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11>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7월 22일 18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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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韓信(10)

오래잖아 번쾌가 불려오자 한왕이 먼저 일깨워 주듯 엄하게 말했다.

“번 낭중은 대장군의 명을 받들라. 우리가 한중을 나가기 전에 먼저 장함을 속여 두어야만 될 일이 있다고 한다. 반드시 번 낭중 같은 맹장이라야 성사시킬 수 있는 계책이라 하니 결코 소홀히 듣지 말라!”

“무슨 일입니까?”

대장군이 한신으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새로 세운 대장군 감으로 가장 많이 물망에 오르내린 번쾌였다. 홍문의 잔치로부터 반년밖에 되지 않는 그 무렵으로 봐서는 실상으로도 공이 장수들 가운데 으뜸이라 할 만했다. 그런 만큼 전날의 배례(拜禮)에서 느낀 서운함과 놀라움도 커서 마음속의 응어리가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남아 있었다.

“번 장군은 군사 500명을 뽑아줄 테니 지금 당장 식(蝕)골짜기로 가서 우리가 불사른 잔도를 모두 새로 만드시오. 다음달 초순에는 대군을 낼 터이니 그때까지는 반드시 잔도를 훤하게 닦아 놓아야 하오!”

가을 7월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장마가 다 걷히지 않은 때였다. 합쳐 2백리가 넘는 곡도(谷道)에 수백의 길고 짧은 잔도를 놓아야 하는 일을 겨우 500명 인부로 스무날 안에 마치라 하니 한왕이 듣기에도 무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번쾌가 퉁명스레 받았다.

“500명 가지고는 두현까지 그냥 갔다 오기에도 스무날로는 빠듯하겠소. 5000명이라도 넉넉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러자 한신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지금 장군 번쾌는 무슨 소리를 하는가? 이는 군명(軍命)이고, 군명은 불가(不可)로 답할 수가 없다. 장수 되어 군명을 받들지 못한다면 참수(斬首)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소리치며 번쾌를 쏘아보았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우렁차고 그 눈길이 얼마나 번쩍이던지 어지간한 번쾌도 움찔했다. 여덟 자 넘는 한신의 키가 그날따라 유난히 우뚝해 보이고 희멀쑥한 얼굴도 서릿발 같은 위엄으로 차게 빛났다. 거기다가 한왕이 다시 한신을 거들었다.

“번 낭중은 한군(漢軍)의 장수로서 대장군 앞에 서 있음을 잊지 말라!”

“신은 군명을 어기고자 함이 아니라 일이 실로 그러함을 밝히고 있을 뿐입니다. 대왕께서도 그 골짜기를 지나오셨으니 그 길이 얼마나 험한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곳의 바위를 깎고 뚫어 십만 대군과 물자가 지나갈 잔도를 매다는 일이 어떻게 군사 500명으로 스무날 만에 이뤄지겠습니까?” “닥쳐라! 안 되면 되게 하는 것이 병법이다. 적이 뜻하지 않는 곳으로 나아간다(출기불의·出其不意)거나 동쪽에서 소리친 뒤 서쪽을 두드린다(성동격서·聲東擊西)고 하는 것은 적이 보기에는 안 되는 일을 해야만 쓸 수 있는 계책이다. 홍문의 잔치에서 번 장군이 우리 대왕을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장군이 바로 그렇게 항왕(項王)의 의표를 찔렀기 때문이다. 거록의 싸움 이래로 누가 항왕의 기세를 면전에서 꺾어낼 수 있다고 믿었겠는가?”

이번에는 한신이 다시 그렇게 받았다. 말은 그럴듯했으나, 한왕이 듣기에도 어딘가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소리였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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