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걸렸다”…‘실리콘밸리 보수’의 대장정 [트럼피디아]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2월 12일 08시 00분


테슬라와 팔란티어.

‘트럼프 수혜주’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두 기업의 설립자는 20년째 우정을 이어온 절친 사이다. 팔란티어를 공동창업한 피터 틸(58)은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54)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마음을 열게 설득한 절친 중 핵심으로 꼽힌다.

틸은 머스크에 비해 대중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페이스북, 스페이스X, 오픈AI 등 실리콘밸리 대표기업의 잠재력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본 천재 투자자다. 진보적 분위기가 강한 실리콘밸리에서 오래전부터 보수 성향을 나타낸 인물이기도 하다. 일각에선, 원조 ‘실리콘밸리 보수’로도 꼽힌다. 특히 그는 2016년 대선에서 정보기술(IT) 업계 거물 중 드물게 트럼프 대통령을 공개 지지해 유명세를 탔다.

2000년 페이팔 창업 당시 틸(왼쪽)과 머스크. AP 뉴시스

실리콘밸리를 주름잡던 틸과 머스크의 친구들은 어쩌다 백악관 킹메이커가 됐을까. 스탠퍼드대에서 시작된 이들의 우정을 살펴봤다.

● ‘스탠퍼드 보수’의 탄생
1987년 스탠퍼드대 철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틸은 그해 7월 ‘스탠퍼드 리뷰’라는 새로운 학내 매체를 창간했다. 창간호에 실린 편집국장 칼럼에서 그는 “비이성적인 캠퍼스 내 주류 담론을 뒤로하겠다. 실질적인 진보를 가져올 건설적이고 합리적인 토론 문화를 정착시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틸은 자신의 정치색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캠퍼스 내 다문화주의와 정치적 올바름(PC) 운동을 거세게 비판했고, 보수 자유주의를 추구했다. 학생단체 ‘스탠퍼드 폴리틱스’는 스탠퍼드 리뷰의 동문 10명 이상을 인터뷰한 뒤 “스탠퍼드 리뷰는 시류를 거스르는 반골들(contrarian)의 모임”이라고 규정했다. 또 이들은 자신이 사상가(thinker)라는 자부심을 갖고 지적과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

2016년 미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틸. 사진 출처 C-SPAN 웹사이트

보수 성향의 스탠퍼드 리뷰 동문들이 진보 성향의 캘리포니아주에서 대학 생활을 하고, 사회로 진출하며 더욱 끈끈해졌다는 분석도 있다. 치열한 토론에서 지적 즐거움을 느끼는 이들의 성향은 특히 스타트업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틸과 페이팔을 공동창업한 ‘페이팔 마피아’가 대표적인 사례다. 전 세계 온라인 지불 시스템을 운영하는 페이팔은 1998년 틸이 스탠퍼드 리뷰에서 가깝게 지낸 동문들을 모아 설립했다. (학부 졸업 후 로스쿨에 진학한 틸은 법률가를 꿈꿨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자 투자 업계로 진로를 틀었다.)

페이팔은 스탠퍼드대 인근 소형 건물 ‘유니버시티 에비뉴 165번지’에 터를 잡았다. 얼마 뒤 바로 옆 방에 머스크와 친구들이 창업한 경쟁 업체 ‘x.com’이 이사 왔다. 두 업체는 더 큰 성공을 위해 2000년 회사를 합치기로 했고, 머스크를 CEO로 추대했다. (머스크 역시 잠시 스탠퍼드대에 다녔지만 스탠퍼드 리뷰에서 활동하지는 않았다.) 회사는 2002년 이베이에 인수됐다. 틸과 머스크 등 설립자들은 20대, 30대의 나이에 백만장자가 됐다.

● 실리콘밸리의 인맥왕
이들은 더 큰 꿈을 향해 달렸다. 머스크는 2002년 스페이스X, 2003년 테슬라를 창업했다. 틸은 2003년 팔란티어를 창업한 데 이어 2004년 페이스북의 첫 투자자가 됐다. 벤처캐피털사를 설립한 틸은 스페이스X, 에어비앤비, 링크드인, 스포티파이, 딥마인드, 오픈AI 등에 투자하며 큰 성공을 거뒀고, 실리콘밸리의 ‘마이더스의 손’이 됐다.

