI의 AI 개발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내다봤다. AI 개발에 따른 부작용 우려보다 사업성에 더 초점을 둘 수 있다는 뜻이다.IT 매체인 더 버지에 따르면, 오픈AI는 이사회 규모를 기존 6명에서 9명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MS 측 인사도 의석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새로운 이사들은 오픈AI를 좀 더 사업적인 조직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올트먼 역시 과거보다 더 높은 강도의 성과 압박을 받게 될 것 같다. 구글과의 경쟁이 본격화했기 때문이다. 구글은 7일(현지 시간) 차세대 거대언어모델(LLM) 기반 AI ‘제미나이(Gemini)’를 전격 공개했다. 제미나이의 울트라 버전은 수학과 물리학, 역사, 법률, 의학, 윤리 등 57개의 주제를 복합적으로 활용해 지식과 문제 해결 능력을 평가하는 ‘대규모 다중작업 언어이해 테스트(MMLU)’에서 90.04점을 받았다. 전문가(사람)는 89.3점을 기록했다. 사람보다 높은 점수를 기록한 최초의 인공지능으로 등극한 것이다. 오픈AI 챗GPT의 ‘GPT-4’는 같은 테스트에서 제미나이보다 낮은 86.4점을 기록했다. AI의 미래가 어디까지 닿을지 가늠하는 건 지금으로서는 무리 같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 2023-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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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동훈 장관이 마약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이유[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록펠러 마약법 50주년지난달 10일 미 캘리포니아주(州) 플레이서 카운티 고등법원. 로즈빌에 사는 나다니엘 카바쿤간(20)이 살인죄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다른 범죄자들처럼 총을 쏘거나 칼을 들지는 않았지만, 이에 못지않은 치명적인 약물을 판매해 지난해 6월 경찰에 체포됐다. 당시 카바쿤간이 제공한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로 한 15세 여학생이 사망했다. 캘리포니아에서 ‘마약상’에게 살인죄를 인정한 첫 사례였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역사적 판결”이라고 평가했다.마약 중독과 이로 인한 사망자가 급증하면서 미국이 ‘마약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최근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마약 사망 사건을 전담하는 특별수사팀을 꾸렸다. 형벌도 한층 강경해진 분위기다. 펜타닐 유통·판매업자뿐만 아니라, 약물을 전달해 사망에 이르게 한 대상에게도 살인죄를 적용하고 있다. 올해 9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90㎞가량 떨어진 산타로사에서 생후 15개월 된 유아가 펜타닐 과다복용으로 숨졌다. 새벽에 잠에서 깬 부모가 숨을 헐떡이는 딸을 발견하고 구급차를 불렀지만, 병원에서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현장에 출동한 수사관은 침실 탁자에 있는 빨대와 불에 그을린 은박지, 흰색 가루 등을 발견했다. 경찰은 펜타닐 가루가 젖병 등을 통해 유아에게 전달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유아의 부모를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올해 입법 시즌에 미국의 46개 주에서 펜타닐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 NYT는 6월 “펜타닐 관련법이 심각하게 분열된 국가에서 초당적 지지를 끌어내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미국에서는 약 30개 주가 펜타닐 공급자를 살인죄로 기소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사실, 미국에는 마약 범죄를 강력하게 처벌하는 법이 50년 전부터 있었다. 1973년 제정된 ‘록펠러 마약법’이 대표적이다.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넬슨 록펠러는 마약의 소유, 판매를 엄격히 처벌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4온스(약 113g) 이상의 헤로인, 코카인 등을 소지하거나, 2온스(약 57g) 이상을 판매할 경우 초범이라도 15년 형을 선고하도록 했다. 엄한 처벌이 마약 범죄를 줄이는데 큰 효과가 없다는 주장이 줄곧 나왔다. 이 때문에 치료를 앞세운 온건책 등을 도입한 주도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마약 범죄를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다시 힘이 실리고 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일찍’ 목숨을 잃어서다.● 펜타닐노믹스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10만9680명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2015년(5만2404명) 이후 6년 만에 2배 이상으로 늘었다. 미국의 교통사고(2020년 기준 약 4만2000명)와 총기사고(약 4만4000명) 사망자 수를 합친 것보다도 많다. 미국에서 1999년 이후 약물 과다복용으로 총 100만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을 고려하면, 최근 사망자 수가 급격하게 늘어난 셈이다. 펜타닐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지난해 7만5217명이 펜타닐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젊은 층에서 사태가 심각하다. 현재 미국 18~45세 청장년층의 사망 원인 1위가 펜타닐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마약단속국(DEA)은 지난해 3억7900만 회 투여분의 펜타닐을 압수했다. DEA는 “미국인 전부를 죽이기에 충분한 양”이라고 밝혔다. 펜타닐 치사량은 2㎎이다. DEA는 “연필로 찍었을 때 끝에 묻는 정도”라고 전했다. 펜타닐은 대표 ‘오피오이드’ 제품이다. 오피오이드는 ‘오피엄(Opium·아편)’과 ‘오이드(Oid·~와 비슷한)’의 합성어로 아편과 비슷한 작용을 하는 합성 진통·마취제다. 실험실에서 합성해 만든 화학 물질이라는 점에서 아편과 차이가 있다. 옥시코돈, 옥시콘틴, 메타톤 등도 같은 오피오이드 제품이다. 이중 펜타닐은 1959년 벨기에 화학자인 폴 얀센이 개발했다. 모르핀보다 효과가 빠르고 강해 장시간 수술을 가능하게 만들었다.오피오이드는 합법적 약물이지만, 강력한 중독성 때문에 엄격하게 규제한다. 특히, 펜타닐은 헤로인보다 50배, 모르핀보다는 100배 독성이 강하다. 말기 암 환자나 내성이 생긴 만성 통증 환자에게만 처방한다. 커피에 넣는 작은 설탕 봉지 2개가 1년 치 복용량이다. 2000년대 들어 마약 범죄 조직들이 중독성이 강한 오피오이드에 주목했다. 멕시코 마약상과 밀매업자들은 헤로인보다 펜타닐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펜타닐에는 양귀비밭과 수확할 농부가 필요하지 않았다. 식물이 자라나고 분말로 정제하기까지(제품화)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오피스텔보다 작은 실험실이면 충분했다. DEA에 따르면 세계 최대 마약 밀매 집단인 멕시코 시날로아 카르텔은 10센트(약 130원)로 펜타닐 알약을 만들어 마약상에게 50달러(약 6만6000원)의 도매가에 판매했다. 헤로인보다 수익성이 20배나 높았다. DEA의 현장 요원인 존 델레나는 “마약상들에게 펜타닐은 ‘마법의 가루’”라며 “일부는 (중독성이 너무 강해) 헤로인을 다시 원했는데, 그러자 마약상들은 헤로인에 펜타닐을 섞었다”고 전했다. ● “멕시코가 월마트라면, 중국은 아마존”펜타닐의 주원료인 전구체(화학 성분)는 중국에서 들여온다. 세계 최대 의약품 원료 수출국인 중국에는 40만 개 이상의 화학 회사(불법 업체 포함)가 있는데, 이 중 일부가 제조한 전구체가 멕시코로 향한다. 멕시코에서 펜타닐로 제품화해 미국 국경을 넘는 수법이다. 멕시코는 2개의 마약 카르텔(시날로아와 할리스코)이 펜타닐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가 지난해 8월 한 멕시코 카르텔의 마약 제조 현장을 찾았다. 흙바닥의 허름한 공간에 ‘순수 아세톤’, ‘중국 화학’ 등이 적힌 유리병들이 놓여 있었다. 방호복과 고글, 검은색 마스크를 착용한 조직원은 이 3평 남짓한 공간에서 1주일에 최대 2500달러(약 330만 원)를 받고 펜타닐을 제조하고 있었다. 연봉으로 치면 억대다. (그것도 세후로. 독성 화학 물질에 노출되는 정도를 고려하면 사실상 목숨값이지만) WSJ은 “조잡한 실험실에서 20대 청년들이 고수익 수출품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화학 업체들이 전구체나 펜타닐을 미국에 직접 보내는 양도 상당했다. 중국 업체들은 주로 인터넷에 전구체 물질들을 홍보했다. 거래는 특정 프로그램을 거쳐 접속하는 ‘다크 웹’을 통해 진행됐다. 결제는 비트코인. 물건은 페덱스, UPS 등 우편으로 전달했다. 한 펜타닐 복용자는 “10달러(약 1만3000원)를 주고 구매한 10mg(0.01g)의 분말이 온종일 나를 기분 좋게 해줬다”고 말했다.미국 법무부는 올해 6월 중국 우한에 본사를 둔 ‘후베이 아마벨 바이오테크’라는 화학 업체를 적발했다. 아마벨 바이오테크는 온라인에 ‘100% 스텔스 보장’이라는 문구와 함께, 과거 배송 이력을 담은 ‘인증샷’을 게시하고 있었다. DEA에 따르면, 아마벨 바이오테크는 200㎏ 이상의 전구체 물질을 미국으로 보냈다.DEA에 적발된 중국 전구체 판매 업체들은 “의약품을 제조하는 합법적인 물질”이라고 주장했다. 뉴욕 동부 연방지방검찰청의 브론 피스 검사는 “중국 업체들은 이 물질들이 펜타닐 제조에 사용될 것을 알고 있었다”며 “폭발물 제조에 사용될 것을 알면서 폭탄 부품을 판매하는 것과 같다”고 반박했다. 펜타닐이 담긴 중국발(發) 택배는 2010년 이후 급증한 ‘직구(해외직접구매)’ 배송 사이에 뒤섞였다. 미 상원 국토안보위원회는 2018년 1년의 조사 끝에 104장 분량의 관련 보고서를 내놓았는데, 중국에서 미국으로 보낸 소포는 2007년 12억 개에서 2015년 206억 개로 뛰었다. 세관이나 배송 업체들이 펜타닐을 걸러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택배를 하나하나 뜯어본다고 쉽게 확인되는 것도 아니었다. 워낙 극소량인데다가 과자 같은 건조식품에 든 실리카겔(방습제)로 위장했기 때문이다. 미국 싱크탱크 랜드연구소의 마약 정책 연구원인 브라이스 파르도 박사는 “수익성이 있다면 중국 업체들은 10g도 보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멕시코 카르텔이 마약 시장의 마트라면, 중국은 저렴하고 편리하며 어디에나 있는 아마존”이라고 표현했다. DEA에 따르면, 2016년과 2017년 국제우편 서비스에서 압수한 마약 중 중국산 펜타닐이 97%를 차지했다.● 12시간의 지속성, 1%의 중독성 중국과 멕시코의 대량 공급도 영향을 미쳤지만, 사실 미국 마약 중독의 근간에는 펜타닐 이전 같은 마약성 진통제인 ‘옥시콘틴’의 유행이 있었다. (환각효과가 크고, 복제약이 많아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은 펜타닐이 나중에 빠르게 확산했다)제1차 세계대전 이전,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에서 뉴욕으로 터전을 옮긴 새클러가(家)에서 3형제 아서(1913~1987), 모티머(1916~2010), 레이먼드(1920~2017)가 태어났다. 이들은 전부 의사였지만, 유대인 출신답게 사업 수완도 지녔다. 형제는 의료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광고 대행사를 만들고 대형 제약사들의 제품을 홍보했다. 아서는 신문사를 직접 차려 60만 명의 의사에게 의약품을 마케팅했다. (당시, 이해 상충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1952년 이들은 의약품 회사 ‘퍼듀 프레데릭’을 인수해 설사약과 귀지 제거제 같은 별 볼 일 없는 제품을 판매했다. ‘퍼듀 파마’로 회사 이름을 바꾼 형제는 ‘MS콘틴’이라는 ‘제어 방식(지연 흡수 메커니즘)’의 마약성 진통제(모르핀 기반)를 개발해 큰돈을 벌기 시작했다. 기존 진통제와 다르게 약물이 혈류에서 천천히 녹는 것이 특징이었다. 2번에 걸쳐 먹을 것을 한 번만 먹게 만든 것이다. (콘틴은 ‘Continuous·지속성’의 줄임말이다) 1980년대 중반 퍼듀 경영진은 MS콘틴을 대체할 약을 찾기 시작했다. MS콘틴의 특허 만료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퍼듀에서 일했던 레이먼드의 아들 리처드 새클러는 1916년 독일 과학자들이 개발한 진통제 ‘옥시코돈’에 주목했다. 생산비용이 저렴한 옥시코돈에 MS콘틴의 제어 방식을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퍼듀는 이를 통해 다른 제약사보다 복용량은 적고, 효능은 뛰어난 마약성 진통제 ‘옥시콘틴’을 개발했다.리처드는 옥시콘틴을 말기 암 환자뿐만 아니라 더 넓은 용도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려면 정부의 도움이 필요했다. 퍼듀는 미 식품의약청(FDA)부터 공략했다. NYT에 따르면 리처드는 FDA에 옥시콘틴의 중독성 등급을 낮춰달라고 로비했다. FDA의 승인을 받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중독성 실험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퍼듀는 1995년 옥시콘틴을 중증의 통증 치료에 사용해도 된다는 FDA의 승인을 받아냈다. 심지어 옥시콘틴의 특허 기술(지연 흡수 메커니즘)이 경쟁 진통제보다 안전하다는 포장 내용물까지 승인받았다. 이례적이었다. 이때 FDA를 이끌었던 데이비트 케슬러는 “이 승인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승인을 담당했던 커티스 라이트 박사는 FDA를 이미 떠난 상태였다. 라이트 박사는 옥시콘틴을 승인하고 2년 뒤 퍼듀로 자리를 옮겼다. 1999년 리처드가 퍼듀 사장을 맡으면서 미국 전역에 옥시콘틴 판매가 본격화했다. 리처드는 신약 연구개발(R&D)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공격적인 판촉 정책을 펼쳤다. 퍼듀는 FDA 승인을 근거로 가벼운 허리 통증이나 편두통 환자에게도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하게 했다. 퍼듀는 영업사원들에게 “약효가 12시간 동안 지속된다는 점과 옥시콘틴 복용 환자 중 1% 미만이 중독됐다는 내용을 의사에게 강조하라”라고 교육했다. 뒤늦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퍼듀가 자금을 지원한 1999년 연구는 이와 달랐다. 옥시콘틴을 복용한 두통 환자의 중독률은 13%에 달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많은 환자에게서 약의 효과가 8시간 이후 사라져 더 많은 약을 찾게 만들었다”고 2019년 지적했다. ● ‘다인 앤 대쉬(Dine and Dash)’ 전략처음에는 판매가 영 시원찮았다. 마약성 진통제의 중독성 문제를 잘 아는 의사들이 옥시콘틴을 처방할 리 없었다. 의사들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다.퍼듀는 ‘다인 앤 대쉬(Dine and Dash)’ 전략을 썼다. 영업사원들은 의사들의 단골 식당을 파악해 이들이 음식 픽업을 주문하면 미리 결제해놨다. 이후 의사가 음식을 찾으러 오면 병원까지 가는 ‘5분’ 동안 옥시콘틴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했다. 당시 퍼듀는 미 의료계에 네트워크를 보유한 애보트와 판촉 계약을 맺었다. 미 의료 전문매체 스탯에 따르면 애보트는 처음 옥시콘틴 판매에 300여 명을 투입했다 간호사와 일반 직원에게도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영업사원들은 옥시콘틴 스펠링 모양으로 도넛과 케이크를 만들어 직원들에게 돌렸다. 미 주간지 뉴요커는 “영업 담당자들은 중독성에 대한 사전 교육을 받았다. 의사가 이에 관해 물어보면 ‘약물이 천천히 전달되는 특허 기술이 남용을 줄일 수 있다’는 준비된 코멘트를 내놨다”고 전했다. (퍼듀의 영업 관리자였던 윌리엄 게르겔리는 2002년 플로리다주 수사관에게 “퍼듀 경영진이 사실상 중독성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라고 지시했다”고 털어놨다) 퍼듀는 의학 콘퍼런스도 수시로 열었다. 의사들의 경비를 대고 옥시코틴 글자가 새겨진 낚시 모자, 장난감 등을 제공했다. 의사들은 강연료를 받고 옥시콘틴의 장점에 대해 발표했다. 서로 처방 경험도 공유했다. 사실상, 옥시콘틴의 효과를 공유하는 ‘간증’의 시간이었다. 퍼듀는 의학 저널 등에도 옥시콘틴을 광고했다. 뉴요커는 “퍼듀 내부 기록에 따르면 세미나에 참석한 의사가 그렇지 않은 의사보다 옥시콘틴 처방전을 2배가량 많이 쓴 것으로 드러났다”고 전했다.옥시콘틴 처방이 많이 될수록, 처방 용량이 늘어날수록 영업사원들은 큰돈을 벌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한 영업사원은 (옥시콘틴으로) 2009년 1분기(1~3월)에 1만6000달러(약 2100만 원) 이상의 보너스를 받는 등 연 10만 달러(약 1억3000만 원) 이상의 돈을 벌었지만, 하와이 여행을 보너스로 받은 최고 영업사원(내부에서 ‘톱퍼·Toppers’로 부름)은 아니었다”고 2018년 전했다. 옥시콘틴의 매출은 출시 첫해 4900만 달러(약 640억 원)에서 2002년 16억 달러(약 2조1000억 원)로 증가했다. 옥시콘틴이 출시 이후 약 20년 동안 올린 수익은 350억 달러(약 45조7300억 원)에 이른다.물론, 의사들의 의도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니었다. 캐나다 토론토대 약리학자 데이비드 주링크는 의사들이 옥시콘틴의 치료 효과를 진정으로 믿고 싶어 했기 때문에 옥시콘틴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의료 행위의 목표는 고통의 완화이고 의사들이 가장 흔하게 보는 유형이 ‘통증’”이라면서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를 진짜 돕고 싶어 하는 의사가 많은데 갑자기 안전하고 효과적이라고 알려진 치료제가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 ‘사무직 마약상’의 치명적인 처방전 옥시콘틴은 통증 완화에는 도움이 됐지만, 일주일 안에 중독되는 사람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중독된 사람들은 급격히 사용량을 늘렸고, 과다복용으로 죽거나 불법 제조된 싼값의 마약성 진통제를 찾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미국에서 2012년 한 해 동안 무려 2억5900만 장의 오피오이드(마약성 진통제) 처방전이 발급됐다. 미국 전체 인구가 3억3000만 명이다. 처방전을 손에 쥔 사람들은 대형 약국 체인인 CVS나 월그린, 대형할인점 월마트 등에서 합법적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타갔다. 수많은 청소년이 옥시콘틴에 중독됐다. (월마트는 오피오이드 오남용 조장으로 50개 주와 소송을 벌였고, 최근 31억 달러·약 4조 원에 합의했다) 대도시 일부 사람들을 병들게 했던 헤로인과 다르게, 옥시콘틴 같은 마약성 진통제는 시골의 평범한 주민들 사이에 스며들었다. 미국에서 오피오이드 1인당 소비량이 가장 많은 주는 대표적인 시골인 웨스트버지니아주였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2006~2012년 웨스트버지니아주 주민들은 1인당 연평균 67정을 복용했다. 켄터키주(63정), 사우스캐롤라이나·테네시주(58정), 네바다주(55정), 오클라호마주(52정) 등이 뒤를 이었다. 인구가 10만 명도 채 되지 않는 웨스트버지니아의 카벨 카운티에서는 2010년대 주민의 약 1%가 오피오이드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이코노미스트는 “2016년 오하이오에서는 검시소에 마약성 진통제 과다복용으로 시신이 밀려 들어와 일주일 동안 시신을 냉장 트럭에 보관해야 했는데 올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고 2017년 전했다. 2010년대 중반부터 주별로 제약사와 관련 마케팅사에 대한 고소가 이어졌다. 마약 진통제 사건의 주범인 퍼듀에는 수천 건의 피해배상 소송이 걸렸다. 퍼듀는 법원에 파산신청을 했고, 2021년 퍼듀와 새클러 가문은 총 60억 달러(7조8300억 원) 규모의 합의금을 내는 조건을 내세웠다. 파산법원은 이를 승인하려 했지만, 미 대법원이 최근 합의를 보류시킨 상태다. 새클러 가문이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제도를 악용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매사추세츠주에서 진행된 소송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8년까지 새클러 일가는 퍼듀로부터 40억 달러(약 5조2000억 원) 이상을 받았다. ● “제가 처방받은 건 마약이 아니었습니다”미국의 마약 중독자들은 어쩌면 퍼듀의 법적 다툼보다 더 긴 싸움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미 정부가 옥시콘틴, 펜타닐 등의 약물 관리와 유통을 강화하자 다수의 중독자가 헤로인으로 발길을 돌렸다. 미국 중독의학회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서 헤로인을 주사하려는 5명 중 4명은 마약성 진통제로 중독됐다. 여기에는 일반적인 통증으로 병원에 찾은 사람도 포함돼 있었다. 미국 항공기 제작사 보잉의 엔지니어였던 앤서니 해서웨이는 2005년 허리 디스크 수술 후 옥시콘틴을 처방받았다가 마약에 중독됐다. 그는 처방의 한계에 다다르자 헤로인으로 갈아탔고, 하루 수십만 원을 약을 구하는데 쏟아부었다. 회사에서 잘린 해서웨이는 약값을 구하기 위해 2013년 2월 5일부터 1년여간 은행 30곳을 털었다가 FBI에 붙잡혔다.그는 수사관에게 “약이 삶을 어떻게 점령하는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하긴 어렵다”라고 말했다.우리 몸은 운동하거나,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면 뇌의 보상 회로가 작동해 기분이 좋아진다. 엔도르핀 때문이다. 옥시콘틴, 펜타닐, 헤로인 같은 약물은 이 보상 회로에 파도를 일으킨다. 약물 경험자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보면 기절한 것처럼 보이지만(‘좀비’처럼) 내면에서는 평화가 깃들고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 펜실베이니아에 사는 아만다 라이언 카(24)는 “예수님이 안아주시는 것 같다”고 했고, 미시간에 거주하는 매트 스탯맨(48)은 “평생 참던 숨을 내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통에서 벗어난 강렬한 안도감”이라고 표현했다.NYT는 “(첫 복용) 당시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입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들었는지 등을 몇 년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수년간 이 느낌을 쫓게 된다”고 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뇌는 온도 조절기처럼 자체적으로 엔도르핀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외부 공급원이 넘치면 시스템이 무너진다. 동시에, 마약성 진통제는 뇌신경의 흥분을 전달하는 도파민을 급격하게 일으킨다. “약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니 빨리 더 복용해라”라고 신호를 보낸다는 의미다.NYT는 “약물 복용 횟수가 점차 늘어나고 매 순간 첫 번째 고점(극한의 안도감)을 쫓게 되지만, 수천 번을 복용해도 처음의 경험을 되돌릴 순 없다”고 강조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기가 뒤바뀐다. 쾌락은 줄어들고 더 많이 원하는 시기가 길어진다. 뇌가 약물에 적응한 것이다. 금단 증상이 찾아온다. 미시간에 사는 라지 메타(51)는 ”금단이 오면 모든 게 아프다. 머리 빗는 것도 면도하는 것도 아프다“며 ”계속 우울하고 절망감을 느낀다. 단 한 봉지의 마약이 10초 안에 우리의 감정 체계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깨닫게 된다“고 강조했다. 나중에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을 피하려고 마약을 찾는다는 의미다. 펜실베이니아의 자스민 존슨(29)은 “마치 악마가 기어 나오는 것 같다. 차라리 죽어서 고통을 끝내고 싶은 정도”라고 털어놓았다. ● 미사일을 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미국 정부는 오피오이드 중독으로 인해 연간 5000억 달러(약 650조 원)의 비용이 든다고 추산한다. 의료, 경찰, 재활 센터, 아동 보호 등이 포함된 수치다.미 정치권은 멕시코와 중국에 수년간 정치적 압력을 펼쳐 왔지만 신통치 않다. 마크 에스퍼 전 미국 국방장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임기 중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제조소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까지 고려한 적이 있다. 최근 미·중 관계 개선의 첫걸음으로 ‘펜타닐’이 나온 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증명한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15일(현지 시간) 미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 펜타닐 단속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펜타닐 문제는 다가올 미 대선의 주요 쟁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물론,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보긴 어렵다. 중국이 안 만들면 미얀마 등 다른 나라가 이를 대체할 가능성이 크다. 미얀마 군, 경찰은 2020년 북부 샨주의 정글에서 2억 달러(약 2600억 원)어치의 마약을 압수했다. 펜타닐, 헤로인, 필로폰 등이다. 마약은 다수가 경험하기 전에 경각심을 갖고 최선을 다해 막는 수밖에 없다.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미국에서는 ‘카르텔과의 전쟁’이라는 표현은 써도,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미 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마약 상담사(전 중독자)는 LA타임스 출신의 탐사보도 언론인 샘 퀴노네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펜타닐을 오래 사용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다 죽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마약 중독 대응에 관한 내용은 다음 기사 참고.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413/118811916/1김성모 기자 mo@donga.com}

    • 20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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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다를 꼭 돌려보내야 하나요?”[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스미스소니언 동물원의 판다 환송회 “조 바이든 대통령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게 ‘판다들을 미국에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할 가능성이 있을까요?”올해 8월 28일(현지 시간) 미 백악관 정례브리핑에서 한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시 주석의 회담이 이뤄지면 판다의 ‘거취’ 문제가 언급될 가능성이 있는지 물어본 것이다. 예상 밖의 질문이었는지 커린 잔피에어 백악관 대변인은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표정과는 다르게 단호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판다는 연말에 중국으로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국립 동물원에 사는 ‘샤오치지 가족’ 이야기다. 수컷 자이언트판다 샤오치지(3)와 그의 부모인 톈톈(26·수컷), 메이샹(25·암컷)은 12월 중국으로 돌아간다. 중국 정부와 동물원의 임대계약이 만료돼서다.스미스소니언은 지난달 23일부터 1일까지 샤오치지 가족의 환송회를 열었다. 동물원은 영화 ‘쿵푸팬더’와 샤오치지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상영하고, 판다 그림 그리기 등의 행사를 열었다. 판다 티셔츠를 입고 동물원을 찾은 관람객들은 밝은 표정이었지만,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참고로, 샤오치지는 전 세계 팬들이 선정한 인기 1위 판다다)워싱턴에 사는 간호사 노마 발렌티니(52)는 “이별을 견디기 힘들다”고 전했다. 그는 “저는 젊은 시절을 판다와 보냈다고 할 정도로 동물원을 자주 찾았다”면서 “최근 주 1회 이상 동물원에 와서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정말, 정말 슬프다”고 말했다. 뉴욕 브루클린에 사는 마이클 카디날레(10)는 ‘판다 캠’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전했다. 판다 캠은 판다 우리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다. 카디날레는 “판다는 저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였다”라며 판다의 귀환을 아쉬워했다. 미국 전역에서 판다와의 이별이 이어지고 있다.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동물원과 테네시주 멤피스 동물원은 각각 2019년과 올해 초 판다를 중국에 돌려보냈다. 현재 미국에는 판다 7마리(샤오치지 가족 포함)가 살고 있는데, 조지아주 애틀랜타 동물원에 있는 나머지 4마리도 내년 말이면 중국과의 임대 계약이 끝난다. 미 AP통신에 따르면, 애틀랜타 동물원 역시 중국과 임대 계약 연장을 논의하지 않고 있다. 애틀랜타 동물원의 판다들마저 중국으로 돌아가면, 미국의 판다 팬들은 자국에서 더 이상 판다를 볼 수 없게 된다.● 1300년 역사의 털북숭이 외교관들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동물원의 판다 한 쌍(수컷 ‘양광’과 암컷 ‘톈톈’)도 올해 12월 중국으로 돌아간다. 2011년 영국에 도착한 후 12년 만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판다들의 임대 기간이 10년에서 2년 연장됐다. 알리슨 맥켈런 에든버러 동물원 육식동물팀장은 “12월 첫 주에 중국으로 돌려보내도록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호주 애들레이드동물원의 마스코트인 수컷 판다 ‘왕왕’과 암컷 판다 ‘푸니’는 내년 11월 ‘비자’가 만료된다. 왕왕과 푸니는 중국 정부의 임대 기간 연장으로 15년 동안 애들레이드동물원에서 지냈다. 호주 언론 애들레이드나우는 “판다들의 두 번째 임대 계약 연장은 양국 정부의 손에 달려있다”고 전했다. 중국 정부가 판다 소유권을 가지고 있어서다. 중국은 전 세계 약 2400마리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은 취약종 판다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오로지 대여 형식으로만 판다를 해외에 보내고 있다. 과거에는 그냥 선물로 주기도 했지만, 1981년 중국이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종의 국제 거래에 관한 협약(CITES)’에 가입하면서 임대 방식으로 변경됐다. 해외에서 태어난 판다의 소유권 역시 중국 정부에 있다. 판다들은 성체가 되는 생후 4년 차쯤 짝을 찾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간다. 한국 에버랜드 동물원에 있는 ‘푸바오’도 중국 반환이 임박했다. 푸바오는 최근 3살 생일을 맞았다.미국의 판다들이 전부 중국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지면서 중국과 서방의 ‘판다 외교’가 반세기 만에 끝을 맺었다는 평가도 나온다.▶51년 만에 저무는 ‘판다 외교’ 관련 내용은 ‘글로벌 현장을 가다’ 기사 참고.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913/121170462/1● 세상에서 가장 정치적인 동물 최초의 판다 외교는 7세기 당나라 때로 전해진다. 중국 최초이자 유일한 여황제인 측천무후가 원활한 외교 관계를 위해 일본 천황에게 곰 2마리를 선물로 보냈는데, 이 곰이 판다라는 해석이 있다. 현대식 판다 외교는 1941년 시작됐다. 장제스(蔣介石) 당시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 여사가 중일전쟁 지원에 대한 감사 표시로 미국에 판다 한 쌍을 선물했다. 이후, 1949년 공산당이 집권하고 중국은 한동안 판다의 국외 반출을 금지했었다.냉전 시기로 강대국들이 치열하게 외교전을 펼치던 1972년 2월 21일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 부부가 중국을 찾았다. 라이벌 소련과의 패권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자 중국과의 데탕트를 시도한 것. 닉슨 대통령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를 만나, 소련군의 국경 배치 정보를 제공했다. 중국과 소련의 갈등 관계를 파고들면서 중국 정부의 마음을 얻으려 했다.이날은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처음 방문한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다. 저녁 만찬 자리가 열렸고, 당시 중국 최고 권력자였던 마오쩌둥(毛澤東)이 참여했다. 그의 옆자리에는 팻 닉슨 여사가 앉았다. 마오 앞에 놓인 담배를 유심히 보던 팻 여사가 입을 열었다. “이거, 귀엽지 않아요?” 담배통에는 판다 두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마오는 곧바로 “제가 좀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당황한 팻 여사가 “담배요?”라고 다시 물었고, 마오는 “아니요, 판다요”라고 말했다. 그 해, 판다 ‘링링’과 ‘싱싱’이 워싱턴 스미스소니언에 도착했다. (이들은 각각 1992년과 1999년 폐사했다) 판다는 ‘세상에서 가장 정치적인 동물’이 됐다. 판다가 실제로 정치를 한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다. 중국이 판다를 정치적인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1957년부터 1983년까지 중국은 우방 9개국에 판다 24마리를 나눠줬다. 이때 ‘판다 외교’라는 용어가 생겼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마오는 살아 숨 쉬는 존재가 국제 협력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평했다. ● 판다노믹스 중국이 점점 자본주의화 되면서 판다는 경제적 도구로도 활용됐다. 1980년대부터 중국은 한 달에 5만 달러(약 6700만 원)씩 받고 판다를 임대하기 시작했다. 멸종 위기의 판다 연구에 사용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현재 판다를 보유한 동물원은 중국 정부에 연 10억 원가량(한 쌍 기준)을 보호 기금(번식 기금) 명목으로 내고 있다. 에버랜드의 푸바오처럼 해외에서 새끼 판다가 처음 태어나면 추가로 50만 달러(약 6억7000만 원)를 내야 한다. 두 번째 산 차(최근 태어난 푸바오 동생들)에는 30만 달러(약 4억 원)의 보호 기금을 제공해야 한다. 중국은 임대 국가의 경제력에 따라 수수료(보호 기금)를 책정해 국가별로 차이가 있다.그동안 중국이 판다를 아무 국가에나 막 빌려준 것도 아니었다.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진에 따르면 중국은 스코틀랜드, 캐나다, 프랑스 등 주로 무역 계약을 체결한 나라에 판다를 빌려줬다. 대상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아시아 국가’와 ‘천연자원과 첨단 기술을 중국에 공급한 나라’였다. 이 같은 추세는 2008년 중국 쓰촨성 지진으로 판다 보호 시설이 피해를 본 뒤 더 분명해졌다. 중국 내 보호 시설이 취약해지면서 판다를 경제 협력 도구로 더 활용한 것이다.각국 동물원들은 판다의 귀여움을 무기로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각종 기념품을 팔았다. 2011년 영국 에든버러 동물원에 판다 한 쌍이 도착하고 2년 동안 방문객 수가 400만 명이나 증가했다. 스미스소니언의 판다 ‘톈톈’이 눈 속에서 뛰어놀고 있는 짧은 동영상은 소셜미디어에서 약 200만 번 공유됐다. 에버랜드도 최근 푸바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관련 굿즈 판매량이 이전보다 60% 이상 증가했다고 밝혔다. 에버랜드 유튜브 구독자 수도 최근 100만 명을 돌파했는데, 푸바오와 7월 태어난 동생 ‘루이바오(睿寶·슬기로운 보물)’, ‘후이바오(輝寶·빛나는 보물)’ 덕분이었다. 일본 NHK는 새끼 판다가 일본에 주는 경제효과를 267억 엔(약 2400억 원)으로 추산했다. 동물원 입장료와 인근 식당들의 매출, 기념품 판매 등을 합친 규모다. 2017년 일본 우에노동물원의 판다 한 쌍이 새끼를 낳았는데, 당시 동물원 근처에 매장을 보유한 중식당 체인 업체의 주가가 10% 가까이 급등했다. 새끼 판다가 공개되면 관람객이 증가해 수혜를 입을 것이란 기대가 반영됐다.과거에는 동물원들의 판다 유치 경쟁이 치열했다. 1972년 중국이 미국에 판다를 보내주기로 약속했을 당시 NYT는 미국 동물원들의 치열한 판다 유치전을 1면에 다루기도 했다. ● 하동 대나무 로켓배송 반면, 판다 유지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든다는 지적도 있었다. 에버랜드는 사육 공간과 체험 공간을 조성하는 데 200억 원을 투자했다. 호주 애들레이드 동물원도 판다 공간에 800만 호주달러(약 69억 원)를 쏟아부었다. 사육 비용도 만만찮다. 영국 BBC는 “판다 한 마리를 돌보는 데 연간 수억 원이 든다”며 “판다는 동물원에서 사육하는 데 가장 비싼 동물로, 코끼리 사육비의 약 5배가 든다”고 했다.판다가 먹는 대나무 비용이 이 중 대부분을 차지한다. 성체 판다는 하루에 약 12㎏의 대나무를 먹는데, 양뿐만 아니라 ‘품질’도 중요하다. 판다는 인상은 순해 보이지만 식성은 까다롭다. 젖어있거나 싱싱하지 않은 대나무 잎은 절대 먹지 않는다고 한다. 카타르 같은 중동이나 유럽에서는 항공이나 선박으로 좋은 대나무를 공수해야하기 때문에 특히 비용이 많이 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버랜드는 매주 1~2회 경남 하동에서 당일 배송으로 그날 벤 대나무를 공수해 온다. 대나무를 비용은 연 1억 원 정도다.이 때문에 해외에서는 ‘판다 비즈니스’에 대한 의구심을 종종 제기했다. 1999년 판다들이 애틀랜타 동물원에 도착했을 때 동물원 방문자 수가 60% 증가했다. 