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문화]『實在는 없다…光速만이 흐른다』

  • 입력 1997년 11월 8일 09시 23분


디지털. 0과 1의 조화(造化)만으로 삼라만상(森羅萬象)을 표현하고 빚어내는 이 시대의 주술(呪術). 디지털이 지배하는 오늘, 컴퓨터는 진정 생명과 진리, 말씀과 빛을 담고 있는 「바이블」인가. 꿈의 속도였던 광속(光速)이 안방까지 연결된 광케이블로 실현되면서 「디지털 신앙」은 광속만큼이나 빠르게 번지고 있다. 메가(초당 1백만회)에서 기가(초당 10억회)로 확장된 컴퓨터의 연산처리 능력은 이제 테라(초당 1천억회)의 시대로 향한다. 디지털 시대, 정보 시대의 문화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컴퓨터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듯 미래학자들도 섣불리 단정하지 못한다. 거대한 변화의 조류를 꿰뚫어 보고 80년 「제3의 물결」이란 저서를 냈던 앨빈 토플러조차 오늘날의 정보사회, 디지털 문화의 모습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60년대, 냉전과 라디오의 시대에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외친 다니엘 벨이나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주장한 마샬 맥루한은 디지털 문화가 일상생활에 자리잡은 오늘날 예언자로 꼽힐 수 있다. 맥루한은 미디어를 「인간 신체의 연장」으로 보면서 메시지의 내용은 그것을 전달하는 미디어의 테크놀러지와 불가분의 관계임을 주장했다. 그래서 미디어가 메시지인 것이다. 나아가 뉴미디어는 인간과 자연을 잇는 다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인간이 된 것으로 보았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보드리야르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미디어 자체도 종언을 고하고 미디어와 실재(實在)가 하나로 함몰된 세상』이라고 주장한다. 미디어를 「신체의 연장」으로 본다면 컴퓨터를 선두로 하는 디지털 문화는 「지능의 연장, 삶의 연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시 군산(軍産)복합구조가 낳은 컴퓨터가 진화를 거듭하면서 세를 부풀려온 디지털은 이제 첨단과학기술 분야에만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는다. 금융과 증권정보처리 등 경제분야와 물류통제 생산관리 등 삶의 전분야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뿐만 아니다. 과학이 틈입(闖入)하지 못할 것으로 간주되던 인간 고유의 영역, 예술도 디지털 지진파로 급속히 붕괴를 겪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오감(五感)으로 분간할 수 없는 무한에 가까운 전자 음계(音階)와 컴퓨터그래픽을 통한 환상적인 시뮬레이션은 정교한 미술 감각을 자랑해온 인간을 부끄럽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 「쥬라기 공원」과 「트위스터」에 등장하는 컴퓨터그래픽은 눈이라는 원시적인 감각기관에 의존한 인간의 판단력이 허망하도록 손쉽게 허상에 놀아날 수 있음을 증명해준다. 문학과 사진, 정치의 세계도 디지털의 위력은 크다. 육필(肉筆)원고의맛과 멋은 키보드를 두드리고 인터넷을 주무르는 신세대 감각에 밀려 한낱 비생산적인 행위로 치부된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폰트로, 작가와 출판인의 만남은 파일전송으로, 출판부수는 통신상의 조회 횟수로 변해간다. 사진이란 예술행위는 디지털 방식으로 저장 압축 조작 재생되는 파일의 한가지 형태로 바뀌었다. 수십만 군중 앞에 포효하던 대선 주자들은 덩그러니 놓인 컴퓨터 앞에서 디지털 카메라와 음성입력장치를 통해 케이블로 연결되어있지만 보이지 않는 「차안(此岸)」의 네티즌들에게 신념과 희망을 설파한다. TV게임을 통해 모니터 내용을 스스로 바꾸는데 익숙해진 「오디오 비주얼 세대」 「카오스의 아이들」은 TV를 더이상 정보수신 도구로 여기지 않고 정보발신기지로 여긴다. 디지털의 쌍방향성은 즉각 반응을 정치인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해준다. 몇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이같은 정치세계의 극적 변화 앞에서도 사람들은 놀라지 않는다. 비디오 컴퓨터게임 디지털위성방송 인터넷 웹사이트로 엮은 단단한 둥지가 디지털 문화란 나무 위에 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디지털 문화체계속의 새로운 가치관이란 알의 부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충남대 정과리교수(평론가)는 『분해와 합성이 생명인 디지털은 이미 사이버 공간을 통해 누구나가 작가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등 독자와 작가의 관계를 수평화했으며 앞으로 문학의 형태도 극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면서 일부에서 인터넷을 통해 실험중인, 독자와 함께 만드는 「공동창작」, 독자가 줄거리를 선택하는 하이퍼텍스트형 문학 등 전혀 다른 장르의 형태를 그같은 예로 든다. 8년째 컴퓨터로 소설을 쓰고 있는 최성각씨는 『원고를 파일로 보낼 때는 낯선 타인의 서랍에 넣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지만 디지털 문화는 이미 돌려놓을 수 없는 흐름』이라고 본다. 그는 인터넷 공간을 권력이 만든 인위적 국경과 이데올로기, 정보통제가 없는 권력해체의 공간으로 이해한다. 정보와 감정이 자유롭게 오가는 반권력적 속성을 환영한다. 88년 작고한 영국의 사회사상사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활용되기도 전에 일찍이 이를 「현대 미디어의 해방적 가능성」이라 불렀다. 사이버펑크라는 새로운 반문화 그룹은 디지털 미디어의 반권력적 속성과 만나 탄생한 것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나타나는 네티즌 언어의 문법 파괴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 넘치는 섹스와 폭력의 메시지 역시 지배문화에 대한 대항 메시지로 논의되기도 한다. 디지털 세계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해커는 스스로를 「사이버 공간의 시민 운동가」로 자처하기도 한다. 「사이버 공간의 독립선언서」를 내놓고 미국중앙정보부(CIA)의 사이트에 침입해 홈페이지를 누드사진으로 바꾸고 빼낸 기밀자료는 세계의 네티즌들에게 공개해 조롱거리로 삼는다. 이같은 반문화 그룹이나 온라인 상의 레지스탕스를 디지털 문화 자체가 갖는 다양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도 있다. 한편으로는 사이버 공간의 해방감과 만족감은 고통스런 땀이 배어있지 않아 문화의 진정성이 없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기술결정론적 낙관론이 아니냐는 지적인 것이다. 찬탄의 박수와 비판의 질타, 그 어느 편에 애써 귀기울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21세기 오디세이를 떠났음을 기억할 일이다. 디지털 호에 탑승한 채. 〈조헌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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