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보니/이은주]美대학 교수와 학생의 ‘공모’

  • 입력 2004년 11월 19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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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장마철처럼 장대비가 쏟아지던 지난해 12월 어느 날 저녁 연구실에 있는데 문 밑으로 뭔가 밀어 넣는 소리가 났다. 비에 젖어 쭈글쭈글해진 크리스마스 카드였다. 카드의 주인공은 내가 가르치는 신문방송학 강의를 두어 번 수강한 적이 있는 한 홍콩계 미국 학생. 카드를 열어 보니 ‘강의를 잘 들었다’는 인사와 함께 초콜릿 상품권이 들어 있었다.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 때문에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 했던 그의 사정을 아는 나로서는 고마움보다 미안함이 앞섰다.

미국 학생들은 교수실을 가깝게 여긴다. 강의 방식, 시험 내용, 성적평가 기준 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스스럼없이 찾아와서 얘기한다. 담당 교수뿐만 아니라 학과장에게까지 찾아가 불만을 토로하니 교수들, 특히 나 같은 ‘초짜’ 교수들은 강의 때마다 학생들의 반응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학생들이 칭찬에도 인색하지 않다는 점. 감사의 카드를 전하거나 마지막 강의 후 사진을 같이 찍자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학생들도 있다. 외국인 교수라는 부담감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학생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큰 힘이 된다.

학생들의 이런 적극적 태도에는 비싼 돈을 지불하고 강의를 듣는 만큼 자신들이 만족할 만한 ‘서비스’를 받겠다는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 서비스 만족도에 대한 최종 평가는 학기말에 있는 공식 강의평가 때 이뤄진다. 이 평가는 교수들로 하여금 보다 충실하게 강의를 준비하도록 하는 자극제가 된다. 얼마나 수업 준비가 철저한지, 강의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는지, 해당 분야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졌는지 등의 항목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항상 강의 내용을 보강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미국식 교수평가시스템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같은 과의 한 노교수는 “‘텔레비전 세대’인 학생들이 교수들에게 ‘엔터테이너’가 되기를 요구한다”면서 “학생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강의의 알맹이보다 겉포장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배움이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쉽고 재미있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교수와 학생간의 ‘공모’가 이뤄지기 쉽다는 것이다.

나도 첫 학기에 시험문제를 어렵게 냈다가 강의평가시 ‘시험문제의 적합성’ 항목에서 평균 이하의 점수를 받고 나서 교육적인 필요보다는 ‘불필요한 불만’을 사지 않기 위해 시험 난이도를 조정한 적이 있다.

몇 년 전부터 한국 대학에도 강의평가제가 도입되고 일부 대학에서는 평가 내용을 학생에게 공개하도록 하는 움직임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학생이 강의 내용에 대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공식적인 창구가 마련된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다.

물론 강의평가제가 단순히 교수들에 대한 ‘인기투표’ 쯤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보완장치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평가가 강의 수준의 질적 향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평가 주체인 학생들의 진지한 자세, 강의 내용의 충실성을 제대로 측정할 수 있는 평가 항목의 개발이 필요하다.

이은주 미국 캘리포니아 데이비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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