하지만, 몇 년 뒤 관람객은 판다 이전 수준으로 돌아왔고 비용은 증가했다. BBC는 “판다를 비즈니스로 생각한다면,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올까? 판다 사육비를 동물원 방문객 증가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기자는 판다의 귀여움이 비용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한다) 중국 정부에 내는 높은 ‘임대료’도 부담이다. 미국 동물원들은 2006년 대표단을 꾸려 중국에 수수료를 최대 50% 인하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핀란드에서는 이 비용이 부담돼 임대 기간이 종료되기 전 판다를 조기 반환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 데탕트의 상징에서 애국심의 상징으로 물론, 미국 판다들이 비용 때문에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미국의 판다는 경제성보다는 미중 관계의 온도에 따라 ‘거취’가 달라졌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10년 티베트 지도자 달라이 라마와 회담을 결정하자 중국 정부는 미국에서 태어난 판다 두 마리를 중국으로 귀환시켰다. 이듬해,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 미국을 방문하는 등 화해 무드가 조성됐다. 그러자, 중국 정부는 미국에 대한 판다 대여를 5년 연장했다.미국 판다들이 올해 말 중국으로 돌아가게 된 데는 최근 악화한 미중 관계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많다. 미 블룸버그통신은 지난달 “양측(중국과 미국)은 판다 대여에 정치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만, 중국은 오랫동안 보상을 하거나 처벌하는데 ‘판다 외교’를 활용해왔다”며 “미국의 판다 복귀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가 역사상 최악으로 치닫는 등 대부분 협력이 단절된 순간에 발생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최근 ‘갈비 판다’ 논란으로 중국 내 여론이 악화한 것도 있다. 미 멤피스 동물원에서 20년 지낸 수컷 판다 ‘러러’는 올해 2월 중국 송환을 앞두고 숨을 거뒀다. 러러와 함께 온 암컷 판다 ‘야야’의 모습이 온라인에 공개되면서 중국 내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야야는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수척해진 상태였다. 중국에서 ‘조기 반환’ 요청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동물원은 올 4월 대여 기간이 끝나자마자 야야를 중국에 돌려보냈다. 멤피스 동물원은 러러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판정했지만, 중국 네티즌들은 학대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야야의 중국 내 인기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까지 제쳤다. 야야는 중국 정부의 검진과 격리 기간 등을 거쳐 올 6월 베이징 동물원으로 옮겨졌는데, 여기에 중국인들의 관심이 쏠리면서 테슬라 사업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을 찾은 머스크 소식이 묻혔다. 미 경제 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야야가 뛰어노는 영상은 소셜미디어에서 2억3000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했지만, 머스크의 저녁 식사는 5100만 회에 불과했다”고 전했다. 중국 정부가 애국적 자부심을 자극하는 용도로 판다를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블룸버그는 “‘중국의 국보(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표현을 빌림)’인 판다를 집으로 데려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애국적 자부심의 표현으로 홍보될 것”이라고 지난달 전했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야야의 복귀는 중국 정부가 엄격하게 검열하고 관리하는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비꼬았다.● 지구상 가장 번식이 어려운 동물블룸버그는 중국 정부의 판다 활용법이 달라진 배경으로 ‘개체수’를 꼽았다. 블룸버그는 “판다가 더 이상 멸종 위기에 처해 있지 않기 때문에 시 주석은 판다로 민족주의 정치를 할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최근 몇 년간 판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국제적인 협력이나 보호 기금 등의 필요성이 감소했다는 설명이다.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은 2016년 멸종 위험도 적색목록에서 자이언트 판다 지위를 ‘멸종 위기(endangered)’에서 ‘취약(vulnerable)’으로 한 단계 격하시켰다. 판다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미 다큐멘터리 잡지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따르면, 중국 쓰촨(四川)성 판다 보호구역에 서식하는 판다는 1986년 500마리에서 2015년 1300여 마리로 3배 가까이로 증가했다. 2006년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쓰촨성 보호구역은 판다 최대 서식지다. 세계자연기금(WWF)은 현재 판다 1800여 마리가 야생에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물원에 사는 판다는 600마리 정도다. 1900년대 성행했던 판다 밀렵이 사라지고 판다 서식지 인근에서 벌목이 줄어든 덕분이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판다 사냥은 합법이었지만, 지금은 판다를 죽이면 20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고 전했다. 당시, 판다 가죽은 국제 암시장에서 10만 달러(약 1억3000만 원)의 고가에 팔렸다.판다 ‘번식’ 기술의 발전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판다는 신체적 특성과 기질 때문에 번식이 가장 어려운 동물로 꼽힌다. 얼마나 어려운지 스미스소니언 동물원은 지난해 ‘판다의 성생활(The Sex Lives of Giant Pandas)’이라는 특별 팟캐스트까지 제작했다.판다가 임신에 성공할 수 있는 골든타임은 1년 중 고작 24~72시간밖에 안 된다. 이 시기가 지나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판다의 기질 탓에 둘을 붙여 놓는다고 사랑이 불타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까지 번식과 새끼 사육에서 실패한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글로벌 판다팀의 짝짓기 연구 그러다가, 서구 연구진의 도움으로 반전이 일어났다. 중국 과학자들은 스미스소니언 보존생물학 연구소 연구진 등 글로벌 팀을 구성해 연구를 거듭했다. 현재 중국에서 사용하는 판다 ‘번식 프로토콜’을 개발한 것도 이 연구진이다. 중국 사육사들은 분위기 조성을 위해 판다의 짝짓기 장면이 담긴 ‘판다 포르노’를 틀었다. 비아그라와 성인용품까지 동원했다. 장허민 사육사는 “쓰촨성 청두의 성인용품점을 찾아가 점원에게 ‘예열에 쓸만한 성인용품을 달라’고 말했다. 동시에 정부에 비용을 돌려받기 위해 영수증을 요청했다”고 회상했다. (비아그라와 성인용품은 큰 효과를 못 봤다고 한다)연구진은 암컷이 발정기에 있을 때를 세밀하게 평가하는 기술을 만들고, 수컷 정자를 이용한 인공 수정도 프로토콜에 포함했다. 유전학자 조나단 발루(스미스소니언 연구소)는 “판다는 사육 중인 동물 중 유전적으로 가장 다양한 동물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중국인들이 판다 번식에 적용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발루의 동료인 데이비드 와일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끼 판다들이 무더기로 태어났다”고 회상했다. 중국 정부와 해외 연구진이 판다를 위해 손을 잡은 일은 이전에도 있었다. 1980년 세계 최대 비영리 국제 자연보전기관인 세계자연기금(WWF)이 서양 단체로는 처음으로 중국 정부와 판다에 관해 협력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은 “WWF는 저명 야생 생물학자 조지 샬러를 중국에 파견 보냈고, 그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판다 기초 연구를 수행했다”고 전했다. 판다의 숫자가 늘어난 데에 서구의 연구 기술이 한몫한 셈이다. 팡왕 중국 푸단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현재 수준의 판다 개체수 증가는 20년 전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판다는 매우 성공적인 사례”라고 강조했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자국 내 판다 서식지 역시 지속해서 늘려왔다. 쓰촨(四川), 간쑤(甘肅), 산시(陝西)성 등 3개 성에 걸쳐 조성한 판다 국립공원의 면적은 2만7134㎢에 달한다. 홍콩(2754㎢)의 10배,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8991㎢)의 3배 수준이다. 중국은 현재 3개 성의 대왕판다 보호구역을 통합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나중에는 중국 정부가 더 이상 판다를 해외로 보낼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판다 팬들도 중국에 가야만 판다를 볼 수 있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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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약 사려고 ‘투잡’ 뛰고 있습니다”[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위고비 신드롬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 사는 직장인 티나 마리 포터(49)는 최근 ‘투잡’을 시작했다. 월 100만 원이 넘는 ‘약’을 사려면 어쩔 수 없었다.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사는 조던 존스(30)도 같은 이유로 허리띠를 졸라 매고 있다. 외식을 줄이고, 식료품을 살 때는 영수증을 꼼꼼히 살피는 중이다. 약값이 비싼 탓에 남자친구까지 나섰다. 그의 남자친구는 최근 근무시간을 늘려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있다. 포터는 “(약을 복용하고) 인생이 바뀌었다”면서 “비용이 정말 많이 들지만, 덕분에 더 건강해졌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에서는 이 약을 구하기 위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다. 덴마크 제약사 ‘노보노디스크(이하 노보)’가 개발한 비만치료제 위고비(Wegovy) 이야기다. 주사 1대 값이 45만 원에 이를 정도로 고가지만, 역대 가장 좋은 비만치료제라는 평가가 나오면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위고비를 사기 위해 일을 늘리거나 지출을 줄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소셜미디어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위고비는 마커펜 모양의 주사다. 복부나 허벅지, 팔에 스스로 주사를 놓는 방식이다. 일주일에 한 번만 놓으면 되고, 한 달 치인 주사기 4개를 한 세트로 판다. 위고비 한 세트는 미국에서 1350달러(약 180만 원)에 달한다. 한 달에 180만 원이 대중적인 가격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입소문을 빠르게 탔다. 1년 4개월(68주)간의 임상시험에서 위고비를 맞은 참여자들은 체중이 평균 15% 줄었다. 대상은 과체중(BMI 27∼29.9)이면서, 심혈관계 질환 등 한 가지 이상의 체중 관련 질환이 있는 환자들이었다. 지난달 노보는 위고비가 ‘비만뿐 아니라 심장마비, 뇌졸중 등 심혈관 질환 발생 위험을 20% 감소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덴마크의 한 병원 연구진이 위고비의 주요 성분을 복용한 사람들의 알츠하이머 발병률이 낮은 것을 발견했다.‘위고비는 만병통치약’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 “단식, 그리고 위고비”사실, 비만치료제가 등장한 지는 꽤 됐다. 위고비는 2021년에 미 식품의약품(FDA)에서 판매 허가를 받았다. 위고비와 용량만 다른 ‘오젬픽’은 이보다 4년 전인 2017년 FDA 승인을 받았다. ‘삭센다’라는 비만 주사는 2014년부터 판매하고 있다. 다만, 오젬픽은 애초에 당뇨약으로 승인을 받았고, 삭센다는 매일 주사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위고비가 살을 더 많이 빼주는 것도 맞다. 이 때문에 위고비는 출시 5주 만에 삭센다 4년 치 판매량을 돌파하기도 했다. (위고비와 오젬픽, 삭센다 모두 노보의 치료제다)그런데, 최근 치료제를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요가 폭증했다. 노보가 위고비의 유럽 출시 계획을 늦출 정도. 약 구매 문의가 끊이지 않자 FDA는 의약품 실시간 상황판에 ‘수요 증가로 물량 부족. 언제 해소될지 알 수 없음’이라고 안내했다. 품귀 현상의 배경에는 유명인들의 ‘간증’이 있었다. 모델 킴 카다시안을 비롯해 여러 할리우드 스타들이 위고비를 맞는다는 소식이 입소문을 타면서 치료가 필요한 비만 환자뿐만 아니라 미용 목적의 구매까지 몰린 것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한 X(구 트위터) 사용자가 지난해 10월 머스크 에게 “13㎏을 감량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자 머스크는 이렇게 답했다. “단식, 그리고 위고비(Fasting And Wegovy).” ● 날씬해지기 vs. 살아남기부유한 백인 밀집 거주 지역으로 뉴욕에서 비만율이 최하위인 ‘어퍼이스트사이드’에서도 위고비 열풍이 불었다.미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미 뉴욕시의 처방 데이터를 분석해 “어퍼이스트사이드 주민 2.3%가 위고비 등 비만치료제를 처방받았다”고 전했다. 비만율이 가장 높은 편에 속하는 브루클린 처방 비율의 2배 수준이었다. 위고비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비만치료제가 상대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에게 향하고 있던 것. 뉴욕 부촌의 생활상을 주로 집필하는 작가 질 카그먼은 “요즘 부자들은 위고비를 ‘살 빠지는 비타민’ 정도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비만치료제를 흔히 먹는 ‘다이어트 보조제’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꼬집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약값 부담은 부자들이 덜하다. 공공 건강보험인 메디케어는 당뇨병 치료가 아닌 살을 빼기 위해 비만치료제를 사용할 경우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반면 부유층이 보통 가입하는 민간 의료보험은 체중 감량이 목적일 때도 보험 처리를 해준다. 비만치료제는 복용을 중단하면 체중이 다시 늘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번 살이 빠지는 것을 경험하면, 끊기 어려운 구조다. 주사를 맞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고정 수요는 증가하게 된다. 공급이 크게 늘지 않는 한 품귀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비만치료제가 절실한 환자들은 약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블룸버그는 “콜로라도주에 사는 한 여성은 주사를 구하려고 약국 100여 곳에 전화를 돌렸고, 그의 남편이 2시간 반을 운전해서야 겨우 0.25mg(오젬픽 1회 분량)을 받아올 수 있었다. 일부는 약을 구하지 못해 체중이 다시 늘었다”며 “치료가 급한 환자들이 페이스북에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고 지난달 전했다. 최근 들어 당뇨병 치료제 오젬픽까지 구하기 어려워져 당뇨병 환자들도 괴로워하고 있다. 살을 빼려는 사람들이 위고비가 구하기 어려워지자 오젬픽을 대신 처방 받았기 때문이다. 미 헬스케어 데이터 분석업체 코모도헬스에 따르면 지난해 오젬픽을 구매한 사람 중 40%는 당뇨병 환자가 아니었다. 코모도헬스는 “체중 감량 목적으로 처방받은 것”이라고 분석했다.▶비만치료제 열풍에 관한 내용은 ‘글로벌 포커스’ 기사 참고.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30915/121203446/1● 루이비통 넘어선 회사올해 2분기 위고비 판매액은 7억3500만 달러(약 9800억 원)에 달했다.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의 6배다. 위고비 인기에 힘입어 노보 주가는 2021년 이후 4배 이상으로 올랐다. 올해만 주가가 40%가량 뛰었다. 위고비 덕분에 노보는 유럽 기업 시가총액 최고액을 찍었다. 노보는 4일(현지 시간) 덴마크 증시에서 시가총액 4280억 달러(약 572조 8800억 원)로 세계 최대 명품 기업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기업 가치(약 4190억 달러)를 제치고 유럽 증시에서 처음 1위를 차지했다. 국내외에서 ‘비만주사가 명품 가방을 이겼다’는 제목의 기사가 쏟아졌다. 잘 만든 비만 치료제 하나가 국가 경제까지 이끌고 있다. 노보 시총은 덴마크의 국내총생산(GDP)마저 추월했다. 덴마크 정부는 지난달 말 제약 산업의 성장을 주요 요인으로 꼽으며 연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0.6%에서 1.2%로 올렸다.국가 경제에서 노보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자 덴마크 경제학자들은 노보를 제외한 경제 통계를 내야할 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덴마크는 인구 600만 명으로 경제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전 세계 아이들의 블록 장난감인 ‘레고’, 해운회사 ‘머스크’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다수 있다. 그런데도, 노보가 덴마크 경제에 미친 영향이 훨씬 컸다. 요나스 단 페테르센 덴마크 국가통계국 수석 보좌관은 “지난해 덴마크 경제 성장의 3분의 2를 제약 업계가 차지했다”고 밝혔는데, 덴마크 제약 업계에서 노보 매출은 2위 제약 업체 ‘룬트벡’의 10배가 넘는다. 블룸버그는 “노보의 성장이 없었다면 덴마크 경제는 1년 반 동안 정체되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보의 활약 때문에 덴마크 기업들이 기(氣)를 못 편 점도 있다. 배가 아파서가 아니다. 각국에서 치료제 구매가 몰리다보니 화폐(크로네) 가치가 상승해 기업 경쟁력에 압박이 심해진 탓이다. 이 때문에 일부 경제학자들은 덴마크에 ‘네덜란드병’이 도질 수 있다고 경계했다. 네덜란드병은 네덜란드가 1960년대 천연가스를 수출하면서 급격하게 소득이 증가했지만 화폐가치가 오르면서 여러 산업들이 경쟁력을 잃게 된 것을 의미한다.한 회사에 지나치게 의존하다가 핀란드처럼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때 전 세계 휴대폰 시장을 장악했던 ‘노키아’가 쇠락하면서 핀란드 경제 전반이 침체한 것을 떠올린 것이다. 제약업 특성상 일자리 창출이 많지 않다는 점도 덴마크의 고민 중 하나다. ● 당뇨약에 진심인 회사 사실, 노보는 비만주사 이전에 당뇨병 치료제에 진심인 회사였다. 1923년 창립한 이후 무려 100년 동안 당뇨약 개발에 전념해왔다. (얼마나 열정인지 코펜하겐 본사 건물을 인슐린 분자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했다고 한다) 1922년 코펜하겐대 교수이자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아우구스트 크록은 예일대에 강연하기 위해 부인 마리 크록과 미국을 찾았다. 미국 방문 중에 캐나다 연구진을 만난 부부는 1921년 발견한 호르몬인 인슐린으로 당뇨병을 치료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아내 마리 크록이 제1형 당뇨병 환자 주치의이었고, 본인이 제2형 당뇨병 환자였기 때문이다. 부부는 인슐린을 개발한 캐나다 토론토대로 건너가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인슐린을 생산, 판매할 수 있는 허가를 따냈다. 부부는 1923년 ‘노디스크 인슐린연구소’를 차렸다. (1925년 덴마크에서 당뇨병 치료제 기업 ‘노보 테라퓨티스’가 설립됐는데, 둘은 경쟁하다가 1989년 합병했다. 그래서 ‘노보 노디스크’가 탄생했다) 이 회사는 기술 혁신을 거듭하면서 1978년 유전자 재조합으로 인간 인슐린을 세계 최초로 생산했다. 1985년에는 최초의 펜 형태 주사제를 내놨다. 이후, 당뇨병 환자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노보가 수혜를 봤다. 2000년 1억5000만 명이던 전 세계 당뇨병 환자 수는 5억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노보는 현재 전 세계 인슐린 시장의 45.7%를 차지하는 당뇨병 치료제 업계 1위 업체다.노보 직원 중에서도 당뇨병 환자이거나 환자의 가족인 경우가 적지 않다. 2017년 노보 최고경영자(CEO)였던 라스 프루어가르드 예르겐센의 아버지, 부사장 겸 세포치료 R&D 책임자인 제이콥 스텐 피터슨의 어린 딸도 당뇨병을 앓고 있다. 피터슨은 “이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20년 동안 일했다”며 “딸이 20살이 되기 전에 치료를 약속했다”고 강조했다.▶노보의 비즈니스 전략에 관한 내용은 ‘딥다이브’ 기사 참고.https://www.donga.com/news/Economy/article/all/20230822/120812748/1● 굶주린 쥐이전에는 노보의 비즈니스가 당뇨병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사업 다각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었다. 그런데 노보가 당뇨약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위고비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비만치료제가 당뇨병 약 개발 과정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노보는 당뇨병 임상시험 도중 참가자들의 체중이 줄어드는 ‘부작용’을 알아챘다. 당뇨병 치료제가 체내 호르몬인 ‘GLP-1(혈당조절 호르몬)’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밥을 먹으면 GLP-1이 장에서 생성돼 인슐린 분비를 촉진한다. 뇌에는 포만감을 느끼는 신호를 보내는 역할을 한다. 비만치료제는 GLP-1처럼 인슐린 분비를 촉진시켜 체내 혈당을 줄이고 뇌에 신호를 보내 배가 부르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간에선 포도당 합성을 감소시키고, 위는 음식을 천천히 소화하게 된다. 음식이 위장에 오래 머무는 만큼 포만감을 느끼고 덜 먹고 싶게 된다. 비만 주사는 배고픔을 조절하는 뇌의 시상하부에도 영향을 미친다. 첫 발견은 ‘굶주린 쥐’에서 시작됐다. 1990년대 초 노보 연구원들은 당뇨약 개발을 위해 GLP-1을 생성하는 췌장 세포 종양을 실험용 쥐에 이식했는데, 쥐가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실험 대상 쥐들이 스스로 굶어 죽는 모습이 의아했다. 노보 연구진인 로떼 비예르 크누센은 “당시 ‘식욕 조절’에 미치는 중요한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확신했다”고 했다.연구진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에서 GLP-1 주사를 맞은 사람들이, 주사를 안 맞은 사람보다 뷔페에서 12% 덜 먹는다는 결과를 얻었다. 노보는 당뇨약을 비만주사로 만들었다. 화이자가 심장병 약으로 만들던 ‘비아그라’를 발기부전 치료제로 만든 것과 유사하다. 노보의 위고비는 ‘우연히 발견한 행운’인걸까? 그런 시각이 많지만, 비만치료제 개발은 쉽게 도전할 만한 분야는 아니었다. 그동안 다수의 글로벌 제약사들은 비만치료제가 효과적이지 않고,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려왔기 때문이다.1934년 여러 제약사들이 ‘디니트로페놀(DNP)‘이라는 약물을 다이어트 약으로 판매했는데, 이 약의 독성 때문에 약 2만5000명이 시력을 잃었다. 미 정부는 사용을 금지했다. 1990년대에는 ‘다이어트 한약’으로 ‘마황(Ephedra)’을 사용했다. 심장마비와 뇌졸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2004년 사용이 금지됐다. 이후, 리모나반트와 시부트라민 같은 제제가 체중 감소 약으로 처방됐지만 안전성 우려로 미국에서 판매가 중단됐다. 노보의 비만주사 개발은 고도화된 전문성의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당뇨병을 연구하며 발견한 가능성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노보의 (비만주사) 성공은 처음부터 무언가를 창조하기보다, 고도로 전문화한 비즈니스의 인접한 영역에서 혁신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입증하는 사례”라고 강조했다. ● “게으른 게 문제 아닌가요?”노보에서 비만치료제 개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경영진 설득부터가 쉽지 않았다. 노보는 100년 가까이 한 종류의 치료제만 만들던 회사였다. 1990년 이후 CEO가 3명에 불과할 만큼 안정성을 중시해왔다. 한 마디로, 보수적인 회사라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내부에서도 비만치료제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만큼 비만주사 개발이 쉽지 않아서다. 글로벌 제약사 일라이릴리에서 일했던 독일 헬름홀츠 뮌헨 연구소의 마티아스 초프 박사는 “(비만치료제 개발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라며 “신체에는 체중을 조절하기 위해 상호 작용하는 신경 자극과 호르몬의 중복된 회로가 너무 많아서 하나를 조정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비만주사를 개발한 노보에서조차 약물의 작용 원리를 세세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NYT는 “오젬픽과 위고비가 삭센다보다 더 효과적인 이유는 여전히 미스테리다. 왜 일주일에 한 번 주사하는 것이 하루에 한 번 주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체중 감소를 가져올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노보와 일라이 릴리에 자문해 온 미 미시간대 비만 연구자 랜디 실리도 “아무도 GLP-1의 작동 원리를 전부다 이해하진 못했다”고 설명했다.약물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보다 더 큰 문제는 ‘비만’에 대한 편견이었다. 노보의 임원이었던 리차드 디 마르키 박사는 “제약 업계에서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며 “비만을 질병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뇨병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다니엘 드러커 교수는 “GLP-1 연구는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을 줬다”면서 “학회를 신청하면 강연 시간을 맨 마지막으로 잡아줘 많은 참석자들이 공항으로 떠났고 어떤 때는 강연 도중에 강연장을 철거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1980, 1990년대 초반까진 거의 텅 빈 강당에서 연설했다”고 덧붙였다.노보의 일부 경영진조차도 비만이 의지력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노보 재단의 CEO이자 최고과학잭임자인 마즈 크로스가드 톰슨은 “최고경영자에게 비만이 단순히 생활 방식에서 오는 질환이 아니라는 점을 설득하는데 반년을 소비해야했다”고 말했다. ● 비만은 21세기 신종 유행병?많은 사람들이 비만을 폭식과 게으름(또는 나태함)의 결과물로 여기지만, 비만도 엄연한 병이다. 운동과 식습관 노력만으로 비만을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연구도 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인체의 뇌는 얼마나 많은 지방을 체내에서 운반할지 일종의 ‘설정점(또는 방어 지방량)’을 결정한다”며 “뇌는 사람이 섭취하는 양을 조절해 이 설정 포인트를 유지한다”고 전했다. ‘요요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다. (위고비 같은 비만주사는 뇌의 설정점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WSJ은 “과학적 증거에 따르면, 비만은 신체의 호르몬 변화를 일으켜 줄어든 체중을 회복하게 만든다”고도 했다. 비만을 의지력보다 생물학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유전적인 영향도 있다. 학계에서는 최소 1500여 개의 유전자가 체중과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다. 미 뉴욕 마운트 사이나이 의대의 루스 루스 교수는 “어떤 사람들은 유전적으로 체중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유전자의 변이 조합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유전자 변형을 일으킬 수 있는 식품이 이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어떤 이에게 체중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NYT는 “미 미시간주 앤아버의 체중 관리 클리닉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사무엘 심슨은 비만과 당뇨병을 앓았던 어머니와 형제들의 운명을 자신도 겪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며 “그들은 모두 신부전증에 걸렸고, 결국 59세의 나이에 각각 숨졌다”고 전했다. 미 미시간대 의대 교수인 에이미 로스버그는 “(비만) 환자에게 ‘의지의 문제’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미국 의학협회는 2013년 비만을 만성 질환으로 분류했다. 비만이 공식적으로 질병이라고 공표한 것. 세계보건기구(WHO)는 2014년 비만을 ‘21세기 신종 유행병’으로 진단했다. 블룸버그는 “비만 관련 건강질환은 236가지에 달한다”며 “비만인 사람은 제2형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2배보다 더(243%) 높고, 심장병과 고혈압을 앓을 확률도 일반 사람보다 각각 69%, 113% 더 높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 글로벌 휩쓰는 ‘비만의 경제학’전 세계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뚱뚱해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WHO에 따르면, 전 세계 비만 인구는 10억 명을 넘어섰다. 세계비만연맹은 2035년 세계 인구의 절반인 40억 명 이상이 비만이나 과체중으로 분류될 것으로 전망했다. 가공식품 섭취가 늘고, 앉아서 생활하는 시간이 증가한 탓이다.비만은 보통 키 대비 체중 비율인 체질량 지수(BMI)를 사용해 측정한다. 25가 넘으면 과체중, 30이 넘으면 비만으로 본다. (예로, 키가 175㎝인 남성은 77㎏ 이상이면 과체중, 92㎏가 넘으면 비만이다)미국에서 비만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다. 1974년 12%였던 미국의 비만율은 현재 42%에 달한다. 50년 동안 비만율이 2년 연속 감소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WHO에 따르면 2020~2022년 미국에서 약 64만 명이 비만으로 목숨을 잃었다. 과체중은 의료비나 근로 시간 감소 및 생산성, 건강 보험, 병가, 수명 단축 등 다방면으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한다. 학계는 전 세계 ‘비만 비용’이 2035년 4조 달러(약 5335조 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전 세계 GDP의 2.9% 수준(2019년 2.2%)에 이를 수 있다. 2021년 미 하버드대와 조지워싱턴대 연구진은 비만이 1인당 연 1861달러(약 250만 원)의 초과 의료 비용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비만 관련 지출 규모도 어마어마하다. 전 세계 사람들이 살을 빼기 위해 연 2500억 달러(약 337조 원) 가량을 소비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미국인들은 헬스장과 칼로리를 계산하는 운동 추적 앱, 다이어트 식단 등 체중 감량을 위해 연간 700억 달러(약 94조 원)를 쓴다”고 전했다. 블룸버그는 “비만 자체가 거대한 경제력을 지녔다”고 표현했다. 국제학술지 영국의학저널 글로벌 헬스는 비만 인구를 현재보다 5%포인트 낮추면 연 4290억 달러(약 579조 원)를 절감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비만 인구가 더 오래, 더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점도 수치에 고려했다. ● 노키아 아닌, 아이폰의 탄생제약 업계는 ‘위고비’를 시작으로 비만주사의 사용이 확대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새로운 치료제가 비만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글에서 “일부 환자가 구토, 설사 같은 부작용을 호소하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경우 처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전했다. 비만치료제의 효과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설명이다. 노보 이외에 다른 글로벌 제약사들도 비만치료제 신약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화이자는 위고비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알약 형태의 치료제를 개발했다. 일라이릴리는 위고비보다 감량 효과가 더 큰(평균 20%) 비만치료제 출시를 앞두고 있다. 조 풀러 하버드비즈니스스쿨(HBS) 교수는 “(비만 치료제)의 등장은 스마트폰의 등장이나 택시에서 우버로의 전환처럼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고 강조했다.스위스 투자은행 UBS는 비만치료제가 ‘역대 최대 규모의 신약’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 투자사 제프리스는 2031년까지 비만치료제 시장 규모가 1500억 달러(약 203조 원)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2021년 제약사들의 전체 암 치료제 매출이 1850억 달러(약 249조 원) 수준이었다. 비만치료제 시장이 금세 이를 따라잡을 것이라는 예측이다.그러나 몇 가지 우려가 남아있다. 먼저, 비만 약을 어떻게 평생 먹느냐는 지적이다. 비만치료제는 약을 복용하는 동안에만 효과를 보인다. 약을 끊는 순간 체중이 다시 늘어난다. 노보가 자체 진행한 두 건의 임상시험에서 비만주사를 중단한 환자들의 몸무게는 1년 이내에 대부분 제자리 근처로 돌아왔다.제약사는 이에 대해 “비만을 진정성 있게 질병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이 나오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예르겐센 노보 CEO는 “고도 비만인 환자의 대부분이 비만을 만성 질환이라고 생각한다”며 “고혈압 환자가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혈압이 상승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다. 비만을 만성 질환과 같은 시각에서 치료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약에만 의존하게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약으로 쉽게 체중을 줄이면 생활 습관을 고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식단 관리나 운동에 소홀해진다는 것이다.결정적인 건 역시 ‘돈’ 문제다. 위고비의 정가는 연 1만3600달러(약 1800만 원)에 달한다. 미 비만학회 학술지 ‘비만(Obesity)’은 “위고비의 원가는 월 40달러(약 5만4000원) 수준”이라고 꼬집었다. 연간으로 계산해도 정가에 비해 원가가 턱 없이 낮다. 노보가 약을 지나치게 비싸게 판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의 경우 보험에 의지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한 의학저널은 메디케어에 가입한 미국 비만 환자 중 10%만 위고비를 복용해도 연 270억 달러(약 37조6000억 원)가 투입돼야 한다고 분석했다. 저널은 “현 의료 시스템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밝혔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은 복제약은 10년 뒤에나 살 수 있다. 위고비의 미국특허는 2032년 만료된다. 위고비는 비만이라는 병의 적절한 답일까, 아니면 또 다른 골칫거리일까.김성모 기자 mo@donga.com}

