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본 대지진 1년]<3>산자들 끝나지 않은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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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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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 걸린 버스 그대로… 구경꾼 보면 분통”

《 일본 미야기(宮城) 현의 한 가설주택단지. 늦은 저녁이라 어둠은 짙었고 공기는 차가웠다. 문을 노크하자 마쓰모토 미에코 (가명·34) 씨가 문틈 불빛 사이로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지난해 마을을 삼킨 지진해일로 졸지에 남편과 아이를 잃은 그녀였다. 이웃의 소개로 찾아왔다고 하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얼굴이 어두워졌다. “내 남편과 아이는 죽은 게 아니에요. 행방불명이란 말이에요. 아직 안 돌아왔을 뿐인데 1주기라니요.” 문을 닫고 돌아서는 그녀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

버스 언제나 내려올까 일본 미야기 현 이시노마키 오가쓰마을 공민회관 옥상에 얹혀진 버스. 회관 옆에 산을 이루고 있는 잔해물 더미와 함께 지난해 처참했던 쓰나미의 악몽을 떠오르게 한다. 이 버스는 10일 철거될 예정이다.
버스 언제나 내려올까 일본 미야기 현 이시노마키 오가쓰마을 공민회관 옥상에 얹혀진 버스. 회관 옆에 산을 이루고 있는 잔해물 더미와 함께 지난해 처참했던 쓰나미의 악몽을 떠오르게 한다. 이 버스는 10일 철거될 예정이다.
동아일보 취재진은 3·11 동일본 대지진 1년을 맞아 지난달 21일부터 이달 1일까지 일본 동북부 쓰나미 피해 지역을 찾았다. 초토화됐던 마을들은 잔해물이 대부분 한곳으로 치워지면서 맨땅을 드러내 텅 빈 택지개발지구를 연상케 했다. 작년 여름 내내 코를 찌르던 악취와 파리 떼도 사라졌다. 그러나 마을을 할퀴었던 상처는 가시라도 품은 듯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묻혔다. 지진이 난 지 1년이 다가오면서 통증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대지진 당일 200∼300명의 시신이 한꺼번에 발견됐다고 가장 먼저 보도됐던 센다이(仙臺) 시 아라하마(荒濱) 해변. 목조주택 밀집 지역이었던 이곳은 2km 내륙까지 흔적만 남은 집터에 잡초만 무성했다. 도로변 주유소는 아직도 폭격 맞은 듯한 모습 그대로 남아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텅 빈 벌판에 덩그러니 남은 초등학교 운동장은 뛰노는 아이들 대신 구겨진 오토바이로 가득했다. 당시 쓰나미가 덮친 시간은 아이들이 한창 집으로 돌아가던 때로 수업이 일찍 끝난 저학년일수록 피해가 컸다. 한때 이 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요코하마로 전근을 갔다는 한 중년 여인은 “지난 1년 동안 학교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어 왔다. 아이들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가정방문을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해변에는 마을연합회가 나무로 만든 위령비가 서 있다. 손을 모아 고인들의 넋을 기린 요네자와 미요코(米澤美代子) 씨는 차로 30분밖에 안 걸리는 센다이 시내에 사는데도 이날 처음 와봤다고 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현실을 목격하는 게 무서워서 그동안 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라도 안 와보면 영원히 후회할 것 같아 왔다. 막상 와보니 고통스러울 뿐이다.” 그는 친구가 살았다는 빈 집터를 가리키며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육중한 콘크리트 방파제가 찢겨 나갈 정도로 강력한 쓰나미가 덮친 이시노마키(石卷) 오가쓰(雄勝) 마을. 공민회관 2층 옥상에는 쓰나미에 쓸려온 버스가 지금도 그대로 얹혀 있다. 마을 뒷산 화장장에서 만난 스기야마 마키(杉山眞紀·66) 씨는 “살아남은 사람들은 버스만 보면 그날의 악몽이 되살아나 잠을 못 이룬다. 사진 찍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치민다”고 말했다. 스기야마 씨는 “쓰나미로 딸과 생후 50일 된 손녀를 잃었다”면서 “하늘을 원망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했다. 한 주민은 “살아남은 가족들의 마음의 상처를 복구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려도 모자랄 것”이라고 말했다.

가는 곳마다 군데군데 모아져 산을 이루고 있는 잔해물 더미도 주민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잔해물을 치워야 마을 재건이 가능하지만 다른 지역에서 방사성물질 누출 가능성을 우려해 받아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테(巖手), 미야기, 후쿠시마(福島) 3개 현에서 생긴 잔해물은 2253만 t으로 이 가운데 1년이 지난 4일까지 5.6%에 불과한 126만 t만 처리됐다. 특히 피해가 컸던 이시노마키 시에서 발생한 잔해물 양은 616만 t으로 시 연간 쓰레기 배출량으로 봤을 때 무려 106년분에 이르는 규모다. 자력으로는 처리가 불가능한 양이다.

대지진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 외에도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더미다. 지역신문 가호쿠신보 다케다 신이치(武田眞一) 보도부장은 “동북부 지역은 대지진과 쓰나미 피해 전에도 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됐고 인구 과소화(過疎化), 수산업 쇠퇴 등 다양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며 “그런 상황에서 대지진이 덮쳐 5년, 10년이 걸려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계절의 봄이 어김없이 오듯 사람들의 마음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미나미산리쿠(南三陸)로 가는 길목에 세워진 가설주택단지엔 가설 상가가 들어서 제법 북적였고 센다이 시 인근 가설주택단지 입구 게시판에는 가족을 찾는 안타까운 사연 대신 구인 광고가 가득했다. 가설주택에 혼자 살고 있다는 사와무라 히로미쓰(澤村博光·27) 씨는 “복구 수요 등으로 건설 현장에 일감이 늘어 그나마 피난소 시절보다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며 “언젠가 남은 가족들과 고향에 다시 집을 지을 것”이라고 말했다.

‘간바레(힘내세요).’ ‘절대로, 절대로 지지 마세요.’ 미나미산리쿠의 가설 행정사무소 벽에 가득한 전국에서 온 응원 메시지들은 이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20년째 센다이에 살고 있다는 한 독일인 대학 강사는 “지난해만 해도 절망적으로 봤는데 1년 지나 다시 와보니 터널 끝이 조금 보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시노마키·미나미산리쿠·아라하마·나토리=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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