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민 탄 배에 총탄세례”… 산 자의 슬픔[사람, 세계]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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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軍 공격에 14명중 11명 숨져
남편-아들 잃은 여성 “살인 멈춰야”

생전 클라이밍을 함께 즐기던 네스테렌코 부자. 점령됐던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에서 배를 타고 피란 가다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고 숨졌다. CNN
생전 클라이밍을 함께 즐기던 네스테렌코 부자. 점령됐던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에서 배를 타고 피란 가다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고 숨졌다. CNN
율리야 네스테렌코 씨(33) 가족은 처음 마련한 집에 가족 성(姓) 일부를 따 영어로 ‘둥지(nest)’라고 애칭을 붙였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에게 푹 빠진 아들 블라디미르(12)는 마당에 세운 농구대에서 아빠와 농구 하는 걸 가장 좋아했다.

네스테렌코 가족의 집은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에 있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가장 먼저 점령한 도시에 속했다. 갈수록 러시아군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실종이나 납치되는 사람이 늘어갔다.

네스테렌코 가족은 7일 집을 떠나기로 했다. 이웃 11명이 함께 배에 올랐다. 드니프로강을 따라 우크라이나군 통제 구역인 북쪽으로 갈 계획이었다. 율리야 씨는 미국 CNN에 “우리 가족에게는 이 배가 암흑 속 한 줄기 빛이었다. 그곳의 삶은 견딜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뱃길에 오른 다음 날 오전 갑자기 뿌연 연기가 퍼지며 표류하던 배에 포탄과 총탄이 어지럽게 쏟아졌다.

“처음엔 우리가 공격을 받는지도 몰랐어요. 소리가 났는데 총인지, 폭탄인지도 알 수 없었죠. 아들은 피를 흘리며 제 품에 주저앉았어요. 뒤에 있던 남편도 머리에 총을 맞고 제 위로 쓰러졌습니다.”

지역 군 당국은 “러시아군이 (러시아) 점령지에서 민간인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며 “이 민간인들이 자신들 위치를 알릴 단서가 될 말을 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율리야 씨를 비롯해 단 세 명이었다. CNN은 “율리야의 어조는 부드럽고 담담했다. 배에서 모든 것을 잃고 감정이 사라진 듯했다”고 전했다. 남편 올리 씨는 그 자리에서 숨졌고 아들은 병원 도착 직후 사망했다. 율리야 씨는 아들과 남편을 친척집 마당에 묻었다.


임보미 기자 bom@donga.com
#네스테렌코#우크라이나침공#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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