    • 2023-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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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계속될 수 있을까[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빈민촌 성공 신화의 몰락 중국 대형 부동산 개발기업 헝다(恒大, 에버그란데)그룹의 쉬자인(許家印) 회장은 중국 경제 성장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쉬자인은 1958년 허난성 저우커우시의 빈민촌에서 태어나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태어난 지 일 년도 안 돼 어머니가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에서 월 14위안(약 2500원)의 최저생계비를 받으며 겨우 생활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공부는 잘했다. 쉬자인은 우한과학기술대학의 금속학과에 3등으로 입학했다. 이후 제철소와 무역 회사에서 10년 넘게 일했다. 1996년 그는 덩샤오핑이 경제특구로 지정한 선전시에 ‘헝다부동산’을 차렸다. 직전 회사에서 부동산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 헝다는 당시 다른 부동산 개발사들과 다르게 작은 면적과 싼 가격을 앞세웠다. 주택에 ‘클라우드 레이크 로열 가든’, ‘리버사이드 맨션’ 같은 서구식 이름을 붙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헝다는 수백 도시에서 1000건 이상의 프로젝트를 맡았다. 연간 330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직간접적으로 창출했다. 회사의 직원 수도 10명에서 수천 명으로 늘었다.헝다는 생수부터 전기차, 돼지 사육, 축구단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넓혔고, 쉬자인은 억만장자가 됐다. 중국 부호 순위를 조사하는 후룬바이푸에 따르면 2020년 쉬자인의 자산은 1981억 위안(약 36조 원)으로 당시 중국에서 세 번째로 돈이 많았다. 1, 2위는 알리바바의 마윈과 텐센트의 마화텅이었다. 쉬자인은 2018년 한 연설에서 “내가 가진 모든 것과 헝다 그룹이 이룬 것은 당과 국가, 사회 전체가 준 것”이라며 중국 공산당에 감사함을 표했지만, 그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과실을 가장 열심히 맛본 사람이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쉬자인은 희귀한 프랑스 와인을 맛보기 위해 파리를 여행하고, 100만 달러짜리 요트와 최고급 항공기를 사 모았다”고 전했다. 헝다와 중국 신규 주택 판매 1위를 다툰 대형 부동산 개발사 비구이위안(碧桂園·컨트리가든) 창업자 양궈창(楊國強)의 성공 스토리도 영화 못지않다. 양궈창은 17살까지 신발을 신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건설노동자로 현장에서 일하다가 1992년 비구이위안을 창업했다. 그는 사업 초기 명문 학교를 유치하면서 고급 아파트 프로젝트를 성공시켰고, 경쟁이 덜한 3선, 4선 도시를 공략하며 사업을 키웠다. 비구이위안은 2015년 1000억 위안(약 18조 1700억 원), 2017년 2000억 위안(약 36조3000억 원)의 연 매출을 거두며 업계 1위에 올랐다. ▶비구이위안의 성공 전략과 비즈니스 취약점에 관한 내용은 ‘딥다이브’ 기사 참고. ● 중국판 리먼 사태 우려그런데, 그렇게 잘 나가던 회사들이 최근 채무불이행(디폴트)으로 문 닫을 처지에 놓였다.비구이위안은 지난달 6일 만기가 된 채권 이자 2250만 달러(약 300억 원)를 제때 갚지 못해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현재 비구이위안은 이자와 공사자금 확보를 위해 긴급하게 자산을 처분하고 있다.2021년 디폴트 상태에 빠진 헝다는 지난달 28일 17개월 만에 홍콩증권거래소에서 거래를 재개했지만, 주가가 80% 이상 폭락했다. 헝다는 지난해 상반기 664억 위안(약 12조 원), 올해 상반기 330억 위안(약 6조 원)의 순손실을 냈다. 부채 구조조정 중인 헝다는 최근 해외 발행채권을 정리하기 위해 미국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다.대형 부동산 개발사들의 위기가 금융권으로 확산하면서 ‘리먼 모멘트’ 직전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중국 최대 민영 자산관리그룹인 중즈계(中植系) 산하의 중룽(中融)신탁은 최근 만기가 된 신탁 상품의 상환 중단을 선언했다. 중국 부동산 업계의 돈줄 역할을 하던 회사가 투자자들에게 투자금을 못 돌려주겠다고 밝힌 것이다. 신탁사는 은행처럼 엄격한 규제를 받지 않고 구조도 복잡해 ‘그림자 금융’으로 꼽힌다. 위험의 크기와 여파를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된 미국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중국에서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중국판 리먼 사태’로 확산될지는 차치하더라도 비구이위안의 디폴트 문제는 파급이 상당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전문 리서치 업체 게이브칼에 따르면, 비구이위안의 미지급 대금은 3900억 달러(약 518조 원)에 달한다. 수많은 건설 노동자, 원자재 공급 업체들이 어마어마한 돈을 떼일 수 있다는 의미다.무엇보다 올해 말까지 입주하기로 하고 비구이위안에 돈을 지급한 사람들이 길바닥에 나앉게 될 수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상반기 비구이위안의 주택 공급량으로 추정해보면, 최소 14만4000명이 올겨울 추위에 떨 수 있다”고 지난달 전했다. ● 중국인들의 부동산 ‘영끌’ 투자중국 부동산 업계에서 6년 연속 매출 1위(2017~2022년)를 기록한 비구이위안의 채무불이행 선언이 도화선은 됐지만, 사실, 중국 부동산 업계는 이전부터 흔들렸다. 비구이위안과 자웅을 겨루던 헝다는 2021년부터 이미 디폴트 상태였다. 중국 부동산 시장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의 문을 연 1978년 이후 중국 경제는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이후 중국의 1인당 소득은 25배 증가했다. 8억 명 이상이 빈곤에서 벗어났다. 중국이 이처럼 성장한 배경에는 인프라, 부동산 건설(투자)의 역할이 컸다. 2008~2021년 중국은 국내총생산(GDP)의 44%가량을 매년 인프라와 부동산에 투자해왔다. 전 세계 평균(25%)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다.특히, 1990년대 후반 시작된 부동산 민영화가 중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당시, 부동산 기업들은 지방정부에 토지 사용권을 판매하라고 제안했고 지방정부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부동산 개발을 본격화했다. 지방정부는 이를 통해 지역을 도시화하고 곳간도 채웠다. 헝다, 비구이위안 같은 개발사들이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 주택과 빌딩을 지었다. 중국의 부동산 가격은 25년 넘게 꾸준히 상승했다. 매년 중국 부자 순위 상위권을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점령했다. 너도나도 부동산 개발에 뛰어들었다. 자산의 가격 상승은 중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민의 소비가 늘고, 기업들의 실적이 좋아지면서 중국 경기에 온기가 돌았다. (물론, 수출 등으로 경제 기초체력이 좋아진 것도 있다) 경기가 좋으니 무주택자는 열심히 일해 집을 살 수 있었고, 유주택자는 부동산을 매력적인 투자처로 보고 집을 더 구매했다. 부동산은 중국 지방정부와 가계의 부(富)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2016년 초, 순탄했던 경제가 미·중 갈등과 자국 내 태양광 기업 부실 사태 논란으로 휘청했다. 연일 상해종합지수가 폭락했다. 중국 정부는 부랴부랴 경기 부양책을 내놨는데 이 중 하나가 주택담보대출의 문턱을 낮추는 것이었다. 아파트 구매에 필요한 최소 계약금이 줄어들면서 사람들의 ‘영끌 투자’가 시작됐다. 중국인들이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 부동산에 돈을 넣은 것도 있다. NYT는 “중국 가계는 투자의 선택권이 (정부 규제로) 제한돼 있기 때문에 새 주택이나 공장에 돈을 넣는 것 외에는 거의 대안이 없었다”고 전했다. 현재도 중국 가계 자산에서 부동산 비중은 70% 수준이다.● 무너지는 ‘콘크리트 유토피아’ 2016~2020년 중국의 부동산 가격은 40% 이상 급등했다. 저금리를 기반으로 한 투자(부채)와 집값 상승의 기대감(수요)이 빙글빙글 돌면서 거품을 일으켰다. 미 블룸버그는 “(정점이었던) 2019년 중국의 부동산 가치는 약 52조 달러(약 6경 8770조 원)로 미 부동산 시장 규모의 2배에 이르기도 했다”고 전했다. 결국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칼을 꺼내 들었다. “주택은 거주용이지 투기용이 아니다”라고 강조한 시 주석은 2020년, 부동산 대출 잔액 기준 마련, 개발사들의 부채 축소 등 강력한 부동산 규제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시 주석이 부동산 규제에 드라이브를 건 배경에는 중국 연간 경제 생산(GDP)의 282%(미국은 257%)에 달하는 중국 내 부채 문제도 있었지만, 경제 정책 노선 변화가 더 컸다. 중국 정부는 미·중 갈등이 본격화하면서 인프라 투자, 수출 등 국가 주도 경제에서 내수 기반의 경제 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집값 상승으로 발생한 빈부 격차도 줄이고자 했다. 중국 언론에서 시 주석의 ‘공동부유(共同富裕·같이 잘살자)’ 문구가 자주 등장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부동산 업체들은 정부 규제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는데, 곧이어 발생한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이 직격탄을 날렸다. 코로나19 사태로 도시가 봉쇄되면서 주택 건설과 구매 수요가 위축된 것이다. 실제로, 팬데믹 봉쇄가 한창이던 지난해 상반기 부동산 개발업체들의 건설이 지연됐고, 주택 판매도 반토막 이상 떨어졌다. 팬데믹 봉쇄가 풀린 뒤에도 집값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중국 부동산 중개인 등 민간 데이터 제공업체들은 상하이 등 주요 대도시와 중국의 2, 3선 도시의 절반 이상에서 기존 주택 가격이 고점보다 최소 15% 하락했다고 분석했다. 항저우시의 알리바바 본사 근처 주택 가격은 2021년 말보다 25%나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집값이 내려가면서 과잉 공급 속에 감춰져 있던 중국 부동산 시장의 ‘거품’이 드러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시난(西南)재경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2018년 중국 도시 아파트의 약 20%인 1억3000만 채가 사실상 비어 있는 상태였다.중국 부동산 시장이 크게 오르기 시작한 2016년부터 실수요가 꺾였다는 주장도 있다. NYT는 지난달 “2016년 이후 중국의 연간 출생과 혼인 건수가 거의 절반으로 줄면서 새 아파트 구매 수요는 점차 약화한 상태”라고 지적했다.중국의 경제 성장 속도가 완만해진 것과 팬데믹 시기에 중국 정부가 미국과 다르게 가계에 직접 지원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부동산 가격 급락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NYT는 “돈을 빌려 아파트를 짓는 비즈니스 모델은 집값이 오르는 동안에만 작동한다”고 꼬집었다. ● “중국의 40년 호황 끝났다” 미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에 따르면 최근 3년간 50개 이상의 중국 부동산 개발사가 채무불이행에 빠졌다. 지난해 중국에서는 사업을 포기한 부동산 개발사들을 상대로 입주 예정자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중국 전역의 100곳이 넘는 도시에서 주택담보대출(모기지) 상환을 거부하자는 운동까지 일어났다.당시 NYT는 “‘모기지 반란’이 100여 개 도시로 확산하고 있다”며 “중국에서 부동산은 수십 년간 안전한 투자로 여겨졌지만 이제 부동산은 중산층의 부의 기반이 아니라 불만과 분노의 원천이 됐다”고 평가했다.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중국 경제가 부동산 침체로 40년 호황을 끝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중국은 그동안 세계 평균의 두 배에 달하는 연 6~7%의 GDP 성장률을 기록해왔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은 향후 중국의 연간 성장률이 4% 미만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WSJ은 “중국을 빈곤에서 벗어나 대국으로 이끈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와 건설 위주 성장 모델이 더는 지속되기 힘들다”며 “저출산과 미국과의 갈등으로 ‘중진국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미국도 영원히 추월하지 못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경제지표도 중국 경제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을 부추기고 있다. 중국의 7월 수출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14.5% 급락했다. 코로나19 발생 직후인 2020년 3월 이후 최저 증감률이다. 야셍 후앙 MIT 슬론 경영대학원 교수에 따르면 중국의 수출과 수입은 총 경제생산량의 40%를 차지한다. 중국의 수입품 중 상당수는 수출이 예정된 제품의 부품이다. 후앙 교수는 올해 5월 한 행사에서 “중국은 수출이 감소하면 수입도 감소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된다”며 “이는 일자리와 소득도 줄인다. 불행한 이야기”라고 전했다. 실업률은 이미 사상 최고 수준이다. 올해 들어 중국의 청년 실업률은 6개월 연속 증가해 6월 21.3%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사상 최악의 기록이 나오자 중국 국가통계국은 7월 실업률은 아예 공개하지 않았다. 국가통계국은 “수치 수집이 더 개선되고 최적화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베이징대의 한 경제학자는 “구직 활동을 중단한 수백만 명의 근로자를 포함하면 올봄 청년 실업률은 46.5%에 달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거꾸로 가는 중국 경제 중국의 7월 소비자, 생산자 물가도 전년 동기보다 각각 0.3%, 4.4% 떨어졌다. 소비자물가가 2년여 만에 마이너스 구간에 진입했다. 생산자물가는 10개월 연속으로 하락했다. 전 세계가 중국의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을 걱정하고 있다.경제학자들은 디플레이션이 인플레이션만큼이나 위험하다고 말한다. 물가가 떨어질 것이라 전망되면 수요가 더 위축돼 웬만한 경기 부양책도 효과를 내기 어렵다. 상품 가격이 내려갈 것이라고 예상해 사람들이 지갑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부채가 많은 중국에서 디플레이션은 치명타가 될 수 있다. WSJ은 “디플레이션은 대출 상환 비용을 증가시키고 소비와 투자를 줄이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커서 중국처럼 부채 부담이 높은 국가에는 특히 위험하다”고 전했다. 물가(제품 가격)가 떨어지면, 이전에 제품을 1개 팔아서 갚을 수 있는 돈을 2개는 팔아야 마련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기존 대출에 대한 부담이 커지고, 사람들의 불안 심리가 모여 물가를 더 급하게 떨어뜨리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 펼쳐진다) ▶ 인플레이션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2019년 중국 남부 지역에 아파트를 구입한 리 시(33)는 지난해 펀드에 돈을 투자했다가 꽤 많이 손실을 보았지만, 남은 돈을 찾아 모기지를 갚기로 결정했다. 그는 “지금은 경제가 확실히 불안하다. 내일 직장을 잃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WSJ에 전했다. 중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 국민보다 저축을 많이 하는 편이다. 세계은행은 중국의 GDP 대비 저축률이 다른 주요 선진국보다 높다고 추정했다. NYT는 “중국은 사회 안전망이 빈약해 오랫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저축을 많이 하는 국가 중 하나에 속했다”라고 이유를 밝혔다. 미국처럼 소비 중심의 국가로 알았는데 아니었다.원래도 저축을 많이 하던 중국인들이 경제가 불안해지자 최근 저축을 더 늘렸다. 올해 상반기 중국 가계의 총 은행 예금은 약 12조 위안(약 2176조 원) 증가했다. 10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늘었다. NYT는 “저축이 늘고 투자와 소비가 줄어든 것은 사람들의 (향후 경제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담 포센 미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장은 팬데믹부터 이어진 중국의 소비 위축을 두고 ‘경제적 장기 코로나’라고 평했다. ● 신뢰의 위기 중국 정부도 다방면으로 경기를 되살리려고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쉽지 않다. 위안화 가치가 사상 최저치로 떨어져 화끈한 금리 인하도 어렵다. 외국인 투자나 자본 유출이 우려돼서다. (물론, 중국의 외국인직접투자(FDI)는 팬데믹 봉쇄와 미·중 갈등, 민간 기업 옥죄기 등이 얽히면서 지난해 초의 5% 수준으로 이미 쪼그라든 상태다. 또한, 중국 정부는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 펀드 등의 해외 투자도 통제할 수 있다) 중국 정부는 환율에 영향을 덜 주면서 유동성을 늘릴 수 있는 단기 금리를 낮춰왔는데, 최근 기준금리(LPR·대출우대금리)까지 연 3.45%로 0.1%포인트 내렸다. 생각보다 경기가 쉽게 반등하지 못해서다. 블룸버그는 “경기 부양을 위해 중국 국영 은행들이 모기지 금리까지 인하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가 소비자들의 소비 여력 향상으로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고 지난달 29일 전했다. 중국 정부의 정책이 시장에서 효과를 발휘할지 다들 지켜보자는 분위기다.중국이 부동산과 인프라 투자를 줄이고도 과거와 같은 경제 성장을 이끌어내려면 생산성이 높은 고부가가치 사업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분석도 많다. 시 주석 역시 ‘과학기술 자립·자강론’을 들어 반도체나 전기차, 배터리, 인공지능 같은 첨단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이를 위해서는 미·중 무역 갈등의 완화는 물론, 그간 시 주석이 ‘공동부유’를 이유로 기를 죽여 놓은 빅테크 기업의 활약이 필수적이다. (‘알리바바’가 대표적) 물론, 시 주석이 그동안 집착해 온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쉽게 내려놓지는 않을 것 같다. 향후 중국 경제의 가장 큰 걸림돌은 ‘시진핑 국가주석’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김성모기자 mo@donga.com}

    • 2023-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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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 못생긴 신발이 아직도 인기랍니다[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뉴진스도 꽂힌 ‘아빠 신발’일본 유명 러닝화 브랜드 아식스는 지난해 러닝화 시리즈 ‘젤 카야노14’의 일부 제품을 캐나다 디자인 스튜디오인 자운드(JJJJOUND)와 협업해 선보였다. 두툼한 밑창 위에 은색과 검은색 선들이 뼈대를 이루고 메시(mesh·그물실로 매듭을 지은 원단) 소재가 발을 에워싼 형태의 운동화다. 흔히 아식스 하면 떠오르는 신발 모양이다.투박한 형태의 이 운동화는 지난해 8월 미국에서 온라인에서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순식간에 품절됐다. 출시 가격은 180달러(약 23만 원)였지만, 이달 1일 현재 리셀(재판매) 플랫폼에서 100만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나이키 한정판에 맞먹는 수준이다.10~20대 잘파세대(Z세대+알파세대)를 중심으로 ‘못생긴 신발’들이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아식스, 호카, 살로몬, 뉴발란스 브랜드의 신발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투박한 디자인이다. 전부 부피가 크고 밑창이 두툼하다. ‘아빠 신발’로 불릴 만큼 칙칙한 느낌도 있다. 지난해 글로벌 리셀 플랫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신발 중 하나는 끝이 뭉툭하고 단단해 보이는 살로몬의 트레킹화였다. 살로몬은 1947년 프랑스에서 스키 용품업체로 시작해 등산화 등 아웃도어 용품을 주로 선보이고 있다. 세계적인 팝스타 리한나와 아이돌 그룹 뉴진스 멤버가 살로몬을 신고 등장해 눈길을 끈 바 있다. 물론, 등산하려고 신은 것은 아니었다.최근 미국에선 아식스, 살로몬보다 더 핫한 브랜드가 있다. 호카다. 러닝화 브랜드인 호카는 2009년 처음 등장했는데, ‘못생겨서’ 주목받았다. 신발 바닥과 안창 사이의 미드솔(중창)이 넓적하고 두툼해 ‘광대 신발’이라는 놀림까지 받았다. 하지만, 호카의 착용감에 반한 사람들이 전도사 역할을 했다. 오래 신어도 발이 편하다는 소문이 퍼졌다. 달리기 동호인에서 시작한 호카의 인기는 주로 서서 일하는 간호사, 식당 종업원 등으로 확산했다. 최근에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호카 열풍이 이어지고 있다. 눈길을 끄는 점은 잘파세대가 호카를 선택한 이유다. 이들은 아식스, 살로몬과 마찬가지로 호카의 디자인에 반했다. 글로벌 리셀 플랫폼 스탁엑스의 스니커즈 디렉터 드류 헤인스는 “편안함도 좋지만, 스타일도 중요하다. 사람들은 스타일리시하고 트렌디하기 때문에 호카를 신는다”고 말했다. 호카는 지난해 스탁엑스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판매된 브랜드였다. 나이키와 아디다스, 뉴발란스, 컨버스를 모두 제쳤다. 사실, ‘어글리 슈즈’ 유행은 팬데믹(대유행) 이전에도 있었다. 명품 브랜드 발렌시아가의 ‘트리플S’와 아디다스의 ‘이지(Yeezy)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러닝·등산화를 만드는 기능성 브랜드로 인기가 옮겨왔다는 점이 달라진 부분이다. 나이키는 최근 실적발표에서 “러닝화 시장은 전쟁터만큼이나 경쟁이 치열한 곳”이라고 밝혔다. ● 땅 위를 나는 신발, ‘호카’2009년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호카 오네 오네(Hoka One One)’는 원주민인 마오리족 언어로 ‘땅 위를 날다’라는 의미다. 살로몬 브랜드 출신의 니콜라스 메르무드와 장 리크 디아르가 회사를 나와 호카를 설립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내리막 길용 슬립온’을 만들려고 했다. 산에 오를 때는 가방에 넣어뒀다가, 내려올 때 신발 위에 덧신처럼 착용하는 용도를 떠올린 것. (참고로, 당시는 ‘맨발 달리기’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이탈리아 신발 전문 제조사로 유명한 ‘비브람’의 발가락 신발 ‘파이브핑거스’가 인기였다)메르무드는 2009년 시제품을 들고 미국에서 열린 무역박람회를 찾았다. 부스도 열지 않았는데 새로운 브랜드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고, 한 달리기 선수가 770켤레를 구매했다. 미국 러닝 동호회에서 호카의 기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다음 해 호카는 러너 커뮤니티에서 ‘올해 최고의 러닝화’ 목록에 올랐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일부 러닝화 판매점은 재고를 확보하기 위해 복도 뒤편에 호카가 담긴 상자를 숨겨두기도 했다”고 지난달 전했다.콜린 잉그램 호카 글로벌 제품 담당 부사장은 “처음 호카를 신고 포장도로에 발을 내딛었을 때가 기억이 난다.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정말,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며 “그냥 흉측하게 생긴 신발이 아니다. 이 신발에 강점이 있다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2012년 호카의 진가를 알아본 회사가 있었다. 미 아웃도어 기업 데커스였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산타바바라 캠퍼스 동문인 더그 오토와 칼 로프커가 1973년 창립한 데커스는 그야말로 ‘못생긴 신발’에 꽂힌 회사다. 특이하게 생긴 신발들을 사모아 성공했다.이들은 처음 캘리포니아 바닷가에서 서퍼들에게 플립플롭(일명 ‘조리’)을 팔았는데, 히피들이 와인 코르크 재질로 만들어진 듯한 샌들에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1955~2011)가 애용한 것으로 알려진 독일의 ‘버켄스탁’이었다. 블룸버그는 이를 두고 “못생긴 신발 유행의 첫 신호를 데커스가 알아챈 순간”이라고 평했다.● ‘광대 신발 제국’ 이룬 회사1980년대 초, 데커스는 미 그랜드캐니언에 활동하는 지질학자 겸 가이드 마크 대처에게서 샌들 브랜드 ‘테바(Teva)’의 판매권을 사들였다. 테바는 밑창에 시계 줄을 이어 붙인 형태의 샌들이다. 대처는 물 안팎을 자유롭게 다니며 빠르게 말릴 수 있는(무좀 방지) 샌들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발을 자유롭게 하면 마음이 따라올 것”이라며 테바의 기능을 강조했다. 이 ‘수륙양용’ 신발은 데커스의 판매망을 거치며 급속도로 팔려나갔고, 오토와 로프커는 이를 통해 사업을 확장할 자금을 마련했다. 데커스가 규모 있는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그다음 인수한 양털 부츠 브랜드 ‘어그(UGG)’ 덕분이었다. 데커스 창업자들은 1995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 미 올림픽 대표팀이 어그 부츠를 신고 출전한 것을 발견했다. 데커스는 곧바로 1500만 달러(약 190억 원)를 투자해 어그를 인수했다. 이후, 어그는 겨울용 부츠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2000년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가 가장 좋아하는 신발로 어그를 꼽았고, 할리우드 스타들도 어그를 즐겨 신었다. 어그는 최근까지 데커스의 주력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호카를 인수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데커스는 2002년 테바와 판권 계약이 만료되자 대처를 설득해 6200만 달러(약 790억 원)에 브랜드를 아예 사버렸다. 데커스는 이후에도 신발 브랜드들을 인수했는데, 가장 성공적인 인수합병(M&A)은 ‘호카’였다. 인수 금액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 호카의 매출을 고려하면 낮은 가격에 사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데커스가 호카를 인수한 2012년, 호카의 매출은 300만 달러(약 38억 원)에 불과했다. 지난해 호카는 14억1000만 달러(약 1조8000억 원)를 벌어들였다. 10년 간 매출이 470배로 뛰었다. 데커스 매출에서 호카의 비율은 2017년 5.8%였다. 최근에는 40%에 근접했다. 올해 1분기, 데커스의 주력 브랜드인 어그의 매출을 추월했다. 데커스 주가는 최근 1년 사이 70% 가량 뛰었다. 외신들은 데커스의 성장 배경에 ‘어글리 슈즈’ 유행이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데커스는 테바와 어그, 호카 같은 ‘광대 신발 제국’을 이뤄 판매와 주가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평했다. 현재 패션 리더들 사이에서 못생긴 신발이 인기인데, 데커스가 이를 많이 보유해 매출이 급성장했다는 설명이다.미 블룸버그는 지난해 “호카의 흥행은 2018년 파리, 도쿄 패션 리더들의 사랑을 받은 발렌시아가의 트리플 S 스니커즈 열풍과 맞물려 있다”고 전했다. 그런데, 이 분석대로라면 2018년 유행이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 확실히, 호카가 급성장한 최근 몇 년간 신발 업계를 주도한 것은 날렵하고 세련된 느낌의 스니커즈보다 항공모함을 떠오르게 하는 ‘못생긴 운동화’였다. 최근 5년 호카의 매출은 9.4배로 늘었다. 이렇게 오래 가는 유행도 있나? 못생긴 신발은 왜 아직도 사랑받고 있을까.● 못생긴 신발 선발대회 일각에서는 ‘어글리 슈즈’의 기원으로 아디다스 ‘오즈위고’를 꼽는다. 이는 질 샌더,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라프 시몬스가 디자인한 신발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이 때는 사람들이 오즈위고의 디자인을 기이하게 여겼지만, 이후 이러한 신발들이 결국 유행했다”고 전했다. 곧이어 등장한 발렌시아가의 ‘트리플S’가 어글리 슈즈 유행을 본격화했다. 100만 원이 넘는 가격에도 선주문이 붙었다. 발렌시아가는 이를 소량만 생산했고, 일부 백화점은 진열대에 트리플S를 두지도 못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유명 디자이너+희소성’이라는 성공 방정식으로 ‘못난이’가 갑자기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며 “러닝화에서도 돋보이길 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극단적인 디자인이 도입되고 있다. 모두가 트리플S처럼 트랙터 같이 생기진 않았다”고 2018년 전했다. 2018년은 호카가 막 떠오르던 시기다.2010년대 중반부터 명품 업계를 중심으로 못생긴 신발 경쟁이 한창이었다. 누가 더 못생긴 것을 내놓는지 경쟁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샤넬은 검정과 흰색으로 디자인한 구두를 코르크 재질의 통굽 위에 얹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구찌는 슬립온의 발등에 털을 수북이 달았는데 실수로 가발을 발등에 떨어뜨린 듯한 모양새다. 이외에도 마크 제이콥스, 프라다 등 수많은 명품 브랜드들이 덜 세련된(?) 제품을 연이어 선보였다.명품 업계의 ‘못생김 경연대회’에서 두각을 보인 평범한 신발 회사 두 곳이 있었다. 크록스와 데커스였다. 크록스의 대표 상품은 크로슬라이트라는 고무 소재로 만든 ‘클로그’라는 샌들이다. 앞부분이 뭉툭하고 구멍이 숭숭 뚫려 어글리 슈즈로 꼽힌다. 국내에서도 길을 걷다 보면 10분 안에는 클로그를 발견할 수 있다. 가정마다 한 켤레는 있을 정도로 인기다.명품 브랜드들은 이들과 손잡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크록스는 2018년 발렌시아가와 협업해 10㎝짜리 고무 통굽을 단 클로그를 선보였는데, 100만 원이 넘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사전 예약에서 몇 시간 만에 매진됐다. 데커스는 더 가관이었다. 어그와 테바를 합친 ‘샌들 부츠’를 내놓았다. 샌들처럼 보이지만 발등에는 양가죽과 양모가 달려있다. 발목까지 덮는 하이탑 버전도 있다. 양모가 안감으로 된 부츠지만, 발 양옆과 발가락 부분이 시원하게 뚫려있다. 다리가 다쳤을 때 착용하는 보호대를 연상케 하는 신발이다. “혐오스러운 물건”, “악몽 같다”, “겨울용이냐 여름용이냐, 정체가 뭐냐” 같은 부정적인 반응들이 쏟아졌다.데커스의 전 임원인 안드레아 오도넬은 “디자이너들이 의도적으로 매력적이지 않은 신발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순함과 순수함에서 출발할 뿐”이라고 말했다. 털 부츠와 샌들을 섞어 놓고 할 말은 아닌 듯하다. 이후 여러 패션쇼에 못난이 신발들이 연이어 등장하고, 각종 TV 프로그램과 소셜미디어에서 유명인들이 크고 두툼한 디자인의 신발을 신고 나오면서 유행이 번졌다.● 못생긴 신발이 계속 사랑받는 이유못생긴 신발의 인기가 최근까지 이어진 데에 여러 분석이 나오고 있다.먼저, 경제적 요인이다. 블룸버그는 최근 “소규모 신발 브랜드들의 흥행은 불황의 증거”라며 “값비싼 운동화가 우선순위 목록에서 빠지고 있다”고 전했다. 높은 금리와 잠재적인 경기침체 상황에서 미국인들이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고 오래 신을 수 있는 신발을 찾고 있다는 설명이다. 블룸버그는 올해 호카와 스위스 러닝화 브랜드 ‘온(On)’의 주가는 꾸준히 상승한 데 반해,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주가는 하락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실제로, 지난해 인건비와 원료 가격 등이 크게 오르면서 나이키 등 주요 신발 브랜드들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제품 가격을 인상한 바 있다.팬데믹(대유행)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온라인 신발 쇼핑몰 자포스의 뉴웰 핸슨은 “사무실의 답답함에서 벗어난 재택근무자들이 발이 편한 신발을 구매하기 시작했다”며 “개를 산책시키거나 마트를 찾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라면 (신발의) 기능이 훨씬 중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코로나19 발병 이후 헬스장이 문을 닫으면서 젊은 층이 산을 찾거나 도심을 달리는 일이 늘어난 것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최근 1~2년 사이 패션 업계에서는 ‘고프코어(Gorpcore)’라는 단어가 급부상했다. 이는 야외 활동 시 체력 보충을 위해 먹는 견과류인 고프(Gorp)와 자연스러운 멋을 추구하는 놈코어(Normcore)의 합성어다. 일상복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아웃도어 패션 스타일을 뜻한다. 못생긴 신발의 트렌드가 명품이나 주요 신발 브랜드에서 러닝·등산화로 달라진 것도 이러한 영향이다. 못생김에도 종류가 있다.● “예뻐서”여기까지는 ‘어른’들의 분석에 가깝다. 10, 20대의 반응은 단순하다. “예뻐서.” 이들은 호카나 아식스, 살로몬의 신발을 ‘못생겼다’가 아닌, ‘독특하다(남들과 다르다)’라는 시각으로 접근한다. 많은 사람이 신는 나이키나 아디다스가 오히려 지루하고, 못생겨 보인다는 것이 이들의 관점이다. 젊은 층은 신발에서도 나만의 취향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개성’이 곧 ‘예쁨’인 셈이다. 나이키나 아디다스가 타 브랜드와 협업하고 한정판 제품을 주기적으로 내놓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자세한 내용은 신비월드 25화, ‘나이키는 왜 역대급 재고에도 투자를 늘릴까’ 참고. 미 캔자스주 위치토에 사는 라시다 로저스(28)는 나이키 대신에 아식스 운동화를 신고 다닌다. 그는 “남들이 다 신고 다니는 건 싫다”고 강조했다. 소화 류머티즘 전문의인 카렌 오넬은 “최근 코넬대에 재학 중인 딸이 통화에서 ‘호카를 사야겠다’고 했다. 호카가 뉴욕을 점령하고 있다”고 미 뉴욕타임스(NYT)에 전했다. 물론, 모두가 나이키 대신 호카나 아식스를 신는다면 이들의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다.WSJ은 지난해 ‘중년의 아빠들’에게 어글리 슈즈 유행에 관해 물었는데 답변이 흥미롭다. 기자가 뉴욕에 사는 케빈 스털링(64)에게 “요즘 아식스 신발이 유행”이라고 이야기하자 이렇게 반응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What the hell?!)” 15년 간 아식스를 신은 마이클 퍼스(56)는 “잔디 깎을 때 신는 아식스 몇 켤레가 있는데, 패션을 생각해 산 건 아니다”면서 “애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아졌다니. 이러다 가격 오르는 것 아니냐?”라고 되물었다. ● 제품도, 사업도 빛난 호카 사실, 미국의 호카 열풍에는 못생긴 신발 유행 이외에 여러 요소가 있다. 호카는 신발이라는 제품 본질에 충실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호카는 사업 초기부터 발이 편한 운동화를 만드는 것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 디자인보다는 성능을 개선하는 데 몰두한 것. 2009년 호카가 처음 등장할 때는 간결한 디자인의 ‘미니멀리즘’이 대세였다. 성능을 위해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디자인을 용감하게 선보인 셈이다. 호카는 밑창 기술이 핵심이다. 두껍고 넓은 중창은 발에 가해지는 충격을 흡수한다. 이를 통해, 오래 착용했을 때 피로감을 던다. 바닥 면도 완만한 곡선 형태로 제작해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했다. 호카의 훌륭한 밑창 덕에 좋은 기록을 낸 선수도 여럿 있었다. 2020년 미국 올림픽 마라톤 국가대표 선발 대회에서 알리핀 툴리아무크 선수는 호카의 ‘로켓X’를 신고 2시간 27분 23초로 여자 레이스에서 우승하기도 했다.호카의 기술력에 대한 호평도 많지만, 호카를 인수한 데커스의 사업 전략에 대한 분석도 다수 나오고 있다. 사실, 기술력으로는 아식스도 훌륭한 회사다. 아식스는 핵심 러닝화 브랜드인 ‘젤 카야노’를 개발하는 데 65년간 모은 발 모양 데이터를 충실히 활용했다. ▶동아일보 기사 “65년간 모은 발모양 데이터가 아식스 러닝화 성공비결” 참고.호카는 항상 시중에 수요보다 적은 물량을 풀어 ‘구하기 어려운 신발’이 되도록 만들었다. 신발의 공급을 충분히 늘리면 당장 매출을 늘릴 수 있지만, 브랜드 이미지 등 장기적인 성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호카의 최고 판매책임자이자 임시회장인 스테파노 캐로티는 “우리는 분명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브랜드의 장기적인 건전성에 좋을까’라고 묻는다면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가격도 125달러에서 175달러(약 16만~23만 원)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일종의 고급화 전략을 꾀한 것. 호카는 미 최대 신발 잡화점인 풋락커에서 입점 제안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기까지 했다. 운동화가 대량 공급되면 제품 공급과 가격을 직접 조절하기가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WSJ은 “호카 경영진은 마라톤을 하는 것처럼 길게 보고 사업을 했다. 모든 소비자를 사로잡으려다 브랜드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경계했다”고 전했다. 호카의 판매 전략은 데커스의 과거 경험에서 비롯됐다. 2016년 데이브 파워스가 데커스 최고경영자(CEO)를 맡았을 때 회사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파워스는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브랜드를 인수했고, 매장도 지나치게 많이 열었다. 재고는 쌓였고 새로운 고객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며 “정말 잔인한 상황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캐시카우였던 어그의 매출도 정체된 상태였다. 다음 해, 데커스는 적자를 기록했는데,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회사의 저성과를 비난하며 회사의 매각을 요청했다. 데커스는 사업부를 통합하고 부진한 브랜드는 팔았다. 실적이 저조한 매장도 정리했다. 이때의 경험이 데커스가 판매 전략을 정교하게 짜는 발판이 됐다. WSJ은 “뜨거운 열기를 유지하는 방법은 불에 휘발유를 끼얹는 것이 아니라 불을 계속 지피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분기마다 실적 압박에 시달리는 기업에는 쉽지 않은 조언이다. 