틸은 첫째도 인맥, 둘째도 인맥을 강조하는 사업가다. 일찍이 페이팔을 통해 ‘마음 맞는 유능한 친구’의 소중함을 깨달은 그는 초창기 스타트업을 향해 “사업에는 똑똑한 사람 세 명이 필요하다”며 “성공하려면 이들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조언하곤 했다.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대학 캠퍼스도 부지런히 다녔다. 샘 올트먼 오픈AI 공동설립자는 틸이 스탠퍼드대에서 찾아낸 원석이다. 틸은 모교에서 창업 강의를 진행하는가 하면 스탠퍼드 리뷰 재학생들과 분기에 한 번씩 저녁 식사를 가졌다. 학생들을 자택이나 고급 식당으로 초대해 캠퍼스 안팎의 이슈를 두고 토론했다고 한다.

지난해 12월 미 육·해군 미식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트럼프 당선인, 머스크, 밴스 부통령 당선인(왼쪽부터). 랜드로버=AP 뉴시스

틸은 그렇게 JD 밴스 미국 부통령도 만났다. 2011년 틸은 미국의 반대편 끝에 있는 동부 코네티컷주의 예일대에 특강을 하러 갔다. 당시 예일대 로스쿨 재학생이던 밴스는 틸의 강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졸업 후 2017년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해 틸의 벤처캐피털사에서 일했다. 이 시기 밴스는 저서 ‘힐빌리의 노래’를 집필 중이었는데 틸이 누구보다 열렬히 응원했다고 한다.

정치인으로서 밴스의 자질을 알아본 틸은 2022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정치 신인이던 밴스에게 무려 1500만 달러(약 218억 원)를 기부했다. 밴스는 이 선거에서 승리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트럼프에게 밴스를 소개한 인물도 틸이다. 틸은 2021년 2월 밴스를 데리고 마러라고로 갔다. 트럼프가 백악관에서 마러라고로 돌아온 지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상원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던 밴스는 이날을 기점으로 180도 변화했다. 이날 처음 트럼프를 만난 그는 사실상 충성을 맹세했고, 친트럼프 인사가 됐다.

● 샤이 보수, 세상으로 나오다
틸은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을 공개 지지했다. 틸의 친구들이 아직 ‘샤이 보수’였던 시절이다. 그는 그해 공화당 전당대회 연설자로 나서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125만 달러를 기부하며 실리콘밸리의 이단아로 이름을 날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틸을 신뢰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틸이 추천한 인물이 트럼프 1기 행정부 곳곳에 포진했다며 “틸은 실리콘밸리의 그림자 대통령”이라고 했다.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패배 이후에도 틸은 의리를 지켰다. 틸은 2022년 중간선거에서 친트럼프 성향의 상·하원의원 후보들에게 자금을 대며 영향력을 키웠다. 그는 그해 선거에 총 2040만 달러를 기부하며 공화당 최대 큰손(기부액 공동 1위를 기록)으로 자리매김했다. 또 장남 트럼프 주니어와도 가깝게 지냈다.

이 와중에 실리콘밸리에서는 정치적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이 세상을 휩쓸고, 2021년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하며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틸의 스탠퍼드 리뷰 후배이자 페이팔 공동창업자, 머스크와도 절친한 사이인 데이비드 색스 벤처캐피털 크래프트벤처스 대표(53)가 그 중심에 있었다.

데이비드 색스. 사진 출처 크래프트 벤처스 웹사이트
데이비드 색스. 사진 출처 크래프트 벤처스 웹사이트

색스는 페이팔 이후 팔란티어, 스페이스X, 에어비앤비 등에 투자하며 크게 성공한 유명인사였다. 2016년 대선 때는 민주당을 지지했지만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공화당으로 돌아섰다.

팬데믹으로 세상이 멈췄던 2020년 그는 팟캐스트 ‘올인’을 시작했다. 특유의 입담으로 IT 업황을 논하고, 머스크 등 친구들과 일화를 풀어놓으며 인기를 끌었다. 그런 그가 바이든 행정부를 거세게 비판하자 청취자는 수백만 명대로 불어났다. 실리콘밸리에서 ‘샤이 보수’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점차 생겨났다.

