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영부인 “영공 닫아주세요, 진실을 계속 보여주세요” 공개서한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9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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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나 젤렌스카 우크라이나 영부인이 9일 세계 언론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젤렌스카는 “최근 세계 각국의 여러 많은 매체가 인터뷰 요청을 해왔다”며 “이 서한은 이러한 요청에 대한 저의 답변이자 우크라이나에서 보내는 제 증언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다음은 공개 서한 전문.

약 일주일 전에 벌어진 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그전까지 우리나라는 평화로웠어요. 우리의 도시와 마을들에는 생기가 넘쳤습니다. 그러다 2월 24일, 우리 모두는 러시아 침공 소식에 눈을 떴어요. 탱크는 국경을 건넜고, 항공기는 영공을, 미사일 발사대는 우리 도시를 애워쌌습니다.

크렘린이 뒤에 있는 선전 매체들은 이를 ‘특수 작전’이라고 불렀지만 실상은 우크라이나 민간인의 대량 살상입니다. 아마 가장 끔찍하고 충격적인 건 이 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어린이들이 많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8살난 앨리스는 아크튀르카 길가에서 손녀를 지키려던 할아버지 앞에서 눈을 감았고 키이우에 살던 폴리나는 폭격으로 부모님과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14살짜리 아르세니는 폭격 때 잔해에 머리를 맞았는데 주변에 심한 불로 구급차가 제때 도착하지 못 해 생명을 잃었습니다. 러시아가 ‘민간인 대상 전쟁을 벌이고 있지 않다’고 말할 때 전 이 아이들의 이름을 먼저 외칩니다.

우크라이나 여성, 아이들은 지금 방공호와 지하실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키이우와 하르키우 지하철역 사진들을 보셨을 겁니다. 사람들은 자녀와 반려견과 바닥에 누워서 말 그대로 지하에 갇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장면이 단순한 전쟁의 결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현실입니다. 일부 도시에서는 민간 인프라에 대한 무차별적이고 고의적인 폭격이 이어지면서 며칠동안이나 방공호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가족들도 있습니다.


전쟁 때 태어난 갓난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지하실 콘크리트 천장을 보았고, 첫 들이킨 호흡은 지하의 매캐한 공기였습니다. 이들은 공포에 질린 채 지하에 갇혀있는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지금까지 생애동안 한 순간도 평화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런 아이들이 수십 명 있습니다.

이 전쟁은 단순한 공습을 벗어나 시민들을 상대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집중치료와 장기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은 현재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하실에서 인슐린 주사를 놓기가 쉬울까요? 집중포화 속에서 천식 약을 먹는 것은요? 화학요법과 방사선 치료가 무기한 연기된 수천 명의 암 환자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지역 사회에는 절망이 가득합니다. 노인, 중증질환자, 장애인 등 많은 약자들이 가족과 떨어져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무고한 사람들에 대해 벌이는 전쟁은 중범죄입니다.

우리 도로는 피난민들로 넘쳐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제껏 꾸려온 삶을 뒤로하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 지친 여성들과 아이들의 눈을 보세요. 이들을 국경으로 데려다 준 남성들은 가족의 이별에 눈물을 흘렸지만 우리의 자유를 위해 싸우기 위해 용감히 돌아옵니다. 이 온갖 공포 속에서도 우크라이나인들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침략자 푸틴은 우크라이나 기습을 벌이려 했지만 우리 나라, 우리 국민, 이들의 애국심을 과소평가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정치적 견해, 언어, 신념, 국적에 관계없이 그 어느 때보다 단결돼 있습니다.

크렘린은 우크라이나인들이 꽃을 들고 자신들을 구원자로 여기며 환영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이들은 화염병으로 외면당했습니다.

피해를 입은 도시에서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기 위해 협력해주신 시민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약국, 상점, 대중교통, 사회복지 분야에서 계속해 일해주시는 분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삶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국민들에게 보내주신 인도적 지원을 비롯한 지속적인 지원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아낌없이 국경을 개방해 여성과 아이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신 이웃 국가 여러분들에게도 이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집회를 열고 계신 전 세계 국민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우리는 이곳에서 여러분들을 지켜보며 성원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평화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 우크라이나는 국경을 지킬 것이고 우리의 정체성을 수호할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포격이 지속되는 도시 속에서 사람들은 잔해에 갇히거나 며칠째 지하실을 빠져나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민간인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기 위해 인도주의적 지원과 안전한 대피 통로가 필요합니다. 영공을 닫기 위해선 세계 지도자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영공을 닫아주세요. 그러면 이곳에서의 전쟁은 저희가 직접 해내겠습니다.

세계 언론에게도 호소합니다.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진실을 계속해 보여주세요. 러시아가 벌이는 정보전쟁에서는 모든 증거가 매우 중요히 쓰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통해 세계에 말하고자 합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은 ‘저 멀리서 일어나는 전쟁’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유럽연합(EU)의 국경과 아주 가까운 유럽대륙에서 벌어지는 전쟁입니다. 우크라이나는 ‘민간인을 구하겠다’는 구실을 삼아 다음엔 여러분이 있는 도시를 침략할지 모르는 (러시아) 군을 막고 있습니다.

지난주만 해도, 저에게도 제 주변 사람들에서도, 이런 소리는 과장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이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핵전쟁을 위협하는 푸틴을 막지 않는다면 누구도 이 세상에서 안전지대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향한 애정으로 하나로 뭉쳤기에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에 영광을!


임보미 기자 b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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