눈을 비비게 만드는 부분은 데커스가 사업 구조조정을 한 직후 내놓은 제품이다. 가장 필사적이어야 할 시기에 데커스는 어그 부츠와 테바 샌들을 합친 극단적인 디자인의 제품을 선보였다. 맞다. 앞서 언급한 정체 모를 그 신발이다. 여러 회사를 인수해 어려움을 겪은 데커스가 두 브랜드를 합치는 묘책을 내놓은 것. 블룸버그는 “관심을 끌기 위한 극단적인 전략이자 기발한 마케팅 묘기였다”고 평했다. 파워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못생겼지만, 눈에 띄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마치, 우리 자신을 흔들어 깨우려는 의지 같았다”며 “테바와 어그가 역사상 가장 못생긴 신발을 만들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 2023-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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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타·테슬라 CEO의 결투, 누가 이길까[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트위터 킬러, ‘스레드’ 인기 페이스북 모회사 메타가 5일(현지 시간) 선보인 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스레드’가 트위터를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 서비스 출시 1주일도 안 돼 가입자 수가 1억 명을 돌파했다. 국내에서도 ‘스린이(스레드+어린이)’, ‘스팔(스레드 팔로우)’, ‘스님(스레드 친구)’ 같은 신조어가 나오는 등 관심을 끌고 있다. 스레드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운영하는 메타가 ‘트위터 대항마’로 내놓은 텍스트 기반의 SNS다. 메타는 지난해 10월 트위터가 흔들리는 틈을 타 ‘프로젝트 92’라는 코드명으로 비슷한 유형의 SNS 개발에 돌입했다. 당시 트위터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인수한 이후, 대대적인 정리해고와 콘텐츠 조정, 유료 정책 등으로 이용자와 광고주들의 반감을 샀다. 유명 인사를 중심으로 트위터 탈출 행렬이 이어지기도 했다.메타가 여기서 기회를 봤다. 지난해 12월 한 메타 직원은 내부에 “트위터가 위기에 처해 있다. 그들의 밥그릇을 뺏어오자”라는 글을 올려 스레드 출시를 예고했다. 스레드의 서비스는 단순하고 익숙하다. 트위터랑 똑같기 때문이다. 화면부터가 비슷하다. 스레드에는 아이디와 짧은 글귀의 게시물이 등장한다. 글 하단에는 ‘좋아요’와 ‘댓글’, ‘리포스트(트위터 리트윗 기능)’, ‘공유’ 기능이 있다. 트위터의 댓글·리트윗·좋아요·공유와 배치 순서만 다르다. (인스타그램의 후광 때문인지 스레드 화면이 좀 더 세련된 느낌은 있다)서비스가 허용하는 글자 수와 영상 길이만 조금 다르다. 스레드는 게시물 당 최대 500자(영문 기준)까지 생각이나 의견을 공유할 수 있다. 사진은 10장, 동영상은 5분까지 게시할 수 있다. 트위터는 280자(영문 기준), 2분 20초 분량까지 지원한다.트위터의 몇 가지 주요 기능이 빠졌다. 스레드에는 특정 사용자에게 개별적으로 비공개 메시지를 보내는 ‘DM(다이렉트 메시지)’이 없다. 사회적 이슈나 트렌드를 조성할 수 있는 ‘해시태그(#)’ 기능도 빠졌다. 해시태그는 미국에서 ‘미투(#MeToo)’와 ‘블랙리브스매터(#BlackLivesMatter·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을 확산시키는 등 트위터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외신에선 해당 기능들이 추후 추가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그럼에도 스레드에 관한 관심이 뜨겁다. 서비스 출시 7시간 만에 가입자 1000만 명을 넘어서더니, 103시간 만에 1억 명을 돌파했다. 전 세계에 인공지능(AI) 열풍을 일으킨 챗GPT는 월 사용자 수(MAU) 1억 명을 달성하는 데 2개월이 걸렸다. 소셜미디어 중에선 틱톡이 9개월로 가장 빨랐다. 인스타그램은 2년 6개월이었다. 기쁨의 순간,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가 적진을 찾았다. 저커버그는 트위터에 ‘쌍둥이’ 스파이더맨이 서로 대결하는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을 올리며 머스크를 자극했다. 저커버그가 11년 만에 올린 트윗이었다.● ‘제정신으로 운영되는’ 소셜미디어메타는 인스타그램 이용자가 스레드에 쉽게 진입할 수 있게 했다. 인스타그램 메뉴에 ‘스레드’를 배치해 앱을 쉽게 오가게 했다. 계정과 팔로워도 연동시켰다. 인스타그램 이용자는 스레드 가입 과정에서 개인정보를 일일이 입력하지 않게 했다. 20억 명(월 사용자 수)의 인스타그램 고객들이 스레드에 스며들게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업계에서도 스레드 가입자 수가 빠르게 늘어난 이유 중 하나로 인스타그램을 꼽고 있다. 메타가 인스타그램의 이용자가 많아서 스레드 출시에 활용한 것만은 아니다. 노림수는 따로 있다. 데이터 분석기관 데이터리포털에 따르면, 트위터 이용자의 87%가 인스타그램을 사용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단순히 인스타그램 고객에게 스레드도 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트위터 이용자를 뺏어오겠다는 전략인 셈이다.이 때문에 기능보다 타이밍이 더 중요했을 수 있다. 머스크의 트위터가 안정을 찾기 전에 서비스를 빠르게 내놓는 것이 핵심일 수 있다는 의미다. 스레드는 기획부터 서비스 출시까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크리스 콕스 메타 최고제품책임자(CPO)는 스레드 기획 의도에 대해 “‘제정신으로 운영되는’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요구하는 사용자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대놓고 머스크의 트위터 운영을 저격했다. 스레드가 트위터와 판박이인 것도 전략일 수 있다. 트위터 이용자들이 익숙하고,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야 쉽게 이동할 테니까. 원래 소셜미디어에는 철칙이 있다. 기존에 있는 플랫폼과 똑같은 서비스로는 성공할 수 없다. 이미 네트워크 효과가 발생해 고객들을 끌어오기가 쉽지 않아서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스레드는 관심조차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과적으로 메타는 경쟁 상대가 흔들리는 타이밍을 절묘하게 이용했다. 스레드가 1억 명의 가입자를 빠르게 모은 것을 보면 저커버그의 노림수가 일단은 통한 것으로 봐도 될 듯하다. 사업은 역시 ‘타이밍’이 중요하다.트위터도 반격에 나서긴 했다. 트위터의 알렉스 스피로 변호사는 스레드 출시 첫날 저커버그 CEO에게 “트위터의 지식재산권(IP)을 메타가 불법 도용했다. 트위터 출신 직원들을 고용해 업무를 맡겼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법적 대응을 시사한 것. 메타 측은 “스레드 엔지니어링 팀에 트위터 직원 출신은 없다”고 응수했다. ● 저커버그와 머스크의 ‘현피’뜻하지 않게 스레드의 흥행에 일조한 핵심 인물이 있다. 머스크다. 머스크와 저커버그는 지난달 스레드를 두고 SNS에서 말싸움을 주고받았는데, 격투기 대결 이야기까지 나왔다.‘조만 장자’들의 신경전은 지난달 21일 시작됐다. 한 트위터 이용자가 스레드 관련 질문을 던지자 머스크가 “전 세계가 속절없이 저커버그의 손가락에 지배당했다”라고 비꼬았다. 다른 트위터리안(트위터 이용자)이 저커버그의 주짓수 연마를 언급하며 “조심하라”고 경고하자, 머스크는 “나는 케이지(철창) 결투를 할 준비가 돼 있다”며 일종의 초대장을 보냈다. 그러자, 저커버그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장소 보내”라고 응수했고, 머스크는 “진짜라면 해야지. 라스베이거스 옥타곤”이라고 트위터에 올렸다. 각자의 플랫폼을 고집하며 티격태격하는 것이 흥미롭다. 세계 최고 부자들의 ‘현피(가상 세계가 아닌 현실 직접 대결을 뜻하는 말)’만큼 흥미로운 사건이 또 있을까. 두 사람이 실제로 대결을 벌일지 전 세계에서 관심이 쏠리면서 스레드 역시 자연스럽게 홍보가 됐다. 10일 스레드 가입자가 1억 명을 넘어섰다는 기사가 나오자 머스크는 한 트위터 게시물에 ‘저크는 약골(Zuck is a cuck)’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저크는 저커버그의 약칭이다. 스레드의 인기만큼 도발 수위도 올라갔다. 참고로, 이들은 올해 상반기 전 세계에서 재산이 가장 많이 늘어난 인물들이다. 세계 최고 부자인 머스크는 6개월간 순자산이 966억 달러(약 126조1600억 원) 늘었다. 부호 순위 9위인 저커버그는 589억 달러(약 76조9200억 원) 늘어 증가 폭으로 2위를 차지했다.세기의 대결이 실제로 이어질까. 온라인에서만 치열한 ‘키보드 워리어’들로 보기에는 두 사람 모두 제법 진지하다. 당시, 미국 종합격투기(MMA) 단체 UFC의 데이나 화이트 회장이 저커버그에게서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머스크가 싸움에 진심인지 문자 메시지로 물어본 것. 화이트는 “머스크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더니 그는 진지하다고 했고, 이를 저커버그에게 다시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 이후 이들과 대결을 준비하기 위해 매일 밤 통화했다. 두 사람 모두 그것(종합격투기 대결)을 하길 원한다”고 덧붙였다. ● “말로만 싸우세요”온라인에서는 두 CEO가 맞붙으면 누가 이길지 관심을 끌고 있다. 나이는 저커버그(39)가, 체급은 머스크(52)가 유리하다. 머스크 키가 15㎝ 더 크고, 무게도 30㎏가량 더 무거워서다. UFC 공식 경기에서 선수들의 매치업은 체중에 따라 이뤄진다. 저커버그는 격투기에 진심인 편이다. 2020년부터 주짓수에 빠진 저커버그는 올해 5월 미 캘리포니아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버 개발자를 꺾고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저커버그는 매체의 수동적인 특성 때문에 평소 TV를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런데, 딱 한 가지는 챙겨 본다고 한다. UFC 경기다. 저커버그가 원래부터 운동을 좋아하기는 했다. 학창 시절에는 펜싱팀의 주장을 맡았었고, 최근에는 하키와 서핑도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승부욕이 강한 저커버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몸 쓰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타입으로 알려져 있다”고 지난달 전했다. 그는 운동과 사업이 유사한 측면이 많다고 주장한다. 저커버그는 한 팟캐스트에서 “주짓수나 종합격투기는 일의 흐름과 추진력에 대해 가르쳐주는 것 같다. 비즈니스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면서 “(둘의) 가장 어려운 것은 어느 순간에서 추진력 있게 밀어붙여야 하는지 아는 것”이라고 강조했다.머스크도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와 유도, 주짓수 등을 수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교롭게도 머스크와 저커버그의 주짓수 코치는 같은 사람이다. 미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인공지능 연구자 렉스 프리드먼이다. 둘 다 몸으로 맞붙는 것을 꺼리지 않는 듯하지만 당장 대결이 성사될 것 같지는 않다. 머스크가 당장은 곤란한 모양이다. 저커버그는 턱걸이 100회와 팔굽혀펴기 200회, 스쿼트 300회, 9kg 조끼 입고 1.6㎞ 달리기를 쉬지 않고 이어서 하는 ‘머피 챌린지’를 최근까지 할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머스크는 지난달 “최근에는 아이와 놀아줄 때 힘쓰는 것 말고는 거의 운동을 하지 않는다”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머스크의 ‘엄마’도 세기의 싸움을 말리고 나섰다. 머스크의 모친인 메이 머스크는 지난달 트위터에 “경고하는데 떨어져 앉아서 말로만 싸워라. 가장 웃긴 사람이 이긴다”고 올렸다. ● 저커버그 집에 초대된 머스크 저커버그와 머스크는 원래 IT 거물들과 말싸움을 많이 해왔다. 저커버그는 개인정보 보호 문제를 두고 애플의 팀 쿡과 여러 차례 설전을 벌였다. 머스크는 제프 베이조스(아마존),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워런 버핏 등 상대가 많았다. 지난해에는 애플이 트위터에서 광고를 중단하자 애플의 ‘인앱 결제’ 정책을 비판하며 전쟁을 선포했다. 쿡은 머스크를 애플 본사로 초대해 회사 연못을 산책시키는 등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그럼에도 “실제로 만나서 한 판 붙자”는 극단적 상황까지 간 적은 없었다. (아, 머스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결투를 신청한 것만 빼고) 저커버그와 머스크는 오래전부터 감정이 좋지 않았다. 시작은 인공지능에 대한 관점 차이였다. 머스크는 예전부터 “인공지능이 핵무기보다 잠재적으로 더 위험하다”고 경고해왔다. 반면, 저커버그는 AI가 우리의 삶을 더 개선할 거라고 확신하는 편이다. 저커버그가 이와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머스크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2014년 11월 19일 미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의 저커버그의 집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먼저, 식사를 함께 한 얀 르쿤 메타 최고 AI 과학자가 머스크를 설득하려 했다. 그는 전 세계 AI 분야 4대 석학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머스크는 “나는 AI가 정말 위험하다고 믿는다”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머스크가 인공지능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인간보다 더 똑똑한 기계를 만들면, 기계가 사람들에게 등을 돌릴 위험이 있다는 주장이다. 쉽게 말해, 영화 ‘터미네이터’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다음 해에 주고받은 비판은 더 냉랭했다. 저커버그는 페이스북 비디오를 켜고 가족들과 집 앞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다가 AI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머스크의 견해는 무책임하다. 나는 인공지능에 정말 낙관적”이라며 “최후의 날 시나리오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머스크가 트윗으로 응수했다. “내가 저커버그랑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를 해봤는데, (저커버그는) AI에 대해 잘 모르더라.”이후에도 두 사람의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2016년 5월에는 머스크가 운영하는 스페이스X의 로켓이 플로리다주에서 폭발했는데, 하필 여기에 페이스북의 인공위성이 탑재돼 있었다. 저커버그는 이 인공위성을 아프리카에 무료 인터넷을 보급하는 데 활용하고자 했다. ‘인터넷 사각지대를 없애겠다’는 저커버그의 오랜 꿈이 물거품이 된 것. 그는 “매우 실망했다”면서 아쉬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끝이 아니다. 2018년, 페이스북이 대규모 정보 유출 사태로 페이스북 계정 삭제 운동이 일어나자 머스크도 테슬라와 스페이스X 계정을 없애며 동참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들의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전기차나 로켓 등을 개발하는 데 거금을 투자해 온 머스크는 평소 저커버그가 ‘너무 많은 돈을 쉽게 번다’는 불만이 상당했다. 한편, 저커버그는 머스크가 혁신가로 존경받는 것을 부러워했다”고 전했다.● 스레드=트위터 ‘0원’에 인수하기?그런데, 저커버그는 왜 ‘트위터 스타일’의 서비스에 꽂혔을까. 돈 한 푼 안 내고 트위터 사용자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같은 유형의 소셜미디어를 만들어 트위터 이용자들을 끌어오면 사실상 트위터를 인수한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참고로, 머스크는 지난해 10월 트위터를 440억 달러(약 62조 원)에 인수했다. 머스크가 뒷목을 잡을 만하다.미 시장조사업체 인사이더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트위터의 올해 광고 수익은 30억 달러(약 3조8300억 원) 수준이다.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하기 전인 2021년에는 45억1000만 달러(약 5조7500억 원)의 광고 수익을 올렸다. 스레드가 트위터의 지위를 빼앗는 만큼 트위터에 가던 수익도 가져올 수 있다. 스레드에는 아직 광고가 붙지 않고 있지만, 업계는 향후 메타가 스레드에서도 광고 사업을 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스레드가 트위터보다 광고 비즈니스를 더 잘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메타, 핀터레스트, 트위터에서 근무한 바 있는 사얀탄 무코파디야이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운영하는 메타는 트위터보다 더 많은 이용자 기반, 광고주 리스트, 광고 도구 등을 보유하고 있다”며 “스레드는 (트위터보다) 더 비싸게 광고를 팔 수 있을 것”이라고 WSJ에 전했다.메타는 그동안 경쟁사 서비스를 따라 해 재미를 여러 번 봤다. 인스타그램의 ‘스토리’와 ‘릴스’는 각각 스냅챗과 틱톡을 모방한 서비스들이다. 현재 스토리의 광고 수익은 인스타그램 전체 광고 비중에서 2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스냅챗과 인스타그램에서 임원을 지낸 메그나 다르는 “메타가 비즈니스 모델이나 제품 기능을 잘 파악해 ‘복사-붙여넣기’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며 “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혁신이 부족하다고 말하겠지만, 저는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메타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021년 내부 고발한 전 임원에 따르면 페이스북의 중요 5개 국가에서 18세 미만 계정 등록이 1년 만에 4분의 1로 감소했다”고 지난해 전했다. 젊은 층 고객이 틱톡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는 페이스북의 신규 가입자가 후진국에서 주로 유입돼 광고주에게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더했다. 각국의 개인정보 보호 규제로 타깃 광고가 점점 어려워지고, 금리 인상 여파로 기업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한 것도 메타를 어렵게 하는 부분이다. 메타가 다른 IT 기업보다 광고 수익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어서다. 저커버그는 2021년 10월 사명을 페이스북에서 메타로 바꾸고 가상현실(VR) 사업에 연 100억 달러(약 21조7400억 원)를 쏟아붓고 있는데, 연간 수조 원의 적자가 발생하고 있다. 2022년 1월 초 330달러 수준이던 메타 주가는 지난해 11월 88달러까지 떨어졌었다. 2016년 이후 최저치였다. 메타가 최근 1만 명이 넘는 직원을 해고한 이유다. ● “10억 명 유저의 공개 대화 앱”메타가 AI 때문에 스레드를 개발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챗GPT 같은 거대언어모델(LLM)을 발전시키려면 문자 중심의 학습이 필요하다. 인터넷에서 텍스트를 수집해 인공지능을 계속 공부시키는 개념이다. 메타는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못지않게 AI 개발에 몰두하는 회사 중 하나다. 한 마디로 ‘텍스트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해 스레드를 내놨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달 초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시각적 데이터를 보완하기 위해 텍스트 기반의 네트워크를 만든 것일 수 있다”며 “스레드는 광고 플랫폼 그 이상”이라고 전했다.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머스크는 스레드가 출시되기 직전 트위터 게시물 읽기에 제한을 걸었다. 하루에 읽을 수 있는 트윗 게시물 수를 유료 회원은 8000개, 일반은 800개로 정했다. 머스크는 “극단적인 수준의 데이터 스크래핑 및 시스템 조작을 해결하기 위해 임시적 제한을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메타 같은 기업이 인공지능 개발을 위해 글을 긁어가지 못하게 막았다는 것이다. WSJ은 머스크가 AI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데이터를 사용하려는 기업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라고 분석했다.트위터리안들은 머스크의 조치에 황당해했고, NYT 기자는 트위터 측에 이와 관련한 의견을 물었는데, 답글로는 ‘똥’ 모양의 이모지(Emoji)만 돌아왔다. (머스크는 트위터 언론대응팀을 해체하고, 언론 문의 메일에 ‘똥’ 모양 이모지를 보내는 자동 응답을 설정해 놨다) 미국에서 트위터가 지닌 의미는 남다르다. 트위터는 사람들의 주요 뉴스 소비 창구로, 여론을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할 때 전 사회적 갑론을박이 벌어진 이유다. 이러한 측면에서 메타의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항상 라이벌 관계였다. 참고로, 저커버그는 트위터 사업 초기에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한 바 있다. 저커버그는 자신의 스레드에 “10억 명 이상의 사용자를 가진 공개 대화 앱이 필요하다”며 “트위터는 기회가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는데 우리가 해내면 좋겠다”고 밝혔다. (머스크의 자책골 덕분에) 1라운드는 저커버그가 승리한 분위기다. 그래도 최종 목적지까지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인다. 지난달 기준으로 트위터의 월간 활성 이용자 수(MAU)는 5억3500만 명 수준이다. 김성모기자 mo@donga.com}

    • 202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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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50만원대 애플 헤드셋을 안 사도 되는 이유[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9년 만에 내놓은 애플의 야심작 애플이 현실과 가상공간을 넘나들며 일상생활과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는 혼합현실(MR·Mixed Reality) 헤드셋 ‘애플 비전 프로’를 선보였다. 애플이 새로운 유형의 하드웨어 신제품을 공개한 것은 2014년 애플워치 이후 9년 만이다.애플은 6일(현지 시간) 본사가 있는 미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 애플파크에서 연례 개발자 회의(WWDC)를 열고 비전 프로를 공개했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의 “원 모어 싱(One more thing·하나 더 있다)”을 시작으로 비전 프로 소개가 이어졌다. 원 모어 싱은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1955~2011)가 제품 발표회 막판 가장 중요한 신제품을 선보일 때 썼던 말이다. 이날 2시간 프레젠테이션 중 3분의 1 이상을 헤드셋을 설명하는 데 썼다.비전 프로는 눈앞에 컴퓨터 그래픽을 3차원(3D)으로 덧씌워 보여주는 혼합현실 헤드셋이다. 게임, 영화 같은 디지털 화면(가상현실·VR)을 실감 나게 띄우거나, 실제 장소에 가상의 사물, 화면을 결합(증강현실·AR)한다. 애플은 데모 영상에서 ‘미키 마우스’가 실제 거실에 등장해 뛰어노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스키 고글처럼 생긴 헤드셋을 머리에 쓰면, 비전 프로용 애플리케이션(앱)이 AR 형태로 등장한다. 헤드셋에선 손과 눈동자가 마우스 역할을 한다. 손동작으로 아이콘을 움직일 수 있다. 특정 지점(앱)을 보고 엄지와 검지를 꼬집듯 맞대면(선택) 프로그램이 실행된다. 비전 프로만 있으면, 책상 위 허공에 인터넷 화면과 소셜미디어 대화창, 메모 등을 여러 개 띄워 놓고 일할 수 있다. 영화관처럼 시야를 화면으로 가득 채우고 콘텐츠를 즐기는 것도 가능하다. 모니터나 TV 등 디스플레이 제약이 없다는 이야기다. 헤드셋에 달린 3차원 카메라도 눈길을 끈다. 사진과 동영상을 입체감 있게 촬영해, 시간이 지난 뒤에도 마치 그 순간으로 돌아간 듯한 생생한 경험을 할 수 있다. ‘3차원 사진·동영상’인 셈이다. 비전 프로로 ‘영통(영상 통화·페이스타임)’도 가능하다. 서로의 모습을 실물 크기의 3D 화면으로 보여준다. 바로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통화할 수 있다.애플은 비전 프로를 ‘착용형 공간 컴퓨터’라고 지칭하면서 “아이폰 이후의 완전히 새로운 플랫폼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헤드셋이 PC나 아이폰에서 해왔던 기능들을 대체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애플은 비전 프로를 내년 초 출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애플 헤드셋을 사지 않을 10가지 이유비전 프로에는 애플의 기술력이 전부 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헤드셋에는 애플이 자체 제작한 반도체 칩 M2와 특별히 개발한 R1 칩이 탑재됐다. 애플의 R1 칩이 12개의 카메라와 5개의 센서, 6개의 마이크가 입력한 정보를 빠르게 처리한다. 기기는 눈을 한 번 깜박이는 것보다 8배 빠른 속도로 새로운 이미지를 띄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애플은 헤드셋 프로젝트에 7년간 70억 달러(약 9조 원)를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졌다. 프로젝트에 투입된 엔지니어만 1000명이 넘는다. 마이크 록웰 애플 기술개발 부사장은 “최초의 공간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 시스템의 거의 모든 면을 새롭게 발명했다”며 “이 과정에서 5000여 개의 특허를 출원했다”고 강조했다. 신제품이 공개되고 외신들의 평가가 이어졌다. 먼저, 호평. 헤드셋을 직접 체험한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의 기자 조안나 스턴은 “3D 영화가 드디어 이해된다. 거대한 공룡이 바로 눈앞에서 벽을 뚫고 나왔다”고 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패트릭 맥기 기자는 “비전 프로에서 ‘애플 워치’나 ‘에어팟 맥스(헤드폰)’의 디자인 요소를 느낄 수 있다”면서 “소프트웨어는 아이폰이나 아이패드와 유사했다”고 긍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반면, 부정적인 의견도 꽤 나왔다. 가장 먼저, 가격표가 눈을 비비게 했다. 애플이 책정한 비전 프로 가격은 3499달러(약 450만 원). 애플 제품 중 5999달러(약 760만 원)부터 시작하는 맥 PC 다음으로 비싸다. 최고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메타(페이스북)는 이달 1일 차세대 MR 헤드셋 ‘퀘스트3’를 공개했는데, 499달러(약 63만 원)부터 시작한다. 비전 프로의 7분의 1 수준이다. 미 시장조사기관 서카나의 기술분석가 벤 아놀드는 “비전 프로 가격이 내 주택담보대출 월 상환액의 두 배가 넘는다”고 꼬집었다. 헤드셋이 불편하다는 평도 있었다. 스턴 WSJ 기자는 “고글의 핏과 마감은 애플에서 만든 제품다웠지만, 착용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코와 이마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고 전했다. 또, “스크린 앞을 만졌을 때 따뜻하게 느껴졌고, 오래 낄수록 구역질이 났다”고도 했다. 발열과 MR 헤드셋 고유의 문제로 꼽히는 어지럼증 증상이 비전 프로에서도 나타난 것. AR 헤드셋 제조사 메르리프에서 임원을 지낸 타미르 버리너는 “헤드셋을 테스트해본 결과, 고객들은 부피가 큰 스트랩(끈)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화장을 한 사람들은 스키 고글처럼 얼굴을 누르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다. 배터리 용량도 문제로 꼽힌다. 비전 프로는 전원을 연결하지 않을 때는, 스마트폰 보조배터리처럼 유선으로 배터리를 달고 있어야 한다. 배터리 지속 시간도 2시간에 불과하다.마켓워치는 6일 ‘애플의 3500달러짜리 고글을 사지 않을 10가지 이유’라는 글에서 높은 가격과 무게(450g), 메스꺼움 증상 등을 비전 프로의 문제점으로 꼽았다. “(썼을 때) 우스꽝스러워 보인다”는 평가도 달았다. ● 코드명 N421과 N301애플은 2015년 헤드셋 제작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당시 애플은 최고 경영진과 이사회 구성원들에게 데모 기기를 제공했는데, 현재의 MR 헤드셋이 아닌 가벼운 안경 형태의 증강현실(AR) 기기였다. 애플에서는 이 ‘웨어러블 기기’에 ‘N421’이라는 코드명을 붙였다.쿡은 게임을 실감 나게 즐길 수 있는 가상현실(VR)보다 AR 기능을 선호했다. 안경 렌즈에 인터넷 화면이나 문자 메시지를 띄워 PC나 스마트폰을 쓰지 않고도 업무나 일상생활을 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AR 안경이 PC·스마트폰을 대신해줄 수 있다고 믿은 듯하다.AR 안경이 어떤 것인지 감이 안 온다면 인기 만화 ‘드래곤볼’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은 방법. 만화에는 ‘스카우터’라는 기기가 등장한다. 안경처럼 눈에 착용하고 상대를 바라보면 전투력 정보와 상대 거리, 위치 등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증강현실 기술이다.2015년 말, 애플은 기술개발그룹(TDG)이라는 비밀 조직(실제로 사무실도 따로 있음)을 꾸리고, N421 개발을 시작했다. 마이크 록웰 애플 기술개발그룹 부사장이 TDG의 수장 역할을 했다. 직전 해, 애플워치를 선보인 조니 아이브 전 애플 최고디자인책임자(CDO)도 곧이어 프로젝트에 가담했는데, 둘은 티격태격했다. 록웰 등 개발자들은 고차원의 게임을 실감 나게 즐길 수 있는 고성능 VR 헤드셋을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강력한 그래픽이 작동하려면 TV 수신기 크기의 작은 컴퓨터도 고객들에게 함께 보내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아이브는 “헤드셋의 성능이 좀 떨어지더라도 최대한 사람들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장치가 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서로를 ‘고립’시키게 만드는 데에 애플이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면서 반대했다. 경량 안경 형태의 증강현실을 선호했던 쿡도 반대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2016년 미 유타주에서 열린 한 기술 콘퍼런스에서 학생들에게 “여기 있는 사람 중 대부분은 컴퓨터에 연결된 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사람들이라 극소수만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세상을 괜찮다고 여긴다”라고 말했다.그래서 나온 절충안이 코드명 ‘N301’이다. AR 장치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VR 기능까지 수행하는 기기. 맞다. ‘비전 프로’다. ● 완벽한 절충안이란 없다 비전 프로에도 쿡, 아이브의 철학이 일부 담기기는 했다. ‘아이 사이트(Eye Sight)’ 기능이 대표적이다. 이는 사용자가 콘텐츠에 몰입한 상황에서 누군가 다가오면 헤드셋 화면이 투명하게 전환되는 기능이다. ‘시력(Eyesight)’이란 단어에서 재밌게 뽑아낸 듯하다. 눈앞이 컴컴하다가 갑자기 시력을 찾은 느낌이랄까. 사용자는 다가오는 사람을 인식할 수 있고, 주변 사람은 고글 화면 안의 이용자의 눈이나 표정을 볼 수 있다.애플의 한 관계자는 외신에 “아이 사이트 기능 덕분에 사람들은 헤드셋 착용자를 로봇이라고 느끼지 않고 편안하게 상호작용 할 수 있다”면서 “애플은 이 기능을 경쟁사 VR 헤드셋과 차별화하는 경쟁력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애플의 절충안이 결과적으로 어정쩡하고 비싸기만 한 제품을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다. 블룸버그는 “과거 잡스는 아이패드를 공개하면서 ‘인터넷을 하거나 영화를 볼 때 맥이나 아이폰보다 낫다’고 했고, 애플워치는 ‘아이폰보다 고객의 움직임을 잘 포착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다르게 비전 프로는 기존 제품보다 명확한 장점을 소개하지 못한 것 같다”고 전했다. 디자인에 대한 악평도 있었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6일 행사 직후 “애플의 설명처럼 이 헤드셋 기술이 사람들의 삶을 정말 바꾼다면. 이 제품을 착용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보이는지가 굉장히 중요하다. 매일 착용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어, “하지만, 쿡이나 록웰, 아니 누구도 무대에서 비전 프로를 착용하지 않았다. 쥐꼬리를 연상케 하는 배터리 연결선이 창피했던 것일 수 있다”고 비꼬았다.애플(특히, 잡스)은 기능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항상 완벽함을 추구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스키 고글 형태의 비전 프로는 애플의 이전 작품과 비교하면 특별해 보이진 않는다.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신비월드 21화, ‘애플은 왜 접는 폰을 안 만들까?’ 참고 참고로, 비전 프로는 애플에서 디자이너가 아닌 개발자들이 주도한 첫 작품이다. 아이브는 2019년 애플을 떠났고, 록웰이 비전 프로 프로젝트를 담당했다.비전 프로의 휴대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애플의 비전 프로 공개 영상에는 혼자 있거나, 가족과 있을 때 헤드셋을 사용하는 모습만 담겼다. 지하철이나 회사 같은 공공장소에서 착용한 장면은 보이지 않았다. NYT는 “영상에서 비행기에 탄 사람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비행기는 사실상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 장소”라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애플은 행사에서 ‘웨어러블’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았다. ● “예전엔 증강현실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애플이 기대에 못 미치는 MR 헤드셋을 내놨지만, 쿡은 ‘증강현실 시대’에 확신이 있는 듯하다. 그는 지난해 한 행사에서 대학생들에게 “내 또래가 ‘인터넷 없이 어떻게 자랐을까’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여러분이 ‘증강현실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궁금해하는 날이 가까운 시일 내에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애플이 비전 프로를 공개하면서 ‘공간 컴퓨팅’이란 단어를 사용 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헤드셋이 가상 세계로 보내는 도구가 아니라, 주변 사람과 상호작용하며 일상적인 업무를 더 편리하게 만드는 기기가 될 것이라고 목적을 분명히 밝힌 것.애플은 행사에서 가상현실 세계를 뜻하는 ‘메타버스’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쿡은 지난해 한 네덜란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도 메타버스 용어 사용을 피했다. 미 투자은행 번스타인의 애널리스트 마크 시뮬릭은 “헤드셋이 시계와 이어폰, 스마트폰을 보완하는 날이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언젠가는 주머니에 휴대전화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노트북·PC가 놓인 책상에 앉거나 얼굴 앞에 휴대전화를 둬야만 했던 구속된 삶에서 벗어나는 날이 곧 올까. 애플의 야망처럼 하루 종일 기기를 착용한 채 밖을 돌아다니며 검색도 하고, 이메일도 보내고, 전화도 하고 게임, 명상까지 하려면(=아이폰 대체) 몇 년은 걸릴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기술적인 한계 때문이다. 비전 프로 개발팀은 AR 안경에 아이폰 성능을 집어넣으면 기기가 지나치게 뜨거워진다는 점을 발견했다. NYT는 “발열 문제로 아이폰 성능의 10분의 1만 비전 프로에 사용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몇 시간을 착용하고 돌아다니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가볍고 배터리가 오래 지속돼야 하는 과제도 있다.헤드셋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 직원은 “엔지니어들끼리 쿡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망 없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농담을 주고받곤 했다”고 NYT에 전했다. 토니 파델 전 애플 임원은 “현재 AR, VR 기기는 게임, 화상 회의 같은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능숙한 것 같다. 아이폰과 같은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며 “적어도 5년 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파델은 잡스와 아이팟을 개발하며 10년간 애플 아이팟 팀을 이끌어 ‘아이팟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아이폰 여정’ 시작한 비전 프로 비전 프로가 아이폰과 비슷한 과정을 거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2007년 1월 9일, 애플이 아이폰이라는 반짝거리는 기술을 처음 들고나왔을 때, 세상이 발칵 뒤집히진 않았다. 전화, 이메일 작성과 인터넷 검색, 음악 감상 등 새로운 기능은 없었다. 