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의 생각돋보기]중학교 동창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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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와 도둑으로 만난 중학교 동창. 유튜브 동영상 캡처
판사와 도둑으로 만난 중학교 동창. 유튜브 동영상 캡처
시간은 오후 10시, 장소는 뉴욕. 습기 머금은 차가운 바람 속에 사람들의 발길은 끊기고, 상점들은 서둘러 문을 닫아 거리는 황량하다. 순찰 중인 경찰관이 철물점 앞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 남자는 경관을 안심시키려는 듯 황급하게 자신이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한다. 20년 전 열여덟 나이에 서부로 떠나던 밤, 뉴욕에 남게 된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아무리 먼 곳에 살더라도, 신분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정확히 20년 후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고. 담뱃불을 붙일 때 남자의 창백한 얼굴과 각진 턱,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오른쪽 눈썹 옆의 하얀 칼자국이 불빛에 선명히 드러난다. 경찰관이 된 친구는 20년 만에 만난 친구가 시카고 경찰에서 협조 의뢰해 온 지명 수배자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오 헨리의 단편 소설 ‘20년 후’의 이야기다.

현실이 허구를 닮는 것일까. 6월 30일 마이애미 법정에서 판사와 도둑으로 만난 두 중학 동창생의 기막힌 사연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판사는 여성 백인이고, 피고는 남성 흑인이다. 두 사람의 나이는 49세, 그러니까 66년생이다. 심리를 마친 후 잠시 머뭇하다가 판사는 “혹시 노틸러스 중학교에 다녔나요?”라고 묻는다. 얼굴을 든 피고인이 “아 이런!” 하고 놀라며 오랜 친구를 만난 반가움에 천진한 미소를 짓는 것도 잠시, 곧 자신의 기막힌 처지를 깨닫고는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린다. 해맑은 얼굴의 판사는 어조의 변화도 없이 담담하게 계속해 말한다. “난 언제나 네 소식이 궁금했어.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참 마음 아프네.” 그러고는 방청석을 향해 3인칭 화법으로 “중학교 때 이 친구 참 성격 좋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어요. 늘 나하고 축구도 같이 했죠(This was the nicest kid in middle school, he was the best kid in middle school. I used to play football with him)”라고 말했다.

레토릭의 배제가 가장 효과적인 레토릭이라고 말한 롱기누스의 수사학 교본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하다. 일체의 감상이 배제된 너무나 평범한 몇 마디 말 속에 그 어떤 과장된 표현보다 더 진한 향수(鄕愁)가 묻어난다. 늘 함께 축구를 하곤 했다는 한 문장 안에는 열다섯 살짜리 소년 소녀들의 풋풋한 한 시대가 압축해 들어 있다. 웃음소리 가득 찬 운동장에서 그들은 모두 미래에 대한 꿈과 야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후 여학생은 판사가 되었고 남학생은 도둑이 되어 다시 만났다. 한 사람은 백인이고 한 사람은 흑인이라는 사실이 요즘에 고조되는 흑백 갈등과 관련하여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유튜브 동영상에도 미국의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댓글들이 많이 달려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동영상이 흑백 화합을 향한 힘들고도 긴 여정의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엔 인간의 무한한 선의(善意)와 인간에 대한 아름다운 존중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민디 글레이저 판사는 피고인이며 동창인 아서 부스를 향해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니. 슬프게도 우린 벌써 이렇게 늙었어(What‘s sad is how old we’ve become). 잘됐음 해. 이번 일 잘 끝내고, 앞으론 모범적으로 살기 바랄게.”

늙어감의 슬픔을 무심하게 언급하는 그녀는 놀랍게도 인생무상(人生無常)의 철학적 통찰까지 보여주고 있다. 이 지성적인 여성이 나는 정말 존경스럽고 아름다웠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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