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신 삼기는 조선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부업이었다. 농사짓는 사람들도 농한기나 궂은 날씨에는 집에서 짚신을 삼았다. 할 일이 없어 방안에서 쉬더라도 손은 쉬지 않고 부지런히 짚신을 삼았다. 승려들도 가을과 겨울에는 짚신을 삼아 생계를 꾸렸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글을 보면 승려에게 짚신을 선물로 받았다는 기록이 많다. 짚신 삼기를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구한말 이건창의 기록에 따르면, 강화도에 사는 유씨 노인은 30년 동안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짚신을 삼았다. 완성하면 집주인에게 주고 시장에 가서 쌀로 바꿔오게 했다. 비슷한 시기, 흑산도의 신운서라는 사람은 짚신 삼을 재료를 짊어진 채 아홉 살짜리 딸의 손을 잡고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짚신을 삼아줬다. 이렇게 네 딸을 키웠다.
더욱 부지런하면 부자가 되는 것도 가능했다. 송세흥은 낮에는 품팔이 노릇을 하고, 밤에는 짚신을 삼았다. 잠을 쫓으려고 후추를 찧어 눈에 발랐다. 이렇게 밤낮없이 부지런히 일하던 송세흥은 돌연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는 절에서도 계속 짚신을 삼았다. 십 년이 지나자 돈 수천 냥을 모았다. 송세흥은 승려 노릇을 그만두고 이 돈으로 가정을 꾸렸다. 그는 이미 마을에서 으뜸가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송세흥은 수만 냥의 재산을 모으고도 짚신 삼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는 항상 말했다. “나는 이것으로 집안을 일으켰으니 잊을 수 없다.” 승려처럼 검소하게 살았지만 인색하지 않았다.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큰돈을 내놓았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강에 돌다리를 놓아주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기념비를 세워 보답했다. 현재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 있는 ‘청강교비(淸江橋碑)’가 이것이다. 송세흥은 98세까지 장수하고 병 없이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손자 하나는 무과에 급제했다. 사람들은 베풀기 좋아한 덕이라 했다. 그는 자기 상여를 메줄 일꾼들이 신을 수십 켤레의 짚신을 만들어놓고 눈을 감았다. 심노숭의 ‘남천일록’에 나오는 짚신 재벌 송세흥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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