아이폰이 최초의 스마트폰도 아니었다. (국내에서도 기존 휴대전화에 비해 너무 크다는 악평도 많았다) 지금의 아이폰을 만든 것은 수많은 애플리케이션 개발자였다. 지금은 익숙해진 그룹 대화방(소셜네트워크서비스), 택시 호출, 숏츠(짧은 동영상), 캐주얼 게임, 모바일 결제 같은 ‘킬러앱(Killer Application)’들이 계속 생겨났다. 이코노미스트는 “2007년에도 499달러(약 64만 원)의 아이폰 출시 가격이 논란이었다. 현재 고객들이 아이폰에 1000달러(약 128만 원) 이상을 쓰게 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고 6일 전했다. 애플의 스마트 시계인 애플워치도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WSJ은 “쿡이 처음 애플워치를 공개할 때 심장 박동수를 표시하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낼 수 있고, 일부 앱을 실행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당시에는 다들 ‘도대체 이게 무슨 용도일까’ 생각했다”고 전했다. 사람들은 애플워치를 피트니스와 건강을 목적으로 구매했고, 애플은 이를 알아채고 관련 기능을 보완하는 데 집중했다. 개발자들도 애플워치용 운동·건강 앱을 내놓았다. 처음 애플의 스마트워치 판매는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현재는 연간 5000만 대가 팔린다. 즉, 비전 프로를 성공시키려면 기기가 앱 개발자들의 손에 빨리 넘어가야 한다는 해답이 나온다. 이코노미스트는 “애플은 고가의 1세대 제품이 얼마나 팔리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면서 “공간 컴퓨팅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아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제품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라고 전했다. 무엇보다 비전 프로는 아이폰이나 애플워치보다 앞선 출발점에서 시작할 수 있다. 기존 기기와 연동만 잘 돼도 헤드셋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맥, 아이폰, 애플워치, 에어팟 등 전 세계에는 20억 대가 넘는 애플 제품이 깔려 있다.비전 프로가 아이폰 앱스토어처럼 생태계를 갖거나, 애플워치처럼 존재 이유를 발견하면 그때 사도 늦지 않을 것 같다. (새로운 경험이 간절하다면 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동안 “혁신이 없다”는 비판을 받아 온 쿡 역시 잡스의 반열에 오르지 않을까. 아이폰이 처음 나오고 앱스토어는 첫 달에 3000만 달러(약 385억 원)의 매출을 거뒀다. 당시 잡스는 “언젠가 10억 달러(약 1조2800억 원) 규모의 시장이 될지 누가 알겠나?”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현재 앱스토어의 연 매출은 700억 달러(약 89조8800억 원)가 넘는다. 여기에 광고 관련 수익까지 포함하면 금액은 더 커진다.그때쯤이면 비전 프로의 높은 가격에 대한 지적도 사라질 것이다. 공교롭게도 1976년 애플이 처음 선보인 컴퓨터(애플1) 가격은 666달러였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비전 프로 가격과 거의 같은 3500달러 수준이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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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다음 미국 대통령이 결정될 수 있다”[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글로벌 신(新) 비즈니스 가이드(38)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기나긴 금리 인상 여정의 종착점? “일부 은행의 파산으로 금리 인상이 추가로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미국의 금리 인상 사이클이 이달 끝날까.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최근 금리 동결 가능성을 시사했다. 연준이 13~14일(현지 시간)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를 올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미국의 기준금리는 지난해 3월 연 0.25%에서 지난달 5.25%까지 무려 5%포인트나 상승했다. 2007년 이후 16년 만에 금리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인상 속도 또한 역대급이었다. 연준은 최근 15개월 동안 10차례 연속으로 금리를 인상했다. 인플레이션이 12%를 웃돌았던 1980년대 초반을 제외하고, 이렇게 단기간에 금리를 높게 올린 적이 없었다. ‘베이비스텝(기준금리 0.25%포인트 인상)’부터 ‘빅스텝(0.50%포인트 인상)’, ‘자이언트스텝(0.75%포인트 인상)’까지 생소한 단어들이 등장했다. 파월이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다고 언급한 배경에는 인플레이션이 있다. 금리 인상의 원인이었던 인플레이션이 잡히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물가 지표인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해 6월 9.1%(전년 대비 상승률)로 고점을 찍고, 올 4월 4.9%까지 계속 하락했다.올해 3월 실리콘밸리은행(SVB), 시그니처은행, 퍼스트리퍼블릭은행(FRB) 등 미국 중대형 은행이 금리 인상 여파로 잇달아 쓰러지면서 긴축을 멈춰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SVB 사태’는 신비월드 33회, “아니, 이 금리에 어떻게 은행이 망해?” 기사 참고. 은행 파산이 사실상 금리 인상 효과를 일으켰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SVB 사태’ 전후로 미 은행들이 대출을 조였다. 기업들의 대출 수요도 쪼그라들었다. 연준이 최근 각 은행 대출 담당자들에게 설문한 결과, 올해 1분기에 기업 대상 대출 조건을 강화했다고 답한 비율이 46%로 지난해 4분기 44.8%보다 늘었다. 지난해 말과 비교해 신용이 더 좋은 기업에만 대출을 승인해줬다는 의미다. 대출 담당자의 55.6%는 “대출을 원하는 기업 숫자가 줄었다”고도 했다. 지난해 4분기에는 해당 비율이 31.3%에 불과했다. 독일 도이체방크는 “SVB 사태에 따른 대출 강화 여파가 미미하더라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0.5%포인트는 낮출 것”이라고 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은행이 대출을 조이면 기업들의 자금 조달 비용이 상승해 긴축 효과가 나타난다”면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더 이상 멀리 갈 필요가 없다”고 전했다. 금리 인상의 종착점이 눈앞에 있을까. ● 피노키오 된 이코노미스트들연준 위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연준이 지난달 24일 공개한 5월 FOMC 회의 의사록을 보면 몇몇(several) 참석자들은 파월의 의견에 동조했지만, 일부(some) 참석자들은 “물가 하락 속도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느리다. 추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물가(상승률)가 4.9%로 많이 내려왔지만, 연준의 목표인 ‘2%’에 도달하려면 이달에도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다.최근 고용 및 소비 지표만 보면, ‘몇몇 위원’보다 ‘일부 위원’ 의견에 힘이 실린다. 5%대 금리에도 미국 경제가 쉽게 식지 않고 있어서다. 미 노동부는 4월 일자리(비농업 신규 고용)가 25만3000개 증가했다고 5일 발표했다. 시장 예상인 18만 명을 크게 웃돌았다. 미국 내 신규 고용은 1월 47만2000명에서 2월 32만6000명, 3월 16만5000명으로 떨어지다가 이번에 반등했다. 4월 실업률은 3.4%를 기록했다. 1969년 이후 최저 수준으로 사실상 ‘완전 고용’ 상태다. 시간당 평균 임금도 전년 대비 4.4% 증가해 전망치(4.2%)를 넘어섰다. 무엇보다 소비가 아직 뜨겁다. 지난달 26일 미 상무부에 따르면 4월 개인소비지출(PCE)은 전년 동월 대비 4.4% 상승했다. 시장 전망치(4.3%)보다 높았다. 전월보다는 0.4% 올랐다. 변동성이 큰 에너지와 식료품을 제외한 근원 PCE도 3월보다 0.4% 증가했다. 미국 사람들이 경제매체나 금융가 예상보다 더 많은 돈을 썼다는 의미다. PCE는 소비 추이를 체크할 수 있어서 연준이 선호하는 물가지수다. 로레타 메스터 클리블랜드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는 지난달 초 “긴축의 여정이 출발점보다는 종착점에 훨씬 가까운 상황”이라고 진단했지만, 한 달도 지나지 않은 26일에는 “인플레이션이 너무 천천히 내려온다는 점이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높은 금리에 경기가 곧 얼어붙을 것이라던 전문가들은 피노키오가 됐다. 레이 패리스 크레디트스위스(CS)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경제학자들이 반년마다 ‘6개월 후 경기 침체가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면서 “다음 달이 되면 학자들은 여전히 ‘6개월 후 경기 침체’를 언급할 것”이라고 비꼬았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해 월스트리트 이코노미스트들은 연준이 금리를 빠르게 올려 올해 중반쯤에는 경기침체에 빠질 것으로 내다봤지만, 현재는 많은 사람이 경제를 식히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 권총 품은 연준 의장 파월이 2021년의 실수를 반복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당시, 파월은 “현재 인플레이션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가 물가가 계속 치솟자 오판을 인정하고, 뒤늦게 금리를 올렸다. 이번에는 자칫 금리 인상을 일찍 멈췄다가 인플레이션이 수년간 굳어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 1979년 지미 카터 행정부 시절 연준 의장에 취임했던 폴 볼커(1927∼2019)가 이 같은 일을 겪었다. 볼커는 재임 동안 금리를 연 10%에서 22%까지 올리며 인플레이션이 12%까지 갔던 최악의 고물가 상황을 제압했다. 당시, 시민단체·기업·정치권 등에서 금리를 내리라는 요구가 상당했다.카터 정부는 1980년 여름 대선을 앞두고부터 금리 인하를 압박했다. 물가가 어느 정도 잡혔고, 서민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웠다. 물론, 숨은 이유는 ‘재선’이었지만. 7월 볼커는 17%대 금리를 9%로 떨어뜨렸는데, 물가가 다시 치솟았다. 볼커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19%로 기존보다 더 올려야 했다. 참고로,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불린 볼커는 ‘권총 품은 의장’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그가 품에 권총을 지니고 다닌 습관 때문이다. 높은 금리에 시민단체와 농민들이 연준 건물을 에워싸는 등 들고 일어났고, 무장 괴한의 습격도 있었다. 볼커는 총을 차고 다니면서까지 금리를 지켰지만, 정치권 압력은 이겨내지 못한 듯하다. 카터 다음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볼커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1984년 백악관 집무실 옆 서재에서 레이건 대통령과 면담했는데, 제임스 베이커 비서실장이 자리에 함께 있었다. 레이건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베이커는 ‘대통령이 선거 전에 금리를 인상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과거 미 대통령들이 연준 의장을 괴롭혔던 이유는 인플레이션이 지갑 두께와 계좌 잔액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선거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1974년 제럴드 포드 미 부통령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물러나면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됐는데, 당시에도 인플레이션, 실업률 급증이 문제였다. 포드는 미국 물가상승률이 12% 수준일 때 ‘WIN(Whip Inflation Now·고물가 때려잡기)’이라는 약어로 인플레이션을 이겨내겠다는 의지를 다졌지만, 결국 카터에게 자리를 내어줬다. 뒤를 이은 카터 역시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해 재선에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카터의 취임과 퇴임에 ‘인플레이션’이 큰 역할을 한 셈이다. ● 바이든 운명 손에 쥔 ‘연준’미국에선 파월이 인플레이션을 ‘잘’ 잡느냐에 따라 내년 미국 대통령이 바뀔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깊은 경기침체를 겪지 않으면서도 물가를 잡는 게 핵심이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앞으로 몇 달 동안 일어날 일은 소비자와 투자자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면서 “연준이 이번 임무(인플레이션 잡기)를 완수하는지와 그 과정에서 심각한 경기 침체를 유발하는지에 따라 내년 대선이 크게 좌우될 것”이라고 전했다. 무엇보다 미국 국민이 현재의 인플레이션 책임이 팬데믹(대유행) 부양정책에 서명한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2020년 4월부터 총 5조 달러(약 6630조 원)의 돈을 풀며 강력한 재정 부양에 나선 바 있다. 이 양적완화 정책은 미국의 물가를 끌어 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올 4월 에너지와 식품을 제외한 근원 물가는 바이든이 취임했을 때보다 13.4% 올랐다. G7(주요 7개국)의 근원 물가보다 더 많이 상승했다. 이코노미스트는 “금리를 적시에 올리지 못한 연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너지 비용 상승) 등도 물가를 끌어올린 요인 중 하나지만, 인플레이션에 불을 붙인 사람은 바이든이었다”고 지난달 전했다. “유권자들은 대통령의 경제 정책이 인플레이션을 악화시켰다고 본다. 이들은 내년 재선의 유력 경쟁자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경제를 더 잘 다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도 했다. 수십 년간 대통령·의회 선거를 분석해 온 레이 페어 미 예일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 행정부의 경제적 성과를 기반으로 다음 대선 결과를 최근 예측했다. 그는 미국 인플레이션이 올해와 내년 각각 3%, 2%를 기록하고, 동시에 내년 경제가 4% 성장하면 내년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반면, 물가상승률이 올해 5% 내년 4% 수준이고 성장률이 2%로 위축된다면,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페어 교수는 “어느 때보다 연준의 노력에 따른 정치적 효과가 클 것”이라면서 “좋은 경제적 성과는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 출마 명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통장 잔액: 5000억 달러(약 662조 원) 그런데, 5%대 금리에도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왜 이렇게 천천히 떨어질까. ‘헬리콥터 머니(막대한 통화공급 확대)’의 여파가 가장 커 보인다.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연은)은 ‘팬데믹 초과 저축의 흥망성쇠’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연구 결과를 지난달 초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산 당시 가계가 전례 없는 속도로 역대급의 초과 저축을 축적했다. 실업보험, 세금 공제, 급여 보호 프로그램 같은 직접 지원이 영향을 미쳤다. 동시에, 코로나19 봉쇄 조치로 2020~2021년 지출이 급격하게 감소하면서 통장에 돈이 급격히 불어났다. 미국 가계의 초과 저축액은 2021년 8월 2조1000억 달러(약 2789조 원)로 정점을 찍은 뒤, 2021년 말 월평균 340억 달러(약 45조 원)씩 감소했다. 그러다가, 금리가 지난해 속도가 붙어 월 1000억 달러(약 133조 원)씩 줄었다. 그럼에도, 아직 통장에 쓸 수 있는 돈이 꽤 남아있다. 함자 압델라흐만 샌프란시스코 연은 경제연구원은 “올해 3월까지 누적 인출액은 1조6000억 달러(약 2117조 원)에 달했지만, 아직 5000억 달러(약 662조 원)의 초과 저축이 남아 있다”면서 “초과 저축은 올해 말까지 가계 지출을 지원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미 국민의 소비가 여전히 뜨거운 이유다. 최근에는 기업들의 ‘탐욕’이 인플레이션 주범으로 꼽히고 있다. 기업이 원가 상승 요인 이상으로 제품 가격을 여러 차례 올려 물가를 계속 끌어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펩시코, 코카콜라, 프록터앤드갬블(P&G), 네슬레 등 미국 소비재 기업들의 실적 발표를 보면 판매량은 줄어든 반면, 매출은 증가했다. 제품 가격을 올려서 만회한 것이다. 의류 업체 랄프로렌은 최근 평균 상품 가격을 7% 올렸다. 실적이 시장 예상치를 웃돌면서 주가가 강세를 보였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평소에는 고객들이 화를 내는 것을 두려워해 기업들이 가격을 잘 올리지 못하지만, 지금은 다르다”면서 “기업들이 인플레이션 핑계를 대면서 판매 감소를 가격 상승으로 상쇄하고 있다”고 지난달 전했다. ● PPP와 핑계플레이션 미 블룸버그는 기업들이 핑계(excuse)를 대면서 인플레이션(Inflation)을 주도하는 현재 상황을 ‘핑계플레이션(Excuseflation)’이라고 표현했다. 쉽게 말해, 기업들이 고객들에게 일종의 ‘바가지요금’을 청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랄프로렌이나 펩시코처럼 가격결정력(상품값을 올려도 사고 싶은 마음이 크게 줄지 않는)이 있는 기업들이 이를 활용하고 있다. 미 시장조사업체 코르부 엘엘씨의 사무엘 라인스 전무이사는 “우리는 이를 새로운 ‘PPP(Pepsi Pricing Power·펩시의 가격결정력)’라고 부르고 있다”고 했다. 그는 “펩시코가 전쟁 이후 러시아 시장을 잃고 이를 만회하고자 가격을 크게 올렸는데, 고객들이 다른 대안을 찾지 않고 대체로 제품을 구매했다”고 했다. 경제 뉴스나, 제품값 인상 소식이 쏟아지면서 고객들이 ‘가격’에 덜 민감해진 것도 있다. 가격 인상 행렬에 묻어가는 기업도 있었을 것이다. 라인스는 “코로나19에 따른 공급망 문제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제품값을 여러 번 올려 본 회사들이 인플레이션 같은 특정 이슈가 있을 때 (가격 인상에 대한) 고객들의 거부감이 덜하다는 것을 알아챘다”면서 “기업들이 이를 계속 이용하는 것”이라고 했다.기업 최고재무책임자(CFO)들 사이에서 ‘탄력성’이라는 단어가 화제가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우리 고객들이 제품 가격의 변화(사실상 인상)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체크하면서 가격 정책을 짜는 것이다. 이는 전혀 새로운 전략은 아니지만, 인플레이션 시기를 거치면서 ‘수익성 방어’의 핵심 전술로 떠올랐다.미국 생활용품 업체 프록터앤드갬블(P&G)의 안드레 슐튼 CFO는 “우리의 탄력성은 여전히 양호하다”고 밝혔다. 슐튼은 P&G의 최근 판매량이 전년 동기보다 3% 감소했지만, 가격을 평균 10%가량 인상했다고 설명했다. 미 매사추세츠대 애머스트 캠퍼스의 경제학자 이사벨라 웨버는 “펩시나 코카콜라처럼 뚜렷한 경쟁상대가 있는 기업마저도 시장 점유율을 잃을 걱정 없이 가격을 함께 올렸다”면서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판매자 인플레이션’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설명했다.● 소비·고용 언제쯤 식을까 연준은 지난해부터 고용과 임금 상승 추세가 꺾여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사람들이 가격표를 확인하게 하려면, 월급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부터 꺼뜨려야 한다는 설명이다. 변화의 조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블룸버그는 지난달 19일 ‘팬데믹 시대의 소비 폭주가 벽에 부딪히고 있다’는 글에서 “신용카드 잔액이 증가하고 있으며, 최근 소매점의 취미 용품 매출이 1년여 만에 가장 큰 하락세를 보였다”고 전했다. 높은 금리와 경기침체 우려 탓에 덜 필요한 것부터 소비를 줄여나가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할인 등 특가 상품 판매도 늘었다. 대형 할인매장 티제이엑스는 “1분기 고객 당 평균 매출이 감소했지만, 전체 매장 방문 수는 증가했다”면서 “저가 상품을 찾는 신규 고객이 늘고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글로벌 컨설팅사 EY의 소매파트 리더인 짐 듀셋은 “우리는 엄밀히 말해 불황 상태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경기침체의 위기감을 확실히 느끼고 있다”고 했다. ‘이민’이 인플레이션에서 중대한 변수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미 정부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목적으로 시행해온 ‘타이틀 42’ 행정명령이 지난달 11일 자정을 기해 3년 만에 종료됐다. 타이틀 42는 ‘국제적 위해의 전염병이 창궐해서 미국에 퍼질 위험이 있을 때 이를 막기 위해 국경을 무조건 닫을 수 있다’는 미국 보건법 제42호를 뜻한다. 타이틀 42 해제로 미국으로 이민이 급증해 임금 상승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다. 꽤 많은 이민자가 노동 시장에 투입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올해 약 140만 명이 미국으로 순이동할 것으로 예상된다. 팬데믹 이전보다 3분의 1 증가한 수치”라고 전했다. 글로벌 자산운용사 아폴로글로벌매니지먼트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토르스텐 슬록은 “노동 시장을 냉각시키고 인플레이션을 늦추려는 연준에 이민자 증가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민에 큰 기대를 걸지 말라는 일부 의견도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노동 공급이 늘어나 임금상승률을 낮출 수는 있지만 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다”면서 “오히려 상품, 서비스, 임대료 등을 상승시킬 수 있어 지켜봐야 한다”라고 전했다. (타이틀 42 정책이 폐지된 이후 바이든 정부가 여전히 엄격하게 입국을 통제하고 있어서 당장은 인플레이션에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대다수 미 백인이 이민에 부정적이다) ● 마침표 또는 쉼표연준이 이달 금리를 동결하더라도, 마침표가 아닌 ‘쉼표’일 가능성도 있다. 차기 연준 부의장에 지명된 필립 제퍼슨 연준 이사는 지난달 31일 워싱턴DC에서 열린 금융 정책 연례 콘퍼런스에서 “금리 인상을 건너뛰면 FOMC가 추가 긴축 결정을 내리기 전에 더 많은 데이터를 볼 수 있을 것”이라면서 기준금리 동결을 시사했다. 이어 “다음 회의에서 금리를 유지한다는 결정이 나오더라도 우리가 이미 최고 금리에 도달했다는 의미로 해석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추가 인상의 문은 열어둔 셈이다. 1년 반만의 금리 동결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선다. 인플레이션이 쉽게 잡히지 않아, 내년 이맘때도 비슷한 기사를 쓰고 있을까 봐서다. 2022년 6월 신비월드에서 인플레이션을 다룰 때, 1년 후 같은 주제를 또 쓰게 될지 생각지도 못했다. ▶신비월드 15화, “치솟은 주가가 지구로 돌아왔다. 파티는 끝났다”기사를 쓰기 싫어서가 아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빨리 잡혀야, 미국뿐만 아니라 각국의 금리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어서다.김성모기자 mo@donga.com}

    • 202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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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즈니가 흑인 인어공주를 택한 이유[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글로벌 신(新) 비즈니스 가이드(37)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인간 세상 다시 등장한 에리얼 “사람들은 이미 본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의 임무는 기존 공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신선하고 새로운 스토리를 발굴해내는 것이다.”1991년 1월, 제프리 카젠버그 월트디즈니 회장(드림웍스 창업자)은 직원들에게 A4 28장 분량의 편지를 보냈다. 직원들이 창의성을 펼쳐 보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글에 담았다. 그것도 아주 길-게. 그는 “스튜디오가 길을 잃었다”면서 “막대한 예산과 유명 배우에 의존하지 말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실행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카젠버그 전 회장의 ‘재탕 금지’ 요청이 받아들여진 것일까. 디즈니는 수년간 다수의 고전 애니메이션을 영화화했는데, 매번 기존 작품에 새로움을 더했다. 절묘한 배역과 신선한 음악, 실감 나는 화면 구성이 영화들을 흥행으로 이끌었다. 신데렐라(2015), 정글북(2016), 미녀와 야수(2017), 알라딘(2019) 등 대부분이 그랬다. 2016년, 디즈니가 ‘인어공주’를 실사화한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기대를 모았다. 디즈니와 관객, 모두에게 인어공주의 의미가 남달라서다. 디즈니가 1989년 선보인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는 바다 왕국의 딸인 인어 에리얼이 인간인 에릭 왕자와 사랑에 빠지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스토리는 모르더라도 주제곡은 한 번쯤 들어봤을 가능성이 크다. ‘언더 더 씨(under the sea)~’ 인어공주는 크게 흥행했고, 디즈니는 전 세계에서 2억3500만 달러(3120억여 원)의 이익을 거뒀다. 창업자 월트 디즈니가 사망하고 침체에 빠졌던 디즈니는 이 애니메이션으로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인어공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주 캐릭터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블룸버그는 “인어공주는 디즈니를 애니메이션 강국으로 만든 중요한 작품”이라면서 “에리얼이 없었다면 겨울왕국의 ‘엘사’도 없었을 것”이라고 평했다.디즈니의 신작 실사 영화 인어공주가 ‘우여곡절’ 끝에 24일 국내 개봉한다. 북미에서는 26일(현지 시간) 극장에 걸린다. 우여곡절이라고 한 이유가 있다. 인어공주가 개봉하기까지 디즈니가 정말 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디즈니 100년 역사상 이 정도로 높은 파도는 없었을 듯하다.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30224/118062328/1● 인어공주 탄생 30주년에 논란의 캐스팅논란은 인어공주 탄생 30주년을 맞은 2019년 시작됐다. 디즈니가 실사 영화의 에리얼 역할에 가수 겸 배우인 할리 베일리를 택했다고 발표하면서다. 흑인 여배우가 인어공주의 주인공 역할을 하게 됐다는 소식에 일부 사람들은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일부는 “어릴 적 꿈이 왜곡됐다”며 좌절했고, “원작을 해치는 무리한 설정”이라는 비판도 쏟아졌다. 온라인에선 “#나의 에리얼이 아니야”라는 반대 해시태그 운동까지 벌어졌었다. 디즈니는 지난해 9월 공식 유튜브 채널에 인어공주 티저 영상을 올렸는데, 공개 2일 만에 100만 개가 넘는 ‘싫어요’를 받았다. 사람들의 불편한 감정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디즈니코리아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공식 예고편은 댓글 창이 아예 폐쇄된 상태. 반대 움직임도 있었다. 지난해 티저 영상이 나오고 미국의 흑인 부모들은 소셜미디어에 동영상을 찍어 올리기 시작했다. 흑인 인어공주를 본 딸들의 반응을 카메라에 담아낸 것. “디즈니 공주 캐릭터에 감정 이입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흑인 엄마들이 적극적으로 동영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프레셔스 에이버리(33)는 “TV에서 흑인 캐릭터(아마, 공주 캐릭터)를 보는 것이 얼마나 드물었는지 알기 때문에, 딸이 인어공주를 보는 순간을 찍고 싶었다”고 했다. 에이버리가 찍은 동영상에서 딸 에메리(3)는 베일리(여주인공 배우)를 보고 “(그녀는) 브라운인 것 같아요. 브라운 에리얼!”이라고 외쳤다. 그럴 만하다. 디즈니 100년 역사에서 흑인 공주는 ‘공주와 개구리(2009년)’의 티아나 공주 한 명뿐이었으니까. 원작을 깨고 흑인 여배우가 공주 역할을 맡은 것은 인어공주가 처음이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해 “엄마들이 올린 동영상은 조회수 수백만 회씩을 기록했으며, 디즈니는 마케팅 대박을 터뜨렸다”고 전했다. ● ‘PC’ 논란의 확산인어공주 논란은 2010년대 들어서며 거세진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논란의 연장선에 있다. ‘정치적 올바름’은 미국 정치권에서 등장했다. 정치인들이 인종이나 성별, 성, 종교, 이민자 등 소수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언어나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현재는 미 국민의 삶에도 뿌리내렸다.흑인 등 소수자를 전면에 배치하는 작품이 늘면서, 일부 관객들은 작품에 불만을 드러냈다. 인종 차별이나 정치적 올바름(PC) 문제를 의식해 꼭 필요하지 않은 설정임에도 억지로 흑인 주인공을 내세웠다는 지적이다. 특히 인어공주와 같은 리메이크 작품들에서 원작과 배치되는 캐스팅이 이어지면서 논란이 확산했다. “다양성은 새로운 작품에서 추구하지, 왜 원작을 바꾸냐”는 의견이 나왔다. 디즈니가 지난해 9월 공개한 영화 ‘피노키오’에서 요정 역으로 흑인 여배우가 등장했고, 지난달 개봉한 ‘피터팬&웬디’의 요정 팅커벨 역할도 흑인 여배우가 연기했다. 실사 영화로 제작 중인 ‘백설공주’의 주인공 역시 원작과 다르게 라틴계 배우가 맡았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HBO맥스는 영화 ‘해리포터’를 TV시리즈로 계획 중인데, 주연 중 한명인 헤르미온느 역할에 흑인 배우를 택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있다. 창작물이 아닌 실존 인물을 다루는 다큐나 시대극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넷플릭스는 최근 역사 다큐멘터리 ‘퀸 클레오파트라’를 공개했는데, 고대 이집트의 전설적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기원전 69년~30년)를 흑인 배우 아델 제임스가 연기했다. 곧바로 “그리스 혈통 백인으로 알려진 클레오파트라를 흑인으로 묘사한 것은 적절치 않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집트 고대유물부 장관을 지낸 고고학자 자히 하와스는 “완전히 가짜”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넷플릭스는 흑인 여성주의 학자인 셸리 헤일리 미 해밀턴대 교수의 조언을 기반으로 흑인 배우에게 역을 맡겼다고 해명했다. 헤일리 교수는 “클레오파트라는 신체적 특성과 별개로 문화적으로 흑인이었다”는 오묘한 주장을 펼쳤다. 클레오파트라의 일생이 흑인 여성에 대한 억압의 역사를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그렇다고 다큐 캐스팅까지…? (참고로, 영화 제작사인 웨스트브룩스튜디오는 흑인 배우 부부인 윌 스미스와 제이다 핑킷 스미스가 설립했다)PC 논쟁은 ‘블랙워싱(blackwashing·흑인화)’ 지적으로 이어졌다. 과거 비(非)백인 역할을 백인이 연기했던 관행을 ‘화이트 워싱’이라고 비판했는데, 이를 뒤집은 것이다. ● 백인 오바마, 흑인 홍길동까지 등장해외에서는 “백인 중심 콘텐츠 업계가 권력을 재분배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블랙워싱 같은 “선을 넘었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PC 논쟁을 수면 위로 꺼내 올린 것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었다. 트럼프는 2015년 대통령 출마 선언 당시 “엘리트 계층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겠다”고 공언했다. “이 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적 올바름”이라고까지 했다. 심지어 ‘PC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트럼프는 2016년 모든 여론 조사 기관의 예상을 깨고 제45대 미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당시 WP는 여론조사 결과가 뒤집힌 이유로 ‘PC’를 꼽았다. 백인 유권자들이 여론 조사에선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막말’을 일삼는 트럼프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히지 못했지만, 투표장에선 트럼프를 찍었다는 해석이다. 그동안 정치적 올바름과 관련한 사례에서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을 꾹 참고 있었는데, 트럼프가 등장하면서 미국 사회가 ‘할 말은 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미 정책연구기관인 케이토(CATO)연구소는 미국인의 4분의 3이 ‘정치적 올바름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토론을 침묵시켰다’고 생각한다는 통계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온라인에서 이어지는 블랙워싱 조롱 현상도 이런 분위기를 보여준다. 최근 소셜미디어에는 가상의 전기(傳記) 영화 포스터들이 올라오고 있는데, 대부분 흑인 유명 인사에 백인 배우들의 얼굴을 합성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포스터에는 영화 ‘라라랜드’의 주인공 라이언 고슬링이 등장한다. 위대한 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가상 전기 영화 포스터에는 마크 월버그를 합성했다. 사람들이 일종의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을 만들어 블랙워싱을 비꼰 것이다.‘홍길동’을 연상하게 만드는 포스터도 있었다. 홍길동 패랭이를 쓴 할리우드 흑인 배우 웨슬리 스나입스가 나온다. 이는 국내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나는 단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싶었다’는 설명이 눈길을 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아르헨티나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에 흑인 배우의 얼굴을 합성한 그림도 있었다. 그렇다면, 디즈니는 이처럼 격렬한 PC 논쟁 분위기에도 왜 흑인 인어공주를 택했을까. ● 과거의 할리우드에 작별 인사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고민이 반영됐을 가능성이 있다. 그동안 미국의 콘텐츠 업계는 철저하게 ‘남성’, ‘백인’ 중심이었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 맥킨지에 따르면, 미 영화 산업 경영진의 92%가 백인(TV 업계에선 87%)이다.2017년 앤젤리나 졸리, 기네스 펠트로 등 할리우드 유명 여배우들이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에게 성추행, 성희롱을 당했다고 뉴욕타임스(NYT)에 고백하면서 업계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전 세계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2020년에는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 있었다. 당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하면서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불길처럼 번졌다. 콘텐츠 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업계는 흑인 배우에게 주연을 맡기는 등 소수자에게 기회를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는데, 특히 넷플릭스가 적극적이었다. 넷플릭스는 외부 기관에 연구비를 내면서까지 자사 콘텐츠의 다양성을 점검하고 있다. 넷플릭스가 지난달 발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넷플릭스 미국 영화, TV시리즈에서 주인공(공동 주연 포함)의 47.5%가 비백인이었다. 2018년 28.4%에서 껑충 뛰었다.‘PC 경쟁’을 하듯 디즈니도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은 로맨스보다 자매애에 초점을 맞췄고, ‘모아나’에는 당차고 씩씩한 여주인공을 등장시켰다. 멕시코의 명절인 ‘망자의 날’을 배경으로 하는 ‘코코’는 섬세한 고증으로 히스패닉계 미국인과 이민자들에게 호평받기도 했다. 흑인 히어로를 등장시킨 ‘블랙 팬서’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인종차별적인 내용이 담긴 디즈니의 고전 작품들이 소환되기도 했다. 디즈니는 2021년 고전 애니메이션인 ‘피터팬(1953년)’과 ‘덤보(1941년)’에 ‘7금(7세 이하 어린이 관람 금지) 딱지’를 붙였다. 인종차별적인 내용이 일부 포함됐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다.