액시오스에 따르면 밴스는 지난해 1월부터 색스에게 “트럼프를 공개 지지해달라”고 설득했다. 색스는 ‘머스크의 비공식 고문’이라고 불릴 정도로 머스크와 가까운 사이였고, 실리콘밸리 여론을 쥔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같은 전략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9월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색스의 팟캐스트 ‘올인’이 개최한 행사에 깜짝 게스트로 나온 밴스 당선인(왼쪽 세번째). 맨 오른쪽이 색스다. 유튜브 ‘올인’ 캡처

노력은 지난해 6월 놀라운 성과로 돌아왔다. 색스가 자신의 자택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위한 모금행사를 연 것. 불과 4년 전만 해도 실리콘밸리에서는 트럼프 모금행사가 극비리에 열렸다. 색스의 행사에는 벤처 투자와 가상화폐 분야 거물 50여 명이 참석했고 총 1200만 달러(170억 원)가 모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크게 만족했다. 이 일을 계기로 밴스는 유력 부통령 주자로 발돋움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을 세계 가상화폐 수도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색스도 입각에 성공해 이번 행정부에서 ‘인공지능(AI)·가상화폐 차르’ 역할을 맡고 있다.

● 머스크의 정치-파티 친구들
스탠퍼드 리뷰 출신으로 페이팔에서 인턴이었던 조 론스데일(43)도 눈여겨볼 인물이다. 그는 틸과 팔란티어를 공동창업했다. 머스크는 2021년 테슬라 본사를 텍사스주 오스틴으로 옮긴 뒤 텍사스 부호들과 가까이 지냈는데, 특히 론스데일과 정치 이야기를 하며 자주 시간을 보내게 됐다고 한다.

*트럼프-머스크 브로맨스의 서막은 트럼피디아 6화7화에서 다뤘다.

론스데일의 지난해 7월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기고도 화제가 됐다. 실리콘밸리 내 우파 그룹의 생각을 잘 드러내는 글로 평가됐다. 그는 기고에서 당시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 이민, 외교 정책을 전방위로 비판했다. 또 “스타트업 업계가 바이든의 연방거래위원회(FTC)에 악몽과도 같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는 “미국의 목을 조여오는 관료주의를 해체할 유일한 후보”라고 적극 지지했다.

실리콘밸리의 파티왕으로 불리는 켄 하워리 주덴마크 미국대사 지명자(50)도 머스크와 페이팔에서 만난 절친이다. 스탠퍼드 리뷰 동문인 그는 페이팔을 공동창업한 후 틸의 헤지펀드에서 일했다. 예민한 성격의 틸과 달리 분위기 메이커인 하워리는 화려한 싱글 생활을 보내며 머스크와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머스크가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지내는 집도 하워리의 자택이라고 한다.

하워리는 일찍 친트럼프로 돌아선 인물이다. 트럼프 1기에서도 주스웨덴 대사로 활약했다. 특히 이번 덴마크 대사직을 그가 직접 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그는 측근들에게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 매입 가능성 때문에 특별히 끌렸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난해 12월 보수 성향 유튜브에 출연한 틸(오른쪽). 그는 자신이 “정치를 본업으로 삼으면 돌아버릴 사람”이라며 트럼프 행정부에 입각할 계획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유튜브 ‘피어스 모건 언센서드’ 캡처

이처럼 트럼프 2기에는 밴스와 머스크를 필두로 곳곳에 틸의 측근이 포진해 있다. 틸은 이번 대선에서 한 푼도 기부하지 않았고, 끝까지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강력한 인맥을 통해 뜻한 바를 이뤘다. 그는 40년 가까운 노력 끝에 미국의 정치 지형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8화 요약: 반골 기질이 강한 보수주의자 피터 틸은 1987년 스탠퍼드대에 보수 학내 매체를 창간했다. 이곳에서 만난 마음 맞는 친구들과 1998년 페이팔을 설립했고, 2000년에는 일론 머스크가 페이팔에 합류했다. 테크 업계를 주름잡던 이들은 조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반감으로 똘똘 뭉쳐 ‘실리콘밸리 우파’로 거듭났다.

9화 예고: 부동산 사업가와 테크 사업가가 만났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머스크와 측근들은 어떤 ‘사업가 본능’을 발휘할까.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살펴봤다.

#트럼프#실리콘밸리#샤이보수#피터 틸#팔란티어#테슬라#머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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