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자에 ‘파나마 페이퍼스’ 불똥

  • 동아일보

글로벌 제약업계 사상 최대 규모인 미국 제약회사 화이자와 아일랜드에 있는 보톡스 제조회사 앨러건의 인수합병(M&A) 협상이 무산됐다. 화이자는 5일 이사회를 열어 지난해 앨러건을 1600억 달러(약 186조 원)에 인수하기로 한 계획을 철회키로 결정했다.

파나마 페이퍼스가 폭로된 4일 미 재무부가 조세회피용 인수합병(M&A)에 대해 강력한 규제안을 내놓자 화이자가 하루 만에 백기를 든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화이자가 기대했던 절세효과를 볼 수 없다면 포기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전했다. 화이자는 합병 건이 무산되면서 졸지에 앨러건에 위약금으로 최대 4억 달러(약 4640억 원)를 물어주게 됐다.

화이자의 당초 계획은 앨러건과 합병한 뒤 본사를 법인세가 미국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아일랜드(법인세율 12.5%)로 옮기겠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본사를 해외에 두고 있는 기업이 미국 내 자회사에 대출해주면 이자비용 만큼 세금에서 공제해줬다. 그러나 미 재무부는 해외 기업이 즐겨 쓰는 수법인 이 같은 실적축소 방식(earnings stripping)의 조세회피를 원천봉쇄하기로 했다. 그동안 부채로 처리되던 것을 주식으로 간주해 과세하고 합병 회사의 미국 주주 지분이 60%를 넘으면 미국 내 규제를 일부 적용하고 80%를 넘으면 법률상 아예 미국 기업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미국 기업들이 법인세(35%)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세금이 낮은 나라의 회사를 사들인 뒤 본사를 그곳으로 옮기는 ‘조세회피를 위한 기업전환(Corporate Inversion)’ 방식은 미국 정치권과 재계의 뜨거운 이슈였다. 재정적자가 심각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엔 큰 골칫거리였다. 미국이 챙겨야 할 세금이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 해외로 고스란히 빠져나가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비도덕적이고 비애국적 행태”라며 이윤을 좇는 기업들에 애국심을 호소했지만 친기업 성향의 공화당과 보수 언론에선 “감정적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경제적 관점에서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선이 있는 올해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공화당 대선 경선 선두주자인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조차 세금을 피해 기업전환을 하는 방법을 강하게 비판했다. 4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사상 최대 규모의 조세회피처 자료인 ‘파나마 페이퍼스’를 공개하면서 이 문제에 기름을 끼얹었다.

미 재무부의 이번 조치에 다국적기업과 월가에선 “정치의 계절에 기업들만 억울한 희생양이 됐다”고 불평하고 있다. 낸시 맥러넌 국제투자기구(OFII) 대표 등은 “정교한 외과용 메스를 써야 할 일(수술)에 큰 나무를 베는 벌채용 칼을 들이댄 셈”이라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화이자를 겨냥해 “그런 기업들은 어느 순간 시민권을 포기하고 다른 곳에 거주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는데 일반 국민이 모두 지는 조세 의무도 다하지 않으면서 혜택만 누리겠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파나마 페이퍼스 사건에 대해서도 “세금을 회피할 목적의 그런 거래를 일어나게 해서도, 정당화해서도 절대 안 된다”고 강조했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화이자#파나마페이퍼#인수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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