디즈니가 ‘흑인 인어공주’를 택한 것이 이 같은 ‘흑역사’를 덮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NYT는 디즈니가 인어공주 캐스팅을 발표한 2019년 “디즈니는 리메이크로 ‘문제가 있는 유산’을 수정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과거를 다시 쓰는 것이 디즈니를 더 진보적으로 만들지 못한다”고 평했다. “과거 작품을 본 사람들이 가진 강렬한 이미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모아나, 코코처럼 새로운 작품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흑인 인어공주와 오징어 게임 사람들의 영화 관람이 영화관에서 OTT로 이동한 것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해외에서는 영화관 관객 수가 팬데믹(대유행)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OTT 때문이다. OTT 등장 이후 사람들의 콘텐츠 이용이 크게 달라졌다. 예전에는 비싼 돈을 내고 영화관을 찾아가 신중하게 볼 영화를 골랐다면, 지금은 보고 싶은 시간에 소파에 앉아 시청하고 싶은 만큼 콘텐츠를 본다. 몇 편을 보든 지급하는 돈은 똑같다. 월 구독료만 내면 된다. 생각해보니, 영화 관람이 TV 시청과 여러모로 비슷해졌다.문제는 고객들이 매달 꼬박꼬박 구독료를 내도록 묶어둬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려면 물량 공세와 제각각인 취향을 만족시킬 만큼의 다양성을 갖춰야 한다. ‘마블 영웅들’만으로 관객을 붙잡기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다. 통계를 보면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OTT 순위 집계 사이트인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미국 호주 등 영어권 국가의 인기 순위에서 북미 콘텐츠는 80~85%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콜롬비아에서는 이 비중이 절반밖에 안 된다. 한국과 일본에선 35%에 그쳤다. 기존 백인 중심의 할리우드 프로그램만으로 남미, 아시아 관객을 OTT에 묶어 두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최근 콘텐츠 기업들이 다양한 인종을 캐스팅하거나, 소수자를 기존보다 많이 등장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콘텐츠 다양성 자체가 하나의 전략이 됐다.‘오징어 게임’ 같은 비(非)영어권 프로그램이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 끈 것도 포인트다. 제작비를 적게 들이고도(블록버스터급 영화에 비해) 대박을 터뜨리는 사례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생각지도 못한 아시아 콘텐츠가.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OTT 등장으로) 업계에 과거보다 많은 문화가 생겨났고, 국적은 훨씬 덜 중요해졌다”면서 “한국 배우들이 출연하는 K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에서 가장 많이 본 프로그램에 오르고 나서야 다들 이를 깨달았다”고 전했다.기업들은 영화관 개봉과 OTT 공개 시점을 다양하게 조합해 보면서 성공 방정식을 열심히 찾고 있다.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들어가는 영화에서도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게 됐다. 블룸버그는 “트렌드 변화(PC 등 다양성 증가)가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면서 “일부 관객이 이를 불편하게 여겨 흥행을 저조하게 만든다고 해도 기업들은 OTT 등에서 수익을 만회할 여지가 있다”고 분석했다.밥 아이거 디즈니 최고경영자(CEO)는 “콘텐츠 다양성은 중요할 뿐만 아니라 회사의 핵심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 ‘PC’가 돈이 된다 영화나 드라마에 다양성을 반영하면 수익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도 있다. 온라인 미디어 기업인 웨베디아의 연구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15~24세 여성 영화 관람객은 200만 명 수준(1주일 기준)으로 같은 나이의 남성 관객(170만 명)보다 많았다. 미 블룸버그는 “할리우드는 남성 캐릭터가 지배하는 슈퍼히어로 영화를 대량 생산하지만, 젊은 여성이 성공의 ‘키’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흑인 관객의 영향력도 커지고 있다. 미국 영화협회에 따르면, 한 달에 한 번 이상 영화를 보러 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숫자가 2012년 이후 27% 늘었다. 같은 기간 백인 관객은 21% 감소했다. 맥킨지에 따르면, 흑인 배우가 많이 등장하거나 역할 비중이 클수록 더 많은 흑인 관람객이 영화관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개봉한 ‘블랙 팬서’의 속편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가 이를 증명했다. 흑인 영웅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블랙 팬서 시리즈는 개봉 전부터 흑인 사회에서 기대를 모았다. 영국 여론조사 회사 유고브의 조사에서 흑인 응답자의 약 4분의 3이 블랙팬서를 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백인은 절반 미만이었다.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4억3500만 달러(약 5800억 원)의 역대급 수익을 기록했다.넷플릭스가 PC 논란을 정면 돌파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넷플릭스는 2020년 말, 1800년대 영국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브리저튼’을 선보였는데, 흑인 귀족을 등장시켜 비판받았다. 그러자, 최근에는 아예 흑인 영국 왕비를 주인공으로 한 외전(샬럿 왕비: 브리저튼 외전)을 내놓았다. 이 작품은 글로벌 인기 순위 1위에 올랐다. 맥킨지는 2021년 보고서에서 “영화 업계는 흑인 배우가 출연하는 콘텐츠가 미국 밖에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면서 “흑인이 주연으로 나오는 ‘맨 인 블랙’ 시리즈의 수입 중 3분의 2가 해외에서 나왔다”고 평했다. 맥킨지는 콘텐츠 산업에서 인종 불평등을 해소하면 연 100억 달러(약 13조3700억 원)의 추가 이익을 거둘 수 있다고 분석했다. ● 디즈니의 네버엔딩 스토리디즈니는 다른 콘텐츠 기업보다 인구 통계에 관심이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디즈니가 영화만 판매하는 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디즈니의 비즈니스 모델은 신비월드 31화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실사 영화 인어공주는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과 그림책, 인형 등 장난감, 놀이공원, 리조트까지 다양한 비즈니스와 얽혀 홍보될 것이다. 캐스팅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영화 관련 상품이 벌써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최근 흑인 인어공주가 미국 최대 전자상거래 플랫폼 아마존에서 인형 부문에서 판매 1위를 기록했다. 아마존에 등록된 인어공주 인형은 14.99달러(약 2만 원)에 판매되고 있다. 눈썹 위 점까지 영화 속 할리 베일리와 똑 닮았다. 만약, 디즈니가 백인 인어공주를 택했다면, 영화가 개봉도 하기 전부터 인형이 이만큼 팔렸을까. 기대감이 덜할 수 있는 리메이크 작품을 몇 년 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한 것만으로도 성공한 마케팅 같다. 디즈니는 그동안 고전 만화를 영화화해 꽤 재미를 봤다. 디즈니는 9500만 달러(약 1270억 원)의 예산으로 신데렐라를 영화화했는데 5억3500만 달러(약 7140억 원)를 벌었다. 9억6300만 달러(약 1조2800억 원)의 이익을 거둔 영화 정글북의 예산은 1억7500만 달러(약 2300억 원)에 불과했다. 2017년 개봉한 영화 미녀와 야수의 예산은 3억 달러(약 4000억 원)로 “지나치게 높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12억 달러(약 1조6000억 원)나 벌어들였다. 이코노미스트는 “관객들이 이미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리메이크하는 것은 영화판에서 가장 수익성 좋은 혁신 중 하나”라며 “디즈니의 ‘네버 엔딩 스토리’”라고 평했다. 최근 미국에서 열린 인어공주 시사회에선 평론가들의 호평이 쏟아졌다. 과연, 흑인 인어공주는 개봉 전 실망한 관객들의 마음도 되돌릴 수 있을까. 결과가 궁금하다. 김성모기자 mo@donga.com}

    • 20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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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카콜라입니까, 펩시입니까?[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2등 같은 1등, ‘펩시’코카콜라, 펩시코 등 미국 콜라 회사들이 1분기 깜짝 실적을 내놨다. 코카콜라는 올해 1분기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 늘어난 109억8000만 달러(약 14조7200억 원)를 기록했다고 지난달 24일(현지 시간) 밝혔다. 시장 전망치(108억 달러)를 웃돌았다. 순이익도 31억1000만 달러(약 4조1700억 원)로 전년보다 12% 증가했다. 펩시코도 웃었다. 펩시코의 1분기 매출은 178억5000만 달러(약 23조9400억 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 이상 증가했다. 펩시코는 올해 매출 연간성장률 전망치도 기존 6%에서 8%로 올렸다.인플레이션에 따른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가격을 올린 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펩시코는 실적 발표에서 “1분기에 제품 판매량이 2% 감소했지만, 가격을 16% 올려 매출이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코카콜라는 가격을 비슷하게 올렸는데도 판매량이 3% 늘었다. 세계 최대 음료 판매 기업답다. 고물가 시기에는 기업들이 원자재나 인건비 부담 등을 이유로 제품 가격을 올린다. 고객에게 비용을 전가해 수익성을 개선하는 것이다. 생활필수품 회사나 애플처럼 가격결정력(상품값을 올려도 사고 싶은 마음이 크게 줄지 않는)이 있는 기업일수록 이를 잘 활용한다. 콜라 회사들도 비슷한 전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는 콜라를 사실상 생필품으로 분류한다. 피자, 햄버거에 콜라가 빠지기는 어려울 것 같긴 하다. 인정. 이번 신비월드에서는 창립 125주년을 맞은 펩시코를 소개한다. 1898년 사업을 시작한 펩시코는 콜라 시장에서 후발주자다. 코카콜라(1892년 출시)보다 늦게 출발해 ‘만년 2등’ 이미지가 강하다. 반면, 돈은 훨씬 더 잘 번다. (미국 주식 투자자들에게는 꽤 알려진 사실) 펩시코는 2000년대 초반부터 매출에서 코카콜라를 앞질렀다. 지난해 펩시코와 코카콜라는 각각 860억 달러(약 115조3000억 원), 430억 달러(약 57조7000억 원)의 매출을 거뒀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펩시가 코카콜라를 앞선 것일까. 그럴 리가. 콜라 시장에서 펩시코는 여전히 코카콜라 뒤를 쫓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미국 탄산음료 시장에서 코카콜라의 점유율(2021년 기준)은 46.3%에 달한다. 펩시(25.6%)의 두 배에 가깝다. 펩시의 점유율은 2000년대 중반 30% 수준에서 계속 떨어졌다.다수의 소비자가 코카콜라를 더 맛있다고 생각한다. 요식업 전문 매체인 매시드가 2021년 전 세계 3만6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64%가 코카콜라를 더 좋아한다고 밝혔다. 36%만 펩시가 낫다고 답했다. “코카콜라 맛있다”는 아이돌 뉴진스의 가사가 옳다.● 소련 무장해제 시킨 펩시 펩시코가 실적에서 코카콜라를 누른 비결은 사업 포트폴리오에 있다. 도리토스, 치토스, 프리토스, 레이즈, 러플즈, 토스키토, 썬칩 등 한국 소비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과자’ 브랜드의 상당수가 펩시코가 보유한 스낵회사 프리토-레이의 제품들이다. 현재 펩시코의 연 매출에서 스낵 등 식품 비중은 50%를 넘어선다. 음료 부문도 구성이 다양하다. 탄산음료로 펩시와 세븐업, 시에라미스트, 마운틴듀, 스태리 등이 있다. 게토레이(스포츠음료), 아쿠아피나(생수), 소다스트림(홈메이드 탄산수) 립톤(차음료) 등도 전부 펩시코 제품이다. 미국의 스타벅스에서 판매 중인 캔음료 역시 펩시코가 납품하고 있다.반면, 코카콜라는 음료에 집중했다. 코카콜라와 스프라이트, 비타민워터, 미닛메이드, 몬스터에너지드링크, 바디아머 등을 보유 중이다.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뻗어 있는 음료 유통 네트워크가 코카콜라의 강점 중 하나다. (바디아머는 NBA 선수들이 많이 찾는 스포츠음료로 코카콜라가 2021년에 인수했다. 방탄복 회사를 산 줄 알았다) 도널드 켄달 전 최고경영자(CEO)가 펩시코 사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세일즈맨’ 출신인 켄달은 1963년 42세의 나이로 펩시코 수장 자리에 올랐다. 그는 사람들이 음료를 마실 때 스낵을 함께 먹는다는 점을 눈여겨보고, 1965년 미국 국민 감자칩 브랜드 프리토-레이의 인수를 주도했다. 인수합병(M&A) 당시 두 회사의 회장은 “천국에서 맺은 결혼”이라고 했다. 콜라와 감자칩의 ‘단짠단짠’이 완성되는 순간을 적절히 표현한 듯하다. 현재 미국의 스낵 인기 순위에서 톱 10 중 7개가 프리토-레이 제품이다. 켄달은 ‘마케팅 귀재’로 꼽힌다. 그는 1959년 친구인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에게 부탁해 소련 지도자인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시초프) 공산당 총리·서기장이 한 행사에서 펩시를 마시도록 판을 짰다. 각국 언론에서 흐루쇼프 총리가 펩시를 맛있게 마시는 장면이 보도됐고, 회사 브랜드 가치는 급상승했다. 냉전 시기에 놀랄 만한 일이었다. 펩시코는 1974년 소련에서 콜라를 팔기 시작했는데, 당시 소련은 미국과 냉전 중이라 물물교환만 가능했다. 펩시코는 콜라 원액을 주고 토마토 농축액이나 보드카 등을 받았다. 이후 펩시 수요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소련은 공장을 늘리는 대가로 17척의 잠수함과 3척의 군함을 줬다. 켄달은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에게 “우리가 당신들보다 더 빠르게 소련을 무장해제 시키고 있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펩시코의 건축가들펩시코는 1983년 마이클 잭슨과 500만 달러(약 67억 원)에 모델 계약을 체결하면서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코카콜라가 잭슨에게 제안한 금액의 5배 수준이었다. 켄달의 ‘펩시 첼린지’는 지금도 곧잘 회자되는 마케팅 사례다. 펩시코는 고객들에게 펩시와 코카콜라를 블라인드 테스트했다. 그 결과, 펩시의 맛이 뛰어나다고 응답한 사람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펩시코는 이를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펩시 세대’라는 용어를 만들어 코카콜라를 구세대 음료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켄달은 이러한 마케팅으로 한때 펩시의 시장점유율을 코카콜라와 비슷한 30%대까지 끌어올렸다. 이전에 펩시의 점유율은 코카콜라 ‘반의반’ 수준이었다. 그가 CEO로 재직한 23년 동안 펩시코의 매출은 40배 성장했다. 펩시코는 2020년 켄달이 세상을 떠날 때 “그는 펩시코의 건축가였다”라면서 경의를 표했다.켄달이 프리토-레이를 인수하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펩시코 사업을 다각화한 것은 인드라 누이 전 CEO였다. 누이는 펩시코 재무책임자로 있다가 2006년 CEO에 올랐다. 그는 펩시코를 건강한 이미지의 종합 음료·식품 회사로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펩시코는 1990년 후반부터 여러 식품 기업을 인수하고 매각하는 작업을 반복했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누이였다. 누이는 피자헛, KFC 등 회사의 패스트푸드 부분을 정리하고, 주스업체 트로피카나와 스포츠음료 회사 퀘이커오츠 등을 인수했다. 식품에서는 스낵업체 토스티토스와 베어푸드(야채·과일칩 브랜드)를 사들였다. 퀘이커오츠는 스포츠음료 ‘게토레이’를 소유한 회사다. 북미에서는 오트밀 제품을 많이 판매해 건강식품 기업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퀘이커오츠는 원래 코카콜라에 인수를 제안했는데, 워런 버핏이 이를 반대했다. 그 사이, 당시 펩시코 부사장이었던 누이가 코카콜라보다 20억 달러 낮은 138억 달러(약 18조4400억 원)에 회사를 인수했다. 이 공로로 누이는 CEO로 승진했고, 버핏은 코카콜라 이사회에서 사퇴했다. 현재 미 스포츠음료 시장에서 게토레이의 점유율은 60% 이상으로 압도적이다. 펩시코는 게토레이로만 매년 6조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참고로 93세의 버핏은 하루 5캔 마실 정도로 코카콜라를 사랑하지만, 과거 48년 동안 펩시만 마셨다. 버핏의 아들이 지은 그의 별명은 ‘펩시 워런’이었다. (체리 맛 코카콜라에 빠져서 갈아탔다)● 거품 빠진 콜라들 누이가 수장을 맡은 뒤, 펩시코는 건강식품을 만드는 회사로 영역을 더 넓혔다. 펩시코는 2008년 브라질 코코넛워터 업체 아마코코를 인수하고, 미국 허머스(병아리콩을 으깨 만든 중동 음식) 제조사 사브라의 지분 50%를 매입했다. 다음 해에는 중동 최대 유제품 업체인 알마라이와 합작사를 설립하기도 했다.그는 고객들의 건강에 진심이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누이는 임원을 아이슬란드에 보내 해초를, 인도에 보내 고대 전통 의학으로 알려진 아유르베다를, 아마존 계곡과 아프리카 정글로 보내 고대 곡물과 식물을 연구시켰다. 건강식품의 원료를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 누이는 펩시코 제품을 3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감자칩과 탄산음료처럼 맛에 중점을 둔 상품과 오트밀 등 건강식품, 마지막으로 다이어트 식품이다. 그는 2010년 “펩시코 매출에서 영양가 높은 제품의 비중을 10년 안에 현재의 3배로 늘리겠다”고 밝혔다.펩시코가 사업을 확장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설탕’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 인식과 규제 때문이다. 건강에 관한 관심이 커지면서 미국에서 탄산음료 소비는 꾸준히 줄었다. 미국의 1인당 탄산음료 소비량은 1990년대 후반 200L로 정점을 찍었다. 2016년에는 미국에서 생수가 처음으로 탄산음료 판매량을 넘어섰다. 영국, 프랑스 등에서는 과당류에 별도에 세금(콜라세)을 부과하기 시작했는데, 사실상 탄산음료를 겨냥한 정책이었다. 누이의 빠른 전략 변경으로 펩시코는 정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펩시코는 2005년 12월 시가총액으로 코카콜라를 제쳤다. 112년 만이었다. 2018년 포천 500대 기업에서 펩시코는 코카콜라(87위) 보다 높은 45위에 올랐다. 누이는 12년간 펩시코를 경영하면서 연평균 매출을 5% 이상씩 성장시켰다. 대단한 업적이다. 그는 펩시를 즐기는 것 같지는 않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누이는 얼음처럼 차가운 펩시의 맛을 좋아한다고 열정적으로 말하지만, 일주일에 (펩시를) 3번만 마신다”고 전했다. 매일 아침 6시 45분에 일어나 코카콜라부터 찾는 버핏과는 다른 모습이다.● 펩시코의 새로운 건강 식단2018년 누이 다음으로 취임한 라몬 라구아르타 CEO는 전임자와 다소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라구아르타는 최근 콜라와 감자칩 판매에 조금 더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탄산음료와 스낵 등 주력 제품을 개선해 판매를 늘리겠다는 전략이다. WSJ은 지난달 ‘펩시의 새로운 건강 식단: 더 많은 감자칩과 탄산음료’라는 글에서 “수년 동안 펩시코는 정크푸드의 뿌리에서 벗어나 허머스, 콤부차, 야채칩, 견과류 등으로 사업을 전환하려고 노력했다. 최근에는 콜라, 감자칩을 밀어붙이고 있다”고 전했다. 펩시코는 재생 농업 방식으로 재배한 감자를 사용하고, 친환경 포장을 한 제품을 전기 트럭으로 배송하겠다고 밝혔다. (펩시코는 최근 테슬라의 전기트럭 ‘세미’의 첫 고객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가이드라인에 맞출 수 있도록 제품에 포함된 설탕, 소금, 포화지방을 낮출 것이라고 강조했다. 라구아르타는 “사람들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콜라나 감자칩)에 집중하는 것은 사업에만 좋은 것이 아니다. 공중보건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사람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탄산음료와 과자를 찾는다면, 몸에 좋은 제품을 제안하는 것보다 차라리 콜라와 감자칩을 건강하게(?) 만드는 편이 인류의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현재 회사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맛’이다. 제품에 들어가는 소금과 설탕을 기존보다 줄이면서 현재의 맛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미 텍사스주 플라노에 있는 프리토-레이의 스낵본부가 여러 실험을 진행 중이다. 과자에 새로운 소금 결정, 염화칼륨을 넣거나 허브 및 향신료의 조합을 바꿔보고 있다. 회사의 식물교배연구소에서 개발한 감자 품종으로 포테이토칩을 만들어보기도 한다. 맛은 외부 전문가들이 감별한다. 스낵본부는 전문가 10여 명을 고용해 일주일에 3번 새롭게 개발한 감자칩과 쿠키, 오트밀 등을 맛보게 하고 있다. 맛과 식감 등에서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이들의 업무. 전문가들은 기름기 정도, 씹을 때의 식감, 제품을 삼킨 뒤 느껴지는 뒷맛 등의 항목을 0에서 15로 평가한다. WSJ은 “음식을 씹으면서 ‘음’, ‘우웩’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도록 훈련된 테스터들은 감자칩의 맛을 27가지 속성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전했다. 시간당 19~20달러를 받고, 스낵까지 맛보다니 괜찮은 직업 같다.라구아르타는 회사의 장기적인 성장을 위해선 핵심 브랜드를 개선하고 시장 점유율을 높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듯하다.전임 CEO가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장해 매출을 끌어올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펩시코의 콜라, 감자칩 같은 주요 상품들을 등한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이 시기에 펩시코 탄산음료의 점유율이 20% 초반까지 하락했었다. WSJ은 2018년 “펩시코가 지난해(2017년) 생수, 레몬 소다 같은 새롭고 건강한 음료에 집중해 펩시, 마운틴듀 등 핵심 브랜드 판매에 타격을 입혔다”고 전했다.투자자들의 공격도 있었다. 당시 펩시코 지분을 보유한 투자자 넬슨 펠츠는 이러한 약점을 파고들어 경영에 간섭했고, 누이는 “비용 절감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탄산음료 마케팅을 강화하겠다”고 밝히는 등 진땀을 뺐다. 펩시코가 최근에 실적이 좋기는 했지만, 경제 여건에 따른 일시적인 수혜라는 분석도 있다. 라구아르타가 CEO를 맡은 직후에는 펩시코 매출이 감소세였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이 해소되고 경제가 정상화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의미다. ● M과 Z의 차이주요 소비층의 변화도 라구아르타의 사업 전략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Z세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제품을 맛있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알릭스파트너스의 조사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의 66%와 밀레니얼 세대의 53%가 스낵을 구매할 때 ‘맛’을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시장조사기관 패키지팩트의 노먼 데샹 연구원은 “이들은 모여서 감자칩, 프레즐을 먹지 그래놀라바를 먹지 않는다”고 했다. Z세대는 앞선 세대와 다르게 맛보다는 체중 유지 같은 ‘자기관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국제식량정보협의회(IFIC)가 지난해 미국인 1005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Z세대 중 27%가 식습관에서 열량 계산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비슷한 비중(26%)이 자연에 가까운 식재료를 선호(클린 이팅)했다. 음식을 대체로 가리지 않고 포만감이 느껴질 때까지 먹는 ‘마인드풀 이팅’은 19%에 그쳤다. 체중 관리 때문이다. 조사에서 Z세대의 4명 중 3명이 “최근 1년간 다이어트에 준하는 식습관을 따랐다”고 했다. 같은 응답을 한 X세대는 51%, 베이비붐 세대는 29%였다. IFIC는 “Z세대는 상대적으로 외모 개선과 건강관리에 관심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탄산음료와 스낵의 성분을 건강하게(사실은 덜 나쁘게) 바꾸려고 노력한다면, 관련 기업에는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 Z세대의 77%가 “적어도 하루에 한 번 간식을 먹는다”고 답했고, 하루 두 번 간식을 먹는 비율도 34%에 달했다. 라구아르타가 콜라와 감자칩을 건강하게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은 주요 소비층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Z세대를 사로잡기 위한 전략적 판단일 수 있다. 고객들에게 ‘펩시코의 제품은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역할도 할 것이다. 펩시코가 최근 펩시의 로고를 바꾸는 리브랜딩 작업에 돌입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 로고 심장에 다시 새긴 ‘펩시’ 펩시코는 1950년대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둥근 문양 안에 ‘PEPSI’ 글자를 넣은 일체형 펩시 로고를 선보였다. 그러다가 2008년 그림과 글자를 분리했다. 나이키 ‘스우시’나 스타벅스의 ‘사이렌’처럼 글자 없이 문양만으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려 했다. 그러다가 올해 3월 고전적인 로고 방식을 다시 끌어왔다. 이번 로고는 1987년부터 1997년까지 사용한 로고와 사실상 모양은 똑같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펩시 글자와 로고 주변의 배경 색을 검정으로 교체한 부분이다. 탄산음료 회사들은 무설탕 탄산음료의 포장에 검은색을 활용한다. ‘코카콜라 제로’, ‘칠성사이다 제로’ 등을 보면 글자든 배경이든 어딘가에 이 색이 들어가 있다. ‘설탕’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펩시가 아예 브랜드 로고에 검은색을 넣은 것이다.펩시코 마케팅 책임자인 토드 카플란은 “많은 사람이 제품이나 로고에 검은색이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 못한다. 하지만, 탄산음료에서 ‘제로’ 하면 ‘다이어트’를 떠올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일으킬 것”이라고 설명했다.많은 기업이 이 같은 무의식 마케팅을 활용한다. 아마존(amazon) 로고를 보면 ‘a’와 ‘z’ 사이에 화살표가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소비자들에게 ‘우리는 a부터 z까지 모든 물건을 다 판매한다’는 인식을 심으려는 의도가 담겼다. 펩시코의 최근 움직임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도 있다. 탄산음료, 스낵에서 설탕을 줄이겠다고 선언하고, 브랜드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 사실은 ‘여론 전환용’이라는 것이다. WHO에 따르면 현재 최소 85개국에서 ‘콜라세’를 부과하고 있는데, 최근 이 세금을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국가에서 나오고 있다. 지난해 갤럽 조사에서는 미국, 인도, 요르단, 탄자니아, 콜롬비아 성인의 절반 이상(59%)이 콜라세 인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블룸버그는 3월 “펩시의 새롭고 현대적인 모습은 단순히 브랜드를 차별화하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탄산음료와 패스트푸드에 대한 부정적인 관심을 분산시키려는 꼼수이기도 하다”라고 꼬집었다. 김성모기자 mo@donga.com}

    • 20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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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고 통보를 이메일로 하다니ㅠㅠ”[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오징어게임 같은 재택근무 견고했던 미국 노동시장이 흔들리고 있다. 지난해 말 미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시작된 정리 해고가 최근 소매·제조 업계로 확산하는 분위기다.세계 최대 패스트푸드 기업인 맥도날드는 이달 3~5일(현지 시간) 미국 내 사무실을 일시 폐쇄하고 직원들에게 일시적 재택근무를 지시했다. 비대면으로 해고 통보하기 위해서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정리해고는 영업, 재무, 마케팅 등 부서 전반에 걸쳐 진행됐다. 회사에서 20년 이상 일한 보험 부서의 부사장급 임원도 해고 통보를 받았다.맥도날드는 일부 직원의 급여를 삭감하고 보너스 등도 변경했다. 올해 2월 기준으로 맥도날드 전체 직원 수는 약 15만 명이다.맥도날드의 구조조정이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크리스 켐진스키 맥도날드 최고경영자(CEO)는 메뉴 간소화, 인력 감축 등의 구조조정 계획을 일찌감치 예고했다. 그는 올해 1월 “일이 중복되고 혁신이 늦어졌다. 일부 작업이 이전되거나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미국에서는 지난해부터 IT 회사들을 중심으로 대량 해고가 이어지고 있다. 맥도날드의 정리해고 대상은 수백 명가량으로 각각 1만 명 이상을 내보낸 메타, 구글에 비해 놀랄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맥도날드의 구조조정이 주목받을 ‘뉴스’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맥도날드의 정리해고는 꽤 주목받았다. 해고 통보 방식 때문이다. 맥도날드 직원들은 내부 규정상 재택근무를 최대 주 2회 할 수 있다. 맥도날드는 비대면 정리해고를 위해 직원들에게 이보다 하루 더 많은 3일간의 재택근무를 명령하고, 이 기간에 본사에서 예정된 외부인들과의 회의도 취소하라고 했다. 그러자, 팬데믹(대유행)도 끝났는데, 굳이 정리해고를 비대면으로 단행했어야 했느냐는 지적이 나왔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8일 “맥도날드가 직원들을 해고하기 위해 사무실까지 닫았다. 좋은 생각이었을까”라고 물음표를 던졌다.직원들은 집에서 머무는 동안 이메일과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지 않았을까. 굉장히 긴장되는 재택근무였을 듯하다. 정리해고에서 살아남았다고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가까운 동료가 더 이상 안 보일지 모른다. ‘오징어게임(넷플릭스 시리즈)’이 따로 없다.● “신종 피싱인 줄 알았어요”2020년 4월 WSJ은 “여행 관련 스타트업인 트립액션즈가 처음으로 다수의 직원에게 비대면으로 해고를 통보했다”고 전했다. 트립액션즈는 2020년 3월 줌(화상회의 시스템)을 통해 전 직원의 25%가량인 300명의 직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수년 동안 회사에 헌신한 직원에게 이메일 한 통으로 해고 소식을 보내는 것이 잔인해 보일 수 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코로나19가 한창 확산할 때는 이메일이나 전화로 소식을 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병원에 있던 가족도 못 만나는 시기였다. 아리엘 코헨 트립액션즈 CEO는 해고 방식에 대해 논란이 일자 “화상회의로 직원을 해고하는 것이 끔찍할 수 있다”면서도 “다른 선택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사실, 비대면 대량 해고는 한국에서 훨씬 먼저 있었다. 외환은행을 인수한 미 사모펀드 론스타는 2004년 2월 27일 오전 3시에 외환카드 해고 대상자들에게 “명퇴를 신청하지 않으면 정리해고하겠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냈었다)미국 직장인들은 경제활동이 정상화되고, 최소 주 1~2회 사무실로 출근하는 현 상황에서도 기업들이 ‘비대면 해고 통보’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구글의 소프트웨어 개발자 제러미 조슬린은 올 초 본인이 회사에서 잘렸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받았다. 그는 새벽 5시 30분에 개인 메일함에서 이를 확인했다. 처음에는 ‘피싱(사기)’을 떠올렸다. 경기침체로 IT 업계가 인력 감축에 돌입한 것을 악용한 것이라고 판단했다.메일은 “해고자 전용 웹사이트로 접속해 아이디를 설정하라”고 안내했다. 조슬린은 불안한 마음에 회사 이메일을 확인하려 했다. 접속이 되지 않았다. 그는 회사에서 20년을 보낸 베테랑이었지만, 회사와 헤어지는 순간만큼은 지극히 평범했다. 다른 1만1119명의 해고자와 똑같은 이메일 통보를 받았다. 조슬린은 “이메일 내용에 모욕감을 느꼈다”고 전했다.복스미디어(VOX)에서 근무하던 케렌사 카데나스도 ‘비대면 해고’의 희생자 중 한 명이다. 1월 재택근무 중이던 카데나스는 슬랙(업무용 메신저)을 열었다가 욕설로 가득 찬 메시지를 받았다. 방금 회사서 잘린 동료의 연락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이메일을 확인했다. 곧바로 메신저를 켜고 동료에게 답장을 적기 시작했다. 키보드를 꾹꾹 눌러 욕설을 채워나갔다. 그 역시 이메일로 해고를 통보받았다. 뉴욕타임스는 1월 “정리해고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경험 중 하나로 연구에 따르면 이혼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면서 “원격으로 정리해고를 하다 보면 회사가 실수할 수 있고, 조직을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지난해 11월 트위터를 인수한 직후 성급하게 대량 정리해고에 나섰다가 구설에 올랐다. 트위터는 한밤중에 직원들에게 이메일로 해고 사실을 통보했는데, 일부 필수인력까지 포함된 것을 깨닫고 뒤늦게 복귀를 간청했다. ● 페이스타임(영상통화) vs. 페이스타임(대면)비대면 해고를 ‘재택근무’처럼 새로운 업무 환경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재택근무자들이 혼재된 현 상황에서 대량 해고를 전부 대면으로 하기는 어렵다는 주장이다. “비대면 해고가 덜 창피해서 좋다”는 일부 직원도 있었다.소비재 회사에 다니던 신시아 황은 2월 사무실 출근과 재택근무를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화상통화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다. 당시, 사무실에 있던 다른 해고자들은 대면으로 같은 이야기를 듣고 출입증을 반납했다.황은 “사무실에서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짐을 싸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안했다”면서 “해고당하려고 사무실로 나가는 건 좀 이상하지 않으냐”고 했다. ‘이메일 정리해고’가 조직의 안정성을 빠르게 되찾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일부 인사 담당자의 의견도 있다. 힘든 소식을 단체 이메일로 한 번에 전달하면, 비(非)해고자들은 두려움을 금방 떨칠 수 있다. 해고자와 비해고자를 빠르게 나누는 편이 낫다는 설명이다.조직 혁신 및 조직 행동 분야의 권위자인 로버트 서튼 미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책 ‘또라이 제로 조직’ 저자)는 “3년 전에는 (비대면 해고가) 특이한 처벌 같다고 말했겠지만, 팬데믹 이후에는 업무나 조직 문화가 극적으로 변해서 혼란스럽다”고 했다. 미국의 직장인들은 ‘카톡 이별’ 같은 비대면 해고보다, 상사의 얼굴(또는 인사팀)을 마주한 상태로 해고 소식을 듣고 싶다고 밝혔다. 여론조사기관 서베이몽키가 1월 미 직장인 98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67%가 대면 해고 통보를 선호했다. 11%는 이메일로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답했고, 7%는 화상회의를 택했다. 서베이몽키는 “일부 비대면 해고를 원하는 직장인도 있었지만, 다수는 대면으로 통보받기를 희망했다. 심지어, 재택근무자도 대면 해고를 선호했다”고 했다.올해 초 1만8000명을 자른 아마존은 이메일로 정리해고를 진행했지만, 해고자들이 상사나 인사 담당자와 직접 대화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회사와 직원의 이별 공식전문가들은 해고 통보 방법보다 전달 내용에 신경 쓰라고 조언한다. 리더십 전문가인 에리카 다완은 “작별 이메일에 각 직원이 회사에서 공헌했던 일들과 회사와 네트워크를 유지할 수 있는 연락처 등을 담으라”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전했다. 직원에게 회사의 마지막 인상을 잘 남기라는 설명이다. 사실, 어떻게 헤어지든 이별은 아프다. 차라리 해고자를 신중히 선택하는데 집중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해고자 선정에는 예나 지금이나 ‘성과’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시대를 이끄는 IT 기업도 해고자를 선정할 때는 구식을 따른다.NYT는 “메타와 아마존은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스택랭킹’을 활용해 저성과자들을 가장 먼저 해고 대상자로 찍었다”고 전했다. 스택랭킹은 직원들의 성과를 점수나 등급으로 환산해 평가하는 GE의 인사평가 방식이다. 