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타임 아빠 될것” 뒤엔… 트럼프에 좌절한 ‘포용적 보수주의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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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하원의장 은퇴 진짜 이유는

폴 라이언 미국 하원의장이 가족과 단란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다. 옆에 한 살 연상의 부인인 재나 라이언이 서있고, 앞줄에는 딸과 아들 둘이 서있다. 사진 출처 폴 라이언 트위터
폴 라이언 미국 하원의장이 가족과 단란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다. 옆에 한 살 연상의 부인인 재나 라이언이 서있고, 앞줄에는 딸과 아들 둘이 서있다. 사진 출처 폴 라이언 트위터
2015년 10월, 미국 공화당의 폴 라이언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45세의 나이로 하원의장직에 올랐다. 연방정부 ‘셧다운’ 문제의 처리를 두고 민주당에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공화당 내 초강경파와 온건파가 치열하게 맞붙은 가운데 당시 하원의장인 존 베이너가 전격 사퇴를 선언하자 공화당 의원들이 갈등 봉합을 위해 뽑아든 카드가 라이언이었던 것이다.

당의 러브콜을 받은 라이언은 “일이 바쁜 하원의장은 ‘빈집지기(empty nester·자녀들이 독립한 집의 부모)’에게나 적합한 자리”라며 난색을 표했다. 그는 수락하기 전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바로 “가족과의 시간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주말은 위스콘신 집에서” 약속 지킨 라이언

그는 의장이 돼도 주말엔 워싱턴에서 1100km 떨어져 있는 위스콘신주 제인즈빌의 자택으로 돌아가 휴식을 즐기겠다고 선언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당시 뉴욕타임스(NYT)는 “주 7일 근무가 일상인 자리를 꿰차면서도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줄 것을 우려하는 라이언 의장이 하원의장직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지도 모른다”고 전했다. 2012년 대선을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서 치르면서도 일요일만큼은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했던 라이언이 ‘정치인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의 새 지평을 열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다.

라이언은 의장이 된 뒤 이를 실천했다. NYT는 11일 “라이언은 여전히 제인즈빌에서 쉽게 발견된다”며 동네 식당과 공구상점이 그가 자주 출몰하는 곳이라고 전했다. 16세에 아버지를 여읜 뒤 맥도널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힘겹게 유년 시절을 보낸 경험에서 우러나온 각별한 가족 사랑인 것이다. “주말 아빠는 싫다”며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정계를 떠나겠다는 그의 은퇴 선언이 진정성 있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은퇴 결정도 가족 모임에서 마지막으로 결정됐다고 한다. AP통신은 “부활절 기간 의회 휴회 중 가족과 다녀온 체코 여행 도중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고 전했다.

○ “주말 아빠 싫다” 선언 뒤, 트럼프의 그림자

하지만 현지 언론은 그의 은퇴에서 가족보다 더 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고 일제히 분석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11일 라이언 의장을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포용적 보수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소개하며 “통제 불가의 ‘트럼프 혁명’이 ‘라이언의 공화당’을 휩쓸었다”고 전했다. 반(反)이민과 보호무역주의를 외치며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바람을 일으킨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의 등쌀에 라이언이 버티지 못하고 끝내 수건을 던졌다는 것이다.

라이언 의장은 미국의 이민자 수용을 “환영할 일”이라고 말하고 “무역전쟁의 결과물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한다”고 밝히는 등 전형적인 공화당 주류의 입장을 대변해 왔다. 이런 라이언 의장을 극우매체 브라이트바트뉴스는 ‘배신자’라고 부르는 등 신랄하게 비판했다. 찰리 덴트 하원의원(공화·펜실베이니아)은 11일 NYT에 “누구나 다 (라이언 은퇴의) 행간을 읽을 수 있지 않느냐”며 “트럼프 행정부는 결코 다루기가 쉽지 않다”고 밝혔다.

라이언 의장은 지난주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열린 정치후원금 모금 행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출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의 소식통은 WP에 “라이언 의장이 (같은 행사에 참석한) 존 켈리 비서실장에게 ‘백악관에 있는 제정신인 사람(sane guy) 중 한 명이 돼줘서 고맙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라이언 의장은 11일 정계 은퇴 선언 뒤 CNN에 출연해 “트럼프 대통령과 많은 충돌이 있었지만 정책면에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며 대통령과의 불화로 인해 의장직을 내려놓기로 했다는 관측을 반박했다. 일각에선 라이언 의장이 지난해 감세법안을 처리하는 커다란 성과를 남겨 미련 없이 워싱턴을 떠날 수 있게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 48세의 전직 하원의장, 다음 행보는?

7개월 뒤 중간선거를 치러야 하는 공화당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당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라이언 의장이 불출마를 선언하자 공화당의 선거 패배가 이미 확실해진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라이언 의장이 후원금을 모을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될 것으로 전망된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낮은 인기 등으로 위기를 맞은 공화당이 역풍을 만나게 됐다”고 전했다.

라이언 의장이 정계 은퇴 선언을 했지만 다시 돌아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는 CNN 앵커 제이크 태퍼가 “정치 무대 마지막이라고 믿기 어렵다”고 말하자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에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해 복귀 여지를 남겼다.

한기재 기자 recor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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