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의 「우리 거리」읽기3]테헤란路는 가라

  • 입력 1999년 1월 18일 19시 59분


안되면 되게 하라. 이 구호는 해병대나 공수부대만의 것이 아니다. 한때는 한국 사회전반을 이끌던 원동력이었다. 안되면 되게 하라고 요구하면, 하면 된다고 대답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불문율이었다.

유명한 불도저시장이 서울시를 예하 사단병력 주둔지인 것처럼 종횡무진 바꿔놓던 그 시기, 1966년에 영동개발은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대서울도시기본계획’은 철야 작업의 강행군 속에서 계획되고 시행되기 시작했다.

무려 8백만평 넓이의 영동 1,2지구 구획정리사업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사단장이 바뀌고 시간도 지났다. ‘서울 3핵화(三核化) 도시구상’계획도 모습을 잡아갔다. 중앙행정부라는 기존의 강북도심과 산업지대 중심의 영등포지역, 그리고 금융업무지구로 만들 영동을 엮어 서울의 기능을 분산시킨다는 것이었다. 지하철 2호선은 세 개의 핵을 거치면서 주둔 병력을 이동시키기 위한 기반시설이었다.

작전은 성공하였다. 말죽거리의 신화로 대변되는 아우성 속에 사람들은 강남으로 향했고 아직도 강북에 살고 있느냐고 물었다.

서울특별시 강남특별구의 테헤란특별로. 강남역 사거리에서 시작하여 강남을 동서로 횡단하다 삼성교에서 마무리되는 길이다. 이 길이 평행한 다른 길에 비해 특별한 것은 잠실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대법원 단지에서 시작되는 서초로와 이어져 있어도 강남구가 시작되는 강남역 네거리부터가 특별로다. 상업지역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테헤란로에 과거는 없다. 부근에는 선정릉(宣靖陵)에 성종과 그 계비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그리고 중종께서 5백년 동안 허허롭고 사이좋게 누워 계셨을 따름이다. 길은 생겼어도 이름은 없었다. 그냥 길이었다. 그러다 1972년에 가서야 한양천도 5백78주년을 기념해서 삼능로(三陵路)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강남역 사거리 역삼빌딩 앞에는 이를 설명하는 작은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서울, 테헤란 양 시와 시민의 영원한 우의를 다짐하면서 서울시에 테헤란로, 테헤란시에 서울로를 명명한다. 1977. 6. 27. 서울특별시장 구자춘, 테헤란시장 고람레자 닉페이.’ 사단장이 지휘하는 한국의 자본주의에서는 정밀한 계산과 계획보다는 결단과 추진력이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졌다. 열매가 많은 나무보다는 키가 큰 나무가 대접받는 이상한 과수원이었다.

이윤보다는 매출이 더 중요한 경영지표가 되는 사회였다. 실업률보다는 경제성장률이 더 중요한 경제지표였다. 정책의 의미가 분배가 아닌 성장에 있었다.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밀어붙이면 일은 진행되었다. 테헤란로에는 이 키 큰 나무처럼 키만 큰 건물들이 진열되었다. 지어라, 팔릴 것이다. 건물은 지으면 임대가 되었다. 땅을 사면 우선 파기 시작했다. 무슨 건물을 만들지는 그 다음에 생각하기 시작했다. 설계도 이렇게 시작됐다.

소대장의 재촉에 따라 신속히 기둥이 세워지고 건물이 올라갔다. 짓고 있는 건물에 맞춰 설계도가 바뀌기도 했다. 수많은 시행착오는 돈으로 해결했다. 귤나무에 탱자가 열리면 귤을 사다 달아놓기도 했다. 건물의 외피는 흉물만 면하면 됐고 화장을 하듯이 얇을수록 돈은 덜 들었다.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이기만 했다.

테헤란로에 건물은 그렇게 세워졌다. 테헤란로에 면한 블록 자체도 다를 바가 없었다. 거리를 면한 땅에는 키 큰 나무인양 고층건물들이 늘씬한 모습을 뽐내지만 그 바로 뒤에는 잡초같은 건물만 무성했다. 안으로 한 걸음만 옮기면 유흥업소들이 초현실처럼 들어서 있는 곳. 일꾼들은 낮에는 테헤란로의 과수원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일식집과 룸살롱의 잡초밭에서 접대를 벌였다. 탱자를 귤로 기록해 달라고 하기도 하고 나무의 키를 더 크게 기록해 달라고 하기도 했다.

한동안 테헤란로의 헤게모니는 강남역사거리가 쥐고 있었다. 강남 쪽의 한강다리 중 가장 고참인 한남대교와 줄이 닿는 곳이니 이 곳이 테헤란로의 수장(首長)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권력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역삼역 네거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짐은 있었다. 보기 드물게 넓게 구획된 대지가 한동안 비워져 있었으므로 올 것이 왔다고들 생각을 했다. 45층 높이의 현대강남사옥과 38층 높이의 LG강남타워가 세워지면서 세력구도는 재편되기 시작했다.

지하철역을 따라 물결치듯 오르락내리락하는 건물들 사이에서 역삼역 사거리는 압구정특별동과 줄이 닿는 새로운 힘의 균형을 보여주고 있다.

역삼역 부근의 아가방사옥 앞은 가장 고도가 높은 곳. 여기서 바라보면 테헤란로가 가장 멀리까지 보인다. 테헤란로에서는 오토바이 퀵서비스 아저씨만 바쁜 것이 아니다. 내일이면 당장 큰 장마가 지리라고 굳게 믿는 개미들처럼 모두 분주하다. 테헤란로는 이유 없이 배회하다 피곤한 그대의 다리를 위하여 벤치 하나 건네줄 만큼 한가하지 않다.

자동차 안에 있건 인도 위를 걷건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테헤란로의 당신은 분명 길을 잘못 들었다. 테헤란로에서는 문화를 이야기하지 말라. 한국의 자본주의는 그런 음풍농월(吟風弄月)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군대에서 낭만이나 운치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문장을 사용하면 군장을 메고 연병장을 돌게 된다. 테헤란로에서는 문화를 찾는 것보다 전봇대를 찾아 나서는 것이 빠르다.

시간이 지나 이제 숨돌릴 시간도 생기면서 열매를 이야기하는 나무들도 조금씩 생기기도 했다. 지어진 포스코센터와 짓고 있는 LG아트홀이 바로 그것들이다.

포스코센터 앞의 광장에 앉을만한 벤치는 하나 없어도 적어도 마당을 내려가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피자집, 칼국수집, 햄버거집이 열려 있다.

전시회도 종종 있다. 얇은 피막의 건축이 아니고 제대로 깎고 다듬어 건물을 만드는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건물은 자본주의의 틀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가치임을 알리기 시작했다. 열매의 향기는 자로 잴 수는 없지만 나무의 가치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21세기의 초반 테헤란로의 나무들은 어떤 열매들을 맺을 것인가.

서현<건축가>hyun1029@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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