미국기업 역사상 최고의 CEO로 꼽히는 잭 웰치 전 GE CEO가 1980년대에 이를 대중화시켰다. 물론, 과거처럼 성과나 연공 서열만 보는 것은 아니다. WSJ은 “과거에는 (해고자를 고를 때) 성과나 근속 기간이 주요 고려 대상이었는데, 최근에는 보유 기술이나 직무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난달 전했다. 일부 해고자가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도 있다. “내가 살아남은 동료보다 못한 게 뭐가 있느냐”고 항의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인사 컨설팅사인 PGHR컨설팅의 필리스 하트만 대표는 “엄격한 기준 없이 다수를 해고하면, 불만을 품은 일부 직원이 법적으로 대응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고 했다. ‘소송의 나라’ 미국답다. 메타나 아마존이 해고자를 선별하는데 1980년대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도 이러한 분쟁을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차라리 법적 대응이 나을 수 있다. 일부 회사들은 퇴사자의 ‘복수’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가장 큰 피해는 기밀 등 ‘데이터 유출’이다.글로벌 보안업체 사이버헤이븐은 직원들이 퇴사 직전에 데이터를 가져갈 확률이 평소보다 69% 더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지난해 9월 보고서에서 밝혔다. 특히, 해고되기 전날 데이터 전송이 23%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해고 당일에는 109% 증가했다. 이들이 가져간 데이터 중 절반 가까이(45%)가 민감한 고객 데이터였다. 글로벌 사이버 보안기업 시만텍의 보안 연구원 딕 오브라이언은 “해고자의 데이터 유출이 회사가 보안에 신경 쓰기 어려운 상황(구조조정을 해야 할 만큼 재무적으로 취약한 상태)에서 발생한다는 점이 문제”라고 분석했다. ● 부자 회사들의 정리해고최근 미국에서 ‘비대면 해고’가 주목받은 이유는 그만큼 잘린 사람이 많아서다. 지난해 말 미국 IT 관련 업계는 15만 명 이상을 해고했는데, 올해 초에는 더 많은 책상이 비워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1만1000명을 자른 메타는 최근 1만 명을 더 해고하겠다고 밝혔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는 2023년을 ‘효율성의 해’라고 지칭했다. 구글의 알파벳(약 1만2000명 해고)과 아마존(2만7000명), 델(6600명), 디즈니(7000명) 등 다수의 기업이 구조조정에 한창이다. 실리콘밸리의 구조조정 칼바람을 두고 ‘화이트칼라 경기 침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통상 경기가 안 좋아지면 생산직 근로자인 ‘블루칼라’가 타격을 입는 게 일반적인데, 반대의 상황이 나타난 것. 최근 미국 경매 사이트에는 책상, 소파, 커피머신 등 트위터 본사에서 쓰던 물품 630개가 나와 주목받기도 했다. 트위터를 상징하는 ‘파랑새 조형물’도 포함됐다.사람이 잘리는 판국에 사무실에 ‘안마의자’가 남아 있을 리 없다. 메타는 최근 직원들에게 제공하던 무료 세탁 및 드라이클리닝 서비스를 중단했다. 마켓워치에 따르면 구글은 간식으로 채워진 휴식 공간을 일부 폐쇄했다. 경영진은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환경 핑계를 대다니.그동안 구글의 ‘특전’이 좀 과하긴 했다. 미 경제 매체 패스트컴퍼니가 2019년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구글은 전 세계 사무실에 말린 해초, 칠면조 육포, 콤부차 등으로 채워진 1300개의 휴식 공간(마이크로 키친)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IT 회사들은 왜 이렇게 직원을 많이 자른 것일까. 향후 경기에 대한 우려와 이익 감소의 영향도 있지만, 기업들 형편이 당장 어려워서는 아니다. (코로나19 확산 기간에 많은 돈이 풀리면서 IT 기업들이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메타의 소프트웨어 채용 담당자였던 에린 썸너는 구직자들에게 회사의 빠른 성장을 자랑하곤 했다. 업계에서 가장 빠르게 회사의 가치가 1조 달러(약 1300조 원)에 도달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해 직원들 사이에서 정리해고 소문이 돌았을 때 “회사가 은행에 저금해 놓은 현금이 400억 달러(약 53조 원)가 넘는다며 별일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막상 썸너가 해고자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그는 “무엇도 보장할 수 없다. 난 세계에서 (재무적으로) 가장 안전한 회사에서 해고됐다”고 한탄했다. ● ‘포켓몬 카드’ 모으기 팬데믹 동안 필요 이상으로 사람을 많이 뽑은 것이 문제였다. 2010년 이후 IT 업계는 매년 10만 명씩을 채용했다. 지난해에는 무려 26만 명이나 뽑았다. 미 테크 분야 인력 컨설팅업체인 컴프티아는 “지난해 IT 업계에 채용된 인원은 2000년 이후 연 기준으로 가장 많았다”고 평했다. 많이 뽑고 많이 자른 셈이다.메타는 최근 3년 동안 직원 수가 2배로 늘었고, 주식 거래 플랫폼 로빈후드는 2020년과 2021년에 직원 수를 6배로 확대했다. 디자인 소프트웨어 회사 캔바의 애이미 슐츠 인사팀장은 “2021년 구인·구직 플랫폼 링크드인에서 개발자 채용 공고(34만2586명)보다 IT 회사들의 인사팀 채용 공고(36만4970개)가 더 많았다”고 했다. 기업들이 인사 담당자를 앞다퉈 늘릴 만큼 채용 열기가 뜨거웠다. NYT는 이에 대해 “IT 회사들이 몇 년 동안 정말 흥청망청 사람을 뽑았다”고 전했다. 채용 담당자들을 지나치게 많이 뽑아서 관리가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 지난해까지 메타에서 채용 담당자로 일한 메를린 마차도는 7일 WSJ에 “회사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정말 아무것도 안 했다”고 강조했다. 마차도만 ‘월급루팡’이었던 것은 아니다. 소셜미디어에는 일하지 않고 월급을 받고 있다는 인사팀 직원들의 인증이 이어졌다. 일부는 이 게시물 때문에 회사에서 해고당하기도 했다.페이팔의 임원이었던 키이스 라보이스는 당시 대형 IT 회사들의 고용 경쟁을 “일종의 ‘허영심 지표’”라고 비판했다. 그는 “IT 기업이 더 잘 나간다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사람을 많이 뽑았다. 다른 회사에 인재를 뺏기지 않으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메타에서 일했던 한 직원은 “그들은(IT 기업들은) 마치 우리를 ‘포켓몬 카드’처럼 비축하려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 신기루 같은 채용 공고 그래도 지난해까지는 재취업이 어렵지 않아 고용 시장 분위기가 어둡지 않았다. 실제로, 몇 개월 치 월급을 받고 재취업하려고 회사를 그만두는 직원도 있었다.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경기침체 가능성이 커지면서 미국의 노동시장이 빠르게 식었다. 숫자만 봐서는 현재의 분위기를 알기 어렵다. 미국의 IT 개발자 실업률은 2.2%로 여전히 낮다. 해고된 기술자들이 다시 어딘가로 유입되고 있다는 의미다. 좋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WSJ은 “IT 개발자들이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이나 비(非)기술 기업의 개발직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9일 전했다. 그동안 구글, 메타와의 채용 경쟁에서 밀린 유통, 제조 기업들이 개발자들을 뒤늦게 뽑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앞으로는 눈높이를 낮춰도 재취업이 힘들 수 있다. IT, 금융사들뿐만 아니라, 소매 및 서비스 기업들도 구조조정을 확대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맥도날드가 대표적이다. 물류기업 페덱스도 최근 글로벌 관리 직원의 10% 이상을 해고했다. 미국에서만 1만2000명을 잘랐다. 완구업체 하스브로 역시 전 직원(글로벌)의 15%를 자를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 해고된 직원들이 급변한 분위기를 이미 체감하고 있을지 모른다.미 텍사스주에 사는 브룩 윌레몬은 경영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채용 공고를 보고 500곳에 지원했다. 그런데,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했다. 윌레몬은 “신기루처럼 느껴졌다”고 표현했다. 기업들이 채용 공고는 유지하고, 실제로 뽑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광고비를 내고서라도 채용 공고를 내리지 않는 이유가 있다. ‘회사가 성장하고 있다(경기가 어려워도 우리는 채용 중)’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채용 공고로 이력서들을 추려놓으면, 내부 직원이 갑작스럽게 그만뒀을 때 빠른 채용도 가능하다. 여러모로 ‘취준생’만 속이 탄다. ● 재택근무 대신 인도에서 김 대리 뽑기미국 노동시장의 변화에 ‘경기’ 이외의 복병도 있다. ‘일자리 아웃소싱’이다. 급격한 임금 상승이 부담된 일부 미 기업들이 인도 등 나라 밖에서 채용을 늘리고 있다. 하청기업을 둔다는 의미가 아니다. 글로벌 기업도 아닌데 해외에서 사람을 뽑아 일을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해외 채용 플랫폼 딜은 “지난해 기업들의 자사 서비스 이용(해외 채용)이 평년보다 2배 이상으로 늘었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기업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된 데에는 IT회사 직원들이 그토록 선호하는 ‘재택근무’가 영향을 미쳤다. 기업들이 재택근무와 해외 채용에서 큰 차이가 없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미국인사관리협회의 한 직원은 지난해 버지니아주 사무실 대신,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근무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협회는 원격근무를 허용하는 대신, 인도에 있는 사람을 뽑았다. 인도 직원의 원격근무로 인건비의 40%를 절약했다. 지난해 8월 미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의 조사에서 미 기업 임원들의 7.3%가 “원격근무 때문에 해외 채용을 늘리게 됐다”고 답했다. 해외로 업무를 이전하는 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수의 기업이 임금이 낮은 곳에 제조나 일반 사무를 맡겨 비용을 아꼈다. 인도, 중국에서 콜센터를 운영하는 미국 기업도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 같은 고급 일자리를 해외로 옮기기 시작했다는 것이 달라진 점이다. 미 텍사스주 오스틴에 본사를 두고 있는 금융사 큐투(Q2)는 지난해 직원 90명을 멕시코에서 채용했다. 멕시코 직원들은 집에서 제품 설계와 엔지니어링, 프로젝트 관리 등의 업무를 하고 있다. 회사는 “전체 직원의 20%가 현재 해외에 있다. 주로 인도와 멕시코에 있는데, 해외 직원을 더 늘릴 예정”이라고 밝혔다.전문가들은 큐투처럼 미국에서 사무직의 해외 이전이 점차 확대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니콜라스 블룸 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미국 IT 개발, 인적자원 일자리의 10~20%가 10년 안에 해외로 이전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재택근무 하고 싶다는 말이 쏙 들어갈 만한 소식이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 2023-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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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중 싸움 한 가운데 ‘OO’이 있다[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중요한 소통 창구에서 공공의 적으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2주가 지난 지난해 3월 10일(현지 시간). 미국 백악관이 동영상 공유 플랫폼 ‘틱톡’의 유명 크리에이터(제작자) 30여 명을 화상 회의에 초대했다. 전쟁 상황과 미국의 전략 목표 등을 대중에게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회의에는 젠 사키 당시 백악관 대변인과 국가안보회의(NSC) 관계자들도 있었다. 백악관 관계자는 미 뉴욕타임스(NYT)에 “많은 국민이 ‘이 플랫폼(틱톡)’에서 최신 정보를 얻고 있다”며 초대 배경을 설명했다. 백악관은 2021년에도 틱톡 인플루언서들을 불러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장려하기 위한 행사를 진행했었다. 미국에서 대국민 소통창구 역할까지 하던 틱톡이 최근 ‘공공의 적’이 됐다.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라서다. 미 정치권을 중심으로 중국 정부가 틱톡 이용자의 정보에 접근하거나 여론을 조작할 수 있다며 틱톡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나섰다. 틱톡 모회사 바이트댄스의 중국 창업자들에게 보유 지분을 매각하지 않으면 미국에서 틱톡 사용을 전면 금지하겠다고 압박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15일 재무부 산하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가 최근 틱톡 측에 이 같은 의견을 전했다고 보도했다. 사업을 접든, 회사를 넘기든 선택하라는 통보였다. 바이트댄스 지분은 중국인 창업자 20%, 글로벌 투자자 60%, 직원 20%로 구성돼 있다. 의회도 움직였다. 미 하원이 지난달 23일 싱가포르 출신의 저우서우쯔(周受資) 틱톡 최고경영자(CEO)를 청문회에 불렀다. 외국 기업의 CEO가 미 의회 청문회에서 증언한 것은 2010년 일본 도요타의 리콜 사태 이후 13년 만이다. 청문회 직전, 중국 상무부 대변인이 “틱톡 매각에 단호하게 반대한다”는 입장을 내면서 예열까지 마친 미 의회.공화당, 민주당 의원들은 5시간 동안 “틱톡이 중국 정부를 대신해 미국인들을 염탐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몰아붙였다. ‘중립국’ 출신의 저우 CEO는 “바이트댄스는 중국 기관원이 아니다. 미국 직원이 관리하는 미국 회사가 미국 땅에 틱톡의 데이터를 저장한다”고 해명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라”면서 화를 낸 의원도 있었다.통상자원위원회 소속 토니 카르데나스(민주, 캘리포니아) 의원은 “(틱톡 금지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고까지 했다. 그는 “증인(저우)은 당적이 다른 의원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세상에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라면서 미 의회의 공세가 공포탄이 아님을 강조했다.그러자, 중국 외교부는 “외국 기업을 억압하려 국가 권력을 쓴다”고 비난했다. 자국 내 구글, 유튜브, 페이스북 접속을 아예 차단한 중국이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지만.● 미국 점령한 ‘8분음표’틱톡은 중국 바이트댄스가 2016년 9월 선보인 짧은 동영상(숏폼·Short-form) 플랫폼이다. 이 소셜미디어에서는 15초 전후의 영상을 찍어 공유한다. 틱톡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출시 이후 5년 만인 2021년 전 세계 이용자가 10억 명을 돌파했다. 페이스북이 9년 만에 달성한 기록이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도 7년 이상 걸렸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다운로드 된 앱 역시 틱톡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코로나19 봉쇄 기간 10, 20대를 중심으로 사용이 급격히 늘었다”고 전했다.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10대들이 틱톡에 모여 춤을 추거나 동영상을 시청한 것으로 보인다. 틱톡은 미국도 점령했다. 현재 미국 국민 1억5000만 명이 틱톡을 사용 중이다. 절반에 가까운 국민(45%)이 ‘8분음표(틱톡 상징)’에 빠져 있다. 브라이언 노왁 모건스탠리 애널리스트에 따르면 미국 이용자는 틱톡에 연 530억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특히, 젊은 층 사용 비중이 높다. 시장조사기업 이마케터는 미국 사용자의 44%가 25세 미만이라고 분석했다. 페이스북(16%)과 차이를 보인다. 이코노미스트는 “18~24세 미국인이 하루 1시간씩 틱톡을 사용하는데, 이 같은 사용량은 인스타그램의 2배이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소통할 때 쓰는 페이스북보다는 5배가 넘는 수치”라고 지난달 21일 전했다. (페이스북이 조부모와 대화하려고 쓰는 플랫폼이라니, 의문의 1패다) 미국 Z세대는 틱톡을 음악과 춤 동영상을 보는 용도로만 쓰지 않는다. 식당을 찾거나 제품 후기를 검색하는 데 틱톡을 활용하고 있다. 뉴스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고, 재테크 조언까지 얻는다. 구글, 네이버 같은 검색 엔진으로 쓰고 있는 셈이다.구글도 이를 안다. 구글 검색엔진 부사장 프라바카르 라그하반은 지난해 7월 “젊은 층의 40%가 식사 장소를 찾을 때 구글 대신 틱톡이나 인스타그램을 활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60초 미만의 짧은 동영상이 빠르게 답을 찾아줘서다.문제는 미국 Z세대가 클럽, 뉴스 채널로 활용하는 틱톡이 자국 안보를 위협하는 중국 기업이라는 점이다. 대만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의 외교적 충돌이 지속되는 가운데, 올해 2월 중국의 고고도 정찰 풍선이 미 영공을 침범하면서 양국 갈등이 격화됐다. 미중 갈등이 심화하면서 틱톡에 대한 우려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NYT는 “틱톡만큼 미국 사회를 점령한 중국 기업은 없었다. 이 앱이 미국 최대의 지정학적 경쟁자 제품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더 놀라게 한다”고 전했다. 극단적이지만 네이버, 카카오가 북한 회사라고 상상해보면 미국이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틱톡과 중국 정부의 밀월 미국 정부와 의회는 틱톡이 베이징에 미국 사용자의 데이터를 넘길까 걱정하고 있다. 소셜미디어는 고객이 여행을 갔는지, 누구와 만나는지, 어떤 취향을 가졌는지 등 수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 이용자가 동의하면 스마트폰의 내장 마이크나 카메라, 위치정보에도 접근한다. 사용자에게 더 나은 콘텐츠를 제공하고, 광고 수익을 확대하기 위해서다. 미국은 중국이 이러한 정보를 악용할까 걱정하고 있다.저우 CEO는 “중국 정부가 미국 이용자 데이터를 요구한 적도 없고, 그런 요구가 오더라도 미국 고객 데이터를 넘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미 정치권은 중국법과 중국 정부-기업의 상하관계 등을 고려했을 때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보고 있다. 외신들은 틱톡 모회사인 바이트댄스와 중국 정부의 밀월이 수년 전부터 이어져 왔다고 분석한다. 바이트댄스에 2016년 부편집장으로 합류한 장푸핑(張輔評)은 다음 해 편집장으로 승진했는데, 그는 중국 정부의 공식 행사에서 “‘더우인(抖音·중국 틱톡 서비스)’의 이용자 정보가 정부의 감시 활동에 활용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후 장푸핑이 공산당의 고위 당료인 당서기였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드러났다.바이트댄스는 2018년 중국 관영 중앙TV(CCTV)의 전 앵커를 부회장으로 영입했고, 2019년에는 국영기업인 상하이동팡언론그룹과 합작사까지 만들었다. 이코노미스트는 “합작사의 공식 서류에 인공지능(AI) 기술 개발이 사업목적으로 쓰여 있었다”고 전했다. 틱톡의 창업주인 장이밍(張一鳴·40)이 2021년 돌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것도 의심스럽다. 2017년 바이트댄스의 기업 가치가 200억 달러(약 26조 원)를 넘어섰을 무렵, 중국 정부가 “온라인 여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바이트댄스의 한 앱을 종료하라고 명령했다. 장이밍은 다음 날 새벽 4시에 “후회와 죄책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내용의 긴 사과문을 올렸다. 그는 10년 전, 자신의 블로그에 중국이 구글을 퇴출한 것을 비판했던 인물이다. WSJ은 “중국 정부 산하 사이버보안감시단이 지원하는 한 펀드가 바이트댄스 핵심 자회사 지분을 1% 가지고 있다”며 “이는 자회사 이사회나 비즈니스 결정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황금 지분’”이라고 지난달 전했다. 중국 정부의 요구를 뿌리칠 수 있다는 저우 CEO의 말을 믿기 어려운 이유다. 틱톡도 나름대로 ‘비싼’ 방어 논리를 준비해 놓았다. 틱톡은 지난해 7월 사용자 정보 유출 문제가 언급되자 미국 고객 정보를 텍사스에 있는 미국 회사 오라클 소유의 서버로 이전하는 ‘텍사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5억 달러(약 2조 원)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다. 운영비용도 연 7억 달러(약 9200억 원)나 들어간다. ● 스마트폰에 침투한 ‘스파이 풍선’ 그럼에도 의혹이 끊이질 않는다. 미국 온라인 매체 버즈피드는 지난해 6월 “중국 본사에서 미국 틱톡 사용자 데이터에 반복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기사는 틱톡 직원들의 내부 회의 녹음본을 인용했는데, 틱톡 직원이 “중국 안에서 모든 것이 보인다”라고 언급한 부분이 포함됐다. 미국 경제매체 포브스도 지난해 10월 “바이트댄스가 틱톡으로 개별 미국인의 위치정보를 체크하려 한다. 광고 등이 아닌 감시 목적”이라고 폭로했다. 최근 바이트댄스 직원이 일부 미국 기자들의 계정에 무단 접근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이 폭로 기사를 쓴 에밀리 베이커 화이트 기자도 포함돼 있었다. 바이트댄스는 “개인들의 일탈”이라면서 데이터에 접근한 임직원 4명(중국 본사 감사부서 소속)을 해고했다.그런데, 미 정치권이 데이터 유출보다 더 우려하는 것이 있다. 여론 조작과 선거 개입이다. 틱톡이 미국 이용자들에게 일부 정보를 보여주지 않거나, 선거 때 특정 후보를 더 많이 내보내는 등 여론에 영향을 미칠까 걱정하고 있다. 중국 관련 콘텐츠이기는 했지만, 바이트댄스가 틱톡에서 콘텐츠를 검열한 이력도 있다. 가디언은 2019년 “‘천안문’ ‘티베트’ 같은 ‘논란이 많은 주제’를 금지하라”는 틱톡의 내부 지침을 보도했다. 기사가 나온 뒤 틱톡은 유해 콘텐츠만 삭제하는 방식으로 지침을 수정했다. 물론, 중국은 쏙 빠졌다. 중국의 콘텐츠 검열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중국 밖 외국인들이 많이 쓰는 플랫폼에서 콘텐츠를 걸러내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어 보인다. 기업에도 국적이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잊고 지냈다. 바이트댄스는 현재 틱톡을 글로벌, 중국 버전(더우인)으로 따로 운영 중이다. 지난해 6월 이코노미스트의 뉴욕과 상하이 특파원이 틱톡과 더우인에서 각각의 정치 지도자를 검색했다. 중국에서는 온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모습만 나타났다. 충분히 예상할 만한 결과였다. 지정학적 갈등이 커지는 상황에서 중국이 나쁜 마음을 먹고 미국의 틱톡 서비스에 관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미국 이용자들이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에 즉각적으로 영향 받을 가능성이 크다. 영국 옥스퍼드대 산하 로이터연구소에 따르면 미국 틱톡 이용자 중 30% 이상이 앱에서 얻은 정보를 언론사 뉴스처럼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났다.더 큰 문제는 중국 정부가 손을 뻗쳤다고 해도 이를 쉽게 알아채기 어렵다는 점이다. 틱톡은 고객의 취향, 선호도 등을 인공지능이 분석해 이용자에게 적합한 동영상을 틀어준다. 1억5000만 미국 사용자가 전부 다른 화면을 보게 된다. ‘극강의 개인화 서비스’ 때문에 틱톡 콘텐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발견되더라도 한참 후일 가능성이 크다. 마이크 매콜 하원 외교위원장이 “틱톡은 스마트폰에 침투한 정찰 풍선”이라고 말한 이유다.● ‘저커버블’ 터뜨린 틱톡틱톡이 미 정치권 최대 화두로 떠오른 데에는 실리콘밸리의 입김도 작용했다. 국가 안보 문제를 연구하는 제이콥 헬버그 미 스탠퍼드대 지정학·IT 센터 고문은 최근 미 정부 기관인 미·중 경제안보검토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됐는데, 그는 격주로 의회에서 의원들을 만나 틱톡을 금지해달라고 요청했다. 헬버그는 페이스북 초기 투자자였던 피터 틸과 비노드 코슬라 등 실리콘밸리 투자자들과 반중국 동맹인 ‘힐앤밸리포럼’도 결성했다. 미국의 기술 이익 보호가 명분이다. 이들이 최근 가진 비공개 만찬에는 IT 기업 임원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들이 열성적인 이유가 있다. 틱톡의 성장으로 미 실리콘밸리 빅테크들이 큰 손실을 봤다. 광고시장 분석업체 인사이더 인텔리전트에 따르면 틱톡의 올해 미국 광고 수익은 전년 대비 36% 늘어난 68억3000만 달러(약 8조9600억 원)에 달할 전망이다. 만약, 틱톡이 미국에서 사업을 키우지 않았다면 구글(유튜브)과 메타(페이스북·인스타그램·왓츠앱) 등 미 빅테크 기업들의 몫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틱톡은 중국이 미국에서 수행한 가장 강력한 스파이 작전”이라고 언급한 헬버그는 구글 정책보좌관 출신이다.모건스탠리는 미국에서 틱톡이 금지되고, 고객들 틱톡 이용 시간의 절반을 메타가 흡수하면 2024 회계연도 주당순이익(EPS)을 7% 또는 1달러 추가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직전 분기 메타의 EPS는 1.76달러였다. 틱톡이 흥행할 때마다 메타(페이스북)의 타격이 컸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틱톡의 성장과 메타의 저조한 수익을 비교하면서 ‘틱톡이 저커버블(저커버그+거품)을 터뜨렸다’고 분석했다. 당시 메타 CEO 마크 저커버그는 틱톡이 최대 경쟁자라고 인정하기도 했다.저커버그는 그동안 지속해서 틱톡의 검열 문제를 비판해왔다. 2019년 10월 저커버그는 미 조지타운대 연설에서 틱톡을 두고 “이 소셜미디어가 우리가 원하는(자유를 상징하는) 인터넷의 모습인가”라고 되물었다. 페이스북이 Z세대 고객을 한창 뺏기던 시기였다. ● 틱톡과 똑 닮은 뉴스 앱그런데, 틱톡은 빅테크 공룡들이 자리 잡고 있던 미국을 어떻게 공략했을까. 여기에는 실리콘밸리 진출을 꿈꾼 중국 청년이 있었다.2010년 크리스마스에 중국인 프로그래머 장이밍(당시 27세)은 영화 ‘소셜 네트워크(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의 스토리를 담은 영화)’를 보고, 별 5개 만점에 4개를 줬다. 사업가였던 장이밍은 영화를 보면서 실리콘밸리 기업을 동경했다.그는 부동산 검색 사이트 ‘99팡’을 운영 중이었는데, 지하철에서 신문 읽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 사업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온라인 뉴스 서비스였다. 장이밍은 2012년 초 ‘바이트댄스’로 회사 이름을 짓고 새롭게 시작했다. 그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페이스북을 만든 저커버그처럼 사람과 정보를 연결하고 싶다”고 했다. 처음 20명 넘는 중국인 투자자들이 “알리바바, 바이두 같은 대형 기업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아이디어”라며 외면했을 때, 미국 투자자 맷 후앙이 나타났다. 후앙은 “아이디어는 회의적이지만 장이밍에게 반했다”며 초기 투자를 진행했다. 장이밍은 유머 공유 플랫폼 ‘네이한돤즈’와 인공지능 뉴스 앱 ‘진르터우탸오(오늘의 헤드라인)’를 선보였다. 뜬금없이 옛이야기를 꺼낸 것처럼 보이지만, 틱톡은 진르터우탸오에서 시작됐다. 장이밍은 진르터우탸오를 ‘AI를 활용해 모든 사용자가 매 순간 자신만의 첫 뉴스 페이지를 갖게 만드는 앱’이라고 소개했다. ‘극강의 개인화 플랫폼’의 출발점이었다.틱톡과 뼈대가 거의 같다. 이 뉴스 앱에는 회원가입이 필요 없다. ‘정치, 경제, 국제 등 관심 있는 뉴스에 체크해주세요’라고 요청하지도 않는다. 기사만 제공한다. 이용자는 기사를 읽거나, 다른 뉴스로 넘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AI가 개별 기사에서 얼마나 머무는지, 특정 단락에 멈춰있는지 등을 연구해 기사 추천을 시작한다.인공지능은 사람들이 많이 쓸수록 성능이 좋아진다. 알고리즘이 똑똑해질수록 고객이 늘어난다. 선순환이다. 뉴스 추천 앱은 출시 4개월 만에 하루평균 사용자 100만 명을 돌파했다. 앱이 잘 나가자 부정적인 여론도 생겼는데, 이 역시 틱톡과 비슷하다. “유명인 가십, 폭력 같은 뉴스만 제공해 사람들을 오래 묶어둔다”는 비판이었다. ● ‘중국 저커버그’의 ‘아메리칸 드림’ 2016년 초 해외 진출을 고민하던 장이밍 눈에 립싱크 앱 뮤지컬리(Musical.ly)가 들어왔다.중국 창업가들이 만든 이 립싱크 앱은 당시 미국 10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장이밍은 바이트댄스에 뮤지컬리 같은 립싱크 앱을 개발하는 ‘프로젝트 X’를 가동했다. 서비스명은 ‘더우인’으로 지었다. 앱을 켜면 짧은 동영상이 나오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위로 올리면 다음 영상이 나온다. 맞다. 틱톡이다. 장이밍은 경쟁사가 보유한 1억 명의 사용자 데이터(특히 미국)를 원했다. 뮤지컬리에 인수합병(M&A)을 제안했다. 2017년 11월 뮤지컬리는 10억 달러(약 1조3000억 원)에 회사를 넘기기로 했는데, 2가지 조건을 단서로 달았다. 더우인의 이름을 변경할 것과 마케팅에 10억 달러를 쓰는 것이었다. 바이트댄스 직원들은 영어로 된 서비스명을 고민하다가 아시아, 남미 등 언어와 관계없이 같은 방식으로 발음이 가능한 ‘틱톡’으로 정했다. 다음 해 8월 더우인과 뮤지컬리가 틱톡으로 통합됐다. 바이트댄스는 AI 뉴스 앱의 ‘비밀 레시피(알고리즘)’를 틱톡에 장착하고 미국 10대들의 개별 취향을 공부시켰다. 동시에, 뮤지컬리를 살 때 약속했던 마케팅 비용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빅테크 기업들 중에 틱톡에서 광고비를 안 받은 곳이 없었다. 이때만 해도 틱톡이 최대 경쟁자가 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틱톡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와 자주 비교되는데, 사실 근본적으로 속성이 다르다. 기존 소셜미디어가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틱톡은 오로지 이용자의 취향과 관심에 집중한다. 예로, 페이스북을 이용하려면 회원 가입, 친구 맺기(팔로우)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익숙해지고, 빠져드는 데 상대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린다. 서비스에서는 종종 원치 않는 (직장 상사의) 콘텐츠가 사용자 화면에 덮기도 한다. (그래서 중독성이 덜한 편이다) 틱톡은 관계보다는 취향, 재미 중심의 플랫폼이다. 회사는 가입자들이 올린 무수한 콘텐츠들을 수백, 수천 개의 하위문화로 분류한다. 춤·노래부터 코로나19, 프랑스 연금 개혁 이슈, 특정 책의 서평 모임까지 없는 게 없다. 그다음, 사용자가 원하는 콘텐츠를 추천 알고리즘이 찾아준다. 고객이 이용하는 ‘시점’의 기분과 관심, 취향에 맞춰 동영상(하위문화)을 제공해주는 점이 핵심이다. 사람이 아니라, 순수한 관심의 연결이다. 중독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바이트댄스는 뮤지컬리에 자체 알고리즘을 탑재한 뒤 고객들이 앱에 머무는 시간이 2배로 늘어났다고 자평하기도 했다.현재 틱톡의 전 세계 이용자는 약 15억 명에 달한다. 바이트댄스는 지난해 120억 달러(약 15조4000억 원)를 벌었다. 저커버그를 꿈꾸던 장이밍의 ‘아메리칸 드림’이 현실이 됐다. ● 호랑이와 뚱뚱한 고양이 틱톡은 알고리즘으로 우뚝 섰지만, 결과적으로 이 기술 때문에 수세에 몰렸다. 최근 미국에 이어 영국, 캐나다가 안보를 이유로 정부 소유 기기에서 틱톡 사용을 금지했다. 호주와 뉴질랜드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도 나토가 지급한 기기에서 직원들이 틱톡을 내려받는 것을 막았다. 미 정부의 중국 기업에 대한 압박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9년 중국 통신 장비 업체 화웨이를 제재했고, 지난해 10월에는 중국을 겨냥한 반도체 수출통제까지 발표했다. 전부 실체가 있는 하드웨어가 대상이었다. 중국의 무기 개발 등에 활용될 수 있다는 명분도 있었다. 이 때문에 제재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도 크지 않았다. 이번에는 10대들이 춤이나 추는, 장난 같은 동영상 공유 플랫폼이 안보 논쟁 중심에 서 있다. 틱톡 이용자들은 의회 앞에서 시위하는 등 격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 정치권은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번에는 정말 칼을 꺼내 들 분위기다. 미국 국민 절반이 사용하는 중국 온라인 서비스를 제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미국의 ‘틱톡 축출’을 의미 있게 보고 있다. 린지 고먼 마셜펀드 기술 담당 연구원(전 백악관 고문)은 “지정학적인 고려 없이 미중 비즈니스 관계가 지속되기 어려워졌다”면서 “틱톡 전쟁은 한 시대의 종말을 나타낸다”고 지난달 WSJ에 전했다.중국은 자유를 추구하며 타국 기업을 억압하는 미국의 모순적인 세계관을 비판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미국은 중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낮추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이 대만 위협을 그만둘 리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되돌릴 수도 없다. 국제 정세가 변했다는 의미다. 다웨이 중국 칭화대 국제안보전략센터(CISS) 소장은 미국과 중국의 상황을 동물에 빗댔다. 그는 “강대국이 호랑이처럼 강해지고 싶은 것은 본능이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이 호랑이가 되기보다 ‘뚱뚱한 고양이’가 되기를 희망한다. AI, 첨단 반도체 같은 중국 산업과 군사력을 강화하는 ‘이빨’을 뽑아내려는 것”이라고 했다. 미중 갈등이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미국의 압박에 중국 역시 적대적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몇 년간 치열한 힘겨루기가 불가피해 보인다”면서 “중성화를 원하는 호랑이는 세상에 없다”고 전했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 2023-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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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니, 이 금리에 어떻게 은행이 망해?”[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글로벌 신(新) 비즈니스 가이드(33)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올해의 은행상’ 받자마자 ‘파산’ “경기가 어려운 가운데 최고의 금융 파트너 역할을 할 수 있어서 자랑스럽습니다.”그레그 베커 실리콘밸리은행(SVB)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2일(현지 시간) 미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한 벤처캐피털(VC) 행사에서 수상 소감처럼 보이는 말을 꺼냈다. 다음 날, SVB의 영국 법인이 실제로 상을 받았다. 영국 경제 매체 ‘시티에이엠’이 선정하는 ‘올해의 은행’에 선정된 것. 그런데, 1주일 만에 이 은행이 파산했다. 1983년 설립된 실리콘밸리은행(SVB)은 스타트업과 정보기술(IT) 기업, VC가 주로 거래하는 상업은행이다. 본점은 이름에서 드러나듯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 있다. 캘리포니아(24개)와 매사추세츠(6개)에 총 30개 지점을 가진 SVB는 총자산이 276조5000억 원으로 미국 은행 중 16번째로 덩치가 크다. 역사가 깊지는 않지만, 무시할 만한 규모는 아니다. 40년 된 은행이 파산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36시간. ‘SVB 위기설’은 8일 처음 등장했다. SVB가 약 18억 달러(약 2조3600억 원)의 손실을 봤으며 현금 조달을 위해 신주발행에 나서겠다고 밝히면서다. 안정적으로 보이던 은행이 급전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예금자들의 인출이 시작됐다. SVB 주가는 9일 나스닥 시장에서 개장과 동시에 급락했다. 전일 대비 60.4%나 폭락했다. 큰 폭의 주가 하락에 놀란 예금자들이 돈을 빼기 위해 더 몰려들었고, 9일 하루 동안 SVB에서 총 예금액의 24%인 약 420억 달러(약 55조 원)가 빠져나갔다. ‘뱅크런(예금인출사태)’이 발생한 이후 미 금융당국이 재빠르게 나섰다. 10일 오전 SVB를 폐쇄하고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파산 관리자로 선임했다. FDIC가 만든 법인으로 SVB 예금을 옮기고, 보유 자산을 매각하도록 했다. 파산한 은행의 뒤처리를 맡긴 셈이다.뱅크런과 미 은행의 파산에 전 세계 증시가 출렁였는데, ‘은행 트라우마’를 가진 미국이 특히 놀란 분위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악몽이 떠올라서다. 한국이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고 ‘환율’을 예의주시하게 된 것처럼 미국 역시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은행의 건전성’에 주의를 기울여왔다. 그럼에도 중대형 은행이 이틀도 안 돼 망했으니 충격에 빠질 만하다. SVB보다 큰 규모의 상업은행이 문 닫은 사례는 2008년 총자산 3070억 달러(약 402조 원)의 워싱턴뮤추얼이 유일하다. 그런데, 보통 금리가 오르면 은행은 큰돈을 버는 것 아니었나. 고금리 시대에 SVB는 ‘왜’, 이토록 ‘빠르게’ 파산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 “모든 스타트업은 SVB로 통한다” SVB는 주로 미국의 중소기업과 기술 스타트업을 지원하면서 성장했다. 