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경계하는 백악관 “약속 조금이라도 어기면 회담 다시 생각”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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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미 비핵화 외교전]북미정상회담 기대-우려 교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정상회담 제의를 전격적으로 받아들인 뒤 워싱턴은 기대감과 불안감이 엉키며 소용돌이치고 있다. “북한을 믿는다”고 한 트럼프 대통령과 달리 백악관은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를 대화의 전제조건을 내세웠다가 철회해 논란을 키웠다. ‘27년간 북한의 비핵화 약속에 속았다’는 미 정부의 트라우마가 정상회담 추진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 “북-미 회담 전제조건 있다” “아니다, 없다” 백악관도 오락가락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9일 정례 브리핑에서 “우리는 북한의 (비핵화를 하겠다는) 말과 수사에 일치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볼 때까지 이 만남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미국은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았지만, 북한은 몇몇 약속을 했다”면서 “우리는 구체적이고 검증할 수 있는 행동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샌더스 대변인은 이날 북한의 조치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구체적(concrete)’이라는 단어를 9번이나 사용했다.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취하는 것이 북-미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이날 귀국 길에 워싱턴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샌더스 대변인의 발언에 대해 “그런 얘기가 없었는데, 그런 얘기를 했느냐”며 “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서 직접 들은 것을 바탕으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샌더스 대변인의 구체적 조치 발언이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이 생겼다”는 논란으로 이어지자 백악관이 언론을 통해 진화에 나섰다. 뉴욕타임스(NYT)는 “샌더스 대변인이 대화를 위한 새로운 전제조건을 붙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백악관이 분명히 했다”고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이날 백악관 관리의 말을 인용해 “정상회담 제안은 수락됐고, 여전히 유효하다”면서도 “다만 북한이 제시한 약속을 조금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회담 자체를 재고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CNN은 백악관을 겨냥해 “북한은 비핵화가 목표라고 했지 정상회담 전에 비핵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은 “이번 논란은 일종의 해프닝처럼 끝났지만, 백악관 내부에 ‘이번만큼은 북한의 대화 전술에 속지 않겠다’는 의견이 많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며 “트럼프 행정부는 정상회담 전까지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압박해 나갈 것 같다”고 전망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10일(현지 시간) 펜실베이니아주 유세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비핵화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을 내비치면서도 “누가 알겠나. 만약 (타결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나는 (협상 테이블을) 금방 떠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태도에 따라 북-미 회담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 셈이다.

○ 워싱턴 조야, “북한에 또 속으면 안 된다” 경계론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5월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되기 전까지 북한이 비핵화 로드맵 정도를 내놓아야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샌더스 대변인의 구체적 조치 발언은 비록 번복됐지만, ‘북한이 대화 전에 비핵화 로드맵을 뛰어넘는 조치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백악관 내부의 인식이 표출된 것이란 분석이다. ‘완전하고 불가역적이며 검증 가능한 비핵화(CVID)’를 위해 북한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미국이 믿게 해줘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샌더스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구체적 조치를 언급하면서 ‘검증 가능한(verifiable)’이란 단어도 함께 사용했다.

북한은 김정은 집권 직후인 2012년 북-미 간 2·29합의에서 식량 지원을 대가로 “장거리미사일 발사와 우라늄 농축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두 달 뒤 장거리로켓 은하3호를 발사했다. 앞서 2007년 2·13합의에 따라 2008년 6월 영변 핵시설 냉각탑을 폭파했지만 역시 이듬해 4월과 5월 각각 장거리미사일 도발과 2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패트릭 크로닌 미국신안보센터(CNAS) 아시아태평양안보소장은 동아일보에 보낸 e메일에서 “북한이 2005년 9·19합의 때 비핵화 합의문까지 쓰고도 검증 단계를 거부하며 조지 W 부시 행정부를 결과적으로 속인 일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중요한 변수로 고려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북-미 대화에 앞서 검증 단계에 대한 구체적인 액션플랜이 나와야 신뢰의 고리가 연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워싱턴 조야에서는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하는 것과 함께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재가입할 필요성이 거론되고 있다.

미국 주요 매체들과 민주당이 충분한 고려 없이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받아들인 것에 우려를 나타낸 반면 공화당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력에 기대감을 드러냈다.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은 8일 성명을 통해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 농락하려 든다면 그걸로 당신과 당신의 집권은 끝”이라고 말했다. 샌더스 대변인은 그레이엄 의원의 성명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능력에 굉장한 신뢰를 보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워싱턴=박정훈 특파원 sunshade@donga.com / 위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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