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보니/박상진]싱가포르 저력은 ‘법과 원칙’

  • 입력 2004년 11월 5일 17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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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소지(所持)시 사형.’

이 섬뜩한 문장은 싱가포르 입국허가서에 표시된 문구다. 의사 출신으로 지금은 다국적 제약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나에게는 별로 해당되는 문구가 아니지만 올여름 처음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는 신경이 쓰였던 게 사실이다. 여행가방을 잠글 때 도둑이 내 물건을 훔칠까봐 걱정되는 게 아니라 누군가 내 가방에 슬며시 마약을 넣지 않을까 걱정됐다.

싱가포르는 ‘법과 원칙의 나라’다. 모든 시민은 일관된 법규의 적용을 받으며 이중 잣대는 좀처럼 용납되지 않는다.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가 바로 오늘날 싱가포르를 만든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다. 총면적 685km², 인구 400만명에 불과하지만 아시아 경제의 중심지인 나라. 어떤 사람은 싱가포르 국민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기 때문에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 나라의 강점은 정부가 국민의 입장에서 정책을 만들고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다. 국민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살 수 있게 하는 데에 정책의 초점이 맞춰져 있고, 일관성 있는 정책은 국민의 신뢰를 얻는다. 부패를 찾아볼 수 없는 행정시스템, 균형 잡힌 인프라, 안전한 환경 등이 조화를 이루는 이 나라에 많은 다국적 기업이 몰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은 공항 도착에서부터 택시 승차까지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수속절차가 간편하다. 공항에서 도심까지는 15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땅덩어리가 작기도 하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만든 합리적인 교통망 덕분이다. 이것이 국가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은 아니지만 이런 요소들이 싱가포르라는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퍼즐 조각이라 할 수 있다.

외국인들도 납세자인 이상 이들을 위한 거주환경도 편리하게 돼 있다. 대다수 병원들이 운영하는 국제환자 서비스센터에서는 교통 시스템, 통역 서비스, 비자 준비 지원, 비행기 환승 안내, 숙박시설, 심지어 병원 내 면세 쇼핑까지 즐길 수 있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부터 진료 후까지 모든 과정이 통합서비스로 운영돼 환자가 안락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독일교포 2세인 나는 한국에서 2년 근무하는 동안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등의 ‘아주 평범한 진리’를 터득했다. 이는 처한 상황과 다루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일관성 없고 불투명한 상황은 국가의 미래 성장을 저해하고, 영향력과 힘을 가진 소수 그룹에 의해 주요 결정이 좌우되게 한다.

한국은 높은 과학기술 수준과 에너지 넘치는 국민성을 자랑한다. 그러나 투명성과 방향성의 부재로 인해 공통의 목표를 향한 노력이 무산되어 버리고 마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싱가포르는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정부가 어떻게 작은 나라를 경제와 금융, 과학의 강국으로 성장시켰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싱가포르에도 문제는 있다. 그러나 보고 배워야 할 것이 많은 나라임에 분명하다. 특히 21세기 초입의 한국 입장에서 말이다.

박상진 아스트라제네카 싱가포르 사무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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