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서영아]위기에 돋보이는 일본인의 시민의식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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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아 도쿄 특파원
서영아 도쿄 특파원
일본 규슈 구마모토(熊本)에서 첫 지진이 발생한 14일 오후 9시 26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도쿄 시내 프랑스 식당에서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자민당 정조회장 등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41분에는 현장에 모인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했다. 부리나케 총리관저로 돌아온 때는 53분. 54분에 위기관리센터에 들어갔고 11시 20분에는 비상재해대책회의를 주재했다. 다음 날 오전 7시 기자들 앞에 다시 나타나 16일 지진 현장을 시찰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밤새 규모 7.3의 ‘본진(本震)’이 강타한 16일에는 새벽 3시 반부터 초췌한 얼굴로 TV에 등장했다. 현지 시찰은 ‘피해 수습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해’ 취소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간 나오토(菅直人) 당시 총리는 원전사고 대응에 경황이 없는 후쿠시마(福島)를 시찰해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이걸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규슈 일대를 흔드는 지진 재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처가 민첩하고도 긴장감이 넘친다. 특히 총리가 밤낮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 힘내 달라”는 메시지를 직접 던진다.

자위대의 활동도 돋보인다. 피난민들 앞에 큰 솥을 들고 나타나 주먹밥을 만들어 나눠주고 궂은일을 도맡는다. 고립된 조난자들을 신중하게 헬기로 구하는 모습도 믿음직스럽다. “자위대의 모습을 보면 위안이 된다”는 시민이 적지 않다. 일본 정부는 주일미군에 지원을 요청해 최신예 수송기 ‘오스프리’ 투입도 검토하고 있다.

그간 ‘강한 일본’은 아베 총리의 캐치프레이즈였다. 하지만 기자는 이번 재해를 통해 또 다른 의미의 ‘강한 일본’을 본 듯했다. 재난에 강한 일본 국민의 성숙한 시민의식이야말로 세계 최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자연재해인데 누굴 원망하겠느냐”며 묵묵히 피난 지시를 따른다. 물도 안 나오는 마을회관에 모여 새우잠을 자고 2시간이나 줄을 서서 자위대가 나눠주는 주먹밥 고작 한 덩이를 받아들면서도 “이런 상황에서 따뜻한 밥이라니, 너무 고맙다”며 고개를 숙인다.

이들은 언제 또 지진이 찾아와 모든 걸 폐허로 만들지 모른다 해도 다시 일어서 더 튼튼한 건물을 지으려 할 것이다. 폭삭 무너져 내린 집 앞에서 “건질 게 하나도 없네. 지진이 잦아들면 다시 시작해야지”라며 입술을 깨무는 초로(初老)의 구마모토 주민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진 전까지 아베 총리의 ‘강한 일본’호(號)는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다. 이번 재해가 이런 흐름에 제동을 걸까. 예단하긴 어렵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당시 민주당 정권은 크게 힘을 잃었지만 이는 후쿠시마 원전 등 정부의 대응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아베 정권이 이번 지진 대책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최선을 다하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지진 이후 일본의 정치 일정은 달라질 것이다. 구마모토 지진은 아베 총리가 누차 내세웠던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한 소비세율 재인상을 연기할 사유(리먼브러더스 사태 같은 경제위기, 동일본 대지진 수준의 재해)에 딱 들어맞는다. 소비세율 재인상을 연기하려면 중의원을 해산해 국민의 의견을 묻는다는 게 지금까지 논의됐던 흐름이기도 하다.

아베 총리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모든 과정을 가능하다면 헌법 개정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베 총리가 오매불망(寤寐不忘) 원하는 ‘강한 일본’을 국민들은 이미 실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서영아 도쿄 특파원 sya@donga.com
#규슈#지진#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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