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 제로 찾은 오바마, 열변보다 빛난 침묵의 추모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5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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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한마디’도 안 했다… 그래서 미국은 ‘하나’가 됐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오사마 빈라덴 사살을 자신의 재선을 위한 정치적 이벤트로 만든다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자신을 한껏 낮췄다. 그는 진정한 국민 통합을 원했다.’

5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9·11테러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 빈라덴을 사살한 지 나흘 만에 오바마 대통령이 이곳을 찾았다. 대통령 후보 시절 방문한 적은 있지만 현직에 오른 뒤로는 처음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무너져 내린 쌍둥이 건물 세계무역센터(WTC) 잔해 속에서 살아남아 이곳으로 옮겨져 다시 심겨진 나무 한 그루 밑에 꽃 한 다발을 헌화했다. 미국을 상징하는 색인 붉은색, 흰색, 푸른색 꽃들로 꾸며진 꽃다발이었다. 그는 헌화한 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그게 다였다.

백파이프나 군악대 연주도 없었고, 축포도 없었고, ‘근엄한’ 연설도 없었다. 많은 뉴요커가 이른 아침부터 나와 성조기를 흔들며 대통령을 환영했지만 이런 행사에서 흔히 예상되는 ‘환호하는 국민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대통령’이라는 낯익은 장면도 연출되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20여 분간의 짧은 헌화식을 마친 뒤 1시간 동안 현장에 나온 9·11테러 희생자 가족 50여 명과 동료를 잃은 소방대원, 경찰관 등과 대담했다. 이들과의 만남에 방송 카메라는 허용되지 않았다.

이날 대통령의 ‘조용한’ 행보는 빈라덴 사살을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이벤트로 삼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었다.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은 “끔찍한 공격을 받은 상황에서 하나가 됐던 미국의 단합심을 기억하는 자리에서 (그) 어떤 말도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그라운드제로를 방문하기에 앞서 9·11테러 때 15명의 소방관을 잃은 맨해튼 ‘엔진54’ 소방서를 방문해 소방관들과 점심식사를 함께했다. 맨해튼 제1경찰서도 방문했다. 하지만 이들과 만나는 자리 역시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다. 기자들은 대통령이 떠난 뒤 그와 자리를 함께했던 소방관이나 경찰관들로부터 분위기를 전해 들어야 했다.

이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소방관들에게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우리의 의지는 정치도 당파도 뛰어넘는 것”이라며 단합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고 한다. 또 “(빈라덴을 사살한) 일요일 사건은 ‘우리가 잊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할 때 그것이 빈말이 아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대통령의 ‘낮추는 리더십’에 미국 국민은 감동하고 있다. CNN방송은 3일 전 세계 주요 신문의 1면을 장식한 백악관 상황실 사진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를 전하면서 “오바마 대통령이 중앙이 아닌 구석에 앉아 있는 사진은 오바마식의 리더십과 자신감을 잘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블로그 ‘잭 앤드 질 폴리틱스’의 셰릴 콘티 씨는 방송에서 “작전이 전개되는 동안 참모들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협력 체제를 이끌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CNN은 “미국에서 흑인은 종종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인물이나 화를 잘 내고 악당 같은 존재로 여겨졌지만 이 사진에서는 흑인이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호민관으로 등장했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고 분석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미국 국민은 첫 흑인 대통령인 그가 인종과 정치색을 뛰어넘어 미국을 진정한 ‘하나’로 만들어주기를 기대했다. 이날 그라운드 제로에서 나타난 오바마 대통령의 통합 리더십은 그가 미국 국민의 기대를 실현할 잠재력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줬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뉴욕=신치영 특파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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