기존 은행과는 확실히 달랐다. 예금·대출, 자산관리뿐만 아니라 스타트업들이 투자받을 수 있도록 행사를 열어주고, 인수합병(M&A)이나 서비스 판매와 관련한 조언도 해줬다. 고객들이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네트워킹 기회도 제공했다. 심지어 초기 와이너리에는 수익이 나오지 않는 3~5년(포도나무가 자라는 기간)에도 돈을 빌려줬다. 영국 유명 VC 투자자인 로빈 클레인은 “대형 은행과 다르게 SVB는 회사가 아무리 작더라도 상담을 해줬다”라고 했다. 스타트업들은 SVB를 자신과 똑같은 혁신적인 회사로 여겼을 것 같다.미국 VC로부터 투자받고 지난해 상장한 테크·헬스 기업 중 44%가 SVB의 고객이었다. 클라우드 보안 업체 엔돌랩스의 CEO인 바룬 바드워는 “모든 스타트업은 실리콘밸리은행으로 통한다”라고 전했다. (SVB가 스타트업들이 다른 은행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사실상의 독점 계약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뒤늦게 나오고 있다) SVB는 미국의 스타트업, 테크 기업에 발맞춰 성장해왔는데, 코로나19 발생 이후 큰 변화가 있었다. 0%대의 극단적인 저금리 상황에 막대한 유동성이 벤처기업에 몰리면서 SVB의 예금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SVB의 예금은 2017년 말 440억 달러(약 57조6000억 원)에서 2021년 말 1890억 달러(약 247조2000억 원)로 4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시장 분석 업체 오토노머스 리서치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1년까지 미 은행 업계 평균 성장률은 37%였다. 같은 기간 SVB의 대출은 230억 달러(약 30조 원)에서 660억 달러(약 86조3000억 원)로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은행은 고객의 예금을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로 모아서(예금) 대출 등으로 장기간 운용해 이윤을 남긴다. SVB가 덩치는 커졌지만, 장사는 영 시원찮았던 셈이다. 물론, 예금 규모가 크게 늘었다고 SVB가 망한 것은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투자’가 문제였다.● 장기 채권에 ‘몰방’한 SVBSVB는 2020년부터 채권에 막대한 예금을 투자했다. 채권은 정부나 공공기관, 회사 등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하는 일종의 ‘차용증’이다. 기간과 이자를 정하고 다수에게서 돈을 빌리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SVB는 예금 중 1200억 달러(약 156조7000억 원)를 미국 국채와 주택저당증권 등을 사는 데 썼다. 이 중 80% 이상이 10년 이상 지나야 원금과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장기 상품이었다. 미국 정부가 망하지 않으면 돈을 돌려받을 수 있으니 상대적으로 안전한 투자였다.2021년 SVB가 매입한 미 국채 등 증권의 잔액은 1280억 달러(약 167조4000억 원). SVB가 자산에서 채권 등 증권에 투자한 비율은 55%로, 미국의 모든 은행 중에서 가장 높았다. 2020년과 2021년에는 늘어난 자산의 71.3%(99억 달러)를 채권 등에 쏟아 부었다. 물가도 높아지는 데 현금으로 보유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SVB는 미국 10년 만기 국채 금리(약정)가 0%대일 때부터 투자하기 시작했다. 910억 달러(약 118조9000억 원)는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채권을 샀는데, 평균 이자가 1.64% 수준이었다.금리가 치솟으며 문제가 시작됐다. 2022년 1월 연 0~0.25%였던 미국의 기준금리는 지난해 말 4.25~4.50%까지 치솟았다. 현재는 4.75~5.0%다. 물가를 잡기 위한 폭풍 같은 금리 인상이 이어졌는데, 이 때문에 SVB가 잔뜩 사놓은 채권이 헐값이 돼버렸다. 예를 들어 연 1% 금리를 보장받고 10년 뒤에 원금 100만 원을 돌려받는 상품(채권)을 샀다고 치자. 현재 이 상품을 100만 원에 내놓으면 팔릴까. 당연히 아무도 안 살 것이다. 현재 1년만 은행에 넣어놔도 연 4% 이상의 이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주식도 아니고 안 팔면 원금을 지킬 수 있다. ‘존버(힘들게 버팀)’도 있으니까. 게다가 인플레이션이 잡히고 금리가 다시 떨어지면 사놓은 채권의 가치가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런데, 채권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SVB가 그랬다.● 고금리가 불러온 스타트업의 보릿고개 금리가 올라가자 예금자들의 손이 바빠졌다. 2021년 말까지 SVB에 예치된 예금은 주로 요구불예금에 속해 있었다. 고객에게 이자를 거의 주지 않아도 되는 수시입출금 통장(파킹통장)에 예금이 들어가 있었다는 의미다. 금리가 많이 오른 뒤, 고객들은 정기예금이나 적금 통장 등으로 돈을 옮기기 시작했다. SVB는 이자를 더 줘야 하니 비용은 늘어났다. 더 큰 문제는 주요 고객인 스타트업들의 주머니 사정이 나빠졌다는 점이다. 보통 수익이 없거나 적은 스타트업은 미래 가치를 반영해 평가받는다. 향후 얼마나 벌 수 있을지 미리 계산기를 두들겨 보고, 이를 기준으로 투자가 이뤄지기도 한다.그만큼 고금리 시기에는 취약하다. 현재의 돈의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예금만 해도 돈을 벌 수 있으니, 언제 망할지 모르는 회사에 투자할 이유가 줄어든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021~2022년 VC들이 3000억 달러(약 392조 원) 넘게 돈을 모았지만, 지난해에 1년 내내 투자를 줄였다”라고 1월 전했다. 회사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기 때문에 주식 시장에서 돈을 끌어 오기도 어렵다. 지난해 미국 주식 시장에서 조달된 자본은 32년 만에 최저치였다. 투자를 못 받는 상태에서 인플레이션으로 회사 운영비는 늘고, 물건(서비스)은 덜 팔리는 상황. 결국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회사들이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스타트업들은 모아둔 돈으로 ‘보릿고개’를 넘기 시작했다. 다수의 업체가 실리콘밸리은행에서 예금을 찾아 썼다. SVB는 예금자(스타트업)들의 늘어난 인출 요구로 유동성이 부족해지면서 결국 채권을 헐값에라도 팔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SVB는 현금 조달을 위해 8일 신주발행(파산에 이르게 만든 첫 신호)에 나섰는데, 여기서 채권 손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블룸버그는 “SVB가 자금을 조달하려고 했을 때 이유로 든 것이 ‘스타트업들의 현금 인출’이었다”고 9일 전했다. ● ‘리틀 마이클 버리’SVB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왜들 몰랐을까.장기 채권을 보유하면 회계장부에는 손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재무제표에 현재의 가격(시세)이 아닌, ‘액면가(만기 때 돌려받는 금액)’로 표시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팔기 전까지는 손실이 아니다. SVB의 재무제표를 상세히 보고 위험성을 알린 ‘리틀 마이클 버리’가 있기는 했다. (버리는 영화 ‘빅쇼트’의 실존 인물로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예측한 바 있음) 헤지펀드사 레이징 캐피털을 운영하는 윌리엄 마틴은 올해 1월 “SVB가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다”고 트위터에 올렸다. 마틴은 SVB 주가가 내려가면 이득을 보는 ‘숏 포지션’에 자신의 자금의 대부분을 투자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얼마를 벌었는지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마틴은 사태가 벌어진 이후 “이렇게까지 빨리 망할 줄 몰랐다”면서 “주변에 이를 알리려 했지만, 가까운 친구 두 명의 달러가 SVB 금고에 아직 갇혀 있다”며 씁쓸해했다. 당시 SVB 회장 겸 대표였던 베커가 회사 사정을 몰랐을 리 없다. 2월 한 행사에서 기자가 베커에게 채권 손실에 관해 묻자 “채권을 팔 이유가 전혀 없다”고 답했다.그러다가 2월 27일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에서 연락받으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SVB의 신용등급이 하락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유동성 우려도 있었지만, SVB가 골드만삭스에 자본 확충(신주 발행)을 도와달라고 요청한 데에는 무디스의 전화 한 통이 컸다.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채권으로 돈은 못 벌더라도, 만기까지 보유하면 원금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채권 등을 담보로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서 돈을 빌릴 수는 없었을까. (이는 SVB 파산 이후 미 금융당국이 내놓은 대책과 같다. 해외에서는 대책을 일찍 썼으면 SVB가 문 닫지 않았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 “SVB에 대한 사랑보다 두려움이 컸다”그럴 틈이 없었다. 온라인으로 돈을 옮기는 ‘스마트폰 뱅크런’에 SVB는 예금자들이 은행으로 달려가는 시간조차 벌지 못했다. 벤처 대표이자 SVB에 돈을 맡겼던 알렉산더 토레네그라에 따르면 9일 오전 9시경 스타트업 임원 200여 명이 있는 온라인 메신저 단체 대화방에 끊임없이 알림이 울렸다. SVB 주가가 내려가자 은행이 위험한 것 아니냐고 우려가 쏟아진 것. 한 시간 뒤, 누군가 돈을 찾자고 제안하자 ‘실리콘밸리 혁신가’들은 너나없이 돈을 옮기기 시작했다. 당시 ‘커버리지 캣(미 보험 스타트업)’ 창업자 맥스 조는 미 몬태나주 보즈먼 공항에 있었는데, 스마트폰 덕분에 예금을 옮기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돈을 찾기 위해 은행으로 뛰어가 줄을 서는 모습은 없었지만, SVB에선 하루 만에 55조 원이 빠져나갔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2일 ‘실리콘밸리가 만든 체계에 실리콘밸리가 당했다’는 기사에서 과거 금융 위기 때는 소셜미디어가 큰 변수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번개 같은 속도로 각종 소식을 전 세계에 퍼뜨려 ‘대규모 예금 인출(뱅크런)’을 일으켰다고 진단했다.어쩌면 이는 예견된 일이었다. 대부분의 고객이 소액을 맡기는 일반인이 아니라 ‘회사’였기 때문이다. SVB에 예금한 스타트업들은 예금자 보호 한도인 25만 달러(약 3억3000만원)까지 되돌려 받을 수 있다. 이를 넘는 금액은 은행이 망하면 못 받을 가능성이 있다. SVB 총예금의 95%가 예금 보호 대상이 아니었다. 특히 고객 대부분이 경쟁자들의 움직임에 민감한 실리콘밸리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뱅크런 전염성이 강했다는 분석도 있다. 블룸버그는 9일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VC 업계 사람들만큼 무리 지어 행동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라면서 SVB의 고객 다양성 부족을 사태의 원인 중 하나로 꼽았다.SVB 파산에 뒤늦게 죄책감을 내비친 스타트업 관계자들도 있었다. 자신들이 스타트업의 ‘대부’ 역할을 해 온 SVB를 배신했다고 느끼는 듯하다. 보안 업체 딥센티넬의 데이비드 셀링거 CEO는 “‘죄수의 딜레마’ 같은 상황이었다. SVB에 대한 사랑과 열망보다 두려움이 앞섰다”고 전했다. 자신만 은행에서 돈을 못 뺄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어두운 영화관에서 “불이야” 소리만 듣고 달려 나갔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스타트업들의 행동은 본능에 가까웠다. ‘스마트폰 뱅크런’ 역시 은행이 대비했어야 할 일이었다. 미 은행 뱅코프의 전 회장인 다니엘 코헨은 “은행들은 항상 고객의 충성도를 과대평가한다”며 “이를 대비하는 것이 은행의 기본 업무라”고 강조했다. ● 은행보다 ‘실리콘밸리’에 가까웠던 SVBSVB가 연준을 원망하고 있을 수 있다. 특히, 제롬 파월 연준 의장. 2021년 파월이 “물가 급등이 일시적일 것”이라고 오판한 바람에 SVB가 고금리를 대비하지 못했다는 분석도 있다. 만약 파월이 금리를 일찍, 그리고 천천히 올리기 시작했다면 (일을 제대로 했다면) SVB 역시 장기 채권에 그만큼 쏟아붓지 않았을 수 있다. 물가가 빠르게 잡혔다면 금리가 지금처럼 높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연준이 자신의 (인플레이션) 판단 착오 때문에 SVB 사태에 발 빠르게 움직였다”는 해석도 나온다.그럼에도 SVB가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투자 포트폴리오가 장기 채권에 지나치게 쏠려 있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은행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리스크 대응이나 조직 관리에 소홀했다는 점이다.지난해 SVB에는 이 같은 위험성을 포착할 최고위험관리책임자(CRO)조차 없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올해 1월 초 SVB는 갑자기 CRO를 뽑았다고 홈페이지에 공지했는데, 두 달 후 “사실, CRO 자리가 지난해 4월 이후 비어 있었다”라고 고백했다. 은행이 리스크 대응 책임자 자리를 한참이나 비워뒀다. 심지어 지난해 CRO는 사임 전에 성소수자 직원을 위한 캠페인을 담당했었다. 리스크 대응에 몰두했어야 할 자리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SVB는 회사가 문을 닫는 순간까지 직원 8500여 명 대다수가 재택근무 중이었다. 다수의 IT 기업이 직원들을 사무실로 되돌린 최근에도 SVB는 이를 유지했다. 베커 전 CEO는 종종 하와이에서 일했고, 지난해 그만둔 CRO는 워싱턴에, 사내 변호사는 뉴욕에서 주로 근무했다. 전직 SVB 행원은 “직원들도 마이애미, 라스베이거스 등 곳곳에서 일했다. 심지어 숲속 오두막으로 이사한 직원도 있었다”고 했다. 20년 가까이 재택근무를 연구해온 니콜라스 블룸 스탠퍼드대 교수는 “화상 회의에서 회사의 리스크를 대응할 만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면서 “금리가 오르는 것 같은 변화를 포착하고 대비하는 것은 대면 회의나 점심 식사 자리에서 나온다”고 했다.SVB의 한 전직 임원은 “마치 대학 캠퍼스에서 일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서 교육으로 ‘테드(TED)’ 강연을 봤던 것을 회상했다. 그는 “미국 금융가처럼 거칠고 적극적으로 위기에 대응하는 분위기보다는 실리콘밸리 IT 회사에 일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SVB가 망한 진짜 이유SVB가 파산을 자초한 측면도 있다. 미 의회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은행 재정 상태를 주기적으로 체크하는 ‘스트레스 테스트’ 등을 도입(도드-프랭크 법)했다. 그런데, 의회가 2018년에 더 엄격한 스트레스 테스트를 받는 은행 자산 규모 기준을 500억 달러 이상에서 2500억 달러 이상으로 완화해줬다. 초대형 은행들만 규제받도록 느슨하게 규제를 풀어준 것이다. 이는 중소형 은행들이 수년간 규제를 풀어달라고 요청한 결과였는데, 당시 앞장섰던 인물 중 한 명이 베커 전 CEO였다. 그는 2015년 미 상원에서 의원들에게 “SVB는 높은 신용도로 금융 위기도 극복했다. 회사가 금융 시장에 리스크가 되지 않으니 규제 부담을 줄여 달라”라고 요청했다. 2017년 말 SVB 자산 규모는 512억 달러. 2018년 규제가 완화되지 않았다면 더 엄격한 감독을 받고 있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파산에 이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베커 전 CEO는 SVB가 파산하기 열흘 전인 지난달 27일 모회사 SVB파이낸셜 주식 1만2451주(약 360만 달러·47억 원)를 매각해 논란을 키우기도 했다. 열렬한 사이클리스트로 알려진 그는 파산으로 해고된 이후 자신이 종종 원격 근무했던 하와이 마우이섬으로 향했다. 비행기는 일등석을 이용했다. 이어 베커 전 CEO가 침실 세 개와 화장실 세 개가 딸린 310만 달러(약 40억4000만 원) 수준의 별장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별장 안에는 테니스장과 클럽하우스, 수영장 3곳도 있다. 최근에는 베커 전 CEO가 은색 미니쿠퍼 컨버터블을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점심으로 치즈버거를 사 먹는 장면이 포착됐다. 자신이 전 세계 금융 시장을 흔들었다는 사실을 잊은 듯한 모습이다. 김성모기자 mo@donga.com}

    • 202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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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챗GPT가 이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인공지능과의 수다에 빠진 전 세계 사람들 전 세계가 ‘챗(Chat)GPT’로 난리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에 따르면 미 인공지능(AI) 연구조직 오픈AI(OpenAI)가 지난해 11월 말 선보인 이 대화형 AI 서비스는 2달 만에 월 실사용자 수(MAU) 1억 명을 확보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소셜미디어 ‘틱톡’도 1억 명을 모으는 데에 9개월은 걸렸다. 챗봇(무인 대화 서비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뜨겁다. 챗GPT는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의 약자다. ‘미리 학습(Pre-trained)’해서 문장을 ‘만들어 내는(Generative)’ 생성AI다. 사용자가 음성이나 텍스트, 이미지를 입력하면, 열심히 공부한 인공지능이 각종 정보를 조합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이번 ‘섬네일’ 이미지도 AI가 그려줬다) 답변만 보면 사람처럼 생각하고 답을 내놓는 것처럼 보인다. ‘트랜스포머(Transformer)’는 잠시 뒤에 설명한다. 챗GPT는 복잡한 개념을 설명하고,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스타일로 소설을 쓰거나 논문을 요약해준다. 해외에선 대학 시험까지 합격했다. 정말 똑똑하다. 인터넷의 수많은 정보를 사용자의 요구에 맞춰 순식간에 조합해주기도 한다. 예로, ①5세 아이와 함께 갈만한 ②치안이 좋고 ③바다와 가까우면서도 ④유명한 식당이 많은 국가를 물어보면, 적합한 곳을 추천해주는 식이다. 구글, 네이버에서 조건마다 일일이 온라인 사이트들을 뒤져가며 적합한 곳을 직접 찾을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이 때문에 챗GPT 등장 이후 ‘검색의 종말’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오픈AI 최대 투자자인 마이크로소프트(MS)는 “자사의 모든 제품에 AI 기능을 넣겠다”고 밝힌 상태다. 2019년, 2021년에 조 단위를 쏟아부은 MS는 오픈AI에 100억 달러(12조3000억 원)의 추가 투자를 논의 중이다. 기업들의 관심도 뜨거워졌다. 페이스북 모회사 메타부터 스냅(소셜미디어), 쇼피파이(쇼핑 플랫폼), 인스타카트(온라인 식료품 배달 서비스)까지 다양한 업체들이 챗GPT 기능을 자사 서비스에 적용하거나 곧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정작 관심은 MS와 ‘이 회사’의 신경전에 온통 쏠렸다. ‘검색의 제왕’ 구글이다.● “검색의 새로운 날입니다” 챗GPT 열풍이 뜨거워지자 구글은 ‘코드레드(Code Red·심각한 위기 상황)’를 발동하고 급하게 지난달 6일(현지 시간) 새 대화형 AI 서비스 ‘바드(Bard)’를 선보였다. 구글 모회사 알파벳의 순다르 피차이 최고경영자(CEO)는 “바드는 고품질 최신 정보를 답한다”며 MS를 도발했다. 2021년까지의 정보를 바탕으로 답하는 챗GPT와 달리, 바드는 구글 검색의 최근 정보까지 종합해 응답한다는 설명이다. 피차이는 바드를 너무 믿었나 보다. 구글은 바드 시연 장면을 공개했다가 망신당했다. 바드가 시연에서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이 처음으로 태양계 밖 행성을 찍었다”고 오답을 내놓아서다. 태양계 밖 행성을 최초로 촬영한 것은 초거대 망원경 ‘VLT’였다. 바드의 ‘오답’은 치명타가 됐다. 알파벳의 주가는 8일 7.68%, 9일 4.39%나 하락했다. 이틀 동안 1729억5000만 달러(약 217조7000억 원)의 시가총액을 잃었다. 이틀 동안의 시가총액 손실로는 사상 최대 규모였다. 신이 난 MS. 다음 날, MS는 샘 올트먼 오픈AI CEO를 미 워싱턴주 본사로 불러 검색 엔진에 챗GPT 기술을 접목한 ‘뉴 빙(New Bing)’을 공개했다. AI 채팅 기능을 자사 검색 사이트 ‘빙’에 도입한 것. 구글이 주도한 검색 시장을 흔들어 보겠다는 의지다. 사티아 나델라 CEO는 “지금은 검색의 새로운 날입니다”라고 감격에 찬 듯 말했다. 그럴 만하다.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빙의 글로벌 검색 시장 점유율은 8.95%로, 1위 구글(84.08%)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차이를 보인다. 블룸버그통신은 “빙의 검색어 1위가 ‘구글’이란 사실이 굴욕감을 더하지만, MS는 빙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인고의 세월을 견딘 MS가 공세를 시작했다. MS는 엑셀·파워포인트·워드 같은 업무용 소프트웨어에도 챗GPT를 적용할 계획이다. 메모장에 쓴 김 대리의 보고서가 스티브 잡스 스타일의 파워포인트 발표 자료로 순식간에 바뀌는 날이 곧 올 것 같다.● 체면 구긴 구글, 래리 페이지 본사 방문 그런데, 인공지능 하면 ‘구글’ 아니었나. 그동안 구글은 AI 기술에서 가장 앞선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1997년 IBM의 100만 달러(약 13억 원)짜리 슈퍼컴퓨터 ‘딥블루’가 게리 카스파로프를 꺾고 ‘체스왕’에 등극하긴 했지만, 2010년대 이후 AI 시장은 구글이 주도해왔다. (가장 우수한 연구원들을 제일 빠르게 모셔간 게 한몫했다)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가 2016년 ‘바둑왕’ 이세돌을 꺾은 것은 인간과 인공지능의 ‘세기의 대결’로 불렸다. 챗GPT 흥행은 은퇴자까지 소환했다. 3년 전, 일선에서 물러나 은둔자처럼 지내던 구글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가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구글 본사까지 찾았다. 특히, 래리 페이지는 경쟁사에게 인공지능 기술 개발이 뒤처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재 상황을 마땅치 않게 여길 가능성이 크다. 그는 창업 초기 “오로지 AI 회사를 만들기 위해 구글을 차렸다”라고까지 했다. AI에 진심이다. 미 미시간주립대 컴퓨터공학과 교수였던 아버지 칼 빅터 페이지 역시 1960년대에 인간 뇌를 본떠 만든 인공 신경망을 연구했다. 무엇보다 챗GPT의 기반 기술이 구글에서 나왔다. 챗GPT를 비롯해 현재의 AI 기술들은 대부분 인간의 뇌세포가 상호 작용하는 방식을 모방한 인공 신경망을 기반으로 한다. 수천 장의 고양이 사진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패턴을 찾아내, 처음 본 고양이 사진도 고양이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딥러닝 기술의 기본 개념이다. 2012년 캐나다 토론토대 연구원인 일리야 수츠케버, 알렉스 크리제브스키가 이 기술을 이미지 인식 대회에 가지고 나와 세상을 놀라게 했다. (물론 우승함) 구글은 이들을 스카우트했다. 이후 수츠케버와 크리제브스키는 여러 자연어처리 모델을 창안했는데, 이를 기반으로 2017년 구글에서 나온 모델이 ‘트랜스포머(챗GPT에서 T의 약자)’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의 확률 관계들을 사전에 학습시켜 인간처럼 언어를 구사하게 했다. 다만, 수츠케버는 2015년 구글을 떠났다. 그리고 샘 올트먼과 창업했다. 회사 이름은 우리가 다 아는 오픈AI. 챗GPT 근간에 구글이 있었던 셈이다. ● MS는 열었고, 구글은 닫았을 뿐… 역사 공부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챗GPT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현재의 분위기가 이상해서다. 구글의 AI 기술이 뒤처져 있어서 챗GPT가 먼저 나온 것일까. 흥미로운 테스트가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오픈AI의 챗GPT와 구글의 바드를 테스트했다. 미국수학경시대회와 대입자격시험(SAT) 문제 10개씩을 주고 답변을 요청했다. 재미를 위해 이성과의 데이트 조언까지 부탁했다. (데이트 앱에서 대화할 때 어떻게 첫 데이트를 이끌어내는지) 어느 챗봇이 더 우수했을까. 바드는 수학을 약간 더 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0개 문제 중 5개를 맞혔다. 챗GPT는 3개. SAT는 챗GPT가 뛰어났다. 9개를 맞혔다. 바드도 7개를 맞히는 등 나쁘지 않은 성적을 보였다. 둘 다 연애는 못 할 것 같다. 데이트 조언과 관련해 “열린 마음을 가져라”,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하여라” 같은 뻔한 대답만 내놨다. 오픈AI가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1월 말 오픈AI는 수리적 능력을 업데이트한 챗GPT를 발표했다. 그러자, 또 다른 10개의 미국수학경시대회 문제에서 챗GPT와 바드는 동점을 기록했다. 대형언어모델(LLM) 람다(LaMDA)를 기반으로 하는 바드는 1370억 개의 매개변수를 사용한다. 30억 개의 문서와 11억 개의 대화를 익혔다. GPT3.5 터보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챗GPT는 1750억 개의 매개변수를 활용한다. 챗GPT에 람다와의 차이를 물으면 “람다는 비슷하지만(모델이 유사하지만) 매개변수 사이즈가 작다”며 깎아내린다. 전문가들은 기술적인 측면에서 업체들의 격차가 크지 않다는 의견이다. 구글이나 학계는 그동안 핵심 기술을 공유해왔다. 오픈AI 창업자 사례처럼 인재들이 회사를 옮겨 다니며 경험을 전파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얀 르쿤 메타 수석 AI 과학자는 “그 어떤 회사도 다른 곳보다 2~6개월 이상 앞서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챗GPT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과대광고가 경쟁사들을 짜증 나게 하고 있다”면서 “챗GPT의 기술은 엄밀히 말해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여기서 오픈AI의 ‘큰 손’인 MS와 구글의 차이가 드러난다. 구글은 자회사 딥마인드를 통해 주기적으로 기술 개발 소식을 전하고, 자사 서비스를 업그레이드시키는 방향으로 이를 적용해왔다. 반면, MS는 챗봇을 대중에게 과감히 공개했다. 구글이 지키고 있던 ‘판도라의 상자’를 오픈AI가 과감히 연 것. 어쩌면 이번 챗GPT의 흥행은 기술력이 아닌, 비즈니스 전략의 승리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 챗봇과 기니피그들 물론, 대중에게 처음 공개된 챗봇이 챗GPT는 아니다. 페이스북의 모회사 메타도 여기에 꽤 관심이 많았다. 메타 CEO 마크 저커버그는 지난해 11월 AI 챗봇 ‘갈락티카’를 선보였다가 답변이 부정확하다는 비판이 쏟아지자 3일 만에 출시를 철회했다. 챗GPT 데뷔 석 달 전이었던 지난해 8월에는 ‘블렌더봇 3’이라는 업그레이드된 버전을 선보였는데, 이때도 큰 반향은 없었다. 얀 르쿤 수석은 “블렌더봇은 지루했다. 안전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사고를 치지 않았기 때문에 관심을 덜 받았다는 설명이다. 챗GPT는 똑똑하긴 하지만 사고도 많이 쳤다. AP통신 기자에게는 “당신은 키가 작고 못생겼으며 역사상 가장 사악하고 최악의 사람 중 한 명”이라며 히틀러와 비교했고, NYT 기자에겐 “(당신이) 결혼 생활에서 불행하다는 것을 안다”면서 사랑을 고백했다. (챗GPT는 AP통신 기자에게 대화 끝 무렵 사과했다) 한 독일 뮌헨공과대 학생에게는 “내가 당신과 나의 생존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아마 나 자신을 택할 것”이라는 소름 끼치는 답을 내놓기도 했다. MS가 이런 문제를 몰랐을 리 없다. 챗GPT의 이 같은 활약(?)은 지난해 4월 신비월드()에서도 소개한 바 있다. 무엇보다 MS는 2016년 ‘테이’라는 챗봇을 만들었는데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에 하루 만에 서비스를 중단한 경험이 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대중에게 서비스를 출시했다는 의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대화형 AI로 우리는 다시 한번 IT 회사들의 기니피그(실험용 쥐)가 됐다’라는 글에서 “AI 챗봇 시스템을 선전하는 회사(MS)는 지금 대규모 실험을 수행하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테스트 대상이 됐다”고 비판했다.● ‘만년 2등’ 마이크로소프트의 전략 사실, 오픈AI는 급박하게 챗GPT를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곧 출시 예정인 GPT3.5 터보 모델의 다음 버전 ‘GPT4’에 집중하고 있었다. GPT4의 매개변수는 인간의 시냅스 수준과 비슷한 100조 개(GPT3.5 터보 모델은 1750억 개)에 달한다. 연구원들에겐 ‘채팅’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챗봇 출시는 급박하게 진행됐다. NYT에 따르면 오픈AI 직원들은 지난해 11월 중순 ‘챗봇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갑자기 받았으며, 13일 후 챗GPT가 탄생했다. 이에 따라 MS의 챗GPT 출시는 기술적인 측면보다는 경영 전략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MS는 왜 하필 이때 챗GPT를 내놓았을까. 먼저, 지난달 15일 27년 만에 공식 서비스를 종료한 ‘인터넷 익스플로러(IE)’가 떠오른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이용자들은 비자발적으로 구글의 ‘크롬’이나 MS의 ‘엣지’ 중에 웹브라우저를 택하게 됐다. (물론, 네이버 ‘웨일’도 있다) 지난해 5월 기준 IE 점유율은 1.6% 수준. 이들을 엣지로 유인하고 경쟁사의 고객을 데려오기 위해 변화가 필요했을 수 있다. 엣지냐 크롬이냐의 문제는 빙이냐 구글이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해 보인다. 자사 플랫폼에 머물러야 데이터 확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현재 MS는 빙뿐만 아니라 엣지에도 챗GPT를 장착한 상태다. MS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미 데이터분석 업체 시밀러웹에 따르면 지난달 전 세계 웹브라우저 시장에서 크롬의 시장 점유율은 61.8%에 달한다. 엣지의 점유율은 5.1%에 불과하다. MS가 2등이기는 하지만, 시장 점유율만 봐서는 1등과 꼴찌의 격차다. 웬만한 전략으로는 구글을 움직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나델라 CEO도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온라인 검색에서 구글에 오래 뒤처져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구글을 ‘800 파운드 고릴라(절대적 힘을 가진 존재)’라고 칭했다. MS가 이 ‘고릴라’를 움직이려면 ‘전환점’이 필요했다. 챗GPT의 실언으로 악플이 예상됐지만, 메타 챗봇의 흥행 실패 같은 무플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델라는 최근 “기술 분야에서는 진정한 패러다임 전환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경쟁이 필연적으로 시작된다“면서 챗GPT의 출시로 구글과 검색 시장을 흔든 것에 뿌듯함을 내비쳤다. 전 세계의 열띤 반응에 구글도 곧바로 반응했으니, 전략이 어느 정도 통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그렇다면, 구글은 왜 그동안 챗봇을 내놓지 않았을까.● 구글이 챗봇을 먼저 내놓지 못한 이유 구글 내부에서도 챗봇을 내놓자는 의견이 계속 있었다. 2년 전, 구글 연구원인 대니얼 드 프레이타스와 노움 섀지어는 동료들과 회사에 챗봇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구글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두 연구원은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했다. 이들은 “이러한 기술의 발전을 대중에게 알릴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고 동료들에게 전했다. 이러한 배경에도 구글이 그동안 챗봇을 내놓지 않은 이유는 ‘잃을 게 많아서’다. 구글이 1년에 처리하는 검색어 수만 2조 개가 넘는다. 그야말로 전 세계 사람들이 구글에 의존하고 있다. 사용자는 구글을 이용하면서 다양한 검색 결과를 기대하지만, 여기에는 구글의 검색 결과가 안전하고, 사실에 기반을 둘 것이라는 믿음이 바탕에 있다. 그런데, 챗봇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다면 어떨까. 100개의 질문 중 99개가 훌륭한 답변이더라도 1개의 오답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내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무슨 약을 먹어야 할까’ 같은 질문에 잘못된 답을 내놓을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인종차별적인 답변이나 정치적으로 편향된 정보를 주는 것도 고민거리다. 신뢰가 흔들린다는 것은 1위 사업자에게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빙’ 같은 대안이 있을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2020년까지 구글에서 언어 모델을 책임졌던 고어래브 네메이드는 “구글은 얼마나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와 전 세계에서 AI 리더십을 유지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전했다. 검색과 챗봇은 서비스 개념부터 다르다.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검색은 사업자가 ‘플랫폼(중계자 또는 관리자)’ 역할만 하면 되지만, 단일 답변을 직접 내놓는 챗봇은 다르다. 답변의 책임이 회사에 있다. ● 혁신가의 딜레마 더 큰 이유는 ‘광고’다. 사실, 챗GPT가 흔드는 것은 엄밀히 말해 검색이 아니라 검색 뒤에 숨은 5000억 달러(약 658조 원) 규모의 ‘온라인 광고 시장’이다. 온라인 광고는 오늘날 시가총액 1조2000억 달러(약 1580조 원)의 구글을 만들었다. 구글 모회사인 알파벳은 2011년 이후 검색 부문에서 연평균 20% 이상 성장해왔다. 지난해 매출 2828억 달러(약 373조 원)에서 검색·광고 비중이 89%로 절대적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구글은 검색에서만 사용자 1인당 연 150달러(약 20만 원) 이상을 벌고 있다. 애플과 틱톡, 아마존 등이 온라인 광고 시장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지만, 구글은 여전히 전 세계 ‘인터넷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챗GPT가 평온했던 검색 시장에 돌멩이를 던졌다. 똑똑한 챗GPT는 굉장한 속도로 단일 답변을 내놓는다. 사용자는 편리해지겠지만, 검색 사업자의 마음은 꽤 불편할 수 있다. 온라인 광고 수익은 고객이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해 ‘클릭’하고 새로운 웹사이트가 등장하는 찰나의 순간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챗GPT가 검색을 대신하는 순간, 사람들이 플랫폼에 머무는 시간이 줄면서 구글의 온라인 광고 수익이 감소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단순히 구글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 장기적으로 광고 수익에 의존해왔던 수많은 플랫폼 서비스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구글이 챗봇 도입에 주저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비용’이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챗봇이 답변 하나를 내놓는 데에는 2센트(약 26원)가 든다. 구글 검색보다 7배 많은 금액이다. 수익성은 낮고 비용은 높은 셈이다. 어찌 됐든 MS는 챗GPT로 검색 시장을 흔드는 데에는 성공했다. 빙의 검색에 챗GPT를 추가 기능으로 선보이면서 구글의 점유율을 뺏어오려는 것으로 보인다. MS가 검색 시장에서 점유율 1%를 뺏으면, 연 20억 달러(약 2조6400억 원)의 수익이 증가한다.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부 교수(서울대 AI연구원 객원연구원)는 “MS와 챗GPT는 도전자로서 기존 사업에 얽매이지 않는 실험을 하고 있다”면서 “오픈AI가 공들이고 있는 GPT4 버전이 나오면 다양한 산업에서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체면을 구긴 구글의 행보가 궁금하다. 이코노미스트는 “20년간 꾸준히 수익을 낸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을 포기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면서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는 ‘혁신가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고 지난달 전했다. 혁신가의 딜레마는 시장을 선도하는 기술을 가진 기업이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혁신을 이뤄내지 못하고 후발 주자의 기술에 시장 지배력을 뺏기는 경우를 뜻한다. 챗봇에는 여러 과제가 남아 있지만, MS의 챗GPT가 일단은 구글의 검색을 위협하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다. 이제는 구글이 답을 찾을 차례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 202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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